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2022 겨울. 18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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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양극화와 제왕적 대통령제, 한국 정치의 영속적 위기

김성균, 임필수 | 정책교육국장, 정책교육실장
이번 글은 ‘정치 양극화’, ‘제왕적 대통령제’라는 두 가지 키워드로 한국의 정치현실을 진단하고 전망을 그려 보고자 한다.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이 두 가지가 도대체 뭐가 문제냐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으므로, 몇 가지 우리의 생각을 제시하고자 한다. 

먼저 정치 양극화가 왜 문제냐는 의문이 있을 수 있다. 혹자는 정치 양극화가 ‘보수정당’ 또는 ‘지배계급’ 간의 새로울 것 없는 이전투구일 따름이며, 나아가 그들 간의 이전투구가 심화할수록 ‘진보 정치세력’이 대안으로 떠오를 기회의 문이 열리지 않겠냐고 주장할지도 모르겠다. 또 다른 시각에서는 정치 양극화가 정당 간의 보수적 담합을 깨고, 정당이 뚜렷한 이념이나 의제, 정책에 따라 분별 정립함으로써 책임정당제가 실현되는 계기라고 말할 수도 있다. (여기서 책임정당제란 정당이 선거가 치러지기 전에 일관성이 있는 정책패키지를 제시하여 유권자에 분명한 선택의 기회를 제공하고, 선거에서 승리한 정당은 그 정책을 실행에 옮김으로써 책임을 완수한다는 간단한 원리를 뜻한다.)

그렇지만, 현실에서 나타나고 있는 정치 양극화는 책임정당제의 실현도 아니고, 새로운 ‘진보 정치세력’이 부상할 수 있는 기회도 아니다. 왜 그런가.  

첫째, 현재 정치 양극화는 정당체계를 구성하는 한 축, 또는 양축이 극단주의로 치달으면서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 현실 세계에서는 ‘우파’ 인민주의나 ‘좌파’ 인민주의, 또는 권위주의의 부상이 정치 양극화를 추동하는 원천이다.  

둘째, 정치 양극화는 또한 민주주의나 법치주의적 제도와 관습으로부터의 이탈로 이어지기도 한다. 예를 들어 극단주의 세력이 집권한 경우, 대통령에게 초헌법적으로 권한을 집중시킴으로써 의회나 사법부의 근간을 무너뜨리기도 한다.

셋째, 이러한 극단화는 경제학적 근거에 입각한 정책적 합의로부터 이탈을 의미하기도 한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나 튀르키예 에르도안 대통령 등장을 계기로 ‘부두(voodoo) 경제학’이라는 표현이 다시 주목을 받았다. 즉 이론적 근거 없이 그냥 믿고 싶은 대로 경제정책을 행한다는 뜻이다. 그 결과 선거 전에 제시했던 허황된 공약은 실행될 수 없거나, 실행되더라도 경제의 정상적 작동을 파괴한다. 다시 말해 인민주의 정치세력은 원천적으로 ‘책임정당’이 될 수 없다.  

넷째, 정치 양극화는 대중에게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 외에 다른 모든 정당에 대한 강력한 당파적 증오심과 적개심을 심어놓는다. 인민주의 정당은 자신을 제외한 모든 세력을 기득권 세력이자 인민의 적이라고 규정하고, 이러한 감정을 증폭시킬 수 있는 모든 수단과 계기를 활용하고자 한다. 대중이 이러한 정서적 메커니즘에 포획될 때, 새로운 ‘진보 정치세력’은 끼어들 틈조차 잃게 된다. ‘우리 편을 들지 않으면 결국 적을 돕는 것’이라는 극히 단순한 논리가 지배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최근 한국의 민주당 열성 지지자들의 행태를 생각해보자. 진보정당이 민주당의 하위 파트너를 벗어나려고 할 때 그들은 어떤 태도를 보이는가. 한국의 진보정당이 민주당 열성 지지자들에 편승하면 할수록, 종속적인 하위 파트너에 만족해야 하는 벽에 부딪힌다. (필자는 인민주의 정치세력이 발호할수록 진보 정치세력이 그에 편승하는 게 아니라, 현대적인 민주주의, 법치주의 원리를 방어하고 ‘부두 경제학’을 넘어서 이론적 근거에 입각한 정책적 대안을 제시해야만 활로를 찾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다음으로, 제왕적 대통령제 문제 역시 그것이 사회운동 내에서 그렇게 주목할 만한 문제냐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대통령제든, 의원내각제든, 분권형이든 간에, 이들 권력구조는 모두 부르주아의 지배가 관철되는 메커니즘일 따름이며 따라서 본질적 차이가 없다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다른 한편, 어떤 사람은 진보세력의 집권을 고려한다면, 의회에서 소수이더라도 대통령의 막강한 권한을 바탕으로 강력한 개혁을 추진할 수 있으므로 대통령으로의 권한 집중이 오히려 유리하다고 암암리에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정치 양극화의 심화, 인민주의와 권위주의의 발호라는 경향이 제왕적 대통령제와 결합할 때 나타날 수 있는 파괴적 상승효과를 간과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위에서 언급한 튀르키예의 에르도안은 공화국 설립 이후 94년간 유지된 내각제를 무너뜨리고 2017년 개헌을 통해 대통령제로 권력구조를 바꾸어버렸다. 대통령이 의회 해산권을 행사할 수 있게 해 의회를 무력화했고, 고위 법관 임면권도 대통령이 갖게 돼 사법부를 좌지우지할 수 있게 되었다. 대통령 임기도 최장 2033년까지 가능하도록 변경했다. 그가 대통령제를 더 선호하는 데에는 분명히 권력의 획득이나 집중이 훨씬 더 쉽다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인민주의와 권위주의가 추동하는 정치 양극화나 제왕적 대통령제는 대중을 당파적 적개심에 종속시키고, 제왕적 대통령이라는 지도자에 대한 맹목적 충성심을 배양한다는 점에서 대중의 정치적 역량을 파괴하는 효과를 발휘한다. 이런 점에서 한국 정치에서 정치 양극화나 제왕적 대통령제가 얼마나 심화하였는가를 진단하고, 그 파괴적 효과에 주목하는 것은 우리 사회운동에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1. 미국의 정치 양극화: 한국을 비춰보기 위한 사례   

 
 
“사회가 아주 다른 세계관을 가진 당파적 캠프들로 분열될 때, 그런 차이가 실존적인 것이어서 타협 불가능한 것이라고 여겨질 때, 정치적 경쟁은 당파적 증오 심리로 발전한다. 정당들은 상대방을 합법적인 경쟁자로 보는 게 아니라 위험한 적들로 간주하게 된다. 패배는 정치적 과정의 당연한 한 부분으로 받아들여지는 게 아니라 커다란 재앙으로 여겨져 무슨 일이 있어도 피하려고 한다. 이런 일이 벌어질 때, 정치인들은 관용을 버리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승리하고자 한다. 만약 우리의 적들이 위험하다고 믿는다면, 그들을 막기 위해 어떤 수단이라도 활용해야 하지 않겠는가?”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2018)를 쓴 미국의 정치학자 레비츠키, 지블랫이 《뉴욕 타임스》에 발표한 글, “우리의 민주주의는 어떻게 흔들리는가”(2018.1.27.)의 한 대목이다. 이는 정치의 극단적 양극화가 민주주의 제도의 붕괴를 야기할 수 있다는 우려를 표현한다. 

또 다른 미국의 정치학자 퍼트냄과 작가 롬니 가렛이 펴낸 『업스윙』(2020)은 미국의 정치적 양극화를 ‘정당 부족주의’라고 요약했다. 정치적 맥락에서 부족주의(tribalism)는 조직, 사회 내의 배타적인 내집단에 대한 충성심에 기초하여 외집단에 대해 차별적 행동이나 태도를 보이는 것을 말한다. 간단히 말해, 자기가 지지하는 정당과 그 후보자는 무조건 칭찬하고, 반대하는 정당과 그 후보자에 대해서는 무조건 비난하며, 심지어 상대 후보는 인격적으로 하자가 있는 사람으로 취급한다는 뜻이다.

동양의 고사성어로는 당동벌이(黨同伐異)라고 할 수 있겠다. 이는 자기가 속한 집단의 이익을 위해 대의적으로 옳고 그름을 떠나 다른 집단 또는 타집단에 속한 사람들을 무조건 흠집내 무너뜨리려는 행태를 말한다. (중국 역사책인 후한서의 당동전에 나온다. 2004년 《교수신문》이 올해의 사자성어로 선정했다. 윤소영 교수는 『문재인 정부 비판』[2020] 에서 노신이 「페어플레이는 아직 이르다」[1925] 라는 글에서 페어플레이의 대안으로 당동벌이를 내세웠다는 사실을 꼬집으며, 운동권 출신 386세대가 채택한 이른바 적폐청산의 원칙이 사실은 당동벌이일 뿐이라고 비판했다.) 

이러한 당파적 편견과 적개심은 평범한 미국인의 개인 생활에도 이미 깊게 스며들었다. 과거에는 당파를 교차하는 사적인 유대관계나, ‘불일치하는 정체성’(예를 들어 진보적 공화당원, 보수적 민주당원)이 존재했다면 현재에는 이런 현상이 사라지고 있다. 2016년 현재 미국인의 75%가 친구들 모임 안에서는 정치적 의견 불일치가 없다고 말했다. 즉 민주당 지지자끼리, 공화당 지지자끼리 친구로 사귄다는 뜻이다. 

또한 반대당 소속 여부에 따라 사람의 지성을 평가하는 비율이 1960년대 6%에서 2008년 48%로 상승했고, 이기심 평가 비율도 같은 기간 21%에서 47%로 올라갔다. 반대당 지지자를 ‘아주 불쾌하게’ 생각하는 비율도 20% 이하에서 56%로 올라갔다. 즉 민주당 지지자는 공화당 지지자에 대해서, 또 공화당 지지자는 민주당 지지자에 대하여 지성이 떨어지고 이기심이 강한 사람이라고 보며 매우 불쾌하게 느끼는 비율이 크게 올랐다는 말이다. 

그래서 자식이 반대당 열성 당원과 결혼하는 것을 반대하는 비율도 1960년에서 2010년 사이 민주당원의 경우 4%에서 33%로, 공화당원의 경우 5%에서 49%로 증가했다. 자신이 배우자를 선택할 때도 정치적 성향이 교육 배경이나 종교관보다 더 중요한 판단 근거가 되고 있어서, 지난 50년을 거치며 인종과 종교의 차이를 넘는 결혼은 훨씬 더 흔해졌으나, 당파심을 뛰어넘는 결혼은 훨씬 더 줄었다. 
 
 

1) 정치 양극화는 누가 주도하는가: 정치엘리트인가 대중인가

그런데 『업스윙』의 특징적인 주장 중 하나는 정치엘리트(정치인, 지식인, 활동가)의 양극화가 대중의 양극화에 선행한다고 본다는 점이다. 이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와 같은 논쟁을 거쳤지만, 저자들은 미국의 정치 양극화가 대략 1970년대에 정치엘리트 사이에서 시작되어 1980년대에 유권자 전체로 퍼졌다고 본다. 물론 유권자들의 당파적 적개심과 지도자의 타협 거부는 상호 피드백 효과를 발휘한다. 그렇지만 일차적으로 그 메커니즘은 위에서 아래로 작동한다. 정치엘리트는 열성당원의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 양극화의 메시지를 보내고 비타협적 태도를 취한다. 지지자는 이런 메시지 때문에 입장을 바꾸고, 비타협적 태도를 확산시킨다. 단적인 예를 들어 보면, 트럼프 대통령이 (대통령선거 관련 이슈가 불거지면서) 친러시아적 메시지를 보냈기 때문에 지지자들이 입장을 바꾼 것이지, 그 역은 아니다.
 
 

2) 정치 양극화의 원인은 무엇인가: 정치 양극화와 경제적 불평등

정치 양극화를 논할 때 그 원인으로 점증하는 경제적 불평등을 꼽는 논자를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위의 [그림1]을 살펴보면, 의회 내 초당적 협력은 1950년 시점에 정점에 올라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고, 시간이 흐를수록 쇠퇴의 속도가 빨라진 것으로 보인다. 

위의 경제적 평등을 나타낸 그림과 비교해보면, 초당적 협력의 쇠퇴는 시기적으로 좀 더 이른 시기부터 발생한 듯 보이지만, 1980년대 이후 정치 양극화나 경제적 불평등이 빠른 속도로 악화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시간이 지날수록 정치 양극화와 경제적 불평등은 고도의 상관관계를 갖는다는 사실도 분명하다.  

정치 양극화를 설명하는 다른 요인도 있다. 각 정당의 기존 정치인에게 유리한 선거구 조정(게리맨더링)이나 정치자금 관련 제도의 변화도 한 요인으로 꼽힌다. 또 ‘황색 저널리즘’(선정주의)의 대표자격인 폭스뉴스나 트위터와 같은 매스미디어 환경의 변화가 정치 양극화를 부추긴다고 평가된다. 그런데 이러한 요인들의 인과관계는 다소 복잡하다. 예컨대 정치 양극화 때문에 선정주의적 언론이 활개를 치는 것인지, 아니면 선정주의적 언론 때문에 정치 양극화가 나타나는 것인지 확언하기 쉽지 않다. 

종합해보면, 정치엘리트들이 선거 당선과 같은 자기 이익을 실현하기 위해 정치 양극화를 선도했고, 점증하는 불평등이 정치 양극화를 이끄는 인민주의적 정치 흐름을 강화했으며, 정치제도나 매스미디어의 변화가 이러한 흐름에 편승하거나 상호강화 효과를 발휘하게 했다고 볼 수 있을 듯하다. 또 하나 덧붙이자면, 미국의 대불황 시기를 되돌아볼 때, 경제위기가 발생한다고 해서 반드시 정치 양극화가 심화하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 이때는 초당적 협력의 상승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구조적 위기에 직면하고 뉴딜과 케인스적 합의와 같이 얼마간 실행가능한 경제적 대안도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 부닥치게 된다면, 진정한 문제는 회피한 채 상대 정치세력 때문에 이 모든 문제가 발생했다는 식의 인민주의적 정치세력이 창궐하고, 허구적 쟁점을 둘러싼 정치세력 간 갈등이 폭발할 개연성이 커지게 될 것이다. 
 
 

3) 정치 양극화의 결과는 무엇인가

이러한 정치 양극화의 결과로 의회 내 ‘초당적 협력’은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위의 [그림1]을 보라.) 공화당 출신으로 1967년부터 1984년까지 상원의원을 했던 하워드 베이커는 “상대방이 옳을지도 모른다”는 태도를 항상 견지함으로써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위에서 레비츠키와 지블렛이 지적했던 것처럼 “나는 반드시 이겨야 하고, 너는 반드시 져야 한다”는 태도에서는 합리적 조정이 불가능해진다. 이는 의회와 행정부의 기능 정지를 낳고, 열성 지지자층에 속하지 않는 대중이 품는 정치나 정부에 대한 냉소주의를 한층 더 강화한다.
 
 

4) 정치 양극화를 주도한 정치세력은 공화당인가, 민주당인가 

오바마(2009~2017)와 트럼프(2017~2021) 시기는 정치 양극화가 극에 달하는 시기였다. 이 때 6개 주요법안에 대한 투표에서, 각 행정부는 여당에서는 95% 지지를 받았으나, 야당에서는 3% 지지를 받았다. 자기 당에 대해서는 100% 지지, 다른 당에 대해서는 0% 지지가 정치 양극화의 최고점이라고 한다면, 거의 최고점에 도달했다고 말할 수 있다. 

양당 모두 정치 양극화에 책임이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겠으나, 이 책에 담긴 또 하나의 특징적인 주장은 양극화가 불균형적이라고 평가한다는 점이다. 즉 본질적으로 공화당에 큰 책임이 있다고 평가한다. 안건마다 민주당은 대체로 중도좌파적 입장을 취했다면, 공화당은 꾸준히 극단적인 방향으로 움직였다. 달리 말해 공화당 내부에 점증하는 보수주의 또는 인민주의가 양극화의 주범이라는 뜻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등장은 이러한 공화당의 극단주의화를 상징할 것이다. 

지금까지 미국이라는 사례를 통해 정치 양극화의 여러 측면을 살펴보았다. 이로부터 한국 정치에 관한 몇 가지 질문을 도출해 볼 수 있다. 첫째, 한국의 정치 양극화는 어느 정도 수준에 도달한 것인가. 오바마-트럼프 시기의 최고점과 비교할 때, 한국 역시 민주주의가 무너질 수 있다는 위험을 느낄만한 수준에 올라왔는가. 둘째, 누가 정치 양극화를 주도하고 있는가. 미국과 마찬가지로 정치인, 지식인, 활동가와 같은 정치엘리트가 주도하고 있는가. 그리고 어떤 정당이 주도하고 있는가. 이러한 문제에 대한 인식은 한국 사회운동의 향방을 결정하는 데 있어 매우 중대한 쟁점이다. 
 
 

2. 한국 새 행정부의 출범과 정치 양극화 

 
 
필자는 한국의 정치 양극화 문제에 대해 2020년 시점에서 문재인-민주당 정부가 ‘문민독재로 폭주할 위험이 있다’고 평가한 바 있다.

“문 정부 3년의 경험을 볼 때, 민주당 10년 집권이 한국 사회를 어떻게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위기로 이끌고 갈지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또한 난폭한 친문 팬덤 정치와 시민운동의 파당적 재편 속에서 비판적 사회운동도 약화, 침체되거나 심지어 소멸될 수도 있다. 이러한 미래를 염두에 둘 때, 더더구나 사회운동, 노동자운동은 문 정부의 폭주를 비판, 견제하는 역할을 포기할 수 없다. 현재의 윤 총장 징계, 공수처 출범을 둘러싼 첨예한 대립 국면부터 2021년 보궐선거 국면까지 사회운동, 노동자운동은 ‘문재인 정부 심판’, 즉 ‘문민독재로 폭주하는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을 저지해야 한다’라는 기조로 초지일관하게 대응방안을 찾아야 한다.” 

다시 말해, 문재인 대통령의 청와대와 민주당이 ‘폭주’라고 표현할 수 있을 만큼 정치의 극단화를 이끌고 있으며, ‘문민독재’라는 표현이 나올 수 있을 만큼 민주주의를 위협한다고 평가했다. 그렇다면 그로부터 2년이 지난 현재, 한국의 정치 상황은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1) 대중의 정치 양극화 

먼저, 대중의 정치 양극화가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르렀냐는 문제부터 살펴보겠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한국의 많은 유권자가 자신이 이념적으로는 ‘중도’라고 규정하면서도, 반대 정당에 대해서 정서적으로는 매우 강한 불쾌감을 보이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는 대중의 정서적 양극화가 매우 높은 수준으로 전개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데, 이것이 자신을 ‘중도’로 규정하는 것과 어떻게 짝을 이루는지 해석이 필요해 보인다. (즉 ‘나는 중도인 반면, 반대당이나 그 지지자들은 극히 불쾌한 세력’이라는 인식 말이다.)

먼저 국회 입법조사처가 발표한 「제20대 대통령선거 분석」(2022년 8월 26일)에 따르면, 유권자가 자기 자신의 정치이념 성향을 어떻게 스스로 인식하는지를 보여주는 이념분포는 최근으로 올수록 중도를 중심으로 수렴된다. 반면 정서적 차원에서는 또 다른 측면을 읽어낼 수 있다. 이번 대선에서 다른 선거와 비교해 지지하는 후보에 대한 호감도가 상대적으로 낮은데, 특히 상대 후보에 대한 호감도가 2007년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다만 지지후보와 상대 후보 사이의 호감도 차이가 급증하지 않은 이유는 지지후보에 대한 호감도가 하락했기 때문인데, 지지후보에 대한 호감도가 낮게 나타나는 것도 2022년 대선의 특징 중 하나였다. 이는 이번 선거가 정책의제에 대한 논쟁보다는 상대 후보에 대한 네거티브 캠페인에 집중된 선거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최근에는 정치적 양극화의 정서적 차원에 주목하는 연구들이 제출되고 있다. 김기동, 이재묵의 논문에서는 정서적 양극화에 대한 한국의 사례를 검토한다. 논문에서는 최근 많은 국가에서 애착에 기반한 집단정체성, 즉 지지정당이 자신의 정체성 중 하나로 인식되고 반대 정당에 대한 부정적 태도를 유발하는 정서적 양극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심화되고 있는 현실을 지적한다. 그리고 이런 정서적 양극화가 한국에서도 나타나는지에 관해 통계분석을 실시한다. 통계분석의 결과, 한국 유권자들 사이에서도 정서적 양극화의 패턴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위의 미국 사례에서도 언급한) 결혼에 대한 통계를 보면 다음과 같다. 
 

응답자들은 “선생님께서 곧 결혼을 하신다고 가정했을 때, 다음의 정당 지지자와 결혼을 하시겠습니까?”, “이번에는 선생님의 자녀가 곧 결혼을 한다고 가정해봅시다. 만약 자녀분께서 다음의 정당 지지자와 결혼을 한다면, 선생님께서 부모로서 어떻게 느끼실 것 같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전자에 대해서 ‘절대 결혼하지 않을 것이다’(1)에서 ‘결혼하는데 전혀 문제없다’(5)의 응답범주 중 하나를, 후자에 대해서 ‘매우 언짢다’(1)에서 ‘매우 기쁘다’(5)의 응답범주 중 하나를 선택했다. 

표에서 나타나듯 내집단 정당 지지자와의 결혼에서는 긍정적으로, 외집단 정당 지지자와의 결혼은 부정적으로 인식한다. 더욱이 두 정당의 지지자 중 50%이상이 외집단 정당 지지자와는 절대 결혼하지 않을 것이라 답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자녀의 결혼에 대해서도 외집단 정당 지지자와 자녀가 결혼한다면 언짢을 것이라는 응답이 50%를 넘고 있다.
 
 

2) 이념적 중도라는 자기인식과 정서적 양극화를 어떻게 해석할 수 있나

이런 현상과 관련해 미국의 저널리스트 에즈라 클라인의 『우리는 왜 서로를 미워하는가』(2020)를 참고해볼 수 있다. 클라인은 미시간주립대학교의 정치학자 코윈 스밋의 논문을 인용하면서, 자칭 무당파라 주장하는 사람들이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과거의 당원보다도 예측 가능하게 민주당, 공화당 중 한 당에 투표한다고 말한다. 이들이 무당파라 자신을 지칭하는 이유는 이것이 개인 브랜드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상대방에게 좋은 인식을 심어주려 할 때, 무당파라 지칭할 가능성이 60%나 된다는 연구를 제시한다. 이렇게 무당층이라는 답변이 높게 평가되는 이유는 본질적으로 당파성이 부정적으로 인식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이들은 특정 당에 투표한다. 이 지점에서 클라인은 ‘부정적 당파성’을 핵심 개념으로 제시한다. 이는 지지하는 당에 대한 긍정적 감정이 아니라 반대하는 당에 대한 부정적 감정에서 기인하는 당파적 행동을 말한다. 2016년 여론조사 전문 기관인 퓨 리서치 센터가 실시한 한 조사에 따르면, 자칭 무당파 유권자들은 부정적인 동기에 더 이끌렸다. 공화당이나 민주당 성향을 보이는 대다수 무당파 유권자들은 자신의 성향에 대한 주된 이유를 설명할 때 상대 당의 정책이 나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대조적으로 어느 당의 정책을 지지하기 때문에 그 당을 선택했다고 말하는 사람은 각 집단의 3분의 1에 불과했다.

한국은 어떨까. 클라인처럼 무당층이라는 답변이 개인의 사회적 관계에서 비롯됐다는 분석도 고려할 수 있다. 또한 이번 대선에서 중요한 이슈로 부상한 경제회복, 부동산, 청년·여성 지원, 양극화 완화 등에 대해서는 두 후보의 정책 공약이 시간이 지날수록 수렴하는 양상을 보인 것과도 관련이 있어 보인다. 즉, 주요한 사회경제적 정책에 있어서는 유권자 사이에 대략의 합의가 있다는 것으로 해석해 볼 수 있겠다. 

정서적 양극화와 관련해 제시된 ‘부정적 당파성’에 관해서는 「제20대 대통령선거 분석」의 유권자 투표 동기 조사를 참고할 수 있다. 조사에 따르면, ‘싫어하는 후보가 당선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투표하는 부정적 투표가 진보층 29.6%, 보수층 23.2%, 중도층 34.7%로 나타났다. 이는 19대 대선의 각각 12.8%, 16.9%, 19.5%와 비교해 상당히 상승한 수치로 부정적 당파성이 그만큼 강화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3) 한국의 정당 양극화, 어떤 정당이 주도했나 

그렇다면 한국의 정당 양극화는 누가 주도했냐는 질문으로 넘어가자. 『업스윙』과 유사한 방법을 사용하여 장기간에 걸쳐 한국 정당의 양극화를 평가하는 연구는 찾기 어렵다. (한국의 경우에는 쿠데타와 군부독재로 인해 의회민주주의가 실질적으로 중단된 시기를 고려해야 하고, 또 국회의 기명투표 자료는 16대 국회[2000~2004년] 후반부터야 공개되기 시작했다는 어려움이 있다.) 다만 16대에서 18대까지, 즉 2000년부터 2012년까지 한국 국회의 기명투표를 분석해 정당 양극화를 연구한 사례 정도를 찾을 수 있었다. 

이 분석의 핵심적 결론은 다음과 같다. 첫째, 분석 기간에 정당 양극화는 심각한 수준으로 진행되었다. 둘째, 정당 양극화의 중대 분기점은 2003년 열린우리당의 창당이었다. 즉 정당 양극화는 유권자의 양극화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정치엘리트에 의해 추동되었다. 셋째, 정당 양극화는 열린우리당과 민주노동당에 의해 비대칭적으로 추동되었다. 한나라당의 이념적 위치는 대동소이했던 반면, 열린우리당과 민주노동당이 이념적 스펙트럼을 급격하게 ‘진보’ 쪽으로 확대했다. 다만 연구 대상으로 삼은 기간이 짧으므로, 이러한 추세가 일시적 현상에 그칠지, 미국처럼 장기적으로 유지, 강화될지는 아직 판단하기 이르다.  

연구가 대상으로 삼은 시기는 김대중 정부 후반부부터 이명박 정부 후반부까지다. 그런데 특히 노무현 대통령의 집권 직후, 2003년 열린우리당 창당을 기점으로 급격한 정당 양극화가 나타났다는 분석은 우리가 직관적으로 짐작할 수 있는 바와 일치한다. 

그렇지만 이 연구는 열린우리당 창당 이후 정당 양극화의 구체적인 전개 양상에 대한 설명이나 해석이 없다. 이에 대해서는 별도의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나아가 이 연구가 열린우리당을 일종의 급진적 ‘진보’로 분류하는 바에 대해서는 분명한 이견이 있다. 그러나 이 글에서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기에는 지면에 한계가 있으므로, 간단히만 살펴보겠다.  
 
 

4) 열린우리당과 정치 양극화: 개혁인가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인가 

열린우리당은 2003년 11월부터 2007년 8월까지 대략 3년 9개월 동안 존재했던 단명한 정당이다. 또한 3년 9개월 동안 당 대표가 10여 차례 바뀌어, 이들의 평균 재임기간도 4.8개월에 불과할 정도로 혼란을 거듭했다. 하지만, 그 주류인 친노세력은 현재까지 이어져 한국 정치에 심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노무현 대통령이 등장할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는 새천년민주당의 국민참여경선제 도입이었다. 김대중 정부 말, 김대중의 아들과 측근의 비리(이른바 ‘삼홍비리’) 사건이 연이어 터지고, 새천년민주당이 2001년 10월 재보선에서 참패한 후, 이대로 가다간 2002년 대선에서도 패배한다는 위기감이 폭발했다. 이때 김대중 대통령이 당 총재직에서 사퇴하고, 국민참여경선제가 도입되었다. 

경선을 거치며 ‘노무현을 사랑하는 모임’(노사모)은 대규모 정치결사체로 변모해 총 지원 선거인단의 21%에 달하는 40만 명의 경선인단을 동원할 수 있는 강력한 원외세력으로 성장했다. 그런데 2002년 4월 노무현 후보가 확정된 후, 오히려 노 후보의 지지율이 계속 내려가고, 심지어 ‘노무현 후보 사퇴, 정몽준과의 후보 단일화’를 주장하는 당내 세력이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노무현 지지 집단에서 ‘국민후보 지키기 2500인 모임’이 등장하고, 또 ‘인터넷 정당’을 표방한 개혁국민정당이 창당했다. 개혁국민정당은 발기인 수가 3주만에 민주노동당 당원 수를 능가할 정도로 노사모 그룹이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당시 정치권 외부에 있던 유시민, 문성근과 한나라당에서 탈당한 김원웅 의원이 지도부를 맡았다. 개혁당은 민주당의 위성정당이라기보다는 더 정확히 말해 노무현 후보의 사당(私黨)에 가까웠다. 이로써 기존 정당을 우회하여, 정치인과 사적인 지지집단이 결합하는 인민주의(포퓰리즘)적 정치스타일이 본격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새천년민주당은 자당 후보가 대선에 승리한 후 오히려 심각한 내홍에 직면했다. ‘동교동계’(구 DJ파)로 대표되는 구주류와 ‘친노파’로 대표되는 신주류 사이의 권력경쟁이 폭발했다. 신주류는 정치개혁, 정당개혁을 명분으로 내세웠으나, 예를 들어 ‘지구당 위원장 제도 폐지’는 구주류가 장악하고 있는 지구당 위원장의 권력을 뺏으려는 의도를 담고 있었다. 이러한 갈등은 2003년 9월의 당내 폭력사태로 이어지고, 2003년 11월 열린우리당이 창당하게 되었다. 열린우리당은 새천년민주당 탈당파 40명, 한나라당 탈당파 5명, 개혁당 2명이 참여해 47명의 소수정당으로 출발했으나,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건을 계기로 오히려 큰 힘을 받아 2004년 총선에서 152석이라는 단독 과반의석을 차지하게 되었다. 

열린우리당은 단독 과반을 차지한 후, 첫 정기국회에서 이른바 ‘4대 개혁입법’을 추진했다. 4대 개혁입법이란, 국가보안법 폐지, 사립학교법 개정, 언론관계법 개정, 과거사 진상 규명법을 말한다. 4대 개혁입법의 추진과정을 검토해보면, 노무현 정부와 열린우리당 시기에 개시된 정치 양극화의 특징적 양상을 가려낼 수 있다.

먼저, 이 중에서 언론관계법은 1개 사업자의 시장점유율이 전국 발생 부수 기준 30% 이상이거나 3개 사업자의 점유율 합계가 60% 이상일 때 시장지배적 사업자로 규정해 규제하겠다는 내용과 특정인의 신문사 소유 지분에 제한을 두겠다는 내용이 담겼다. 다만 당론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최종적으로 신문사 소유 지분 제한제 도입은 포기했다. 2005년 12월, 4대 개혁입법 중에서 언론관계법이 제일 먼저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그러나 2006년 6월 헌법재판소는 시장지배적 사업자 규제에 대해 위헌 판결을 내렸다. 또한 언론중재위원회에서의 간단한 소명만으로 정정보도를 청구할 수 있도록 한 내용에 대해서도 법원의 영역을 침해한다고 해석해 위헌 결정을 내렸다. 

다음으로 사립학교법은 사학재단에 교사와 학부모가 참여하는 운영위에서 이사 정수의 1/3 이상을 추천하는 개방형 이사제를 도입한다는 게 골자였다. 애초 열린우리당 당론은 재단 이사회의 교직원 임명권을 교장에게 주는 방안도 포함했으나, 이 부분은 철회했다. 사립학교법은 2005년 12월 김원기 국회의장의 직권상정으로 몸싸움 끝에 통과되었다. 그러나 사립학교법 역시 재단의 권한을 과도하게 침해한다는 위헌 논란을 벗어날 수 없었고, 결국 열린우리당 자신이 사립학교법의 위헌 소지를 없앤다는 명분으로 2007년 한나라당과 합의하여 재개정안 통과시켰다. 재단과 학교운영위원회에서 각각 동수(또는 과반수)로 ‘개방형이사추천위원회’를 구성하며, 이사 정수의 3분의 2 이상의 찬성과 관할청의 승인을 받을 경우 이사장 친인척이 주요 직책을 맡게 한 것이다. 

과거사진상규명법의 경우, 2004년 10월 열린우리당 천정배 원내대표가 잠정안을 발표했는데, 조사대상은 크게 네 범주로 ‘항일 독립운동’, ‘광복 이후 한국전쟁 전후에 이뤄진 민간인 집단 희생사건’, ‘건국 이후 권위주의 시대의 인권침해 사건’, 그밖에 ‘위원회가 필요하다고 인정한 사건’이었다. 2005년 12월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 실무회담에서 △과거사 진상조사기구를 독립된 국가기구로 하고 △위원은 13명으로 하되 모두 국회에서 선출하기로 하는 데 합의했다. 그러나 열린우리당 지도부는 진상조사위원 13명은 대통령이 임명해야 한다는 이유로 협상안을 거부했고, 한나라당 지도부는 진상조사기구를 독립적 국가기구가 아닌 학술원 산하의 민간기구로 설치한다는 의견을 고수하며 여야 합의에 실패했고, 법안도 불발로 끝났다.

국가보안법 폐지는 2004년 10월 열린민주당 의원 전원의 이름으로 공식 발의됐다. 한나라당 역시 소속 의원 111명의 이름으로 개정안을 발의했는데, 전면 폐지는 아니고 7조 찬양·고무 개정, 10조 불고지죄를 삭제하는 안이었다. 2004년 12월 열린우리당 지도부는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 및 지도부와 ‘국가보안법의 민주주의를 탄압하는 부분은 개정한다’고 합의했다. 여당 단독으로 처리하지 않는다는 것도 조건으로 걸었다. 열린우리당 내에서 50~60명의 의원이 전면적 폐지에는 부담을 느끼는 당내 분위기가 드러나면서 △고무 △찬양 △동조 △회합 △통신 등 5대 독소조항을 제거하는 것을 우선 추진한다는 방침이 나왔다. 이때부터 열린우리당은 반대파와 강경파로 극심하게 갈렸다. 여야 합의안을 추인하기 위한 열린우리당 의원총회는 강경파들에게 의해 난장판이 벌어졌고 결국 열린우리당 이부영 의장이 사퇴했다. 국보법 폐지, 개정 모두 불발로 끝났다. 

이에 덧붙여 열린우리당은 2004년 3월 2일 수도이전(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특별법)을 추진했으나, 2004년 10월 헌법재판소는 위헌 결정을 내렸다. 결정문은 “서울이 수도라는 점은 관습헌법으로 성립된 불문헌법에 해당된다”, “따라서 정부는 헌법 개정절차를 거치지 않았으므로 헌법상 국민투표권을 침해한 위헌”이라고 밝혔다. 

이처럼 열린우리당이 수도이전과 4대 개혁입법을 추진하는 과정을 살펴보면 몇 가지 시사점을 찾을 수 있다. 첫째, 4개 개혁입법이 표적으로 삼은 세력은 ‘보수언론’(조중동), ‘사학재단’, ‘친일독재’ ‘반민족·반통일’ 정치세력(박정희-박근혜)이다. 이는 오늘날 386식의 전형적이고 진부한 역사인식의 단초를 보여준다. 즉 ‘친일세력이 독재세력으로 변신했으며, 이들이 언론과 학교를 장악하고 통일을 가로막고 있는 기득권 집단’이라는 인식 말이다. (현재는 이른바 ‘토착왜구론’으로 계승되었다고 볼 수 있다. 4개 개혁입법은 검찰 관련 내용이 없다는 점만 빼면, 대체로 문재인 정부 시기 민주당의 역사인식과 일치한다.) 

둘째, 기득권 집단의 카르텔을 깨기 위해서는 국가의 강제력을 기초로 한 징벌적인 수단이 필수적이라는 인식이 두드러졌다. 예를 들어 막강한 언론사의 경우 사주의 소유 지분을 10% 이하로 제한하고, 사학재단의 경우 교직원 임면권을 박탈하는 식이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아무리 개혁이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국가가 헌법을 초월하는 권한을 행사할 수 없다는 위헌 논란에 휩싸였고, 일부는 실제로 위헌 소송에 들어가 헌법재판소로부터 위헌 판결을 받기도 했다.
 
셋째, 4개 개혁입법에서 여야 합의가 가능한 선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국가보안법이나 과거사진상규명법도 박근혜 대표 체제의 한나라당과 합의 가능한 선이 있었다. 그런데 그때마다 매번 열린우리당 내부에서 강경파와 협상파가 강렬하게 대립했다. 그럴수록 오히려 법안이 공중분해되고, 열린우리당 지도부가 깨지고, 대중적 지지도도 계속 하락하는 결과를 낳았다. 

하나만 덧붙이자면 새천년민주당 말기에 국민참여경선제도를 도입할 당시, 당 총재 1인의 막강한 권한을 제한한다는 취지로, 의원총회에서 직선으로 선출하는 원내총무의 권한을 확대하고 당의 주요 정책에 의결권을 의원총회에 부여하는 변화가 있었다. 그런데 강경한 원내 지도부와 초선 의원이 결합할 경우, 의회 내 비타협적 강경기류를 강화할 여지가 커지기도 한다. 상임위를 중심으로 오랜 관록을 지닌 의원들이 토론과 협상을 통해 합의안을 도출하는 대신, 원내 지도부의 일사불란한 지휘 아래 초선의원들이 강경 대응을 주도해 나간다는 말이다. (열린우리당은 그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열린우리당은 4대 개혁입법 추진과정을 통해 오히려 힘을 잃고 2006년 5월 지방선거에서 대패했다. 광역단체장은 한나라당(박근혜) 12개, 민주당(한화갑) 2개, 열린우리당(정동영) 1개로 열린우리당은 오직 전북에서만 한 곳 얻는 데 그쳤다. 기초단체장도 한나라당이 230개 중 155개, 67.4%를 획득했다. 지방선거 결과, 열린우리당은 해체 수순에 들어갔고, 2007년 8월 대통합민주신당의 창당으로 소멸했다.   

열린우리당의 소멸 이후 민주당 계보가 단독 과반을 차지한 것은 그로부터 12년만인 2020년이다. 2008년(18대) 선거는 한나라당(강재섭) 153석, 통합민주당(손학규·박상천) 81석, 2012년(19대) 선거는 새누리당(박근혜) 152석 민주통합당(127석)으로 한나라당·새누리당이 단독과반을 차지했다. 2016년(20대) 총선은 더불어민주당(김종인) 123석, 새누리당(김무성) 122석으로 ‘옥새파동’의 새누리당이 크게 의석이 줄었으나, 민주당 역시 약진에 실패했고, 국민의당(안철수·천정배)이 20석을 얻었다. 2020년 총선(21대)에서야 더불어민주당(이해찬) 180석, 미래통합당(황교안) 103석으로, 민주당 계보가 단독과반을 훨씬 뛰어넘는 압도적 의석을 차지하게 되었다.

앞에서도 간략히 언급했듯이, 문재인 정부 시기 민주당의 행동양식은 열린우리당과 여러 모로 닮았다. 4대 개혁입법과 문재인 정부의 핵심 법안에서도 유사점을 찾을 수 있다. △검찰개혁의 이상적인 명분이 현실에서는 집권세력의 비리에 대한 검찰 수사를 막는 사법방해와 (사법부가 아닌 행정부에 속한) 경찰의 권력비대화로 이어졌다는 사실이나, △언론보도에 대해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도입하려는 집권세력의 시도가 언론의 자유에 대한 심대한 침해라는 문제제기에 부딪쳤던 사실이나, △정치개혁이라는 훌륭한 명분에도 불구하고, 게임에 참여하는 다른 당사자의 의견을 무시한 채 다수의 뜻대로 규칙을 변경함으로써 강력한 반발을 낳았다는 사실 등이 그러하다.

이처럼 17대(2004~2008)의 열린우리당과 21대(2020~현재)의 더불어민주당의 행동양식은 매우 공통점이 많고, 이 시기 대중의 당파적 적개심이 더욱 강렬해졌다. 따라서 필자는 지난 10년간 정치 양극화가 한층 더 심화하였고, 이를 주도한 세력은 민주당이었다는 결론이 도출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5) 소결: 새 행정부 출범과 정치 양극화 

지난 2021년 보궐선거와 2022년 대선 과정에서는 극심한 형태의 네거티브 캠페인이 절정에 이르렀다. 민주당과 그 지지자들의 경우 2021년 서울·부산시장 보궐선거에서는 뉴스공장 김어준 씨가 제기한 이른바 오세훈 후보의 ‘생태탕’ 의혹에 집중했고, 2022년 대선에서는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의 부인 관련 의혹에 집중했다. 특히 2022년 대선에서 민주당 지지자들이 상대방 후보 부인을 조롱하고자 했던 여러 행동에서 아주 격렬한 당파적 증오심리를 읽어낼 수 있다. (당시 민주당 이재명 후보의 대장동 의혹 제기도 네거티브 캠페인이 아니냐는 문제제기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공무와 직접 관련된 권력형 비리사건을 후보자 부인의 과거 개인사와 동급의 문제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앞서 국회 입법조사처의 분석과 유사하게도) 여론조사를 보면 주요 후보의 ‘비호감도’가 60%대 전후로 나오기도 했는데, 여기서도 당파적 적개심을 읽어낼 수 있다. 특히 정의당 심상정 후보의 비호감도가 가장 높은 결과가 나오기도 했는데, 이는 민주당, 국민의힘 지지층 양자로부터 배척을 받았다는 뜻으로 읽힌다.

다른 한편, 11월 14일 주호형 국민의힘 원내대표가 “새 행정부가 들어서 6개월 동안 정부발의 법안이 단 한 건도 본회를 통과하지 못했다”고 밝히면서 언론이 팩트체크에 들어갔다. 기사를 정리해보면, 1987년 이후 8번 중 5번 여소야대 상황에서 새 행정부가 출범했다. 그중에서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정부의 경우 통과된 비율이 각각 18.6%, 14.3%, 7.5%인 반면, 이명박, 윤석열 정부는 각각 2.1%, 0%였다. 전반적으로 하락하는 추세를 확인할 수 있으면서도, 동시에 (열린우리당 창당 이후 시점인) 2000년대 후반 이후 보수 정당이 대통령이 되고 민주당 계열이 국회 다수당이었던 경우, 그 비율이 크게 떨어진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상황이 이렇게 치닫게 된 데에는 여러 정황적 요인도 작동했다. 대선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지방선거·보궐선거 국면에 돌입하여, 대선 시기의 격렬한 대립이 재연되었다. 또한, 보궐선거에서 당선된 이재명 후보가 민주당 대표로 당선되는 한편 대장동 사건에 대한 수사가 본격화되면서 여야 대치 구도가 이어지게 되었다. 최근 들어 남욱, 유동규, 김만배 씨가 조금씩 입을 열면서 이재명 대표에 대한 수사가 불가피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이재명 대표 체제의 민주당은 더욱 격렬히 반발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한 윤석열 정부는 문재인 정부의 검찰정책, 대북정책, 원전정책과 분명히 다른 입장을 보이고 있는데, 이는 서해 공무원 사건, 월성 원전 문건 삭제 사건에 대한 수사와 이어지면서 전 정부 인사나 야당 측의 격렬한 반응을 낳고 있다. 야당은 대장동 사건이나 서해공무원, 원전 문건 사건에 대한 수사를 모두 “정치보복”으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 야당 측에서 제시하거나 적극 수용·채택한 정치 이슈는 극히 지엽적인 문제이고, 대체로 지난 시기 네거티브 캠페인의 테마를 따라가고 있다. 최근의 예를 들어보면, △ 윤 대통령과 한동훈 법무부장관이 강남에서 늦은 밤까지 술을 마셨는가, 아닌가 △ 윤 대통령이 미국 바이든 대통령을 거명하며 비속어를 사용했는가, 아닌가 △ 김건희 씨가 캄보디아에서 찍은 사진이 빈곤 포르노인가, 아닌가 △ 이때 조명을 사용했는가, 아닌가 △ 대통령 관저를 결정할 때 역술인 천공의 입김이 작용했는가, 아닌가 등등.

이러한 상황을 종합하면, 한국의 정치 양극화와 당파적 적개심은 최고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고, 이는 (정치인, 지식인, 정치활동가를 포함한) 정치엘리트들이 주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 결과 선거 시기의 격렬한 네거티브 캠페인이 일상화되고, 의회에서 협력은 실종된다. 정치 양극화가 정당 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증폭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민주당의 인민주의(포퓰리즘)가 그 일차적 추동력이라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정치 양극화에 있어 한국 정치의 상층부에 위치한 정치 엘리트에게 일차적 책임이 존재한다고 전제할 때, 이들의 활동 조건으로서 정치체제, 즉 제왕적 대통령제의 문제를 간과할 수 없다. 제왕적 대통령제는 정치 양극화와 결합해 파괴적 효과를 낳는다. 적군과 아군으로 나눠진 세계에서 논의와 타협이라는 정치적 과정이 제대로 작동할 리 없는 데다, 승리했을 시 막강한 권한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은 상대방을 꺾고 권력의 상층으로 가고자 하는 욕망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호작용 속에서 정치엘리트는 대중을 파당적으로 동원하고, 이 과정에서 대중의 정치적 역량은 점차 침식된다. 따라서 한국 정치의 위기를 분석하는 데 있어 제왕적 대통령제의 분석 역시 중요하다.
 
 

3. 제왕적 대통령제, 비판의 기원

 
 
제왕적 대통령제라는 용어는 미국에서 탄생했다. 그 표현은 1960년대부터 유행하기 시작하여, 역사학자 아서 슐레진저의 1973년 저서의 제목(『Imperial Presidency』)이 되었다. 제왕적 대통령제를 둘러싼 토론의 배경에는 1972년 워터게이트 사건이 있었다. 저자의 우려는 워터게이트 사건과 같이 대통령의 권력을 통제하거나 억제할 수 없어, 그 권력이 헌법적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는 것이었다.

미국이 건국된 뒤 1930년대까지도 대통령의 참모·직원은 소수에 불과했고, 대부분 의회 의사당에서 근무했다. 대통령도 의회 의사당의 ‘대통령의 방’으로 출근하여 업무를 봤다. 그런데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의 임기(1933~1945년) 동안 커다란 변화가 나타났다. 대불황과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하여, 대통령 사무실의 중요성이 크게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적극적으로 정책자문단(브레인 트러스트)을 구축했다. 또한 뉴딜을 거치며 집행기구가 성장해 1939년 대통령실의 창설로 이어지고, 전통적으로 소규모에 불과했던 대통령 직속의 참모·직원이 급격하게 팽창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전후에 백악관 웨스트윙과 지하실뿐만 아니라, 백악관 밖의 아이젠하워 행정동까지 채워 나간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에서 제왕적 대통령제는 다음과 같은 상황을 지칭하게 된다. 

△ 참모·직원의 숫자가 증가하면서, 대통령 개인에 대해 충성심을 가진 사람들이 대개 그 참모·직원으로 임명되며, 그들은 외부에서의 승인이나 통제에 종속되지 않는다. 
△ 대통령 주변에 설치된 자문위원회의 대다수는 주요 내각부서를 보완하는데, 이럴 경우 내각부서의 영향력이 감소된다. 대표적으로, 국가안보위원회, 예산관리실이 그러한 사례다. 
△ 상원은 내각을 임명할 때는 “자문과 동의”를 행사하지만(이는 헌법에 명문화되어 있다), 대통령실 소속 직원의 임명에서 “자문과 동의”를 행사하지 못한다. (아주 소수의 예외만 있다.) 그 결과, 대통령실의 직원은 오로지 대통령에 대해서만 책임을 지지, 의회에 대해서 책임을 지지 않는다. 
△ 대통령은 헌법으로 명문화된 조항에 기초를 둔 권한이 아니라, 암묵적인 합의에 따라 권한을 행사한다. 그러한 권한 중에서 특히 외교정책과 전쟁에 관한 대통령의 권한은 논쟁적이다. 또한 대통령의 비밀유지도 논쟁적이다. (헌법에서는 대통령의 전쟁에 관한 권한이 모호하게 규정되어 있다. 또한 대통령의 비밀유지는 입법부와 사법부에 의한 견제와 균형을 봉쇄한다.) 
△ 시민이 대통령을 직접 선출하는 경우, 책임성은 오직 선거나 탄핵을 통해서만 작동될 수 있고, 일상적으로 의회, 언론, 공중에 대해 책임성이 작동되지 않는다. 

특히 닉슨(1969~1974년)이나 레이건(1981~1989년) 대통령 시기에, 대통령은 ‘궁궐’ 속에 둘러싸여 있었고, 궁궐의 참모들이 의회의 법률이나, 대통령의 행정명령마저 종종 위반하는 행동을 벌였다는 비판이 등장했다. 예를 들어, 슐레진저는 워터게이트 사건 당시 닉슨 참모의 행동을 그 사례로 들었다. 레이건 시절, 국가안보위원회 소속 해병대 중령 올리버 노스는 의회의 금지(볼랜드 법)를 명시적으로 위반하고 니카라과 콘트라스(우익 반군)에게 자금을 제공했는데, 백악관의 ‘하급 신하’도 자신의 지위를 얼마든지 남용하여 엄청난 일을 벌일 수 있다는 게 드러났다. 레이건의 마지막 합참의장 하워드 베이커는 대통령 ‘궁궐’이 더 커지고, 복잡해지면서 백악관의 책임성이 점점 더 사라진다고 지적했다. 

물론, 워터게이트 사건이 터진 후 의회는 대통령의 권력을 제한하기 위한 광범위한 개혁에 착수한다. 1973년 전쟁권한법은 미군을 해외에 배치할 때 의회의 승인을 얻도록 한 메커니즘을 창출했다. (미군의 해외배치가 전쟁을 유발할 수 있고, 대통령이 의회를 우회하여 사실상 전쟁을 개시하는 수단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1974년 예산개혁은 상하원에 예산위원회를 설치하고 의회가 예산편성권도 행사하며, 의회가 예산안을 거부할 경우 연방정부가 업무정지(셧다운)에 들어가도록 했다. 1974년 선거운동자금개혁법은 대통령 선거자금 기부액과 지출액의 한계를 설정했다. 또한 1976년 국가비상사태법은 대통령에게 비상사태 권한을 부여하면서도,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특정한 조건과 의회의 종료 권한을 명시했다. (그렇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비상사태 권한을 악용하여 멕시코 국경장벽 건설을 강행하기도 했다.) 또한 정보기관의 감시활동이나 비밀작전이 대통령의 권력을 심대하게 강화한다는 우려 때문에 정보기관 개혁도 이뤄져서 중앙정보국(CIA)와 연방수사국(FBI)에 여러 제약을 부과했다. 마지막으로 1978년의 정부윤리법은 독립조사국을 설치하여 행정부의 부정행위를 독립적으로 조사함으로써 워터게이트 사건이 반복되는 일을 막고자 했다. 

이러한 일련의 개혁을 거치면서 ‘제왕적 대통령제’에 대한 논란은 어느 정도 가라앉는 듯 보였다. 그러나 역사학자 자카리 캐러벨은 21세기에 들어서, 행정부의 권력이 더 커졌다고 주장했다. 9·11 테러 사건은 제왕적 대통령제로의 변화를 향한 또 하나의 출발점이 되었는데, 위기를 기회로 삼아 국가안보와 국내감시 부문에서 행정부의 권한을 크게 팽창했고, 의회는 이를 비밀리에 승인했다는 것이다. 

대통령의 권한이 강화되는 흐름은 오바마 행정부에서도 이어졌다. 특히 의회의 의사진행 방해가 심해지자 오바마 행정부는 권력 행사를 위한 ‘혁신적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2010년 에너지 법안이 하원에서 부결되자, 오바마는 모든 정부기관이 자동차 연비 기준을 높이도록 지시하는 ‘행정메모’에 서명했다. 2012년 이민법 개혁안이 하원을 통과하지 못하자, 16세 미만으로 학교에 다니거나 고등학교를 졸업했거나 군복무를 마친 이민자의 추방을 중단하는 행정조치를 내놓았다. 또, 이란과의 핵 협정이 상원에서 동의를 구하지 못하자 오바마 행정부는 이란과 ‘행정협정’을 체결한다. 티파티 운동이나 부유한 정치활동위원회(PAC, 합법적인 정치자금 기부단체)의 강력한 영향을 받은 공화당 강경파가 거의 무조건적으로 의사진행 방해를 강행했다는 분명한 사실을 고려하거나, 오바마의 정책을 지지하는 입장이라면 오바마 행정부의 ‘창조적’이고, ‘혁신적’인 조치를 지지할 수도 있다. 이러한 오바마 행정부의 행보는 헌법적 경계를 벗어난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의회가 저지한 법안을 실행에 옮김으로써 대통령의 권한 자제라는 규범을 어긴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면에서 보면 오바마 대통령은 미국 역사상 가장 ‘강력한’ 대통령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결국 의회의 결정취지를 뒤집어엎는 대통령의 행정조치는 트럼프 행정부에서 ‘부메랑’이 되어 되돌아왔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트럼프 행정부는 멕시코 국경장벽 설치를 위해 셧다운을 불사했고, 그 후에는 대통령의 권한에 속한 비상사태 선포를 통해 장벽설치를 강행하려고 했다. 오바마 행정부는 ‘올바른 일’을 위해 의회의 결정 취지를 뒤엎는 대통령의 권한을 행사했다고 주장하고 싶겠지만, 어느 대통령이라도 자신이 하는 일은 ‘올바르다’라고 주장할 것이므로, 결과적으로는 나쁜 선례를 남긴 셈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미국에서도 제왕적 대통령제가 여전히 살아남았고, 더 기승을 부리고 있다는 논란이 현재진행형으로 벌어지고 있다. 
 
 

4. 한국의 제왕적 대통령제 

 

1) 제왕적 대통령제의 역사

그렇다면 한국에서 제왕적 대통령제의 시작은 어디인가. 한국은 초대 이승만 대통령부터 그 권한이 막강했다. 애초에 1948년 제헌의회가 구성되었을 당시 입법의원들은 의원내각제를 구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의원내각제 하에서는 자신에게만 집중된 권한을 가질 수 없기에 의원내각제에 반대하고 대통령제를 주장했다. 입법의원 다수가 이승만의 제안을 거절하자 이승만은 정부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승만의 막가파식 주장이었으나, 중간파가 5·10 총선거를 보이콧한 상황에서 이승만마저 정부에 참여하지 않으면 정부의 정당성은 심각한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헌법 조항을 수정해 대통령제가 수립된다. (한국 헌법에 의원내각제적 요소가 있다는 말은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대통령은 비상조치권, 조약의 체결 및 비준, 전쟁선포 및 강화권, 법률안 거부권, 국군통수권, 계엄선포권 등을 가졌다. 비상조치권은 명시적으로 제한규정이 존재했지만 계엄령에 대해서는 어떤 제한규정도 두지 않았다. 또 국회의 가장 본질적 권한인 법률제출권과 예산편성권이 정부에 부여됨으로써 국회는 무력해졌다. 이승만 대통령이 4·19 혁명으로 하야한 뒤, 2공화국에서 잠시 의원내각제로 정치체제가 전환되었으나, 군사쿠데타로 무너지고 다시 대통령제로 회귀했다. 군사정권 시기 대통령의 막강한 권한은 큰 변화 없이 유지됐다.

마침내 군사독재가 끝나고 1987년 민주화를 맞이했다. 그렇다면 민주화 이후 대통령제는 민주적으로 개혁되었을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한계가 있었다.

우선 1987년 6월 항쟁의 주류적 노선이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었기 때문에 대통령제에서 의원내각제로의 전환은 처음부터 배제되었다. (당시 학생운동에서는 아예 제헌의회를 소집해야 한다는 주장도 상당히 강력했다. 그렇지만 전체 운동의 입장은 직선제 개헌으로 흘러갔다.) 대통령 임기를 5년 단임으로 하고, 대통령의 국회해산권을 폐지하고, 계엄에 대한 국회의 통제권을 부여한다는 내용이 새로 들어가기는 했으나, 대통령의 비상조치권, 행정입법권, 개헌발의권, 국민투표 부의권과 같은 대통령의 막강한 권한은 그대로 남았다. 예를 들어 대통령의 비상조치권은 ‘긴급명령, 긴급재정경제처분 및 명령, 계엄과 그 해제’라는 이름으로 그대로 남아 있다. 이러한 권한은 입법부인 국회를 초월하는 권한을 대통령에게 부여한 것이기 때문에 ‘비민주적’ 권한이라고 부를 수 있다. 실제로 과거 이승만 정부나 박정희 정부처럼 ‘비민주적’ 정부가 도입하거나 즐겨 활용했다. 
 
 

2) 제왕적 대통령제의 정치문화적 연원: 『소용돌이의 한국정치』

대통령이 막강한 권한을 가지는 만큼 국회는 주변화되어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1년 광복절 연설에서 “우리 국민 대다수는 자기들의 신문도 갖고 있지 않고 공식적인 대변인도 없습니다”라면서 직접 자유당을 창당해 국회를 장악하고 독재를 유지했다. 박정희 정권은 민주공화당, 전두환 정권은 민주정의당을 각각 활용해 대통령이 국회를 좌지우지했다. 개헌 이후에는 어땠나. 군사정권만큼 직접적이지는 않았으나, 김대중 대통령까지는 대통령이 당의 총재였다. 노무현 정권 이후에는 대통령이 당의 총재를 하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여당이 대통령의 뜻대로 움직이는 행태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따라서 여당이 다수당이 되면, 국회는 행정부의 정책을 그대로 승인하는 소위 ‘통법부’가 됐다. (이런 정치행태는 야당의 강한 반발을 낳을 수밖에 없었다. 이는 제왕적 대통령제가 정치 양극화를 자극하는 한 통로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정부수립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왜 국회는 제대로 된 기능을 하지 못했나. 군사정권 시기에는 물리적 억압이 존재했다고 하더라도, 정부수립 초기와 민주화 이후에는 왜 국회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못했을까. 그레고리 헨더슨의 『소용돌이의 한국정치』는 이에 대해 역사적 설명을 제공한다. 
 

(1) 중앙권력을 지향하는 상승기류

헨더슨이 한국 정치문화에서 문제로 지적하는 핵심은 정점을 지향하는 정치풍토다. 헨더슨에 따르면, 한국은 중앙정부 이외에 중앙권력을 견제할 수 있는 다른 권력의 존재를 허용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다원적 사회로의 발전경로는 막혀있었다. 이렇게 상층부가 사회를 중앙권력의 방향으로 강력하게 이끌었기에 모든 사람은 중앙권력에 도달하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상승의 핵심은 교육이었다. 물론 교육의 확대는 민주주의를 발전시킬 기반이 되기도 했지만, 헨더슨은 교육의 목적이 기본적으로 권력지향이었음을 지적한다. 따라서 교육을 통해 지식인이 되더라도, 이들은 장기적인 이익을 고려하면서 정치인 주위에서 무상으로 봉사하며 권력의 주위를 맴돌았다. 헨더슨은 이런 한국인의 위를 지향하는 움직임을 상승기류라 표현했고, 이런 상승운동을 통해 원자화된 개인들이 상부로 빨아 올려지는 현상을 소용돌이라 표현한 것이다.

이렇듯 모든 사람이 꼭대기와 어떻게든 직접적으로 연결되려 했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집단의 이익을 대변하는 이익단체나 정치적 이념을 공유하는 정당과 같은 집단은 발전할 수 없었다. 헨더슨은 이런 집단을 중간매개집단이라 불렀다. 그에 따르면, 이러한 중간매개집단의 발전은 의회가 발전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요소다. 다양한 집단의 의견이 조율되는 과정을 통해 공론을 형성하는 것이 의회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의견을 제시할만한 집단 자체가 부재했기에 의회가 제대로 기능할 리 만무했다.
 
 

(2) 권력 나눠 먹기

이렇게 상승하는 소용돌이 속에서 중앙권력에 도달한 이들은 최대한 그 권력을 분점하고 싶어 했다. 헨더슨은 해방 후 한국의 국회, 정당, 중앙정보부와 같은 국가기관은 권력분점이라는 목적에 충실했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국민에게도 권력분점이 정당한 것으로 수용됐다. 권력분점이 민주주의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헨더슨이 보기에 한국 정치는 통치에는 책임을 지지 않고, 권력만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큰 문제가 있었다. 그렇지만 한국인들은 이를 인식하지 못했고, 국회는 전문적인 입법 기능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행정부를 억제하는 데 모든 역량을 소모했다. 비능률과 권력투쟁이 격화됐다. 이는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엎친 데 덮쳐 중앙권력 내부에서는 자리싸움도 치열했다. 여기서는 파벌이 중요했다. 당연히 권력만을 지향할 뿐이기에 파벌싸움에서는 계급, 종교, 이해관계, 이념은 중요치 않았다. 권력 쟁취가 유일한 목표였기에 당파 사이에 적의가 조성되면 타협이 불가능했다. 이런 가운데 정당 역시 권력에 대한 접근 채널에 불과했다. 따라서 권력에 대한 더 나은 접근 기회가 제공되면 신의를 저버리는 것도 자유라고 여겼다. 정당이 장기간 이어지지 못한 이유다. 근본적으로는 정당이 이해관계, 이념을 기반으로 형성된 집단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헨더슨의 연구를 정리하면, 한국 사회는 모든 개인이 중앙권력을 지향하면서 이익단체나 정당과 같은 집단이 발전하지 못했다. 이에 따라 대의 정치제도 구축 역시 어려워졌다. 여기에 더해 중앙권력 내부에서는 파벌싸움이 심각했고, 그들 사이의 타협이란 존재할 수 없었다. 논의와 타협이라는 민주주의의 기본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헨더슨은 이를 가장 명쾌하게 치유할 수 있는 것은 다양화라고 말한다. 다양성이 인정되어 여러 조직이 발전할 수 있다면 대의성이 형성되어 중요한 정치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으리라 전망했다. 구체적으로는 정치권력과 경제활동을 크게 기능적으로 분산하고 중앙권력을 지방으로 분산해 지방자치제를 실시할 것을 제언한다. 이로써 중앙이 아니라 지방적인, 개인적인 기득권이 형성되어야 점차 대의제도가 형성될 수 있으리라고 봤다.

물론 헨더슨의 저작을 자세히 읽다 보면 역사적 사실에 관한 서술에서 많은 쟁점이 보이기도 한다. 또한, 헨더슨이 결론적으로 제시한 대안에 대해서는 추가적인 논의가 필요해 보인다. 그렇지만 그가 도출해 낸 중간매개집단 형성의 지연, 대의제 발전의 지연, 권력지향의 정치문화라는 한국 정치문화의 특징들 그리고 이를 종합하는 소용돌이 모델은 한국 정치를 반성적으로 평가하는 데 있어 충분히 시사적이다. 
 
 

5. 한국 정치의 위기 극복을 위해 대의제 작동의 조건을 형성해야

 

1) 대의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발리바르의 견해

한국의 정치문화를 1980년대까지 통사적으로 분석하고 그 문제점과 해결방안을 도출했던 헨더슨이 말하고자 한 바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대의제의 발전이 한국 정치의 위기를 극복하는 하나의 방향성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과 관련해 대의제에 관한 발리바르의 견해도 함께 참고해볼 수 있다.

발리바르는 「민주주의적 시민권인가 인민주권인가?」(2001)에서 대의제 민주주의는 ‘인민이 자기 자신과 거리를 두게 하는’ 메커니즘이라고 말한다. 그 결과는 양면적인데, 권력의 위임이 권력독점과 부패로 이어질 경우 공동체의 집합적 역량이 감소할 수 있다. 반면 대의기구가 공적 토론을 이끌어내고 이를 바탕으로 입법과 행정에 관한 결정을 적절히 이뤄낼 수 있다면 공동체의 집합적 역량이 증가하거나 보충될 수 있다. 즉 대의제가 반드시 부정적 의미의 ‘대리주의’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며 공동체의 역량을 강화할 수도 있다는 의미다.

이는 대의기구가 ‘인민과 거리를 둔다’, 즉 인민의 즉각적인 주장이나 요구와 거리를 둘 수 있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공적 토론을 조직하고 더 적합한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는 의미다. 달리 말하면, 훌륭한 대표자, 지도자를 육성하고 선출할 수 있는 능력 자체가 공동체의 역량을 나타내는 지표이고, 이를 매개로 공동체의 역량이 한층 더 강화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한편으로는 대중, 또 한편으로는 정치인, 지식인, 전문가의 역량이 상호 강화되어야 한다. 즉 대의제가 순기능을 하기 위해서는 그 자체를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현재 시점에서는 마르크스주의자가 대의제 민주주의에 대해 상투적인 비판을 반복한다면 (우파적이든, 좌파적이든 간에) 인민주의와 공명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더욱 주의할 필요가 있다. 현재의 인민주의는 선거정치에 적응하여 의회 의석을 차지하면서도 끊임없이 ‘직접 민주주의’를 호소하며 국민투표나 주민소환을 선동한다. 따라서 현재 시점에서는 대의제가 순기능을 할 수 있는 조건에 주목하는 게 더 유익할 수 있다. 
 
 

2) 대의제 작동의 제도적 조건: 제왕적 대통령의 권한분산

대의제가 순기능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발리바르가 지적한 대로 공동체의 역량 증진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이를 전제로 하되, 대의제 작동 조건을 마련하기 위한 제도적 접근도 고려해볼 수 있다. 여기서 핵심은 제왕적 대통령의 권한분산이다. 

대통령이 제왕적 권력을 가지고 있기에 모든 열망은 정점을 향할 수밖에 없다. 그 목적이 개인의 권력 지향이든 사회 제반의 문제 해결이든 말이다. 특히 사회 제반의 문제 해결을 모두 대통령에 의탁하면서 제도적으로 국회가 무능력해진다. 국회의 무능함으로 인해 행정부 견제라는 기능이 사실상 상실되고 이는 제왕적 대통령의 전횡이 나타날 가능성을 키운다. 낙하산인사, 정경유착, 권력형 비리 등 정권마다 끊임없이 부패가 반복된다. 

그렇기에 개헌이 정권마다 제기되어 왔지만, 언제나 실패해왔다. 대통령 직선제에 대한 국민의 염원, 정치인들의 이해관계(차기 대권주자의 이해관계, 개헌논의가 시작될 시 현직 대통령의 남은 임기는 개헌논의가 모두 수렴될 여지가 있다는 것 등), 내각제 실패 경험이 축적된 결과였다. 

그런데 위에 거론된 어떤 요인보다도, 국회가 그 무능으로 인해 국민적인 불신을 받고 있다는 점이 개헌논의의 장애 요소로 작용한다. 제왕적 대통령제를 개혁한다면 어쨌든 국회의 권한이 커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국회의원 수도 줄이고 세비도 줄여야 마땅한데 도리어 국회 권한의 확대라니, 받아들여지기 쉽지 않다.

그러나 국회가 제 기능을 해야 현대 대의제 민주주의가 온전히 작동할 수 있음은 기본이다. 한편으로는 한국 현대 정치사에서 국회가 시작부터 권한을 제대로 갖지 못해 입법부로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해본 경험 자체가 없다는 점도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정치인으로서, 입법부로서의 훈련이 제도적으로 가로막혀 있었기에 제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이런 맥락에서 대통령의 권한을 분산하고 입법부로서 국회의 권한을 강화하자는 여러 방안이 제기되곤 했다. 가장 빈번히, 그리고 우선하여 거론되는 방안은 대통령의 예산편성에 대한 권한과 입법안을 발의하는 권한을 국회로 돌려줘야 한다는 것이다. 이 두 권한은 현대 민주주의에서 입법부의 본질적 권한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이 두 권한이 국회로 오는 것은 국회의 기능정상화를 위해 당연한 과정일 것이다. 한편 현대 대의민주주의에서 정부에 대한 의회의 통제는 활동에 대한 직접적인 통제보다는 인사와 예산을 통한 간접적인 통제로 옮겨가고 있다. 따라서 매우 광범위한 대통령의 인사권을 제한하는 방안도 고려될 필요가 있다. 미국의 경우 엽관제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500여 명의 공직자에 대한 상원의 인준이 필요하다. 이런 미국의 사례를 참고하여, 법률개정을 통해 국회의 내각인준권을 강화하자는 주장도 있다. 
 
 

3) 윤석열 정부의 제왕적 대통령제 개혁 평가

이렇듯 제왕적 대통령제의 개혁 필요성은 꾸준히 제기되어 왔고, 대안에 관한 논의도 함께 이뤄져 왔다. 특히 박근혜 대통령 탄핵 이후 그 목소리가 더욱 커졌다. 그러나 개혁의 열망을 안고 출범한 문재인 정부는 제왕적 대통령제 개혁을 공약해놓고 전혀 이행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권한을 십분 휘둘렀다. 문재인 정부의 폐단을 뜯어고치겠다는 것을 내세워 대통령에 당선된 윤석열 대통령 역시 후보 시절 제왕적 대통령제를 개혁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웠다. 대통령 10대 공약에 “청와대 해체 및 조직개편”으로 제시된 제왕적 대통령제 개혁은 당선 후에도 국정과제에 반영되었다. 핵심 내용은 대통령실 이전 및 축소, 책임총리제·책임장관제, 민관합동위원회, 각종 위원회 실태 점검이었다. 

그렇지만 12월 현재 시점에서 윤석열 대통령의 제왕적 대통령제 개혁 공약은 뚜렷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대통령실을 이전하고, 정책실장, 민정·인사·일자리 수석을 폐지하여 문재인 정부 3실 8수석 체제를 2실 5수석 체제로 축소한 정도에 그치기 때문이다.

우선 대통령실 전체 규모를 30% 줄이겠다고 공약했으나, 보도에 따르면 현재 대통령실 근무 인원은 409명으로 총정원 490명 대비 17% 축소된 형태로 운영하고 있다. 게다가 윤재순 대통령실 총무비서관은 국회 예산결산심사소위원회에서 30% 축소 공약이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답한 바 있어서, 공약을 그대로 실현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정부 위원회의 경우 총 636개 위원회 중 246개를 폐지·통합하는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는데, 이에 대해 제 기능을 하도록 활성화해야 할 위원회마저 통폐합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그런데 정작 새 정부 출범 후 신설한 대통령 직속 위원회 2곳에는 약 200억 원의 예산을 새로 편성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위원회 246개를 폐지해 줄일 수 있다고 예상한 300억 원의 예산 대부분이 신설되는 위원회로 다시 흘러 들어가는 것이다.

또한 소통을 늘리겠다는 취지로 도입된 도어스테핑은 잠정 중단됐다. 책임장관제, 책임총리제의 경우 현재 시점에서 단정적으로 평가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책임총리제의 경우 지난 4월, 한덕수 당시 국무총리 후보자가 자신의 친필 서명이 담긴 ‘국무위원 후보자 추천서’를 공개하면서 인사 제청권이 강화됐다고 의미를 부여했고, 6월에 들어 대통령이 취임 후 총리와 첫 주례회동을 가지면서 규제개혁, 혁신추진, 경제 상황 등 국정 전반에 대해 논의한 적도 있다. 규제혁신추진단, 2030 부산세계박람회 유치와 같은 큰 사업에 총리가 직접 나서는 모습도 있었다. 그렇지만 대통령 전용 헬기 손상 논란이나 영빈관 신축 논란과 관련해서는 소위 ‘신문 총리’라 불리며 중요 사안에 관한 논의에서 배제된 게 아니냐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책임장관제의 경우 지난 9월 장관의 인사권 범위를 확대하고 인사혁신처의 개입은 줄이는 내용의 인사법규를 개정했다. 그간 실·국장급까지 대통령이 인사에 개입할 여지가 있었으나, 상당 부분을 장관에게 넘긴 조치다. 그러나 1기 내각 구성이 181일로 최장기간 소요됐고, 5명의 장관이 낙마했다. 그만큼 인사에 난항을 겪었던 것인데, 이를 고려하면 책임장관제가 당장 가시적인 성과를 거둘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그런데 공약 이행 여부를 떠나, 윤석열 대통령이 제시한 공약은 결국 행정부 내에서의 권한 조정에 국한된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다. 위에서 서술했듯 대통령 권한분산에서 핵심은 국회와의 권한분산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이에 대해서는 어떤 언급도 없다. 새 정부에 대해 몹시 비협조적인 야당의 행태를 고려해야 하겠으나, 대통령에게 국회로 권한을 이전해야 한다는 인식을 찾을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시간이 흘러 대통령의 공약이 이행된다고 하더라도, 윤석열 정부의 제왕적 대통령제 개혁은 한계적이라 평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6. 결론

 
 
2022년의 한국 정치는 대통령 선거라는 중대한 일정이 있었고, 이를 전후로 정당 간의 극단적 대립이 이어졌다. 2023년에는 총선이나 대선과 같은 커다란 정치일정은 없지만, 대선 국면과 같은 격렬한 대결 구도가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크게 두 가지를 짚을 수 있다.
 
 

1)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사법리스크

먼저 이재명 민주당 당 대표의 사법리스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안을 나열해보자면, 백현동 개발사업의 부지 용도변경 과정에서 특정 부동산 업체에 특혜를 줬다는 의혹, 성남FC 후원금과 관련한 의혹, 주식회사 쌍방울이 2018년~2020년에 걸친 이재명 대표 재판의 변호사 수임료를 대납했다는 의혹, 성남시 대장동 개발 당시 화천대유라는 특정 회사에 천문학적 이익을 몰아주고 뇌물로 사용하려 했다는 의혹이다. 현재 백현동 의혹과 관련해서는 허위사실 공표 혐의로, 성남FC와 관련해서는 뇌물수수로 이재명 대표가 기소된 상황이다. 쌍방울 변호사비 대납 의혹은 회사 회장인 김성태 씨가 도피 중인 가운데, 쌍방울그룹 재경총괄본부장 김 모 씨가 태국에서 체포되어 수사에 탄력이 붙을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다만 송환거부로 시일이 걸릴 수 있다는 전망이다.) 대장동 사건의 경우 남욱, 유동규의 진술이 바뀌어 일단 남욱과 유동규 사이의 자금흐름에 대해서는 검찰이 규명을 명확히 했을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다. 또 이재명 대표의 최측근인 정진상 대표실 정무조정실장도 뇌물수수, 부패방지법 위반, 증거인멸 교사 등으로 기소됐다. 다만 2021년 대장동 의혹이 처음 제기되었을 때부터 이재명 당시 대통령 후보자를 법적인 차원에서 최종 책임자로 증명하고 처벌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 있었던 만큼, 그 결말은 여전히 예측하기 어렵다.

이렇게 많은 개인 비리가 엮여있음에도 민주당은 일단은 총력방어 단일대오를 명시적으로 깨지는 않고 있다. 그렇지만 이재명 대표의 입지가 흔들리고 있는 게 아니냐는 이야기도 솔솔 흘러나오고 있다. 이전부터 소위 소신파라 불리던 조응천, 박용진 의원은 최소한 이 대표의 정치적 책임에 대한 입장 표명을 요구했고, 김해영 의원은 이 대표 용퇴론을 제기했다. 이원욱 의원은 “물이 100도가 돼야 끓는다”면서 “지금은 70~80도”라고 답했다. 100도가 돼 분출하는 시점은 “이 대표에 대한 사법리스크가 본격화될 때, 국민이 봤을 때 정치탄압이라고 느껴지지 않고 정말인가보다 고개가 끄덕여지는 때”라고 말했다. 박영선 의원은 2024년 총선 공천권은 내놓아야 한다고 발언하면서, 민주당 분당 가능성까지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이재명 대표와 당 지도부는 당 대표 선출을 즈음해 이런 상황을 대비하며 당헌을 개정했다. 즉 당헌 80조 1항의 ‘부정부패 혐의로 기소될 시 직무정지’는 그대로 뒀지만, 80조 3항에서 ‘직무정지를 구제할 수 있는 주체’를 윤리심판원에서 당무위원회로 개정했다. 이로써 친명계가 우세한 당무위가 이재명 대표의 직무정지를 구제해줄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이러한 당헌 개정의 취지를 생각한다면 적어도 1심 유죄 판결이 나오기 전까지는 당내 우려가 있더라도 이재명 대표가 대표직을 내려 놓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된다면 민주당 내부의 혼란은 당연하거니와 한국 정치 전반이 혼란의 수렁으로 빠져들 가능성이 크다. 이재명 대표는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윤석열 정부를 더 강하게 공격하면서 쟁점 전환, 나아가 정부 힘 빼기를 통해 검찰수사의 정당성을 침식하고자 할 것이다. 이재명 대표와 민주당의 이런 시도가 성공적일수록 검찰수사에 대한 민주당 지지자의 반발은 더욱 거세질 것이며, 이는 한국 사회가 조국사태와 같이 이재명 대표가 죄인이냐 아니냐는 소모적인 쟁점으로 다시 한번 갈라질 가능성을 내포한다. 한국 사회의 정치 양극화가 더욱 악화하는 내년이 될 수 있다는 의미다.
 
 

2) 선거제도 개혁

또 하나 주목해볼 만한 사안은 2024년 총선을 바라보며 진행될 선거제도 개혁 논의다. 지난 10월 26일, 570개 노동, 시민단체로 구성되어 2017년부터 활동해온 ‘정치개혁공동행동’은 2024년 22대 총선을 앞두고 조직을 정비해 민주노총, 참여연대, 전국민중행동을 비롯한 690개 노동, 시민단체가 참여하는 ‘2024정치개혁공동행동’으로 재발족하는 기자회견을 개최했다. 이들은 차기 총선 전 21대 국회가 이행해야 할 정치개혁 10대 과제를 제안했다. ▲ 유권자 표현의 자유 보장 ▲ 국회 선거제도의 비례성 확보 위한 공직선거법 개정 ▲ 정당설립요건 완화 및 지역정당 제도 도입 ▲ 대통령 및 지자체 단체장 결선투표제 도입 ▲ 성평등 공천확대 ▲ 교원 및 공무원의 정치적 기본권 보장 ▲ 청소년의 정치활동 자유 확대 ▲ 지방의회 선거제도의 비례성 확보 위한 공직선거법 개정 ▲ 선거공영제 확대와 정치장벽 해소 ▲ 투표권 실질적 보장이다.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도 활동을 시작했다. 12월부터 연동형 비례대표제 등에 관한 본격적인 논의를 할 계획이다. 여야 합의에 따라 2023년 4월 30일까지 활동한다. 논의안건은 ▲ 연동형 비례대표제 개선 ▲ 지역당(지구당) 부활 ▲ 규제 중심 공직선거법 개선 ▲ 법사위 체계·자구 심사 권한 폐지 검토 ▲ 국회의장단(후반기) 선출 규정 정비 ▲ 예산 결산 관련 심사기능 강화 ▲ 상임위원장 배분 방식 ▲ 상임위원회 권한·정수 조정 ▲ 국회의원 이해충돌방지제도 보완 ▲ 교육감 선출방법 개선 ▲기타 여야 간 합의 사항이다. 

여러 쟁점이 있겠으나, 핵심적이고 우선적인 논의는 연동형 비례대표제 개선일 것이다. 현행 선거제도가 개선되어야 한다는 점은 2021년 총선을 지켜봤다면 모두 공감할 것이다. 그런데 2021년 총선에서 결국 거대양당 구도로 회귀한 핵심 원인은 여당의 패스트트랙 공조를 통한 무리한 선거법 개정과정에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무리한 선거법 개정은 비례위성정당 창당이라는 파행으로 귀결됐고, 유권자는 위성정당을 창당하여 선거법 취지에 어긋난 행태를 보인 민주당을 심판하지 않았다. 연동형 비례제가 소수정당의 원내진출에 유리하다는 근거는 사실 명분일 뿐이고, 선거법 개정으로 당시 야당이던 미래통합당의 의석을 인위적으로 줄이려는 게 민주당의 본심이라는 사실을 지지층이 간파한 결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양당이 합의할 수 있는 선거의 규칙, 즉 선거법 재개정이 제대로 이뤄질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현재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가 가동되었음에도 관련한 여야의 입장을 찾아보기 어려운데, 이런 식으로 지지부진하다가 선거 막판에 이르러 당리당략에 따라 급하게 결정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혹여나 어떤 합의도 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비례위성정당이라는 기이한 행태를 2024년에 다시 한번 목격하게 될지도 모른다. 

한편 ‘2024정치개혁공동행동’은 정치개혁의 과제로 비례성을 높이고, 비례대표 국회의원의 수를 명문화해 거대양당의 야합으로 그 수를 줄일 수 없도록 하며, 정당설립과 후보 출마의 장벽을 낮추는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물론 비례성을 높이고 정당설립을 쉽게 함으로써 다양한 사회적 요구를 수용해야 한다는 진의는 충분히 고려되어야 할 것이나, 다시금 야권연대로 귀결될 위험을 경계해야 한다. 선거법과 공수처법 패스트트랙에 공조했던 것이 정의당을 비롯한 진보정당에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를 너무 쉽고 빠르게 망각하는 것은 아닌지 깊이 숙고할 필요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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