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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11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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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의 좌파, 마르크스주의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

에릭 홉스봄의 『세상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를 읽고

남종석 | 회원
정세의 역설

이미 수십 년간 자본주의 체제의 기능장애는 지속되고 있다. 미국 금융위기와 유럽국가들의 재정위기는 자본주의 중심부의 경제가 무너지고 있다는 뚜렷한 신호다. 그러나 자본주의 경제가 붕괴하고 있다는 말이 체제가 갑자기 붕괴한다는 말은 아니다. 그것은 당분간 자본주의 체제가 지속적인 심연으로 빠져들고 있다는 뜻에 가깝다. 이윤율의 저하, 경제의 금융화와 벨 에포크 시대, 그에 이어지는 금융과 산업의 동시적 위기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정확히 예언했던 것이기도 하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본주의 경제구조는 내적 동력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위기를 초래한다고 주장한다. 기술편향적 축적과 이로 인한 자본생산성 하락이 위기의 내적 원인이다. 이런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제도적인 혁신이 부재할 때 위기는 지속된다는 것이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주장이다. 이윤율 저하 법칙은 이를 간단히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경제위기가 반체제운동의 성장을 자동적으로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 경제가 위기 상태에 놓여있지만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견고한 성을 구축하고 있으며,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이념적 측면에서 아무런 동요도 없다. 세계변혁을 주장했던 마르크스주의는 현실운동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대학에서조차 점차 주변화되고 있다.
노동자운동과 급진적 이데올로기의 해후의 시간은 도래하지 않았다. 자본주의 내에서 노동자계급 운동을 대표했던 사민주의 정당들은 적극적으로 신자유주의를 수용함으로써 노동자계급을 ‘체계적으로’ 배신했다. 우리의 시대는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와 반체제운동의 위기가 동시에 진행되는 시대이다. 현 정세의 역설적 측면이라고 할 만한 이런 상황을 두고 홉스봄은 『극단의 시대』에서 ‘산사태’라고 표현한 바 있다.
좌파의 위기는 한국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1990년대 한국 민중운동을 이끌던 민주노총은 2000년대에 들어와 심각한 부침을 겪으며 투쟁력이 약화되고 건강한 조직문화를 상실하고 있다. 정치적으로 노동자운동을 대변하며, 제도 공간에서의 급진주의를 실현하려던 일련의 정당운동들은 주류화와 분파주의, 고질적인 노선상의 갈등으로 인해 해체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경제위기의 국면에서 부르주아들은 더 공격적으로 노동의 안정성을 파괴하고 노동조합을 무력화시킨다. 한국의 변혁적 분파들은 스스로 마르크스주의 운동을 자임함에도 불구하고, 90년대의 볼셰비키적 노선에서 단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정세 분석에서도, 주체적 대응능력에서도 그들은 퇴행하고 있다. 반면 진보신당과 같이 신좌파를 선언한 일부 집단들은 이념과 노선, 정세분석에서 무능력을 보일뿐만 아니라 활동 자체에 필요한 기본적인 조직 문화조차 확립하지 못한 채 우왕좌왕 하고 있다.
이 시점에서 최근 타계한 홉스봄의 『세상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가 출판된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이 책은 그가 지난 수십 년간 마르크스의 마르크스주의와 그를 계승한 후예들의 이념적, 정치적 실천에 대해 마르크스주의 역사가로서 저술한 글들을 모아 놓은 책이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마르크스에게 이행은 무엇이었고, 지난 한 세기 동안 마르크스주의 운동은 무엇을 목적으로 어떻게 활동했는가를 알 수 있다.
물론 마르크스의 마르크스주의나 그 후예들의 실천이 한국 사회주의 운동이 당면한 문제에 대한 직접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홉스봄이 책에서 누차 강조하는 것이다. 『세상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는 마르크스주의의 역사를 통해 현 정세 속에서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사고하도록 문제의식을 던져줄 뿐이다. 그 이상은 우리 자신의 몫이다.

마르크스의 마르크스주의 Ⅰ: 역사론

『세상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책 전체의 총론격으로 제시된 1장의 「오늘날의 마르크스주의」를 포함하여, 마르크스의 마르크스주의와 그 후예들의 마르크스주의로 구성되어 있다. 나는 이 글에서 학술적인 논의는 최소한으로만 다룰 것이다. 그것이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이 글의 목적이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현 정세에 어떻게 개입할 것인가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글에서 마르크스의 마르크스주의라고 했을 때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마르크스주의다. 많은 학자들이 엥겔스의 마르크스주의와 마르크스의 그것을 구분하려고 했다. 그러나 나는 두 창시자들이, 각론에서 차이가 있다 해도, 큰 범위에서 공동작업자라는 입장에 동의한다.
이 책은 마르크스의 역사유물론과 경제학 비판을 다루지 않는다. 제목이 시사하듯이 이 책은 ‘세계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고자 하는 실천적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마르크스 자신의 실천이론을 중점적으로 소개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변혁론을 다루기에 앞서 우리는 그의 역사론을 간단히 이해해야 한다. 저자는 마르크스의 역사론을 7장 「전자본주의 구성에 관한 마르크스의 입장」에서 중점적으로 다룬다. 우리는 흔히 마르크스의 역사관을 역사발전5단계설로 알고 있다. 5단계설이란, 원시공산제에서 노예제, 봉건제, 자본주의를 거쳐 공산주의에 이르는 사회구성체의 연속적 교체에 관한 이론을 일컫는다.
그러나 이는 1930년대 소련의 공식 교과서에서 정립한 교조이지 마르크스 자신의 입장은 아니다.(180쪽) 『정치경제학비판을 위하여』에서 마르크스가 경제학 비판을 위한 작업가설로 사회구성체의 단계적 이행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이런 관점을 갖고 경제학 비판을 하겠다는 계획이었지 실제 마르크스의 역사서술이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사회구성체의 연속적 변화는 1950년대 소련의 교과서조차 유보조건을 달 정도였다.(182쪽)
실제 역사적 사회구성체에 대한 마르크스의 논의는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이 책은 『자본』 제 1초고이다)에 포함된 ‘전자본주의 생산양식’에서 이뤄진다. 이 장에서 마르크스는 사회구성체가 연속적으로 교체되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원시공산제가 여러 구성체로 전환된다고 쓰고 있다. 각 지역의 역사를 고찰하면서 마르크스는 원시공산제가 고대 노예제, 게르만적 봉건제, 아시아적 생산양식, 슬라브적 공동체 등 상이한 경로로 분화되어온 역사를 고찰한다.(157쪽) 원시 공산제가 고대노예제로 변동하고, 고대노예제가 봉건제로 단선적으로 이행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만약 마르크스가 그렇게 썼다면 그것은 “문자 그대로 비현실적”인 주장이다.(160쪽) 더불어 고대노예제조차 로마제국에게 독특한 것이었으며, 다른 지역에는 그와 같은 구성체가 존재하지 않았고, 이 체제가 반드시 봉건제로 이행해야 할 필연성도 없었다. 두 구성체는 원시공산제를 대체하는 경쟁하는 사회구성체였다. 서유럽 봉건제의 확립은 노예제가 봉건제로 이행한 결과가 아니라 노예제가 붕괴하면서 공존하고 있던 게르만적 봉건제가 ‘확산된 결과’였다.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의 필연성도 기각된다. 마르크스 자신은, 예상과 달리 봉건제 자체의 역동성에 대해서는 깊이 있게 분석하지 않는다.(165쪽) 봉건제의 역동성을 알기 위해서는 마크 블로흐와 같은 아날학파의 성과를 읽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봉건제이든 그보다 더 보편적이었던 공납제 양식이든, 어떤 체제도 내적 역동성에서 보았을 때 자본주의로의 이행의 필연성은 없다.(167쪽) 서유럽 봉건제가 자본주의로 이행했다면 그 이유는 봉건제 자체의 내적 동력이 아니라 독특한 ‘역사적 맥락’에서 그렇게 된 것이다.
마르크스가 유럽의 후기 봉건제를 심층적으로 다루는 이유는, 중세 내부의 화폐경제의 발전과 농민층의 분화로 인해 자본주의로의 변동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는 전자본주의 체제가 자본주의의 전제로 작용하지 않는다면 깊이 있게 분석하지 않았다. 마르크스의 『자본』의 목적은 자본주의 구조의 분석이지 사회구성체의 역사적 이행단계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그에게 있어서 역사적 이행의 필연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로 이행해야 할 필연적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사회주의가 필연적으로 도래한다는 사고를 흔히들 목적론이라고 한다. 목적론이란 역사가 특정한 목적을 향해 나아간다는 사고방식이다. 마르크스의 저작은, 우리의 통념과는 달리, 사회주의의 필연성을 전제하지 않는다. 마르크스가 「헤겔법철학 비판」이나 『공산당 선언』에서 자본주의의 무덤을 파는 존재로서 프롤레타리아트를 제시하는 것은 그가 헤겔좌파였을 때 지녔던 관념론적 유산에서 비롯된 것일 뿐이다.(126쪽) 에티엔 발리바르가 썼듯이, 마르크스는 역사의 나쁜 방향을 보면서 『공산당 선언』의 목적론을 정정한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역사의 주체로 구성될 수 있지만 그들이 선험적으로 그렇게 될 것이라고 보장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현재의 맥락에서 역사를 예측해 보았을 때, 미래는 사회주의의 실현이 아니라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언급하고 있던 ‘두 계급의 공멸’로 향해 나아갈 수도 있다. 경제의 심연이 낳고 있는 세계적 위기는 두 계급(자본가와 노동자) 모두에게 ‘파국’을 초래할 수도 있는 것이다. 홉스봄은 사회 전체의 혁명적 재구성인가 공멸인가라는 두 전망 중 21세기에 어느 것이 더 우세할 것인가가 우리에게 남겨진 질문이라고 ‘우울하게’ 쓰고 있다.(130쪽) 그의 후기저작 『극단의 시대』, 『미완의 시대』를 함께 고려해 보았을 때, 그가 예상하는 역사의 방향은 두 계급의 공멸의 가능성에 더 큰 무게를 두고 있음이 명백하다. 이는 사회주의자들, 변혁적 입장에 선 자들로 하여금 더 뚜렷한 역사의식을 갖출 것을 강력히 요청하는 것이기도 하다.

마르크스의 마르크스주의 Ⅱ : 운동론, 조직론

앞 절에서 다소 학술적인 논쟁들로 비칠 수도 있는 내용을 소개한 것은 우리들의 통념을 정정하기 위한 것이다. 자본주의 경제가 붕괴할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인가도 쟁점이지만 붕괴한다고 해도 그것이 사회주의로 필연적으로 나아가야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현재의 위기가 파국으로 간다면 그것은 문명의 붕괴가 될 수도 있다고 홉스봄은 경고한다.
자본주의의 위기가 사회주의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윤소영 선생이 『일반화된 마르크스주의 개론』에서 쓰고 있듯이, 노동자운동과 급진적 이데올로기와의 만남이 있어야 한다. 여기서 꼭 노동자운동만이 문제인 것은 아니다. 사회운동 일반이 대안적인 이데올로기와 해후하고 이를 토대로 새로운 사회를 ‘구성’해 나갈 때에만 야만은 극복될 수 있는 것이다. 사회주의냐 야만이냐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시대에만 제기된 쟁점이 아니다.
홉스봄은 마르크스의 종별성을 경제와 정치를 따로 떼어서 설명하지 않는 데서 찾는다. 마르크스주의의 가장 위대한 점은 경제적 분석과 정치적 갈등, 사회 문화적 현상을 결합시켜 분석하는 것이다.(23쪽) 심지어 과학의 발전도 사회경제적 조건을 고려하여 분석한다. 이것이 과학사에 남긴 마르크스주의의 가장 중요한 업적이다.(305쪽) 분과학문을 초월하여 사회적 심급들의 상호작용을 분석하는 것이 마르크스주의의 가장 큰 매력이다. 마르크스는 정치적 현상을 경제적 갈등으로 환원시켜 분석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정치를 자율적 심급으로 다루지 않았다.
마르크스의 운동론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자본주의 체제가 어떤 상태에 도달하든 ‘상수’로 존재하는 것은 노동자운동이라는 것이다.(412쪽) 사회주의가 지리멸렬하고 마르크스주의가 부재해도 노동자운동은 존재한다. 마르크스의 『자본』은 자본에 대한 분석이 아니라 노동력이라는 특수한 상품에 대한 분석이다. 자본주의 체제는 노동력을 파는 집단을 구조적으로 만들어 내고 이들의 삶의 조건을 불안정하게 만든다. 노동의 불안정성과 불평등이 지속되는 한 노동자운동은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물론 자본주의 내에서 구조변동은 노동자들의 상태를 변화시킨다. 육체노동자가 다수이던 시대에서 서비스 노동자가 다수인 시대로 전환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상태의 변화가 노동자운동, 더 정확히 말해 노동조합운동을 소멸시키지는 않는다. 레닌주의의 영향으로 인해 자생적 노동자운동은 사회주의 운동이 아니라고 무시하는 경우가 있지만 노동자운동/노동조합운동이야말로 마르크스주의의 기본적 토대이다. 또한 신좌파 일부가 노동자운동을 체제와 타협했다고 비판하면서 이의 존재를 상대화시키려고 했던 것은 마르크스주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홉스봄은 여타 사회주의자들이나 생디칼리스트들, 아나키스트들과 마르크스를 구별하는 것은, 그가 노동자들의 독립된 정치조직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 점이라고 지적한다. 노동자운동은 경제적인 요구와 정치적인 요구를 결합시켜야 하며, 이를 위해 노동자운동의 독립된 정치조직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것이다.(70쪽) 마르크스는 노동자운동의 성장은 필연적으로 노동자들의 연대의식, 계급의식을 만들어내며, 이런 계급의식을 토대로 한 노동자들의 정치적 조직화가 노동자운동의 목적을 실현하는 데 효과적이라고 보았다.(410쪽) “거대한 다수의 거대한 이해를 대변하고, 정치권력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독립된 정치조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124쪽) 현대적으로 이해하자면 사회운동들은 자신들의 요구를 정치적으로 조직할 정치조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은, 마르크스가 주장하는 노동자계급의 독자적 정당은, “마르크스주의자들, 공산주의자들의 독자적 정당”이 아니라는 점이다. 마르크스는 노동자운동, 사회운동이 결합된 계급적 대중정당이라면 그것이 꼭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해야만 한다고 보지 않았다. 이것이 『공산당 선언』에서 공산주의자는 “노동자운동과 대립되는 독자적인 정당”을 구성하지 않는다고 한 이유이다.
더불어 마르크스가 대중정당의 필요성을 제기했지만 이것이 반드시 제2인터내셔널의 정당들과 유사한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단일한 강령과 사상 통일에 기초한 일괴암적 볼셰비키 정당도 아니었다. 그것은 다양한 운동들, 대중조직들, 이념들이 공존하는 노동자운동의 ‘정치조직’이었다. 그것은 일종의 전선과 같은 조직으로서 공산주의자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그 가운데 가장 단호한 분파로 활동하면 된다고 보았다.
마르크스가 의도했던 것은 운동의 독립성이 유지되는 것이라면 당의 성격에 구애받지 말라는 것이다. 혁명적인 정당만 마르크스주의적이기 때문에 승인하고 그렇지 않은 정당은 기회주의자들이라서 같이 못한다는 사고방식은 ‘적어도’ 마르크스의 생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72쪽) 마르크스주의적인가 그렇지 않은가가 문제가 아니라 운동의 독립성을 유지하는가 그렇지 않은가가 쟁점이라는 말이다. 소위 자신의 변혁적 순수성을 위해 기회주의자들과는 일체 타협하지 않으려는 집단들이 마르크스주의의 이름으로 그렇게 한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마르크스의 정치적 상속자들

『세상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의 2부는 마르크스의 후예들의 역사를 다룬다. 이 부분은 크게 세 시기로 구분된다. 1880~1914년, 1929~1945년간의 반파시즘 시대, 1945~2000년에 이르는 전후 마르크스주의 성장과 퇴조의 시기가 그것이다. 홉스봄은 이 책에서 역사유물론의 이론적 발전을 다루지 않는다. 이 책은 마르크스주의라는 이름으로 전개된 정치운동과 지식인 사회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이라는 측면에서만 논의를 전개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의 2부는 마르크스주의의 운동사이자 수용사라 하겠다.
3절에서 보았듯이, 마르크스는 노동자들의 독립된 정치조직이라면 그 성격을 문제 삼지 않았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나 공산주의자들로만 구성된 혁명정당의 건설이라는 쟁점은 레닌주의의 영향 속에서 형성된 것이다. 이 점에서 홉스봄은 마르크스 사후 만들어진 제2인터내셔널의 정당들과 전후 사민주의 정당들도 마르크스가 예상했던 형태의 조직은 아닐지라도 마르크스주의의 유산을 부분적으로라도 상속한 정당으로 보고 있다.(18쪽) 볼셰비즘에 토대를 둔 공산당만이 아니라 서구 사민주의도 마르크스의 동등한 계승자의 반열에 올려놓은 것이다. 물론 사민주의 정당은 1950년대에 이르러 마르크스주의를 공식적으로 폐기하지만 말이다. 볼셰비즘이든 서구 사민주의 정당이든 공유하는 정서가 있는데, 그것은 노동자들은 독립된 정당조직을 통해 사회변혁과 개혁을 추구해야 한다는 점이다. 볼셰비즘은 혁명정당으로서 체제 변혁을 추구했지만 사민주의는 자본주의 내에서 개혁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다를 뿐이다. 홉스봄이 비록 사민주의 정당에 대해 근본적으로 비판했을지라도 그가 이들을 노동자 운동 내에서 연대 세력으로 보아야 한다는 입장에 서 있던 것은 분명하다.
1890년대 수정주의가 대두되고, 제2인터내셔널의 정당들이 볼셰비키화를 거부하고 자본주의 체제에 안주하려 했을 때, 이를 지지한 것은 다수의 노동자들이었다. 홉스봄에 따르면 서구에서 사회적인 위기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조차 다수의 노동자들은 혁명적인 변화를 거부했다.(415쪽) 이는 1930년대에도 그랬고 1970년대에도 그랬다. 그들은 자본주의 내에서 개혁을 선택했다. 자본주의는 그들에게 참정권을 부여하고, 노동자들이 주도하는 정당이 집권할 기회를 부여함으로써 노동자계급을 체제내화 했다. 이는 물론 사민주의 정당들이 개혁세력으로서 자본주의의 방어에 능동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초래된 결과이기도 하다.(417쪽)
이것과 관련하여 1930년대 인민전선의 경험은 매우 시사적이다. 반파시즘 인민전선은 노동자계급의 지도하에서 다양한 계급들을 동맹시킴으로써 반파시즘, 반자본주의 전선을 확대하려 했으며 이 과정을 통해 체제 이행을 이끈다는 것이었다.(315쪽) 적어도 디미트로프 테제나 이를 수용한 톨리아티의 관점은 그런 것이었다.(316쪽) 그러나 실제 반파시즘전선은 그 자체로 이행을 목적으로 한 것이라기보다 파시즘의 패퇴를 우선적 과제로 삼고 있었다. 그 뒤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반파시즘 전선에 참여한 세력들은 의식적으로 사회주의적 이행을 추구했어야 하는가, 그렇지 않으면 파시즘으로부터 민주주의를 방어한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실천을 수행했던 것인가? 이에 대해 홉스봄은 민주주의를 방어한 것만으로도 반파시즘 인민전선은 굉장히 큰 의미가 있는 실천이었다고 평가하고 있다.(323쪽)
더불어 유추해 보면, 전후 서구 공산당이 유로코뮤니즘으로 이행한 것은 공산주의자들조차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급진적 개혁정당’으로 자리 매김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서구에서 사민주의와 볼셰비즘이 개혁주의로 수렴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수렴은 1980년대 이후 자본주의 세계에서의 좌파 정당이 신자유주의를 수용하는 것으로 참담하게 귀결된다. 서유럽 사민주의는 노골적인 신자유주의 옹호자가 되었고 유로코뮤니즘을 대표하던 이탈리아 공산당은 민주당으로 전환하였으며 프랑스 공산당은 영향력을 대거 상실했다. 결국 자본주의 체제하의 좌파정당들은 공산당이든 사회민주주의 정당이든 개혁정당으로 수렴되었고, 직접적인 혁명적 노선을 구체화시키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소련 해체 이후 우파로 전향하거나 해체의 상태로 나아가게 된 것이다.

마르크스의 지적 상속자들

비공산권 세계에서 마르크주의는 사회운동으로서 큰 족적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지적으로 주요한 이론으로 확립되었다. 마르크스주의는 그 이론이 최초로 탄생했을 때부터 수많은 논쟁의 대상이 됨으로써 스스로를 세련된 방향으로 정교화 해 왔다. 20세기 전 역사에 걸쳐 학문세계에서 마르크스주의는 분명 하나의 전통으로 자리 잡았다. 경제학에서는 언제나 마르크스주의가 찬밥 신세였지만 우리는 루비니와 같은 주류 경제학자들조차 ‘마르크스, 당신이 옳았소’라고 칼럼에 쓰는 시대에 살고 있다. 역사학에서 마르크스주의는 여전히 가장 중요한 흔적을 남겼다. 시대구분이나 역사 변동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제외하고는 아무런 논의도 할 수 없는 상태이다. 심지어 포스트모던 역사학을 주창했다고 여겨졌던 미시사가들조차 마르크스주의는 결코 거부할 수 없는 전제라고 주장한다. 사회학에서 마르크스는 그 학문을 창시한 고전 이론가들 가운데 한명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철학에서는 역사유물론이 사회철학으로서 강력한 토대를 갖추고 있다.
그러나 전전의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와 오늘날의 마르크스주의는 그 존재양태가 근본적으로 달라졌다. 전전 마르크스주의의 국제적인 버전은 소련에서 제시한 교조적 마르크스주의였다. 그것은 마르크스주의의 공식 판본이었다. 그러나 스탈린주의화 하지 않은 다수의 마르크스주의가 존재했다. 레닌, 트로츠키, 로자의 마르크스주의(고전적 마르크스주의)가 있었고, 그로스만, 판넨쿠크, 파울 마틱의 마르크스주의(이른바 평의회 마르크스주의), 오스트로 마르크스주의와 카우츠키의 마르크스주의(제2인터내셔널의 마르크스주의)가 있었다. 또한 그람시, 코르쉬, 루카치의 마르크스주의(헤겔주의적 마르크스주의)도 있었다. 그런데 이들은 대부분 학계에 남아 있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아니라 공산당 활동가였고 혁명적 실천에 참여하던 마르크스주의자였다. 당대의 마르크스주의는 사회변혁의 이론으로 활발하게 수용되었다. 이 시대의 마르크스주의는 혁명적 실천과 결합된 마르크스주의였던 것이다.
반면 전후 마르크스주의의 지적 발전은 주로 대학에 자리 잡은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이 시기 마르크스주의는 한편으로 주류 지식인 사회에 영향을 주고 다른 한편으로 다른 지적 원천들로부터 자양분을 얻는 방식으로 발전해 왔다. 마르크스주의는 이제 다양한 학문들과 교류하고, 상이한 지적 흐름을 결합시켜 발전했으며, 뚜렷이 ‘무엇이 마르크스주의다’라고 정의하기 힘든 상태로 변화되었다.(377쪽) 프랑크푸르트학파의 계승자들은 노동자계급 운동이 체제와 타협했다고 이들로부터 등을 돌리고 새로운 변혁주체를 탐색하려 나섰다. 루이 알튀세르는 스피노자, 정신분석학, 구조주의 등을 절묘하게 수용하여 마르크스주의를 혁신하려고 했다. 물론 이 혁신도 ‘마르크스주의의 위기’를 피해가지는 못했다.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혁신은 당대의 역사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그 나름의 해법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이뤄진 것이다. 홉스봄은 서구 마르크스주의가 지식인 세계에서 발전했다고 썼지만, 이 전통은 분명 1960년대 ‘거리의 사상’이었다. 미국에서든, 독일이나 프랑스에서든, 혹은 라틴아메리카에서든 서구 마르크스주의는 ‘전사’들의 이념이 되었고, 실천의 지침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저자가 보기에 서구 마르크스주의는 지적 발전에 조응하는 만큼 노동자 대중과의 결합력을 높이지는 못했다. 이 이론들은 1960년대 급진화 된 학생들에게는 매력적이었지만 노동자계급이 이를 수용하기에는 너무 어려웠다.(378쪽) 그것은 보다 대중적인 이데올로기로 번역되어야만 노동자계급의 이데올로기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에도 활동가 지식인들에게 요구되는 과제임은 분명하다.
마르크스주의의 역사를 논하는 과정에서 홉스봄이 지속적으로 다루는 문제가 있다. 그는 변혁운동의 영향력이 확대될 때는 언제나 지식인들을 대량으로 마르크스주의로 끌어들이거나 그 지지자로 만들어 내었다고 한다.(287쪽) 지식인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운동은 사회적 정당성을 획득하기가 훨씬 쉽다. 공산당들이 파시즘에 저항하며 보편적 대의를 위해 싸우고 있었을 때 지식인들은 공산주의를 강화시키는 자양분이 될 수 있었다.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자연과학에서조차 많은 학자들이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크게 호감을 가졌다는 점이다.(302쪽) 잘 알려졌듯이 아인슈타인도 그렇고 심지어 맨하탄 프로젝트를 이끌던 오펜하이머도 그렇다. 전후에도 마찬가지다. 노동자운동, 사회운동이 보편적 정의를 위해 싸우고 있을 때, 이 운동은 지식인들을 끌어들였으며, 지식인들을 끌어들이면 들일수록 사회운동은 더 크게 성장했다. 오늘날 지식인 세계에서 마르크스주의가 소멸된 것은 노동자운동이 보편적 정의를 실천할 수 있는 사회적 대의를 만들지 못하고 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지식인들의 배신’이 더 큰 문제인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1980년대에 이르면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은 심각하게 약화된다. 사회주의의 몰락과 신우익의 등장, 시장 근본주의의 확대는 급진주의를 논의할 수 있는 토대를 근본적으로 침식했다. 더불어 서구의 권위주의적 질서에 대항하며 자유를 외쳤던 신좌파들은 시장이 제공하는 자유에 물들어 버렸다. 그들이 원한 개인의 자율성은 시장체계 하에서 소비의 자율성으로 대체되었고, 지식 세계에서는 소위 포스트주의가 범람하게 된다. 모든 것이 상대화되고 이론들은 하나의 ‘이야기’로 전락해 버린다. 노동자운동이 소멸된 것은 아니지만 반체제적인 문제의식은 지식인 세계에서도 대중운동 속에서도 사라져 버린 것이다. 노동자운동의 토대였던 전통적인 육체노동자가 감소함으로써 노조의 영향력은 뚜렷하게 약화되었고, 그 약화된 틈을 매운 것은 종교 근본주의와 민족주의였다.(406쪽) 21세기 초반은 자본주의 경제만이 문제인 것이 아니라 급진적인 반체제 운동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산사태라고 홉스봄은 쓰고 있다.

홉스봄의 마르크스주의?

『세상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는 21세기에 접어든 시점에서 마르크스주의가 퇴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끝을 맺는다. 그는 마르크스의 정치론과 사회구성체론을 장황하게 설명하고 20세기 마르크스주의의 전개와 그와 연관된 노동자운동, 정당운동에 대해 설명했다. 그러나 정작 글의 끝맺음은 어떤 새로운 전망도 제시하지 않은 채 단기에 있어서 변혁적 전망은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으로 그치고 만다. 페리 앤더슨이 『미완의 시대』 서평에서 쓰고 있듯이, 홉스봄은 자신이 ‘패배한 좌파’라고 인정하는 것 말고 어떤 희망적인 전망도 제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표면적인 패배의 인정 속에서도 홉스봄은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미완의 시대』에서 그는 자기 스스로 영국 공산당을 탈당하지 않은 이유가 세계혁명에 대한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조직이 필요하다는 볼셰비키적 신념을 단 한순간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다가 정작 『세계를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를 쓰는 시점에 이르러서 그는 볼셰비키에 대한 논의는 거의 하지 않는다. 심지어 볼셰비키 혁명이 조건의 성숙 없이 일어남으로써 종국에는 실패로 돌아갔다고 쓴다. 이는 『극단의 시대』에서 미국보다 소련사에 대해 훨씬 많은 분량을 할당하는 것과 뚜렷이 대조된다. 더불어 그는 전후 마르크스주의 역사를 기술하면서 유로코뮤니즘의 역사를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이탈리아 공산당에 대해서도, 다소간 경멸했던 프랑스 공산당에 대해서도 단 한마디도 쓰지 않는다. 이들은 그저 스쳐지나가며 언급될 뿐이다. 반면에 그는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적 유산은 구체적인 이념과 상관없이 대중적 노동자 정당의 존재 그 자체라고 반복해서 강조할 뿐이다.
그가 『극단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세계를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에서도 심층적으로 분석하는 것은 반파시즘 인민전선이다. 반파시즘 인민전선에서 공산당들은 보편적 대의와 문명을 대변하는 세력이었다.(294쪽) 그는 공산당이 체제 변혁을 추구했기 때문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의 적에 맞서 사회적 정의를 수호했다는 점을 줄기차게 부각시킨다. 더불어 이 시기 러시아 혁명이 대중들의 지지를 받았던 것은 볼셰비키들이 진보와 이성, 과학을 대변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관점은 홉스봄이 마르크스주의를 계몽주의적 유산의 계승자로 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계몽주의는 이성, 진보, 인간해방을 추구한 사상이었고 자유주의가 몰락하던 시절에 마르크스주의는 계몽주의를 대변함으로써 지식인들을 공산주의의 대의 속으로 끌어들였고, 피억압대중들을 지도할 수 있는 윤리적 주체가 되었다는 것이다.(296쪽)
홉스봄의 이런 경향은 징후적이다. 반파시즘 인민전선을 부각시키고 노동자운동의 존재를 옹호하면서도 노동자 대중들이 혁명의 편에 단 한 번도 선적이 없다고 하는 것은, 그가 마르크스주의를 체제 변동의 이념이라기보다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인간적 가치와 노동의 존엄’을 보호하는 수단으로 보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가 보기에 현실은 『극단의 시대』에서 그리고 있듯이 산사태의 상태에 있다. 신자유주의 체제가 초래한 파국에서 힘을 얻는 것은 종교적 근본주의와 민족주의라는 반동적 이데올로기들이다. 이 상태에서 홉스봄은, 마르크스주의의 과제를 체제변동이 아니라 근대성이 이룩한 문명을 방어하고 사회체제가 해체되는 것을 막는 것에 두고 있다. 이는 국가에 대한 그의 언급에서도 뚜렷이 드러난다. 마르크스가 묘사적인 수준에서 부르주아 국가를 자본가계급의 집행위원회라고 했지만 21세기의 국면에서 그것은 공공성을 방어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424쪽) 국가는 시장이 만족시킬 수 없는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기관인 것이다. 홉스봄은 이행을 상대화시키면서, 그러니까 볼셰비키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모호하게 하며 부르주아체제가 달성한 개혁을 방어하고 있는 것이다.
홉스봄은, 앞에서도 보았듯이 사회주의가 없어도 노동자운동은 존재할 것이라고 단언한다.(423쪽) 그가 보기에 오늘날의 마르크스주의는 노동자들을 정치적으로 조직함으로써 자본주의가 더 큰 사회적 파국으로 치닫게 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그람시를 특권화 하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 이 책에서 그람시는 평의회 마르크스주의자 볼셰비키로서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을 정치적 주체로 구성하는 이론가로서 인용된다. 그는 그람시의 실천철학을 소개하며 노동자들이 정치에 능동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사회적 주체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332쪽) 노동자들이 혁명의 주체로 나서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정치적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듯하다. 홉스봄은 그만큼 미래의 역사에 대해 비관적 전망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나오며: 비판적 평주

홉스봄은 어떤 점에서 전형적인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자라 할 수 있다. 그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근본적인 위기에 처해 있다는 점을 숨기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것이 사회주의로의 변동을 정당화시키는 것도 아니다. 그가 보기에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당면과제는 서구 사회가 이룩한 자본주의적 진보를 방어하는 것이다. 내가 그를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자라고 한 것은 수백페이지에 달하는 이 글 어디에서도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이론적 혁신과 조직적 혁신을 제안하지 않는다는 점에서이다. 그는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전개를 논하면서 오늘날의 마르크스주의는 창시자들의 그것과 같을 수 없으며, 모든 마르크스주의는 그가 직면하고 있는 정세에 맞게 재창조되어야 함을 정당하게 주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오늘날 직면한 위기에 걸맞게 마르크스주의를 어떻게 혁신할 것인가에 대한 기초적인 전망조차 제시하지 못한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의 위기를 논하고 있지만 어떤 방향으로 이를 극복할 것인가에 대해 침묵한다.
그가 고전적 문제의식에만 사로잡혀 있다는 것은 다른 측면에서도 고찰할 수 있다. 그는 1970년대 신좌파를 논하면서 새롭게 성장하는 생태주의 운동 등에 대해 마르크스주의와 경쟁하는 새로운 운동이라고 하지만 이것을 어떻게 마르크스주의 내부로 수용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하지 않는다. 그가 유일하게 천착하는 것은 자본주의가 지속되는 한 노동자 운동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명백한 사실이다. 특히 그가 페미니즘 운동에 대해 일관된 침묵을 지키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는 『미완의 시대』에서 신좌파의 성과를 완전히 기각하는 것과 궤를 같이 한다. 말하자면 그는 새로운 사회운동의 성장이라는 국면 속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어떻게 전화시킬 것인가에 대한 아무런 문제의식이 없는 것이다. 그저 정세에 맞게 정세가 요구하는 과제를 실천하기 위해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창조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점만을 강변하다.
더 나아가 그가 일관되게 주장하는 것은 당형태의 운동이다. 당이라는 정치조직이 존재함으로써 변혁이든, 개혁이든 가능했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 역시 노동자계급을 정치적으로 조직화 하는 것을 과제로 갖는다. 노동자들이 정치적 실천의 주체가 됨으로써 사회의 헤게모니 세력으로 구성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꼭 당이라는 형태로 존재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재고할 필요가 있다. 정치의 전화를 위해서는 조직 형태의 전화가 필요하다는 것이고, 새로운 국면에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조직적인 관점에서도 실험적 실천을 해야 할 필요성도 있다. 그 단초는, 3절에서 보았듯이, 『공산당 선언』에 나타난 마르크스의 조직론일 것이다. 홉스봄이 이와 같은 마르크스의 문제의식이 21세기 어떻게 나타날 수 있는가에 대해 보다 심층적으로 논했다면 이 책은 더 큰 의미를 지녔을지도 모른다.
더불어 마르크스주의가 단지 계몽적 유산의 방어자로서만 의미 있는 존재는 아닐 것이다. 마르크스는 분명 계몽주의의 후예이고, 마르크스주의 프로젝트가 계몽을 급진화 시키는 수단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이성을 옹호하고, 과학의 진보를 믿으며, 대중이 정치적 주체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은 마르크스주의의 거역할 수 없는 구성 부분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는, 홉스봄이 그리고 있듯이, 자본주의적 관계 하에서의 ‘인간적 가치’만을 방어하는 수단으로 제한되지 않는다. 계몽의 급진화는 노동자계급과 인민의 자기해방의 실천이자 체제변동을 의미할 수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문명의 가치를 지키는 것만이 아니라 현재의 위기 국면을 돌파할 수 있는 창조적 상상력이다. 이행이 단지 특정 국가에서의 국가권력의 장악과 이를 방어하는 것만으로 제한되지 않고, 반체제적 운동들의 세계적 영향력의 확대라는 측면으로 사고한다면 계몽의 급진화는 여전히 부르주아적 상상력을 넘어선다. 물론 이런 급진적 프로젝트의 재생을 작고한 노역사가에게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세대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몫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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