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 특집
  • 2016/10 제21호

북한 인권,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한 전제들

  • 박석진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
안다는 것, 즉 지식은 세계를 인식하고 이해하는 방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알고 있는 것에 따라서 세계는 다르게 인식되고 이해될 수 있다. 지식은 감추어진 진실의 맥락들을 파악할 수 있게 해 주기도 하지만 반대로 진실을 은폐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는데, 불행히도 현대 사회에서는 이 반대의 경우가 오히려 더 빈번한 것 같다. 
 

‘북한 인권’을 둘러싸고 이를 이해하는 방식도 다양하다. 사실 ‘다양하다’는 표현은 그다지 적절하지 않다. 북한 인권을 둘러싼 맥락들은 그냥 ‘다양하다’기보다는 대체로 위계적으로 구조화하는 것이 가능한데, 결국에는 서로 논쟁적이고 대립적인 몇 개의 세계관이 그 속에서 충돌하고 있다. 그래서 북한 인권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재차 삼차 검토해야 할 전제들이 남아 있다. 그 세계관 역시 모종의 맥락 속에서 존재하며, 복잡하게 얽혀 있는 맥락들은 대부분 매우 논쟁적인데다가 정치적인 판단에 의해서 선택적으로 자연화되어 있거나 혹은 폭력적으로 금기시되거나 은폐되어 있기 때문이다. 서로 대립적인 맥락들이 투쟁적으로 충돌하는 북한 인권 의제는 일종의 담론의 전쟁터이다. 북한 인권을 말할 때, 이러한 여러 맥락들에 대해 질문하거나 검토하지 않고 기존의 주류적 맥락만을 자연화하는 모든 시도는 다분히 정치적이고 기만적인 의도가 있거나, 아니면 지식에 대한 책임의 포기라고 봐야 한다.
 

가장 핵심적인 질문: 
북한 인권 개선의 주체는 누구인가

인권 담론에서 가장 핵심적인 주제 중 하나는 주체의 문제이다. 인권 향유의 주체는 누구이고 책임의 주체는 누구인가, 그리고 개선의 주체는 누구인가. 이는 인권운동의 처음이자 끝이라고 볼 수도 있는 질문이다. 당사자의 의사와 무관하게 누군가를 대리해 인권을 개선해주겠다거나 일방적으로 인권을 가르치겠다는 것은 당사자의 주체성을 무시한 오만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당장의 인권 침해 피해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들도 그러한 인권 침해의 구조에 노출되어 있고 잠재적으로 인권 침해를 당할 가능성이 있다면, 그리고 그러한 인권 침해 구조가 명백히 정의에 어긋나는 것이라면 일차적 당사자가 아닌 사람들도 인권 개선 활동에 함께 할 권리와 의무가 생긴다. 하지만 이 때에도 당사자와 비(非)당사자 사이(경계가 모호하긴 하지만)에는 모종의 끊임없는 긴장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주체들이 처한 상황에 따라서 다양한 맥락이 발생하고 교차하기 때문에 서로의 관계에 대한 성찰의 긴장이 풀어지거나 어긋나는 순간 ‘내부’에서의 분쟁과 불화는 피하기 힘들다. 그러므로 이 관계는 늘 협상의 연속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북한 인권 담론에서 주체에 대한 담론은, 주체들 간의 관계에 대한 고민은 도대체 어디에 있나. ‘북한 인권 운동’에는 ‘내가 너를 위해 인권을 개선해 주겠다’는 전지전능한 초월자들만이 존재한다. ‘(북한 인민들은 스스로 인권을 개선할 능력이 없으니)내가 대신 개선해 주겠다’며 법까지 만든 분들이다. 미국과 일본과 남한의 북한인권법이 그렇다. ‘북한 인권 운동’이라는 모순적인 이름을 달고 있는 반북·반공 운동 단체나 소위 전문가들도 마찬가지이다. 이들은 북한 주민들을 인권 침해의 피해자로 고정시킨 채 이들의 피해를 전시하기만 할 뿐 당사자로서 북한 주민들의 주체성, 그리고 북한 주민들과의 관계성에 대한 고민은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한 인권을 개선하기 위한 방법이 북한 정권의 붕괴냐 아니냐는 논의는 그 자체로 넌센스다. ‘전체주의 독재 국가 북한 정권 붕괴가 북한 인권 개선의 해답’이라는 주장은 북한 인민들의 주체성을 철저히 무시한 재앙 수준의 발상이다. 인권 개선의 일차적 주체로서 북한 인민들의 주체성을 무시한 모든 논의는 탁상공론일 뿐이다. 
 
 
이라크 인민들의 의사와 무관하게 ‘이라크 인민들의 인권을 위해’ 미국이 단행했던 침공의 결과는 어떤가. 미국이 이라크 인민들을 해방시켜 줬는가, 이라크 인민들의 인권을 개선시켜 줬는가. 서로 연결되어 있는 인권을 위해 함께 싸울 순 있지만, 누구도 나의 인권을 대신 개선해줄 수는 없다. 아무리 좋고 아름다운 인권 제도나 정책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권리를 위해 싸운 인권 주체들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은 인권과는 무관한 시혜일 뿐이다. 그것은 우리의 역사가 될 수 없다.

정희진은 《페미니즘의 도전》에서 아프리카 여성의 할례 문제를 언급하며, 아프리카 여성들·여성운동이 이를 인권 침해이자 여성에 대한 폭력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서구(비아프리카) 여성들·여성운동이 동일하게 주장하는 것은 같은 내용이더라도 다른 맥락에 있는 것임을 서구(비아프리카) 여성들·여성운동은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모든 것은 맥락 속에 있다. 자신이 서있는 맥락을 성찰하지 못하는 인권 행위자는 어느 순간 오만한 인권 제국주의의 첨병이 되어 있을 것이다.
 

우리는 북한을 어떻게 인식하는가

남한에서의 북한 인권 담론에 주체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삭제된 현실은 북한에 대한 남한 사회의 역사적 인식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남한 사회에서 북한에 대한 인식은 점점 옅어지면서 일면적이 되고 있다. 남한의 주류 시각에서 볼 때, 북한은 남한의 평화를 위협하는 불온한 존재이자 적대 세력일 뿐 전혀 다른 의미를 갖지 못한다. 일부 진보 진영에서도 북한에 대한 타자화는 마찬가지이다. 그들에게 북한은 ‘실패한 사회주의’ 혹은 ‘비(非)사회주의-국가자본주의’ 체제로서만 수렴될 뿐이다. 역사는 없고 현재만 평가의 대상으로서 제3자적으로 무심하게 바라 볼 뿐이다. 혹은 역사도 현재에 소급시킨다. 다른 모든 역사는 선별되고 삭제되었다. 

이 모든 것은 남한 사회에서 교육으로 온건하게 강화되었고, 국가보안법으로 강압적으로 유지되었다. 그것은 마치 공기와도 같다. 온 사회가 나서서 북한과 북한의 역사에 대한 타자화에 나선 결과다. 그리고 그것은 남한 민중들에게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안정적으로 내재화됐다. 국가보안법의 존재가 그 ‘안정’의 불안정성을 역설적으로 증명하고 있긴 하지만. 

이 과정에서 북한 인민들이 타자화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북한 인민들에 대한 타자화 속에서 그/녀들은 오직 두 가지 이미지로만 존재한다. 가난하고 불쌍한 인권 침해 피해자들이거나 북한 독재 정권을 추종하는 세뇌된 로봇. 남한의 북한 인권 담론에서는 이것이 여실히 드러난다. 북한과 북한 인민들은 합리적 행위자로서 이해와 소통의 대상이 아니라 비합리적인 일탈을 일삼는 비이성적 무법자일 뿐이다. 

이제 북한 인권 담론에 대한 진지한 질문이 필요하다. 북한은 정말 이해할 필요가 없는 비이성적인 존재인가. 북한 인민을 어떻게 볼 것인가. 북한의 역사는 우리의 역사인가, 타자의 역사인가. 이것은 선택 혹은 지정 가능한 것인가. 북한의 역사는 결론만 있고 과정은 없는가. 북한의 역사는 모두 부정되어 마땅한가. 북한의 역사에서 북한이 행한 시도들은 모두 필연적으로 실패를 향한, 그래서 결국에는 불필요한 시도들이었는가, 등등.
 
 

허구적 쟁점: 
인권의 보편성 대 특수성

‘북한 인권’에 대한 논의에서 가장 자주 언급되면서 또 그만큼 가장 빈번하게 오류를 반복 재생하고 있는 쟁점이 바로 ‘인권의 보편성 대 특수성’ 논쟁이다. 북한 인권이라는 의제에서 유엔과 북한이 대립하고 있는데, 미국과 유럽이 주도하고 있는 유엔의 인권 규범은 보편적이고 북한은 ‘우리식 인권’이라는 ‘특수한’ 인권을 내세우고 있으므로, 유엔 인권 규범이 북의 인권론에 비해 우월하다는 것이 이 논쟁의 일반적인 결론이다. 하지만 왜 보편성이 특수성보다 우월한지,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는 논리랄 것도 없고 ‘보편성은 보편적이기 때문에 특수성보다 우월하다’는 동어반복적인 고정관념만이 근거로 동원될 뿐이다. 

왜 유엔의 인권 규범이 보편적이라고 여겨지는지, 여기에서 ‘보편’의 의미는 무엇인지, 유엔 인권 규범은 정말 보편적인지, 보편적인 것은 왜 자연스럽게 특수한 것보다 우월한 것으로 인식되는지 등에 대한 질문이 나오지 않는 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 ‘인권의 보편성 대 특수성’ 논쟁은 보통 진보와 보수 가릴 것 없이 관련 언론 및 전문가들의 논의에서 대부분 공통적으로 언급되는데, 유엔의 역사와 보편주의(즉 서구보편주의)의 역사를 생각하면 이는 남한 사회 전반의 서구중심주의와 이의 동의어라 할 수 있는 식민성을 보여 준다. 학계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던 것이다.

보편성과 특수성은 대립하지 않는다. 역사적으로 보편은 권력자들의 특수성이었을 뿐이다. 근대 이후 서구가 식민지 개발을 통해 세계의 권력자로 등극하면서 서구의 특수성이 세계의 보편인 것처럼 인식되었고 서구의 특수성-즉 보편-에 어긋나는 것들은 모두 특수한 것들로 폄하되었다. 

다른 대부분의 국가가 그랬듯이 남한 사회도 자신의 역사와 고유성·특수성을 버리고 서구의 특수성을 취하기 시작했다. 그게 바로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어떠한 권력도 100퍼센트를 가질 수는 없다. 어떤 국가나 사회는 서구 중심적인 보편을 인정하지 않았고, 남한 사회는 자신의 역사와 고유성을 서구 보편으로 대체하려고 노력했으나 역사적 흔적을 모두 지워버릴 수는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남한은 그 어느 사회 못지않게 서구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서구와 동일해질 수는 없고 ‘보편적’인 서구의 기준에 부합하지 못한 잔여의 특수성들을 갖고 있다. 

모든 것들은 특수하게 존재할 뿐이다. 특수성은 본질적인 것이다. 보편성은 존재 형태가 아니라 특수한 것들의 관계 형태 혹은 추상화된 인식 형태일 뿐이다. 보편성은 추상적인 내용이 될 수밖에 없고 그렇기 때문에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날 때에는 개별성(특수성)의 형태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 

다만 특수성만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모든 것들을 개별적으로만 인식해야 한다는 해체적인 불가지론에 빠짐으로써 부조리한 개별성의 정당화의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개별성(특수성)의 개방성이 중요하다고 중국의 학자 쑨거(孫哥)는 강조한다. 개별성(특수성)은 개방적인 태도를 유지함으로써 다른 개별성들과의 관계성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쑨거의 논의는 보편성과 특수성을 위계화하지 않으면서 현실의 구체적인 상황에 발 디딘 채 보편성이 개별성 간의 번역이자 교류로서 그 매개체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사고의 단초를 보여 준다.

인권의 보편성은 여전히 힘을 가진 중요한 가치이지만, 그 내용은 역사적·사회적으로 구성될 수밖에 없고, 그에 대해 질문하고 그 질문들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면 공허해지거나 폭력적인 개념으로 전락해버리고 말 것이다.
 
ⓒNKNEWS

‘북한 인권’은 그 용어부터 서구 중심적인 인권론을 기준으로 북의 인권 상황을 특수화·정치화하는 것으로서, 그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 이것은 소위 북한 인권 운동이 가지고 있는 정치적인 특징이자 본질적인 한계라고 생각한다. 

다만 ‘인권의 보편성’의 정신에 따라 남북의 인권을 모두 증진시키는 것은 미룰 수 없는 과제인데, 이를 위해 남북의 민중이 어떻게 아래로부터 흐름을 만들어갈 수 있을지, 남한의 민중운동이 어떻게 더 많이 기여할 수 있을지 적극적으로 고민이 모아지기를 바란다. ●
 
덧붙이는 말

* 이 글은 2016년 7월 사회진보연대 북한인권연구팀 워크숍에서 박석진 활동가가 발표한 글 중 일부를 편집한 것입니다. 인권운동사랑방 홈페이지에서 발표문 전문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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