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러시아혁명 1917-1938』을 통해 본 러시아혁명사

쉴라 피츠패트릭, 『러시아혁명 1917-1938』

서보람 | 회원


1. 들어가며

 
2008년 금융위기 이후 해결되지 못한 경제위기는 코로나19 위기를 겪으며 더욱 심화되었다. 현재 인플레이션과 고금리로 인해 (현금을 다량 보유한 부자들을 제외하고) 노동자를 포함한 일반 시민들의 고통은 커져 가고 있다. 현 정세는 대안세계를 고민하는 우리에게 치열함과 더 높은 판단력을 요구한다. 그런 측면에서 소련, 중국, 북한과 같이 현실 사회주의를 자임했거나 자임하고 있는 국가들의 혁명 과정과 국가운영 방식을 살펴보는 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과제일 수밖에 없다. 

2023년 현재,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 지 100년이 넘었으며,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30년의 시간이 지났다. 1921년 중국공산당이 수립되고 1949년 중국에서 혁명이 승리한 이후 70여 년이 흘렀다. 1945년 한반도 해방 이후 북한이 건국되고 사회주의를 표방하며 국가를 운영한 지도 70년이 넘었다. 이들의 2023년 상황은 어떠한가?

2022년 러시아는 2차 세계 전쟁 이후 국제 평화와 안전을 지향하자는 국제적 합의를 무시하고, 1991년 소련으로부터 독립하여 국제법적, 영토적으로 분리된 주권국가인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중국공산당은 지난해 10월 진행된 중국공산당 20차 당대회를 통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중국공산당 총서기 3연임을 확정하고, 시진핑 사상을 당헌에 명시했다. 이때 시 주석은 대만 통일을 반드시 실현하겠다며, 대만에 대한 무력행사라는 선택지를 포기하지 않았음을 명확히 하였다. 북한에서는 2011년 김정은이 집권하며 3대 세습이 이루어졌고, 핵실험 위협과 미사일 발사를 통해 한반도 평화를 포함한 전 세계의 평화를 위협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은 ‘사회주의가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우리에게 제기한다. 사회주의 국가를 자임했거나 자임하고 있는 나라들이 세계의 평화를 위협하고 민주주의 자체를 실종시키는 정책과 제도를 강화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원칙과 기준을 가지고 대안 세계를 만들어가야 할까? 이는 과거 공산주의를 지향하며 투쟁해왔던 역사 속에서 무엇을 반성하고, 무엇을 계승하며, 무엇을 발전시켜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다. 특히 혁명 과정에서 대중의 인식과 의식은 어떠했는지, 그것이 혁명의 흐름과 사회 정책 방향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잘 고찰해볼 필요가 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 현실 사회주의의 역사를 비판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에서는 쉴라 피츠패트릭의 책 『러시아혁명 1917-1938』을 소개하면서, 러시아 혁명 당시 상황을 요약하고 러시아 혁명이 우리에게 남긴 몇 가지 과제와 쟁점을 살펴보려 한다. 이러한 과제와 쟁점에 대한 올바른 답을 찾기 위해서는 여전히 많은 토론과 새로운 시도가 필요하다. 저자인 쉴라 피츠패트릭은 현대 러시아 및 소비에트를 연구하는 수정주의 역사학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피츠패트릭은 소련을 전체주의적 입장에서 평가하는 기존 서구 학자들의 주장에 도전하며, ‘아래로부터’의 사회사에 충실하게 역사를 바라보려고 노력했다. 물론 저자가 제기한 다양한 문제는 현재까지 논쟁의 대상이다. 가장 큰 논쟁 중 하나는 과연 스탈린주의에 대한 대중적 지지가 존재했는가, 그리고 1920~1930년대를 문화혁명기로 명명할 수 있는가이다.  

이 책은 세 가지 주제에 대해 다루고 있다. 첫째는 현대화, 즉, 후진성에서 탈출하는 수단으로서 혁명의 의미다. 둘째는 계급, 즉, 프롤레타리아와 그 ‘전위’인 볼셰비키당의 임무로서 혁명이 지닌 의미다. 셋째는 혁명적 폭력과 테러, 즉, 혁명이 어떻게 적들을 다뤘고 이것이 볼셰비키당과 소비에트 국가에서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다.
 
 

2. 러시아 혁명의 배경

 
러시아는 20세기 초까지는 유럽의 열강 중 하나였으나, 다른 열강에 비해 봉건제에서 뒤늦게 벗어났고 산업화도 늦었다. 정치적 측면에서도 1905년까지 합법 정당도, 선거로 선출된 중앙 의회도 없었다. 1905년 혁명으로 인해 차르(황제)는 두마(의회)를 전국적으로 설립하고 정당과 노동조합을 합법화했지만, 독단적 관행과 비밀경찰의 활동을 통한 억압적 통치는 지속되었다.  

도시 대공업 단지는 매우 적게 형성되어 있었으며 농촌 지역 대부분은 전통적 삶의 방식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가부장제 구조도 여전히 확고했으며, 농노제가 폐지된 지 정확히 한 세대밖에 지나지 않았다. 온전한 산업 노동력이 상당한 비율을 차지한 도시는 상트페테르부르크뿐이었다. 대부분의 근대 산업 도시에서 노동자들은 농촌과 연결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1914년 8월 1차 세계 전쟁이 발발했다. 러시아의 패전이 반복되자 대중의 불만은 폭발했다. 차르의 전제정은 이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었다. 결국 1917년 2월 러시아의 전제정은 붕괴한다. 

한편, 러시아에서 마르크스주의자는 1880년대에 등장했다. 러시아 인텔리겐치아(지식인 계층) 내부에서 마르크스주의는 하나의 세력으로 등장하면서 이전까지의 혁명적 운동의 특징인 유토피아적 이상주의와 테러 전술, 농민 지향성을 거부했다. 당시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러시아의 자본주의적 산업화가 불가피하며, 자본주의야말로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라고 보았다. 이들은 자본주의 발전이 만들어 낸 산업 프롤레타리아야말로 진정한 사회주의 혁명을 가져올 수 있는 유일한 계급이라고 단언하였다. 당시 러시아에서 마르크스주의는 다른 개발도상국과 마찬가지로, 서유럽 산업 국가에서와는 다른 의미를 가졌다. 즉, 마르크스주의는 혁명의 이념일 뿐만 아니라 근대화의 이념이기도 했다.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들은 1898년 (불법으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을 건설하고 노동자 교육, 정치적 노동조직, 파업, 그리고 1905년 혁명에도 직접 개입했다. 1898년과 1914년 사이에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은 인텔리겐치아 조직으로 머무르기를 멈추고 노동자 운동에 합류했다. 이후 1903년 제2차 당대회에서 ‘볼셰비키’(러시아어로 ‘다수파’) 분파와 ‘멘셰비키’(‘소수파’) 분파로 나뉘게 된다. 당시에는 멘셰비키가 더 정통적인 마르크스주의로 보였으며, 이들은 러시아 제국의 비러시아 지역에서 지지기반을 다졌다. 반면, 볼셰비키는 러시아 노동자 사이에서 우위를 점하기 시작했다.
 
 

3. 1917년: 볼셰비키의 승리

 
2월 전제정이 붕괴한 뒤 러시아에서는 임시정부가 구성되고 소비에트가 부활하면서 임시정부와 소비에트의 이중 권력이 형성된다. 새로운 임시정부는 엘리트 혁명을 대표하는 반면, 부활한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는 인민의 혁명을 대변했다. 당시 소비에트의 사회주의자들은 부르주아 혁명이 역할을 다하고 사라지는 순간까지 노동계급의 이해관계를 보호하면서 임시정부를 감시하는 길을 선택했다. 임시정부 시기 소비에트의 멘셰비키 지도자였던 니콜라이 수하노프는 “유산계급의 참여 없이 소비에트는 절망적 붕괴의 상황에서 행정 기술을 숙달할 수도 없었을 것이고 소비에트를 상대로 똘똘 뭉친 왕당파와 부르주아 세력을 다룰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권력 이양의 조건으로 가까운 미래에 계급의 적에게 완전한 승리를 거둘 민주주의를 보장해야 했다”고 말했다. 이는 사회주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자본주의가 필수적이라는 생각과 연결된다. 

그러나 2월 임시정부 구성 이후 대중과 엘리트의 입장은 더욱 분할된다. 대중은 더욱 급진적으로 변한 반면, 엘리트는 소유권, 법, 질서의 수호를 바라는 보수적 입장에 가까워진다. 두 세력 간의 갈등은 노동 정책, 농민의 토지 요구, 전쟁 참여 문제를 둘러싸고 더욱 증대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소비에트 내 소수였던 볼셰비키는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빵, 토지, 평화”라는 정세적 구호를 바탕으로 노동자의 공장위원회, 군대의 병사위원회와 수병위원회, 대도시의 하위 구역 소비에트에서 지지를 얻어내고 10월 혁명을 성공시킨다. 10월 혁명 이후 제헌의회 선거가 진행된다. 볼셰비키는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 러시아 도시 전체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나, 농촌에서는 그렇지 못하였다. 볼셰비키는 선거결과를 받아들이지 않고 1918년 1월 제헌의회를 해산시킨다. 이는 볼셰비키가 다른 정당과의 연립정부 구성을 거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과정에서 자유주의자, 비(非)볼셰비키 마르크스주의자는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 혁명의 시기가 무르익지 않았는데도 볼셰비키가 마르크스주의의 법칙을 깨고 권력을 잡았다는 사실에 대해 분노한다. 

한편, 10월 혁명까지 가는 과정에서 8월 라브르 코르닐로프 장군의 우익 쿠데타 시도가 발생한다. 저자는 페트로그라드 노동자의 활발한 대응으로 쿠데타는 결국 실패했지만, 쿠데타 시도로 인해 많은 노동자가 오직 무장 경계만이 혁명을 적으로부터 구할 수 있는 수단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고 평가한다. 더불어 이러한 인식이 내전을 거치며 더욱 강화된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렇다면 당시 볼셰비키의 10월 혁명이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서구의 전형적인 해석은 볼셰비키의 당 조직과 규율을 원인으로 지목한다. 이러한 해석은 1917년 2월 이후 개방적이고 민주적이고 다원주의적인 정치가 형성되었는데, 이를 볼셰비키가 음모를 꾸며 조직한 10월 쿠데타로 전복하고 불법적으로 권력을 장악했다며 강하게 비판한다. 그러나 저자는 이런 식의 분석은 실제 상황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1917년 당시 새로운 당원의 가입이 쇄도하여 볼셰비키가 대중 정당이 되었으며, 이에 따라 볼셰비키는 1917년의 가장 기본적인 정책 문제도 합의하지 못했고, 10월 봉기가 바람직한가를 둘러싸고도 당 지도부 내부의 첨예한 대립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볼셰비키가 혁명적 대중의 적극적 지지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1917년 10월 혁명이 승리했다고 이야기한다. 볼셰비키가 대중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정치 스펙트럼의 가장 왼쪽에서 비타협적 급진주의를 고수하며, 다른 사회주의자 집단과 자유주의자 집단이 임시정부와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에서 직위를 놓고 대립할 때 정치적 연립과 타협을 거부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4. 내전: 통제와 강압의 강화

 
1918년 초, 러시아는 독일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조약을 공식적으로 매듭짓고, 유럽 전쟁에서 확실히 철수한다. 그 이후 몇 달이 지나지 않아 많은 전선에서 다양한 백군(반혁명군)을 상대로 한 전투가 벌어지게 된다. 내전은 볼셰비키가 처음으로 통치를 시작하는 시기였다. 볼셰비키는 임시정부 과정에 참여하지 않았기에 과거에 행정을 경험한 사람이 거의 없었다. 볼셰비키는 내전 동안 조직의 역량 대부분을 ‘붉은 군대’(혁명군), 체카(정치경찰), 식량인민위원에 쏟아 부으면서 내전을 승리로 이끌려고 노력했다. 볼셰비키에게 이 전쟁은 계급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많은 볼셰비키가 민병대 유형을 이념적으로 선호했지만, 붉은 군대는 처음부터 병사는 군대 규율에 복종하고 장교는 선출이 아니라 임명되는 정규군의 방식으로 조직되었다. 내부의 심한 반발과 비판에도 불구하고, 훈련 받은 군사 전문가가 부족한 현실에서 트로츠키와 레닌은 옛 차르 군대 출신 장교를 기용하기도 하였다. 군사력에 더해, 소비에트 체제는 ‘체카’, 즉 반혁명, 사보타주, 투기에 맞선 투쟁을 위한 전(全)러시아비상위원회라는 보안 조직을 재빨리 편성한다. 체카는 곧 반체제 음모를 다루게 되었고, 충성심이 의심스러운 집단을 감시하는 비밀경찰 기능을 맡게 된다. 내전 시기 체카는 처형을 포함한 약식재판을 시행하고, 대규모 체포를 자행한다. 체카와 반(反)볼셰비키 양측 세력 모두 곳곳에서 테러를 자행한다. 내전의 영향으로, 체카는 옛 전제정 시기 경찰보다 훨씬 더 공공연하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한편, 볼셰비키는 절망적인 경제 상황 속에서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이를 위해 볼셰비키는 급진적 정책들을 중앙으로 집중시키고, 빠르게 실행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 대표적 사례로, 사회주의 혁명 승리를 위해 필수적 과제로 인식되었던 국유화가 급속도로 추진되었다. 그러나 이는 현실적으로 새로 설치된 ‘인민경제최고회의’의 능력을 초과하는 것으로, 국유화된 산업 전반을 감독하지 못하는 한계를 낳았다. 실제로 내전 시기 도시의 식량난은 매우 심각한 상황이었다. 물가가 치솟아 물물교환이 거래의 기본 형태가 되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농촌의 식량 징발은 더욱 강제되었다. 이를 두고 일부 볼셰비키는 화폐가 사멸하고 있다며 칭송하기도 했다. 더불어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승리와 함께 공산주의로의 이행이 아마도 몇 주나 몇 달 안으로 완료될 것이라는 기대가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저자는 당시 볼셰비키의 통치에 대해 비판적으로 평가한다. 볼셰비키가 그들의 통치를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묘사했으나 실제로는 볼셰비키당의 독재에 더 가까웠으며, 볼셰비키는 그들의 통치를 ‘소비에트 권력’으로 묘사하기도 했지만 이 역시 사실과 다르다는 것이다. 그 이유로 첫째, 10월 혁명은 본질적으로 볼셰비키당의 쿠데타였지 소비에트의 쿠데타가 아니었으며, 둘째, 중앙 정부는 소비에트와 전혀 무관했다는 점을 들고 있다. 당시 새 정부는 임시정부에서 다양한 부처의 관료 조직 통제권을 넘겨받았고, 임시정부 역시 차르의 대신 회의에서 이를 넘겨받았다. 

당시 볼셰비키는 혁명적 정책을 손상시키고 파괴할 능력을 지닌 관료 조직을 두려워했다. 하지만 레닌은 당시 상황에서는 관료제와 함께 일하는 것밖에 대안이 없다고 믿었다. 당이 충분한 수의 공산주의 전문가들을 길러내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자들은 부르주아 전문가와 함께 일하는 법을 배우고, 동시에 부르주아 전문가를 확실하게 통제하는 법도 배워야 하는 과제를 부여받았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내전 말엽에 이르면 볼셰비키 당 중앙위원회와 정치국이 정부의 권력을 침해하는 경향이 드러났다. 지역 수준에서도 당 위원회가 소비에트보다 우세한 징후가 나타난다. 

1920년 볼셰비키는 내전에서 승리한다. 내전에서 볼셰비키가 승리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는 붉은 군대와 체카였다. 도시 노동자계급의 적극적 지지와 인구의 절대 다수를 구성하고 있는 농민계급의 소극적 수용 역시 또 다른 승리 요인이었다.

1917년 10월 혁명 승리 후, 러시아의 미래 정부 형태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필요하다는 인식은 존재했지만,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어떤 의미인가는 여전히 열린 문제였다. 만약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옛 자산계급의 반혁명 시도를 분쇄하는 것이라면,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독재 정권은 차르의 비밀경찰에 비견할 만한 강압적인 기관을 설치할 필요성이 있었다. 만약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볼셰비키당의 독재를 의미한다면, 여전히 존재하는 다른 정당들을 억압하는 것이 필요했다. 한편,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노동조합이나 공장위원회를 포함한 모든 프롤레타리아 기구의 폭넓은 권력과 독립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이를 위한 체계와 제도를 만들어야 했다.

이와 관련하여 마르크스는 1871년 파리코뮌을 목격한 뒤 「1871년 프랑스 내전에 대한 국제노동자협회 총평의회에서의 연설」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해 단서를 남겼다.

“파리가 저항할 수 있었던 유일한 원인은 포위의 결과로 파리가 군대를 배제하고 주로 노동자들로 구성된 국민방위군으로 대체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은 이제 하나의 제도로 변모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코뮌의 최초 포고령은 상비군을 폐지하고 무장 인민으로 대체하는 것이었습니다. 
코뮌은 파리 시의 다양한 각 구에서 보통선거로 선출되어 시민에게 책임을 지며 즉시 소환 가능한 시 의원들로 구성되었습니다. 성원의 다수는 당연히 노동자들이거나 노동계급의 공인된 대표들이었습니다. 코뮌은 의회 기구가 아니라 활동하는 행정부인 동시에 입법부였던 것입니다. 경찰은 중앙 정부의 하수인으로 계속 남았던 것이 아니라 즉각 그 정치적 속성을 벗게 되어 책임감 있고 언제든지 소환 가능한 코뮌의 집행인으로 바뀌었던 것입니다. 여타 행정 부서의 모든 관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코뮌의 의원을 필두로 공직은 노동자의 임금 수준에서 수행되어야 했습니다. 국가 고관의 기득권과 판공비는 그들의 높은 위엄 그 자체와 더불어 사라졌습니다. (…) 이전의 모든 정부 형태가 억압적이었던 반면에 코뮌이 철저하게 개방적인 정치 형태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코뮌의 진정한 비밀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즉, 코뮌은 본질적으로 노동계급의 정부였으며, 생산계급의 착취계급에 대한 투쟁의 성과였으며, 노동에 대한 경제적 해방이 이루어질, 궁극적으로 발견된 정부 형태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볼셰비키 지도부는 내전 이전부터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당이 이끄는 것으로 사고하였다. 볼셰비키 지도부는 공장위원회와 소비에트를 통한 노동자들의 직접민주주의 실현이 가능하다고 보지 않았으며, 과학적 이념으로 무장한 전위로서의 당만이 혁명을 지도하고 완수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내전은 이러한 경향을 더욱 강화했다. 내전은 “볼셰비키 운동의 혁명적 정치문화를 군사화”시켰으며, “강제력에 쉽게 의존하기, 행정명령 통치, 중앙화된 행정, 약식재판”이라는 유산을 남겼다. 당의 권위주의적 경향 역시 강화되었다. 한편, 노동자가 국가를 실제로 운영할 수 있는 지식을 거의 보유하지 못했던 현실도 존재했다. 이런 가운데 볼셰비키는 임노동관계와 상품 및 화폐의 소멸, 국가의 소멸을 목표로 하는 공산주의로 나아가기 위해, 어떻게 국가를 통치할 것인가라는, 아무런 선례가 없는 질문에 신속하게 답해야만 했다. 
 
 

5. 신경제정책과 혁명의 미래: 
전략적 후퇴인가? 혁명의 퇴보인가?

 
내전에서 승리했지만, 볼셰비키는 곧바로 행정적 혼란과 경제적 파탄을 해결해야 하는 과제를 부여받는다.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더는 유지할 필요가 없는 붉은 군대 병력이 500만이 넘었다는 사실이었다. 붉은 군대는 인구 중 노동자의 비중이 높지 않았던 러시아에서 프롤레타리아의 가장 중요한 세력이었다. 1921년 첫 몇 달 동안 200만 명이 넘는 병사들이 제대하면서, 볼셰비키는 프롤레타리아 혁명 투사들이 돌변할 수 있다는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대표적 사건이 1921년 3월 크론슈타트 해군기지에서 발생한 수병 반란이다. 수병들은 노동자와 농민의 진정한 소비에트 공화국을 요구하며 볼셰비키 혁명을 거부한다. 이들은 노동자와 농민에게 정치적 자유 및 표현의 자유를 보장할 것, 노동조합과 농민조합 결성의 자유를 보장할 것, 평등한 노동자 배급제를 실시할 것을 포함한 15개 요구를 결의했다. 이 반란은 노동계급과 볼셰비키 사이를 갈라놓은 상징처럼 보였다. 이에 대해 노동자가 당을 배신했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당이 노동자를 배신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모두 존재했다. 그러나 반란은 이들 모두에게 비극이었다. 소비에트 체제는 수병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처음으로 ‘혁명적 프롤레타리아’에게 총구를 겨누게 된다. 

한편, 레닌이 혁명의 완수를 위해 기대했던 독일 공산주의자의 혁명적 봉기가 비참하게 실패한다. 해외로부터의 지원이 불가능하게 된 상황에서, 레닌은 혁명의 승리를 위해서는 결국 농민계급과의 동맹이 필요하다는 판단을 내리게 된다. 이에 따라 레닌은 내전 시기 시행되었던 전시(戰時)공산주의를 종료하고 신경제정책(NEP, 네프)을 시행했다. 경제, 사회, 문화생활의 통제를 완화하는 정책들이 추진되기 시작했다. 농민이 생산한 식량에 대한 징발을 중지하고 현물세를 도입했다. 농민이 시장에서 매매할 수 있는 잉여 물품을 남길 수 있게 되었으며 사적 거래 역시 법적으로 허용했다. 완전한 국유화 또한 포기했다. 

그러나 정치 영역에는 완화가 허용되지 않았다. 많은 공산주의자는 네프를 둘러싸고 큰 환멸을 느꼈으며, 자본주의의 위협을 두려워했다. 이에 따라 당 내 규율은 더욱 엄격하게 적용되었다. 더불어 1917년 이후 기존에 볼셰비키 지도부 안에서 분파 형성이 허용되었던 것과 달리, 1921년 제10차 당대회를 거치며 (일시적 조치라고 이야기했지만) 분파 활동 자체가 불법화된다. 다른 정당에 대한 탄압도 더욱 강화했다. 1922년과 1923년에 저명한 입헌민주당원과 멘셰비키 수백 명이 소비에트 공화국에서 강제 추방되었고, 사회혁명당 우파 집단은 반국가범죄로 공개 재판에 회부되었다.

러시아혁명에서 볼셰비키가 시행한 정책과 대응은 모두 다 쟁점적이다. 어떤 원칙과 기준을 가지고 사회를 변혁할 것인가를 판단하기 위해 세밀하게 살펴보고 평가할 측면이 많다는 의미다. 그 중에서도 네프는 더욱 쟁점적이다. 네프는 혁명의 퇴보인가? 아니면 혁명의 발전을 위해 필요한 조치였는가?, 네프는 더 오래 지속되었어야 하는가? 아니면 네프의 빠른 중단이 올바른 선택이었는가? 이와 같은 질문들이 현재에도 제기되고 있다.

당시 볼셰비키에게 사회주의 건설의 핵심은 경제 발전과 근대화였다. 1921년 네프 도입 초기, 레닌은 네프가 ‘새로운 혁명적 공격을 가하기 전에 볼셰비키에게 힘을 모으고 체력을 회복할 시간을 제공해주는 전략적 후퇴’라고 말했다. 물론 네프 기간 동안 볼셰비키의 사적 부문에 대한 태도는 항상 양면적이었다. 지역의 사적 기업가들(네프맨)에게는 언제나 큰 의혹이 따랐다. 농민계급에 대한 접근법은 더 모순적이었다. 농민계급은 소부르주아적 길을 따라가도록 회유되었다. 이는 체제가 열심히 일해서 성공을 거둔 농민을 관용으로 대하고, 심지어 승인한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실제로 볼셰비키는 이웃보다 더 부유해진 농민들을 극단적으로 의심했다. 볼셰비키는 종종 그런 농민들을 ‘쿨라크’(부농 계층)로 분류하고, 잠재적 착취자나 농촌 자본가로 여겼다. 부농은 선거권 상실을 포함한 다양한 형태의 차별을 겪어야 했다. 

네프가 시행된 지 10년도 지나기 전에, 레닌 사후 새로이 권력을 잡은 스탈린은 네프 정책 대부분을 포기했다. 스탈린은 제1차 5개년 계획 공업화 추진과 농업 집단화를 통해 소련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연다. 부하린과 리코프를 포함한 당의 다른 지도자들은, 레닌이 네프는 소련 체제가 사회주의의 결정적 단계로 나가기 전까지 ‘심각하게 오랜 시간’ 동안 이어져야 한다고 말했다는 점을 지적하며 스탈린의 경제 정책에 반대한다. 그러나 네프 동안 젊은 당원들은 영웅적인 옛 내전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당 엘리트뿐만 아니라 다수의 공산당 평당원과 동조자는 네프 시기를 혁명의 교착 상태라고 믿으며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 이에 따라 스탈린의 입장은 대중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또한 스탈린은 당의 서기장으로서 당의 결정을 사실상 ‘독점’할 수 있었다. 결국 스탈린이 승리하면서, 농민과의 동맹 강화와 사회주의의 결정적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심각하게 오랜 시간’이 걸릴 전략이라는 문제의식은 결국 폐기된다. ‘위로부터의 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혹자는 스탈린의 국유화와 농업 집단화 정책이 (실제로는 제품의 품질이 낮고 물자 낭비도 엄청났으며 불량품의 비율도 높았지만) 소련 경제성장의 주요한 원인이었으므로 네프의 폐기가 올바른 방향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동시에 네프를 유지했어도 1930년대 중반까지 비슷한 수준의 성장이 달성되었을 것이라는 연구결과 역시 존재한다는 점을 무시할 수 없다. 더욱이 스탈린 시기 농촌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계급 도시 주민의 생활수준과 삶의 질이 하락했다는 현실 역시 외면할 수 없다. 

당시 볼셰비키에게는 사회주의 혁명을 발전시키며 국가를 운영할 준비가 되어 있었는가, 사회주의의 결정적 단계로 나아갈 충분한 준비와 시간은 정말 불필요했는가라는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더불어 노동자 비중이 적었던 당시 러시아에서 네프가 추구한 농민과의 동맹을 거부하고, 농민에 대한 수탈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혁명이 성공할 수 있었겠냐는 질문 또한 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 
   
 

6. 스탈린 혁명: 
위로부터의 혁명 대 배반당한 혁명, 그리고 대숙청

 
스탈린 집권 초기를 좀 더 살펴보자. 1924년 레닌이 죽자 격렬한 승계 투쟁이 전개되었다. 레닌의 뒤를 이어 인민위원회의 의장을 알렉세이 리코프가 맡게 되었지만, 이 당시에도 권력의 중심은 정부가 아니라 사실상 당 정치국이었다. 레닌의 후계자들은 정치국을 집단 지도 방식으로 운영하기로 맹세한 바 있었지만, 스탈린은 ‘서기장’이라는 지위가 가졌던 권한을 적극 활용하여 정치적 반대파를 처단하고 당 대회를 통해 자신의 자리를 보전했다. 지역 당 조직을 이끄는 서기들을 임명하고 분파적 성향을 보이는 서기들을 면직한 것이다.

스탈린은 당의 새로운 방향을 수립한다. 당의 새로운 방향은 ‘일국(一國)사회주의’로 표현되었다. 이 구호는 소련이 외부의 어떤 도움도 받지 않고 공업화를 추진하여, 힘 있고 강력한 사회주의의 전제조건을 만들 준비를 하고 있다는 선언이었다. 소련공산당의 목표는 국제혁명이 아닌 국가 근대화로 바뀌었다. 스탈린은 애국적 입장과 실용적 입장을 동시에 취하였다. 당시 공업화를 추진할 재원을 마련하는 일은 심각한 문제였다. 공업화를 추진하려면 소비에트 체제도 자본을 축적해야만 했는데, 옛 러시아 부르주아의 자산은 이미 몰수했고, 네프맨이라는 새 부르주아와 부농은 자본을 충분히 축적할 만큼의 시간이나 기회가 없었다. 따라서 공업화를 위한 자원은 여전히 인구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으로부터 끌어와야만 했다. 농민 수탈이 다시 등장한 것이다.

당시 소련에는 (명확한 증거는 없었지만) 자본주의 열강의 새로운 군사 개입이 임박했다는 생각이 당과 국가 전체에 퍼져있었다. 저자는 스탈린이 이런 가능성을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한다. 이에 1927년 스탈린은 볼셰비키의 금기를 깨고 트로츠키를 상대로 투쟁을 전개한다. 또한 스탈린은 1928년 초 농민계급과 대립하고 옛 ‘부르주아’ 전문가를 배신자로 고발하면서 반(反)전문가 운동을 촉발한다. 당시 당의 농촌 정책과 관련하여 곡물 조달을 둘러싸고 스탈린파와 훗날 ‘우익 반대파’로 알려질 집단이 갈라진다. 곡물 징발과 농업 집단화를 주장한 스탈린파가 당 내에서 승리하게 되면서 네프는 중단되고 1929년부터 제1차 5개년 계획이 수립된다. 제1차 5개년 계획은 내전과 전시공산주의의 정신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저자는 제1차 5개년 계획은 내전처럼 계급의 적을 상대로 한 투쟁으로 인식되었으며, 동시기 국제 공산주의 운동 역시 네프 기간에 있었던 ‘유화적인 접근법’을 모두 거부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또한 당시 옛 인텔리겐치아, 부르주아적 문화가치, 엘리트주의, 특권, 일상적 관료주의를 상대로 한 투쟁을 ‘문화혁명’으로 지칭해야 한다고 주장한다.(이는 부르주아 문화의 계승과 발전이라는 레닌의 ‘문화혁명’ 개념과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었다) 더불어 “문화혁명의 목적은 공산당과 프롤레타리아의 ‘주도권’ 확립이었다. 이는 실질적 측면에서 당이 문화생활을 통제한다는 것을 확인하고, 젊은 공산당원·노동자 무리가 행정직·전문직 엘리트가 되는 길을 여는 것”이었음을 강조한다. 

실제 네프 시기에 정부 기관에 고용된 전문가는 매우 높은 급여를 받았다. 교수는 부당한 대우를 받기도 했지만 주택 우선 부여 및 자녀를 위한 고등 교육 기회 제공 등 높은 급여와 많은 특권을 가졌다. 사무직 노동자 역시 현장 노동자보다 더 많은 급여를 받았다. 이에 따라 불만이 증가하고 있었다. 따라서 문화혁명은 네프 시기를 거치며 강화된 모순, 즉, 특권층과 그렇지 못한 사람 간 차별을 해결하기 위한 지도부의 대응이라는 측면도 가지고 있었다. 문화혁명은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 사이의 계급 전쟁으로 선포되었으며, 이에 따라 네프맨, 소비에트 관료, 문학·예술 지식인이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학교의 ‘프롤레타리아 비율’을 높이라는 압력이 행사되었다. 지역 공산주의자들은 노동자만이 교육에 대한 절대적인 권리를 가져야 하며, 투표권과 마찬가지로 교육 역시 노동자 이외의 세력은 제한된 권리를 가져야 한다고 인식했다.    

문화혁명의 가장 중요한 지점은, 문화혁명은 산업 노동자와 노동계급 당원이 엘리트로 성장하는 계기였다는 것이다. 제1차 5개년 계획 동안 스탈린은 젊은 노동자와 공산주의자를 상위 교육기관에 보내는 운동을 집중적으로 개시했다. 약 15만 명의 노동자와 공산주의자가 상위 교육기관에 진학한다. 1928년에는 4만 명의 대학생이 노동자 또는 노동자의 자녀로 분류되었는데, 1931년에는 12만 명 이상의 대학생이 노동자 또는 노동자의 자녀로 분류되었다. 

한편, 당시 소련에서는 중앙 계획과 경제의 국가 통제를 통한 생산력 증대가 사회주의로 가는 길로 인식되었다. 산업부문에서는 계획을 ‘초과 이행’하는 것이 목표가 되었다. 문제는 공급의 우선순위가 그때그때의 지시에 따라 정해지면서, 여러 공장의 일정이 완전히 엉망진창이 돼버리기도 했다는 점이다. 저자가 보기에 제1차 5개년 계획 동안 성공을 거둔 소비에트 경영자는, 순종적 공무원이라기보다는 절차 따위는 생략하고 경쟁자를 앞지르려고 권모술수를 부리는 기업가에 가까웠다. 지역 간의 개발 지역 할당을 놓고 경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소련은 다른 나라보다 더 많이 짓고 더 많이 생산해야만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다. 그러나 산업 현장에서는 새로 만든 컨베이어 벨트가 헛돌았고 노동자의 작업 환경 역시 전통적 방식에서 달라진 것이 없었으므로, 생산력의 발전은 한계적이었다.
 
한편, 1929년 말 농촌에서는 농민의 삶을 재조직하고 행정 통제를 확립하려는 시도로서 농업 집단화가 강제된다. 그러나 당시 지방 공산주의자들은 농민의 삶을 어떻게 재조직해야 하는지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결국 통제만이 남게 되었다. 쿨라크는 재산을 몰수당하고 시베리아나 우랄, 북부 지방으로 이송되었다. 스탈린은 이러한 정책이 빈농을 중심으로 농촌에 혁명을 확산시키리라고 사고했을지 몰라도, 농촌의 분노와 혼란은 거대했다. 농민은 가축을 자기 손으로 넘겨주느니 그 자리에서 도살하는 것을 선택하거나, 가까운 도시로 달려가 팔기도 했다. 이들은 농업 집단화를 새로운 농노제로 인식했다. 이 시기 농민은 공업지대에 새로 만들어진 일자리로 자발적으로 떠나거나, 콜호즈(집단농장)에서 도망치거나, 강제 이주를 당해서 노동자가 된다. 사실상 농업 집단화는 농촌 파괴 행위였다.
 
이렇듯, 제1차 5개년 계획과 농업 집단화를 거치며 노동자와 농민 대부분의 생활수준과 실질임금은 급격하게 하락했다. 그럼에도 1929년 말부터 ‘스탈린 숭배’가 시작된다. 상위 교육기관에 진학한 젊은 노동자와 공산주의자가 핵심적인 스탈린 지지 세력이 되었다. 최고 지도자들은 신비롭고 불가사의한 신처럼 행동하는 태도를 기르게 되었으며, 언론 역시 현실을 왜곡하고 통계를 조작하는 방식으로 경제적 성취를 칭송하게 된다. 즉, 좌절과 실패는 무시되었고, 성공한 현실만 강조되었다.
 
 

7. 혁명의 종료: 선언된 사회주의

 
1930년대, 스탈린은 사회주의의 승리를 선언함으로써 혁명을 끝낸다. 1936년 새로운 헌법에는 소련이 사회주의 국가임이 명시된다. 사회주의는 혁명의 최종 결말은 아니지만, 자본주의에 포위된 상황에서 소련이 성취할 수 있는 최선으로 인식되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필요치 않게 되었다. 이제 ‘프롤레타리아 주도권’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지도적 역할’이 강조된다.
 
계급 전쟁이 종식되었다고 여겨진 소련에서 이제 가장 중요한 과제는 생산력 증대였다. 이를 위해 제2차 5개년 계획은 (제1차 5개년 계획보다는 덜 엄격했지만) 생산성 향상과 기술 습득을 최우선의 목표로 삼는다. 교육과정에는 혁명 이전 규율이 다시 돌아왔고, 옛 차르 시대의 위대한 러시아 지도자들을 포함한 영웅들의 역사가 되돌아온다. 모성과 가정생활의 가치가 중요하다고 가르쳤으며, 낙태와 남성 간 동성애는 불법화된다.
 
스탈린은 문화혁명 당시 노동계급과 농민계급에서 충원된 새로운 특권계급에 ‘인텔리겐치아’라는 이름을 붙여서 이들의 문화적 우월성을 강조한다. 실제로 이들은 정치에서 공산당이 맡은 전위 역할을 부여받게 된다. 스탈린은 이들을 통해, 충성심이 항상 의심스러웠던 옛 엘리트 출신에게 의존하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1930년대 후반에 이르자, 대숙청이 감행된다. “한 명의 죄인이 풀려나는 것보다 열 명의 무고한 사람들이 죽는 편이 낫다”라는 생각이 통용되었다. 저자는 당시 대숙청이 발생한 원인으로 1920년대 초 볼셰비키당 밖에 조직된 반대파가 사라지자, 과거 당 밖의 반대파를 향하던 테러와 숙청이 당 내의 반대파를 제거하는 데에까지 나아갔다는 점을 지적한다. 1920년대 후반부터 당내 숙청이 점차 빈번해졌고, 각각의 숙청은 체제의 잠재적 적들을 만들어냈다. 당시 고위직 공산주의자뿐만 아니라, 인텔리겐치아 역시 테러와 숙청의 대상이 되었다. 대숙청 시기 일반 시민은 지역 관리의 ‘권력 남용’을 고발하도록 권고 받았다. 대중의 참여 속에서 대숙청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모든 공산당원 행정가를 고발하는 서류가 계속 쌓여갔다. 그 중에는 불만과 이기심에서 근거한 고발도 존재했다. 
 
 

8. 나가며

 
지금까지 러시아 혁명이 어떻게 진행되었으며, 시기별로 어떤 쟁점이 있었는지에 대해 간단하게 살펴보았다. 이제 저자가 이야기한 세 가지 주제, 즉 현대화, 계급, 혁명적 폭력과 테러에 대해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정리하며,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폭력이라는 문제에 대해 몇 가지 쟁점을 던져보고자 한다.

당시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는 산업화와 경제 현대화를 사회주의라는 목표를 달성하는 수단으로 인식했다. 봉건제에서 뒤늦게 벗어났고 산업화도 늦었던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노동자계급의 형성과 생산력 발전이 필수적이라는 사고가 널리 퍼져있었다. 소련에서 생산력 발전은 혁명 완수의 필요충분조건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생산력 발전은 공산주의 이행의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스탈린은 “사회주의 체계 하에서 생산관계의 기초는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이다. 소련에서 더 이상 착취자와 피착취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소련에서 생산관계는 생산력의 상태와 완벽하게 일치한다”고 밝혔다. 실제로 1936년 소련은 새로운 헌법을 통해 ‘이미 달성된 사회주의 국가’가 되었으며, 공산주의에 미달한 생산력을 발전시키면 혁명이 완수된다는 극단적 논리가 마련되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자본』의 결론으로, 자본주의적 축적의 역사적 경향인 공산주의를 ‘연합적 생산양식’으로 정의한다. 연합적 생산양식의 핵심은 노동자연합에 의한 소유로 특징지어지고, 연합적 소유는 사회적 소유와 개인적 소유 모두를 포함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소유의 법적 형태가 국가 소유로 되었다는 것이 곧 노동자연합에 의한 사회적 소유가 완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와 관련하여 샤를 베틀렘은 『소련에서 계급투쟁』을 통해 소유의 법적 형태를 계급 관계와 기계적으로 동일시하는 것에 대해 비판했다. 또한 “소련에서 착취계급 및 피착취계급의 소멸과 생산력 발전의 우위라는 두 테제는 생산관계를 전화시키기 위한 조직적 행동을 봉쇄하는 데 있어 이데올로기적이며 정치적으로 기여했다”고 평가한다.
 
더불어 “생산력의 발전은 그 자체로서는 결코 분업의 자본주의적 형태도, 다른 부르주아적 사회관계도 소멸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하며, “사회주의 혁명의 임무는 법적인 소유 관계를 전화하는 것으로 제한할 수 없으며, 근본적인 것은 생산 관계를 포함하여 사회적 관계 전반을 전화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오히려 “프롤레타리아 독재 하에서 발전하고, 대중의 과학적 실험과 이론적 분석을 통해 올바르게 지도되는 계급투쟁만이 자본주의적 경제 관계를 소멸”시킬 수 있으며, “자본주의적 분업과 착취•억압 관계의 재생산을 가능하게 하는 이데올로기적•정치적 관계를 동시에 공격하는 것을 통해서”만 사회주의 혁명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그러나 소련에서는 혁명의 완수와 사회주의 승리를 유지하기 위한 계획으로 계획경제와 중앙 통제가 시행되었고, 생산력 발전을 위해 노동자에 의한 통제가 아니라 당에 의한, 노동자에 대한 통제가 이루어졌다. 

또한 소련에는 부르주아의 일원, 즉 옛 자본가, 옛 귀족 지주, 관리, 소상인, 부농, 심지어 어떤 맥락에서는 러시아 인텔리겐치아를 포괄하는 넓은 집단을 ‘타고난 적’으로 가정하는 흐름이 존재했다. 볼셰비키는 이런 사람들을 ‘인민의 적’으로 칭했다. 과거 계급 및 신분을 기준으로 한 사람의 현재 계층이 판단되었다. 이는 그 자식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혈통이 계층 구분의 가장 중요한 근거가 된 것이다. 동시에 과거부터 노동자나 빈농으로 살았던, 옛 체제에서 착취의 희생자였던 사람들이야말로 진정한 프롤레타리아로 여겨졌다. 어떤 의식을 가졌느냐보다 어떤 신분과 출신이었느냐가 프롤레타리아를 구분하는 제1요소가 된 것이다.
 
저자가 지적하듯이 레닌을 포함한 일부 볼셰비키 지식인은 교육이 계급만큼이나 중요하다고 주장했을지도 모르지만, 당 전체에서는 새 체제가 진정으로 권력을 위임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들은 옛 체제에서 착취의 희생자였던 프롤레타리아뿐이라는 합의가 확고했다. 1920년대 스탈린이 서기장이 된 이후 시행한 정책으로 상위 교육기관으로 진학한 약 15만 명의 노동자와 공산주의자들로 구성된 새로운 소비에트 인텔리겐치아가 진정한 프롤레타리아로 여겨졌다. 그 결과 이들은 공산당 간부가 되고 전위 역할을 부여받을 기회를 보장받았고, 현실에서 이들은 소련의 새로운 특권 계층이 될 수 있었다. 더불어 스탈린이 반대파를 제거하고 정책을 변화시키는 데 이들의 지지는 큰 역할을 하였다.

한편, 볼셰비키는 혁명 내내 반혁명 음모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내전 이후 이러한 경향은 더욱 강화되었다. 적에 대한 폭력은 혁명의 완수를 위해 불가피한 것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인민의 적’이라고 의심되거나 지명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폭력 역시 정당화되었다. 레닌은 혁명 초기 체제 내 정치투쟁을 허용했다. 그러나 계급투쟁이 격화되고 내전이 발발하자 관용은 포기되었고, ‘인민의 적에 대한’ 혁명적 폭력을 허용한다. 물론 레닌은 혁명적 테러는 ‘가장 강력하게, 그러나 단기적으로 행사해야 하는’ 것으로 ‘임시적’ 폭력임을 분명히 밝혔다. 그러나 레닌 사후 폭력과 억압은 사실상 영구화되었으며 소련이 사회주의 국가를 선포한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이루어진다. 대표적 비극이 바로 1937년 대숙청이다. 

여기서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폭력이라는 문제에 대해 간단하게 살펴보자.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부르주아에 대한 배제를 수반했다. 문제는 누가 프롤레타리아이며 부르주아(적)인가, 이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반복적으로 제기될 위험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인민의 적’은 현실에 존재할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발명될 수도 있다. 대중의 지지에 의해 폭력과 숙청이 정당화되는 상황이 만들어질 수도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에티엔 발리바르가 이야기한 것처럼 최소한 대중의 이데올로기적 갈등성을 통제할 수 있는 위로부터 또는 아래로부터 주어지는 제약으로서 ‘시빌리테’가 기본조건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없다면, 폭력이 재생산되는 비극이 발생할 수 있다. 동시에 생산과정에서의 지적 차이를 감축하여 진정한 노동자 통제가 가능한 조건을 만드는 것 역시 필요하다. 그러나 소련에서 결국 이는 실패하였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인 현재에도 구조적 폭력뿐만 아니라, 극단적인 폭력은 증가하고 있다. 결국 폭력을 어떻게 해결하고 대안사회를 만들 것인가는 오늘날 우리가 숙고해야 할 문제이다.

1917년 혁명이 발생했던 당시와 2023년 지금은 다르다. 1917년 볼셰비키와 달리 우리에게는 실패한 선례가 존재한다. 소련 붕괴 이후 공개된 다양한 자료들 속에서 우리는 당시의 상황을 예전보다 좀 더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더불어 프롤레타리아 독재, 국유화, 전위당, 폭력이라는 문제를 둘러싸고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공백과 한계에 대한 냉철한 평가와 반성,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평가와 비판 역시 여러 측면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역사를 살펴보며 ‘나는 당시의 상황에서 어떤 판단과 원칙을 세웠을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은 현재를 살아가며 미래를 고민하는 사람들에게는 꼭 필요한 일이다. 현재 대안세계를 고민하고 있는 우리 앞에 1917년과 비슷한 상황이 전개된다고 가정했을 때, ‘러시아 혁명의 과정에서 우리는 어떤 기준과 원칙을 가지고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더 고려할 부분은 무엇인가?’ ‘이를 위해서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우리는 어떠한 답을 내릴 수 있을까. 

특히, 인민주의가 날로 심해지는 현 시기에 대중의 분노와 불만이 곧 올바른 변혁의 길을 안내하지는 않는다는 진실, 대중의 지지 또는 동참 속에서 오히려 큰 폭력이 묵인되고 더 확대될 수도 있다는 진실 앞에서, 우리는 현재 어떠한 과제를 가져야 하는지 잘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
 
 
 
주제어
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