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2025 가을. 19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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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현대사로 살펴본 이슬람주의 비판

좌절과 극단이 낳은 이란 신정체제

김영진 | 정책교육국장

1. 서론

 

2025년 6월 13일부터 25일까지 ‘12일 전쟁’에서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공습은 전 세계인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사건의 발단은 6월 12일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이란의 핵확산금지조약(NPT) 의무 위반을 규탄하는 결의안을 통과시킨 것이다. 이란이 무기화가 가능한 고농축 우라늄 생산을 늘리며 국제원자력기구의 조사와 정보 제공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과 미국의 공습은 국제법을 위반하는 행위였으나, 이란의 핵무기 개발 의혹도 근본적으로 중동의 평화와 안정에 큰 걸림돌일 수밖에 없다.

 

2022년 9월 이란에서는 쿠르드인 여성 마흐사 아미니가 히잡을 제대로 착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여성 복장을 규제하는 도덕경찰에 체포돼 며칠 후 의문사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란 전역에 반정부 시위가 펼쳐졌다. ‘여성, 삶, 자유’ 구호는 이란을 넘어 전 세계로 확산했다. 이란 정부는 이를 강경하게 탄압했다. 사건을 취재한 기자들을 체포해 징역 13년을 선고했으며 반정부 시위를 주도한 이들을 처형했다. 아미니 시위는 이란 정부의 권위주의적 본질을 국제사회에 각인시켰다.

 

[사진] 2022년 10월 28일 테헤란 아미니 추모 시위

2022년 9월 16일 쿠르드인 여성 마흐사 아미니가 도덕경찰에 의해 사망한 후, SNS를 타고 전 세계와 이란에서 항의 시위가 잇따랐다. 국제적인 비판 여론에 이란 정부는 도덕경찰 폐지를 검토하겠다 했으나 여전히 유지 중이다. 오히려 아미니 1주기 추모 시위 당시 애도를 금지하며 유족을 체포했다. 당시 라이시 대통령은 시위가 외세의 음모라 주장하며 강경한 자세를 보였다. (출처: 《AFP》)

 

중동의 평화를 위협하는 행보와 시민을 무력으로 억압하는 이란은 분명 문제가 있다. 그렇다면 이란은 왜 이런 행보를 보이는 것일까? 일각에선 잘못을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의 책임으로 돌린다. 실제로 이란 정부는 그렇게 주장한다. 그러나 모든 책임이 서방 국가들에만 있다고 볼 수 있을까? 외부 세력의 음모가 주변국들에 대한 위협과 국내의 폭압적 통치를 정당화할 수 있을까?

 

이란은 종교 지도자가 이슬람법에 따라 통치권을 행사하는 ‘신정체제’를 채택한 나라로, 1979년 이슬람 혁명 이래 신정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슬람법에 따른 이란의 통치는 과연 무결점이며 모순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이슬람 국가로서 이란이 여러 혼란과 위기에 책임이 있다면, 이란 신정체제에 대한 분석을 외면할 수 없다. 왜 이란이 오늘날 중동의 위기와 긴장의 한가운데에 있는지를 답할 수 있을 때, 오늘날의 불안정한 상황을 어떻게 바로잡을 수 있을지에 관한 생각을 진척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은 오늘날 이란의 신정체제를 받치고 있는 이데올로기로서 ‘이슬람 원리주의’, 줄여서 ‘이슬람주의’(Islamism)를 분석하고 비판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를 위해서 이슬람주의의 주요 특징을 설명하고, 이슬람주의가 이란에 어떤 과정을 통해 정착했는지를 소개한다. 그리고 이슬람주의를 정착시킨 1979년 이슬람 혁명 이후의 이란 이슬람 공화국이 어떻게 이란의 시민을 억압하고 중동에 평화를 위협해 왔는지를 폭로한다. 그리고 이란과 중동 지역의 인민이 국내적으로, 대외적으로 극단적 폭력의 위협에서 벗어나 대안적인 질서를 구축하기 위해선 이슬람주의를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2. 이슬람주의 비판

 

많은 사람이 종교로서 이슬람교와 정치이데올로기로서 이슬람주의를 혼동한다. 왜냐하면, 이슬람주의자들이 의도적으로 둘의 구분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슬람교와 이슬람주의의 차이는 중요하다. 이슬람교가 아니라 이슬람주의가 무슬림과 비무슬림 간의 사회적 갈등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이슬람 정치학 교수인 바삼 티비는 이슬람주의를 이슬람 종교와 구별되는 정치화된 이데올로기로 본다.

 

이슬람교는 신앙과 종교, 윤리적 틀로서 정치적 가치를 내포하지만, 구체적인 정치질서를 전제하지 않는다. 반면, 이슬람주의는 주권이 국민이 아닌 알라(신)의 뜻에서 비롯하는 정치질서를 상정한다. 이슬람주의의 주된 신조는 이슬람법(샤리아)에 의거한 정교일치로, 이는 신앙을 명분으로 정치체제의 구색을 맞춘다.

 

이슬람 문명은 과거 수 세기간 인류문명의 발전에서 선두권에 있었다. 그러나 17세기를 지나면서 이슬람 문명은 유럽에 뒤처지기 시작했다. 18세기 오스만제국 등 이슬람 국가들의 연이은 군사적 패배는 무슬림이 서양을 배워야 한다는 인식으로 이어졌다. 서양의 군사 기술과 무기 수입에 의존하던 상황에서 지식인들은 점차 사회, 제도 개혁의 필요성을 느꼈다. 하지만 장기간 정교일치 문명을 지속해오던 무슬림에게 유럽식 제도와 법은 기독교와 동일시되어 거부감이 심했다. 그 결과 지식인들은 주로 프랑스혁명을 통해 세속주의, 현대화를 접하기 시작했다. 프랑스혁명을 탈기독교 운동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개혁운동을 이끌던 무슬림 지식인들은 20세기 들어 이슬람 세계의 현대화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현대화를 지지하는 사회적 기반이 취약한 가운데, 개혁적 지식인층은 서방 열강에 의존하거나 독재정치를 추구하며 이슬람 사회에 광범위한 저항을 낳았다.

 

이슬람 세계의 세속적 현대화는 결과적으로 20세기 대부분의 나라에서 실패했다. 서방 열강에 대한 의존성, 특정 자원에 편중된 경제구조, 무엇보다 독재정권의 억압과 사상교육은 이슬람 세계의 많은 인민에게 큰 좌절감과 실망을 안겨주었다. 특히나 과거 세계를 호령하던 이슬람 국가들에서 빈곤과 무기력이 지속되자 자존심의 상처가 컸다. 그 결과, 중동의 좌절감은 분노로 변했다. 역사학자 버나드 루이스에 따르면, 현대화의 실패 속 무슬림은 비참한 현실을 마주하자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는가?”가 아닌 “누가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는가?”로 질문을 퇴보시켰다. 중동 무슬림 지식인들은 그 표적을 외부로 돌렸다. 이슬람주의는 이런 배경에서 이슬람 문명의 부흥을 주장하며 성장했다.

 

이슬람주의는 이슬람주의자들의 주장과 달리, 이슬람교 전통과 무관한 ‘꾸며낸 전통’이다. 이슬람주의자들은 이슬람교의 대표 경전인 ‘코란’과 예언자 무함마드의 언행록인 ‘하디스’와 무관한 내용을 ‘전통’이라 강변하며, 예언자 무함마드가 이끌었던 이슬람 공동체인 ‘움마’의 재현을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이 주장하는 ‘움마’는 역사상 실존했던 ‘움마’와는 무관한 상상 속 신화 즉, 천년왕국이다. 구체적으로 이슬람주의자들은 어떤 주장을 할까?

 

먼저 이슬람주의자들은 세계를 다시 만들겠다는 야망을 공유한다. 그들은 1648년 베스트팔렌 평화조약 이래 형성된 현대 정교분리와 국민주권 국가의 세계질서를 이슬람법(샤리아)에 기초한 알라 통치의 세계질서(니잠 이슬라미)로 대체하고자 한다. 1924년 칼리프 제도가 폐지된 후 중동의 세속 민족국가들이 연이어 현대화에 실패하자, 이슬람주의자들은 대안으로 이슬람교를 내세웠다.

 

여기서 ‘이슬람교’란 종교적 신념이 아닌, 인류를 이슬람교의 세계질서로 재편해 단일조직으로서 전 무슬림 공동체로 통합하자는 주장이다. 그리고 그들이 단일 무슬림 공동체로서 ‘움마’를 구성하는 원리로 제시한 ‘신 이슬람질서’란 정교일치의 정치와 샤리아에 기초한 통치다. 그들은 오늘날 17억이 넘는 무슬림 사회가 분열한 이유는 서방 세계의 현대화 탓이라 주장하며 서구식 가치관을 거부하지만, ‘신 이슬람질서’는 세속 민주주의 민족국가에 대한 반대 이상으로 구체적이진 않다.

 

이슬람주의의 핵심은 통치의 기초인 이슬람법 즉, ‘샤리아’다. 샤리아는 코란에 단 한 번 등장한다. “우리가 너희에게 바른 길(샤리아)을 마련하니 이를 따르라.”(코란 45장 18절) 이 구절에서 샤리아는 이슬람교의 다섯 기둥을 일컫는다. 예언자 무함마드 사후(632년) 100여 년이 지난 후, 무슬림 학자들은 코란과 무함마드의 언행에 기초한 법규범을 확립하고자 했다. 이들이 발전시킨 고전 샤리아는 종교의례, 민사법, 형사법으로 구성된 일종의 지침이자 판례의 누적이며 학파에 따라 해석이 다양했다. 또한, 샤리아는 정치 질서와 무관했다. 정치는 이슬람 국가 지도자인 칼리프의 통치행위였으며 사회적 규범으로서 샤리아는 별개의 영역이었다. 즉 샤리아는 통치 시스템과 무관한 사회적, 윤리적 관행에 가까웠다. 그러나 이슬람주의자들은 샤리아를 절대화한다. 관행의 누적을 절대적 사법제도로 둔갑시켰으며, 존재하지도 않았던 통치구조와 관련해 샤리아가 ‘이슬람식 헌법’이라 주장한다. 그들은 샤리아를 엄격한 도그마로 법제화하며 이견을 허용하지 않고 헌법으로 위상을 격상해, 현대적 의미의 ‘법의 지배’를 반대하는 새로운 문명 프로젝트로 정치화한다.

 

많은 이슬람 연구자가 주목하는 이슬람주의의 중요한 특징은 반유대주의다. 이슬람주의자들에게 신 이슬람질서 프로젝트의 결정적 반대세력은 유대인이다. 전통적으로 유대인은 이슬람 문명에서 소수민족이자 별도의 종교를 가진 억압 대상이었다. 유대인에 대한 전통적 반감은 1930년대를 거치며 반유대주의로 발전했다. 이슬람 연구자 제프리 허프는 이때의 반유대주의가 중동 세속 지식인들의 친나치 성향에 기인했다고 분석했다. 1차 세계대전까지 프랑스의 사상과 문화에 영향을 받았던 중동 민족주의 지식인들은 1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와 영국이 독립시켜 주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서 친독일로 기울어졌고, 1930년대 나치당이 집권한 제3제국 시기에 그들의 반유대주의 선전에 큰 영향을 받았다. 독일은 반유대주의적 『시온주의 의정서』를 유포하는 한편, ‘베를린 아랍어 방송’ 등 단파 라디오 방송을 통해 반유대주의를 광범위하게 선전했다.

 

특히 팔레스타인 민족운동 지도자인 아민 알 후세이니는 중동에서 반유대주의 확산에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1941년 히틀러와 만난 뒤 1945년 4월까지 베를린에서 나치 외무부 소속으로 일하며 북아프리카부터 중동 지역 전체에 라디오로 반유대주의 선전을 펼쳤다. 알 후세이니는 유대인이 미국과 영국의 후원을 받고 있으며, 전쟁이 끝나면 중동에 시온주의 국가를 세울 것이고 북아프리카와 중동의 무슬림 국가들을 축출할 것이라고 선전했다. 이를 막기 위해 무슬림은 나치 독일과 협력해 유대인을 박멸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무슬림 무장 친위대를 조직했다.

 

그의 주장과 음모론은 실제로 전후 이스라엘이 건국되자, 중동의 많은 무슬림 지식인이 반유대주의를 수용하게끔 했다. 이슬람주의자들은 여기에 종교적 색깔을 덧붙였다. 알 후세이니의 후원자였던 무슬림형제단의 사이드 쿠틉을 비롯한 이슬람주의자들은 유대인의 음모가 예언자 무함마드가 있던 시절부터 나타났으며, 유대인이 기독교와 미국이라는 대리자를 통해 세계를 통치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텔아비브대 중동 역사학 교수 메이어 리트박은 이란에서는 반유대주의가 홀로코스트 부정론으로 나타났다고 지적했다.

 

[사진] 이란의 반유대주의

메이어 리트박 교수에 따르면, 이란과 아랍세계는 나치에 의한 홀로코스트를 부정한다. 특히 이란의 경우, 《카이한 인터내셔널》, 《테헤란 타임즈》 등의 관영매체 혹은 친정부언론은 홀로코스트가 이스라엘을 건국하기 위한 유대인의 조작이라고 주장하며 유대인에 의한 팔레스타인과 무슬림의 피해야말로 진정한 홀로코스트라고 주장한다. 실제 이란에선 1월 27일 국제 홀로코스트 추모일에 ‘홀로코스트 만화 경진대회’를 개최한다. 대회는 홀로코스트와 유대인을 조롱하는 만화 중에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은 만화를 그린 사람에개 약 5만 달러의 상금을 수여한다. 서방의 비판에 이란 정부는 단지 민간단체 행사일 뿐이라고 일축한다. 사진은 2006년 이슬람혁명 기념일 집회의 반유대주의 피켓으로, “홀로코스트는 거대한 거짓말!”이라고 쓰여있다. (사진출처: 《로이터》)

 

이슬람주의는 이슬람질서를 위협하는 세력에 맞선 ‘지하드’를 강조한다. 원래 이슬람교에서 지하드는 자기수련이나 물리적 투쟁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슬람 국가는 초기부터 적극적인 포교활동을 전개했는데 평화적 포교활동을 하면서도 이슬람교 문화를 위협하는 세력에 대한 방어전쟁으로 지하드 개념을 사용해왔다. 이슬람주의자들은 전통적인 지하드 개념을 바꾸었다. 그들은 이슬람 문명이 서방과 세속주의에 포위되었기에 그들을 상대로 방어전쟁을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현대국가 간 전쟁 개념에 구애받지 않는 비정규전으로서 테러행위를 정당화한다. 그들은 자신의 행위를 테러가 아닌 알라의 이름으로 세계적 전쟁을 선포하는 전사의 행동으로 여긴다. 이슬람주의자들의 지하드운동은 사회적으로 소외된 젊은 무슬림에게 인기가 많다. 그들이 신병 모집에 몰리는 까닭은 지하드운동이 정말 마음에 들기보단 암울한 현실에서 위안과 의미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슬람주의의 마지막 특징은 순결에 대한 열망이다. 이슬람주의는 서구의 가치관과 세속주의를 부정하지만, 현실에서 서구의 제도와 현대 과학기술을 일정 부분 수용한다. 이슬람주의자들은 이러한 모순에 대해 진정성과 순결을 내세운다. 그런 수용이 ‘유대인의 음모와 서양화’에 대항한다는 점에서 진정성과 순결이 있다고 정당화하며 이를 ‘준현대성’이라 부른다. 이슬람주의자들은 과거 다양한 문명과 교류했던 이슬람 문명의 역사를 배격하며, 서구의 기술과 제도를 오직 이슬람질서를 구현하기 위한 수단으로서만 사고한다.

 

바삼 티비는 이런 이유에서 민주적 선거제도에 참여하는 제도적 이슬람주의자들을 ‘개혁파’로 분류하며 그들을 높이 평가하는 《포린 어페어스》의 미국 정책가, 외교관들에게 비판적이다. 2000년대 초 미국 정부는 터키 정의개발당(AKP)의 제도정치 참여, 친미국적 행보, 민병대 미보유에 우호적이었으며, 하마스의 2006년 의회 선거제도 참여를 환영했다. 그러나 2010년대 들어 정의개발당의 에르도안 총리는 권위주의, 이슬람주의로 경도됐으며, 하마스는 민병대를 통해 세속주의적 파타당을 가자지구에서 몰아냈다. 티비는 안보에 집착해 비폭력 이슬람주의자들의 타협책을 수용하는 것은 중동 지역의 평화를 담보하지 못하며 진보적 무슬림의 입지를 좁힐 뿐이라 비판한다.

 

그는 동시에 인도네시아 종교부와 모로코의 사례를 소개하면서 정교분리를 지향하는 세속주의적 진보적 무슬림 공동체에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모로코는 1999년 즉위한 무함마드 6세 이후 진보적인 이슬람 개혁의 길을 걸었다. 무함마드 6세는 재위 중 강제결혼 금지, 유대인 차별 금지를 법으로 제정하며 인권을 개선하는 법을 다수 도입했다. 그는 2011년 아랍의 봄 시기, 헌법을 개정해 사법부의 독립, 행정권한의 총리 위임을 보장했다. 인도네시아 종교부 지도자 아즈유마르디 아즈라는 민주정치와 이슬람교의 공존을 주장하며 세속주의적 다원주의 교육을 전파했다.

 

결국, 이슬람주의는 현대화의 실패와 좌절 속에서 성장한 이데올로기로, 이슬람 종교와 역사를 재해석함으로써 이슬람 문명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전체주의 이데올로기다. 이슬람질서를 세계적으로 건설한다는 명분으로, 이슬람주의는 다양한 해석을 거부하고 이견을 이슬람 문명을 위협하는 유대인과 서양인들의 음모로 간주한다. 그리고 위협세력에 맞서는 수단으로 성전을 중요시하며, 서구의 제도와 기술은 순결한 이슬람질서 건설을 위한 수단으로만 여긴다. 민주정치, 유대인, 세계질서는 이슬람주의와 양립 불가능한 것으로 상정된다.

 

 

3. 이란현대사로 살펴본 이란 이슬람주의의 정착과정

 

이슬람주의는 이란에서 어떻게 형성, 정착됐을까? 이란은 이슬람교의 대표 종파 중 비주류인 시아파의 대표 국가다. 그렇기에 일반적인 이슬람주의의 특성을 공유하면서도 독특한 이슬람주의가 나타났다. 그 결과물이 바로 오늘날의 이란 이슬람 공화국이다.

 

1) 전사: 이란에서 시아파의 정착과정

이슬람교의 대표 종파인 수니파와 시아파는 예언자 무함마드 사후 이슬람 지도자를 뽑는 과정에서 형성되었다. 수니파가 부족 전통에 따른 칼리프 선출을 주장했던 반면, 시아파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혈통만이 이슬람 지도자가 될 수 있다고 맞섰다. 양자의 대립은 4대 정통 칼리프이자 예언자 무함마드의 사촌인 알리가 사망한 후 우마이야 왕조가 등장하면서 본격화됐다. 시아파는 알리의 후계자만이 이슬람 지도자임을 고수하며 수니파 칼리프 국가에 저항했다. 그 결과 시아파는 우마이야 왕조의 큰 탄압을 받았다. 알리의 후계자들은 ‘이맘’(모범이 되는 자)으로서 시아파의 지도자로 활동했다. 왕조의 탄압 속에서 이맘들은 상당수 순교했다. 그 결과, 12대 이맘부터는 은둔하여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후 시아파는 12대 이맘의 복귀를 소원하며, 그 외의 정치질서, 국가를 일절 인정하지 않았다. 시아파는 메시아인 ‘숨겨진 이맘’의 구원을 바라며 피억압자의 저항정신을 강조하는 측면에서 수니파와 구분됐다.

 

시아파의 전통은 16세기 페르시아 지역에서 사파비 왕조가 등장하며 큰 변화를 맞이한다. 사파비 왕조는 중동지역 패권을 놓고 오스만제국과 경쟁했다. 사파비 왕조는 수니파 오스만제국에 대항해 시아파 이슬람교를 국교로 채택했다. 왕조는 시아파 성직자 지식인(울라마)들을 지지기반으로 삼기 위해 시아파 종교인에게 신도로부터 종교세 ‘훔스’를 거둘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며 그들의 경제적 독립을 보장했다. 이는 전쟁에 얻은 전리품 중 20%를 이슬람 공동체가 필요할 때 사용할 목적으로 비축해 놓는 코란 8장 41절에 근거한다. (이를 수니파는 전쟁 시에만 걷는 것으로 간주한 반면, 시아파는 숨은 이맘을 대신해 시아파 성직자들이 신도들로부터 걷는 특별 종교세의 근거로 삼았다.) 그 대가로 시아파는 전통과 달리 사파비 왕조를 세속적 통치자로 인정했다. 사파비 왕조의 지원을 바탕으로 시아파 교단은 페르시아 지역에 뿌리내렸다.

 

사파비 왕조 시기 시아파 교단에서는 교리에 대한 개인의 독자적 해석인 이즈타히드(유권해석)을 강조하는 우슬리 학파가 주류를 이뤘다. 처음에 우슬리 학파는 충분한 교육과 훈련을 받은 자라면 적법한 예언자 무함마드 혈통이 아니라도 교리 해석을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진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종교계의 충분한 지지를 받는 소수 시아파 성직자(무즈타히드)만이 이즈타히드를 수행할 수 있으며 신도들은 그들의 권위를 따라야 한다는 이론(무즈타히드론)으로 나아갔다.

 

1722년 사파비 왕조 붕괴 이후 페르시아 지역은 1세기간 중앙권력이 공백인 대혼란기였다. 이 시기 우슬리 학파를 중심으로 한 시아파 교단은 교육과 사법 역할을 대신 수행하며 권력 공백을 메웠다. 이후 1796년 페르시아 지역을 통일한 카자르 왕조는 중앙집권이 취약한 유목민 왕조였다. 카자르 왕조는 우슬리 학파에 교육과 사법 영역에서 광범위한 역할을 맡기며 취약한 권력구조를 채웠다. 지역사회에서 역할이 커지면서 우슬리 학파는 무즈타히드론을 성직가 계층구조로 제도화, 관행화했다. 이른바 ‘마르자에 타클리드 제도’는 가장 권위 있는 성직자인 마르자에 타클리드(대(大) 아야톨라)를 정점으로 아야톨라, 호자톨 이슬람의 무즈타히드(유권해석이 가능한 성직자)로 이어지는 위계적인 성직자 계층도다.

 

[그림] 시아파 종교 계층구조와 마르자에 타클리드 제도

이즈타히드(유권해석)이 가능한 무즈타히드 성직자(울라마)들은 권위를 가진 모칼라드(모방되는 자)로 불린다. 이들은 신도들(모칼레드, 모방하는 자)을 지도하고 입법해석권을 가진다. 무즈타히드의 규모가 커지면서 20세기 들어 아야톨라와 호자톨 이슬람으로 분화하는데, 아야톨라 이상이 독자적인 입법해석권을 가진다. 아야톨라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들은 대(大)아야톨라 혹은 아야톨라 우즈마(마르자에 타클리드)로 불린다. (그림출처: 요시무라 신타로, 『이란 현대사』, 한국외국어대학출판부, 2011)

 

19세기에 들어서 서양과의 교류 속에서 도시가 발전하기 시작했다. 도시의 발달은 시장(바자르)의 발달로 이어졌다. 시장 상인계층과 이슬람 성직자들은 상호간 긴밀한 동맹관계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상인들은 성직자들을 재정적으로 지원하고, 성직자들은 상인들을 교육하고 분쟁을 조정해 주는 역할을 하면서 바자르 상인계층과 성직자 간 정치, 경제적 동맹관계가 강해졌다. 성직자-상인계층 동맹은 이후 이란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회세력으로 기능했다.

 

2) 이슬람주의의 기원이 된 입헌혁명

19세기부터 이란은 서구 열강의 진출과 함께 각종 이권을 침탈당했다. 러시아와 영국이 가장 대표적인 국가였다. 러시아와 영국은 카자르 왕조와의 거래를 통해 이란에 대한 내정간섭을 심화해갔다. 특히 카자르 왕조는 왕실 사치로 국가재정이 고갈되자, 각종 이권을 열강들에 팔았다. 이에 이란의 상인과 성직자 계층은 크게 반발했다. 1890년 왕조가 영국인 탈보트에 담배 전매권 50년을 부여하자 여러 성직자와 상인이 연초불매운동을 펼친 것이 대표적이다.

 

성직자 지식인들은 왕실이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고 국가재정을 마음대로 사용하며 재정 충당을 위해 영국과 러시아에 차관을 빌리거나 이권을 양도하는 것에 제약을 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1905년 테헤란에서 상인과 지식인들이 비밀결사체인 ‘비밀회’, ‘인간회’ 등을 결성하여 왕실의 전제권력을 제한할 헌법과 의회민주주의를 연구했다. 이들은 당시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러시아에 우위를 점하는 상황에 주목하여, 입헌민주주의의 도입이야말로 이란이 외세 종속에서 벗어날 방법이라 보았다.

 

한편, 러일전쟁의 여파로 러시아와 교역이 감소하면서 이란의 물가상승률이 굉장히 높아졌다. 정부는 당시 설탕 가격 폭등의 원인을 상인들의 사재기로 보고 1905년 2월 테헤란 상인 2명을 공개태형에 처했다. 태형에 처해진 상인들이 지역에서 신망이 높았기에 시민과 상인의 불만이 폭발했다. 상인과 시민은 시위를 벌이며 재상의 해임을 요구했다. 정부가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사망자가 발생하자, 테헤란 지역 종교지도자인 베흐바하니와 타바타바이를 중심으로 성직자들이 개입했다. 그들은 연좌시위를 벌이며 재상 해임, 헌법 제정과 의회민주주의 도입을 요구했다. 정부가 무응답으로 일관하자, 이들은 집단적으로 테헤란을 떠남으로써 저항했다. 1천 명이 넘는 성직자들이 테헤란을 떠나자 대중 시위는 더욱 거세졌다. 대치 상황이 1년을 넘기자 군대도 동요하기 시작했다. 결국, 왕은 1906년 8월 제헌을 약속하는 포고령을 내리며 입헌 요구를 수용했다. 이를 입헌혁명이라 부른다.

 

그해 10월 처음으로 개회한 의회는 곧장 헌법 제정에 착수, 12월 30일 처음으로 헌법을 제정했다. 그러나 어떤 헌법을 도입할 것인지를 놓고 입헌혁명을 주도한 지식인들 사이에서 분열이 발생했다. 서구식 입헌국가를 지향한 하산 타키자데를 중심으로 하는 특별위원회는 헌법 보칙에 주권재민, 삼권분립, 국왕과 정부의 권한을 명시하고자 했다. 여기서 유력 무즈타히드인 셰이크 파즐룰라 누리가 이견을 표출했다. 누리는 ‘이슬람법(샤리아)’에 대한 존중을 최우선으로 하고 헌법은 샤리아에 종속되어야 함을 주장하며 ‘마슈르에(이슬람법 제일주의)’를 주장했다. 의회는 고위급 울라마의 입법 감독조직 설립을 헌법 보칙에 반영하는 중재안을 마련했으나, 누리는 이슬람법에 토대를 둔 신정체제를 주장하며 종교의 자유가 명시된 헌법에 반대했다. 누리는 나아가 1907년 6월부터 자신을 지지하는 성직자, 신학생을 중심으로 헌법 반대 집회를 열며 입헌파에 저항했다.

 

[사진] 1906년 제헌의회

이란 초대 헌법은 1830년 벨기에 헌법, 1875년 프랑스 헌법을 모델로 했다. 초대 헌법은 이슬람교를 국교로 정하고 이슬람법에 저촉되는 입법을 금지하며, 입법 감시를 위한 성직자위원회 설치를 명시하는(실제로 설치하지는 않았다) 등 성직자 세력의 주장을 상당 부분 수용했다. 반면, 의회 동의 없는 예산 지출과 행정행위를 막는 등 정부의 권력 행사를 억제했다. 이 헌법은 1979년 이슬람 혁명 전까지 이란의 헌법으로 기능했다. (출처: 위키피디아)

 

재정개혁 시도 역시 입헌파 내 온건파와 급진파의 갈등을 일으켰다. 왕실재정과 국가재정을 분리하기 위해 타키자데 등 급진파가 왕실재산의 상당 부분을 일방적으로 재무부로 이관하는 과정에서 타바타바이 등 온건파와 갈등이 불거졌다. 의회의 혼란은 영국과 러시아의 개입으로 이어졌다. 당시 오스만제국과의 동맹을 바탕으로 이라크 국경까지 독일이 진출했고, 테헤란까지 철도를 부설하자는 교섭이 진행 중이었다. 영국과 러시아는 독일의 진출을 저지하기 위해 1907년 비밀리에 이란 국토를 남부(영국), 북부(러시아), 중간지대로 나눠 관할권을 정하는 영·러 협상을 체결했다. 이란 의회는 이 과정에서 배제됐다.

 

1907년 새로운 왕이 된 무함마드 알리는 이전부터 의회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와 왕당파는 의회의 혼란과 무능을 보면서 의회를 전복하고자 했다. 우선 왕은 누리와 동맹을 형성했다. 1907년 12월 누리는 반의회 집회를 주도하며 서양식 개혁을 주장하는 이들을 공격할 것을 주문했다. 입헌파와 누리·왕당파 동맹의 갈등은 1908년 6월 폭발했다. 왕은 왕실 군대(코사크 여단)를 통해 의회를 포격하고 입헌파를 체포하며 계엄령을 포고했다. 타바타바이, 베흐바하니 등의 입헌파 지도자들이 체포되고, 상당수 의원이 처형당하거나 망명을 갔다. 계엄령은 이후 왕당파와 입헌파 사이의 내전으로 이어졌다.

 

의회 지도자 다수가 체포되거나 처형되었음에도 입헌파는 지방에서 큰 지지를 바탕으로 저항을 이어갈 수 있었다. 타브리즈 지역에서의 민병대가 국왕군의 공격을 버텨냈으며, 무엇보다 바흐티야르 부족을 비롯한 지방 부족군이 입헌파를 지지하며 테헤란으로 진군했다. 지방 부족군과 민병대의 활약으로 내전은 1909년 7월 입헌파의 승리로 끝났다. 왕은 폐위되고 아들 아흐마드가 새 왕이 되었으며, 누리를 비롯한 신정체제 주장 세력은 처형됐다.

 

그러나 2대 의회는 재정개혁을 놓고 다시금 분열했다. 의회는 재정개혁을 위해 미국인 고문 모건 슈스터를 초빙했다. 그는 종래의 관례를 깨고 구미의 규칙을 도입했으며 전국적 조세제도를 확립하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급진파와 온건파의 갈등이 재차 점화했다. 갈등은 1911년 재무부가 러시아의 이권을 압류하면서 폭발했다. 러시아는 영·러 협정에 따른 이권 보장을 요구하며 최후통첩을 보냈다. 의회가 저항하자, 러시아는 군대를 보내 테헤란까지 진격했다. 결국 테헤란 진입 직전에 의회는 러시아의 최후통첩을 수용했다. 내각은 슈스터를 해고하고 의회를 해산했다. 타키자데 등 급진파는 망명했으며, 이후 1차 세계대전까지 영국과 러시아가 이란에 실질적 통치권을 행사했다.

 

입헌혁명은 성직자 지식인들이 정치에 본격적으로 가담하기 시작한 계기였다. 이들은 왕과 귀족들의 전제정치에 반대하며, 그들의 자의적 권력행사를 제어하고자 헌법과 의회를 도입했다. 그러나 성직자들은 지향하는 국가의 상을 놓고 분화했다. 서구식 입헌 민주주의 국가를 지향한 성직자들이 있었으며, 누리와 같이 이슬람법에 근거한 신정국가를 지향한 성직자들도 있었다. 양자 간 갈등은 내전을 거치며 입헌파의 승리로 끝났지만, 입헌파는 재정개혁을 둘러싼 급진파와 온건파의 대립, 외세의 개입으로 붕괴했다. 입헌파의 몰락과 외세의 개입은 이란에서 누리와 같은 초기 형태의 이슬람주의가 반외세의 명분으로 계속해서 성장하는 계기가 됐다.

 

3) 석유국유화 운동의 여파

1921년 서구식 현대화를 지향하는 군인인 레자 칸이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하고, 1925년 카자르 왕조를 무너뜨리고 팔레비 왕조를 창건한다. 그는 터키의 케말 아타투르크를 모델로 삼아 현대화 정책을 추진했다. 징병제를 도입해 지방 부족의 힘을 약화하고 현대적 교육제도와 관료제를 도입하여 세속적 성격을 강화했다. 그는 이슬람 성직자들의 사회적 권력을 약화하기 위해 히잡 착용을 금지했고, 이에 저항하는 성직자들을 처벌했다. 그의 통치에 많은 성직자가 반대했음에도 당시 마르자에 타클리드인 야즈디의 정치불개입 선언으로 인해 종교계는 크게 저항하지 않았다. 한편, 레자 칸은 대공황 이후 소련, 영국에 대한 무역의존도를 낮추고자, ‘아리아인 우월주의’를 내세우며 이란에 접근한 독일과 적극 교류했다. 그러나 그의 친독일 행보는 2차 세계대전 시기 영국과 소련의 침공으로 이어졌다. 레자는 1941년 폐위되고 아들 무함마드 레자가 왕이 되었다. 그는 정치 관여를 최소화하겠다고 선언했다.

 

이후 이란에서 민족주의 열풍이 불었다. 2차 세계대전 말기 석유 이권 문제가 핵심 쟁점이었다. 소련은 이란 석유 이권에 관심을 보이며 북부 지역 석유채굴권을 요구했다. 소련은 이란 주둔 소련군, 쿠르드 분리주의 세력과 투데당을 통해 이란 정부를 압박했다. 영국은 이란 정부를 지원하면서 소련에 저항했다. 양측의 대립은 전후 미국 트루먼 정부가 이란 정부에 군사 지원을 약속함과 동시에 쿠르드 분리독립 운동이 붕괴하고 소련군이 1947년 철군하면서 해소되었다.

 

고양된 여론의 초점은 1908년 체결된 영국-페르시아 석유회사(APOC, 이후 AIOC로 변경) 석유이권협정의 개정에 쏠렸다. 1949년 7월 이란 정부와 AIOC 간의 이권협정 개정(보칙협정)은 영국의 석유 수입에서 이란의 몫을 상승시켰다. 그러나 여론은 외세에 석유 이권을 양도하는 것 자체에 부정적이었다. 따라서 석유국유화 운동이 전개됐다. 운동을 주도한 세력은 민족주의 정치인 모사데그와 정당 연합 민족전선(NF)이었다. 모사데그는 이란의 대외정책이 외국의 이권을 전적으로 긍정했다고 지적하며, 석유국유화를 비롯해 외세의 종속에서 벗어나 자주적 민주정권을 수립하자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에 여러 세력이 결합했다. 이란당, 조국당 등 민족주의 세력들과 함께 이슬람주의 성직자 아야톨라 카샤니의 종교세력이 합류했다.

 

특히 카샤니가 이끄는 종교세력의 합류로 운동이 탄력을 받았다. 그들은 당시 마르자에 타클리드인 보루제르디의 정치불개입 선언에 이견을 표명하며 이슬람 신정체제 수립을 요구했다. 카샤니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에 반대해 나치 독일의 선전을 유포하며 친독일 행보를 보이다 영국군에 체포됐던 인물이다. 그는 나밥 하파비의 ‘페다이얀 이슬람’와 같은 무장 이슬람 조직과 연계해 석유국유화운동에 가담, 이슬람법 시행과 세속법 폐지를 주장했다. 젊은 성직자들과 빈곤층은 그의 주장에 열광하며 석유국유화 운동을 지지했다.

 

1950년 16대 의회에서 다수를 형성한 민족전선은 석유특별위원회를 구성해 정부의 보칙협정이 부적절하다고 결론을 내린 후 국유화 방침을 제출했다. 당시 라즈마라 총리는 이란 단독으로 석유매매를 할 능력이 없다며 저항했다. 이에 민족전선은 특별위원회 방침을 지지하는 집회를 조직해 정부를 압박했다. 내각 각료들이 사의를 표명하는 와중 ‘페다이얀 이슬람’에 의해 라즈마라 총리가 1951년 암살된다. 후임 총리가 된 모사데그는 5월 석유국유화 법안을 의회에서 통과시켰다. 이란 정부는 AIOC 회사 자산을 압류했으며 AIOC 내 영국인 기술자들을 영국으로 돌려보냈다.

 

영국은 즉각 항의하며 국제사법재판소, 국제연맹 안전보장이사회 에 소송을 제기한 한편, 이란에 경제제재를 가했다. 모사데그 정권은 기술자 부재로 석유공장 운영에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석유생산량 급감하며 경제위기가 발생했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모사데그는 영국과 국교를 단절하고 독재권력으로 경제를 통제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그는 민족전선을 통해 도시에서 왕에 항의하는 대규모 집회를 조직해 왕으로부터 군부 임명권을 넘겨받았다. 그는 군권을 바탕으로 재정난에 대응하며 비석유경제로의 전환을 내세운 한편, 미국에 중재를 요청했다. 모사데그의 권위주의적 행보는 그를 지지했던 민족전선을 분열시켰다. 미국의 관여와 세속적 현대화 정책에 반대해 카샤니 등의 종교계가 이탈했다. 모사데그는 1953년 라디오 방송을 통해 의회 해산에 관한 국민투표 시행을 발표했다. 이에 왕이 그를 해임했으나 모사데그는 불복했다.

 

분쟁 와중에 왕이 로마로 피신하자, 반모사데그 세력들이 그를 축출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고립된 모사데그가 투데당에 접근하자, 소련의 개입을 우려한 미국 CIA와 영국 M16이 쿠데타 계획을 지원했다. 그 결과 왕당파 자헤디 장군이 민족전선에서 이탈한 카샤니 등의 묵인하에 8월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다. 쿠데타로 모사데그는 체포되었으며 왕 무함마드 레자가 다시금 권력을 잡았다. 무함마드 레자는 민족전선, 투데당 등을 탄압하며 의회권력을 억눌렀다. 한편 석유국유화 논의는 AIOC를 미국계 석유기업 5개 회사를 중심으로 8개 석유 메이저 합병회사(NIOC)로 재편하는 1954년 석유산업 운영협정으로 결론이 났다. 이 협정은 이란의 석유 소유권을 인정하고 종전보다 이란 정부에 높은 수익률을 보장하되, 외국 기업의 이권을 인정했다.

 

[사진] 카샤니(왼쪽)와 모사데그(오른쪽)

카샤니는 모사데그와 민족전선의 석유국유화 운동과 반영국 정책에 동조했으나, 1953년 중반 모사데그에 반대했으며 쿠데타를 지지했다. 훗날 이슬람 공화국 교과서와 매체에서는 모사데그를 거의 언급하지 않으며 카샤니를 진정한 반제국주의 투사로 설명하고 모사데그는 카샤니의 추종자로 설명한다. 그리고 모사데그 정권을 극단적인 세속주의 정권으로 묘사하며 그가 이슬람을 배신했기에 몰락했다고 설명한다. (출처: 《Ettelaat》)

 

이란 석유국유화 운동은 두 가지 여파를 낳았다. 민족전선의 석유국유화 시도의 좌절은 민족주의 세력의 결함을 보여줬다. 그들은 여론의 광범위한 지지를 바탕으로 집권했으나 구호 이상의 계획과 전략이 부재했다. 그 결과, 영국의 제재와 독자적 경영의 한계로 경제위기를 맞았다. 경제위기에 권위주의로 대응한 모사데그는 정권 붕괴를 초래했다. 그럼에도 세속현대화 지향 민족주의 지식인들은 그의 몰락 원인을 미국의 개입으로 보고 반미 경향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그들은 서구화에 거리를 두며, 고유의 문화인 이슬람교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한편, 쿠데타에 미국과 영국이 관여한 탓에 이란인들 사이에서 서방 개입 음모론이 퍼졌다. 이는 훗날 호메이니 등의 이슬람주의에 이란 대중이 동조한 배경이 됐다.

 

4) 무함마드 레자의 백색혁명과 호메이니의 이슬람법학자 통치론

권력을 장악한 무함마드 레자는 비밀경찰 사바크(SAVAK)를 통해 독재권력을 확립한 후 본격적인 서구식 현대화 정책을 펼쳤다. 그는 바그다드 조약에 가입하여 미국의 중동정책에 적극적으로 호응하는 한편, 케네디 미국 행정부의 압력으로 개혁에 착수했다. 1961년 의회를 해산한 후 아미니 총리를 통해 백색혁명이라 불리는 개혁안을 발표하고 이를 국민투표에 붙였다. 주요 내용은 ▲ 농지개혁 ▲ 삼림 국유화 ▲ 국유공장 주식 경매 ▲ 산업노동자 이익 분배 ▲ 여성참정권 확대 ▲ 문맹 퇴치단 창설이었다. 1963년 국민투표 결과 개혁안은 절대다수의 지지를 받아 통과됐다. 개혁안에 가장 큰 저항세력은 지주가 아닌 성직자와 바자르 상인계층이었다. 쟁점은 훔스를 통해 성직자들이 형성한 재산 일부를 몰수하는 것이었다.

 

무함마드 레자는 성직자-바자르 상인계층의 강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개혁을 밀어붙였다. 그 결과 1971년까지 200만 가구의 970만 명(1970년 농촌 인구의 56%)이 농지를 배분받았다. 1970년대 들어 100헥타르 이상 토지를 소유한 대지주는 사실상 소멸했다. 이란의 GDP는 1963~76년까지 연평균 8.6% 성장했다. 무엇보다 석유생산량이 급증했고, 석유 판매도 1960~70년대 초반의 중동전쟁으로 호황이었다. 석유수입은 정부수입의 60%에 육박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란 경제는 불안정했다. 백색혁명 당시 인구의 75%가 농민이었으나 충분한 관개시설과 농업자본이 확보되지 못해 농민들의 생활이 어려웠다. 그 결과 많은 농민이 몰락했다. 농민들은 대거 도시로 유입해 현대적 노동자 계층을 형성했다. 브루킹스연구소의 이란 전문가 수잔 말로니에 따르면, 당시 이란경제는 표면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구조가 취약했다. 이란 제조업은 정부보조금에 의존한 수입대체전략으로 대외경쟁력이 약했으며 생산성이 떨어졌다. 실제 일자리 창출은 제조업보다 경기에 유동적인 건설업에 집중되어 저숙련, 불안정 일자리가 많았다. 반면 석유산업 등 고숙련 일자리는 해외인력 의존도가 심했다. 결과적으로 사회 양극화가 심했으며 유가에 따라 경제가 휘청였다.

 

무함마드 레자는 자신의 권력을 절대화했다. 백색혁명 당시 20만 명이던 이란 군대를 1971년 40만 명으로 늘리며 군을 확대했으며 미국의 무기를 많이 구매했다. 팔레비 재단을 통해 왕실 재산을 크게 늘렸으며 의회는 통제 가능한 관제정당으로 구성해 측근을 넣었으며 이견을 보이는 인물들은 비밀경찰을 통해 감시했다. 공무원 수도 대폭 늘려 자신의 지지기반으로 삼았다. 특히 1973년엔 기존 정당을 해체하고 ‘부흥당’이란 단일정당으로 의회를 재편했다. 뉴욕시립대의 역사학 교수 에르반드 아브라하미안은 팔레비 정권이 백색혁명을 통한 사회경제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정통성이 취약했고, 다양한 사회세력과 연결고리를 형성하거나 소통하지 않았기에 정치 저발전이 심했다고 지적한다. 그렇기에 1975년 이후 경제적 상황이 악화되자 정권이 급격히 취약해질 수밖에 없었다고 보았다.

 

팔레비 왕정에 가장 강력한 저항자로 부상한 인물은 성직자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였다. 당시까지 보루제르디의 정치불개입 선언으로 종교계 주류가 정치개입을 자제하던 와중, 호메이니는 왕과 정부의 정책에 강력히 저항하며 반정부 지도자로 급부상했다. 그는 1962년 바자르 상인계층과 성직자 연합단체인 ‘이슬람 사회의 연합’을 조직하여 정부의 백색혁명에 저항하는 한편, 정부와 타협하는 성직자들을 맹비난했다. 또한, 조직을 테헤란을 비롯한 주요 도시로 전파하여 성직자 사회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키웠다. 그는 1963년 국민투표 거부운동을 지도하며 상인들의 폐점, 신학교의 폐교 시위를 이끌었다. 호메이니의 저항은 1963년 6월 아슈라 기간 연설로 절정에 달했다. 왕을 맹비난한 호메이니의 연설 후 지지자들이 궁전을 향해 “독재자에게 죽음을!” 구호를 외치며 행진을 펼치다 경찰과 충돌했다. 호메이니는 체포 후 10달간 수감생활 후 풀려났으나, 곧 해외로 추방당했다. 이후 호메이니는 이슬람혁명까지 15년간 망명 생활을 보냈다.

 

장기간의 망명 동안 호메이니는 자신만의 독특한 이슬람주의 이론을 완성했다. 1971년 이를 정리한 『이슬람정부』을 출간했다. 책에서 호메이니는 성직자들의 직접통치 즉, ‘이슬람법학자 통치론’(벨라야테 파키)을 주장했다.

 

“이슬람에서 입법권은 신에게 속한다. 신만이 유일한 입법자다. … 이슬람 정부는 이슬람법에 의한 정부다. 이슬람 정부에서 주권은 신에게 귀속되고 이슬람법은 신의 명령이다. 이슬람법은 모든 개인과 정부에 대해 절대적 권위를 가진다. … 이슬람 정부는 이슬람법에 기반한 정부이므로, 통치자에게 이슬람법에 대한 지식은 필수적이다. 실제로 이러한 지식은 통치자뿐 아니라 어떤 직위를 맡거나 정부 기능을 수행하는 모든 사람에게도 필수적이다. 통치자가 이슬람법을 따르는 경우, 그는 반드시 이슬람 법학자에게 복종해야 하며, 이슬람법 규정을 실행하기 위해 그에게 문의해야 한다. 그렇기에 진정한 통치자는 이슬람 법학자이며, 통치권은 공식적으로 그들에게 속해야 하고, 법학자의 지도를 따라야 하는 자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호메이니, 『이슬람 정부: 법학자의 통치』, 38~43쪽.

 

호메이니는 왕정을 인정하는 종전의 해석을 부정하고, 진정한 이슬람 통치를 구현하기 위해선 이슬람법을 올바르게 해석할 이슬람 법학자들이 통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슬람 법학자들은 숨겨진 이맘의 대리인으로, 이맘이 재림해 진정한 이슬람 국가를 건설하기 전까지 과도기 형태로써 통치한다. 그리고 이슬람 정부 실현을 위해 수동적으로 이맘의 재림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이슬람법학자 통치하의 혁명적 투쟁으로 이맘의 재림을 앞당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호메이니의 주장은 그의 제자들에 의해 이란 성직자 사이에 널리 유포되었다. 라프산자니와 하메네이를 비롯한 호메이니의 제자들은 ‘코란 연구회’와 같은 성직자 학술모임을 통해 그의 사상을 학습하는 한편, 사이드 쿠틉의 『진리를 향한 이정표』를 비롯해 이슬람주의자들의 서적을 번역했다. 특히 호메이니의 연설을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해 이란에 퍼뜨렸다. 이들의 노력은 팔레비 정부의 강력한 검열에도 불구하고 이란에서 이슬람주의의 대중화에 기여했다.

 

이슬람주의의 대중화엔 이슬람교에 주목한 비성직자 지식인들의 역할도 컸다. 잘랄 알레 아흐마드는 투데당 출신 소설가였다. 그는 1962년 『서구중독증』이란 책을 저술했다. 아흐마드는 이란의 맹목적인 서구모방 현대화가 이란 사회를 오염시켰다고 주장하며 역사적으로 성직자들이 위기에 저항했음을 강조하고, 그들을 이란 사회 최후의 보루로 주목했다. 그의 책과 ‘서구중독증’ 개념은 체제에 비판적인 이란인들 사이에서 유행했다. 또다른 인물로는 알리 샤리아티가 있다. 좌파 민족주의 단체 ‘해방운동’에 속한 지식인인 그는 대학에서 강의하며 여러 저술을 남겼다. 샤리아티는 시아파의 전통적 상징을 재평가하며, 시아파의 역사와 이데올로기를 외세와 압제에 맞선 저항으로 평가하고 사파비 왕조 이후 주류 시아파 성직자들의 타락을 비판했다. 그리고 마르크스 계급투쟁론과 이슬람교를 결합해, 현시대의 계급투쟁은 선진국과 제3세계 간 갈등이며 혁명적 시아파 이데올로기만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했다. 그의 주장은 반체제 지식인들과 주류 성직자들의 정치불개입에 불만을 가진 성직자들에게 널리 읽혔다.

 

1975년 달러 가치 하락, 유가 하락으로 발생한 경제위기는 정권에 위기감을 조성했다. 왕은 국가기구들을 비롯해 각종 사회 조직을 관제조직으로 재편하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성직자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며 훔스를 비롯한 각종 권리 폐지를 시도했다. 이후 성직자와 바자르 상인의 저항이 이어졌다. 1978년부터 시위는 사상자가 계속해서 늘어나면서 격화되었다. 특히 9월 7일 계엄령 선포에 반대하는 9월 8일 항의집회에 군대가 탱크를 동원한 무차별 살상으로 대응하며 테헤란에서 2000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했다(‘검은 금요일’). 이후 대규모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했다. 10월 석유기업(NIOC) 노동자와 공무원의 파업으로 정부기구가 마비되었다. 시위대는 호메이니의 녹음테이프를 틀며 왕의 퇴위를 요구했다. 결국, 1979년 1월 16일 무함마드 레자는 망명했다. 곧이어 2월 1일 호메이니가 300만 명에 이르는 시민의 환호 속에 귀국했다. 그렇게 팔레비 왕조는 붕괴했다.

 

[사진] 망명에서 귀국 후 군중의 환호를 받는 호메이니 (사진 가운데)

2월 1일 망명지 프랑스에서 이란으로 귀국한 호메이니는 팔레비 왕정에 저항하는 세력을 규합하는 ‘혁명지도부’를 구성했다. 혁명지도부는 2월 5일 바자르간을 임시정부 수반으로 임명하고, 팔레비 왕조의 바흐티야르 총리가 제안한 정권 이양 협상을 거절했다. 2월 11일 군 최고위원회가 임시정부를 인정하는 성명을 발표하며 이슬람 혁명이 반체제세력의 승리로 끝났다. 이 시기를 이란에선 ‘여명의 10일’로 부른다. (출처: 《AP》)

 

팔레비 정부의 현대화 정책은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양극화를 비롯한 여러 사회문제를 낳았다. 그러나 정권은 사회적 갈등을 완화하려는 노력보단 권위적 행보로 일관했다. 미국의 비호를 받는 이란 정부의 독재체제는 이란인에게 반미감정과 현대화에 대한 실망을 안겼다. 호메이니는 이런 흐름 속에서 성장한 이슬람주의자였다. 그는 시아파 전통과 무관한 이슬람주의 이론을 개발하는 한편, 제자들을 통해 이슬람주의의 대중화에 앞장섰고 대규모 군중 동원을 통해 이슬람 혁명에 성공할 수 있었다.

 

 

4. 이란 이슬람 공화국의 신정체제

 

1) 이슬람 신정체제의 통치

권력을 쥔 호메이니는 빠르게 자신의 세력을 구축했다. 이슬람 혁명위원회와 혁명재판소를 지역마다 설치하여 혁명기 정책을 주도하고 반혁명세력을 숙청했다. 혁명재판소 의장 할할리는 팔레비 왕정 비밀경찰 지도부의 공개처형을 시작으로 무자비한 처형을 진행했다. 한편 호메이니는 이슬람공화당을 설립해 이슬람 혁명이론을 구현할 공화국의 단일 정치단체를 조직했으며 반혁명을 분쇄하기 위한 이슬람 혁명수비대를 혁명위원회 관할에 두었다. 호메이니와 이슬람주의자들은 성직자-상인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빠르게 이슬람 통치체계를 만들어갔다.

 

한편, 임시정부에서 바자르간 등 민족주의 세력과 호메이니가 새로운 체제의 성격을 놓고 ‘민주공화국’과 ‘이슬람 공화국’ 사이에서 대립했다. 3월 호메이니는 국민투표로 체제 성격을 결정하기로 했다. 국민투표 결과, 97%의 찬성으로 이란은 이슬람 공화국이 되었다. 그리고 호메이니는 바자르간의 제헌의회 구성 제안을 거부하고, 이슬람법학자 통치론을 관철하려는 70여 명의 성직자 전문가회의를 통해 헌법 제정을 추진했다. 여기에 가장 큰 제동을 건 인물은 보루제르디 사망 후 마르자에 타클리드로 인정받던 샤리아트마다리였다. 그는 호메이니와 이슬람 공화국 성격을 둘러싸고 논쟁했다. 샤리아트마다리는 이슬람 공화국은 이슬람 원리가 존중, 적용되는 사회일뿐, 이슬람법이 지배하는 사회가 아니라고 지적했다. 또한 이슬람법은 고정된 것이 아니며 그 해석으로서 이즈타히드는 변화한 사회에 대한 적응일 뿐이라고 강조했다. 나아가 현대사회에서 주권은 국민에 있으므로, 국민주권에 의한 세속 통치자의 통치를 존중해야 한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성직자의 직접적 정치참여는 과도하며, 성직자의 역할은 국가와 사회를 중재하며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고 행정을 감시·견제하는 데 머물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호메이니는 외부 세력의 위협을 내세워 경쟁자들을 무너뜨렸다. 샤리아트마다리가 팔레비 군주제에 협력한 이력을 지목하며 그의 비판을 무력화했다. 무엇보다 1979년 11월 미국대사관 인질 사건과 뒤이은 이란-이라크전쟁은 호메이니의 비판 세력들을 외세의 꼭두각시로 몰아세울 수 있었던 중요한 계기였다. 당시 바자르간은 정치적 고립에서 벗어나 이란의 이슬람화를 막고자 미국의 브레진스키 국가안보관을 만나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논의하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인질 사건이 발생하자, 바자르간은 미국 간첩으로 몰렸고 결국 사임했다.

 

좌파에 대한 탄압도 본격화됐다. 호메이니의 주요 산업 국유화, 반제국주의적 언사를 근거로 좌파는 그를 지지하며 바자르간을 비롯한 비이슬람세력을 공격하는 데 집중했다. 그러나 좌파는 이내 분열했다. 투데당은 이슬람 정권의 반자본주의, 반제국주의 성격에 주목해 정권을 지지했다. 무자헤딘과 페다이얀 등은 이슬람 정권의 매판자본적, 소부르주아적 성격에 주목해 정권에 무장테러를 시도했다. 이슬람 정권은 1979년 12월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것에 대한 이란 좌파의 침묵을 계기로 그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1981년 이슬람공화당사 폭발사건을 일으킨 무자헤딘 할크 등의 좌파는 탄압 끝에 망명했다. 투데당 역시 1983년 대규모 탄압을 받아 그해 5월에만 당원 5천여 명이 체포됐다. 이 과정에서 키아누리 서기장을 비롯한 투데당 지도부 다수가 자신들이 소련 스파이였으며 사회주의가 아니라 이슬람주의가 옳다고 공개 방송을 통해 자백하며 투데당은 사실상 궤멸됐다. 이란 사회학자 발렌타인 모그하담은 혁명기 당시 이란 좌파가 반제국주의에 집착해 민주주의 문제를 경시한 점, 그리고 이슬람 성직자에 대한 과소평가를 비롯해 정세를 오판하며 분열한 점이 몰락의 원인이었다고 지적한다.

 

성직자 전문가회의를 통해 작성된 헌법안은 1979년 12월 국민투표 98%의 찬성을 거쳐 최종 확정됐다. 이슬람 공화국 헌법은 호메이니의 이슬람법학자통치론과 이슬람법을 토대로 구성됐다. 헌법 전문은 이란 이슬람 공화국이 이슬람 원리에 토대를 둔 공화국임을 명시한다. 5조는 “(움마의 진정한 최고지도자인) 12대 이맘의 부재 시, 정통하고 독실하며 책략이 풍부하고 행정 능력이 있는 최고지도자에 위임한다”고 규정한다. 즉 최고지도자가 12대 이맘의 대리인으로서 실질적인 국가통치권을 가짐을 밝혔다. 헌법은 최고지도자에 주요 정책 집행 감독, 군 통수권, 혁명수비대 사령관 임명, 대통령 인준, 해임권 등 강력한 권한을 부여했다. 최고지도자는 선출된 이슬람법학자들로 구성된 전문가회의가 지명하고 선출한다. 전문가회의는 최고지도자에 의해 임명된 이슬람법학자들의 기구인 헌법수호위원회의 심사를 받는다. 헌법수호위원회는 전문가회의 뿐 아니라 국회, 대통령의 자질을 검증하고 감독하며 그들의 권한을 제한할 수 있다.

 

[그림] 이란 이슬람공화국 정치권력구조

이란 이슬람 공화국은 신정체제와 공화국체제로 구성된다. 여기서 공화국체제는 신정체제의 하부구조다. 행정부와 입법부 모두 이슬람법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이슬람법학자들의 통제를 받기 때문이다. 최고지도자는 헌법수호위원회, 혁명수비대 사령관, 사법부 수장을 임명해 이란 사회 전 분야를 이끌고 있다. 최고지도자는 임기의 제한이 없다. (출처: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이란의 정치 권력구조와 주요 정파별 경제정책」, 전략지역심층연구, 2012)

 

경쟁자들을 제거한 이슬람 공화국은 본격적으로 ‘문화혁명’으로 불리는 이슬람주의 정책들을 펼쳤다. 팔레비 왕정의 가족보호법을 폐지하고 1980년 7월 여성의 히잡 착용을 의무화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또한, 여성의 이혼신청권, 판사가 될 권리를 없애고 일부다처제를 부활시켰으며, 남성 보호자의 허락 없이는 여성이 해외여행을 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란 여성은 혁명 이전의 권리를 요구하며 저항했으나 폭력적으로 진압당했다. 정부는 좌파의 근거지였던 대학들을 이슬람화하고자 1980년 6월 문화혁명본부를 설립해 2년간 모든 대학교를 폐쇄했다. 좌파 성향의 대학교수와 강사들을 모두 쫓아낸 후 다시 연 대학들은 이슬람화되었으며 교육과정은 이슬람교 교육 위주로 바뀌었다. 여기에 1985년 새로운 언론법을 제정하여, 이슬람 가치에 위반되는 보도에 대한 광범위한 처벌을 규정해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탄압했다.

 

이슬람 공화국은 특히 이슬람교 성인(聖人)들과 최고지도자에 대한 모독을 견디지 못한다. 1988년 인도계 영국 소설가 살만 루시디의 소설 『악마의 시』에 대한 호메이니의 대응이 대표 사례다. 루시디의 소설은 유럽에서 큰 호평을 받았으나, 내용 중 예언자 무함마드가 다신교를 지지했다는 묘사가 있어 무슬림의 큰 반발을 받았다. 중동 지역 무슬림 항의시위가 발생하자, 호메이니는 1989년 2월 14일 라디오 방송을 통해 성명(파트와)을 발표하고 루시디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파트와는 정부의 공식 성명이 아니라, 이란 신정체제의 최고지도자가 직접 발표한 것으로 법과 같은 권위를 갖는다.)

 

호메이니의 성명 이후 루시디에게는 거액의 현상금이 걸렸으며 그를 살해하려는 시도가 계속되었다. 나아가 그의 책을 번역한 전 세계 출판업자들에 대한 테러도 자행되었다. 이탈리아와 노르웨이의 번역가가 테러로 중상을 입었으며 일본인 교수 이가라시 히토시가 암살당했다. 1997년 당시 이란 하타미 대통령이 파트와 철회를 발표했으나, 2017년 최고지도자 하메네이가 여전히 유효하다고 밝히면서 2022년 루시디를 향한 습격이 이어졌다. 이 대표 사례 외에도, 이란은 신성모독법을 통해 예언자 무함마드와 이맘, 최고지도자에 대한 모독이라고 판단될 발언, 저술에 대해 관련자를 체포해 중형을 내린다.

 

1989년 6월 호메이니 사후 이란의 통치체제는 약간의 변화를 맞이했다. 호메이니의 제자들로 구성된 전문가회의는 차기 최고지도자로 알리 하메네이 당시 대통령을 지명했다. 그러나 당시 하메네이는 호자톨 이슬람으로, 헌법에 규정된 마르자에 타클리드가 아니었으며 종교적 권위가 부족했다. 따라서 성직자 사이에서 논란이 일었다. 전문가회의는 헌법을 개정해 최고지도자 마르자에 타클리드여야 한다는 규정을 삭제하고, 약화된 최고지도자의 권위를 대통령의 권한 강화로 보완했다. 그리고 호메이니의 또 다른 충직한 제자인 라프산자니를 대통령으로 밀어주며 당선되게끔 했다. 초기에 하메네이와 라프산자니는 이란-이라크전쟁 이후 경제 재건을 위해 협력했다. 그들은 전시 가격통제를 해제하고 전쟁 동안 광범위하게 진행된 국영화를 해제하는 데 공감대를 가지고 협조했다. 그러나 이후 이란의 대외정책, 경제정책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혁명수비대의 지지를 받는 하메네이의 보수파와 관료들의 지지를 받는 라프산자니의 중도·개혁파가 대립했다.

 

보수파와 중도·개혁파 사이의 권력투쟁은 계속되었지만, 보수파 대통령 집권기(아흐마디네자드, 라이시)와 중도·개혁파 대통령 집권기(하타미, 로하니)와 무관하게 이란의 경제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신정체제 성립 이래 이란은 지속적인 고인플레이션으로 고통받았다. 전쟁과 제재로 안 그래도 물자와 자본이 부족한데, 물가를 안정시키고자 기업·상인에게 보조금을 지급하고 소비자의 소득을 보전하며 군비까지 확장하면서 이란 정부는 만성적인 재정적자에 시달렸다. 여기에 고정환율제가 더해져 인플레이션율이 매우 높았다. 국제통화기구(IMF)에 따르면, 최근 10년간 이란의 연평균 소비자 물가상승률은 31.58%다. 2011년 하메네이는 제재에 대항해 저항경제 즉, 자립경제 노선을 발표했으나, 생산력이 낮아 청년세대를 중심으로 실업률이 계속 상승했다. 특히 2010년대 국제사회의 제재 확대는 이란의 경제 사정을 더욱 악화시켰다.

 

신정체제는 경제정책 실패에 더해 억압적인 통치를 더욱 강화했다. 2006년 도덕경찰제도를 도입해 이슬람법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단속하고 구금했다. 소셜미디어에 대한 검열도 강화해 페이스북, 트위터를 폐쇄했다. 통제는 서방의 제재가 강화되고 경제가 어려워질수록 심해졌다. 특히 여성의 히잡 착용에 엄격했다. 2022년 7월 통과한 히잡과 순결에 관한 법령은 히잡, 스카프 길이, 화장까지 통제했다. 이처럼 이란 이슬람 신정체제는 세속화와 현대화를 서구화와 동일시하며 배척하고, 이슬람법이라는 모호하고 자의적인 해석에 따라 권위적 통치를 자행하며 저항에 잔혹하게 대응했다. 하메네이 집권 이후 약화된 종교적 정통성, 내부 권력투쟁 그리고 경제난은 통치 정당성의 위기로 이어졌다. 그럼에도 이란 정부가 강압을 통해 체제를 유지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안보 문제 때문이다.

 

2) 중동의 불안정을 야기하는 이란의 대외정책

이슬람 공화국 수립 전부터 호메이니는 자신의 저서 『이슬람정부』를 비롯해 모든 곳에서 줄곧 ‘이슬람혁명 수출론’을 주장했다.

 

“이슬람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다. 이 목적을 위해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첫 번째 활동은 이슬람 사상의 전파다 … 우리의 의무는 불법적 정치 권력을 전복하는 것이다. 현재 세계를 지배하는 불법적 정치권력을 공공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고 이슬람법에 따라 운영되는 기관으로 대체해야 한다. … 이맘들은 무슬림에게 적들과의 지하드를 벌이도록 촉구했다. … 이는 이슬람 정부 수립 프로그램으로 이어진다.”

 

즉 호메이니는 전 세계를 압제국과 피압제국의 대립으로 설명하고, 무슬림은 진정한 이슬람국가를 세워 이슬람을 전파할 의무가 있으며, 무슬림이 단결해 제국주의와 시오니즘에 맞서 싸워 ‘이슬람 세계정부’를 건설할 것을 주문했다. 그의 주장은 이란의 외교정책에 반영됐다.

 

이슬람 공화국 초기부터 이란은 레바논 남부에서 헤즈볼라 민병대 설립을 지원하며 중동 각지의 시아파 세력을 후원했다. 이란의 행보는 옆 나라이자 시아파 인구가 다수인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권에 특히 위기감을 주었다. 국경지대 샤트 알 아랍 수로를 놓고 이란과 분쟁 중이던 이라크는 바흐티야르 총리 등 망명한 팔레비 왕정 인사들의 요청에 따라 1980년 9월 이란을 침공했다. 1988년까지 8년간 이어진 전쟁은 이란 체제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란 정부는 이를 ‘강요된 전쟁’(imposed war)이라 명명하며 미국의 음모가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에 맞서는 ‘성스러운 방어’(sacred defense), 즉 시아파 이슬람을 지키기 위한 방어전쟁이라는 명분으로 국민을 동원했다.

 

이라크와의 전쟁은 이란에 두 가지 영향을 주었다. 첫째는 대외 영향력 확대였다. 이란은 서방의 지원을 받은 이라크의 공격으로부터 ‘성스러운 방어’에 성공했음을 선전했다. 나아가 이란이 본래 지원했으나 ‘두 국가 해법’을 수용하기 시작하며 소원해진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를 대신해 무장단체 하마스를 지원하기 시작하는 한편, 서방국가처럼 이라크를 지원한 사우디아라비아 등 아랍지역 국가들을 비난했다. 이란의 비판은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걸프 전쟁이 발발하면서 정당성이 올라갔다. 이란은 ‘모든 무슬림의 단결’을 위한 반이스라엘주의, 반시온주의를 내세우며 1992년부터 이스라엘을 ‘국제적 위협’으로 규정했다.

 

둘째는 미사일 개발의 본격화다. 전쟁 중 이라크의 도시 지역 미사일 폭격은 이란에 큰 타격을 주었다. 이후 이란은 미사일 개발을 비롯해 핵 개발에 착수했다. 1983년 북한과 탄도미사일 개발 상호원조 협정을 맺었으며 1989년엔 파키스탄과 방위협정을 체결했다. 이후 샤하브 미사일을 비롯한 미사일 개발에 매진했다. 핵 개발 역시 러시아, 파키스탄 등과 협력해 관련 기술을 습득한 이후 1999년부터 모센 파크리자데의 주도로 비밀리에 핵무기 5개년 개발 계획인 ‘아마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아마드 프로젝트’는 2002년 반정부단체 이란저항국민회의의 폭로와 2003년 이라크전쟁으로 중단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권이 몰락하면서 중동 정치는 변화를 맞이했다. 미국 부시 행정부의 ‘악의 축’ 발언과 미군의 이라크 주둔은 이란에 큰 위협이었다. 2003년부터 이란은 대외전략으로 ‘전진방어’(forward defense) 개념을 채택했다. 이는 기존의 자국 방어력 강화에서 나아가 중동 각지에서 대리전을 일으켜 본국을 방어한다는 전략이었다. 존스홉킨스대 발리 나스르 교수에 따르면, 이는 실용적인 목적에 기인했다. 혁명수비대 솔레이마니 장군은 재래식 군사력의 한계를 쿠드스군을 통한 현지 비정규전 지원으로 보완하는 한편, 중동 지역 미군의 철수와 중동 내 이란의 영향력 확대를 도모했다. 이러한 전략은 2006년 레바논 전쟁에서 이스라엘을 상대로 레바논 헤즈볼라 민병대가 선전하며 성과를 보였다.

 

특히, 2011년 아랍의 봄 이후 이슬람국가(ISIS)와의 전쟁을 통해 쿠드스군의 영향력이 커졌다. 이란은 9,200명의 쿠드스군을 보내 고전하던 시리아 정권을 보위하는 한편, 헤즈볼라, 하마스 등의 군사훈련을 지원했다. 그 결과 ‘전진방어’는 시리아, 이라크 민병대, 레바논 헤즈볼라, 예멘 후티반군, 하마스로 이어지는 ‘저항의 축’으로 발전했다. ‘저항의 축’을 통해 이란의 대외안보전략은 이슬람 공화국 방어에서 이슬람주의 공동체 방어로 넓어졌다. 이들은 지역의 적대국, 특히 중동 내 친미국가인 이스라엘과 사우디아라비아에 저항하는 세력들에 무기를 제공했다. 군사적 성과는 이란 정계 내에서 보수파 성직자들과 혁명수비대의 영향력을 강화했다. 이슬람주의의 영향력을 확대해 나가자는 이데올로기에 부합하는 혁명수비대는 서방 제재에 무력한 관료세력과 대비되어, 하메네이의 지지하에 정계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한편, 핵 개발 의혹이 밝혀진 이래 이란은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감시 활동에 비협조적이었다. 그 결과 유엔안전보장이사회는 2005년 이란이 안전조치협정의무를 위반했다는 결의를 채택했다. 이 무렵 대통령에 당선된 아흐마디네자드 대통령(2005~2013)의 ‘핵주권’ 강조는 위기를 고조했다. 이는 국제사회의 본격적인 제재로 이어졌다. 이란은 안보리국들과 협상했다. 로하니 대통령(2013~2021)은 회고록 『국가안보, 핵 외교』(2011)에서 핵 개발 포기는 애초에 협상 대상이 아니었음을 밝히며 하메네이가 2003년 당시 핵협상을 이끌던 자신에게 ‘경제제재 해제와 핵물질 생산 감축’ 교환을 협상에서 요구하고 절대 핵권리 포기를 수용하지 말것을 주문했다고 밝혔다. 핵물질 보유량 제한만을 대상으로 논의한 결과물인 2015년 이란핵합의(JCPOA)는 우라늄 농축을 허용하되 15년간 저농축 수준을 유지하고 농축우라늄의 규모를 제한하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그러나 합의 체결 후, 이란의 불만이 커졌다. 이란 정부는 미국이 약속한 제재 완화가 실행되는 속도가 느리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예멘 내전에서 예멘 정부군을 지원하는 이스라엘과 사우디를 미국이 지원한 점, 특히 사우디의 군비 팽창에 큰 위기감을 느꼈다. 이란 정계는 이를 미국의 배신으로 간주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과 2018년 미국의 핵합의 탈퇴에 이은 최대 압박은 미국을 향한 분노를 더욱 키웠다. 이란은 고농축 우라늄을 비롯한 핵물질 보유량을 늘렸다. 또한, 이란은 재개된 경제제재에 대응해 중국, 러시아와 경제 밀착도를 높여 제재를 우회했다. 그 결과 이란은 심각한 경제압박 속에도 완전히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다.

 

나아가 이란은 혁명수비대를 통해 압박에 위협적으로 맞대응했다. 혁명수비대는 2019년 아랍에미리트(UAE) 푸자이라항과 오만만에서 미국으로 향하는 유조선들을 공격했으며 이후 정찰에 나선 미국 드론을 격추하며 긴장을 높였다. 나아가 호르무즈 해협을 지나는 해외 유조선들을 나포하며 제재 해제를 압박하고 무력시위를 이어갔다. 미국 정부는 호르무즈 해협에서의 이란의 도발적 행위에 2020년 1월 혁명수비대 쿠드스 사령관 솔레이마니 장군을 암살하며 맞불을 놓았다. 그 결과 양국 관계는 한층 경색되었다.

 

[사진] 한국케미호 나포사건

2021년 1월 4일 호르무즈 해협을 지나던 한국 유조선 ‘한국케미호’가 이란혁명수비대에 나포되어 95일간 억류된 사건이다. 혁명수비대는 유조선의 해양오염 때문에 나포했다고 밝혔으나, 이후 이란정부 대변인을 통해 이란정부가 한국이 대이란제재에 동참하면서 동결한 이란정부의 석유수출대금 70억 달러의 동결 해제를 요구했음이 드러났다. 한국케미호가 나포된 날은 솔레이마니 장군 사망 1주기 다음날이었으며 같은날 혁명수비대는 바그다드 미 공군기지에 드론공격을 시도했다. 이를 두고 언론에선 미국을 향한 무력시위라는 분석도 나왔다. 한편, 동결된 자금은 2023년 8월 해제되었다. (출처: 연합뉴스)

 

2022년 하마스의 기습으로 시작된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 전쟁은 이전부터 이어진 대리전의 강도를 높였다. 이란은 트럼프 행정부의 이란핵합의 탈퇴 배후에 이스라엘이 있다고 보았다. 더구나 지속적인 이스라엘의 사이버테러와 과학자 암살에 보복을 원했다. 이스라엘 역시 카타르 등 수니파 국가 일부가 이란과 교류를 활발히 하며 관계 개선에 나선 점, 하마스를 통한 지속적인 비정규전 위협, 무엇보다 미국 바이든 정부의 이란핵합의 복원 협상에 위기감을 느꼈다. 양측의 교전 수위는 2022년 이후 점증하여 2025년 6월 13일 ‘12일 전쟁’까지 이어졌다. 《로이터》에 따르면 이란은 전쟁 동안 간첩으로 의심되는 인물 2만 명 이상을 체포했다. 나아가 이란 내 소수민족인 아프간족 2774명을 구금했다. 이란은 대외 위협을 미국과 이스라엘의 음모로 간주하며 억압적 통치를 강화하고 체제를 정당화하고 있다.

 

이란의 대외전략은 이슬람주의 정권의 생존을 위해 조금씩 초점이 변했다. 초기 이란은 이슬람혁명 수출론을 내세우며 중동 각지의 시아파 세력들을 지원했다. 그러나 21세기 들어 국제사회의 제재와 미국과 이스라엘의 군사적 압박에 고전하자, 무슬림의 단결하에 ‘반미, 반이스라엘’ 투쟁을 벌이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즉 종교를 이데올로기로 활용하여 자신들의 행보를 정당화하는 것이다. 그 결과 이란의 대외정책은 주변국 분쟁에 개입하는 것으로 이어졌고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갔다. 아울러 이란은 외국 특히, 미국과 이스라엘의 위협을 내세워 체제에 저항하는 인사들을 탄압한다. 이러한 대외정책은 정권의 성격이 보수적이냐 중도·개혁적이냐와 무관하게 진행 중이다.

 

 

5. 결론

 

이란 현대사에서 나타난 이슬람주의는 페르시아 지역을 지배했던 열강의 개입을 배경으로 등장했다. 세속적인 현대화를 지향했던 이란의 지식인들은 현대화에 대한 포괄적인 전략과 계획이 부재했다. 이들은 무능하고 부패한 카자르 왕조와 열강의 이권침탈에 분개해 빠른 현대화를 추구하고자 했다. 그러나 준비 없는 현대화 시도는 입헌혁명, 그리고 석유국유화 운동에서 확인할 수 있듯 실패했다. 이들을 대체한 팔레비 왕정은 외세와 강압에 의존하였기에 더욱 결함이 많았다.

 

세속적인 현대 지식인들의 무능과 몰락 속에 정치성직자들이 등장했다. 누리에서 카샤니, 호메이니로 이어지는 이슬람주의자들은 서양 기독교 문명과 유대인에 대항하여 이슬람법에 기초한 새로운 이슬람질서를 세우고자 이슬람법 전통을 재해석했다. 이들은 위계적 성직자 제도와 ‘이맘’에 의한 메시아적 구원을 강조하는 시아파 특유의 이데올로기와 오랜 기간에 걸친 바자르 상인계층과의 견고한 동맹을 바탕으로 강력한 사회세력으로 활약했다. 이들의 강한 조직력과 사회적 기반은 이슬람주의 혁명을 가능하게 했으며 호메이니와 그 제자들은 이를 바탕으로 왕정체제 전복에 성공했다.

 

이슬람 공화국 건설에 성공한 이란은 이슬람질서를 국내외로 확립해 갔다. 이슬람혁명 수출론을 통해 새로운 이슬람질서를 구축하고자 했으며, 이슬람법 재해석을 바탕으로 정교일치의 이슬람법학자 통치구조를 확립했다. 이들은 세속문화와 제도를 거부하고 지하디즘을 말하며 자신들의 통치를 정당화하고, 서방과 이스라엘의 음모를 그 근거로서 강조한다. 그리고 음모론에 기초해 체제 내외에서의 비판을 무력화한다. 이란 이슬람주의의 특징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중도·개혁파, 보수파 모두 공유하는 특징으로 이들은 이란 신정체제의 생존을 최우선시한다.

 

이렇듯, 이란의 이슬람주의는 외세의 개입을 배경으로 하며, 러시아에 의한 의회 해산이나 미국의 쿠데타 지원 등 외세의 잘못도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이란 현대사를 살펴봤을 때,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 이슬람주의의 책임이 적다고 볼 수 없다. 내적으로는 이란의 인민을 억압하고 외적으론 중동지역의 평화를 위협하는 이란 이슬람주의는 당연히 비판해야 한다.

 

그렇다면 현 정세에서 사회운동 차원에서의 이슬람주의, 특히 이란 이슬람주의 비판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이슬람교와 이슬람주의의 구별이 없다면 무슬림과의 공존이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두 개념은 분명 다르지만, 오늘날 많이 혼동된다. 이 혼동은 무슬림과 비무슬림 사이에서 끝없는 폭력과 편견을 낳는다. 한쪽 극단에서는 이슬람주의의 폭력에 대한 반발로 이슬람 혐오가 퍼져가고, 다른 한쪽 극단에서는 이슬람 혐오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이슬람주의를 옹호하는 태도가 나타난다. 특히 후자는 사회운동 일각에서 이란 이슬람 공화국, 하마스, 헤즈볼라를 민족해방운동으로 미화하거나, 이들을 종파갈등의 피해자로만 보거나, 이들의 일부 정책만이 문제라는 시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태도는 결국 앞서 살펴본 이란 이슬람주의의 위험성을 회피하게 만들고 진정한 국제주의적 연대의 가능성을 약화한다. 양극단의 대립 속에서는 서로를 향한 비난과 분노만 남을 뿐이다.

 

과거 이슬람혁명 당시 투데당과 이란 좌파들이 범했던 착오는 오늘날에도 중요한 교훈을 준다. 당시 이란 좌파들은 이슬람주의의 위험성을 경시하고, 단지 ‘반자본주의’와 ‘반제국주의’ 성격만을 강조했다. 투데당은 호메이니 정권의 권위적인 통치를 반제국주의 투쟁의 일환으로 규정하며 지지를 보냈다. 예를 들어 1979년 11월 그리스 언론 《엘레프테로티피아》의 인터뷰에서 투데당의 누레딘 키아누리 서기장은 이슬람 혁명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혁명의 본질은 반제국주의적, 대중적, 민주적입니다. 물론 이슬람의 우산 아래에서 일어났지만 말입니다. 반제국주의적이고 반독재적이며, 따라서 민주적이고 대중적이며 반자본주의적인 것, 바로 이것이 이슬람, 더 정확히 시아파의 본질입니다. … 시아파는 혁명적이고 진보적인 이념으로, 우리가 사회주의로 가는 길을 막는 존재가 결코 아닙니다. … 우리 당의 협력은 전술적 성격이 아니라 전략적 성격을 지닙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슬람주의 정권이 민주적 권리를 제도적으로 보장할 수 있을지, 인민의 사회경제적 요구에 부응할 수 있을지에 대해 진지한 검토를 회피했다. 이슬람주의를 제국주의에 맞선 무기로 착각한 것이다. 그 결과 좌파는 이슬람주의의 가혹한 탄압 끝에 몰락했다. 그들이 보여준 비극은 곧, 이슬람주의를 비판 없이 용인할 때 어떤 대가가 뒤따르는지를 보여준다.

 

이란 이슬람주의를 비판해야 할 두 번째 이유는 이란 신정체제를 비판하는 사회운동과 연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현재 이란 사람들 사이에선 신정체제에 불만이 크다. 2024년 진행된 대통령 선거는 투표율이 40%로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다. 2024년 10월 실시된 이란 폴(Iran Poll) 여론조사에 따르면, 이란인들의 78%가 정부의 소셜미디어 통제에 반대하며, 63%가 정부의 히잡 통제에 부정적이다. 그런데 동시에 76%의 여론이 향후 10년간 정치체제가 변동하지 않을 것이라 보았다. 즉, 현 체제에 불만이 많지만, 당장 바뀌지 않을 것이란 비관과 정치 환멸이 만연함을 보여준다. 2009년 대통령 부정선거 의혹을 둘러싼 녹색운동을 비롯해 여러 대규모 저항운동이 있었으나, 신정체제 자체를 겨냥하는 운동으로 나아가지 못했고, 한때 기대를 끌었던 중도·개혁파 정치인들은 침묵했으며 운동을 이끌어갈 구심점이 없었다. 그렇기에 여러 저항운동은 진압되었고, 이란인 사이에서 비관적 전망이 커지고 있다.

 

그러나 이란의 신정체제를 비판하는 개인과 조직들이 분명 존재한다. 시린 에바디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시린 에바디는 이란 최초의 여성판사였으나, 이슬람 혁명 이후 판사직을 박탈당했다. 그녀는 이후 변호사로 체제에 저항하는 인사들을 변호했으며 2001년 이란 인권수호센터(DHRC)를 설립해 이란 여성, 아동 인권개선을 위한 다양한 활동과 가족법 개정 100만 서명운동을 주도했다. 그녀는 2003년 이란인 최초의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녀와 인권수호센터의 활동은 당국의 지속적 탄압을 받았다. 결국, 2009년 에바디는 살해 협박 끝에 영국으로 망명했고 단체는 폐쇄되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여전히 해외에서 이란의 인권 실태 폭로와 이슬람 신정체제 비판을 지속하고 있다. 그녀는 이란 신정체제의 위험성을 폭로하며 이슬람주의와 이슬람교를 분리해서 볼 것과 이란의 세속적 법치와 민주주의, 인권보장을 촉구하고 있다. 2020년 2월 《워싱턴포스트》 기고문은 이란 이슬람주의 비판의 중요성을 다시금 강조한다.

 

“인정하기 어렵지만, 우리는 호메이니가 이란에 대해 어떤 비전을 가졌는지 거의 알지 못한 채 그를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들은 그의 책을 읽지도, 그의 연설을 자세히 확인하지 않은 채 그의 카리스마에 사로잡혔습니다. 변명 같지만, 우리에게 표현과 토론의 자유가 있었고 정보 접근성이 좋았다면, 그에게 도전하고 맞섰을 것입니다. … 저는 수많은 고통을 초래한 혁명에 기여했다는 사실에 괴로웠습니다. … 가끔 과거를 돌이켜보면서 왜 후세대들에 더 나은 세상을 물려주지 못했는가를 자문하곤 합니다. … 지금도 우리가 저지른 실수로 인해 여러분이 여전히 너무나 큰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사실에 깊이 사죄하고 싶습니다. 혁명의 열기에 휩쓸려 자신의 행동이 초래할 결과를 생각하지 못했던 저와 수많은 이들을 용서해 주시길 바랍니다.”

 

마찬가지로 이란 안과 밖에서 이란인들은 이란 신정체제의 위험성을 폭로하며 저항을 이어가고 있다. 이란 정부에 의해 1991년 암살된 민족전선 출신 압둘라만 보루만드 박사의 딸들이 미국에서 만든 ‘압둘라만 보루만드 센터(ABC)’는 이란 정부의 인권탄압을 데이터로 정리하고 관련한 교육과 연구를 진행한다. 이란 안에도 투쟁이 존재한다. 2023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인권운동가 나르게스 모함마디는 교도소에서 옥중투쟁을 하면서 이란체제의 폭력성을 국제사회에 고발하는 중이다. 그녀가 투옥된 에빈 교도소는 그녀 외에 여러 여성 활동가, 언론인들이 교도관들의 고문을 견디며 옥중학습, 토론을 비롯해 투쟁을 진행 중이다. 이밖에도 이란에는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다양한 문화적 방식으로써 체제에 저항하는 사례가 많이 존재한다.

 

이란 신정체제에 대항한 여러 개인, 조직들의 저항은 미약하지만, 이슬람주의 체제가 성평등, 사회정의, 민주주의와 근본적으로 양립할 수 없다는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그들의 목소리에 주목하고 연대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이들이 제기하는 이슬람주의 비판을 경청하고 이를 국제적 담론으로 확산할 때, 진정으로 해방적이고 보편적인 민주주의의 전망을 이란에서 강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비관에 빠진 이란인에게 이슬람주의에 대한 성찰과 대안을 제공할 수 있다.

 

이란 현대사 속에서 성장한 이슬람주의는 편집증적인 정치문화로 다원주의를 거부하고 끝없는 극단적 갈등과 폭력을 국내외로 재생산한다. 그렇기에 사회운동이 중동 문제를 인식할 때 이슬람주의 비판, 특히 이란 이슬람주의 비판은 중요할 수밖에 없다. 이란의 민주화만이 아니라 지역의 평화와 안정, 나아가 국제 질서의 지속가능성을 확보하는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이슬람주의와 이슬람교를 혼동하여 이슬람주의를 옹호하거나 이슬람 혐오에 빠지는 양극단의 오류를 피하고, 과거 투데당 등이 보여준 과오와 달리 신정체제의 위험성을 엄중히 인식하며, 이란 신정체제에 저항하는 이란 사회운동 세력과 연대를 강화하는 것은 민주주의 수호와 중동 평화 구축을 위한 불가결한 조건이자 과제이며 오늘날 권위주의 정권이 확대되는 정세에서 특히 중요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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