[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 논평]
문재인 정부는 '낙태죄' 완전 폐지로 후퇴가 아닌 진전을 택하라
 
정부가 지난 해 헌법재판소에서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린 형법상 ‘낙태죄’의 개정입법 방향을 논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최근 보도에 따르면 현재 정부 논의에서 언급되고 있는 개정방향은 ‘낙태죄’의 전면 폐지가 아니라 관련 조항을 형법에 두고 임신 14주 이내의 임신중지를 제한적으로 허용하겠다는 안이다. 이는 ‘낙태죄’의 헌법불합치 결정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어떻게든 법에 여성을 처벌하는 조항을 남기겠다는 의미나 다름 없다. 만일 이와 같은 방식으로 처벌 조항이 유지된다면 우리는 다시 전면 투쟁에 나서지 않을 수 없음을 심각하게 경고한다.
 
처벌이 아니라 권리 보장이 답이다.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의 중요한 의미는 “처벌은 실질적인 효과가 없다”는 사실에 있다. 헌법불합치 의견 또한 “태아의 생명을 보호한다는 언명은 임신한 여성의 신체적ㆍ사회적 보호를 포함할 때 실질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으며, “원치 않은 임신을 예방하고 낙태를 감소시킬 수 있는 사회적ㆍ제도적 여건을 마련하는 등 사전적ㆍ사후적 조치를 종합적으로 투입”하는 것이 실효성 있는 대책이 될 것이라고 제시한다. 임신중지를 합법화 하면서도 주수에 따른 제한 등 여러 법적 제약과 처벌 조항을 남겨 두었던 다른 나라의 사례를 볼 때에도 처벌이 아니라 실질적인 사회경제적 조건을 개선하고 적극적인 성평등 정책과 성교육에 대한 노력을 기울이는 것, 임신중지에 대한 접근성 확대와 안전한 보건의료 보장 체계를 구축하는 방향이 효과적임이 증명되었다. 주수에 따른 제약이나 강제 숙려기간, 상담 의무제 등은 오히려 적절한 임신중지 시기를 놓치게 만들며 이는 사회경제적으로 취약한 조건이 있는 이들에게 더 해로운 영향을 미치게 된다. 때문에 최근 다른 나라에서도 이와 같은 불필요한 규제 조항들을 삭제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낙태죄’와 모자보건법 14조가 함께 존속해 왔던 지난 한국의 역사 속에서 임신중지에 대한 처벌은 평등한 삶의 권리를 보장해야 할 국가의 책임을 방기하고 여성에게 책임을 전가해 온 역사나 다름없다. 지금 필요한 것은 처벌이 아니라 권리다. 장애, 질병, 연령, 국적이나 인종, 경제적 상태 등에 따른 삶의 조건을 적극적으로 개선해 나갈 책임을 국가가 감당하고 임신과 출산, 임신중지 모두를 공공의료 체계에서 안전하게 보장되도록 하는 것이 지금 문재인 정부가 해야 할 일이다.
 
후퇴가 아닌 진전을 택하라.
 
지난 해 헌법재판소 앞에서 우리는 “66년만의 낙태죄 폐지”에 기대를 걸고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환영했다. 이 결정은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지난 역사에서 수많은 여성들이 홀로 감당해야 했던 임신중지의 경험과 그에 얽힌 사회적 불평등, 폭력, 차별과 낙인의 상황들이 그 66년의 역사에 담겨 있다. 헌법재판소의 결정은 지난 66년의 역사를 끝내기 위해 23만 명 이상이 청와대에 청원을 하고, 수많은 이들이 거리에 나서서 투쟁하며, 세계 각국에서 지지와 연대의 힘을 모은 결과이다. 문재인 정부는 이 역사를 되돌릴 것인가. 후퇴가 아니라 진전을 택하라. 형법상의 낙태죄 조항을 전면 삭제하라. 처벌과 허용의 구도로 다시 여성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대신 성적 권리와 재생산 권리의 보장,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보건의료 및 상담 체계 마련, 실질적인 성평등 정책과 성교육 실현으로 나아가라.
이와 같은 진전이 이루어질 때까지 우리는 계속해서 싸울 것이다.
 
2020년 9월 23일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
(건강과대안, 건강사회를위한약사회, 노동당, 녹색당, 민주노총, 반성매매인권행동 이룸, 불꽃페미액션, 사회변혁노동자당, 사회진보연대,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 SHARE, 여성환경연대, 인권운동사랑방,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장애여성공감, 전국학생행진,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참의료실현청년한의사회, 탁틴내일, 페미당당, 한국성폭력상담소, 한국여성단체연합, 한국여성민우회, 한국여성의전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