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정세분석: 한국사회 분기점과 노동운동
 
2015.3
한지원(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실장)
 
 
1. 하나의 계급이 아닌 다양한 노동자들의 정세.
 
하나의 노동자계급을 염두에 두고 정세를 이야기하는 것이 쉽지 않다. 노동자 간 임금, 생활조건 격차가 단지 벌어지는 수준이 아니라 십 수 년 간 아예 고착화되었기 때문이다. 로또와 같은 일확천금이 아니면 저소득 노동자가 돈을 모을 길이 없고, 비정규직이 정규직이 될 길도 없다. 한국의 노동자들은 대기업/중소기업, 정규직/비정규직, 기성세대/청년세대 등으로 크게 갈라져 있다.
 
격차가 고착된 결과는 세계를 느끼는 감각 자체부터 아예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세계경제위기 이후 2010년부터 2013년까지 한국의 수출대기업들은 대부분 창사 이래 가장 돈을 많이 번 기간이었고 이에 따라 수출대기업 노동자들의 임금도 성과급을 중심으로 꽤 많이 올랐지만, 중소기업 노동자들과 자영업자들의 소득은 불황 그 자체였다. 현재 수출대기업에서 일하는 20%의 노동자와 나머지 80%의 노동자가 느끼는 경제 자체가 전혀 다르다. 민주노총의 주력이라 할 금속노조 조합원 대부분이 느끼는 정세는 불황과는 거리가 멀다. 반면, 중소영세사업장, 자영업자들의 체감 경제는 외환위기 이상이다.
 
노동운동의 ‘정세’는 이런 점에서 당위적인 ‘단결’이 아니라 다양하게 갈라져 있는 여러 노동자그룹들의 ‘동맹 또는 연합’을 고려해야 한다. 노동자계급은 어떠어떠해야 한다거나, 정규직은 도의적으로 비정규직을 도와야한다거나, 민주노총은 전체 계급을 대표해야 한다는 식 분석이나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공동의 이해를 찾고 대기업과 중소기업 노조의 갈등적 이해관계를 조정하며 공통분모를 만들어내고, 학교비정규직노조와 교사노조의 공존을 모색할 수 있는 방법 등이 중요하다.
 
 
2. 한국 사회의 역사적 분기점
 
2015년에서 2017년은 한국 사회의 중요한 분기점이다. 노동운동은 정부 정책에 대한 각론보다는 한국 사회의 큰 변화에 초점을 두고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먼저, 한국 사회의 가장 강한 지배이데올로기인 ‘성장론’이 분명하게 한계에 부딪혔다는 점에서 그렇다. 정부는 물론이거니와 시장근본주의자들조차 장기저성장, 장기불황, 일본화 등을 이제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 한다. 이명박이 7-4-7(7%성장, 국민소득 4만불, 세계7대 선진국)공약을 들고, 박근혜가 박정희 시대에 대한 향수를 배경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것이 불과 몇 해 전이다. 하지만 이제 일부 이데올로그들을 제외하고는 저성장 또는 불황은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라 받아들여 적응해야 할 조건이라고 판단한다. 60년대 이래 성장에 대한 회의론이 이렇게까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처음이다.
 
다음으로, 3저 호황, 87년 노동자대투쟁의 주역이었던 베이비부머세대의 정년퇴직이 이 시기에 본격적으로 이뤄진다는 점에서 그렇다. 1950년대 중반부터 1960년대에 태어난 시민들은 1980년대 중반부터 1998년 전 까지 한국 자본주의의 황금시기 주역이었고, 1987년 6월 항쟁과 노동자대투쟁을 만든 주력이었다. 평생직장, 4인 가족, 내 집 마련의 꿈 등 이른바 중산층에 관한 상징들은 모두 이 시대가 만든 것이다. 또한 민주노총 운동 역시 이 시대의 작품이다. 혹자는 한국의 노동운동은 1987년부터 4~5년간 만들어 놓은 것을 20년 여 년 간 써먹는 것이라고도 평가하기도 한다. 지금은 정상적(normal)인 것으로 인식되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예외적이었던 이 성장과 운동의 세대가 노동시장에서 떠난다. 87년 시대 만들어진 체계가 아니라 이제 전혀 다른 방식으로 노동운동의 내용을 채워야 한다는 의미다.
 
 
3. 위기 시대 최고 갈등적 쟁점은 국가재정.
 
경제성장이 시장근본주의자들의 말처럼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는 않지만 그래도 상당수 사회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은 맞다. 80년대 중반부터 10여 년 간 이어진 한국의 고성장이 만들어 낸 중산층이 대표적이다. 재벌 중심 경제체제, 낮은 노조 조직률과 규제력 약한 노동법, 보수적 정당체계에도 불구하고 높은 성장률은 꽤 많은 사람들의 계층상승을 만들어냈다.
 
2천 년대 중반에 비해 더 크게 나빠진 제도가 없음에도 현재 소득불평등, 갑을관계로 이야기되는 불평등 체감도가 높아진 것도 저성장 탓이 크다. 2008년 세계경제위기 이후 한국의 성장률은 2천 년 대에 비해 2%p 이상 하락했다.
 
경제 저성장에 부딪힌 정부가 최근 몇 년간 가장 신경 쓰는 것 중 하나가 국가부채다. 민간한국의 국가부채는 GDP 대비 약 40%다. G7 평균 90%나, 유로존 120%, 일본 200%에 비하면 낮은 것처럼 보이나 국가부채는 절대수준이 아니라 통화신뢰도 대비 상대적으로 봐야 한다. 화폐 신용도가 낮은 대부분의 국가는 국가부채를 30~50% 정도로 유지한다. 보통 70~100%는 대규모 경제위기를 겪은 후 후과가 남아있는 국가들이다. 한국은 최근 빠르게 부채가 증가했고, 더군다나 저성장으로 부채 상승 요인은 더 많아져 외환위기 위험성이 작지 않다. 정부의 국가부채 걱정이 순전히 정치적 쇼만은 아니란 이야기다.
 
물론 정부가 내놓은 해법은 철저히 계급적이다. 정부 정책은 공무원연금개혁, 공공기관정상화, 노동시장구조개혁, 서민 증세 등이다. 공공부문 노동자를 쥐어짜겠다는 것이고, 그래도 부족하니 담배세인상, 소득공제축소 등으로 세금을 더 걷겠다고 나섰다. 초이노믹스로 불렸던 중기 경제정책에서는 가계소득증대를 핵심과제라 하면서도, 정작 기업소득에 대한 재분배 정책은 없고 역으로 가계소득을 정부로 이전하는 정책뿐이다. 가계소득증대를 통한 내수 확대는 보수적인 시장주의자들도 요구하는 것인데, 박근혜 정부가 개별 기업들의 반발 속에서도 자본 전체의 이해를 위해 정책을 추진할만큼 ‘전략’적이지 못하단 이야기다.
 
민간경제의 장기간의 침체는 많은 사람들에게 국가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하도록 한다. 세출에 대한 요구는 커지는 반면, 세입은 증세가 아니면 방법이 없다. 장기저성장에 따라 사회복지냐 수출기업지원이냐, 연금지출이냐 청년취업지원이냐, 서민증세냐 부자증세냐, 정부재정을 둘러싼 갈등이 다양한 갈등이 첨예화 될 것이다. 디플레이션이 현실화되는 2015년은 2016년, 17년 선거 해를 앞두고 갈등이 최고조로 향해 갈 것으로 보인다.
 
노동운동은 다양한 노동자들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며 대안적인 대정부 재정 요구를 만들 수 있어야 한다. 즉자적으로 조직노동의 이해관계에만 반응해서는 고립된 기득권 세력이 되기 십상이다. 정부 재정은 새로운 부가가치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세입과 세출을 통해 재분배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제로썸 게임이다. 예를 들면, 현재와 같이 임금을 보완하는 형태의 공무원 연금은 역사적 맥락이나 과정이야 어찌되었건 현재의 임금지출을 후세대가 책임지는 것이 된다. 대기업 기업복지를 사회화하지 못한 채 정부 복지지출만 늘리면 대기업의 사회적 부담을 결국 서민들이 떠 앉는 꼴이 된다. 민주노총은 기업노조를 벗어나 초기업적 단체협약을 강화하고, 적용대상이 넓은 제도를 우선적으로 개선하는 투쟁을 해야 한다.
 
 
4. 노동시장구조개혁, 재정 부담 전가 및 87년 임금체계 정리를 위한 포석
 
작년부터 진행된 공무원연금개혁과 공공기관정상화에 이어 올해는 노동시장구조개혁이 쟁점이다. 정부는 연공급임금체계를 직무성과급으로 바꾸고, 업무평가에 따른 정리해고를 제도화하는 것은 물론 취업규칙변경도 사용자 마음대로 할 수 있도록 관련 제도를 바꾸려 하고 있다.
 
노동시장구조개혁은 고용경직성을 강조하는데, 사실 그 대상이 한국 취업자의 10%도 되지 않는다. 아래 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한국의 고용 유연성은 근속을 기준으로 보자면 OECD 평균보다 한참 밑이다. 금속노조와 공공부문 공기업노조, 공무원노조 같은 일부 조직 노동자(일부 대기업, 공기업의 현장직)를 제외하면 대공장, 공기업이라 하더라도 OECD 평균 수준에 불과하다.
 
<한국 노동자의 그룹별 근속 비교>
20년
 
 
 
 
금속노조(17년)
15년
이태리, 일본,
독일
공무원(16년)
 
유노조 대기업(13년)
10년
OECD평균
공공기관(10년)
9년
미국
민간 대기업(9년)
5년
한국평균
 
 
 
중소 비정규(3년)
 
국제비교
한국 그룹별
 
민간부분에서는 노동시장구조개혁은 거의 전적으로 금속노조와 일부 대기업 노조에 한정된 문제다. 정부가 이야기하는 고용경직성은 현대차그룹이 있는 자동차산업과 조선산업, 화학일부 정도에만 해당된다. 이들 기업들은 울산, 거제 등 87년 노동자대투쟁의 상징이기도 하다. 재벌대기업 종사자 120만 명 중 20만도 되지 않는다. 전체 취업자의 1% 정도다. 87년 노동자대투쟁을 빗겨간 대기업들, 한국 최고 재벌인 삼성의 경우 이미 직원 90% 이상이 연봉제고 고용 관계에도 제약이 없다. 한화나 SK도 마찬가지다.
 
공공부문은 민간부분과 반대로 대부분의 정규직 노조가 개혁 대상이다. 100만 공무원과 40만 공공기관 정규직이 이번 노동시장구조개혁의 직접적 대상으로 임금근로자의 8% 수준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노동시장구조개혁은 공공부문 2차정상화, 연금개혁과 더불어 공공부문 노동자를 핵심 타깃으로 하며, 민간부분의 대공장 노조 일부가 포괄되는 구조다.
 
노동시장 개혁으로 포장했지만 실제는 재정지출 감축을 위한 노동자 쥐어짜기고, 87년 노동자대투쟁으로 만들어 진 민간부분 임금체계를 이들 노동자들의 정년퇴직과 함께 끝내겠다는 의도다.
 
문제는 정부가 이런 식으로 공격에 들어올 수 있는 것은 위 근속년도 비교 그림에서도 볼 수 있듯이 한국의 노동시장이 극단적으로 분절되어 있기 때문이다. 연금, 임금체계 해고조건까지 대공장, 공기업 조합원에게는 치명적인 것이 중소기업,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는 전혀 해당되지 않는다. 중소기업 사업장에서는 최저임금+α에다 최근에는 현장직까지 포괄임금제로 바꾸고 있는 실정이고, 기간제 사용기간 연장도 이미 현장에서는 2년이든 4년이든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닐 정도로 엉망으로 운영되고 있다. 한국은 노동규제에 관한한 무규제가 아니라 비규제(non-regulation)란 평가를 받는다. 규제가 없는 것은 아니나 있으나 없으나 지켜지지 않기 때문이다. 높은 수준의 단협과 조직력이 아니면 한국 노동시장에서 노동자는 전혀 보호를 받지 못한다.
 
결국 조건에 의해 노동운동이 노동시장구조개혁에 대해 그대로 맞받아치는 것은 미조직 노동자들에게 기득권 유지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직무성과급이 극악한 임금체계인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기업별’로 유지되는 연공급이 딱히 좋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기업별 호봉제가 노동자 간 임금격차를 벌이는 매개 중 하나인 것은 분명하다. 임금격차를 최소화할 수 있는 초기업적 임금표준(직무, 숙련에 따른 임금차 최소화, 동일노동 동일임금 등)을 제안하고, 초기업적 단체협약과 협약의 효력확장이 가능한 법제도 개선을 위해 투쟁할 수 있어야 한다.
 
 
4. 총파업, 재·보궐선거, 재벌 경영권승계, 민주노조운동은 어떤 사회세력으로 등장해야 하나
 
노동시장구조개혁과 공무원 연금개혁에 대한 반대를 핵심으로 해 민주노총이 4월 말 총파업에 돌입한다. 실제 파업은 민주노총이 밝히는 데로 4말 5초에 기 조직된 투쟁들을 집중시키는 파업이 될 것으로 보인다. 공공부분 정상화의 최대 격전지가 되고 있는 공공운수노조 의료연대본부, 공무원연금개혁을 두고 총력투쟁을 다짐한 공무원노조와 전교조, 교육공무직법 제정을 요구하며 작년 말부터 투쟁을 이어가고 있는 공공운수노조 교육공무직본부, 정부조직 개편에 따라 파업을 최근 결의한 건설노조 등이 실제 파업을 준비하고 있는 곳들이다. 최초로 직선으로 선출된 좌파집행부가 어느 정도까지 그 ‘투쟁’을 밀고 나가느냐는 이후 어쨌거나 긍정적으로나 부정적으로나 투쟁하는 조직으로 정체성을 삼았던 민주노총의 전망과도 직결 되는 문제일 것이다.
 
총파업 직후 4월 29일에는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가 있다. 지역구 세 곳의 작은 선거지만 박근혜 정권의 지지율이 바닥이고, 지역구들도 통합진보당 정당해산 판결로 치러지는 곳들이라 상징성이 크다. 특히 정의당, 국민모임, 노동당, 노동정치연대 등이 선거 직후부터 본격적인 통합 프로세스를 밟을 것으로 보여 노동운동에도 상당히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2016년 총선과 2017년 대선을 앞두고 포스트-박근혜를 노리는 정치세력의 시험대란 측면에서도 규모는 작지만 의미는 큰 선거가 될 전망이다. 포스트-박근혜는 한 대통령의 다른 대통령으로의 교체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고도성장과 민주화라는 한국의 가장 지배적인 상징이 모두 소진된 후 치러지는 권력 재편이란 의미가 크다.
 
한편, 이런 가운데 이재용을 비롯해 정의선 등은 상속을 서두르고 있다. 이미 이재용은 몇 달간의 내부 정리를 끝내고 법적 절차를 제외하면 삼성그룹의 승계를 마무리했다. 조만간 현대차 정의선 역시 비슷한 절차를 밟을 것으로 보인다. 비용문제와 안정적 지분 확보 문제로 순환출자구조를 지주회사 체제로 바꿀 수 없다는 전망이 우세한 가운데, 결국 정치적으로 꼼수를 동원해야 할 것으로 보이는데, 4월 총선 후에는 이재용 체제 안정화를 위해 지주회사법과 금산분리법을 국회에서 본격적으로 논의할 것이다. 삼성 승계 과정을 보면 현대차도 그에 맞게 승계를 준비할 것이다. 순환출자 외에도 불법 주식 양도와 상장 차익, 내부거래를 통한 그룹자산의 재벌총수가계로의 이전 등의 쟁점이 여전히 논란 여지가 있다.
 
전투주의와 코포라티즘이라는 극단적 편향이 많았던 한국의 노동운동은 중장기 ‘전략’이라는 것이 익숙지 않다. 하지만 올해부터 몇 년은 저성장 시대 국가재정, 3저호황-87년체제 세대의 정년퇴직, 재벌의 새 총수체제와 제도적 사회적 인정문제, 고성장-민주화 시대 정치세력 이후 정치재편 등 중장기 한국사회 변화를 좌우할 쟁점들이 다뤄지는 기간이다. 2015년 노동운동이 한국 사회의 큰 변화를 주도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는데 온 힘을 다해야 하는 이유다.
 
이런 점에서 사실 민주노조 운동에게 핵심은 총파업보다는 그 후에 무엇을 할 것인가에 있다고도 할 수 있다. 현재와 같은 임금주도성장론 정도가 민주노총의 중장기 전략이라고 한다면, 민주당 내 개혁그룹으로 분류되는 그들보다 나을 게 없는 상황이다.
 
 
6. 나가며: 그리스 시리자의 사례가 한국 노동운동에 주는 시사점
 
2015년 1월 집권에 성공해 세계를 놀라게 한 그리스 시리자(Syriza) 이야기부터 마무리 해보자. 시리자는 2004년에 결성된 사회주의를 지향으로 삼는 급진 좌파들의 연합 정당이다. 선거를 거치며 급진성이 많이 누그러졌다는 운동 진영 내 평가도 있지만 어쨌거나 시리자가 전후 유럽에서 선거를 통해 집권한 가장 급진적인 세력 중 하나인 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스는 2010년 4월 국가부도를 맞았고, 구제금융을 제공한 트로이카(유럽연합, 유럽은행, 아이엠에프)의 감시 속에 빚을 갚기 위해 4년 넘게 재정 긴축을 계속했었다. 2009년까지 득표율 4% 내외의 군소 정당에 불과했던 시리자는 국가부도 사태 이후 민영화 재정긴축 계획 철회를 내걸고 대규모 집회, 지역풀뿌리활동, 대안미디어 등을 통해 시민 곁에서 정열적으로 활동, 결국 4년 만에 의회 300석 중 149석을 차지하게 되었다.
 
2010년 이후 당내 논란이 있기는 했지만 시리자의 일관된 경제 강령은 경제성장이 먼저고 구제금융 상환은 나중이라는 것이었다. 정부와 재벌의 부패, 건실한 산업 대신 부동산, 금융 시장으로 성장한 지난 십 수 년간의 경제정책실패가 그리스 부도의 원인인 만큼 대책 역시 원인에 대한 해결이어야 하지, 부도로 인한 손실을 서민이 짊어지는 정책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시리자는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아이엠에프와 유럽연합이 요구하는 긴축이 아니라 국가주도 투자와 조세정의(부자증세)가 필요하며, 국가재건을 위해 실업자 빈민에 대한 인도적 지원(전기, 식품, 주택, 교통 등), 개인 및 자영업자 부채에 대한 지원, 해고 규제와 일자리 창출 등이 시급히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부 보수언론은 시리자를 포퓰리즘 정당으로 평가절하하기도 하지만 시리자는 사실 전통적인 사민당이나 공산당보다도 더 ‘강령’을 강조하는 정당이다. 2009년 시리자가 내외적 어려움에 빠졌을 때 그들이 한 일은 지역의 활동가들과 전문가들이 협력해 400페이지에 달하는 강령을 책으로 발간한 것이었다. 강령의 특징은 국가 사회 정책 대부분을 다루는 ‘전략’과 함께 경직적 통일성보다는 다원주의를 인정하고 유연한 연합들을 추구한다는 점이다. 즉 새로운 경로를 탐색하고, 새로운 위험을 방지하고, 모든 가능성을 활용하는 지속적 과정이었다. 시리자를 통일하는 요인으로서의 강령은 사회적 투쟁으로부터 얻은 경험의 산물이자, 사회적 정치적 대의제도 내부에서 획득한 경험과 전문성의 산물이었다.
 
시리자는 각기 다르게 발전해 온 정당운동과 사회운동 전통이 연합정당 아래서 공생하며, 내적 통일을 위한 분파적 갈등에 골몰하기보다는 국가적 정책을 변화시키고, 정당의 대중적 정치역량을 증진시키기 위한 기능적 조직적 실천에 더 많은 역량을 쏟도록 상호 강제하는 문화가 정착되어 있다. 시리자는 이런 문화 속에서 2000년대 중반 학생운동과 깊게 관계했고, 2010년 이후에는 총파업과 광장시위(그리스 분노한 사람들)에 헌신적으로 참여하며 다양한 사회적 동맹의 중심에 섰다. 의회를 통해 얻게 된 정보와 제도개선의 방법들이 사회운동을 더 풍부하게 했고, 반대로 사회운동을 통해 의회에서 시리자 의원들의 발언에 힘이 실렸다.
 
생각해보면 1997년 국민승리21의 태도는 현재 시리자의 그것과는 사뭇 달랐었다. 1997년 권영길 대통령 후보의 국가부도사태에 대한 첫 번째 일갈은 “일어나라 코리아”였었다. 정부의 금융규제 철폐, 재벌의 과잉축적과 부패비리, 글로벌 금융자본의 환투기가 국가부도 사태의 원인이었지만, 국민승리21은 사태를 제대로 분석하지 못한 채 대책도 국민승리21의 이해관계자들을 중심에 뒀다. 권영길 후보가 기아차노조 이·취임식에서 한 연설 ― 기아차를 인수하려는 재벌과 정부가 협잡하다 기아차가 부도났고 외환위기가 발생했다는 내용 ―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데, 이렇다보니 외환위기 대책이 재벌과 정부의 음모로 고용불안에 처한 노동자를 살리는 “고용안정특별법과 재벌해체”가 되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당시 갈등은 현재 그리스와 비슷하게 구제금융의 성격과 부도의 손실을 분배하는 계급투쟁이었다. IMF의 구제 금융에 대한 재협상 또는 거부와 한국 경제 재건을 위한 이행 프로그램(재벌의 사회화, 조세 복지, 긴급한 구호 등)이 중요했었다.
 
그렇다면, 1997년 국민승리21과 2010년 시리자가 다른 경로를 가게 된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국민승리21은 계급적 이해와 배반되게 민족주의적(일어나라 코리아)이거나, 조직 노동만의 이해관계를 계급적 슬로건(고용안정특별법)으로 포장하는데 익숙했다. 그리고 이 모순은 10년 넘게 이어져 퇴행적 민족주의 논쟁(종북논란)으로 당을 파탄내고, 조직 노동에 대한 거리두기를 당의 발전전략(이른바 민주노총당 논쟁)이라고 말하는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파산으로 이어졌다. 오늘 우리에게 문제는 진보성을 상실한 민족주의 세력과 계급적 대표성을 획득하지 못하는 조직노동의 요구라는 노동운동의 두 가지 모순이 현재까지도 전혀 새로운 단계로 발전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2015년, 지속적 무역흑자와 외환보유고를 감안했을 때 우리가 2011년 그리스나 1998년 당시처럼 갑작스런 경제 붕괴 상황에 빠지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저성장 시대 노동운동은 사실 한국 진보진영에게 전혀 익숙치않은 조건이다. 1998년이나 2009년의 예를보면, 조직노동은 위기를 뚫고 나가기 보다는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몸을 낮췄다. 한국사회의 민중적 이행에 관한 분명한 전망을 가지고 지역과 현장에서 다시 대중운동을 만들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