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사일 지침 개정 규탄한다 한국 정부는 어제(10월 7일) 오후 새로운 ‘미사일 정책 선언’을 발표해 11년 만에 미사일 지침을 개정했다. 이번 지침의 개정으로 300킬로미터로 제한되었던 탄도미사일 사거리를 800킬로미터로 크게 늘였다. 탄도중량의 경우 기존의 500킬로그램을 유지하기로 했지만, 사거리를 줄일 경우 탄도중량을 늘리는 방식(트레이드 오프)을 채택해 사거리를 300킬로미터로 할 경우 최대 4배인 2톤까지 늘릴 수 있도록 했다. 중부권 기준으로 북한 전역이 미사일 사거리에 포함된 것이며, 트레이드 오프 방식을 통해 미사일의 파괴력을 훨씬 더 높일 수 있게 되었다. 정부는 이번 개정이 북한 핵과 미사일 위협을 효과적으로 억제하고 유사시 민첩하게 대응할 종합대책이라고 주장한다. 보수언론을 포함한 일부 호전세력들은 한술 더 떠 이번 지침 개정도 부족하다며, 이번 대선을 거치면서 아예 지침을 폐기해 미사일 주권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동안 한국 정부는 북한 위협을 빌미로 지속적으로 군사력을 증강해왔다. 특히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사태 이후에는 남북간 평화와 화해의 노력은 사라지고 남북 관계는 오로지 강경 대결로 치닫고 있다. 이러한 태도는 국민들의 생명과 안정을 보호하고 전쟁을 억지해야 하는 정부의 의무와는 한참 거리가 멀다. 한국 정부의 이러한 태도는 북한을 비롯한 주변국들을 자극해 한국의 안보를 강화하기보다는 동북아시아의 정세를 훨씬 더 위험하게 만든다. 언론을 포함한 호전 세력들은 이번 지침 개정이 북한의 도발을 억제하는 한편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것임을 숨기지 않았다. 한국의 미사일 지침 개정이 발표되자마자 중국은 관영 매체인 신화통신을 통해 우회적으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최근 도서 지역의 영토분쟁이 격화되는 등 복잡하게 얽힌 동북아 정세 속에서 한국의 군사력 증강이 다른 나라를 자극하고, 이것이 또 다른 군사력 경쟁의 도미노를 불러올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정부는 이번 미사일 지침 개정이 한국형 MD 구축 과정일 뿐 미국의 MD와는 무관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정부가 미국의 MD 참여를 협상카드로 미사일 사거리 연장을 요구해왔다는 점은 이미 잘 알려져 있으며, 탄도미사일 방어를 위해서는 미국의 MD 시스템의 지원이 필수적이라는 점에서 정부의 주장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격이다. 하루가 다르게 격화되고 있는 동북아시아의 긴장과 대결 구도 속에서 지금 당장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미사일 사거리 연장이 아니라 민중들의 평화적 생존을 위한 대화와 협력의 분위기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동북아시아 주변국들의 군사력 경쟁을 불러오고, 미국의 MD 체제에 깊숙이 참여하게 될 한국 정부의 시도는 즉각 중단되어야 한다. 2012년 10월 8일 사회진보연대
미사일 지침 개정 규탄한다
2012년 10월 8일 사회진보연대
반전평화연대에서 발간한 이슈페이퍼 '한국정부의 파병 상황과 문제점' 입니다. 레바논, 소말리아, UAE(아랍에미리트), 아이티, 아프가니스탄 파병의 현황과 문제점을 잘 정리하고 있습니다. <목차> 평화유지군 5년, 동명부대가 레바논에 평화를 가져다줄 수 있는가 | 김태경(2005파병철회단식동지회) 소말리아 파병의 현황과 문제점 | 수열(사회진보연대) UAE 원전수주 백지화하고, 위헌적 아크부대 철군하라! | 김환영(평화재향군인회) 국군 해외파병연장에 관한 이슈페이퍼 - 아이티 단비부대 | 최재훈(경계를넘어) 오쉬노부대, 아프가니스탄 파병의 진실 | 김어진(다함께)
침략과 점령을 끝내야한다 “이슬람에 대한 가장 악랄한 공격” 레바논의 헤즈볼라는 ‘무슬림의 무지’라는 동영상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반이슬람 동영상으로 촉발된 이슬람의 반미시위가 계속 확산되고 있다. 이집트와 리비아에서 시작된 이번 시위는 금새 예멘, 튀니지, 수단, 모로코, 팔레스타인, 이라크, 방글라데시, 파키스탄, 이란을 비롯한 다른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예멘의 수도 사나에서는 수백 명의 학생들이 미국 대사의 추방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고,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성난 시위대가 불을 지르고 캠프 피닉스 미군기지에 돌을 던지며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지난 9월 21일 파키스탄에서는 금요기도회를 마친 무슬림들이 파키스탄 전역에서 시위를 벌였다. 경찰은 실탄과 최루탄을 동원해 진압했고, 하루 동안 17명이 숨지고 200여 명이 다쳤다. 중동과 북아프리카 지역을 중심으로 진행되던 반미 시위는 아시아권 이슬람 국가로까지 확산되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수도 자카르타를 포함해 여러 도시에서 반미 시위가 벌어졌다. 또한 규탄 대상 역시 미국을 넘어 서방 세계 전체로 확산되는 조짐도 보인다. 반미에서 서방 세계 전체에 대한 분노로 한국의 한 언론은 반 이슬람 동영상으로 시작된 반미시위가 프랑스의 만평을 기화로 서방 세계 전체에 대한 규탄으로 비화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프랑스의 한 주간지에서 이슬람교의 선지자 무함마드를 풍자한 만평을 실었는데, 이 사건으로 미국만이 아니라 프랑스를 비롯한 서방 세계 전체가 무슬림들의 표적이 될 수 있다는 보도였다. 들끓는 무슬림 여론을 프랑스가 자극해 전체 서방 세계로 피해가 확산될 수 있다는 우려이기도 했다. 이러한 우려에는 프랑스 주간지의 만평 사건이 없었다면 무슬림의 시위가 ‘반미’에 국한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깔려있다. 이러한 인식은 이번 사태를 오로지 선지자 무함마드에 대한 모욕과 그에 대한 무슬림들의 분노라는 틀에 가두어버린다. 때문에 이번 사태 초기에 수단의 무슬림들이 영국과 독일 대사관을 습격한 일은 ‘격앙된 시위대의 우발적 폭력 사태’ 정도로 치부된다. 무슬림에 대한 혐오 이러한 보도는 뿌리 깊은 무슬림에 대한 혐오와 연결된다. ‘거룩한 예언자를 모욕한 이를 자신들이 직접 처벌할 것’이라며 주먹을 흔드는 시위대의 인터뷰 장면은 무슬림 혐오에 생생하게 색을 입힌다. 표현의 자유는 종교적 인물에도 예외가 아닌데,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폭력적인 시위를 벌이고 있는 무슬림들은 비이성적이고 폭력적인 사람들로 그려진다. 문제가 된 만평을 게재한 프랑스 주간지의 편집장이 ‘종교는 하나의 철학, 하나의 생각이기 때문에 무함마드도 칼 마르크스도 만화로 그릴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 대목에서 서방 세계가 이번 사태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엿볼 수 있다. 독재자를 몰아내고 민주화를 이루는 것을 도왔던 미국의 영사관을 습격해 대사를 살해한 리비아 무슬림들에게 ‘은혜를 모르는’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데에도 주저함이 없다. 침략과 점령에 대한 분노 그러나 이번 시위가 이렇게 단기간에 전체 이슬람 국가로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은 지난 10여 년간 지속된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 세계의 침략과 점령에 대한 분노 때문이다. 미국의 진보적 싱크탱크인 <포린 폴리시 인 포커스>는 공화당과 민주당 정부 모두 독재자들과 동맹을 맺고 이스라엘의 점령을 지원하면서 이라크 침략과 점령,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예멘에서 지속되는 군사 공격에 대해서는 침묵했던 지난 시간들이 없었다면 이러한 반미 시위들은 없었을 것이라 평가했다. 해외 언론이 예멘이나 다른 지역의 시위자들과 진행한 인터뷰를 보면 그들의 분노가 동영상 자체를 훌쩍 넘어 미국과 서방 세계로 향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테러리스트들의 배후 조종? 이러한 상황에서 리비아에서 발생한 미국 대사 살해 사건은 이번 시위의 의미를 폄하하고자 하는 세력들의 좋은 먹잇감이 되었다. 미국의 눈치를 보는 리비아 당국은 재빨리 이번 피습 사건은 성난 시위대에 의해 발생한 사건이 아니라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된 것이라고 발표했다. 미국 역시 현재 벌어지고 있는 반미 시위가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들, 테러리스트들의 개입으로 증폭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흘렸다. 실제 리비아의 미국 영사관 피습은 이슬람 무장단체에 의해 치밀하게 계획된 공격으로 보인다. 이슬람 그룹들이 여러 경로를 통해 반미 시위를 호소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들이 동영상이 헐리우드 메이저 영화사에서 제작되었다거나, 미국 정부의 사전 심의를 거쳐 승인받은 영화라는 식의 거짓 주장을 퍼뜨린 정황도 포착된다. 그러나 시위가 시작된 리비아와 이집트에서 가장 큰 규모를 갖고 있는 무슬림 형제단은 시위 초기에는 전혀 개입하지 않았다. 얼마 후 무슬림 형제단은 동영상에 대한 비난 성명을 발표했지만, 9월 14일에 평화로운 집회를 열겠다고 밝혔을 뿐이다. 다른 이슬람 종교 학자와 그룹들도 동영상을 비난했지만 평화로운 저항을 호소했다. 이번 사태에서 이슬람 극단주의를 부각시키는 것은 기나긴 침략과 점령의 세월에 대한 무슬림들의 분노를 가리려는 술책에 불과하다. 미완의 민주주의? 한편 일부 전문가들은 이번 사태의 초기 상황을 분석하면서, 반미시위가 벌어지고 있는 수많은 국가들 중 폭력 시위가 벌어지고 있는 몇 안 되는 나라들에 공통점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것은 작년 ‘아랍의 봄’을 타고 독재 정권을 무너뜨려 민주정부가 세워졌거나 그러한 과정에 있는 나라들이라는 것이다. 독재 정권 하에서 강력하게 유지되던 정부의 통제가 사라지고, 아직 그러한 통제력을 회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테러리스트들이나 극단주의 세력들의 폭력 행위를 막을 수 없다는 분석이다. 이와 같은 주장은 자칫 서방의 군사 개입을 부를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우려스럽다. 국제 사회는 그동안 한 국가가 국민의 생명과 인권을 보장할 수 없을 때 그들을 보호하기 위한 타국의 개입은 주권에 우선한다는 이른 바 ‘보호책임’ 개념을 계발해 왔다.(이에 대한 신념은 작년 리비아 사태에 대한 국제 사회의 ‘성공적인’ 개입을 계기로 한층 강화되었다.) 민주화 과정에 있는 나라들이 치안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하기 때문에 테러리스트들이나 극단주의 세력들이 폭력을 조장한다는 인식은 결국 평화를 위해서 외부의 개입이 필요하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논리가 그동안 유엔의 평화유지군이나 미국의 점령을 정당화하는 알리바이로 활용되어 왔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분석을 경계해야 한다. 침략과 점령을 중단하라 반미시위의 급속한 확산은 그동안 지속된 침략과 전쟁에 대한 무슬림의 뿌리 깊은 분노를 보여준다. 따라서 이번 사건이 미국이나 서방 세계의 또 다른 개입의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들의 개입이 세계를 얼마나 불안정하게 만들었는지를 분명하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세계화의 보호를 사활적인 이익으로 정의한 미국의 군사교리는, 세계화가 내세우는 담론과는 반대로 세계에 평화가 아닌 폭력과 파괴, 점령과 전쟁을 가져다주었을 뿐이다. 한국은 그동안 미국의 대테러 전쟁에 조응해 적극적으로 파병을 하면서 불안한 중동 정세에 깊숙이 발을 담그고 있다. 무슬림의 분노가 단지 동영상만을 향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이 언제든지 미국의 패권 정책을 충실히 수행해 온 한국으로 향할 수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한국에서 별다른 의문 없이 지속되고 있는 해외 파병을 중단하고, 중동에 대한 침략과 점령을 종식시키기 위한 반전평화운동의 또 다른 한걸음을 준비해야 할 때다. [%=박스1%]
[2012년 9월 18일 레디앙 칼럼] 기후변화와 시리아 봉기 임필수 | 사회진보연대 반전팀 필자의 지난 기사 <시리아 저항운동의 고민과 갈래들>(2012.8.29. http://www.redian.org/archive/32189)은 시리아 봉기를 이끈 다종다양한 세력들의 조직구성과 성격, 현재 저항운동이 봉착한 난관과 활로를 찾기 위한 모색이 어떠한지 살펴보았다. 필자는 시리아 정권이 여전히 상대적으로 강한 결속력을 지닌 지지집단과 우월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으나 민중봉기가 발생한 근본 원인이 지속되는 한 시리아 사회가 과거로 회귀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시리아에서 대중적 저항을 촉발시킨 결정적 매개는 최근 더욱 악화된 경제상황이다. 1990년대에 본격화된 경제 자유화 조치로 시리아 경제에서 사적 부문이 공공 부문을 능가하기 시작했지만 사적 부문의 가장 부유한 인사는 국가 관리, 정치가 또는 그들의 가족이었다. 1990년대 후반에 이르면 시리아는 과거 지향한 아랍사회주의(국가자본주의)에서 아주 탁월한 족벌 자본주의로 변모했다. 1990년대 경제성장은 소비 증가에 따른 단기 효과에 불과했고 2000년대 이후 슬럼프에 빠졌다. 5-7%의 성장률은 1997년 이후로 1-2%에 머물렀다. 그 결과, 시리아 봉기 전 빈곤선 이하 인구의 비중이 급상승했다. 그 비중은 2000년 11%에서 2010년 33%로 올라갔다. 이는 700만 명 이상이 빈곤선에서 생활하고 있다는 뜻이다. 실업률도 지속적으로 상승하여 20~25% 수준에 이른다. 특히 25세 이하의 실업률은 55%에 이른다. (30세 이하 인구 비중은 55%다.) 물가상승과 생계비 부족, 높은 실업률, 정부보조금 감소 등 시리아 민중이 경험한 경제현실은 아랍의 봉기가 발생한 다른 지역, 국가와 전혀 다르지 않았다. 시리아 경제를 더욱 악화시킨 또 하나의 결정적 요인은 2000년대 후반에 발생한 이례적 가뭄이다. 그 가뭄은 강도와 지속성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 결과, 2009년까지 약 백만 명 이상이 농촌에서 도시로 이주한 것으로 추산된다. 이는 시리아의 사회적, 지역적 격차를 더욱 심화시켰다. 다마스쿠스, 알레포와 같은 대도시가 이주민을 흡수했으나 인프라 투자는 매우 부족했다. 지방도시들, 예를 들어 다라아, 이들리브, 홈스, 하마와 같은 도시와 그 배후 지역은 이제 반란의 주요 전투지역이 되었다. 농촌 지역은 정부의 보조금 축소, 투자 부족, 도시화의 영향으로 인해 자신의 삶이 파괴되었고 수십 년에 걸친 권위주의와 부정부패로 인해 이러한 결과가 나타났다고 믿는다. 최근 <핵과학자회보>에는 기후변화라는 맥락에서 시리아 봉기를 검토하는 기사가 실렸다. (원문 참조: http://www.thebulletin.org/web-edition/features/climate-change-and-the-syrian-uprising) 기사에 따르면 시리아 정권이 식량자급과 농산물 수출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단기적 농업정책에 집중한 결과, 시리아 자연조건을 고려한 지속가능한 농업 시스템을 형성하는 데 실패했다. 이처럼 취약하고 불균형적인 농업 시스템은 2000년대 후반에 발생한 이례적 가뭄으로 완전히 무너졌고 농촌에서 쫓겨난 백만 명 이상의 이주민은 시리아 봉기의 도화선이 되었다. 기사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시리아에서 발생한 가뭄이 기후변화에 의해 야기된 측면이 크다면 그 사실이 함의하는 바는 매우 엄중하다. 자연적으로 정상 기후로 돌아오리라 기대할 수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시리아 농업을 재건하려면 장기적이고 심층적인 계획을 동반하는 사회경제 시스템의 전면 재편이 불가피할 것이다. 하지만 이는 시리아 사회의 민주화가 전제되지 않는다면 불가능할 듯하다. 아래에서는 앞서 언급한 기사를 간추려 소개한다. * * * 시리아 봉기에 기여했던 역사적, 정치적, 경제적 요인 중에서 시리아에 엄청난 충격을 준 하나의 요인이 종종 간과된다. 시리아의 기후변화는 국가의 안정성과 수명에 복잡, 미묘하지만 강력한 영향을 끼쳤다. [그림] 시리아의 가뭄은 200~300만 인구를 ‘극단적 빈곤’ 상태에 처하게 했다. 시리아 국토는 약 12,000년 전 인류가 최초로 농경과 목축을 실험한 곳으로 여겨진다. 현재 세계은행은 그 지역이 기후변화의 두려운 영향을 경험할 것이라고 예측한다. 연간 강수량이 감소하여 영구적으로 더 건조해지고 가뭄의 발생빈도와 심각성이 더 커지리라 예상한다. 1900년부터 2005년까지 시리아에서는 여섯 번의 심각한 가뭄이 발생했다. 이러한 건기 동안에 월간 평균 겨울 강수량은 정상시의 3분의 1이었다. 여섯 번 가뭄 중 한 번을 제외한 나머지는 단지 한 계절 동안만 지속되었다. 다른 한 번은 두 계절 지속되었다. 따라서 농촌은 정부 보조금과 2차 수자원에 의지하여 건기를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가장 최근에 발생한 일곱 번의 가뭄은 2006년부터 2010년까지, 믿기 어려울 정도로 사계절 동안 지속되었다. 이는 지난 세기에 비추어 진정으로 이례적 현상이었다. 나아가 사계절 동안의 평균 강수량은 지난 세기의 어떤 가뭄 기간에 비해도 훨씬 더 적었다. 가뭄의 한 사례를 인간이 초래한 기후변화의 직접적 결과로 간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미국 국립해양대기청의 2011년 보고서는 시리아 가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1902년부터 2010년 사이의 건조도 증가의 원인 중 온실가스로 인한 기후변화는 거의 절반 정도를 차지한다.” 핵심 연구자였던 마틴 호어링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발생했던 건조 상태의 규모와 빈번성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자연적 가변성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이는 이미 물 부족을 경험한 지역에는 희망의 소식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연적 가변성만으로 그 지역의 기후가 정상으로 돌아올 수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패널은 지구온난화가 다가올 수십 년 동안 이 지역의 가뭄을 더욱 심각하게 할 것이라고 예측한다. [그림] 미국 국립해양대기청의 2011년 보고서는 “인간이 초래한 기후변화는 지중해 지역에 빈번히 발생하는 가뭄의 주요 요인이 되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적색과 주황색은 1902년-2010년 기간과 비교하여 1971년-2010년의 겨울 가뭄이 심각했던 지중해 지역을 표시한다. 시리아는 가장 붉은 색으로 나타났다. 시리아의 가뭄은 150만 명을 넘는 주민의 이주를 야기한 것으로 추산된다. 농업 노동자와 소규모 농민의 모든 가족이 북동부의 곡창지대에서 남부의 도시 주변부로 이주했다. 가뭄은 불균형한 농업 시스템을 무너뜨렸다. 시리아의 농업 시스템은 이미 농업 정책의 오류와 환경적인 지속 불가능성을 경험하고 있었다. 나아가 긴급사태를 대비한 대책이 없었기 때문에 가뭄이 낳은 결과에 무능했다. 수십 년간 지속된 농업정책의 빈곤이 이제는 알아사드 정권을 집요하게 괴롭히고 있다. 지속 불가능한 역사 현 대통령 바샤르 알아사드의 아버지인 하피즈 알아사드 대통령은 수십 년간 시리아를 지배했다. 하피즈는 그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농촌 지역 대중의 지지에 의지했고,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농업 부문은 시리아 경제의 가장 중요한 중심축 중 하나였다. 하피즈는 시리아 국민에게 안정적인 식량공급을 보장했고 식량, 석유, 물의 가격을 내리기 위한 보조금을 지급했다. 정권은 식량자급을 강조했고, 1980년대에 밀 자급을 최초로 달성했다. 목화는 관개농업이 필요한 물 집약적 작물인데, 정권은 ‘전략 작물’로 선정하여 목화 재배를 강력히 장려했다. 그래서 한때는 목화가 석유 다음으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수출품이 되었다. 농업 생산은 팽창했지만 그것이 환경에 끼치는 영향은 거의 고려되지 않았다. 프란치스코 페미아와 케이틀린 웨렐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알아사드 정권은 정책의 오류를 저질렀고 시리아의 자연자원을 무시했다. 이는 물 부족과 토지 사막화를 야기했다.” 현재 발생한 가뭄 전 20년 동안 정권은 관개 시스템에 큰 액수를 투자했지만 여전히 충분히 발전되지 못했고 극단적으로 비효율적이었다. 관개 시스템의 다수는 지하수를 주요 원천으로 활용했는데 강물의 양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2005년부터 정부는 농업용 우물에 대해 허가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혹자는 시리아 정부가 쿠르드족이 다수를 차지하는 북동부 지역을 저개발 상태로 방치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일부 농민의 허가 요구를 거부했다고 주장했다. 어떤 이유든 간에, 일반적으로 우물 허가를 받기는 매우 어려웠다. 그 결과 시리아의 농업용 우물 중 절반 이상은 불법이었고 따라서 규제를 받지 않았다. 가뭄이 발생하기 직전 수년 동안 지하수는 급속히 고갈되었다. 경고에 대한 무시 2001년 세계은행은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단기적으로 밀과 다른 곡물의 안정적 공급을 성취하고 물 집약적 목화 재배를 장려하려는 시도는 활용가능한 지하수 자원의 고갈로 인해 장기적으로 시리아의 안전을 잠식할 것으로 보인다는 사실을 시리아 정부가 인식해야 한다.” 정부가 에너지와 물에 대해 상당액의 보조금을 제공함에 따라 농민은 지속가능한 목표를 설정하기보다는 생산량 증가에 더 큰 노력을 기울였다. 2005년 밀 가격이 급등하자 지나치게 자만했던 시리아 정부는 긴급사태에 대비한 밀 보유고의 상당량을 판매했다. 2008년 가뭄으로 인해 시리아 정부는 자급정책의 실패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20년 만에 처음으로 밀을 수입해야 했다. 또한 보리 수확이 90% 감소하자 가축 사료 가격이 가뭄 첫 해 동안에만 두 배로 올랐다. 북동부의 소규모 목축업자는 가축의 70% 이상을 잃었고, 다수는 그 지역을 떠나야만 했다. 유엔 식량농업기구에 따르면 가뭄으로 인해 시리아 가축의 4분이 1이 사라졌다. 식량의 안정적 공급이라는 아사드의 약속은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유엔 보고서에 따르면 가뭄의 심각한 영향을 입은 인구의 80%는 빵과 설탕을 넣은 차로만 연명하고 있다. 거의 사막화된 북동부 농촌 지역의 주민은 급등한 식품 가격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다. 가뭄이 강타한 지역의 주민 중 80%는 빈곤선 이하에서 살고 있다. 2003년 농업 부문은 시리아 국내총생산(GDP)의 4분의 1을 차지했으나 가뭄에 돌입한 2008년에는 17%로 감소했다. 유엔 재난위험경감 사무국에 따르면 시리아 정부의 가뭄 대책은 수동적이었고, 시의적절하지 못했으며, 목표 설정과 조정과정이 매우 부적절했다. 카오스 가뭄이 시작된 후 대부분 농촌 이주민으로 구성된 임시 거주지가 다마스쿠스, 하마, 홈스, 알레포, 다라아 주변에 형성되었다. 이중 다라아는 2011년 3월, 시리아 봉기에 결정적 계기가 된 첫 번째 대규모 시위가 발생한 지역이다. 이미 주변국 이라크와 팔레스타인에서 거의 200만 명이 난민이 시리아로 건너온 상황도 경제적으로 큰 부담을 주었는데, 시리아 내부에서 대규모 이주가 발생하자 그 부담은 더욱 커졌다. 아랍연구소가 발행하는 디지털 매거진 자달리야의 필자 수전 샐리비는 이렇게 말했다. “정권은 가뭄의 영향을 경감하기 위한 경제적 조치를 취하는 데 실패했다. 그것은 이렇게 거대한 대중시위를 야기한 결정적 추동력이 되었다. 최근 몇 달 동안 시리아 도시들은 쫓겨난 농촌 이주민들과 권리를 박탈당한 도시 주민들의 불만이 모이고 정치권력의 성격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공간이 되었다.” 시리아 정권의 경제자유화 정책은 소득 격차와 지리적 불균형을 확대했으며, 그것이 야기한 여러 요인들은 시리아 정권이 가정한 안정성을 산산이 깨뜨렸다. 가뭄과 대규모 이주는 시리아 반란을 추동한 가장 주요한 원인이 아닐지 모르지만, 대중의 불만을 촉발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시리아의 가뭄은 이례적인 기후변화가 대규모 이주를 낳고 그것이 국가의 불안정성을 야기한 최초의 현대적 사례일 것이다. 이는 이미 문화적 양극성, 정치적 억압, 경제적 불공평성이라는 긴장에 처해 있는 지역에서 기후변화가 매우 중대한 촉매제가 될 것이라는 교훈이자 경고다. <끝>
미국의 군사적 보복 움직임을 경계한다 이슬람을 모욕한 동영상이 미국 전역에 유포되자 이슬람권 전역으로 반미시위가 확산되고 있다. 지난 주 금요일 ‘분노의 금요일’에 절정에 이르며 중동 지역의 시위는 아프리카와 아시아 등으로 확산되고 있다. 분노한 리비아 시위대에 의한 미 대사의 죽음으로 미국은 해병대를 급파하고 순항 미사일을 탑재한 미 해군함을 리비아 인근 해상에 배치했다. 미국은 예멘에도 미 해병대를 급파했다. 며칠만에 20개국으로 확산된 무슬림의 시위는 너무도 당연한 결과다. 무슬림 모욕 동영상은 결코 우연적인 사건이 아니다. 그 동안 서방 강대국은 이슬람 혐오증은 여러 방식으로 부추겨 왔다. 중동 지역 지배를 위한 자신의 군사적·정치적 목적을 위해 이슬람이 호전적이고 테러 지향적이며 여성억압적인 경향이 있는 종교라는 편견을 조장해 왔다. 올해 초 미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코란을 소각한 사건은 그 결과의 일부일 뿐이다. 이슬람에서 무함마드 사진이나 영상은 종교적 금기다.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 모욕 동영상은 이슬람 선지자 무함마드에 무슬림이 가장 모욕적으로 여기는 모든 극단적 표현을 집중시켰다. 이슬람 예언자 무함마드를 비하하는 영상을 본 수많은 무슬림들이 격하게 분노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미 반미 시위는 이집트와 리비아에 이어 튀니지·모로코·수단·팔레스타인·예멘·이란 등 인근 중동 국가들뿐 아니라 무슬림 인구가 많은 나라들로까지 반미시위가 번지고 있다. 방글라데시에서도 13일 1000여 명 시위대가 시위를 벌였다. 서방의 이슬람 혐오증에 대한 격렬한 반감은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침공과 점령을 해 온 미국과 나토에 대한 깊은 적대감과도 관련있다. 그 동안 미국은 9ㆍ11에 대한 대응으로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공했고 전쟁과 점령 때문에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매일 4백 명이 난민이 되고 있고 이라크에서는 1백만 명 이상이 죽었다. 리비아로 치자면 미국과 나토의 전투기 폭격으로 수많은 리비아 국민들이 죽었다. 따라서 미국이 사과를 요구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석유과 패권을 위해 아랍 민중을 멸시해 온 자들이야말로 이번 사태를 일으킨 핵심 원인이다. 반전평화연대는 혹시라도 이번 사건을 계기로 미국을 비롯한 서방 열강이 중동에서 자신들의 힘을 다시 강화하려는 수단으로 활용한다면 전 세계의 반전운동 세력들과 함께 이에 대한 강력한 규탄 행동을 조직할 것이다. 2012년 9월 14일 반전평화연대
미국의 군사적 보복 움직임을 경계한다
2012년 9월 14일 반전평화연대
2박 3일간의 반핵대회 참가기 7월 16일, 도쿄 요요기공원에서 ‘안녕 핵발전소 10만 집회’ 가 열렸다. 2011년 3월 11일, 동일본대지진으로 인해 후쿠시마 핵발전소가 폭발 사고를 일으키고 이로 인해 핵의 위험성이 널리 알려지면서, 대중적인 반핵집회가 열리기 시작했다. 2011년 4월 도쿄에서 1만 5천 규모의 집회가 처음 열린 이후, 몇 만 단위의 집회가 2-3개월마다 한 번씩 열렸다. 이번 집회는 2011년 9월 도쿄에서 6만 명이 모인이래, 최대 규모가 될 것이라 예상되었다. 일본정부가 반대여론을 무릅쓰고 오이 핵발전소를 가동시킨 지 약 보름, 전력수급량이 급증하는 한여름을 목전에 둔 7월 14일, 이틀 뒤에 열릴 집회참가를 위해 일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탈핵텐트 도쿄는 이제 막 무더위가 시작되려고 하고 있었다. 가스미가세키 역에 내려 햇빛이 내리쬐는 빌딩 숲을 걸었다. 도쿄의 가스미가세키는 대부분의 일본 중앙행정기관과 대기업들의 본사가 모여 있는 곳으로, 일본 행정의 중심지이다. 일본인들이 관료들을 비꼴 때 ‘가스미가세키 문학’이라는 말을 쓰는데, 자기들끼리 일반인들이 못 알아들을 말을 하고 있다는 뜻이란다. 그 가스미가세키 한가운데, 일본의 에너지 정책을 결정하는 경제산업성 앞이자, 도쿄전력 본사와 총리관저를 도보로 이동할 수 있는 거리에 탈핵텐트가 있다. 지난해 9월 11일 경제산업성 인간띠잇기 집회 후 첫 번째 텐트가 세워지면서, 300일이 넘는 농성이 시작되었다. 작년 10월 25일과 28일에 텐트가 연이어 세워진 후 총 3개의 농성텐트가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두 번째 텐트가 세워질 때 ‘핵발전소 필요없다! 후쿠시마의 여성들’이 2박 3일간의 투쟁을 한 뒤 농성에 결합하기 시작했고, ‘핵발전소 필요없다! 전국의 여성들’이 그 뒤를 이었다. 세워진 순서대로 제1~제3텐트라고 불리는데, 제1텐트는 접수처 역할을 하는 메인텐트이고, 제2텐트는 여성들이 주로 지킨다고 한다. 접수처에 가서 방명록을 적고 나니, 후쿠시마 여성들이 와 있으니 제2텐트로 가보라고 한다. 4명의 여성들이 텐트를 지키고 있다. 평일에는 도쿄에 있는 여성들이 당번을 정해 지키고, 주말에는 후쿠시마에서 사람들이 와서 함께 지킨다고 한다. 텐트 안에는 지금까지 나온 유인물이 정리되어 있고, 세계 곳곳에서 전해온 메시지가 붙어있었다. 텐트는 경제산업성의 요청으로 철거위기에 내몰리기도 하고, 핵발전소를 찬성하는 우익들의 공격을 받기도 하였으나 반핵운동의 중요한 거점으로 계속 유지되고 있다. 일본의 레이버넷에는 거의 매일 텐트일지가 업데이트된다. 후쿠시마 여성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첫 번째 텐트 뒤쪽에 붙어 있는 ‘어머니와 아이들을 지켜주세요’라는 슬로건과 ‘미래를 잉태한 여성들의 열 달 열흘의 텐트’ 라는 이름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여성들은 농성투쟁의 상징이고, 실제로도 텐트를 유지하는데 큰 역할을 해왔다. 이러한 흐름을 이어서 지난해 12월 1일에 시작된 것이 ‘미래를 잉태한 여성들의 열 달 열흘의 텐트행동’ 이다. 텐트에 들어갈 때는 몰랐는데, 나오는 길에 보니 정말 이런 이름이 제2텐트에 붙어있었다. 이야기를 나누던 4명의 여성들은 나이도 사는 지역도 달랐는데, 이 주제로 이야기가 시작되니 금새 토론이 활발해졌다. 주로 이러한 구호들이 여성들을 보호받아야 할 대상으로 만드는 것 같고, 어머니 역할을 너무나 강조하여 불편하다는 이야기였다. 실제 방사성 물질의 위험성을 이야기할 때, 가임기 여성은 특히 조심해야 한다는 점이 강조된다. 또한 ‘기형아’에 대한 공포도 심어준다. 그러나 여성들은 ‘미래의 어머니’ 정체성만으로 투쟁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머니를 지켜주세요’ ‘미래를 잉태한 열 달 열흘’과 같은 구호는 그녀들의 투쟁을 축소하는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일본 여성 활동가들의 토론에 운 좋게 동석하게 된 내가 이런 이야기를 이전에도 했었냐고 묻자, 놀랍게도 오늘 처음 이야기를 시작했단다. 뭔가 불편하긴 한데, 과연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눈치 보며 쉽게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다가 우연히 토론이 시작된 것이었다. 토론은 서로의 의견이 대략 일치함을 확인하고, 반핵운동의 구호에서 ‘어머니로서의 여성’을 강조하는 것에 대해 다른 천막농성자들과 이야기해보자는 결론에 이르렀다. 누구는 30년 넘게 반핵운동을 하고, 누구는 이번 사고를 계기로 반핵운동에 나섰고, 누구는 후쿠시마에 살고, 또 누구는 도쿄에 사는데, 텐트농성을 진행하면서 이 자리가 이들의 토론의 장이 되고 서로를 교육하는 장이 된 것이다. 오랫동안 운동이 축소 재생산되었던 일본에서, 누군가와 다른 의견을 말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일본에서 이러한 경험은 더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일본 활동가들과의 교류회 14일과 15일 저녁에는 교류회에 참석하였다. 첫 번째 교류회는 일본 노동운동활동가평의회에 속한 활동가들과의 소규모 간담회였고, 둘째날은 ‘반핵발전신문’에서 주최하는 전국교류집회였다. 노동운동활동가평의회는 일본의 노동조합이 분열할 때, 중핵파와 혁마루파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길을 선택한 소수노조들의 연합 중 하나이다. 노동운동활동가평의회는 ‘피폭노동을 생각하는 네트워크’ 준비회에 함께하고 있는데, 교류회를 통해 핵발전소 하청노동자들의 이야기를 간접적으로나마 들을 수 있었다. 최근 방사선량이 약간 낮아지면서 노동자들의 임금이 크게 낮아졌다는 사실, 핵발전소 노동자로 취직하여 조직화에 나선 활동가가 있다는 사실을 들었고, ‘피폭노동을 생각하는 네트워크’가 핵발전소 노동자들에게 배포하고 있는 피폭노동을 방지하기 위한 매뉴얼도 받을 수 있었다. 이외에 소위 인터넷을 통해 자발적으로 모이기 시작했다는 총리관저 앞 금요집회에 대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오이 핵발전소의 재가동이 목전에 다가온 6월부터 집회 참가자가 몇 만 단위로 급증하자 활동가들도 크게 놀랐는데, 들어보면 집회 분위기가 마치 2008년 한국의 촛불집회를 떠올리게 했다. 활동가들의 예상을 뛰어넘은 자발적 참가자들의 역동성도 그렇지만, 예를 들어 조직의 깃발을 내리라는 요구가 튀어나오고, 핵발전소 재가동 저지 외의 주제로는 발언을 금지하는 등의 분위기도 비슷하다. 무정형의 집회가 대중의 창발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방식이자, 또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방식이라는 주장과 이를 둘러싼 쟁점은 2008년 한국의 촛불집회나 2011년 미국의 오큐파이 운동, 스페인의 분노한 사람들 운동에서도 제기되었는데, 아무래도 21세기의 운동은 이 쟁점을 결코 우회할 수 없을 듯하다. 15일의 전국교류집회는 150여 명의 전국의 반핵활동가들이 참가한 자리였다. 케이오 대학의 카네코 마사루 교수의 짧은 강연 후, 전국의 반핵활동가들이 각 지역의 활동내용을 보고했다. 후쿠시마에서는 인구가 계속 줄어들고, 피난생활과 스트레스로 인해 건강이 악화된 노인들이 속출하고 있으며, 고농도 오염 지역이 늘어나고 있는 등의 피해를 보고했다. 그리고 사고 직후 방사성 물질의 누출이 가장 심각했던 날의 행동기록을 남겨 피해를 확실히 기록하자는 운동을 진행하고 있으며, 핵발전소 노동자들이 큰 위험에 노출됨에도 임금이 낮아 분노하고 있다는 사실과 함께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핵발전소에서 일할 노동자들을 구하기가 점점 어려워질 것이라 전망했다. 후쿠시마 외의 각 지역에서도 자기 지역의 핵발전소 가동을 멈추기 위해 진행하고 있는 활동을 보고했다. 주로 서명운동, 현지사 선거 대응, 핵발전소 피해에 대한 재판 등의 활동을 진행하고 있었다. 앞으로의 운동에 대해서는 총리관저 앞에서 열리는 집회와 같은 직접행동을 강화해야 하며, 전국적인 운동과 지역적인 운동이 연결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의견이 각 지역에서 공통적으로 나왔다. 안녕 핵발전소 10만 집회 7월 16일, ‘안녕 핵발전소 10만 집회’의 날이 밝았다. 집회 장소까지 인솔해주신 분이 집회 실무도 담당하고 있다보니 집회시작 시간보다 2시간이나 일찍 도착했다. 대규모 집회인 만큼, 미리 모여서 할 일을 나누는 스텝들 만해도 200여 명은 되어 보인다. 스텝들 중 젊은 사람은 거의 없고, 더운 여름날 체력이 될까 싶을 정도로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이 대부분이다. 한국의 젊은 활동가로서 익숙하지 않은 광경이었다. 무대는 총 4개로, 각각 시작시간과 끝나는 시간, 프로그램의 성격이 다르다. 내가 발언한 곳은 제4스테이지, 가장 작은 방송차이다. 집회 장소로 향하는 사람들을 안내하며, 프로그램도 진행하는 곳이다. 오랫동안 핵발전소와 핵무기 반대 활동을 해왔던 단체와 핵발전소가 있는 지역의 활동가 발언이 이어졌다. 제1스테이지는 메인무대로, 조직적으로 참가하지 않은 일반시민들을 비롯하여 시민단체, NGO들이 자리잡았다. 사카모토 류이치나 오에 겐자부로와 같은 유명한 문화예술계 인사들의 발언은 모두 이곳에 배치되었다. 제2스테이지는 렌고가 속한 평화포럼과 전노협 등 조직 노동자들, 제3스테이지는 여타 단체와 시민들의 무대로 라이브공연과 발언이 번갈아 진행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인상에 남았던 장면 중 하나는 집회장에 흩날리는 일장기였다. 대중운동에 민족주의적인 감정이 빠지기 어렵다. 하지만 제국주의의 상징인 일장기가 오랫동안 천황제에 맞서고, 일본의 역사를 반성하는 활동가들이 쏟아져 나온 집회에서 자랑스럽게 흩날리는 것은 참으로 불편하다. 넘어야 할 과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또 하나는, 활동가들의 발언이 주로 작은 무대에 배치되어, 큰 무대에서는 오히려 오랫동안 반핵운동을 해왔던 여러 활동가들의 의견을 듣기 어렵게 프로그램이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현재 일본의 반핵운동에 참가하는 대중들이 핵발전소 문제와 핵무장 문제를 연관 짓지 못하는 것은 일본 활동가들 사이에서도 문제로 지적되기도 하는데, 집회를 주최하는 측이 이런 부분을 돌파하는데 있어 매우 소극적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7만 명이 참가한 집회는,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열기를 느끼게 했다. 발언은 힘이 넘치고 절절하고, 공연은 능숙하든 서툴든 진심이 담겨있다. 젊은 사람들도 많고 나이든 사람들도 많다. 각 조직들은 곳곳에서 유인물을 배포하고, 일본 경찰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도로점거를 막기 위해 집회를 방해한다. 메인 무대의 프로그램이 한창 진행되고 있는데, 이쪽에서는 이미 행진을 시작하기 위한 대열이 만들어졌다. 도저히 혼자서는 집회 전체 모습을 다 파악할 수 없다. 하지만 그만큼 역동성이 느껴진다. 경찰의 지시에 따라 질서정연하게 인도로 가는 착한 시민들, 그 와중에 경찰과 싸워 1차선을 확보하는 어떤 활동가를 지켜보다 비행기 시간에 맞춰 공항으로 향했다. 무수한 갈림길에서 오랜 기간 반핵운동을 해왔던 일본의 활동가들은 폭발적인 대중운동을 경험하며 흥분과 걱정을 동시에 하고 있다. 새로운 세대가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이들이 반핵운동의 과제 전반을 충분히 흡수하지 못할 수 있다는 불안, 세대 간의 문화적 차이로 인한 당혹스러움 등 여러 감정이 섞여 있다. 물론 가장 큰 감정은 기쁨과 희망이긴 하지만 말이다. 짧은 일정이었지만, 이미 제기되고 있는 몇 가지 쟁점이 보인다. 집회에서 본 일장기는 많은 것을 상징할 것이다. 이미 3월에 있었던 1주기 집회 때도 논쟁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집회주관자들은 추모와 부흥, 반핵운동이 함께 가야 한다며, 집회기조를 설정했다. 하지만 동일본대지진과 핵발전소 사고로 인한 피해자에 대한 추모는, 천황과 정부도 다 하고 있는 일이다. 집회기조가 추모와 부흥을 외치는 천황에 대한 비판 없이 세워졌다는 비판이 오랫동안 활동해 온 후쿠시마 현지의 반핵활동가들을 통해 제기되면서 집회 기조는 수정될 수 있었다고 한다. 소위 조직된 집회와 인터넷을 통해 모인 대중 집회에 대한 태도도 쟁점 중 하나이다. 실은 각각의 집회에 참가하는 대중들이 완전히 이분화된 것은 아님에도, 두 집회를 대립적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어떤 이들은 대중 집회에서 조직의 깃발을 들지 않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반면 10만 집회를 조직한 주최 측은 총리관저 앞의 집회에 대해 과소평가하는 분위기가 있다. 그러나 두 집회 모두 참여하고 있는 여러 활동가들은 어느 한 쪽이 좋고 나쁘다고 평가하지 않았고, 오히려 이 두 집회가 시너지를 발휘하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핵발전소에서 피폭당하며 일하는 노동자들의 권리를 반핵운동이 어떻게 함께 쟁취해 나갈 것인가도 중요한 문제이다. 지금 집회에 나오는 사람들 대부분은 핵발전소 사고에 의한 피폭을 두려워하고 있다. 하지만 집회에선 지금 이 순간에도 피폭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핵발전소 하청노동자에 대한 이야기는 잘 보이지 않았다. 핵발전소가 가동중지 상태가 되더라도, 방사성 물질이 누출되지 않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누군가는 핵발전소에서 피폭을 무릅쓰고 일해야 한다. 이런 문제에 대해 현재 집회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을까? 섣불리 단정 지을 순 없지만, 일본의 한 활동가가 제기한 ‘후쿠시마 핵발전소에서 수습작업을 하는 노동자들의 파업이 가능하다고 보는가?’라는 질문에 ‘물론 당신들은 파업할 권리가 있다’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들은 얼마 없을 것이다. 수습작업을 멈추면 당장 방사성 물질이 일본 전역으로 퍼질 것이라는 공포는 반핵운동의 커다란 동력이지만, 핵발전소 노동자들의 단체행동을 가로막는 주요 논리가 될 수 있다. 물론 핵발전소 하청노동자들의 조직화가 어려워, 이런 쟁점이 당장 불거지지는 않을 수 있다. 폭발적인 대중운동은 수많은 쟁점을 제기하고, 이를 어떻게 해결하고 돌파하느냐에 따라 운동의 방향이 갈린다. 30년이 넘게 끈질기게 운동을 지속해 온 60-70년대 학생운동 세대 활동가들에게 이는 희망이자 또한 두려움이기도 할 것이다. 무수한 갈림길에서, 일본의 반핵운동은 앞으로 어디로 나아갈 것인가? 이 질문을 던질 때 나에게 지금도 떠오르는 장면은, 무더운 여름날 집회 곳곳을 돌아다니며 온갖 유인물을 차곡차곡 모으던 허리 굽은 한 할아버지 활동가와, 바깥보다 훨씬 더워 땀을 뻘뻘 흘려야 했던 텐트 안에서 60대와 30대 여성이 세대를 넘어 토론하는 모습이다. 일본 본토가 방사성 물질로 오염된 초유의 재앙을 맞닥뜨린 후 사람들은 겨우 만나기 시작했고, 토론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 이전세대의 신심과 현재의 창발성 모두를 힘으로 갖는, 새로운 세대의 등장을 바란다. 이들과 토론하며 동아시아의 반핵평화 운동을 건설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도 큰 힘이 될 것이다.
동아시아와 한반도를 읽는 키워드: 미국의 아시아 전략과 중국 중국의 부상과 변화된 미국의 아시아 전략 아시아에 대한 적극적 개입 최근 미국은 ‘아시아 회귀’라고 칭할 만큼 아시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단순히 인식의 변화나 수사의 측면에 국한되지 않는다. 아시아에 대한 적극적인 개입은 오바마 행정부를 관통하는 아시아 전략의 특징이다. 2009년 임기를 시작한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그해 11월 아시아 순방에 나섰다. 첫 방문지인 일본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신아시아 정책구상’을 발표했다. 여기서 오바마 대통령은 미국이 아시아 지역과 태평양을 통해 하나로 묶여 있다며, 글로벌 이슈를 다루는 데 아시아 지역과의 협력을 극대화할 것이라 밝혔다. 특히 그는 이러한 협력 극대화에서 중국과의 갈등과 경쟁을 지양하며 실용적 협력을 추구할 것을 강조했다. 아시아, 글로벌 이슈의 협력자 이렇게 미국이 아시아 지역을 중요하게 바라보는 것은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하나는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방안 마련이다. 경제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미국은 구제금융 투입, 수량완화 정책 등을 동원했는데, 이러한 방식은 막대한 재정 소요를 낳았다. 미국은 부족한 재원을 국채를 통해 조달했는데, 미국으로 상품과 자본을 수출해 온 동아시아 국가들이 그 국채의 상당 부분을 부담했다. 현재 중국, 일본, 한국 등 동아시아 6개국이 미국 국채의 절반 이상을 보유하고 있다. 때문에 미국과 동아시아 경제의 상호연관성은 훨씬 깊어졌고, 미국으로서는 동아시아 지역의 협조와 안정적인 관리가 매우 중요해진 것이다. 다른 하나는 ‘테러와의 전쟁’의 출구전략 마련이다. 10여 년 간 지속된 대테러 전쟁에서 미국은 1조 3천억 달러가 넘는 전쟁 비용과 2천 명이 넘는 미군 병사의 목숨을 대가로 치렀다. 그럼에도 이라크 지역과 아프가니스탄 지역의 안정과 평화는 요원해 보이며, 사실상 발을 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는 지난 5월 시카고에서 열린 정상회의에서 2014년까지 아프가니스탄에서 완전 철수하기로 한 기존의 계획을 확인했고, 대테러 전쟁에 대한 비판 여론이 높은 유럽 국가들의 조기 철군은 언제나 논란거리다. 따라서 미국은 대테러 전쟁의 출구전략을 마련하기 위해 동아시아 지역 국가들의 손을 빌리고 있다. 미국의 새로운 방위 전략 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변화된 인식은 방위전략에도 반영되고 있다. 2011년 4월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향후 12년간 4조 달러 상당의 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국방예산 4,870억 달러를 감축할 방안을 마련하도록 지시했다. 국방부는 이에 따라 변화된 조건(예산 제약, 재정 위기)에서 향후 10년간 미국이 추구할 새로운 방위전략을 정리했다. 이것이 2012년 1월에 발표된 “지속되는 미국의 글로벌 리더십: 21세기 방위를 위한 우선 사항들”이라는 제목의 새 전략 지침이다. 아시아 집중 새 지침은 ‘미국의 경제와 안보는 서태평양과 동아시아에서 인도양 지역과 남아시아에 이르는 지역의 발전과 불가분의 연결 관계를 지닌다’고 밝히고 있어, 미국의 지역적 집중점이 아시아로 이동했음을 보여준다. 미국 의회조사국은 ‘중동에 대한 초점을 유지하면서도 아시아 태평양 지역으로 지리적 우선권이 이동’한 것이라 평가했다. 지리적 우선권의 이동은 방위전략의 강조점도 변화시킨다. 지침이 밝히는 미국의 방위전략은 ‘오늘날의 전쟁’에 대한 대비에서 ‘미래의 도전’에 대한 대비로 이동한다. 테러 집단 등 비정규군과의 전투를 주로 상정하는 전략에서 잠재적 적대국의 공격을 억지하고 격퇴하기 위한 군사적 준비, 사이버 능력 등 미래전력 개발이 중심적 과제로 부상한다. 중동 지역에서의 활동은 ‘안정화’에 초점을 맞추고,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는 부상하고 있는 잠재적 경쟁국, 즉 중국을 억제하기 위한 군사적 대비를 강조하는 것이다. 작전개념의 변화 새 지침은 전진기지 확보, 지역접근저지 능력 타격, 우주와 사이버 공간 방어 등을 포함하는 ‘합동작전 접근 개념’을 제시한다. 지역접근저지 능력이란 중국의 방위전략으로, 외부의 개입을 차단해 주변 지역에 자국의 군사력을 투입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즉 새로운 작전개념은 중국의 군사력 투사를 견제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를 위해 미사일방어망(MD) 구축, 미래전력 프로그램과 장거리 타격 능력 강화, 직접 침투와 병행한 원거리 공격 등이 강조된다. 중국의 지역접근저지를 극복하기 위한 장거리 타격 능력은 미사일방어망 추진으로, 전지기지 확보 전략은 동아시아 주변 국가들과의 긴밀한 군사 협력 강화로 드러나고 있다. 지역 패권의 격전지가 되고 있는 동아시아와 한반도 동아시아 파트너십의 강화 2010년 10월 미국은 ‘동아시아 정상회의’(EAS)에 가입했는데, 이를 통해 동아시아에 대한 공식적인 개입 채널을 확보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는 미국의 기존 외교정책 노선과 큰 차이점을 보이는 이례적 행보다. 지금까지 미국은 자국이 직접 만들지 않은 다자주의 틀에 참여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동아시아 지역을 안정적으로 관리하고 경제, 군사적 협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다각도로 노력하고 있는 미국의 고심이 엿보이는 순간이다. 동아시아 정상회의 이외에도 미국은 중국과의 전략경제대화, G20 정상회의,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등을 통해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지역과의 파트너십을 강화해가고 있다. 파트너십을 뒷받침하는 군사력 강화 동아시아 지역과의 파트너십 강화는 국제협력체에 국한되지 않는다. 미국은 동아시아 여러 나라들과 직접적인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2010년 4월 워싱턴 핵안보정상회의 때 오바마 대통령은 말레이시아와 별도 회담을 개최했다. 7월 로버트 게이츠 당시 미 국방장관은 인도네시아를 방문해 인도네시아의 특수부대와의 안보협력활동을 발표했다. 게이츠 장관의 인도네시아 방문 직후에는 사회주의 국가인 라오스와 베트남 전쟁 이후 처음으로 외교장관 회담을 진행했다. 북한과 핵 협력을 했다고 의심되는 미얀마와 대화를 재개했고, 인도 특수부대와도 안보협력을 강화하기로 했다. 동아시아 지역과의 협력을 뒷받침하는 군사력 강화도 진행된다. 미국은 하와이-괌-일본-한국을 연결하는 군사허브를 구축하고 있다. 일본 요코스카 미 해군기지에는 핵잠수함이 상시 배치되어 있고, 전략폭격기와 핵잠수함의 근거지로서 괌 기지가 강화되고 있다. 주한미군과 주일미군의 재편이 이루어지고, 일본은 미국과의 군사동맹을 강화해 ‘군사일체화’로 나아가고 있다. 평택 미군기지는 7만 명 수준의 미군 장병과 가족이 상주하는 거대 군사기지로 조성되고 있다. 미중 갈등의 고조 미국은 중국과의 협력을 강조하지만, 그만큼 중국의 성장을 견제하기 때문에 다양한 갈등 요소들이 상존한다. 2009년 3월 남중국해 하이난섬 부근 공해상에서 중국 해군과 미군 함정이 대치하는 사건이 벌어질 정도로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은 심화되고 있다.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센카쿠 열도 분쟁, 서사군도 분쟁, 남사군도 분쟁, 쿠릴 열도 분쟁, 그리고 독도 문제 등 영유권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는데, 지역 패권을 놓고 다투는 미국과 중국의 충돌이 이러한 영유권 다툼과 얽히고 있다. 경제 부문에서도 아시아 태평양 자유무역지대(FTAAP) 창설에 주목하면서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을 추진하고 있는 미국의 구상이 중국과 충돌하고 있다. 중국은 중화 경제권과 아세안에 중점을 두고 동아시아 자유무역지대(EAFTA)를 추진하고 있는데, 미국의 TPP 구상을 자국을 견제 또는 배제하려는 흐름으로 이해하고 있다. 미국의 대외전략에 종속된 한국의 평화정책 미국 대북전략의 변화 냉전 이후 미국의 대북전략 냉전 종식 후 미국은 ‘지역강국’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북한과 이라크 같은 이른바 ‘불량국가’들이 포함되는데, 미국은 이들의 대량살상무기 능력을 제거하는 것이 미국의 안보를 위해 중요하다고 인식했다. 1990년대 초부터 핵 프로그램이 의심된 북한이 가장 유력한 대상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북한을 정치, 경제적으로 완전히 봉쇄하거나 붕괴를 유도할 경우, 북한 사회의 불안정성이 증대해 결국에는 대량살상무기 위협이 더욱 증폭될 것이라 판단했다. 따라서 대량살상무기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군사적 봉쇄를 강화하는 것과 함께 대화와 협상을 병행하게 된다. 클린턴 정부의 페리프로세스 이러한 미국의 대북전략은 ‘페리프로세스’를 통해 정리되었다. 클린턴 행정부에서 국방장관과 대북정책조정관을 지낸 윌리엄 페리가 작성한 보고서에서 이름을 딴 페리프로세스는 북한의 대량살상무기 보유를 저지하는 것을 목표로 대화와 압박을 병행하는 ‘이중경로 전략’을 제시했다. 북한이 핵과 미사일 활동을 종료시킨다면, 미국은 북한에 대한 적대적 조치를 철회하고 북미관계 정상화를 추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페리프로세스가 북한에 대한 압박에 의존하던 아버지 부시 정부 시절보다 상대적 안정성을 제공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페리프로세스가 협상을 첫 번째 경로로 상정한다고 해서 군사력 증강을 협상의 후순위에 배치하는 것은 아니다. 이중경로 전략에서 군사력 증강은 언제나 협상과 병행된다. 이 때 협상의 결과나 북한의 의도에 대한 예측은 철저히 배제되며, 북한과의 협상이 잘 풀리지 않을 경우, 즉 북한의 대량살상무기 프로그램을 사전에 차단하지 못할 경우 이러한 군사적 압박이 단계적으로 가시화된다. 이러한 전략을 수용했던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절 한미동맹의 강화와 현대화가 함께 추진되었다는 점을 떠올리면 쉽게 알 수 있다. 햇볕정책의 의미와 한계 김대중 정부의 통일방안과 615 선언 615 공동선언은 ‘남측의 연합제 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기에,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한다’고 밝히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남측의 ‘연합제 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김대중 대통령이 밝힌 통일방안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95년 대선후보 당시에 김대중 대통령은 남북연합 단계-연방제통일 단계-완전통일 단계의 3단계로 구성된 통일방안을 발표했다. 남북연합 단계는 향후 통일을 위한 제반업무를 처리하는 권한이 매우 작은 연합기구가 존재하는 단계다. 연방제통일 단계는 하나의 연방과 두 지역의 자치정부가 존재하는 단계로, 연방은 외교와 군사의 전면적 권한과 주요 내정에 대한 주요 권한을 갖는다. 완전통일 이전에 제시된 두 단계는 남과 북의 경제적 통합이 이루어지는 시기로, 이러한 경제적 통합을 정치적 통합으로 확대한다는 구상이다. 남북 통합의 질적 전환이 이루어지는 이 시기는 사실상 북한의 개혁개방을 유도하는 단계로 설정되는데, 여기에는 시장경제의 도입과 다당제, 자유선거의 허용 등이 포함된다. 즉, 남측의 연합제 안이란 북한의 경제개방과 정치개혁을 유도하는 기간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세부 방안이 남북 간의 무역자유화 시나리오다. 이는 북한 지역을 노동집약적 저부가가치 제조업 생산기지(가공무역형 수출기지)로 전환해 북한을 남한경제의 하위파트너로 통합한다는 것이다. 정경분리 원칙과 햇볕정책 정경분리 원칙은 대외정책에 있어 정치와 경제 문제를 분리해서 추진한다는 것으로, 한국에서는 소련과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추진한 노태우 정부에서부터 부각되기 시작했다.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은 이러한 정경분리 원칙에 따라 정치 문제는 미국이, 경제문제는 한국이 담당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즉 미국의 대북전략 구도 아래에서 한반도의 정치문제와 군사문제에 관한 주도권을 미국이 행사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햇볕정책은 클린턴 정부의 페리프로세스에 철저하게 종속된다. 북한의 핵과 미사일의 개발이나 확산을 봉쇄하는 것이 햇볕정책의 전제였다는 점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페리프로세스에 따라 미국은 남북의 경제 교류나 이산가족 상봉 등을 적극 지원하지만, 남북한의 관계 개선은 북미협상의 의제에서 배제된다. 때문에 1980년대 후반 이래 북한이 한반도 문제의 진전을 위해 지속적으로 강조해온 핵심적 주장들, 예컨대 미군무력(특히 핵무기)의 철수나 남북한 무력 감축, 한반도 평화보장체제의 구축(남북 불가침선언, 북미평화협정) 등은 철저하게 미국의 영역이며, 남과 북의 관계 개선에서는 다루어지지 않는다. 이는 남북관계 개선과 북미협상이 별개의 것으로 상정된다는 것으로, 북한이 남한과의 관계 개선을 상대화하도록 만든다. 햇볕정책의 한계 615 선언으로 표상되는 햇볕정책이 최소한 남북 대화와 교류를 확대한다는 점에서 봉쇄와 대결 정책에 비해 상대적 안정감을 제공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한 축으로는 남한 자본이 주도하는 북한 사회의 경제적 재편을 추구하고, 다른 축으로는 한미 군사동맹을 강화함으로써 남북관계에 새로운 형태의 긴장을 형성했다. 미국의 한반도-동아시아 패권을 승인하는 가운데 남과 북이 일정한 경제 통합의 경로를 모색하는 것으로는 한반도 평화체제를 위협하는 근본적인 원인을 전혀 제어할 수 없다. 더불어 햇볕정책의 근간이 되었던 페리프로세스는 북한이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으로, 북한의 거듭된 핵실험과 우라늄 농축 시설 공개, 핵보유 천명 등으로 이미 실현 불가능한 구상이 되었다. ‘전략적 인내’로 표상되는 미국의 대북 정책은 북한이 비핵화로 향하는 구체적 조치를 취하기 전에는 어떠한 인센티브도 제공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남과 북의 관계 개선은 필요한 문제지만 한반도 평화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필수적인 일종의 정치 문제, 즉 미국이 주도권을 행사하는 문제에 대한 해결이 없는 남북 협력, 교류는 현재 상황에서는 무망한 시도라 할 수 있다. 노무현 정부의 한반도 구상 노무현 정부의 한반도 구상은 평화번영정책으로 요약된다. 평화번영정책은 북핵 문제의 해결을 전제로 해서, 북한을 위시한 불특정 위협에 대비하는 전력을 우선적으로 보강하도록 했다. 이는 동북아허브 중심국가 구상으로 연결되는데, 한반도 평화체제를 바탕으로 한국을 동북아시아의 물류, 관광, 무역, 산업의 중심으로 발전시켜나간다는 구상이다. 여기서 한반도의 평화는 동북아허브 중심국가가 되기 위한 사전 단계로 설정된다. 즉 한반도 평화체제가 필요한 이유는 자본 투자를 유도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평화번영정책이 말하는 평화란 전쟁위험의 항구적인 제거라기보다는, 경제의 불안이나 투자의 불안 요인의 제거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불필요한 전쟁 위협이 한반도에 경제 불안을 야기할 수 있다는 점에서 평화를 앞세울 수도 있지만, 자본 투자의 불안 요인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선제공격도 할 수 있다는 ‘예방전쟁의 교리’, 즉 부시 독트린을 지지하는 역설에 이르게 된다. 평화번영정책과 부시 독트린 2003년 한미정상회담은 이러한 상황을 잘 보여준다. 당시 발표된 공동성명은 남북교류와 협력이 북핵문제의 전개 상황에 따라 추진될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으며, 한반도에서 미국의 군사적 패권을 인정하면서 그것의 절대 우위를 전제하는 군사동맹의 강화를 확인했다. 또한 북한에 대해 경제 봉쇄는 물론, 군사적 수단도 사용할 수 있다고 밝혔다. 따라서 노무현 정부의 한반도 위기 인식과 해법은 부시 정부의 그것과 사실상 일치된다고 볼 수 있다. 남북의 화해협력은 미국의 군사적 패권에 완전히 종속되며, 미국의 강력한 군사적 힘을 바탕으로 남한이 주도하는 경제통합을 통일의 윤곽으로 제시한다. 노무현 정부 시절, 여타 정부에서보다 훨씬 높은 국방비 증가는 이러한 현실을 잘 보여주며, 이러한 면에서 노무현 정부의 평화번영정책은 한반도의 위기를 더욱 증폭하는 역할을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점증하는 한반도 위기 북핵 위기의 역사 1990년대부터 시작된 이른바 북핵 위기는 현재도 진행 중이다. 북한은 그동안 2차례의 핵실험을 단행했고, 최근에는 우라늄농축시설을 공개하며 핵보유국을 선언했다. 20여 년의 시간 동안 다양한 협상이 진행되었고, 때로는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1991년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이나 1994년 제네바 합의, 조미 공동 코뮤니케, 그리고 6자회담에서 도출된 수차례의 합의가 그것이다. 그러나 한반도와 동아시아 지역에서 자국의 핵전력을 유지하고자 했던 미국의 전략 속에서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은 무력화되었고, 북한에 대한 지원을 꺼리는 미국 내 강경파의 반대 속에서 제네바 합의 이행은 계속 지연되다가 부시 행정부가 들어서며 파탄이 났다. 핵 프로그램 해결을 통해 북한 체제의 안전을 보장해 줄 수 있을 것으로 보였던 6자회담은 ‘비핵화’의 의미(민수용 핵 프로그램 포함 여부, 미국의 핵우산 문제 등)에 대한 혼란과 북한에 대한 지원 문제로 장기 표류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북핵 위기의 역사는 한반도 문제의 열쇠를 쥐고 있는 미국의 근본적인 태도 변화가 전제되지 않은 상황에서 핵 프로그램을 둘러싼 협상이 불가능하다는 사실, 결국 핵 카드를 지렛대로 체제 안전을 보장받겠다는 북한의 전략이 구조적인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 북한의 핵개발이 국제적인 문제로 떠오른 것은 1991년 걸프전 이후부터다. 1990년대 초 현실사회주의 진영이 몰락하면서 북한의 정치, 경제적 고립이 심화되었다. 한반도에서 초강대국 미국과 군사적으로 대치하는 상황에서 소련을 통해 값싸게 들여오던 1차 연료 공급이 대폭 감소하면서 북한은 에너지 체계를 핵발전 중심으로 재편하기로 결정한다. 이렇게 시작된 북한의 핵개발은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1991)을 통해 평화적으로 해결되는 듯 보였다. 당시 옛 공산권 국가들과 차례로 관계 정상화를 추진하던 노태우 정부의 정경분리 원칙에 따라 남북한의 화해무드가 조성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화해무드는 안정적일 수 없었다. 비핵화 선언에 포함되지 않은 미국의 한반도 핵무기 배치를 둘러싼 쟁점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북한은 한반도 비핵화 문제는 북한의 핵무기 개발 뿐 아니라 미국이 한국에 배치한 전술핵무기나 핵우산 문제도 포함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그러나 미국은 북한을 대화 상대자로조차 인정하지 않았다. 1차 북핵 위기 1992년 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IAEA) 안전협정에 서명한 직후 1차 북핵 위기가 터졌다. 북한의 핵 시설을 사찰하던 IAEA는 북한의 플루토늄 추출량에 의혹을 제기했고, 특별 사찰을 요구했다. 북한은 핵비확산조약(NPT) 탈퇴 선언과 폐연료봉 추출, IAEA는 대북 제재안 결의라는 초강수로 맞섰다. 남북한 접촉에서 ‘서울 불바다’ 발언이 나올 정도로 악화일로를 걷던 1차 북핵 위기는 1994년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하면서 극적으로 타결 국면에 접어든다. 1994년 10월, 북한과 미국은 ‘제네바 합의’를 체결하고, 북한이 핵 프로그램을 동결하는 대신 미국이 경수형 원자로 2기, 연간 50만 톤의 중유를 지원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제네바 합의는 미국 내에서 격렬한 반발에 부딪혔고, 미국은 제네바 합의 이행 및 경수로 건설을 유보하게 된다. 1998년 북한이 3단계 로켓을 발사하면서 다시 경색되었던 국면은, 2000년 10월 ‘그 어느 정부도 상대방에 적대적 의사를 갖지 않는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조미 공동 코뮤니케’가 발표되면서 타협점을 찾는다. 미국은 북한에 10억 달러 상당의 식량 원조를 약속했고, 북한은 미사일기술 통제 체제(MTCR) 가입을 검토하기로 했다. 그러나 부시 정부가 출범하면서 미국은 일본을 향해 배치된 100여 기의 북한 노동미사일을 문제 삼기 시작했고, 합의는 파기되었다. 2차 북핵 위기 2002년 부시 미국 대통령은 연두교서에서 북한을 ‘악의 축’이라 규정했다. 북한은 미국의 핵태세 검토보고서(NPR)에 반발하면서, 미국과의 모든 협의를 재검토하겠다고 주장했다. 그러던 2002년 10월, 평양을 방문한 제임스 켈리 미 국무부 차관보가 북한의 고농축우라늄 프로그램 여부를 추궁하면서 2차 북핵 위기가 시작된다. 북한은 ‘인정도 부정도 않는 전략’으로 일관하면서, 미국의 안전 보장과 북한의 핵, 미사일 프로그램을 일괄 타결하자고 제안했다. 미국은 이 제안을 거부하면서 북한에 제공하던 중유 공급 중단을 선언했고, 한반도 에너지 개발기구(KEDO)는 2002년 12월분부터 중유 공급을 중단하게 된다. 이에 반발한 북한은 봉인되었던 영변 핵시설의 재가동을 선언하고 IAEA 사찰단을 추방했다. 2003년 1월 북한은 다시 NPT 탈퇴를 선언했고, 미국은 군사적 행동을 시사했다. 극단으로 치닫던 북미 갈등은 2003년 8월에 6자회담이 개최되면서 6개 국가의 협상 테이블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6자회담 6자회담을 통해 2005년 919 공동선언, 2007년 213합의, 2007년 103 합의 등이 이루어지면서 북핵 문제는 해결의 기미가 보이는 듯 했다. 북한은 2008년 6월 핵 신고서를 제출하고, 영변 핵시설의 냉각탑을 폭파하는 장면을 전 세계에 공개했다. 이에 미국은 북한을 테러지원국에서 해제했다. 그러나 북한의 플루토늄 추출량 의혹이 제기되면서 시료채취 여부와 미신고 시설에 대한 검증 문제가 불거졌고, 2008년 12월, 6자회담은 결렬되었다. 미국은 에너지 지원을 유보했고, 일본은 납북자 문제 해결을 이유로 중요 지원에 불참했다. 한국 역시 경제, 에너지 지원을 중단했다. 6자회담이라는 다자간 협상 틀은 사실 북미협상이라는 1:1 협상에서 미국이 져야 할 책임을 5개 나라로 분산하는 구조였다. 더구나 미국은 6자회담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북한을 ‘정권교체가 필요한 깡패국가’로 규정하고, 북한의 인권상황 개선을 대북 안전보장과 관계 정상화와 연계시켰다. 이는 미국이 주장하는 다자간 협상이 얼마든지 자신의 책임을 분산하고 북한에 대한 무력행사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전환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미국의 대북 인식 변화 오바마 정부가 북한과 대화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음에도 불구하고 2009년 4월 로켓을 발사한데 이어, 5월에는 2차 핵실험을 단행하면서 미국 내 북한에 대한 인식이 크게 변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의 태도를 ‘대화 성사를 위한 전술’로 간주하는 것은 더 이상 설득력이 없다는 견해가 우세해졌다. 로켓 실험이나 핵실험은 최소한 몇 개월 이상의 준비 기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북한이 진정 원하는 것은 실제 핵무기 보유이며, 이를 미국과 인도가 맺은 핵 협정과 같은 수준으로 미국이 보장하기를 원한다는 시각이 미국 정가에서 힘을 얻었다. 오바마 정부의 ‘전략적 인내’는 대북 관계에서 어떠한 진전도 이루어내지 못한 것으로 평가되지만, 미국 내에서는 일정한 합의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최근 미국 대선주자인 공화당 밋 롬니 진영과 오바마 진영의 토론회에서 롬니 진영은 오바마 정부의 대외 정책에 맹렬한 비판을 쏟아내면서도 오바마 정부의 대북 접근법에는 동의를 표했다. 북한의 잘못된 행동에는 어떠한 보상도 주지 않겠다거나, 북한이 비핵화 프로세스를 일정 수준 이상으로 진행시키기 전에는 어떠한 인센티브도 제공할 수 없다는 입장은 이제 일부 매파의 주장에 머물지 않는다. 한반도, 동아시아의 긴장 고조 한반도 위기의 새로운 국면 2010년 발생한 연평도 사태는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점점 더 극단적인 형태로 치닫고 있는 한반도 긴장 고조 사이클의 반영이다. 1999년과 2002년, 2009년에 발생한 3차례의 서해 교전사태가 외양상 ‘우발적 충돌’의 형태를 띠는 반면, 한국전쟁 이후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군사적 충돌로 평가되는 연평도 사태는 ‘사전에 계획된 도발’로 이해된다. 우발적 충돌은 실수나 최소한 자위적 행위로 인식되기 때문에, 여기에는 보복과 응징과 같은 추가적 군사행동의 요구가 끼어들기 어렵지만 연평도 사태에 대한 인식은 다르다. 그동안 남북 정상회담이나 교류가 지속되면서 일종의 ‘가상적’ 존재가 되었던 북한 위협을 다시 ‘실질적’ 존재로 복구하면서 호전적 분위기를 정당화시킨다. 한국도 사전에 치밀하게 대비해야 한다는 논리(군사력 증강의 수준 변화), 북한의 타격에 맞서 강력한 대응이 필요하다는 논리(현장 지휘관의 권한 확대와 교전 수칙 개정 요구) 등으로 이어지면서 군사적 긴장이 현격히 고조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이 서북도서 요새화 계획 등 한국의 군사력 증강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주변 국가들의 군사력 경쟁을 부추기고, 그에 대한 알리바이를 제공한다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상존하는 군사적 긴장과 충돌 가능성 남과 북이 서로 다른 지점을 해상 경계선으로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서해에서는 군사적 충돌이 반복되고 있다. 또한 반복되는 군사훈련은 역사적으로 해당 지역의 군사적 긴장을 높여 갈등을 증폭시키는 커다란 원인으로 작용한다. 한미 또는 한미일이 연합한 합동군사훈련 강화, 미국의 핵 항공모함이 참가하는 대규모 한미연합훈련, 일본 자위대까지 참여하는 PSI 해상차단훈련 등의 군사훈련은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을 크게 고조시킨다. 북한의 현실 북한 전략의 성공 가능성 북한 체제의 위기는 최근 권력 세습 과정에서 새롭게 불거진 문제가 아니다. 북한이 미국과의 대결에서 원하는 바는 ‘정상국가’가 되는 것, 즉 체제 안정의 보장이다. 북한의 핵 개발이나 군사적 도발은 이를 가능케 하는 협상을 위한 지렛대라고 할 수 있다. 북미협상이나 6자회담은 북한이 핵 카드를 이용해 협상을 벌일 수 있는 통로다. 그러나 핵과 체제의 안전보장을 교환한다는 북한의 전략은 북미협상과 6자회담 프로세스의 중단으로 난관에 봉착해 있다. 북한은 이러한 교착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이전보다 더 높은 강도의 방법을 강구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바, 북한의 태도에 대한 미국의 변화된 인식은 이러한 시도의 성공 가능성을 더욱 낮추고 있다. ‘미국의 대북압박과 고립정책 → 북한의 더욱 강력한 협상카드 강구 → 군사적 긴장 고조와 압박 정책 강화’라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악순환은 미국의 한반도-동아시아 전략이 근본적으로 수정되지 않는 한 북한의 군사적 도발은 중단되지 않을 것이며, 그 수위는 계속해서 높아질 것이라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북한 체제의 변화 가능성 1990년대부터 북한은 자체적으로 산업력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자원과 자본, 기술이 부족한데다가 경제적 고립이 심화되어 경제 정상화는 요원해 보인다. 2002년 71 경제관리 개선조치, 2009년 화폐개혁 등 경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여러 개혁조치들이 있었지만 성과가 미미하거나 실패한 것으로 평가된다. 산업력을 회복하는 데 결정적인 에너지가 심각하게 부족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최근 북한이 일련의 개혁조치를 단행하면서 북한 체제의 변화 가능성에 대한 추측이 쏟아지고 있다. 한국의 언론은 대부분 북한 경제가 시장경제, 개혁개방으로 가고 있다고 분석한다. 물론 새로운 체제 아래 김정일 국방위원장 시기의 선군정치에서 탈피할 가능성도 있다. 2010년 이후 북한은 시장을 통제, 억압하는 조치들을 폐기하기 시작했고, 중국식 경제개혁 모델을 검토했다. 그러나 값싸고 어마어마한 노동력을 보유하고 있고, 자본 투자가 집중되고 있는 중국과는 경제적 차원이나 대외 정치차원에서 큰 차이를 갖는 북한이 중국식 경제개혁 모델을 그대로 도입하기란 불가능하다. 대외적 고립이 해결되지 않는 한 내적인 경제성장 동력도 매우 부족한 북한은 점점 더 군사력에 의존할 가능성이 크다.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한 과제 미국의 아시아 집중 전략과 이에 따른 한미일 삼각동맹 강화, 그리고 이에 맞선 중국과 북한의 군비증강 속에서 동아시아의 군사적 위기는 더욱 고조되고 있다. 상호 군사력 증강을 부추겨 긴장을 고조시키는 이러한 흐름을 제어하지 못한다면 한반도의 평화도, 북핵 문제의 해결도 결코 이룰 수 없다. 때문에 미국의 동아시아 군사전략에 대한 대응, 가시화되는 한미일 삼각동맹에 대한 대응은 반전평화운동 진영의 시급한 과제다. 이러한 과제 속에서 한국의 군사력 증강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도 중요하다. 천안함, 연평도 사건 이후 심화되는 호전적 분위기는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을 높이는 동시에 반전평화운동을 질식시키고 있다. 북한 위협을 빌미로 한 군사력 증강, 날로 수위를 높여가는 공격적인 군사훈련, 그리고 북한, 중국 등 주변 국가의 군사력 증강으로 이어지는 제로섬 게임을 끝내기 위해서는 남한에서부터 군비 축소, 군사력 축소, 군사훈련 반대의 흐름을 조직해야 한다. 강정해군기지 반대 해군이 제주에 해군기지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1>북한의 도발 억제와 해양영토 보호, 2>남방해역 해상교통로와 풍부한 해저자원 확보, 3>제주 남방해역 보호와 해상 교통로 확보를 위한 해군함정의 군수 지원 등이다. 그러나 북한의 도발을 억제하기 위해 제주도에 해군기지를 건설한다는 주장은 해군기지 위치 선정의 원칙인 지리적 인접성과 배치된다. 또한 안보 위협이 거의 없는 남방해역의 해군력 강화가 해상교통로 확보와 해저자원 확보에 도움이 된다는 주장 역시 근거가 없다. 강정해군기지의 건설은 많은 비용이 들어가는 주둔기지 건설보다 동맹국으로부터 기항지와 군수물자를 제공받아 보다 효율적인 군사작전을 수행하려는 미국의 해양 전략에 의한 것이다. 정부는 미군이 강정해군기지를 함부로 사용할 수 없다고 주장하지만,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따라 미군은 별도의 협약 없이 한국의 군사시설을 무제한 사용 가능하다. 강정해군기지는 미국이 잠재적 적국으로 상정하는 중국을 상대로 한미 합동 해양전력의 강화를 목표로 하는 해양패권 전략에 조응한 결과물이다. 따라서 동아시아 역내 군사적 긴장을 크게 고조시키고, 해양 군사화를 촉진할 위험이 크다. 제주도와 한반도는 물론, 동아시아 지역의 평화를 위협할 해군기지 건설을 저지하기 위해 함께 투쟁해야 한다. 한일 정보협정 반대 한일 정보협정이 수면 위로 드러난 것은 2011년 1월 한일 국방장관회담에서다. 북한의 핵과 대량살상무기 관련 정보를 공유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북한 위협을 빌미로 한국과 일본의 군사협력이 한층 더 강화되고 있는 것이다. 한국과 일본의 군사협력은 19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김대중 정부 시절부터 군사협력 수준이 격상되었고, 2000년대 들어 미국이 주도하는 다국적 군사훈련(RIMPAC 등)에 참가하는 방식으로 전략, 작전 협력이 진행되었다. 그러다 이명박 정부 들어 북한을 명시적 대상으로 삼는 훈련(PSI 훈련, 한미일 연합해상훈련)이 진행되고 있다. 현재 한국과 일본의 군사협력 수준은 공동의 적국에 대처하는 공동 전략을 수립하고, 정형화된 군사훈련을 실시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정보협정과 군수지원협정이 체결된다면 한국과 일본의 군사관계는 군사협조의 완성, 혹은 준 군사동맹의 단계에 돌입하게 된다. 한일 정보협정은 미국의 아시아 전략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전략적 유연성에 따른 미군 재배치는 미군을 신속기동군으로 재편해 주둔지에 얽매이지 않는 세계적 작전 수행을 목표로 한다. 이때 발생할 수 있는 지역의 전력 공백을 메우고, 미국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동맹국의 역할을 강조하는데, 동맹국을 연결하고 이들의 군사력 증강과 현대화를 지원한다. 이를 위해 미국은 한미 동맹과 미일 동맹으로 양분되어 있던 동맹구조를 한일 간 협력 강화 속에 통합하려 하고 있다. 따라서 한일 정보협정은 정보 교환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연합 방위 태세를 구축하는 군사 동맹의 첫걸음이다. 이 협정의 논의 시작 시점부터 군수지원협정과 함께 추진되었다는 점도 이러한 판단을 뒷받침한다. 미국은 한미일 협력 강화가 동북아시아 지역에서의 MD 추진과 연결되어 있음을 숨기지 않는다. 2012년 6월에 진행된 한미 외교국방장관 회담의 공동성명은 ‘미사일 위협에 대한 포괄적인 연합방어태세를 강화하는 방안을 모색하기로 했다’고 밝히고 있다. 현재 일본은 미국의 MD 체제에 점차 깊이 참여하는 중인데, 미국과 공동으로 차세대 요격미사일도 개발하고 있다. 개발이 끝나면 이 미사일은 당연히 일본 주변 지역에도 배치된다. 한일 간 정보교환은 이러한 요격미사일 체제를 뒷받침하기 위해 꼭 필요하다. 한국 정부가 이번 협정 체결 과정에 문제가 있었지만 내용은 국익에 도움이 된다면서 추진 의지를 굽히지 않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살펴볼 수 있다. 미국의 MD 체제에 편입되기 위해서는 어차피 넘어야할 산이기 때문이다. 군비 축소와 군사적 긴장 완화 올해 기획재정부가 발표한 ‘2013년도 예산 요구현황 및 검토방향’을 보면 각 부처가 제출한 총지출 요구규모는 346조 6천억 원이다. 복지 분야는 5.3% 증가에 그친 반면, 국방 분야는 7.6%나 증가했다. 복지 분야의 지출 증가는 기초생활보장, 기초노령연금, 건강보험 등 의무적 복지지출로 현행 수준의 제도 운용에 따른 자연 증가분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국방 분야 예산요구안 중 실제 군사력 증가라 할 수 있는 방위력 개선비는 작년에 비해 11.1%로 크게 증가했다. 호전 세력들은 미국의 전략을 추종하면서 자국의 무기와 그 체계를 현대화하고 군사력을 증강시키려 시도하고 있다. 북한의 도발을 빌미로 중국의 성장을 견제하고 아시아에서 자국의 패권을 유지하려는 미국과 한국-일본의 호전 세력들의 이해가 만나는 지점이다. 또한 미국의 동아시아전략 아래 연합 군사훈련 역시 그 수위가 점차 높아지고 있다. 2010년 한미, 미일훈련에 자위대 및 한국군의 교차참관이 이뤄졌고 올해 초에는 최초로 한미일 연합해상훈련이 진행되었다. 이러한 군사력 증강과 침략적 전쟁연습의 확대는 한반도를 비롯한 동아시아의 군사적 긴장을 크게 높이며, 북한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군사력 증강 레이스를 현실화시키고 있다. 우리의 반전평화 투쟁은 이러한 군사적 긴장을 해소하기 위한 구체적인 요구에서 출발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