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노동보다 | 2019.05.22

노조법 개악 없는 ILO협약비준을 요구하자

사회진보연대
 
기어이 선비준 요구를 거절한 문재인 정부
 
 
지난 5월 20일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 운영위원회는 ‘ILO 핵심협약 비준’관련 논의를 진행하였으나 합의에 이르지 못하여 논의를 종결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면서 “두 차례의 공익위원 합의안은 향후 ILO 핵심협약 비준 논의 과정에서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언급했다. 뒤이어 22일 고용노동부 장관은 “4개 협약 중 105호(강제노동철폐협약)을 제외한 3개 (결사의 자유와 단결권 보호에 관한 87호, 단결권과 단체교섭권에 관한 98호, 강제노동에 관한 29호) 비준을 추진하고, 협약 비준에 요구되는 법 개정 및 제도개선도 함께 추진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법 개정 방향에 대해서는 “지난 4월 15일 발표된 경사노위 최종 공익위원안을 포함해 사회 각계·각층의 의견을 폭넓게 수렴하여 합리적인 대안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고용노동부장관이 발표한 입장을 들여다보면 사실상 달라진 것은 없다. 정부가 설정한 ‘경사노위를 통해 법 개정안 합의 → 협약비준안 국무회의 의결 → 법개정안과 비준동의안 국회에 동시 상정 → 법 개정안과 비준동의안 통과 후 비준서 기탁’이라는 비준 경로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해졌음을 시인했을 뿐이다. 더 나아가 비록 노사가 합의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공익위원안을 사회적대화의 결과물로 인정하고 나머지 정해진 수순을 그대로 밟겠다고 밝혔다.
정부의 입장은 민주노총을 비롯한 시민사회가 제시한 ‘선비준론’, 즉 협약을 먼저 비준하고 추후에 ILO의 감시감독 메커니즘을 활용하여 협약에 맞게 법안을 개정한다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비준은 하겠으나 법 개정은 사용자측의 요구를 적절히 반영해 개악하겠다는 의지를 그대로 유지했다.
 
 
비준과 법개악 동시 추진한 정부가 애초에 문제
 
 
문재인 정부는 ILO 핵심협약 비준을 공약으로 내걸고 당선되었고 취임 100일을 맞아 발표한 국정과제를 통해서도 이를 재차 확인했다. 그러나 비준을 회피하던 역대 정부와 다를 바 없이 법을 먼저 고치고 난 다음에야 비준을 할 수 있다는 태도를 취했다. 막상 법 개정 논의에서는 협약과 상충되는 법조항 및 제도를 개정할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정부는 경사노위에서도 법 개정 논의의 과제를 협약비준에 따른 의무이행방안이 아니라 ‘핵심협약비준 관련 논의’라고 모호하게 설정했다. 노사가 무엇인가를 교환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은 것이다. 이렇게 되니 경총 등 사용자단체는 협약 비준의 대가로 노조 할 권리 축소, 특히 단협유효기간 연장, 사업장내 쟁의행위 금지, 파업대체인력투입 허용, 사용자의 부당노동행위에 대한 형사처벌 금지 혹은 노조에 의한 부당노동행위 신설 등을 ‘사용자 대항권’이라는 이름으로 공세적으로 주장했다. 만약 의무이행방안을 과제로 설정했다면, 사용자들의 요구는 애초에 배제되었을 것이다. 결국 사용자들의 요구는 합리적 논의대상처럼 포장되었고, 협약을 이행하는 방향으로 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노동계의 요구는 전면 수용하기 힘든 ‘무리한 요구’로 둔갑했다.
 
노동자단체(한국노총), 사용자단체, 정부가 각각 추천한 경사노위 공익위원들은 양측의 입장을 적절히 수용하여 그동안 ILO 결사의 자유 위원회가 십수 년 동안 정부에 권고한 내용에 크게 미달하는 방안을 내 놓았다. 이 방안으로 바탕으로 정부 입장도 고려한 법 개정안(민주당 한정애 의원 대표발의)은 공익위원들이 제시한 안에서도 중요한 요소들을 누락했을 뿐 아니라 개악 요소를 추가했다. 결국 사회적 대화를 통해 노사양측이 합의에 도달하지 못했다지만 협약비준과 노동법 개악의 교환 방안이 그 결과물로 남게 되었다.
 
먼저, 단결권에 대해서는 실업자· 해고자가 조합원으로 남더라도 노조아님 통보를 하지 못하도록 한 대신 해고자의 노조활동을 대폭 제한했다. 대의원 혹은 임원으로 선출되는 것도, 사업장 출입 등 편의를 제공받는 것도 제한했다. 둘째, 전임자임금지급 금지 조항을 삭제하는 대신, 타임오프 한도를 넘는 단협 체결은 부당노동행위로 처벌하도록 했다. 더구나 단협 유효기간 연장, 사업장내 쟁의행위 제한이라는 사용자들의 요구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정부는 이를 향후 법 개정 방향의 토대로 삼겠다고 선언했고, ‘각계각층의 요구를 수렴’한다는 말을 덧붙여 자유한국당 추경호 의원이 대표발의한 ‘노조파괴법’도 함께 논의할 수 있음을 시사했다.
 
 
선비준은 법개정의 좌표 설정
 
 
민주노총 등은 ‘선입법 후비준’이라는 정부의 구상은 협약 비준의 본래 취지를 훼손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사용자단체가 수용할 수 있는 수준에서 법 개정을 먼저하고 이를 토대로 비준에 대한 야당의 동의를 얻겠다는 구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대안으로 ‘선비준 후입법’을 경로로 제시했다.
 
국제적인 의미에서 협약비준은 ILO가 국내 법·제도·관행이 협약에 부합함을 인증하는 절차가 아니라 거꾸로 회원국이 국내 법·제도·관행을 국제기준에 일치시킬 것과 이를 위해 ILO 감시감독절차를 수락하겠다는 것을 선언하는 절차다. 따라서 협약 비준에 앞서 법개정이 선행되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국내적으로도 헌법 73조와 60조 1항을 종합하면 입법이 필요한 국제 조약은 국회의 동의를 얻어 법을 고치기 전에 비준을 먼저 할 수 있다.
 
실제 1991년 ILO 가입 후 역대 정부는 비준 협약 수를 늘이기 위한 방법으로 국내법과 상충되지 않는 협약만 골라 비준했다. 그러다 1998년 ILO 실무대표단 방한 후 가급적 핵심협약을 빨리 비준하겠다는 입장을 취했던 김대중 정부는 국내법과 충돌 요소가 있는 138호(취업 최저연령에 관한 협약)을 “조금이라도 빨리 협약을 비준하기 위해 국회 동의를 거쳐 비준한다”라고 입장을 밝히며 법 개정에 선행하여 비준부터 했다.
 
선비준 요구는 사회적 합의를 핑계로 정부가 비준절차를 지연하지 말라는 취지뿐만 아니라 법개악을 막는데 선비준이 유리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국내법의 개정을 요하는 협약을 비준하고 나면 비준 1년 후 효력을 발휘하게 된다. 다시 말해 1년이 지나면 협약이 국내 법체계에 통합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결사의 자유에 관한 협약을 국회 동의를 거쳐 비준서에 서명하여 ILO 사무국에 등록한 후, 1년 동안 국제 기준에 부합하도록 법을 개정하면 된다. 만약 1년 내에 법개정을 완료하지 못하면 협약이 신법 우선의 원칙에 따라 개정되지 않은 법보다 우선 적용된다. 이때 적용되는 협약은 협약 본문에 명시된 추상적 문구만이 아니라 ILO 결사의 자유 위원회 또는 전문가위원회가 만들어온 판정례도 포함된다. 따라서 전노협, 민주노총이 제출한 사안에 대해 결사의 자유 위원회가 정부에 전달한 법·개정 권고의 내용이 개정되지 않은 법에 앞서 우선 적용된다는 뜻이다. 이렇게 되면 법이 개정되지 않았다고 해서 법적용에 혼란이 있을 이유가 없다.
 
 
노조할 권리는 운동을 통해 쟁취해야
 
 
일각에서는 헌법 60조 1항에 따라 국회 동의가 필요한 협약이라고 할지라도 국무회의에서 가결만 되면 국회 동의를 거치기 전이라도 비준서를 ILO에 등록할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대통령의 국제조약 체결·비준권과 국회의 동의권은 각각 별개의 권한이고 무엇이 선행하여 행사되어야 하는지는 절차 규정이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대통령이 체결·비준권을 먼저 행사하고 (국무회의 의결 직후 비준서를 ILO에 등록하고) 보자는 것이다.
 
얼핏 급진적이고 과감한 주장처럼 보이지만 현실적으로 효력이 없다. 국회 동의권은 대통령의 권한행사에 대해 민주적 통제를 가하자는 취지이므로 동의권은 비준에 앞서 사전에 행사되는 것이 맞다. 협약비준은 최종 목적이 아니라 모든 노동자가 노조 할 권리를 자유롭게 행사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기 위한 지렛대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협약 비준 과정에서 국제적으로 인정된 기본 인권으로서 결사의 자유 원칙을 사회전반이 규범으로서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 노조할 권리가 제한과 통제의 대상이 아니라 자유로서 보장되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대통령이 결단한다고 해결 될 일이 아니라 대중운동을 더욱 확대하고 활성화함으로써 가능하다.
 
ILO는 회원국이 된 사실만으로 결사의 자유를 법과 관행에서 존중·실현·촉진할 의무를 지닌다고 규정하고 있다. 노동시간, 임금, 사회보장, 산업안전보건, 휴일 등을 망라한 여러 국제노동기준을 노동자들이 실질적으로 누리기 위해서는 노동자들이 자주적으로 단결하고 단체교섭과 단체행동을 할 권리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바로 결사의 자유가 ‘일터에서의 기본 원칙과 권리’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정부가 비준과 법 개악을 동시 추진하겠다는 입장을 재차 분명히 한 만큼, 사회운동은 ‘선비준 후입법’ 요구를 더욱 분명히 제기해야 한다. 또 사용자단체나 야당 때문이 아니라 바로 정부가 애초부터 국제적으로 인정된 기본권 보장을 노사 간의 교환과 타협의 대상으로 탈바꿈시켜 대대적인 법 개악, 노조할 권리 축소의 물꼬를 텄고, 협약비준 추진도 어렵게 만들었다는 점을 비판해야 한다. 또 법개정이 아니라 행정조치로 시행할 수 있는 전교조 노조아님통보 취소, 특수고용노동자 노조 설립신고 인정, 협약의 취지에 어긋나는 노동행정 지침(시행령, 시행규칙, 행정해석, 가이드라인)등을 즉각 개정할 것을 촉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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