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성화된 헌정 위기와 국민주권정부의 위험성
21대 대선 분석과 평가
1. 이번 대선은 무엇이었나
이번 21대 대선은 결국 이재명 대통령과 거대여당 민주당의 국민주권정부 출범으로 귀결되었다. 돌이켜보면, 이번 대선은 문민화 이후 초유의 헌정위기 사태로 인해 치러졌다. 3년 만에 치러진 조기 대선의 직접적 원인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위법·위헌적 비상계엄 선포였다. 무엇보다 대통령이 야당과의 갈등으로 인한 교착상태를 국회와 정당의 활동을 금지하고 군경을 동원해 주요 정치인과 전직 법관을 체포하는 방식으로 해결하려 했다는 점에서, 지난 비상계엄 사태는 민주화 이후 한국 헌정사에 유례없는 폭거였다. 게다가 대통령 탄핵 심리 과정에서 윤 전 대통령은 아무런 반성 없이 지지자를 선동하며, 선거불복의 정치문화를 사법불복과 물리적 폭력에 의한 법치 파괴로까지 악화시켰다. 이렇게 헌정 파괴의 우두머리가 된 윤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 심판은 사필귀정이었다.
헌법재판소는 헌법재판관 8명 만장일치로 윤석열의 대통령직 파면을 결정하면서, 지난 3년간 한국 사회에서 극단화된 정치적 양극화와 각 정치세력의 자제 없는 권한 행사가 위험 수위를 넘었다고 우려했다. 지난 3년간 민주당의 대선불복과 윤 전 대통령의 총선불복으로 점철된 대통령과 국회(야당) 간의 극렬한 갈등 속에서 심화한 헌정 위기가, 앞으로도 만성화될 수 있음을 엄중히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진보연대는 이렇게 민주정의 퇴보와 붕괴가 우려되는 현 정세에서, 책임 있는 정치세력이라면 헌정 위기를 종식할 방안을 모색하는 ‘정치의 시간’을 열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탄핵 이후 전개된 대선 국면에서도 ‘정치의 시간’은 오지 않았다. 대선 국면에서 핵심 화두는 ‘헌정 위기 해소’가 아니라, 이재명 대표의 민주당이 주도하는 ‘내란세력 척결과 압도적 정권교체’였기 때문이다. 이번 대선의 핵심은 극단적 헌정 위기를 초래한 비상계엄과 탄핵 사태에 대한 심판과 정권교체였지만, 동시에 그 해결사를 자처하고 나선 이재명 대표의 민주당 역시 그간 다수당 지위를 남용해 헌정을 위협해 온 데다 이제 입법권에 이어 행정권과 사법권을 장악하고 ‘국민의 뜻’을 내세워 폭주할 수 있다는 우려 역시 강하게 작용했다.
지난 2022년 20대 대선 국면에서, 사회진보연대는 반(反)경제학과 법치 파괴라는 측면에서 민주정을 인민정으로 타락시키는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의 포퓰리즘(인민주의)이 갖는 위협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사회운동이야말로 민주당 비판과 심판의 적임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지난 3년간 한국 정치와 민주정의 위기는 더욱 심화했다. 이는 무엇보다 민주당과 국민의힘이라는 거대 양당의 정당 민주주의가 돌이킬 수 없이 붕괴하는 가운데, 두 정치세력이 대통령직과 국가권력을 놓고 더 이상 ‘적대적 공생’조차 아닌, 적대적 내전과 헌정 파괴를 무릅쓰는 데까지 치달았기 때문이다. 즉, 양대 정당이 정치적 경쟁을 통해 입법부를 구성하는 민주정의 축이 아니라, 공직을 비롯한 공적 자산을 경쟁적으로 약탈하는 반헌정세력의 핵심 축이 된 것이다. 여기에 더해, 진보당과 노동운동 일각 역시 민주당의 압도적 정권교체론에 편승해 내전의 한 축을 자임하며, 헌정 위기를 심화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
요컨대, 이번 대선은 문민화 이후 유례없는 헌정 위기에서 비롯되었지만, 정작 그러한 위기를 초래한 양대 세력이 다시금 서로를 핑계로 한국 사회의 구조적 위기 속에서 헌정 위기를 만성화하는 길로 나아가리라는 점을 보여주었다.

사회진보연대는 대선후보 TV 토론 기간에 경제, 정치, 노동·사회, 외교에 대한 각 후보의 공약과 입장에 대한 논평을 《사회운동포커스》 시리즈로 냈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을 참고할 수 있다. “한국경제의 구조적 위기를 말하지 않는 대선”(5월 23일), “제왕적 대통령제를 바꾸겠다 말하지 않는 대선”(5월 29일), “노동시장 이중구조와 격차 축소를 말하지 않는 노동·사회 공약”(5월 30일), “트럼프주의에 편승하려는 양당 외교정책의 위험성”(6월 2일). (사진출처: 《경향신문》)
이 글에서는 먼저, 대선 국면을 전후로 양대 정당 내부에서 나타난 정당 민주주의의 붕괴를 중심으로 만성적 헌정위기의 단면을 살펴본다. 다음으로, 집권에 성공한 이재명 정부가 국민주권을 내세워 법치와 재정을 중심으로 제왕적 대통령제를 강화하고 한국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를 오히려 심화할 가능성이 있다고 제기한다. 이어서, 민주당과 이재명 후보 지지를 노골화하며 노동자 정치세력화와 진보정당 운동을 파산시킨 진보당과 민주노총 집행부의 행보를 지적하면서, 노동자운동과 사회운동이야말로 이재명 대통령과 민주당의 인민주의를 비판하는 적임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만성적 헌정 위기를 해소하고 한국 사회의 구조적 위기에 대응할 역량이 필요하다는 관점에서 대선 이후 사회운동의 과제를 도출해본다.
2. 만성적 헌정 위기를 초래하는 정당 체계의 타락
1) 팬덤 당원이 주도하는 ‘이재명의 민주당’
지난 2022년 대선에서 이재명 후보가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은 2024년 총선을 거치며 오히려 ‘이재명의 민주당’으로 전락했다. 그는 대선 패배 직후 인천 계양을 보궐선거에 출마해 승리하고 8월에는 당대표로 선출됐다. 국회미래연구원에 따르면, 이 짧은 시기에 신규 당원이 14만 명 증가했는데, 대부분 중앙당을 통해 온라인으로 입당한 ‘팬덤 당원’이었다.
이재명 당대표 체제에서 민주당은 이들 당원의 권한을 강화했다. 총선을 앞둔 2023년 12월 전당대회에서 대의원의 투표 비중은 낮추고 권리당원의 투표 비중은 높이는 한편, 현역의원 평가 하위 10%에 포함된 의원에 대한 감산 비율을 20%에서 30%로 높이는 당헌 개정을 의결했다. 이는 이재명 대표를 지지하는 당원의 권력을 강화하여 당내 경쟁자를 배제하는 수단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실제로 이어진 2024년 총선 공천 과정에서는 ‘비명횡사’라는 말이 나올 만큼 민주당은 비명계 인사 다수를 경선 없이 탈락시키고, 친명계 인사를 전략공천으로 대거 투입하면서 당내 민주주의에 대한 격렬한 갈등과 논란이 불거졌다. 극심한 공천갈등에도 불구하고 총선에서 민주당이 압승하면서, 팬덤 당원과 친명계 일색의 의원이 주도하는 ‘이재명의 민주당’이 완성되었다.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은 이재명 전 대표의 압도적인 당내 지위를 재확인하는 과정이자, 이른바 ‘팬덤 당원’이 민주당을 주도하고 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자리였다. 4월 14일부터 시작된 경선에는 이재명, 김경수, 김동연 후보가 나섰다. 이후 세 차례 토론회와 지역별 순회 연설회를 거쳐, 4월 27일 이재명 후보가 89.77%의 압도적 득표율로 선출되었다. 불과 4년 전인 2021년 11월 치러진 20대 대선 경선에서 이재명 후보가 이낙연 후보와의 격렬한 경쟁과 대장동 비리 논란 속에서 50.29% 득표율로 승리했던 것과 비교하면, 지난 총선을 거치며 이재명 전 대표가 당내를 완전히 장악하는 데 성공했음을 보여주는 결과다.
다만 후보 선출 방식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당원 중심주의’를 둘러싼 논란이 다시 한 차례 반복됐다. 민주당이 2012년 18대 대선 경선부터 시행된 완전국민경선제(당원 외에도 국민 전체를 대상으로 선거인단을 모집해 후보를 선출하는 방식)를 폐지하고, 권리당원(6개월 이상 당원이면서 1년 내 6회 이상 당비를 납부한 당원) 투표 50%와 일반국민(안심번호로 추출한 100만 명) 여론조사 50%로 선출하도록 결정하자, 김두관 후보가 이를 비판하며 경선 불참을 선언했고, 김동연 후보는 사실상 ‘이재명 후보 추대 경선’이라고 지적한 것이다.
민주당은 완전국민경선제를 폐지하는 이유로 당원 중심 민주주의 강화와 역선택 방지를 들었다. 본래 완전국민경선제는 정당의 대선 후보자를 결정하는 예비선거를 대중에게 개방하는 미국의 ‘오픈 프라이머리’(open primary)를 모델로 하는 것으로, 3김 정치 시대에 제왕적 당 총재나 일부 상층 핵심 정치인이 마음대로 당내 공천권을 행사하던 정당의 비민주성 문제를 개혁하고 민주적 대표성을 넓힐 방안으로 2000년대부터 주목받았다. 물론 지역 기반이 취약한 민주당에 완전국민경선제가 도입되면, 정당이 여론에 좌우되는 경향이 더욱 강화될 것이라는 우려 역시 컸다.
문제는 ‘이재명의 민주당’이 강화하는 당원 중심주의가 정당의 민주주의를 더욱 타락시키는 방향이라는 점이다. 『혐오하는 민주주의』의 저자 박상훈은 대권을 지향하는 지도자 1인이 팬덤 당원과 직접 결합하여 당내 권력구조를 수직화하는 현상이 정당의 대표 기능과 정책 기능을 약화시킨다고 지적한다. 이에 따르면, 본래 정당의 핵심 구조는 지역을 기초로 오랫동안 활동하는 당원이 아래로부터 위로 대표성을 쌓아가는 대의원 제도다. 정당은 이러한 대의원 제도를 바탕으로 이념과 정책에 기반한 안정적 정체성과 정치문화를 발전시킬 수 있다.
반대로 지역 기반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팬덤 당원은 기존의 지역과 대의원 기반의 정당 구조를 해체하고, 당원과 당대표를 직접 연결하는 정당 구조를 지향한다. 또한, 이들은 당의 활동 전반을 자신의 지도자에게 충성하도록 만들기 위해 의원이나 당직자의 일상 활동에 직접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이를 통제하고자 한다. 제왕적 대통령제라는 통치구조에서, 팬덤 리더와 당원이 지배하는 정당은 당직과 공직, 결정적으로 대통령직을 장악하기 위한 게임의 수단으로 전락하고 만다.
결국 민주당은 김대중이라는 카리스마적 지도자의 사당(私黨)에서 출발하여, 전국정당으로 나아가기 위한 ‘국민참여’ 정당을 거쳐, 최종적으로 이재명이라는 지도자 1인과 그를 지지하는 팬덤 당원이 직접 결합하는 인민주의적 정당으로 완전히 귀결된 셈이다. 박상훈은 이를 “정당은 사라지고, 팬덤만 남는 현상”이라 표현한다. 그러면서 대의제의 핵심 제도인 정당의 민주주의가 파괴되면서 결과적으로 국민에 대한 대표성과 책임성 모두가 상실된 정치로 이어지고 있다고 경고한다.
2) 보수주의에도 미달하는 기생정당 국민의힘
민주당이 이재명과 팬덤 당원이 지배하는 인민주의로 완전히 타락했다면, 국민의힘은 보수주의에도 미달하는 기회주의적 당권파가 당내 민주주의를 완전히 파괴하기에 이르렀다. 돌이켜보면, 국민의힘은 2020년 총선 대패 이후 김종인 비대위 체제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에 반대하며 결집한 극우 태극기세력과 거리를 두고, 탄핵 이후 분열했던 바른미래당 세력을 재규합하며 탄생했다. 이후 국민의힘은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의 실정에 힘입어, 2021년 서울시장과 부산시장 보궐선거에서 승리한 데 이어 2022년 대선에서 정권교체에 성공했다.
그러나 윤석열 정부 시기에 국민의힘은 박근혜 정부 시기의 새누리당과 마찬가지로, 제왕적 대통령을 중심으로 계파를 형성하고 당권과 공천권을 장악하는 데에만 몰두하는 기생적인 집권여당의 면모를 반복했다. 2022년 하반기 이준석 당대표를 축출하고 이듬해 3월 김기현 당대표를 선출하는 과정에서, 대통령실의 당무개입 논란과 이른바 ‘윤핵관’(윤석열 핵심 관계자) 논란이 터져 나왔다. 또한, 이재명 대표의 민주당과 비슷하게 친윤계 지도부가 당대표 선출을 위한 3차 전당대회 규칙을 기존 ‘당원투표 70%와 여론조사 30%’에서 ‘당원투표 100%’로 바꾸기로 하면서, 유승민 전 의원과 안철수 의원을 비롯한 비윤계 의원이 크게 반발했다. 이후 친윤계 일색의 김기현 당대표 체제는 윤석열 정부 심판론이 작동한 2023년 하반기 보궐선거 대패로 좌초했고, 한동훈 비대위 체제 역시 윤석열 대통령과의 갈등 속에서 2024년 총선 대패로 무너졌다.
나아가, 윤석열 전 대통령이 자행한 초유의 비상계엄 사태와 탄핵 국면에서, 국민의힘은 무능을 넘어 극단으로 치달았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국면에서 새누리당이 대국민 사과를 한 것과 달리, 국민의힘은 이번 비상계엄에 대해 친윤계를 비롯한 상당수 의원이 사실상 계엄을 옹호하거나 대통령 탄핵 반대에 몰두했다. 한동훈 대표가 비상계엄 해제에는 앞장섰지만 이내 대통령 탄핵과 정국 수습 방안을 두고 갈팡질팡하는 가운데, 친윤계는 한동훈 대표를 끌어내리고 권영세 비대위 체제를 중심으로 대통령 탄핵 반대에 앞장섰다. 심지어 1월에 이르러 극우세력을 중심으로 한 탄핵 반대 집회가 최고조에 이르고 윤석열 지지자가 서부지법을 침탈하는 사태마저 일어났는데도 이들과 전혀 선을 긋지 않으면서, 극우에 잠식된 ‘내란의힘’으로 전락했다는 비판을 자초했다.
헌법재판소가 윤석열을 대통령직에서 파면한 이후에도, 권성동과 권영세 의원을 중심으로 하는 당 지도부는 오직 당권 장악에만 몰두했다. 대선후보 예비경선으로 압축된 김문수, 홍준표, 안철수, 한동훈 4인 구도는 국민의힘 내에 존재하는 탄핵 반대와 탄핵 찬성 구도를 그대로 보여주었다. 그런데 예비경선을 거쳐 김문수 후보와 한동훈 후보 2인 구도로 결선이 치러지는 과정에서, 한덕수 전 총리 대망론이 급부상했다. 한 전 총리 본인은 이재명 집권을 저지하고 권력구조 개헌을 이루기 위해 출마하겠다고 밝혔으나, 실상은 향후 선출될 대선 후보에게 (특히 한동훈 후보에게) 당권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당권파의 술책과 윤 전 대통령의 의중이 강하게 작용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쏟아졌다.
그런데 결선에서 최종 승리한 김문수 후보가 한덕수 전 총리와의 단일화에 소극적으로 나서자, 권영세·권성동 지도부는 경선을 거쳐 전당대회에서 선출된 대선후보를 비상대책위원회와 선거관리위원회의 긴급 의결로 강제 교체하려고 시도하는 초유의 ‘당내 쿠데타’를 감행했다. 이는 당헌 제74조 2항에 따라 ‘상당한 사유’가 있을 때 비대위 의결로 대선후보 선출 관련 사항을 정할 수 있다는 규정을 근거로 한 것인데, 당원 여론조사 결과 당원 대다수가 원하는 단일화를 김문수 후보가 거부하므로 그의 대선후보 자격을 취소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5월 10일 새벽 2시 반에 김문수 후보 선출을 취소하고, 3시에 새 예비후보 등록을 공고한 뒤, 4시에 한덕수 입당과 후보 등록 완료로 이어진 한밤중의 사태는, 국민의힘 당권파가 당권을 위해 정당정치와 민주주의를 어디까지 파괴할 수 있는가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국민의힘 김문수 대선후보와 무소속 한덕수 예비후보 간의 후보 단일화를 위한 담판이 성과 없이 끝나자, 국민의힘 당권파는 김문수 후보의 자격을 취소하고 한덕수 후보를 등록하는 초유의 ‘당내 쿠데타’를 감행했다. (사진출처: 《연합뉴스》)
놀랍게도, 김문수 대선 캠프는 이런 초유의 사태가 마치 없었던 일인 것처럼, 권성동 의원을 비롯한 당권파와 탄핵 반대 세력을 모두 아우르는 방식으로 구성됐다. 김문수 후보 자체가 2020년 자유한국당이 추진하는 보수통합이 ‘광장 세력’을 도외시한다며 탈당한 뒤 전광훈 목사와 함께 자유통일당을 창당한 이력이 있고, 비상계엄 사태 이후 유력 대선후보로 부상하고 국민의힘에 입당하는 과정에서 역시 탄핵 반대 집회 세력의 지지를 등에 업었기 때문일 것이다. 뒤늦게 중도층 표심을 잡기 위해 김용태 비대위원장을 내세워 비상계엄 사태에 대한 당 차원의 사과와 윤석열 전 대통령 탈당을 내세웠지만, 만시지탄이었다.
게다가 김문수 캠프는 반이재명 외에 전통적인 보수주의라 할 만한 정책조차 전혀 제시하지 않았다. 제왕적 대통령제 개혁은 이재명 후보를 저격하기 위한 용도일 따름이었고, 경제 부문 공약 역시 규제 개혁과 (이재명 후보와 별반 다를 것 없는) 재정 지출에 의존하는 것뿐이었다. 외교 역시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가 다자간 국제질서를 파괴하는 상황에서 구호뿐인 한미동맹 강화만을 제기할 따름이었다. 선거 기간 내내 이재명과 민주당의 독재를 지적하는 데에만 몰두하는 한편, 이준석 후보와의 단일화를 위해 당권을 거래하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논란만 나올 뿐이었다.
『보수주의: 전통을 위한 싸움』의 저자 에드먼드 포셋은 유럽과 영미의 보수주의를 시기별로 나누어 분석하며, 큰 틀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수용하는지를 기준으로 보수주의를 자유보수주의와 비자유보수주의로 구분한다. 그에 따르면, 자유보수주의는 19세기에 선거민주주의를 수용한 데 이어, 20세기에는 전후 케인즈주의와 경제민주주의를 일부 수용하고 탈냉전 시기 신자유주의 정책개혁과 금융세계화에 협력하는 방식으로 자유주의와 타협하며 주류화했다.
다만 자본주의와 자유주의가 위기에 빠질 때마다 보수주의 역시 방향을 잃고 분열했는데, 특히 2007~09년 금융위기 이후 미국과 유럽에서 기존의 주류 자유보수주의가 표류하는 가운데 인민주의적 ‘강경우파’가 대변하는 비자유보수주의가 새로운 주류로 부상했다. 이들은 △ 배타적 자국민주의 △ 교조적 초자유주의 △ 문화적 전통주의 △ 인민주권에 대한 호소를 특징으로 한다. 특히 이기적인 엘리트와 좌파라는 내부의 적에게 희생된 선량한 다수 국민의 대표를 자처하며 직접행동과 단일한 인민의 의지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자유주의와 양립할 수 없는 인민주의라고 할 수 있다.
이를 한국 정치에 대입해 보면, 두 차례의 대통령 탄핵을 겪으며 주류 보수주의가 붕괴하고 영남 지역당으로 퇴보하는 가운데 본격적으로 강경우파가 확산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국민의힘은 당 내외에서 발호하는 이러한 ‘강경우파’와 명확히 절연하지 않으면서, 민주당 반대와 지역주의 정서에 의존해 당권 장악을 위한 내부 갈등과 경쟁에 몰두했다.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 국면은 이러한 기회주의적 보수세력의 위기와 극단주의의 위협을 단적으로 드러냈다.
즉, 한국의 보수세력은 덕성과 능력에 기초한 정치문화를 강조하며 현대사회의 정치적·경제적 자유를 보존하는 보수주의의 이상과는 전혀 관련 없이, 인민주의적 강경우파와 당권을 둘러싼 기회주의 사이에서 표류하며 반(反)헌정세력으로 기우는 가운데 ‘이재명의 민주당’이 더욱 활보하는 거름만 제공하고 있는 셈이다. 대선 패배 이후 국민의힘은 당권을 둘러싼 내부 경쟁이 재점화될 것으로 보이지만, 자유민주주의에 부합하는 보수 혁신의 길은 요원해 보인다.
3) 소결: 제왕적 대통령제와 정당체계 타락의 악순환
제왕적 대통령제의 결함과 결합한 정당체계의 타락이 한국 민주정에 미치는 위협은 더 이상 거대 양당의 ‘기득권 다툼’이나 ‘적대적 공생’ 수준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위험 수위에 달했다. 한쪽에서는 대선불복을 위해 다수당의 권한을 최대한 남용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대통령의 위헌·위법적 비상계엄 선포를 두둔하거나 옹호하며 정치과정과 제도 자체를 파괴하는 데 이르렀기 때문이다.
이렇게 정치적 양극화가 극단화하는 가운데, 두 정당 모두 당내 민주주의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었다. 정당의 지역 기반과 대의원 제도가 유명무실해지면서, 거대 양당은 팬덤 당원이나 검증되지 않은 ‘반짝 스타’에 취약한 정당이자 권력 쟁취를 위해 상쟁하는 파당으로 전락하고 있다. 지난 3년을 거치며 민주당과 국민의힘 모두 당원주권과 국민주권을 더욱 강조하면서, 대의제 붕괴와 인민주의로 나아가는 길을 거대 양당이 오히려 주도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대선 직후, 강준만 교수는 《경향신문》 칼럼에서 “우리가 정작 무서워해야 할 것은 ‘극우’라기보다는 ‘정치의 이권화’”라고 주장하면서, 한국 정치에서 가시화된 극우와 날로 극심해지는 진영주의의 토양에 ‘정치의 이권화’가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극우’보다 무서운 ‘정치의 이권화’”, 《경향신문》, 2025년 6월 4일.) 막강한 임명권과 재정권을 갖는 대통령직을 차지하기 위한 승자독식 체제를 약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한국 민주정의 위기는 반복해서 심화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물론 제왕적 대통령제의 역사이기도 한 한국헌정사에서, 한국의 정당정치 역시 제왕적 대통령을 둘러싼 경쟁에 매몰되었다는 평가는 이미 오래전부터 제기되어 왔다. 그러나 2020년대에 이르러 정당이 팬덤 정치에 잠식되고, 당직과 공직을 장악하려는 파당 간의 ‘내전’으로 정당체계가 악화하면서 만성적 헌정 위기를 초래할 지경에 이르렀다는 점을 엄중하게 인식해야 한다.
3.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주목해야 할 쟁점
6월 6일, 대통령실은 새 정부를 부를 때 ‘이재명 정부’라는 공식 명칭과 함께 ‘국민주권정부’라는 별칭도 사용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그런데 비상계엄 사태와 대통령 탄핵 국면에서, ‘국민주권’은 극우세력과 민주당이 공통적으로 강조한 구호였다. 극우세력은 윤석열 탄핵에 반대하며 선출되지 않은 헌법재판소가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을 심판할 수 없다고 주장했고, 민주당 역시 선출되지 않은 사법부가 유력 대선후보의 피선거권을 박탈하며 국민이 대통령을 선출하는 과정에 개입해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들이 강조하는 국민주권론은 현대 민주정의 핵심 원리를 부정하고 파괴하며 이를 인민주의로 대체하려 한다는 점에서, 헌정 위기를 영속화할 위험성이 있다. 특히, 이재명 정부가 집권 초기 사법부와 국가재정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내세워 제왕적 대통령제를 강화하고 권력에 대한 견제와 제한 장치를 약화하는 행보를 보이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1) 국민주권의 변형을 지향하는 정치이념으로서 인민주의
윤종희 교수는 포퓰리즘을 ‘국민주권’ 원리를 변형하며 대표제 민주주의를 내부로부터 전복하려는 정치이념으로 규정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나, 인민: 포퓰리즘은 어떻게 민주주의를 변형시키는가?』의 저자 우르비나티 교수 역시 정치지도자와 ‘진정한’ 인민 사이의 신앙적 신뢰에 기초해 정당, 언론, 국가기관, 독립된 사법부와 같은 매개조직을 약화하거나 수단화하면서 지도자를 책임성으로부터 면제하는 ‘직접 대표제’를 추구하는 것이 포퓰리즘이라고 설명한다.
대표제 민주주의에 기반한 현대 민주정에서 국민주권 원리는, 구체적인 현실에 다양하게 존재하는 인민과 구별되는 추상적 집합체로서 ‘법 앞에 평등한’ 국민이, 대의제를 통해 간접통치를 확립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선출된 부분으로서 대표는 전체를 대표하기 위한 정치적 과정과 정당, 언론, 독립된 사법부와 같은 여러 매개조직을 거치며 권력을 행사함으로써, 대중의 의견과 의지 사이에 시공간적 거리감을 유지한다.
그런데 인민주의는 구체적인 현실에 존재하는 다양한 인민을 인위적 집합체인 주권자로서 인민, 특히 특정한 지도자나 대표자가 추구하는 가치관을 공유하는 ‘진정한 인민’과 일치시키려 한다. 그러면서 권력자와 인민 사이에 존재하는 여러 매개조직을 약화하거나 파당적으로 소유하며, 인민의 의견과 의지를 즉각적이고 직접적으로 실현하고자 한다.
나아가, 인민주의는 다원주의와 다수의 지배를 결합하는 현대 민주정의 다수결 원리 역시 다원주의를 제거한 다수의 지배로 변형시킨다. 이들에게 선거는 정치적 판단이나 정책을 평가하는 과정이 아니라, 다수파로서 정당성을 확인하는 의례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들에게 선출된 권력을 제어하고 견제하는 제도나 정치적 관행은, 다수의 ‘진정한 인민’의 의지를 가로막는 소수의 기득권 엘리트의 방해물일 따름이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이재명 대표 체제의 민주당이 ‘당원주권’을 내세워 인민주의적 정당으로 완전히 귀결된 것처럼, 이제 이재명 대통령과 민주당 정부가 ‘국민주권’을 내세워 권력에 대한 제한과 견제를 무력화하며 민주정을 인민정으로 타락시킬 수 있다는 우려가 큰 것이다.
김예원 장애인권법센터 변호사는 《경향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다수당 지위를 활용해 입법권 독주에 앞장선 민주당이 대통령직을 장악하고 사법부의 독립성을 훼손하는 데까지 나아가면 “법치주의, 재정건전성, 서민의 삶을 직접적으로 위협할 수 있다”라고 지적한다. (“법치 위에 정치가 서지 않도록”, 《경향신문》, 2025년 5월 25일.) 즉, “재정 지출이 인기영합적으로 확대될 경우 국가 재정의 안정성이 흔들릴 수 있고, 형사사법 제도의 설계가 정치적 이해에 따라 변동되면 권력형 범죄에 대한 실효적 대응도 약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대선 과정과 집권 직후 나타난 이재명 대통령과 민주당의 행보를 볼 때, 사법부와 국가재정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앞세운 제왕적 대통령제 강화가 앞으로 국민주권정부에서 핵심 쟁점이 될 것이다.
2) 법치와 재정의 위기를 초래할 ‘국민주권정부’의 위험성
먼저 사법부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살펴보자. 대선을 한 달여 앞둔 5월 1일, 대법원이 이재명 후보의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에 대해 다소 이례적인 절차와 속도로 유죄 취지 파기환송을 결정했다. 그러자 민주당은 극렬히 대법원과 사법부를 공격하고 나섰다. 예를 들어, 한민수 의원은 SNS에 ‘사법쿠데타’가 발생했다고 주장했고, 박진영 전 민주연구원 부원장은 CBS 유튜브 ‘더라커룸’에 출연해 선출되지 않은 사법부가 국민주권을 침해했다면서 “삼권분립이라는 것이 이제 막을 내려야 될 시대가 아닌가”라며 격앙된 모습을 보였다.
민주당과 그 지지자의 격앙된 반응은 사법부가 이 후보의 사법리스크를 활용해 피선거권을 박탈하여 대선에 개입할 수 있다는 공포에서 출발하여, ‘선출’되지 않은 사법부가 국민주권을 침해한 행위에 대해 책임져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피선거권 박탈 여부가 달린 중대한 법 위반 혐의를 받는 인물이더라도 국민 다수가 지지하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고, 오히려 이에 대해 판결하려는 사법부가 국민주권에 도전하는 것이라는 인식은 전형적인 인민주의적 민주주의관이라고 할 수 있다.
이어 민주당은 조희대 대법원장 탄핵과 청문회를 거론하면서, △ 대법관을 30명으로 증원하고 비법조인을 일부 임명하도록 하는 법원조직법 개정안, △ 법리를 왜곡한 판·검사를 ‘법 왜곡죄’로 처벌하는 형법 개정안, △ 선거법상 ‘허위사실 공표’ 구성 요건을 재규정하는 공직선거법 개정안, △ 내란·외환죄를 제외한 대통령의 임기 중 모든 공판 절차를 정지하는 형사소송법 개정안을 쏟아냈다. 그런데 이러한 민주당의 폭주에 대해 사법부의 독립성을 침해하고 이재명 1인을 위한 입법을 남발한다는 비판이 제기되는 가운데 중도층 민심 이반마저 감지되자, 이 후보는 곧바로 자기 뜻이 아니라며 발을 뺐다.
그러나 사법부 개혁은 대선 공약집에 명시되었고, 이재명 대통령 당선 직후인 4일 대법관을 30명으로 증원하는 법원조직법 개정안이 민주당 단독으로 법사위 소위에서 통과되었다. 이후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 파기환송심과 대장동 사건 재판부가 헌법 84조를 적용해 공판기일을 추후지정하고, 이재명 대통령이 다시 직접 나서 법원 개혁의 속도를 조절해달라고 주문하면서 당장의 입법 드라이브는 멈췄지만, 언제든 사법부를 길들이려는 시도가 재발할 수 있다.
한편, 다음날인 5일 국회 본회의에서 ‘3대 특검법’과 함께 법무부 장관도 검사 징계를 직접 청구할 수 있도록 하는 검사징계법 개정안이 통과된 가운데, 이재명 대통령이 윤석열 정부 국무위원 중 유일하게 박성재 법무부 장관 사의만 수용하고 민정수석실 산하에 사법제도비서관을 신설한 것에도 주목해야 한다. 한편으로는 ‘내란 세력 척결’에 검사를 대규모로 동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법무부 장관을 매개로 검찰에 대한 정치적 장악력을 높이고 살아 있는 권력에 대한 수사와 기소를 제어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김용민·민형배·장경태·김문수·강준현 민주당 의원은 검찰청법 폐지법안과 공소청·중대범죄수사청·국가수사위원회 신설법안을 6월 11일에 발의했다. 이에 따르면, 검찰은 법무부 산하 공소청으로 바뀌어, 영장청구·기소·공소유지만 담당하게 된다. 검찰의 수사권은 모두 행정안전부 산하 중대범죄수사청(중수청)이 넘겨받는다. 한편, 국무총리 직속으로 설치되는 국가수사위원회(국수위)가 모든 수사기관을 총괄하고 지휘하는 권한을 갖게 된다. 국수위원 11명은 대통령이 임명하고, 법조인 외에 비법조인도 위원이 될 수 있다. 검찰청을 헌법 개정 없이 해체하는 입법이 위헌적이라는 지적을 논외로 하더라도, 이러한 안은 수사와 기소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앞세워 실상은 살아 있는 정치권력이 수사권을 더욱 통제하고 장악하는 길을 여는 것이다.
다음으로, 국가재정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살펴보자. 이재명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불황과의 일전’을 치를 것이라며 경제성장과 재정지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국무총리와 비서실장에 이은 두 번째 인선으로 대통령실 경제팀을 우선하여 발표했다. 먼저 대통령실 경제수석을 경제성장수석으로 바꾸고 확장 재정의 필요성을 강조해 온 하준경 한양대 경제학부 교수를 임명했으며, 정책실장 산하에 재정기획보좌관을 신설하고 역시 확장 재정 필요성을 지지하는 류덕현 중앙대 경제학부 교수를 임명했다. 이러한 인선은 확장적 재정 정책을 위해 예산의 편성과 운영에 대한 대통령실의 개입을 강화하겠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대통령의 직무를 보좌하는 대통령실은 정부 부처 위에 군림하며 정책결정 과정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왔다는 점에서 ‘제왕적 대통령제’의 핵심 병폐 중 하나로 지적된다. 『청와대 정부』의 저자 박상훈은 “제어되지 않는 ‘강한 청와대’는 ‘민주적 책임 정부’와 양립할 수 없는 형용 모순”이라고 지적한다. 역대 정부는 모두 청와대와 대통령실 권력 축소를 공언했지만, 결과적으로 누구도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이재명 대통령 역시 대통령실 권한을 더욱 강화하는 방향의 초기 인선을 발표했다. 특히 정책실장 산하에 재정기획보좌관을 신설하고 민정수석 산하에 사법제도비서관을 신설하여, 국가재정과 사법부 개혁에 대한 대통령의 장악력을 높이는 데 초점을 둔 것으로 보인다. (자료출처: 《동아일보》)
한편, 조국혁신당 차규근 의원은 지난 4일 기획재정부의 예산 기능을 분리해 예산처로 독립시키는 정부조직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이재명 대통령과 민주당 역시 이전부터 기획재정부를 재정경제부와 기획예산처로 분리하고, 특히 기획예산처를 대통령 직속 기구로 두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선출되지 않은 정부 부처인 기획재정부가 국가재정에 대한 무소불위의 권력을 쥐고 “왕 노릇”을 하고 있으므로, 선출된 대통령에 의한 민주적 통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른바 ‘쪽지 예산’ 논란이 잘 보여주듯 입법부인 국회의 예산안 심사와 의결이 실질화되지 않은 상황에서, 예산안 편성권을 정부 부처에서 대통령실로 이전하는 것은 국가 재정을 더욱 소수의 권력자 손에 쥐여주어 재정의 정치화를 심화하는 방향일 뿐이다.
게다가, 이재명 정부와 민주당이 추진하는 재정지출 확대의 내용과 재원조달 수단도 문제다. 이재명 대통령은 대선 기간 경기와 민생 회복을 위해 지역화폐 형태의 전국민 지원금을 핵심으로 하는 약 21조 원 규모의 추경 편성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또한 경제성장을 위해 인공지능(AI)을 비롯한 국가첨단전략산업에 대한 대규모 재정 투자를 공약했다. 당선 직후 이 대통령이 경기 회복과 소비 진작을 위해 속도감 있게 추경을 편성할 것을 지시하였는데, 이러한 공약은 곧장 추경안과 2026년도 예산요구서에 반영될 가능성이 크다.
취약계층과 소상공인 보호를 위한 일정한 재정지출은 물론 필요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공적 부조의 영역일 뿐이고, 소득 지원 정책으로 경기를 회복하겠다는 건 언감생심이다. (민주당은 21조원 규모로 예상되는 이번 추경으로 경제성장률을 1%p 끌어올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특정 산업에 국가재정을 투여하는 산업정책으로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다는 주장 역시 한국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를 도외시한 터무니없는 기대일 따름이다. 실제로 첨단산업 육성에 효과가 있을 것인가를 논외로 하더라도, 생산성 한계와 경쟁력 저하에 직면한 수출 재벌체제를 어떻게 개혁할 것인지, 인구구조 변화에 대한 대응을 어떻게 해나갈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게다가 민주당은 대규모 재정지출을 위한 재원 마련 수단으로 적극적인 국채 발행만을 강조한다. 윤석열 정부 시기 발생한 대규모 세수결손에서 알 수 있듯, 장기저성장이 고착하고 경기침체가 심화하며 정부 재정 여력에도 제약이 크다. 이런 조건에서 조세 기반을 확대하는 증세 없이 국채 발행에 의존할 경우, 부채위기가 가속될 것이고 그로 인한 금리와 물가 상승 압력은 취약계층에게 더욱 무겁게 되돌아올 것이다.
그러나 그간 윤 정부와의 정략적 대결에 몰두하며 정부 재정지출에만 의존해 온 민주당에서 이러한 문제의식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결국 재정정책에도 미달하는 산업정책과 선심성 소득지원 정책은 경제성장은커녕 일시적 경기부양 효과도 크지 않을 것이며, 무엇보다 스태그플레이션과 부채위기가 결합하는 한국경제의 구조적 위기를 심화하고 그에 대한 정부의 대응력을 약화할 따름이다.
요컨대, 한국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가 심각한 조건에서, 입법권과 행정권을 장악한 강력한 ‘이재명의 민주당’이 독선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위기를 해결하는 좁은 길을 성공적으로 걸으리라 기대할 수 없다. 오히려 재정 지출 확대를 만병통치약으로 삼기 위한 기획재정부 해편과, 이재명 정권에 대한 사법적 견제를 무력화 하기 위한 검찰과 사법부 개혁으로 제왕적 대통령제를 개악할 가능성이 높다. 즉, 이재명 대통령과 민주당이 한국의 민주정을 위협하는 핵심은 ‘우클릭’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국민주권을 내세워 권력에 대한 제한과 견제를 약화하고 구조적 위기를 오히려 심화시키는 ‘국민주권정부’ 그 자체에 있다.
3) 사회운동은 이재명 정부를 어떻게 비판할 것인가
더욱 큰 문제는 문민화 이후 가장 강력한 권력을 쥔 것으로 평가받는 이재명 대통령의 국민주권정부를 제대로 견제하고 비판할 세력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보수세력이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과 함께 다시 한번 자멸한 가운데, 진보당과 민주노총이 민주당의 내란세력 청산과 압도적 정권교체에 부화뇌동하며 이재명 후보 지지를 노골화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민주당이 한국 자본주의의 위기와 헌정 위기를 심화하는 인민주의 세력이기 때문에 위험하다는 문제의식을 노동자운동과 사회운동 내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거대 양당 사이의 정치적 경쟁이 만성적 헌정 위기를 초래하는 파당 간의 내전으로 악화하는 가운데, 진보당과 노동운동 일각은 민주당이 주도하는 내란세력 척결에 부화뇌동하며 노골적으로 이재명 후보를 지지하기에 이르렀다. 진보당은 지난해 총선에서 반윤 범야권연대가 필요하다며 민주당의 비례위성정당인 더불어민주연합에 참여한 데 이어, 이번 대선에서는 야5당 원탁회의(민주당, 조국혁신당, 사회민주당, 기본소득당, 진보당)를 통해 민주당과 적극적인 연대연합을 추구했다.
4월 19일 진보당 대선후보로 선출된 김재연 상임대표는 5월 9일 ‘광장연합의 힘을 통한 압도적 대선 승리’를 위해 이재명 후보를 ‘광장대선후보’로 지지한다며 사퇴했다. 이후 김 대표는 이재명 후보 중앙선대위 공동선대위원장이 되었고, 진보당 의원을 비롯한 간부들은 각지에서 이 후보 선대위와 선거 유세에 적극 참여했다. 채진원 경희대 공공거버넌스연구소 교수는 이를 두고 “과거 정의당처럼 후보를 내고 단일화를 조건으로 정책연합이라도 추진한다면 모르지만, 후보도 안 내면서 연합한다는 것이 어디 있나”라며 “소수정당이나 다양성에 기초한 연합이 아니라 위성정당을 포함한 지배연합이라고 볼 수 있다”라고 지적했다. (“헌정수호 합의 민주당 등 야5당, 교섭단체 논란 왜?”, 《경향신문》, 2025년 4월 27일.)
진보당은 지난 총선에서 더불어민주연합에 입당해 비례 순번 15번을 받고 계속해서 민주당 당적을 유지하던 손솔 전 수석대변인이 이재명 정부 안보실장에 발탁된 민주당 위성락 의원 궐원을 승계함으로써, 국회 의석을 4석으로 늘리는 데 성공했다. 실리에 취한 진보당은 앞으로도 내란세력 척결과 사회대개혁을 명분으로 민주당의 지배연합에 편승하는 데 더욱 앞장서면서, 파당 간의 퇴행적 경쟁으로 헌정 위기를 만성화하는 데 일조할 것으로 보인다.

김재연 진보당 상임대표는 대선후보 사퇴 이후 5월 14일 이재명 후보 중앙선대위에 참석해 “진보당은 민주수호 광장의 시민사회, 제 정당들과 함께 극우내란세력의 재집권을 저지하고 사회대개혁의 과제를 흔들림 없이 추진하기 위해 이재명 후보를 ‘광장대선후보’로 선언했습니다. 빛의 광장, 그 뜨겁고 간절한 힘으로 압도적 정권교체를 이루겠습니다.”라고 발언했다. (사진출처: 진보당)
또한, 진보당은 민주당과의 연대연합에 편승해 자당의 정치적 복권을 이루기 위해 지난해 총선에 이어 다시 한번 민주노총을 정치적 분열로 내몰고 노동조합 민주주의의 근간을 훼손했다. 지난 총선에서 양경수 집행부는 대의원대회 결정으로 위성정당 참여 금지를 규정한 민주노총 총선방침 4항을 정면으로 위반한 진보당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지 않으면서, 정파의 이해를 앞세워 민주노총의 민주주의를 무너뜨렸다. 이번 대선에서도, 양경수 집행부는 진보당의 노선을 따라 민주노총이 민주당 이재명 후보를 지지할 수 있도록 하는 대선방침을 통과시키려 시도했다. 4월 29일 중집에서 ‘진보정당 후보’뿐만 아니라 ‘진보정당과 연대연합을 실현한 후보’를 지지한다는 후보방침을 제안한 것인데, 사실상 이재명 후보 지지를 열어두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에 격렬한 반발이 잇따르면서 이러한 대선방침을 확정짓지 못했음에도, 민주노총 집행부는 민주당과 정책협약을 추진하기도 했다. (이는 5월 15일 중집에서 논란 끝에 중단되었다) 한편, 유일하게 남은 진보정당 후보인 민주노동당 권영국 후보 지지로 대선방침을 세우자는 중집성원의 의견도 있었으나, 양경수 집행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양경수 집행부는 이번 대선에서도 진보당의 파당적 이해를 앞세우며 대선방침을 형해화함으로써, 민주노총을 정치적으로 분열시키고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파산시켰다.
이렇게 진보당과 민주노총 집행부가 노골적으로 민주당의 하위파트너를 자처하는 상황에서, 민주당에 포섭되지 않는 민주노동당 권영국 후보의 존재와 독자 완주는 분명한 의미가 있었다. 진보당과 민주노총 집행부의 행보에 비판적인 진보 3당(정의당, 노동당, 녹색당)과 노동운동·사회운동 세력은 ‘사회대전환 대선 연대회의’를 구성하고 경선을 통해 민주노동당 권영국 후보를 선출했다. (정의당은 대선 공동대응을 위해 당원총투표를 거쳐 당명을 민주노동당으로 변경하였다) 권영국 후보는 민주당의 압도적 정권교체론과 선을 그으면서, 극단화된 정치적 양극화의 배경에 경제적·사회적 불평등이 있음을 지적하고 노동권과 사회권의 확대를 대안으로 제기한 유일한 후보였다.
다만 몇 가지 중요한 과제도 남았다. 무엇보다 민주노총의 정치방침과 대선방침이 양경수 집행부로 인해 형해화된 조건 속에서 진보당의 맹목적인 민주당 지지를 비판하며 민주노동당 권영국 후보를 지지하는 흐름이 주요 산별을 비롯한 노조 단위를 중심으로 모였으나, 조합원의 광범위한 참여보다는 노동조합 상층 간부와 일부 활동가 중심의 선거운동에 그쳤다는 한계가 있다. 민주노총 내에서 반진보당을 중심으로 정파 간 연합 전술을 시도하는 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기층에서부터 더 많은 조합원과 함께 정치 정세에 대한 인식을 넓히고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역사를 돌아보며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방향을 구체화하는 과제가 남은 셈이다.
또한, (진보당의 구호와 동일한) 내란세력 청산과 사회대개혁을 내세우며 민주당의 ‘외부’이자 ‘왼쪽’에서 이를 견인한다는 민주노동당의 전략은, 민주노동당이 민주당과 분별정립할 수 있는 구도를 만드는 데에는 한계적이었다. 이는 지난 총선에서 민주당의 비례위성정당에는 참여하지 않지만, 다른 방식으로 야권연대를 추진하고자 했던 정의당이 보인 한계를 반복하는 것이기도 했다. 결국 정당 체계와 민주정의 질적 타락을 주도하는 민주당의 인민주의를 분명하게 비판하는 데에서 출발해야만, 민주당이나 진보당과 구별되는 정치세력으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과제는 민주노동당만의 과제가 아니라, 독자적 노동자 정치세력화와 진보정치의 재건을 모색하는 노동자운동과 사회운동 전체의 과제다. 이번 대선에서 민주노동당이 남긴 성과와 과제를 바탕으로, 지난 야권연대 실패의 역사를 직시하며 민주당에 포섭되지 않는 노동자 정치세력화와 진보정당 운동의 새로운 길을 찾는 계기를 계속해서 모색해야 한다.
4. 결론
이번 대선은 한국 민주정과 헌정의 중대한 위기 속에서 치러졌다. 문민화 이후 초유의 ‘셀프 쿠데타’를 시도한 윤석열 전 대통령과 이를 두둔하는 데 앞장선 국민의힘에 대한 심판이 이루어지면서, 이재명 대통령과 민주당이 집권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러나 비상계엄 사태와 그로 인한 탄핵이라는 전대미문의 상황 속에서도 거대 양당은 헌정질서 회복보다는 권력 쟁취에 몰두했다는 점에서 헌정 위기 해소와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이번 대선은 향후에도 정치적 양극화와 제도적 파행이 심화하며 헌정 위기가 고착할 것임을 보여주었다.
무엇보다 지난 3년을 거치며 한국의 정당체계가 한층 더 타락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민주당은 이재명 대표 체제에서 팬덤 당원이 직접 지배하는 ‘이재명의 민주당’을 완성하며 완연한 인민주의적 정당이 되었고, 국민의힘은 보수주의에도 미달하는 기회주의와 극우가 혼재된 무원칙 정당의 민낯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거대 양당은 제왕적 대통령직을 장악하기 위한 극단적 갈등을 빚는 과정에서 당내 민주주의뿐만 아니라 정치제도와 관행을 파괴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2020년대에 이르러 기존의 정당이 점차 팬덤 정치에 잠식되고, 정당체계 역시 당직과 공직을 장악하려는 파당 간의 ‘내전’으로 악화하면서, 앞으로도 헌정 위기가 만성화될 우려가 크다.
그런 가운데, 이재명 정부가 내세우는 ‘국민주권’은 인민주의적 통치 이념으로서 권력을 제한하고 견제하는 제도와 관행을 해체할 위험성이 크다. 이재명 대통령과 민주당은 지난 문재인 정부가 실패한 원인을 기획재정부와 검찰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데서 찾으면서, ‘민주적 통제’라는 명분을 앞세워 실제로는 선출된 권력자가 법치와 재정을 더욱 정치적으로 통제할 수 있도록 제도를 변형하고자 한다. 이는 금융위기 이후 세계적으로 확산하고 있는 인민주의와 권위주의의 전형적 특성과 일치한다. 이들은 인민주권을 절대화하며, 자신을 지지하는 ‘진정한 인민’에 의해 선출된 권력자가 자의적으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기존의 정당이나 사법부와 같은 매개조직을 기득권과 부패세력으로 지목하고 약화시키려 한다.
사회운동과 노동자운동은 이재명 대통령과 민주당의 ‘국민주권정부’가 중도보수를 자처하며 ‘우클릭’ 행보를 보이기 때문에 문제라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즉, 신자유주의를 적극 수용하면서 ‘좌회전 깜빡이 켜고 우회전’한 노무현 정부나 이른바 ‘촛불민심’을 배반했다는 문재인 정부와도 질적으로 다른, 국민주권을 내세워 민주정과 헌정을 구성하는 제도와 관행을 파괴하고자 하는 세력이기 때문에 문제라는 점을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정당체계가 돌이킬 수 없이 붕괴하고 보수세력이 자멸한 가운데 노동운동과 사회운동 일각이 이재명 대통령과 민주당을 더욱 노골적으로 지지하는 상황에서, 문민화 이후 가장 강력한 권력을 장악한 것으로 평가받는 이재명 정부를 제대로 견제하고 비판할 세력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엄중히 인식해야 한다. 사회운동이야말로 입법부와 행정부를 장악한 ‘이재명의 민주당’이 민주정의 제도를 파괴하고 자의적 지배를 강화하려는 것에 대한 적극적 비판세력을 자임하는 가운데, 노동권과 사회권의 확장을 모색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