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시리아 공습 반대한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시리아에 대한 무력 사용 승인을 요구하는 제안을 의회에 제출했다. 현재 미 해군은 시리아가 접해 있는 지중해에서 순항미사일 공격을 할 수 있는 채비를 마쳤다고 한다. 이미 지중해 해상에는 각각 40개의 순항미사일(크루즈 미사일)이 장착된 미국 해군 구축함이 파견돼 있다. 미국 정부는 시리아 내에서 화학무기가 사용됐기에 “민주주의”와 “인도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습이 불가피하다고 말한다. 우리는 그 어떤 화학무기 사용에 대해서도 결단코 반대한다. 그러나 시리아 내에서의 화학무기 사용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민간인 피해를 낳을 대규모 공습이 대안이 될 수는 없다. 더욱이 미국이야말로 화학무기를 가장 많이 사용해 온 장본인들이다. 미국은 베트남에서 0.15그램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치명적 독극물이 포함된 고엽제를 대량살포한 바 있다. 2003년에 이라크에서 살갗을 들러붙게 하는 신형 네이팜탄을 사용했으며 2004년 이라크 팔루자에서는 뼈와 살을 태우는 백린을 사용해서 7일만에 4천 명을 학살한 바 있다. 서방 강대국들의 “인도주의적” 개입은 재앙만을 불러왔다. 19세기에 식민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해 개발된 “인도주의적” 개입은 1999년 코소보 전쟁에서 인종청소는 오히려 더 부추켰고 아프가니스탄 전쟁 이후 유아사망률은 더 높아졌다. 멀리 거슬러 올라갈 필요도 없이 대중의 민주주의 염원을 보호한답시고 미국과 서방이 개입한 리비아의 경우, 폭격 한 달 동안 나토 군대는 자그마치 1천8백 회 이상의 폭격을 해서 상당한 민간인들의 사상자들을 낳았다. 우리는 미국이 그렇게도 시리아 민중들을 걱정했다면 왜 미국과 서방은 주변국으로 피신한 시리아 난민 수백만 명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조치를 취하지 않았는가? 미국이 진정으로 시리아에 대한 군사작전을 벌이려는 이유는 중동 내에서 다시 패권주의의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이다. 아랍 혁명이 이집트 군부의 반혁명으로 위기에 처한 가운데, 시리아에서 서방 제국주의 세력이 군사적 개입을 강화한다면 아랍 민중의 힘은 약화될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공습을 규탄하는 움직임은 전 세계적으로 확대되고 있다. 무엇보다 미국 내에서 평화를 바라는 대다수 국민들은 시리아 공습을 반대하고 있다. 8월 24일(현지시간) 로이터 통신과 여론조사기관 입소스가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60%는 미국 정부가 시리아 사태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고 답했다. 반면 오바마 행정부가 행동에 나서야 한다고 답한 응답자는 9%에 불과했다 특히, 영국 런던에서는 시리아 공습에 반대하는 5천여 명의 시위가 즉각적으로 조직됐고 8월 29일 영국 의회에서는 시리아 군사개입 동의안이 부결됐다. 그러나 국제적인 여론과는 달리,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한국 정부 관리들은 시리아에 대한 강경 대응을 미국 측에 촉구했다”고 한다. 시리아에 대한 군사작전은 새로운 중동전쟁을 야기하는 매우 위험천만한 행위이다. 2001년 아프가니스탄 공격 이후 12년 계속된 ‘대테러전쟁’이 세계평화를 위협해 왔음이 분명한 상황에서 또다시 새로운 중동전쟁을 시작하자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럼에도 시리아에 대한 군사작전을 걱정하기는커녕 중동전쟁을 촉구하고 나선 김관진 국방장관의 언행에 우리는 깊은 우려를 금할 길이 없다. 더욱이 한국군의 해외 파병에 반대해 온 한국의 반전평화연대 세력은 레바논에 파병된 한국군 3백50여 명(동명부대)가 미국의 시리아에 대한 군사적 공격에 휘말릴 수 있음을 준엄하게 경고하고자 한다. 동명부대는 시리아-이스라엘의 접경 지역인 골란 고원에서 겨우 40킬로미터가량 떨어진 곳에 주둔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올해 들어서만 시리아를 세 차례나 폭격했다. 이 지역의 불안이 계속된다면 더 많은 폭격이 벌어질 수 있다. 이런 위험천만한 상황 때문에 지난 몇 달 동안 자국 병사가 두 번이나 전투에 휘말려 억류되고 최근에는 부상자까지 발생했다. 그 때문에 최근 오스트리아와 필리핀 등 레바논에 파병된 군대들이 속속 철군을 결정한 바 있다. 동명부대는 아랍 민중이 제국주의 강대국에 맞서 싸우는 것을 막는 역할만을 할 뿐이며 그 때문에 위험천만한 상황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박근혜 대통령은 한미정상회담에서 ‘글로벌 동맹’ 차원에서 시리아에 개입하겠다고 천명한 바 있다. 반전평화를 염원하는 우리들은 위와 같은 시리아 개입도 불사하려는 현 정부의 태도가 미국의 군사작전을 지지하는 행동으로 결단코 이어져서는 안 됨을 엄중하게 경고한다. 시리아에 대한 그 어떤 서방의 군사작전도 안 된다. 시리아에 대한 미국의 폭격은 더 큰 재앙을 불러 들일 것이다. -. 미국의 시리아 폭격 계획 철회하라! -. 레바논의 동명부대 즉각 철군하라! -. 미국의 대 시리아 군사작전 반대한다! 2013년 9월 2일 반전평화연대(준)[경계를넘어, 국제노동자교류센터, 기독교사회선교연대회의, 남북공동선언실천연대, 노동인권회관, 농민약국, 노동자연대다함께, 동성애자인권연대, 랑쩬, 민가협양심수후원회, 민족자주평화통일중앙회의, 민주노동자전국회의, 민주화운동가족협의회,민족문제연구소, 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기념)단체연대회의, 보건의료단체연합, 불교평화연대, (사)민족화합운동연합, 사월혁명회, (사)전국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 사회진보연대, 우리민족연방제통일추진회의, 예수살기, 615공동선언실천청년학생연대, 21세기한국대학생연합, 2005년파병철회단식동지회, 전국농민회총연맹,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전국빈민연합, 전국여성연대, 전국학생행진, 조국통일범민족연합남측본부, 노동당, 통일광장, 통합진보당, 팔레스타인평화연대, 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 평화의친구들, 평화재향군인회,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 한국노동사회연구소, 한국진보연대],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 한국청년연대 Statement Against US Plans to Bomb Syria US President Obama has asked Congress to pass his proposal for military action against Syria. The US navy reportedly finished preparations to launch cruise missiles in the Mediterranean sea. Already, US destroyers armed with 40 cruise missiles each are deployed to the Mediterranean. The US government claims a strike is necessary in order to defend ‘democracy’ and ‘humanitarianism’, given that chemical weapons have been used in Syria. We are adamantly opposed to any use of chemical weapons. However, a military strike that will cause massive civilian casualties is not the solution, even if allegations of chemical weapons use in Syria are true. It must be recalled that the US itself has the deadliest record of chemical weapons use among all countries. It sprayed massive quantities of agent orange in Vietnam, containing poison that is lethal at a dosage of just 0.15 grams; used a new type of napalm during the Iraq war in 2003; and murdered 4 thousand Iraqis in Fallujah in just 7 days in 2004 using white phosphorus, which burns through flesh and bone. The so-called humanitarian interventions by western powers have brought nothing but disaster. Originally devised as a term to justify colonialism in the 19thcentury,‘humanitarian’ intervention only fueled ethnic cleansing in the 1999 Kosovo war and led to heightened infant mortality in Afghanistan. In Libya, where the US and the West intervened ostensibly to defend the democratic aspirations of the Libyan masses, the NATO carried out over 1,800 bombing missions within a span of 1 month, again causing severe civilian casualties. If the US is so worried about the fate of ordinary Syrians, then why has it done nothing to help the millions of Syrian refugees in neighboring countries? The real motive behind the US’ planned military action against Syria is to regain its imperial initiative in the Middle East. The strengthening of Western imperialist military intervention would certainly weaken the power of the Arab people at a time when the Arab Revolution is being threatened by the Egyptian army’s counter-revolution. But opposition to US bombing is spreading globally. Above all, the majority of US citizens are yearning for peace and opposed to an attack on Syria. According to a Reuters/Ipsos poll taken August 24, 60 percent of respondents said the US should not intervene in Syria: a mere 9 percent said the Obama administration should take action. In Britain, a 5 thousand-strong anti-war rally was immediately organized and the UK Parliament voted down a motion to support US military action against Syria on August 29. In contrast to such international public opinion, Korean government officials reportedly urged their US counterparts to deal with Syria in a tough manner, according to the Wall Street Journal. Any military action against Syria is extremely dangerous as it can unleash yet another Middle Eastern war, after 12 years of devastation and suffering brought by the ‘War on Terror’ that began with the attack on Afghanistan in 2001. We therefore find deeply disturbing the remarks by the Korean Defense Minister Kim Gwan-jin that in effect serve to instigate another war in the Middle East. Moreover, we the anti-war forces in Korea who have been opposed to dispatching Korean troops abroad, hereby warn the Korean government that the 350-strong Korean unit already dispatched to Lebanon can easily get embroiled in any US military action against Syria. This unit is stationed barely 40 km away from the Golan Heights, which straddles the Syrian-Israeli border. Israel has bombarded Syria three times this year alone; more such attacks are likely to come as long as instability continues in this region. It was under this highly combustible situation that Israel twice saw its soldiers get entangled in combat and detained over the last few months, and lately even saw casualties. International troops stationed in Lebanon, including the Austrian and Philippine units, recently decided to leave Lebanon for this reason. The Korean unit, whose sole mission is to prevent the Arab people from rising up against imperialist powers, would only court disaster by choosing to stay. President Park Geun-hye nevertheless said during the Korea-US summit meeting that Korea would intervene in Syria out of consideration for its ‘global alliance’ with the US. Standing for peace and against war, we hereby issue a stern warning that we shall not countenance any attempt by the Korean government to aid and abet US military action against Syria. The West must steer clear of any military move against Syria. A US strike on Syria will only lead to horror and destruction on a greater scale. -. Scrap plans to bomb Syria! -. Withdraw the Korean troops in Lebanon now! -. No to US military action against Syria!
한반도 핵전쟁 위험성 높이는 UFG 연습 중단하라! 한미연합사령부가 8월 19일부터 30일까지 2013년 한미연합 을지프리덤가디언(UFG)연습을 전개한다. 제임스 서먼 한미연합사령관은 “UFG 연습은 한미 양국군의 준비태세를 향상시키는 데 중요한 동맹간의 연습”이라며 “이 연습은 실전적인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범정부적 차원에서의 필수과업 훈련을 할 수 있도록 도울 것”이라고 밝혔다. UFG연습은 연례적인 방어연습이라는 한미연합사의 주장과는 달리 북한군 격멸과 북한정권 제거를 작전목적으로 하는 작전계획 5027과 한미연합 '국지도발대비계획', '북한 급변사태'에 대응하는 작전계획 5029에 따른 대북 공격연습이다. 이에 따라 평양 점령과 북한 최고지도자 생포 작전, ‘국지도발’의 경우 도발원점은 물론 지원세력과 지휘세력까지 타격, 북의 대량살상무기 유출시 한미연합군 투입하여 탈취작전 등을 연습한다. 이와 함께 19일부터 22일까지 실시되는 정부연습인 을지연습은 ‘응전자유화계획’(충무 9000)에 따라 북에 대한 '안정화 작전'(점령통치)을 연습한다. UFG 연습에는 미군 3만명, 한국군 5만여명, 정부`민간인 40여만명 등 총 50여만명이 동원된다. 세계 최대 규모의 공격적 전쟁연습이 실전적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전개되는 것이다. 특히, 작년 을지프리덤가디언 연습에서 선제타격전략을 최초로 공식 도입한 바 있는 한미군당국은 북한의 3차 핵실험 등 북한의 핵위협이 심각해졌다는 판단 하에 북한의 핵위기 상황 유형을 핵위협 단계‧사용임박 단계‧사용 단계 등으로 구분하여 각 단계별로 구체적인 타격 전략을 수립 중이며, 올해 UFG 연합연습에서 적용 및 검증하고 10월에 열리는 제45차 한미안보협의회(SCM)에서 최종 승인할 예정이라고 한다. 미국은 2010년 핵태세보고서(NPR)에서 부시정권의 대북 핵 선제사용(First Use) 전략을 그대로 유지했고, 이를 구체화하는 대북 핵선제 공격계획인 ‘OPLAN 8010'과 북의 대량살상무기(WMD) 확산저지 작전계획인 ’CONPLAN 8099'을 세우고 B-2, B-52 전략폭격기 등을 동원하여 한반도에서 핵전쟁연습과 대량살상무기 탈취훈련을 수시로 벌여왔다. 한국도 이에 보조를 맞춰 선제공격 전략인 ‘능동적 억제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한미당국은 대북 선제타격을 핵심으로 하는 ‘킬 체인(Kill Chain)’을 2015년 이전에 구축하기로 하고 각종 무기체계 도입을 서두르고 있다. 또 한국군 이지스 구축함이 수집한 정보를 미국에 제공해 온 데 이어, '한국형 MD'(AMD-Cell)와 주한미군 TMD(TMO-Cell)를 연동시키고, SM-3 요격미사일 도입을 추진하는 등 '한국형 미사일방어(KAMD)'로 포장된 미국 주도의 동아시아 MD 구축을 가속화하고 있다. 한미당국이 대북 (핵)선제공격 전략과 작전계획을 세우고 이를 실행할 타격체계를 갖추어 수시로 이를 연습하면 당연히 한반도에서의 핵전쟁 위험성은 그만큼 높아져 한반도의 평화가 심각하게 위협받을 수 밖에 없다. 한미연합사는 호주 영국 캐나다 뉴질랜드 덴마크 노르웨이 프랑스 등 7개국의 유엔군사령부 파견국이 참관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아울러 정전협정 이행 및 준수 여부를 확인`감독하는 중립국 감독위원회의 스위스와 스웨덴 요원들도 이 훈련을 참관한다고 한다. 이는 2010년 한미 연례안보협의회(SCM)가 "필요시 유엔사와 전력을 제공하는 국가들을 연합연습에 참여시킨다"는 내용의 한미 국방협력지침에 서명한 데 따라 2011년부터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미국이 형식적으로 정전협정 관리만 해오던 유엔군사령부(UNC)에 대해 2006년 전작권 전환 합의 이후 지속적으로 전시임무 복원을 추진하는 이유는 미군이 전작권 이양과 관계없이 유엔사를 존속시켜 한국군에 통제력을 행사하려는 데 있다. 나아가 유사시 유엔사 이름으로 전쟁을 수행하고 북에 대한 점령통치를 함으로써 국제법적 논란을 피하고자 하는 의도에 따른 것이다. 50여만명이 동원되어 북한군 격멸과 북한 최고 지도부 생포, 안정화작전을 수행하는 UFG연습은 그 자체로 유엔헌장이 금지하는 ‘무력의 위협(2조 4항)’에 해당한다. 평화통일의 사명을 명시한 헌법 전문, 평화적 통일정책 추진을 규정한 헌법 4조, 침략적 전쟁을 부인한 헌법 5조에도 위배된다. 정전협정 상 ‘적대행위 금지’(2조 12항), ‘군사인원 및 작전비행기 등 무기 증원 금지’(2조 13항 ㄷ, ㄹ목) 규정 위반이기도 하다. 평화적 통일, 상호 체제 인정과 존중을 규정한 7.4 남북공동성명, 남북기본합의서, 6.15 공동선언, 10.4 선언 등 남북합의에도 위배된다. 뿐만 아니라 미국은 미군주둔비부담(방위비분담) 협상 과정에서 북핵 문제로 인해 전략 폭격기 등의 한반도 전개와 한미연합 군사훈련 등으로 연합방위력 증강에 소요되는 비용이 크게 늘어났다는 이유로 한국 부담의 대폭 증액을 요구했다고 한다. 미국은 북핵을 빌미로 한반도의 전쟁위기를 스스로 증폭시켜놓고 이를 핑계로 한국에 비용 부담을 요구하는 파렴치한 짓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이번 UFG연습은 대북 (핵)선제공격을 포함한 침략적이고 불법적인 전쟁연습이다. 미국은 이 같은 연습을 위해 비용 부담까지 요구하고 있다. 이에 우리는 한반도에 핵전쟁 위험성을 높여 평화를 위태롭게 하고 대미 군사적 종속을 심화하며 국민의 부담까지 강요하는 2013년 UFG연습을 즉각 중단할 것을 한미당국에 강력히 촉구한다. 나아가 미국의 대북 적대정책 폐기와 한반도 비핵화를 실현하고 이를 위해 정전협정을 폐기하고 평화협정을 체결할 것을 촉구한다. 2013. 8. 19. 2013년 을지프리덤가디언 전쟁연습 중단 촉구 공동 기자회견 참가자 일동 21세기한국대학생연합, 노동인권회관, 노동자연대다함께, 민가협양심수후원회, 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기념)단체연대회의, 민족자주평화통일중앙회의, 민주노동자전국회의, 민주민생평화통일주권연대,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불교평화연대, 사회진보연대, 새물약사회, 우리민족연방제통일추진회의, 자주통일과민주주의를위한코리아연대, 전국농민회총연맹,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전국빈민연합,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전국여성연대, 조국통일범민족연합남측본부, 통일광장, 통합진보당, 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화해통일위원회, 한국진보연대, 한국청년연대
[2013년 8월 2일 레디앙 칼럼] 오바마의 추가 핵군축 제안, 세계는 더 안전해질까? 임필수 (사회진보연대 반전팀) 2013년 6월 19일 오바마 대통령은 베를린 연설에서 “우리의 전략핵무기를 최대 1/3 감축하면서도 미국과 동맹국의 안보를 보장할 수 있을 것으로 결심하게 됐다"고 선언했다. 신전략핵무기감축협정(New START)은 미국과 소련이 실전 배치한 핵탄두의 수를 1,550기로 제한했으나, 오바마의 새로운 제안은 그 상한선을 1/3 더 감축하자는 것이었다. 오바마 대통령은 2009년 4월 프라하 연설에서 미국 국가안보 정책에서 핵무기의 역할을 감축하며 세계 핵군축을 향해 나아가겠다고 맹세했다. 따라서 그의 이번 제안은 마치 핵군축을 향한 꾸준한 진보로 비춰질 수 있다. 이는 얼마나 현실에 부합할까? New START는 무엇이었나? 오바마의 새로운 제안을 평가하기 위해선 그에 앞서 체결된 신전략무기감축협정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그것은 미국과 러시아가 체결한 협정으로 2010년 4월 8일 서명되어 2011년 2월 5일 발효되어 2021년까지 효력을 발휘할 예정이다. 협정은 실전 배치된 핵탄두의 수를 1,550기로 제한했다. (하지만 실제로 배치된 핵탄두의 수는 1,550기 제한을 넘을 수 있는데, 폭격기 한 대에 탑재된 탄두는 그 수가 얼마든 간에 1기로 계산되기 때문이다.) 또한 협정은 실전 배치되거나 배치되지 않은 발사체, 즉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잠수함발사 탄도미사일(SLBM), 중폭격기(장거리전략폭격기)의 수를 800기로 제한하고, 그 중 배치된 미사일과 폭격기의 수를 700기로 제한했다. 협정은 검증을 위해 위성 원격 감시를 허용했고, 1년에 18회 현지 사찰도 가능하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미국이 감축하자는 상한선은 실전 배치된 핵탄두를 대상으로 하며, 여기에는 비축분은 제외된다는 점이다. 미국은 상당량의 핵탄두를 비축하고 있고, 필요에 따라 현존 운반 체계에 4,000기 이상의 핵탄두를 배치할 수 있다. 바로 이 지점이 많은 언론이 정확히 잘못 전달하고 있는 바다. 또한 협정은 전술핵무기 시스템에 대해서는 아무런 제한을 가하지 않았다는 점도 중요하다. 예를 들어 록히트 마틴의 F-35 라이트닝Ⅱ는 전술핵 운반체 역할을 하는 F-15E와 F-16을 대체할 가능성이 매우 높으나 어떤 제한도 가해지지 않았다. 실전배치 전략핵무기 감축 제안의 맹점 나아가 백악관은 핵무기 추가 감축이 미국의 일방적 조치로 취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 즉 러시아와의 협상을 통해 추진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오바마 대통령의 제안은 러시아의 협상 참여 여부에 운명이 달려 있다. 그러나 미국은 러시아를 협상에 참여하게 할 인센티브가 거의 없다. 러시아의 관점에서 볼 때 New START가 규정한 상한선이 1,550기냐 1,000기냐는 문제는 거의 중요성이 없다. 그 이유는 앞서 지적한 바와 같다. 같은 날 백악관이 배포한 <핵무기 사용 정책에 관한 새로운 지침>도 “기술적, 지정학적 위험에 대항하여 강건한 대비책(hedge)을 유지한다”고 밝혔다. 여기서 대비책이란 바로 핵탄두 비축량을 의미할 것이다. 설사 미국이 전략핵탄두 비축량을 검증 가능한 방식으로 감축한다고 제안하더라도, 이 역시 러시아에 큰 관심사가 아닐 수 있다. 현재 러시아심의 최대 관심사는 미국의 미사일방어 시스템이나 재래식 타격능력, 우주의 군사화, 중국 핵전력을 견제하기 위한 다자간 핵군축 협상과 같은 사안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바마 대통령의 새로운 제안은 본질적인 문제를 다루지 못하고 장래도 그리 밝지 않다. 미국의 핵무기 의존도는 감소했나? 오바마 정부의 핵정책에 담긴 의미를 정확히 평가하기 위해서는 그의 베를린 연설보다는 오히려 같은 날 발표된 <핵무기 사용 정책에 관한 새로운 지침>을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오바마 대통령은 핵무기 규모뿐만 아니라 핵무기의 역할도 축소한다고 선언했기 때문에 그 약속이 얼마나 실현되었는지부터 살펴보자. 2010년에 발표된 미국의 <핵태세평가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은 “핵비확산조약(NPT)에 가입했고 핵비확산 의무를 준수하고 있는 비핵국가에 대해서는 핵무기를 사용하지도 않고 핵무기를 사용한다고 위협하지도 않는다고 선언함으로써 장기적인 ‘소극적 안전보장’을 강화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에 따라 보고서는 미국과 동맹국에 대한 화학무기, 생물학무기 공격에 대해서는 재래식 무기로 대응한다고 밝혔다. 이러한 언급은 미국이 안보전략에서 핵무기의 역할을 감축한다는 상징이라고 선전되었다. 즉 미국이 핵무기를 사용하거나 위협할 수 있는 비상사태의 범위를 상당히 축소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보고서는 핵무기를 보유했거나 핵비확산 의무를 준수하지 않는 국가에 대해서는 그들이 재래식 무기나 생화학무기로 미국 또는 동맹국에 공격을 가한다면 핵무기로 대응할 수 있다고 명시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이 보유한 핵무기의 ‘유일한 목적’은 미국과 동맹국, 파트너에 대한 핵공격 억제라는 보편적 정책을 현재 시점에서는 채택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새로운 지침>도 위와 같은 입장을 재확인했다. 미국의 전략 핵전쟁 계획은 6개의 적대세력, 즉 러시아, 중국, 북한, 이란, 시리아, 마지막으로 9·11 유형의 대량살상무기 공격 시나리오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이중에 러시아, 중국과 북한은 핵무기 보유국으로 분류될 수 있다. 이란과 시리아는 핵무기를 보유하지 않았으나 핵비확산조약이 규정한 의무를 준수하지 않는 국가로 분류할 수 있다. 따라서 실질적으로 미국의 안보 전략에서 핵무기의 역할은 거의 변화가 없다. 냉전식 핵전쟁 계획의 재확인: 선제응징과 전략핵 대응발사 <새로운 지침>에 따르면 미국은 잠재적 적국에 대항하는 선제응징 능력(counterforce capabilities)을 유지하며, 결코 등가보복전략 또는 최소억지전략에 의존하지 않는다. 선제응징 전략은, 미국 전략사령부의 용어를 쓰자면 ‘예방적’, 또는 ‘공격적으로 반응적’(offensively reactive)이다. 이러한 미국 핵전쟁 계획의 재확인은 오바마 정부의 핵 정책이 프라하 연설에 밝힌 ‘냉전적 사고의 종식’과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지표다. 또한 선제응징은 전략핵 대응발사(launch under attack)로 인해 더욱 악화된다. 미국 정부의 <새로운 지침>은 냉전 이후로 기습 핵공격을 무력화할 필요성이 상당히 감소했기 때문에 국방부가 전략핵 대응발사의 역할을 축소하기 위한 새로운 옵션을 평가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하지만 동시에 여전히 미국은 전략핵 대응발사 능력을 상당 규모 보유해야 한다고 밝혔다. 예를 들어 러시아의 대륙간탄도미사일이 북극에 도달하는 데 약 30분밖에 들지 않기 때문에 전략핵 대응발사를 실행하려면 수백 개의 핵무기가 경계 태세에 있어야 하며 발사 명령을 접수한 후 수 분 내에 발사가 가능해야 한다. 선제응징이나 전략핵대응발사와 같은 핵전쟁 수행 계획은 냉전과 거의 유사한 전쟁준비태세와 기술적, 운용적 요소를 요구한다. 이는 주요 핵보유국의 핵경쟁을 유지시키며 핵무기의 역할과 규모를 감축하려는 모든 노력에 장애를 초래한다. 오바마 등장 후, 세계는 핵전쟁의 위험으로부터 더 안전해졌는가? 오바마 정부는 실전 배치된 핵무기의 수를 감축하자고 제안할 뿐, 그 이상 어떤 의미 있는 진전도 이뤄내지 못했다. 냉전식 사고방식을 대표하는 ‘선제응징’이나 ‘전략핵 대응발사’ 개념을 고수하며, 주요 적대국에 대한 핵공격 계획을 유지하고 있다. 나아가 핵무기 현대화 계획에 따라 실전에서 사용가능한 핵무기 개량화를 추구하고 있다. 이는 한반도에서 핵전쟁 가능성이라는 실제적 위험을 의미한다. 2013년 7월 31일 미국 공군 지구권타격사령부의 제임스 코왈스키 사령관은 서태평양 괌 기지에 B52 전략폭격기를 6대 이상 지속적으로 배치한다는 방침을 밝혔다. 그는 이 작전계획을 '폭격기의 지속적 배치'(Continuous Bomber Presence) 프로그램이라 명명하고 "6개월마다 새로운 B52 폭격기를 교대로 괌 기지에 순환배치하고 있으며 최소한 6대 이상의 폭격기를 유지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또한 2013년 3월에는 B2 스텔스 전략폭격기 2대가 한·미 연합 독수리연습에 참여해 폭격 훈련을 실시하기도 했다. 미국 미주리주 화이트맨 공군기지에서 3월 27일 출발한 폭격기들은 공중 급유를 받으며 10,500㎞를 비행했고 28일 정오 한반도 상공에 도착해 전북 군산 앞바다 직도 사격장에 훈련탄을 투하한 뒤 기지로 복귀했다. B52나 B2 폭격기는 양자 모두 (전술)핵무기를 탑재할 수 있다. 현재에도 진화하고 있는 미국의 핵전쟁 계획에서 한반도는 가장 중요한 시험무대가 되고 있다. <끝>
<9차 미군주둔비부담 협정 체결 첫 협상 대응 공동 기자회견문> SOFA 위반, 국민 부담 가중, 집행 통제 불능 미군주둔비부담(방위비분담) 특별협정(SMA) 폐지하라! 2014년부터 적용될 미군주둔비부담 특별협정 체결을 위한 한미 간 첫 협상이 7월 2일 워싱턴에서 열린다. 미국은 한국이 주한미군의 인건비를 제외한 주둔비용(비인적주둔비, NPSC)의 40~45%만 부담하여 불공평하다면서 50% 부담을 요구하고 있다. 미국의 이 같은 주장은 한국의 부담 중 미군주둔비부담금만 인정하고, 카투사·경찰지원 등의 직접비와 부동산 임대료 등의 간접지원은 모두 무시한 것이다. 미국은 1992년도 한국의 부담이 76%로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만족감을 표한 바 있다. 이후 우리의 미군주둔비부담금이 대폭 늘어나고 주한미군 숫자는 줄어들었는데도 미국은 2000년대부터 한국의 부담을 40% 초반대로 터무니없이 낮게 평가해왔다. 이는 일본의 부담을 줄곧 70% 중반대로 평가하는 것과도 대비된다. 이처럼 미국의 비인적주둔비 개념은 한마디로 ‘고무줄 잣대’이고, 특히 우리에게 불평등한 기준이다. 그런데 한미 국방부의 통계(2010년 기준)를 종합하면 우리는 이미 주한미군 비인적주둔비의 65.1%를 부담하고 있다. 여기에 저평가된 부동산 임대가치, 누락된 미군기지 이전비용과 미군기지 환경오염 치유비용 등을 합치면 우리는 이미 70%가 넘는 부담을 하고 있다. 협상 때마다 미군주둔비부담금이 모자라다면서 불공평한 기준을 들이대면서 증액을 강요해 온 미국은 우리 국민 혈세를 엉뚱한 데 흥청망청 쓰고 있다. 미국은 2004년 미2사단이전비용은 자신들이 부담하기로 협정(LPP)을 맺어놓고도 미군주둔비부담금 중 군사건설비를 빼돌려 미군기지이전비용에 쓰고 있다. 주한미군은 2008년까지 무려 1조1193억원의 미군주둔비부담금을 미군기지이전에 쓰기 위해 빼돌려 돈놀이에 탈세까지 자행했다. 미상원 군사위원회는 최근 보고서에서 한국에서의 군사 건설 프로젝트가 적절한 감독없이 추진되고 있다면서, 한국의 기여는 116억원이나 되는 평택 캠프 험프리에 주둔하는 미2사단을 위한 박물관이나 16억원에 달하는 용산미군기지를 위한 식당시설과 같은 의심스러운 프로젝트에 사용되는 “공돈”으로 간주된다고 밝히고 있다. 평택 미군기지에 50억원짜리 제빵·제과시설을 신축하려다가 역시 미 의회의 제지로 중단되기도 했다. 한미 간 협약에 따라 한국 업체가 맡게 돼있는 군수지원 업무를 미국회사 록히드 마틴의 자회사 PAE Korea에 맡겨 2007년부터 2011년까지 406억원의 부당이득을 안긴 사례도 있고, 미군주둔비부담금 중 인건비 11억원을 영리 목적의 미군기지 내 드래곤힐 호텔 종업원 인건비로 돌려쓰다가 적발된 사실이 ‘미국 국방부 감찰관 보고서’에서 확인된 바 있다. 협상 때마다 ‘미군철수’ 등을 내세우는 미국의 증액 강요에 못이겨, 1991∼2013년 사이에 우리 국방비가 4.6배 늘어나는 동안 미군주둔비부담금은 8.1배나 상승했다. 이 기간 동안 미군주둔비부담금이 국방비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4%에서 2.5%로 2배 가까이 늘어났다. 미국 요구대로 미군주둔비부담금이 또다시 증액된다면 우리는 2014년부터 매년 1조원 이상을 부담해야 한다. 미군주둔비부담금이 국방비 증액을 크게 압박하여 결국 국민 부담을 가중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제까지 부담한 미군주둔비부담금만 합쳐도 주한미군의 장비가치 약 10조원을 넘어선다. 이는 미군주둔비부담금을 한국군 전력강화에 투자했다면 주한미군이 보유한 것에 상응하는 장비를 우리가 모두 갖출 수 있었다는 뜻이다. 미군주둔비부담금이 자주적 방위력을 갉아먹고 한국 국방의 미국 의존도를 더욱 높이고 있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미군주둔비부담 협정은 한미SOFA 제5조에 따라 미국이 부담해야 할 주한미군 주둔 경비의 일부를 한국에 떠넘기는 불법적인 협정이다. 더욱이 주한미군의 성격이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따른 대북 방어에서 신속기동군으로 바뀌었다. 우리가 대북 방어 임무를 벗어난 주한미군을 위해 기지를 무상으로 임대해 줄 필요가 더 이상 없고, 주한미군 주둔 경비를 부담할 이유는 더더욱 없는 것이다. 따라서 미군주둔비부담 협정은 조속히 폐지되어 마땅하다. 미군주둔비부담 협정 자체가 한미SOFA 5조에 대한 예외적 특별조치협정이므로 새로운 협정을 맺지 않으면 미군주둔비부담금 제도는 자동적으로 종료된다. 이에 우리는 한미당국에 불법적이고 불평등한 미군주둔비부담 협정 폐지를 촉구한다. 주한미군 소속 한국인 노동자 고용보장 문제 등으로 협정을 당장 폐지하기 어렵다면 우선 가장 큰 문제가 되고 있는 군사건설비를 폐지하여 미군기지이전비용으로의 전용 등 불법성과 재정주권 침해를 근절해야 한다. 우리는 첫 협상에 나서는 우리 협상 관계자들이 우리의 주권과 국익을 지키기 위해 적극 임할 것을 촉구한다. 2013. 7. 2. 노동자연대다함께, 민주화를위한변호사모임미군문제연구위원회, 사회진보연대,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 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
한미정상회담 이후 한반도 정세 전망 5월에 개최된 한미정상회담은 한반도 위기가 비상하게 고조된 상황에서 60년을 맞은 한미동맹의 발전 방향을 논의하는 자리라는 점에서 귀추가 주목되었다. 한미 양국은 한미동맹의 본원적 기능이었던 군사동맹을 한층 강화하는 가운데 ‘지역적세계적 안보 및 경제발전과 불가분으로 연계되어 있는’ 한미관계를 ‘글로벌 파트너십’으로 발전시키기로 합의하였다. 한미정상회담 결과 채택된 <한미동맹 60주년 기념 공동선언>은 최근 한반도 위기를 계기로 미국의 ‘태평양으로의 선회’가 더욱 탄력을 받고 있고 한국이 이러한 미국의 지역적세계적 전략의 하위 파트너로 적극 기능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최근 한미동맹 대 북한의 대결 국면에서 양측의 작용반작용이 동아시아의 핵군비 경쟁을 비약적으로 상승시키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면서, 현 정세에서 한반도의 긴장을 감축하기 위한 사회운동을 ‘적극적 평화주의’라는 맥락에서 재조명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이 글은 오늘날 한반도 위기의 구조적 요인이자 역사적 기원으로서 세계적지역적 차원의 미국 헤게모니와 한반도 차원의 냉전적 구도의 존속에 대한 분석으로 시작한다. 이어서 한반도 위기의 정세적 요인이자 현실적 모순으로서 ▲세계 경제위기에 따른 미국의 아시아태평양 전략의 변화와 미일동맹한미동맹의 호전적 재편 ▲오바마 정부의 ‘전략적 인내’와 북한의 핵미사일 역량 제고 ▲한미연합전력 대 북한의 군사적 대결과 박근혜 정부의 한미동맹 강화 과정을 차례로 분석한다. 끝으로 한미정상회담 이후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를 전망하면서 평화주의와 국제주의의 관점에서 사회운동의 과제를 논의한다. 탈냉전 이후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과 ‘북핵 위기’ 탈냉전 이후 (아버지) 부시 정부는 레이건 정부의 ‘2차 냉전’이나 ‘두 개의 중국’ 노선과 단절하며 새로운 동아시아 전략 수립에 착수했다. 이후 탈냉전 시대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을 공식화한 것은 클린턴 정부로, 이들은 1970년대 말부터 지속적인 개혁개방 정책을 추진해온 중국과의 ‘교류’(engagement)를 시도한다. 2001년 ‘테러와의 전쟁’을 개시한 (아들) 부시 정부 1기에는 신보수주의적 국방부를 중심으로 중국위협론이 부상하면서 ‘동아시아 중시정책으로의 전환’과 ‘동아시아 주둔 미군 전력의 재조정’이라는 두 가지 목표가 동시에 추진된다. 반면 부시 정부 2기에는 신자유주의적 국무부가 중심이 되어 주요2개국(G2) 구상에 따라 2005년 미중전략대화를 시작하고 2006년에는 전략경제대화를 시작한다. 1990년대 이후 역대 남한 정부의 대북정책은 이상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에 정확히 조응하는 것이다. 노태우 정부는 (아버지) 부시 정부의 동아시아 전략에 상응하여 1990년과 1992년에 각각 소련, 중국과 국교를 체결하고 1991년 <남북 사이의 화해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와 <한반도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을 채택했다.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이나 노무현 정부의 평화번영정책도 각각 클린턴 정부와 (아들) 부시 정부의 동아시아 전략과 연관된다.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은 한편으로는 남한 자본이 주도하는 북한 사회의 경제적 재편을 추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한미 군사동맹을 강화함으로써 남북관계에 새로운 형태의 긴장을 형성하는 모순을 내포했다. 또 동북아 금융물류 중심국가 구상과 연계된 노무현 정부의 평화번영정책은 부시 정부의 대테러 전쟁과 ‘북핵 위기’ 정세에서 한미동맹 현대화와 한미자유무역협정 체결로 귀결되었다. 탈냉전 이후 북한은 한소 국교수립, 한중 국교수립으로 국제적 고립이 심화되는 와중에 경제위기와 함께 에너지식량위기가 발생하면서 경제가 사실상 붕괴했다. 그리고 1994년에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고 김정일 위원장이 권력을 승계하면서 ‘선군정치’가 출현하게 된다. 선군정치는 인민군이 ‘주체혁명’의 방위자에서 그것을 완성하는 주력군으로 격상된다는 의미다. 1990년대 ‘고난의 행군’을 거쳐 2000년대 들어 선군정치가 본격적인 핵무장으로 발전했다. 한국전쟁 이후 불안정한 정전체제 하에서 미국이 대북 선제 핵공격 옵션을 계속 유지하는 상황에서 ▲탈냉전 이후 중소 핵우산의 공백 ▲주한미군의 핵우산과 남한의 재래식 전력의 압도적 우위 ▲‘수직적 확산’을 유지한 채 ‘수평적 확산’만 규제하려는 핵비확산조약(NPT) 체계의 이중 잣대 ▲장기간에 걸친 대북 경제 봉쇄제재의 파괴적 효과 ▲첨단 재래식 무기 대비 핵무기 비용의 상대적 이점 등이 북한의 핵무장을 유발한 요인이다. 1993-94년 북한의 NPT 탈퇴 선언과 폐연료봉 추출,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대북 제재안 결의로 빚어진 1차 ‘북핵’ 위기 국면은 1994년 ‘제네바 합의’로 일단락되었다(미국은 북한의 핵 프로그램 동결을 대가로 경수형 원자로 2기, 연간 50만 톤의 중유를 지원하기로 약속하였다). 그러나 미국이 제네바 합의를 이행하지 않자 북한은 1998년 3단계 로켓 발사 실험으로 대응하였고, 이 국면은 2000년 ‘조미 공동 코뮤니케’ 체결로 봉합된다(미국이 북한에 10억 달러 상당의 식량 원조를 약속하는 대신 북한은 미사일기술통제체제(MTCR) 가입을 검토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부시 정부 들어 미국은 일본을 향해 배치된 100여 기의 북한 노동미사일을 문제 삼으며 또 다시 기존 합의를 파기했다. 2002년 부시 대통령이 연두교서에서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미 국무부가 북한의 고농축우라늄 프로그램 여부를 추궁하면서 2차 ‘북핵 위기’ 국면이 시작되었다. 이에 북한은 ‘인정도 부정도 않는 전략’(NCND)으로 일관하면서, 미국의 안전 보장과 북한의 핵미사일 프로그램을 일괄 타결할 것을 제안했다. 미국의 제안 거부와 그에 뒤이은 북한의 영변 핵시설 재가동 선언, IAEA 사찰단 추방, NPT 탈퇴 (재)선언으로 위기가 고조되다가 이 국면은 2003년 8월 6자회담 개최로 일단락되었다. 6자회담을 통해 2005년 919 공동선언, 2007년 213합의, 2007년 103 합의가 도출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6자회담이라는 다자간 협상 틀은 기본적으로 북미협상이라는 일대일 협상에서 미국이 져야 할 책임을 여러 나라로 분산하는 구조였다. 더구나 미국은 6자회담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북한을 ‘정권교체가 필요한 깡패국가’로 규정하였고, 북한의 인권상황 개선을 대북 안전보장과 관계 정상화의 조건으로 제시했다. 부시 정부 말기 북한은 2008년 영변 핵시설의 냉각탑을 폭파하는 장면을 전 세계에 공개하고, 이에 미국은 북한을 테러지원국에서 해제하는 등의 조치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또다시 북한의 플루토늄 추출량 의혹이 제기되면서 같은 해 12월 6자회담은 결렬되기에 이르렀고, 지금까지 재개되지 않고 있다. 위기와 대화가 끊임없이 교착되는 상황에서 북한은 2005년 2월 핵보유 선언, 2006년 1차 핵미사일 실험, 2009년 2차 핵미사일 실험, 2012-13년 3차 핵미사일 실험으로 핵미사일 역량을 단계적으로 제고했다. 이 과정에서 미국 내에는 ‘북한과의 협상이 핵 공갈과 그에 따른 갈취의 악순환만 조성했다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이런 인식은 오마바 정부의 ‘은근한 무시’와 ‘전략적 인내’ 정책기조에 반영되는데, 이는 북한이 비핵화 프로세스를 일정 수준 이상으로 진행시키기 전에는 어떠한 인센티브도 제공할 수 없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오바마 정부의 대외전략과 대북정책 2007-2009년 금융위기 이후 장기 심화하고 있는 미국의 경제위기는 한반도 정세에서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 금융위기 이후 미국은 연준의 통화정책(제로금리수량완화오퍼레이션트위스트)과 재무부의 재정정책(부실자산구제계획적자재정정책)과 같은 비상위급대책을 실시하였다. 이에 힘입어 미국은 ‘더블 딥’을 예방하는 데 얼마간 성공하지만, 일련의 정책은 금융위기로 인한 민간의 부채를 정부의 부채로 이전한 것으로, 이는 중장기적으로 재정위기와 달러위기의 가능성을 함축한다. 유럽연합의 재정위기은행위기를 논외로 하더라도 미국 경제는 추가적인 적자재정정책 실행의 곤란과 주택시장의 부진이라는 두 가지 역풍에 직면해 있다. 비상위급대책에 의해서도 경기가 회복되지 않음으로 인해 불가피하게 차선책이 동원되고 있는데, 이를 상징하는 것이 바로 2011년 오바마 정부가 선언한 ‘태평양으로의 선회’다. 오바마 정부의 아시아태평양 중시 정책은 미중 관계(G2)를 강조하면서도 중국과의 잠재적 갈등을 염두에 두고 한미일 동맹(G3)을 강화하는 이중 노선으로 구성된다. 이중에서도 최근 부각되는 것이 바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모형으로 삼아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을 아시아태평양자유무역협정(FTAAP)으로 발전시키려는 구상이다. 미국은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중국의 경제적 부상으로 인한 세력균형의 교란을 재조정하기 위해 동아시아에 대한 재관여재균형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중국북한이란 등이 ‘세계적 공유지’(global commons)인 황해남중국해인도양페르시아만에서 미군의 작전을 방해한다(Anti-Access/Areal Denial, A2/AD)는 인식에 따라, 미국 국방부는 육군공군 중심의 ‘지상공중전’에서 해군공군 중심의 ‘합동작전접근개념’, 즉 ‘해상공중전’ 개념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북한의 핵무장은 미국에게 좋은 빌미가 되고 있는데, 미국은 역내 안정과 동맹국에 대한 안전 보장을 이유로 미일동맹과 한미동맹의 재편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이는 중국과의 잠재적 갈등을 심화하고 북한의 핵무장을 또다시 심화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한편, 2010년 제출된 미국의 <핵태세 검토보고서>(NPR)는 핵비확산 의무를 준수하지 않는 국가들을 핵무기로 선제공격할 수 있다는 옵션을 유지했고, ‘새로운 전략무기감축협정’(New START)으로 미국의 핵전력이 축소될 수 있으니 ‘3원 전략 핵전력’(전략 폭격기, 대륙간 탄도 미사일, 잠수함 발사 탄도미사일)과 미사일 방어망(MD), 재래식 장거리 타격 능력을 유지해 전략적 억지력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오바마 정부의 선전대로 ‘핵 없는 세계’를 위한 변화가 아니라 북한이나 이란 같은 비확산 체제의 이탈 세력을 관리하여 핵독점 체제를 유지하려는 명분일 따름이었다. 2009년 북한이 2차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를 감행하자, 미국의 한반도 전문가들은 초당파적으로 오바마 정부의 대북정책을 총괄 재검토하였다. 이 보고서는 오바마 정부의 대북정책으로 ▲북한의 비핵화를 달성하기 위해 더 이상 사용가능한 마땅한 옵션이 없어서 북한의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하는 ‘명시적 묵인’(explicit acquiescence) ▲북한을 비핵화하는 데에는 장시간이 소요될 것이므로 협상과 압박의 수단을 병용하여 북한의 수직적수평적 확산을 방지하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설정하는 ‘관리와 봉쇄’(manage and contain) ▲제재와 인센티브를 병용해서 북한으로 하여금 핵 프로그램을 포기하고 비핵화의 길로 복귀하도록 시종일관 압박하는 ‘원상복귀’(rollback) ▲경제적 제재를 확대하고 해상 봉쇄를 강화하는 등 북한 지도부를 전복하기 위한 활동을 적극 펼치는 ‘정권교체’(regime change) 등 네 가지 옵션을 검토한다. 첫 번째 옵션인 ‘인정’ 정책은 관계 개선과 비핵화를 연계하지 않는 접근법이다. 이는 긴장 완화에는 도움이 되지만 미국의 안보 공약에 대한 역내 동맹국들의 신뢰를 약화시킬 것이다. 뿐만 아니라 북한의 핵보유를 인정하는 것은 미국 힘의 약화와 NPT 체제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핵 보유를 추구하는 여타 국가들에 대한 협상력을 침식할 것이다. 따라서 미국 정부는 이 옵션을 채택할 수 없을 것이다. 반대로 네 번째 옵션인 ‘정권교체’ 접근법은 일체의 대화와 협상을 북한이 핵 위기를 고의로 지연시키기 위한 구실로 간주한다. 정권교체 시나리오는 남북통일이나 또는 개혁성향의 북한 지도부의 수립 등과 같은 정권교체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불안정성이라는 대가를 감내하는 것을 함의한다. 그러나 중국이 지역 평화와 안정을 비핵화보다 우선순위에 두고 있고 남한도 갑작스러운 정권교체 시 부담해야 할 비용을 우려한다는 점이 이 옵션의 장애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수평적수직적 확산을 지속하면서 비핵화의 길로 되돌아오지 않을 경우를 대비해서, 오바마 정부는 비핵화를 계속해서 압박하는 공식 방침에 병행해서 이 옵션을 적극 고려해야 한다고 보고서는 권고한다. 두 번째 옵션인 ‘관리와 봉쇄’ 접근법은 오바마 정부 초기의 대북정책과 가장 유사한데, 이는 북한의 수직적수평적 확산 방지를 최우선적이고 직접적인 목표로 삼으면서, 궁극적으로 비핵화를 실현하기 위한 환경을 조성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관리와 봉쇄는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현상을 유지하는 방책이므로 그 자체만으로는 불충분하다. 관리와 봉쇄 접근법은 또한 미국이 오로지 반확산에만 관심이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어 결과적으로 비핵화보다는 북핵을 인정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따라서 관리와 봉쇄는 비핵화 노력과 결합되어야 한다. 세 번째 옵션인 ‘원상복귀’는 미국이 역내 국가들과의 안보 협력을 강화함으로써 북한의 핵 포기를 강제한다는 구상이다. 북한이 비핵화를 약속할 경우 2005년 ‘9.19 공동 성명’에 따른 인센티브를 제공받게 될 것인 반면 그에 응하지 않을 경우 북한은 제재를 받게 될 것이다. 보고서는 북한을 비핵화 프로세스로 복귀하게 하기 위해서는 중국의 협력을 이끌어내는 것이 결정적이라고 본다. 중국의 경우 유엔 차원의 대북 제재 결의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는데, 이는 북한의 핵보유국 지위를 사실상 인정하는 것으로 흐를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이 보고서는 옵션 2의 잠정적 편익을 인정하면서도 옵션 3을 중점적으로 채택해야 한다고 오바마 정부에 권고하면서 정책의 우선순위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첫째, 북한의 핵무기 프로그램이 시리아, 리비아 등으로 수출되거나 이란과 연계되는 것은 미국 국가안보와 지역의 안정에 직접적 위협이 되므로 수평적 확산을 금지해야 한다. 둘째, 북한의 추가적인 핵 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와 같은 수직적 확산을 중단시켜야 한다. 셋째, 북한이 핵무기 보유국 지위를 인정받으려는 시도는 세계 NPT 체제에 중대한 도전이 되므로 북한의 비핵화를 추구해야 한다. 넷째, 난민의 발생, 핵무기핵물질에 대한 정권의 통제력 상실, 내부 혼란의 장기화와 같은 북한 우발사태에 대비한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다섯째, 북한의 고립이 현 지도부의 지속에 도움이 되는 반면 노출은 궁극적으로 정권의 변화를 유도할 수 있으므로 접촉(engagement)을 확대해야 한다. 여섯째, 인도적 지원과 인권 개선 등 북한 인민들의 상태를 개선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북한의 3차 핵실험과 미국의 대응 이런 정책적 옵션 내에서 오바마 정부 1기의 대북정책은 실제로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요소로 구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첫째, 6자회담 가능성을 열어두지만 북한이 비핵화를 위한 ‘비가역적 조치’를 취한다는 보장이 없는 한 거부한다. 둘째, 6자회담이나 북미 대화에 앞서 비핵화와 남북관계 개선에 관한 남북대화가 선행되어야 한다. 셋째, 중국이 북한에 대한 전략적 평가를 변경하도록 노력한다. 넷째, 합동군사훈련과 한미일 삼각공조를 통한 대북 압박과 제재를 강화함으로써 북한의 도발에 대응한다. 이러한 미국의 ‘은근한 무시’와 ‘전략적 인내’에 따라 대화와 협상이 교착상태에 처하고 한미일의 군사적 압박과 국제적 제재가 한층 강화되자, 북한은 오바마 정부 2기 출범 직후인 작년 12월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 1주기를 명분으로 로켓 실험을 강행했다. 이번 로켓 실험 성공은 이미 확보한 핵무기로 미국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의 개발에 도전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이어서 올해 2월 진행된 3차 핵실험은 핵무기를 미사일에 장착할 수 있는 핵탄두의 소형화개량화를 목표로 한 실험이었다. 북한의 장거리 로켓 발사 성공과 3차 핵실험이 미국에 직접적인 위협을 가하고 있다는 인식에 따라 미국에서는 북한의 핵미사일 역량에 대한 기술적 평가와 더불어 ‘전략적 인내’에 대한 정책적 재검토가 이루어지고 있다. 북한의 3차 핵실험 직전에 행한 집권 2기 첫 국정연설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북한 핵실험이 지역안정을 해치는 것은 물론 미국에 대한 직접적 위협”이라고 강조했다. 이러한 인식은 최근 미국 국방부가 보고서에 공식 반영되어 있는데, 여기서 미 국방부는 북한을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가장 중요한 안보적 도전’이라고 평가한다. 북한이 남한, 일본, 태평양 전구(theater)에 도달할 수 있는 이동식 탄도미사일 역량을 확보했고 핵기술 개량과 함께 미국 본토에 도달할 수 있는 ICBM 개발을 지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보고서는 북한이 미국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미사일 능력을 확보하는 것은 제한된 자원 투입 규모와 실험 빈도에 달린 문제라고 지적하면서도 미사일을 확보할 것으로 예상되는 시점은 따로 언급하지 않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비슷한 시기에 제출된 미 의회조사국 보고서는 ‘북한이 핵탄두를 소형화했다거나 ICBM이 대기권에 재진입할 때 초고열과 압력에 견디는 핵심 기술을 확보했다는 명확한 증거는 없다’고 평가하고 있다. 또 보고서는 정보당국 간 이견을 보인 북한의 핵탄두 소형화 수준에 대한 평가도 다루지 않고 있다(4월 미 국방정보국(DIA)은 북한이 핵탄두를 탄도미사일에 장착할 수 있다고 평가했으나 국가정보국(DNI)은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이와 관련하여 비슷한 시기에 제출된 다른 기관의 보고서는 북한이 아직 높은 수준의 핵폭탄 위력을 확보하지 못했으며, 논란의 여지가 있긴 하지만 북한이 핵탄두를 충분히 소형화경량화하지는 못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요컨대, 미국 군사전문가들은 현재 북한의 핵미사일 역량이 미국에 대해 ‘공포의 균형’을 이룰 수 있는 ‘최소억제’ 수준의 핵전력을 구축하지는 못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지만, 현재 소형화경량화된 핵탄두를 ICBM에 탑재해 미 본토를 타격하겠다는 목표를 추진하고 있다는 점에서 북한을 실질적인 위협으로 인식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한국국방연구원의 한 분석은, 북한이 남한에 대해서는 남한의 재래식 공격을 제2격하여 무력화할 수 있는 충분한 핵무기 수량과 위력을 확보한 상태라고 평가한다. 이런 기술적 평가를 바탕으로 미국은 ‘전략적 인내’ 정책을 부분적으로 재검토하고 있다. 비판의 요지는 북한의 비핵화보다는 핵확산 활동을 봉쇄하는 데 주안점을 둠으로써 결과적으로 북한이 상황을 통제하도록 허용한 것이 오바마 정부 1기 대북정책의 결점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오바마 정부와 이명박 정부가 유화 시기에는 접촉을, 긴장 시기에는 압박을 병행하며 북한의 변화를 ‘수동적으로 공격’하는 동안 북한은 지속적으로 핵미사일 역량을 키웠고 중국으로부터의 경제적 지원도 확대되어 협상의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따라서 오바마 정부 2기와 박근혜 정부의 대북정책은 이러한 결함을 보완하여 일관되게 북한의 비핵화를 압박하는 정책적 옵션을 구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3차 핵실험 이후 발표된 오바마 정부의 일련의 입장은 ‘전략적 인내’의 기본틀을 유지하면서도 세부적인 정책의 효과를 높이는 추가적 조치를 적극 구체화하고 있다. 미 정부 당국자들의 발언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미국은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지 않으며 북한의 나쁜 행동에 대해 보상하지 않는다 ▲한반도의 안정화와 비핵화를 위해 한미일의 공조가 필수적이며 미국은 동맹국에 대한 방위 공약을 재확인한다 ▲미국과 중국 간에 북한 문제에 대한 불신을 감소시킴으로써 중국이 북한에 대해 실질적인 압력을 행사하여 북한의 행동을 순치하고 비핵화 프로세스에 복귀하도록 견인한다 ▲미국은 북한이 비핵화 프로세스로 복귀할 경우 협상에 임하고 협상에서 합의한 약속을 이행한다. 이에 따르면 향후 미국의 대북정책은 단중기적으로는 국제적 제재 강화, 중국과의 공조 강화 등 북한의 태도 변화를 강제하는 다양한 외교적 노력을 확대하고 한미일의 군사적 압박을 강화함으로써 상황이 악화하지 않도록 ‘관리’할 것으로 예상된다. 중장기적으로는 비핵화를 목표로 설정하면서 북한이 계속해서 도발을 지속한다면 압박을 더욱 강화하면서 북한의 위협과 도전을 근본적으로 제거하기 위한 정책적 옵션으로서 정권교체 시나리오를 더욱 구체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3-4월 한미동맹과 북한의 군사적 대결 북한의 3차 핵실험 이후 미국과 북한의 대결 구도가 첨예해진 가운데 3월 유엔 안보리는 대북 제재 결의안을 채택하여 한층 강도 높은 대북 제재에 돌입하였다. 이와 함께 한미연합전력은 3-4월 확장억지 성격을 지닌 대북 무력시위를 본격화하였다. 한미연합훈련에서 전략폭격기 B-52, 스텔스폭격기 B-2, 핵잠수함 샤이앤이 동원된 것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듯이 미국은 북에 대한 핵위협을 실제화했다. 또한 한미 양국은 북한의 국지도발시 도발원점과 지원세력, 지휘세력까지 타격할 수 있는 ‘한미국지도발대응계획’도 발효했다. 북한도 3월 들어 대미 공세 수위를 한층 높였다. 최고사령부의 ‘정전협정 백지화’ 선언(5일), 외무성의 ‘핵 선제 타격권 행사’ 발언(7일), 조평통의 ‘남북불가침합의 무효’ 선언(8일), 1호 전투근무태세 진입 선언(27일, “실제적인 군사적 행동은 강력한 핵 선제 타격이 포함된다”), ‘남북 관계 전시상황 돌입’ 선언(30일)이 차례로 이어지며 한반도의 위기감은 날로 고조되었다. 또한 31일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는 ‘경제건설과 핵무력건설 병진 노선’을 채택하고 4월 1일 최고인민회의에서 핵보유국과 인공위성 제작발사국임을 법령으로 채택했다(‘자위적핵보유국의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할 데 대하여’, ‘우주개발법’). 그 후속조치로 2일에는 영변 핵시설 용도의 조절변경을 언급했는데, 이는 기존 핵시설을 이용해 핵무기 개발에 필요한 핵물질 확보에 적극 나서겠다고 공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2-4월 한반도 위기 국면에서 전개된 양측의 작용반작용은 동아시아의 핵군비 경쟁을 비약적으로 상승시켰다. 우선 이번 사태를 계기로 미국이 경제위기에 대응하여 사활적 과제로 추진 중인 ‘태평양으로의 선회’ 전략은 더욱 탄력을 받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단적으로, 미국은 그동안 막대한 비용과 노력을 투자해온 MD 체제의 당위성을 이번 계기를 통해 폭넓게 인정받을 수 있었다. 게다가 한반도 주변에 전략 무기 외에도 F-22 스텔스전폭기, SBX 레이더, 고고도미사일방어망(THAAD)과 같은 최첨단 무기를 동원하는 파격적 군사 조치들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전격 실행하였다. 이와 함께 미국의 아시아태평양 전략의 주축을 이루는 미일동맹과 한미동맹이 더욱 공고해지고 있다. 비핵보유국 중에서 유일하게 핵재처리 시설을 공인받고 있으며 핵물질과 핵기술 두 측면에서 언제든 핵보유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 일본은 북한의 핵미사일을 빌미로 핵무장화와 ‘보통국가화’를 계속 시도했다(2011년 무기수출금지 3원칙 수정, 2012년 우주관련법 개정). 그리고 아베 정부는 올해 2월 ‘긴밀한 미일동맹이 완전히 부활했다’고 선언하고 3월 TPP 협상 참가를 결정하고 4월 주일미군 재편 협정을 마무리했다. 박근혜 정부도 북핵 억지와 불용이라는 원칙 하에 각종 외교적 수단을 활용하여 북한 비핵화를 추진하는 한편 한미 군사동맹 강화를 통해 핵억지력을 제고하고 있다. 한술 더 떠 보수세력들은 ‘한미동맹을 강화하여 북한의 핵위협에 대해 핵우산 등 충분한 억지력을 확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독자적 대북 억제력을 확보하기 위해 군사전략을 획기적으로 전환하는 방안도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거나 ‘핵으로 무장한 북한군에 대적하기 위해서는 재래전 중심의 군비경쟁논리나 억제 방어체계는 분명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면서 남한의 독자적 핵무장화나 미국의 전술핵 재배치 주장을 제기하기도 한다. 물론 정부는, 전자의 경우 ‘국제법상 불법이며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세계평화 차원에서 부도덕하며 한미동맹에 치명적인 손상을 초래할 것’이라는 점에서, 후자의 경우 ‘동북아에서 미중 간 새로운 갈등요소로 등장할 것이므로 미국이 이를 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에서 공식적으로 이러한 정책을 부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수세력이 이러한 주장을 끊임없이 제기하는 이유는, 이를 현실적인 대안으로 간주해서라기보다는 이에 대한 사회적 여론을 대미 협상의 지렛대로 삼아 미국 측의 공약과 양해를 얻어내는 기제로 활용하기 위함이다. 가령, 한미원자력협정 개정을 위한 협상에서 남한이 동맹국과의 조정·합의를 거쳐 핵연료 생산 및 재처리 공정 사이클을 완성할 수 있게 된다면 향후 유연하고 다양한 핵 억제 전략을 구사할 토대를 구축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미동맹, 글로벌 파트너십으로의 진화 이런 상황에서 5월에 개최된 한미정상회담은 북한과의 대화나 협상보다는 제재와 한미동맹의 군사적 압박이 북한을 변화시키는 더 현실적인 수단이라는 데 인식을 함께 하였다. <한미동맹 60주년 공동선언>은 ‘북한의 핵 및 탄도 미사일 프로그램 그리고 반복되는 도발행위가 한반도는 물론 동북아의 평화와 안정에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다는 데 깊은 우려’를 표하였다. 오바마 대통령은 “북한이 위기를 만들고 양보를 얻어내는 때는 지났다”고 말함으로써 ‘은근한 무시’와 ‘전략적 인내’로 표현된 기존 정책기조를 변경할 뜻이 없음을 확인하였다. 박근혜 대통령도 “국제사회가 북한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 한 목소리로 단호하고 분명한 메시지를 보내야 한다”며 보조를 맞췄다. 대북 정책 공조를 뒷받침하는 군사동맹 강화 방안도 폭넓게 논의되었다. 공동선언에서 미국은 확장 억지와 재래식 및 핵전력을 포함하는 모든 범주의 군사적 능력 사용을 포함한 대한(對韓) 방위 공약을 재확인하였다. 특히 이번 공동선언은 ‘북한의 미사일 위협에 대한 정보·감시·정찰 체계 연동을 포함한 포괄적이고 상호 운용 가능한 연합방위력을 지속적으로 강화해 나갈 것’이라며 한국의 미사일방어망(MD) 체계 편입을 암시하고 있다. 향후 일본과 남한의 MD 참여와 함께 이와 연관된 한일정보협정 체결, 한일 양국의 재래식 전력 증강(첨단무기 도입) 등이 쟁점으로 부상할 가능성이 크다. 또한 양국은 한미동맹을 ‘글로벌 파트너십’으로 한 단계 발전시키는 데에도 합의했다. 공동선언은 이러한 동맹 발전의 중요한 전기로서 한미자유무역협정(FTA)을 꼽고 있다. 한미 FTA가 한미 양국 간 무역과 투자를 확대하여 양국 경제에 이익이 되는 것은 물론, 군사동맹과 함께 미국의 아시아태평양 전략의 핵심축(linchpin)을 이룬다는 것이다. 이번 정상회담에서 TPP 참여 문제가 직접적으로 거론되지는 않았지만, 공동선언에서 언급된 것처럼 한미 FTA에 대한 ‘긍정적’ 평가를 바탕으로 조만간 미국이 박근혜 정부에게 TPP 협상 참여를 종용할 가능성이 크다. 한미동맹은 2003년 노무현-부시의 ‘동맹 현대화’와 2009년 이명박-오바마의 ‘동맹 공동비전’을 거치며, 동맹의 범위를 한반도에서 지역과 세계로 확대하고 동맹의 이슈를 군사안보에서 경제문화 등으로 확장하는 포괄적 전략동맹으로 진화해왔다. 가령, 이라크전을 비롯한 미국의 대테러전쟁에 한국이 파병으로 호응하고, 해외주둔미군재배치전략(GPR)에 따라 주한미군기지를 재편하고, 한미 FTA를 체결발효함으로써 미국 주도의 세계화·지역화 전략에 편입하고, 핵안보정상회의와 같은 미국의 핵독점체제 유지를 위한 거버넌스를 지지하는 것이 단적인 사례들이다. 이번에 합의된 ‘글로벌 파트너십’ 개념은 기후변화, 에너지 안보, 인권, 인도적 지원, 개발 지원, 테러리즘, 원자력 안전, 사이버 안보 등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적 통치성(global governance)에 한국이 하위 파트너로서 더욱 적극적으로 기능하는 것을 의미한다. 정부는 한미정상회담에서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에 대한 오바마 대통령의 지지를 이끌어냈다’고 자평한다. 신뢰프로세스는 북한이 핵을 포기하고 도발을 중단하면 대북 지원과 경제공동체 건설 등을 추진하고 북한이 도발하면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는 대화와 억지가 배합된 정책으로서, 이는 오바마 정부의 ‘투 트랙’에 입각한 ‘전략적 인내’와 공조 가능하다는 것이 정부의 설명이다. 또 정부는 한미 정상 간에 신뢰프로세스에 대해 합의점을 찾았다는 것을 두고 향후 대북정책에서 남북관계 개선에 상대적으로 방점을 찍고 있는 한국이 한미 대북공조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공동선언은 2009년 이명박-오바마의 <한미동맹을 위한 공동비전>에 기초하여 ‘비핵화, 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 원칙에 입각한 평화 통일’을 재론하고 있을 뿐이다. 이는 박근혜 정부의 신뢰프로세스가 기존 노선과 실질적으로 큰 차이가 없을 것임을 시사한다. 최근 케리 미 국무장관이 상원 외교위 청문회에서 ‘현재 상태에서 신뢰프로세스를 실현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표명한 것에서도 드러나듯이, 오바마 대통령의 ‘지지’란 외교적 수사로 보는 것이 옳다. 한국이 대북정책을 주도한다는 것도 실은 북미대화에 앞서 남북관계 개선이 필요하다는 그간의 미국의 입장이 반영된 것이다. 게다가 미국이 북핵 제거 및 확산 방지에 초점을 두고 있는 반면 박근혜 정부의 신뢰프로세스가 남북관계 개선에 방점을 찍고 있다는 해석도 설득력이 떨어진다. 4월의 개성공단 잠정 폐쇄 조치나 5월 방미 이후 박근혜 대통령의 연이은 강경 발언 등 일련의 상황을 고려할 때, 오히려 박근혜 정부 스스로가 신뢰프로세스를 선언 이상으로 사고하지 않는다는 해석이 설득력 있게 느껴진다. 이상의 논의를 종합할 때, 최근 비상하게 고조된 한반도 긴장 국면이 대화 국면으로 전환되고 여기서 의미있는 합의가 도출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설령 단기적으로 대화 국면이 형성된다 하더라도 미국과 북한은 지금까지 이뤄진 대화 또는 협상을 상대방이 진정한 의도를 숨기고 자신에게 유리한 여건을 조성하기 위한 기만술로 보고 있기 때문에 이 과정은 오히려 갈등을 증폭시킬 위험을 항상 내포하고 있다. 장기적으로 볼 때, 한미일 삼각공조가 북핵을 빌미로 점점 더 중국을 포위하는 형세를 조성하여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군사적 긴장은 점증하고 있다. 한미정상회담 이후 사회운동의 과제 최근의 군사적 대결은 한반도에서 재래식 군사적 충돌은 물론 핵전쟁의 가능성이 엄연히 실존함을 보여주었다. 오마바 정부는 동아시아 주둔미군의 전쟁태세를 한층 더 강화하며 동맹국에 대한 확장억지 정책을 재확인하고 MD 체제를 추진하고 있다. 일본과 남한은 북한 핵을 빌미로 미국과의 동맹을 포괄적으로 강화하면서 군비를 증강하고 있다. 북한은 핵보유국 지위 인정과 ‘비핵화회담’이 아닌 ‘군축회담’을 주장하며 핵미사일 역량을 제고하고 있다. 현재 상황은 한반도와 동아시아에서 핵재래식 군비경쟁을 지양하고 종국적으로 비핵지대를 구축하려는 평화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회운동은 대화나 협상을 통해 사태의 원만한 해결을 촉구하는 것 외에 한반도에서 핵재래식 군비경쟁과 전쟁 위기를 감축시키기 위한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지난 2-3개월 간 한반도 위기 국면에서 사회운동의 대응을 간략히 평가하면서 향후 과제를 점검해보자. 전쟁반대평화실현국민행동으로 결집한 통합진보당, 한국진보연대 등 범 민족해방 계열은 ‘관련국의 군사적 행동 중단,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대화 시작’을 요지로 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북미 군사대결 과정에서 ‘일촉즉발의 위기’가 발생할 수 있으므로 일단 북에 대해 압도적인 힘의 우위를 점하고 있는 한미합동군사훈련을 비판하는 데 주력해야 한다는 이들의 주장은 일견 타당하다. 그러나 이 주장의 밑바탕에 깔린 오류와 맹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은 북한의 핵미사일 능력 제고가 장기간에 걸친 북미 간 대결 구도에서 협상의 지렛대로 작용하여 결과적으로 평화협정 체결로 이어질 가능성을 기대한다. 이러한 태도는 미국의 대북 적대정책과 군사적 압박이 지속되는 한 협상수단 또는 자위수단으로서 북한의 핵보유를 지지해야 한다는 관념, 또는 최소한 주요한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관념을 내포한다. 우선 현실적인 측면에서 볼 때, 미국의 대북전략이 교류를 통해 북한의 변화를 유도한다는 입장에서 제재를 통해 봉쇄를 유지한다는 입장으로 수렴한 상황에서, 현재와 같은 북한의 맞대응 전략은 미국의 추가적인 강압적군사적 대응 가능성을 높이는 반면 협상을 통한 조정의 가능성을 높이지는 않을 것이다. ‘사실상의’ 핵 능력을 보유한 것으로 평가되는 북한에 대한 제재 완화는 미국이 추구하는 핵비확산체제의 와해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가능성이 크지 않다. 북한의 ‘벼랑끝 전술’은 역으로 미국의 핵위협의 정당성을 사후적으로 강화하는 데 기여할 뿐만 아니라 일본과 남한에게 핵군비 증강의 빌미를 제공하여 향후 계속해서 북한 스스로를 감당할 수 없는 딜레마로 몰아넣을 것이다. 부수적으로는 주변국의 보수적호전적 이데올로기를 조장하여 진보적 평화운동의 입지를 축소시키는 의도치 않은 효과도 낳을 수 있다. 다음으로 이념적인 측면에서 볼 때, 북한의 핵개발을 사실상 지지하거나 또는 북한의 핵개발이 주요한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모순적이고 모호한 입장은 반핵평화운동에 대한 대중의 불신을 조장한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2006년 1차 핵미사일 실험 이후 최근까지 전개된 일련의 상황을 종합해볼 때, 북한의 핵무장을 단순한 협상용이라거나 자위용으로 간주할 수는 없다. 2012년 새로 개정된 헌법 전문에 ‘핵보유국’임을 명기한 것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듯이, 북한은 한반도 비핵화의 길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다. 미국과의 일괄타결이냐 전면전이냐 양 극단 사이의 선택을 촉구하는 북한의 핵대결 논리는 처음부터 한반도와 주변국 민중을 볼모로 한 ‘거대한 도박’이었고 그 판돈은 점점 커지고 있다. 그에 따라 남한에서는 북핵 억지력의 현실적 대안으로 한미동맹의 강화나 남한의 독자 핵무장 논리가 득세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남한의 사회운동이 ‘핵무기 반대’라는 평화주의의 이념적 기초를 확고히 하지 않을 경우 평화운동의 대중적 확장은 고사하고 대중적 토대마저 유실할 위험이 크다. 강조하건대, 핵전쟁에서 ‘정의의 전쟁’과 ‘불의의 전쟁’ 사이의 구별은 무의미하며, 핵무기 그 자체가 전쟁의 억지 요인이 아니라 유발 요인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핵 전략가들은 상대방의 핵 선제공격에 대해 핵으로 보복공격을 단행하는 상호확증파괴(MAD)를 통해 핵전쟁을 합리적으로 억제할 수 있다며 ‘공포의 균형’을 정당화한다. 그러나 전쟁의 가능성 또는 현실성을 과학적으로 계산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또한 우리는 인간의 오류가능성에 대해서도 인정해야 한다. 전쟁을 예방한다는 것은 예상불가능하고 예측불가능한 위험, 하지만 그 대가가 인류전체의 절멸인 위험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한다는 의미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한반도에서 고조되고 있는 핵전쟁의 위험에 대응해야 할 ‘합리적’인 이유다. 사회운동은 북한의 핵무장에 대한 방어적수세적 관점을 전도하여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비핵화’를 일관되게 주장함으로써 미국의 핵 위협과 한미동맹의 확장억지 강화, 남한의 독자적 핵무장화 시도를 무력화해야 한다. 아울러, 설령 이번 사태가 일시적인 대화 국면으로 전환되고 그 결과 일정한 타협이 도출되더라도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지배력, 한미일 삼각동맹의 압도적인 힘의 우위는 근본적으로 침식되지 않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동아시아 핵재래식 군비경쟁 또는 전쟁위기의 근본적 유발요인인 주둔미군의 철수와 한미일 삼각동맹의 해체를 지향하는 평화운동이 활성화되지 않는다면 북미 간의 대화나 협상이 갖는 제한적 의의는 더욱 축소될 수밖에 없다. 사회운동은 북한의 핵무장에 대한 비판을 포함한 ‘한반도 비핵화’를 자신의 일관된 요구로 채택하면서 한미 군사동맹의 폐기, 핵우산 및 주둔 미군의 철수, 남한의 군비 증강 반대와 같은 ‘일방적 군비축소’를 실천해 나가야 한다. 구체적으로는, 확장억지 성격을 지닌 합동군사훈련 저지, 미국산 첨단무기 도입, 한국형미사일방어망(KAMD) 구축 및 MD 편입 반대, 주한미군 방위비 추가 분담 저지를 목표로 하는 평화운동이 필요하다. 아울러 양국 간 입장 차이로 이번 정상회담의 주요 의제로 다뤄지지는 않았지만, 독자적 핵무장화와 핵수출을 용이하게 하려는 박근혜 정부의 한미원자력협정 개정 시도에도 적극 대응해야 한다. 나아가 한반도와 동아시아에서 군비경쟁을 지양하고 핵무장을 해제하고 군사동맹을 폐기하기 위한 평화운동의 국제적 연대도 적극 모색해야 한다. 끝으로, 이 글의 주요 분석 대상은 아니지만, 한국의 TPP 협상 참여 여부를 예의주시하면서 정부의 자유무역협정 전략 전반에 대한 포괄적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 지금까지 정부는 한중 FTA, 한중일 FTA 협상 상황을 고려하면서 TPP 참여 문제를 신중히 결정한다는 입장을 가져왔지만, 한미정상회담을 전후로 미국 당국자들이 “TPP는 미국 정부의 우선 정책 과제”라고 거듭 강조한 사실을 감안할 때 TPP 참여 문제를 계속 우회하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과거 한미 FTA가 한미동맹 현대화나 포괄적 전략동맹이라는 맥락에서 추진되었고 현재 일본의 TPP 협상 참여도 미일동맹 강화 맥락에서 탄력을 받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번 정상회담에서 합의된 ‘글로벌 파트너십’ 개념은 향후 TPP 참여의 강력한 근거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사회운동은 한국의 TPP 참여가 초래할 정치적경제적 효과를 비판하면서 정부의 FTA 추진 전략을 비판해야 한다.
- 역자 해설 - 전쟁과 폭력에 관한 발리바르의 분석은 이미 『사회운동』에 세 차례 게재되었다. 앞서 실렸던 세 글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로 실린 「평화를 향한 대장정」(『사회운동』 2006년 1-2월호)은 1982년에 작성된 것으로 뉴레프트리뷰 출판사가 조직한 심포지엄에 제출된 논문을 편집한 『절멸주의와 냉전』에 담긴 것이다. 1970년대 말 미국과 나토가 유럽에 신형핵무기 배치를 강행하면서 강대국 간의 핵전쟁 위험이 다시금 고조되고, 이에 따라 서유럽에서 반핵평화운동이 다시 분출했다. 발리바르는 이 글에서 동서 핵대결의 ‘세력균형’이란 논리의 악순환을 깨기 위해서는 서유럽의 각국들이 먼저 핵무기 도입·배치를 중단·폐기하고 나토 동맹체계를 해소하는 ‘일방적 군비축소‘와 ‘적극적 중립주의’를 단행해야 한다는 입장을 제시했다. 두 번째 글, 「잔혹성의 지형학에 관한 개요: 세계적 폭력시대의 시민성과 시빌리티」(『사회운동』 2004년 6월호)는 2004년에 출판된 것으로, 앞서의 글이 냉전 시대의 산물이라면 두 번째 글은 냉전이 붕괴된 후의 세계정세를 ‘세계적 폭력’이란 관점에서 조망한다. 이 글은 지금의 세계가 전쟁, 이른바 ‘인종청소’, 경제의 파멸로 인한 기근과 절대빈곤, 대재앙(외견상 자연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대규모의 살인과 같은 유행병, 가뭄, 홍수, 지진)으로 점철된 잔혹한 폭력의 지대를 창출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극단적 폭력은 상이한 이유로 발생하지만 누적효과를 낳고, 결국 세계를 생명의 지대와 죽음의 지대로 분할하는 ‘초국경’(원한의 경계선)을 생산한다. 나아가 세계적인 시민성을 창출할 수 없는 자본주의의 정치적 조건으로 인하여 죽음의 지대의 인민은 불필요한 잉여로 간주되고, 외부세계는 예방적 반봉기라는 관점에서 이 지대에서 벌어지는 상호제거 또는 절멸을 조장하거나 이에 개입한다. 세 번째 글,「전쟁으로서의 정치, 정치로서의 전쟁: 포스트-클라우제비츠적인 변이들」(『사회운동』 2006년 10월호)은 2006년에 행한 강연문으로, 세계적 폭력시대라는 맥락에서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과 최근에 부각되고 있는 다양한 전쟁이론을 고찰한다. 저자는 전쟁에 관한 클라우제비츠의 대표적인 명제들의 유효성에 대해 질문하고 그의 이론체계에 내재한 난제와 모순을 분석한다. 예를 들어 ‘전쟁은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계속’이라는 클라우제비츠의 대표적인 명제는 현실을 설명하는 묘사로 해석될 수 있지만, 역으로 군사적 목표가 정치의 목적에 종속되어야 한다는 처방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전투로 실현되는 군사전략의 자율화와 파괴 경향이 억제되지 않는다면 ‘제한전쟁’은 ‘절대전쟁’으로 극단화되고, 정치의 조건 그 자체가 파괴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18세기 왕조전쟁에서 19세기 민족전쟁으로 현실의 전쟁이 전개된 역사는 ‘극단으로의 상승’이라는 클라우제비츠의 전쟁 개념이 극적으로 실현되는 과정이었다. 그런데 현재의 시점에 이르러서는 군사전략의 근대적 주체였던 국가-인민-군대의 통일체가 해체되면서 폭력의 국가 독점과 민족국가에 의한 이데올로기적 통합이 점점 더 의문시되고 있다. 이에 따라 전쟁의 역사는 한 단계 더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저자는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과 대별되는 마르크스주의 운동의 전통을 검토하면서 마오쩌둥의 ‘유격대·지구전’ 이론이 클라우제비츠의 경고를 (마르크스주의 전통을 경유해서) 인식하고 정치적 목적에 종속된 군사전술이란 지향을 실천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마오쩌둥 역시 혁명정당이 국가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관점을 (문화혁명을 경과하면서도) 완전히 버리지 못했고, 유격대·지구전 이론을 통해 역전된 국가와 인민의 위계관계가 다시 당-국가를 우위로 재역전되는 경향을 막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이에 따라 국가에 의한 폭력의 독점(억압적 국가장치의 재건)과 절대전쟁으로의 진화 경향(정치의 조건에 대한 파괴) 역시 재확립되었다는 것이다. 이번에 소개하는 「마르크스주의와 전쟁」은 2010년에 쓰인 것으로, 앞의 강연문에서도 다룬 마르크스주의와 전쟁이란 문제를 부연한다. 이번 글은 세 가지 질문을 제기한다. 첫째, 계급투쟁을 ‘내전’(civil war) 또는 ‘사회적 전쟁’(social war)으로 개념화하는 것이 적절한가?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자 선언>에 나타난 ‘계급투쟁=내전’이라는 등식을 유지할 수 있었나? 러시아 혁명 이후 프롤레타리아 독재 모델을 ‘지속되는 내전’으로 보는 관점은 마르크스주의에 어떤 효과를 발휘했나? 둘째, 자본주의 내부에서 전쟁의 특유성은 무엇인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분석은 여전히 유효한가? 여기에서 무기경쟁이 자본축적 과정만큼이나 무제한적이라는 문제가 출현하며, 나아가 식민지 분할 또는 포스트-식민지 분할이란 조건에서 세계적인 수준에서 대중의 분할이라는 문제에 직면한다. 따라서 “국제주의의 ‘현실검증’은 정확히 전쟁 중에 이루어졌다”는 진단은 의미심장하다. 셋째, ‘혁명전쟁’이라는 개념은 여전히 유효한가? 앞서 언급한 것처럼 마오쩌둥은 역사적으로 가장 클라우제비츠적으로 그의 공리를 재해석하고 실천했으나 고유한 난점에 봉착했다. 따라서 ‘새로운 전쟁’, 또는 ‘세계적 폭력시대’라는 조건에서 사회변혁적 전망은 극단적 폭력의 영구적 구조를 다뤄야만 한다. 전쟁은 항상 이미 정치의 정상적 수단이었지만, 이제 우리는 정치를 만드는 ‘다른 수단’을 탐색해야 한다는 영구적 과제를 안고 있다. * * * 마르크스주의에서 전쟁은 정확히 말해 하나의 개념이 아니고 확실히 하나의 문제다. 마르크스주의는 전쟁에 관한 어떤 개념을 발명할 수 없었지만, 말하자면 그 개념을 재창조할 수 있었다. 즉 마르크스주의는 전쟁이라는 질문을 자신의 문제 틀에 도입하고 완전히 독창적인 내용으로 전쟁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비판 또는 전쟁행위, 전쟁의 상황과 과정에 대한 비판이론을 생산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이는 마르크스주의가 진정으로 독립적인 담론으로서 자신을 확립할 수 있는 능력에 관한 일종의 시험으로 인식될 수 있었다. 전쟁 일반과 특정 유형의 전쟁을 다루는 마르크스주의 사상사 속에는 계시적인 분석이 풍부하다. 그러나 무언가 곤란한 것이 발생했다. 전쟁이란 문제는 마르크스주의의 시야를 확장하고 그 응집성을 공고히 하도록 촉진하기보다는 마르크스주의에 심오한 파괴효과를 생산하며 역사유물론을 그 한계들로 끌어당기고 역사유물론이 그 한계들을 진정으로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이상의 것이 있다. 전쟁을 둘러싼 토론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의 개입, 따라서 평화와 정치를 둘러싼 토론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의 개입은 혁명을 추가 항으로 고려하도록 강제함으로써 (그리고 혁명이라는 관념의 유일한 배경인 ‘계급투쟁’의 형태를 고려하도록 강력히 강제함으로써) 이처럼 전통적인 대칭적 양식[전쟁과 평화]을 심오하게 교란했다. 그것이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이라는 개념에 끼친 교란효과는 마르크스주의 내부뿐만 아니라 이른바 ‘부르주아’ 이론 내부에서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철학의 빈곤』, 『공산주의자 선언』에서 마르크스가 초기에 표현했던 것처럼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계급투쟁과 혁명이라는 개념은 정치적이지 않다. 그 개념들은 ‘정치국가의 종말’을 예상하거나 정치영역의 자율성을 억제했다. 역으로 계급투쟁의 실현이자 계급투쟁의 장애물로서 ‘전쟁’과 ‘혁명’의 조합은 결국 심오하게 비정치적으로 보인다. 달리 말하면, 전쟁을 이해하고 전쟁을 다루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하나의 문제로서 남아 있을 뿐더러 역사유물론이 지닌 한계의 특징을 이룬다. 뿐만 아니라 전쟁의 비정치적 성격이 마르크스주의와 대면하면서 출현한다. 이는[전쟁이 비정치적 성격을 지닌다고 보는 것은] 현대에 정치와 정치적인 것을 이론화하려는 가장 심원한 시도의 하나로서 마르크스주의의 적절성을 시험할 뿐만 아니라 전쟁의 정치라는 모든 수수께끼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해결책 또는 종결점은 여전히 접근할 수 없는 것으로 남아 있다고 가리키는 것처럼 보인다. 내가 연속적으로 세 안내선을 따라감으로써 마르크스주의와 전쟁의 연계성을 검토하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문제들에 관한 것이며 그 문제들의 함의를 조사하기 위한 것이다. 그 세 안내선 각각은 특정 저자와 텍스트에 특권을 부여한다. 물론 그 안내선은 진정으로 독립적이지 않고 지속적으로 중복되지만 분리해서 검토될 만하다. 그것들은 우선 계급투쟁을 ‘내전’(civil war) 또는 ‘사회적 전쟁’(social war)으로 개념화하는 문제다. 두 번째는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에서 볼 때 자본주의와 전쟁의 관계, 그리고 ‘자본주의적 전쟁’ 또는 자본주의 내부에서 벌어지는 전쟁의 특유한 형태, 목적, 정치적 결과라는 문제다. 세 번째로는 혁명과 전쟁의 역사적 관계라는 문제에 집중할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혁명전쟁’이라는 결정적인 쟁점, 혁명 과정 또는 혁명 상황에서 군사적 요소와 정치적 요소 사이의 변증법적 긴장이라는 문제다. 이는 혁명의 군사화를 통한 혁명적 정치의 반혁명적 정치로의 반전과 관련된 혼란스러운 문제로 나아간다. 내전으로서 계급투쟁: 정치적인 것의 새로운 개념 계급투쟁(Klassenkampf)과 ‘내전’(Bügerkrieg)의 등식은 『공산주의자 선언』에서 제안되었으며, 마르크스주의 내부와 그 주변에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우리는 그 등식이 어디에서 왔는지, 그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것에 어떤 난점이 수반되는지, 그것이 마르크스주의 담론에 어떤 자취를 남겨서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한 레닌주의적 이해 속에서 그것이 강력히 부활하게 되었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에 따라 우리가 현재의 정치적 담론, 특히 내가 정치적인 것에 대한 ‘슈미트적’ 개념과 ‘그람시적’ 개념 사이의 대안이라고 묘사하고자 하는 형태를 취하는 정치적 담론을 구조화하는 어떤 딜레마들을 해석하기를 원한다면 이러한 레닌주의적 부활은 결정적이다. 이 문제는 미셀 푸코의 도발적 개입으로 인해 최근 더 두드러졌다. 1976년 콜라주 드 프랑스에서 행한 강의에서 그는 비판적이고 역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의 유명한 표어를 전도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는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계속(Fortsetzung)’으로 간주해야 할 것은 전쟁이 아니고, 오히려 정치 그 자체가 전쟁의 다른 형태라고 썼다. 사실 푸코는 클라우제비츠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지만 그는 ‘계급투쟁’이라는 표현의 계보학을 제안한다. 그 계보학은 봉건사회의 계급제도와 정복으로 인해 발생하는 ‘인종전쟁’에 따른 귀족과 부르주아의 대립을 해석하는 17세기와 19세기 사이의 역사가들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계급투쟁’이라는 관념을 ‘인종전쟁’의 변형에 따른 최근의 부산물로 간주한다. (잘 알려진 것처럼 마르크스는 그 자신이 ‘계급투쟁’이라는 관념을 발명했다고 주장한 적이 전혀 없었다.) 푸코는 19세기 반혁명 측의 경쟁자였던 ‘인종투쟁’(der Rassenkampf)이라는 관념도 그러한 부산물로 간주한다. 이런 해석은 『공산주의자 선언』에서 계급투쟁에 기반을 둔 세계역사 이론을 ‘발명’한 배경 중 일부를 지적하며,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유용하다. 그러나 그런 해석은 그 맥락에서 의미하는 바를 얼마간 왜곡하며, 놀랍게도 마르크스가 정확히 그의 이론의 중심에 두었던 것, 즉 화해 불가능한 적대라는 관념을 마르크스에 반하여 사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화해 불가능한 적대라는 관념의 최상의 이름은 일반화된 의미에서 정확히도 ‘전쟁’이다.) 우리는 실제 정식화로 되돌아가야 한다. 계급투쟁과 사회적 전쟁 또는 내전의 등식은 두 개의 문구에서 유래하며, 이는 『공산주의자 선언』 1장의 처음과 끝에서 발견된다. 지금까지의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다. 자유민과 노예, 귀족과 평민, 영주와 농노, 동업조합의 장인과 직인, 요컨대 서로 영원한 적대 관계에 있는 억압자와 피억압자가 때로는 은밀하게, 때로는 공공연하게 끊임없는 투쟁을 벌여 왔다. 그리고 이 투쟁은 항상 사회 전체가 혁명적으로 개조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투쟁하는 계급들이 공멸하는 것으로 끝났다. (…) 우리는 프롤레타리아의 발전의 가장 일반적인 단계들을 서술함으로써, 다소간 가려져 있는 기존 사회 내부의 내전이 공공연한 혁명으로 바뀌고, 프롤레타리아가 부르주아를 폭력으로 타도하여 자신의 지배권을 확립하게 되는 데까지 고찰했다. 이러한 동일화는 여러 흥미진진한 문제들을 제기한다. 첫째는 그것의 직접적인 원천과 관련되는데, 그 원천도 그 의미의 일부분을 결정한다. 우리는 『공산주의자 선언』의 텍스트가 팔림프세스트[흔적 위에 덧쓰기]라는 것을 안다. 거의 모든 구절은 고대 또는 현대의 앞선 저자들로부터 빌려온 것이지만, 그러한 조합의 결과는 정말로 새롭고 독창적이다. 여기에는 두 개의 맥락이 특히 연관성을 맺고 있다. 헤겔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칸트적 기원을 지닌 적대라는 바로 그 관념은 『생시몽주의의 교리에 대한 폭로』에서 유래한다. 바로 이 결정적인 텍스트는 ‘착취’ 계급과 ‘피착취’ 계급이라는 이원적 양식을 제공하며, 노예소유자와 노예로 시작하여 자본가와 임금노동자로 끝을 맺는다. 그러나 생시몽주의자들은 ‘사회학적 전통’의 한 기둥이 될 관념을 스스로 채택하고 또는 체계화하는데, 그 관념은 산업화가 역사 속에서 군사적 지배형태의 극복을 수반한다는 것으로서 이는 전쟁을 상업과 생산으로 대체하는 경향이다. 이런 의미에서 마르크스는 이러한 결론을 역전하려고 했는데 그는 산업혁명과 프롤레타리아화 과정이 단지 전쟁의 다른 형태를 개시할 뿐이라고 설명하고자 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어떤 용어법과 은유적 담론에 의존하는데, 그러한 용어법과 담론은 좁은 배경을 지닌 것도 있고 넓은 배경을 지닌 것도 있다. 좁은 배경을 지닌 것에 대해 말하자면, 그것은 ‘계급들 간에 죽음에 이르는 전쟁’(guerreà mort entre les classes)이라는 블랑키주의적 담론에서 직접 끌어온 것이다. 이는 신자코뱅적 담론이며 그로부터 몇 년 후에 ‘프롤레타리아 독재’도 파생된다. 더 광범위한 배경을 지닌 것도 동일하게 중요한데, 그것은 벤자민 디즈렐리의 소설에 나오는 서로 싸우는 ‘두 개의 국민들’이나 오노레 드 발자크의 ‘사회적 전쟁’(guerre sociale)에서 볼 수 있듯이 1840년대 새로운 산업 사회와 부르주아 사회에 대한 비판적 담론 전체와 관련된다. 이러한 담론이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엄청난 영향을 준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러한 정식화의 의미에 관하여 나는 세 가지 점에 집중한다. 1. 마르크스가 계급투쟁에 대한 전쟁 모형을 부르주아 혁명 이후 정당 정치로서 정의된 ‘정치’ 또는 정치의 자율성이란 관념에 대한 근본적 비판으로 이해하고자 했더라도 그 모형은 의심할 바 없이 정치적인 것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수반한다. 이를 이해하기 위한 최상의 방법은 내전이 잠재적인 ‘국면들’과 내전이 공공연해지고 가시화되는 다른 ‘국면들’ 사이의 진동에 관해 문헌이 지시하는 바를 발전시키는 것인 듯하다. 본질적인 의미에서 정치는 바로 하나의 국면에서 다른 국면으로의 이행, 즉 잠재적 투쟁의 가시화(따라서 역시 투쟁의 의식화, 조직화)에 관한 것이며, 아마도 그 역도 그렇다. 따라서 그것은 사회적 적대에서 하나의 결정, 즉 ‘승리’ 또는 ‘패배’라고 불리는 것에 이른다. (또한 우리는 상쟁하는 계급들의 공멸이라는 세 번째의 교란 가능성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는 고대 문명의 쇠락에 대한 헤겔적 정식화를 상기시키는 ‘비극적’ 사례다.) 비록 그 당시에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클라우제비츠를 읽지 않았더라도 정치에 대한 이런 개념과 클라우제비츠의 정식에 포함된 개념의 상관성에 대해 토론하는 것은 이미 매우 흥미로울 것이다. 그러나 클라우제비츠의 정식이 여기에서 얼마간 전도된다는 것은 실제로 진실이다. 2. 역사의 전체 시대와 궁극적으로 역사의 전체 과정에 걸친 내전으로 계급투쟁을 표현하는 것은 계급들 그 자체가 ‘진영들’ 또는 ‘군대들’로 묘사된다는 것을 함의한다. 흥미롭게도 이처럼 계급을 군대로 표현하는 것은 계급정당 또는 (계급정당에 종속되는) 계급의식에 대한 마르크스의 어떤 사고보다도 앞선 것이다. 3. 마지막으로 그 관념은 계급의 양극화와 자본주의의 경제적 과정의 파국적 결과라는 표현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여기에 수반되는 완벽한 목적론이 존재한다. 계급투쟁의 역사 속에서 우리가 현대 자본주의로 진전할수록, 자본주의 그 자체 내부의 산업혁명 속에서 우리가 진전할수록 시민사회는 더욱 더 상대방에 대해 외부적인, 근본적으로 외부적인 적대적 집단으로 실제로 분할되며, 과거의 사회질서가 완전히 해체되고 부르주아 자본가가 프롤레타리아를 아사라는 절망적인 상황 또는 반란에 처하게 할 때 최종적인 대결이 발생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혁명이다. 이러한 모든 점은 마르크스주의 담론에 심오한 흔적을 남기게 되었고, 우리가 살펴볼 것처럼 그것[계급투쟁과 내전의 등식]은 잠복 기간 후에 혁명과 파국이 다시금 밀접히 상관관계를 맺는 새로운 상황에서 재가동될 것이다. 하지만 단기적으로 [마르크스는] 그것[등식화]을 곧바로 중단했고, 이를 중단함으로써 마르크스의 경제학 비판, 엥겔스의 ‘역사유물론’ 교리의 출현이 가능했다. 우리는 왜 그런지 이해해야 한다. 나의 가설은 다음과 같다. 1. 계급투쟁과 내전의 등식은 포기되어야만 했는데 왜냐하면 1848년부터 1851년까지 혁명과 반혁명은 실제 ‘내전’ 양식을 보였고 그 속에서 프롤레타리아는 패배했을 뿐만 아니라 위기와 계급정치의 관계를 그렇게[그러한 등식으로] 표현하는 게 부적절하다는 것을 경험했다. 즉 공산주의 반대방향으로 극성이 작동했다. 또한 그것은 국가 권력과 국가 장치를 그렇게 이해하는 게 부적절함을 경험했다. 그 결과로서 ‘계급 군대’라는 관념과 ‘계급 전체의 정당’이라는 관념의 관계가 역전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2. 오늘에 이르기까지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에서 이러한 비극적 경험은 여러 번 반복되었다. 그러나 또한 내전의 각각 새로운 유형은 내전의 계급구조에 관한 새로운 문제들, 또는 내전이 계급구조를 분열시키고 왜곡시키는 방식에 관한 새로운 문제들을 야기하기도 했다. 3. 이러한 경향에 관한 가장 거대한 예외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관한 1918~1921년 레닌의 이론과 실천이다. 이러한 [프롤레타리아 독재 개념의] 부활은 헤아릴 수 없는 영향을 끼쳤다. 나아가 여기에는 수많은 예비적 검토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한 예비적 검토 대상은 마르크스주의자들 가운데 ‘독재’라는 통념을 두고 후속하여 이루어진 토론부터 레닌과 볼셰비키가 ‘제국주의 전쟁을 혁명적 내전으로 전화하자’는 표어에 착수하도록 촉진했던 전쟁 정세에 대한 묘사에 이른다. 여기서는 레닌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낡은 사회와 새로운 사회 간 장기적인 ‘삶과 죽음이 걸린 투쟁’으로 이해했고 그러한 투쟁은 군사적 수단과 행정적 수단, 폭력적 또는 ‘테리리즘적’ 전술과 비폭력적 또는 대중 ‘교육학적’ 전술을 결합했으며 따라서 그것은 정치 지도부(또는 정당)가 영구적인 전략적 딜레마에 직면하게 했다는 점만 지적하겠다. 따라서 여러 측면에서 이러한 계급 전쟁도 비(非)전쟁, 또는 반(反)전쟁인데, 이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에서 국가가 ‘소멸’ 과정의 비국가 또는 반국가로 묘사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또한 수많은 변증법적 정식화는 실제로 해결할 수 없는 수수께끼를 다룬다. 예를 들어, 군대로서 노동자계급의 통일성을 단련하기 위해 필요한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것과 계급 없는 사회로 전진하면서 동맹계급에 대한 프롤레타리아 헤게모니를 확보하는 것을 어떻게 결합할 것인가? 4. 이러한 경험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발생하는 새로운 딜레마에 대한 묘사로 여기의 첫 번째 검토를 이론적으로 마치고자 한다. 나는 그러한 딜레마를 상징적인 형태로 표현하고자 한다. 칼 슈미트 또는 안토니오 그람시, 무엇이 정치적인 것에 대한 ‘포스트-레닌주의적’ 개념인가? 우연치 않게도 이러한 대안은 특히 1980년대 이탈리아 마르크스주의 또는 포스트-마르크스주의 내부에서 탐구되었고, 그 결과 그 영향을 받은 다른 곳에서도 탐구되었다. 분명히도 슈미트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지만 마르크스주의의 특정 측면에 대한 심오한 이해를 지니고 있었고 이는 결국 정치이론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에 반작용했다. 이는 그가 ‘정치’적인 것의 개념을 예방적 반혁명으로 구축하기를 원했다는 사실로부터 유래한다. 그 개념은 외부의 적(즉 민족의 적)이 내부의 적(국가의 계급의 적)에 대해 우위에 있는 형태를 지니지만, 실제로 그는 내부의 적에 대한 억압이 우선되어야 하며 지속적으로 반복되어야 한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람시에 대해 말하자면 정치적인 것에 대한 그의 개념은 적이라는 관념(심지어 계급의 적이라는 관념)의 우선성에 근거를 두고 있지 않지만 그것은 분명한 방식으로 전쟁 모델과 관계를 맺고 있은 채로 남아 있다. 여기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헤게모니’의 모색이 되며 그 전략적 핵심은 서로 다른 수준의 ‘세력관계’와 관련되며, 그 전략적 핵심은 ‘기동전’에 대한 ‘진지전’의 우월성에서 절정에 이른다. 비록 이러한 우월성은 상황과 사회구조 그 자체에 의존하더라도 그렇다. ‘진지전’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말은 ‘반혁명의 억압’이라기보다는 부르주아의 ‘수동혁명’에 대한 대안이다. 전쟁과 자본주의 나는 두 번째 쟁점에 대해서는 도식적인 방식을 넘어서고자 한다. 그 쟁점은 전쟁과 자본주의, 따라서 ‘역사유물론’의 관점에서 본 전쟁의 역사성이다. 그 쟁점은 막대한 문헌에 걸쳐 있다. 역사유물론은 엥겔스의 창조물이다. (이는 마르크스가 그것을 거부했다는 말이 아니다.) 이러한 일반 이론[역사유물론]이 어디에 뿌리는 두는지를 이해하는 서로 다른 방식들이 있다. 그 중 하나는 경제학 비판과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대한 마르크스의 분석을 사회의 ‘발전 법칙’을 해석하고 사회 또는 사회구성체(Gesellschaftsformation)가 또 다른 사회 또는 사회구성체로 변증법적으로 변형되는 것을 해석하는 완벽한 도식으로 확장하는 것과 관련된다. 그러나 다른 방식도 동일하게 결정적이다. 그것은 계급투쟁을 복잡하게 하고, 또는 심지어 계급투쟁의 전형적인 경향을 역전시키는 것처럼 보이는 사회적 과정들에 대한 이해를 제공할 필요성과 관련되는데, 이는 그런 사회적 과정들을 ‘최종심급에서’ 동일한 진화 법칙으로 감축시킨다. 여기서 종교 문제와 전쟁 문제는 두 개의 매우 결정적인 문제다. 엥겔스는 두 개의 문제를, 특히 그 두 번째인 전쟁 문제를 매우 진지하게 다루었고, 전쟁 문제에 관하여 마르크스에 틀림없이 영향을 끼쳤고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이는 1848년 독일 혁명의 군사적 국면에서 조직가로서 엥겔스의 개인적 경험으로 설명할 수 있지만, 구체적인 제도의 역사에 대한 그의 특별한 관심으로 설명할 수도 있다. 지금 논의해야 할 ‘전쟁’은 계급전쟁도 아니고 폭력적 적대라는 ‘일반적’ 또는 ‘일반화된’ 관념도 아니다. 그것은 경험적인 전쟁, 특히 민족전쟁이며, 또한 동시에 내전, 예를 들면 미국 남북전쟁으로 그것은 마르크스의 관심을 대단히 끌었다. 1857년부터 1870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마르크스-엥겔스 저작선』을 한번 훑어보면 여러 권이 완전히 또는 대부분 유럽 내외부의 외교와 전쟁에 관한 기사와 평론에 집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엥겔스와 마르크스는 유럽의 민주주의자인 동시에 (특히 그들이 훗날에 적대관계로 돌아선 영국과 러시아 동맹이 강요한 반혁명적 질서를 공격할 때 그러했다) 자율적인 역사적 행위자로서 부상해야 할 국제 노동자계급의 지도자를 지망하는 사람으로서 그 문제들을 다루었다. 여기에 엥겔스가 군사 범주들과 과거 전투 사례에 대해 『신아메리카백과사전』에 기고한 설명적이고 이론적인 모든 에세이도 추가해야 한다. 이제 이처럼 막대한 문헌들의 집대성에 완전한 의미를 부여하고 그 문헌들이 역사적 유물론을 창조하는 데 수행한 역할을 평가할 때다. 그러나 그 문헌들이 구축하려 했던 이론의 본체를 어느 정도나 그 문헌들이 실제로 해체하는지에 대해서도 토론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나의 가설은 이렇다. 엥겔스에게서 클라우제비츠 『전쟁론』(또한 1812년 프랑스-러시아 전쟁에 관한 클라우제비츠의 초기 저작)의 관념들과 문제들에 대한 최초의 비판적 영유가 발생했고, 그것은 이미 건설적 기능을 획득했다. 다른 것들이 뒤따르는데, 매번 강조점이 우리가 클라우제비츠의 전투의 ‘공리들’라고 부를 수 있는 서로 다른 측면으로 이동하며, 종종 클라우제비츠의 해석을 역전시키는데, 특히 절대전쟁과 제한전쟁의 구별, 현대전쟁에서 ‘도덕적’ 요인의 우선성, 장기적인 관점에서 공세전략에 대한 방어전략의 우월성이라는 결정적 관념들과 관련된 해석을 역전시켜며, 이는 전쟁이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계속’이라는 관념을 다른 방식으로 발전시키도록 한다. 헤어프리트 뮌클러는 엥겔스가 전 생애에 걸쳐 추구하고자 했던 ‘군사주의의 변증법’(Dialektik des Militarismus)에 대해 언급한다. 하지만 또한 그는 우리를 제국주의의 초기 국면으로 이끄는 당대의 경험들이 끼친 영향 하에서 전쟁행위에 대한 ‘역사유물론적’ 개념화가 전쟁행위가 계급투쟁과 맺는 관계에 대한 보편적 평가에 이르지 못했고, 더군다나 자본주의에서 무계급 사회로 이행하는 것에서 전쟁행위의 역할에 관한 어떤 확실성에는 더욱 더 이르지 못했다는 것을 엥겔스가 인정해야만 했다는 사실에 우리가 주목하게 한다. 전쟁과 군사주의의 변증법에 대한 엥겔스의 설명 방식에는 두 개의 다른 ‘모순’이 상호작용한다. 하나는 군사기술이 군대의 조직과 전략적 모델의 변화에 끼치는 영향과 관련되며(이는 생산력의 발전과 유비된다), 그리고 인민 또는 대중을 징병제 군대에 편입하는 것이 끼치는 효과와 관련된다(이는 사회적 생산관계와 유비된다). 다른 모순은 민족-국가의 역할과 민족들 간 경쟁의 증대, 그리고 그것이 경제의 국제화와 노동자계급들 사이의 국제주의의 발전과 맺는 적대적 관계와 관련된다. 엥겔스는 ‘기술적 개량과 새로운 무기류를 향한 경쟁이 절대적 한계에 봉착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국가에 과도한 재정적 부담을 안길 것이기 때문이다’, 라는 생각으로부터 무기경쟁이 자본주의 축적 그 자체의 과정만큼이나 무제한적이라는 생각으로 점진적으로 변화했다. 그리고 엥겔스는 징병제 군대가 계급투쟁을 국가장치 그 자체의 핵심으로 이전할 것이라는 확신으로부터 상쟁하는 자본주의 국가 간의 일반적 전쟁을 봉쇄할 수 있는 능력은 노동자계급이 스스로 민족주의를 국제주의로 전환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는 망설이는 예측으로 변화한다. 이를 숙고할 때 이는 역사유물론에 강력한 불확실성의 요소를 초래하며, 우리는 이미 1914년 로자 룩셈부르크의 딜레마, ‘사회주의냐 야만이냐!’를 예상할 수 있다. 자국 정부에 대항하여 각국 노동자계급을 동원하고자 노력했던 평화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때에 20세기의 대 유럽내전이 발발했다. 나는 이에 따라 자연히 수반되는 문제로서, 역사유물론을 구성하는 전쟁이론의 이러한 일반적 문제들과 연결되어야 하는 다른 세 가지 문제를 지적하고자 한다. 1. 엥겔스 이후 군사주의의 변증법은 제국주의 이론으로 변형되었고 그것은 지배적 민족들이 세계의 식민지 독점을 위해 경쟁하는 ‘국면’에 자본주의가 도달할 때 군사주의는 더 이상 역사 발전의 단순한 결과가 아니고 또한 그 동력이 된다는 관념의 형태를 취했다. (역설적이게도 당대에 널리 공유된 이러한[군사주의가 자본주의의 동력이라는] 사회주의적 관념은 그 후에 파시스트 국가들뿐만 아니라 ‘케인즈주의’ 자유주의에서도 자본가 그 자신을 위한 긍정적인 가정과 계획이 되었다.) 이는 정치적인 것과 군사적인 것 간 상호작용이라는 문제를 다시 개방했고, ‘최종심급에서의 결정’이 무엇이냐는 정의에 대해 질문을 제기했다. ‘사회주의 국가들’이 전쟁 그 자체의 결과로서 출현하고 세계적 규모에서 군사화된 국가권력 간 대결에서 주요한 ‘전략적 행위자’가 된 후 그 문제는 훨씬 더 복잡해졌다. 2. 이는 두 번째 결정적인 문제로 나아간다. 그것은 우리가 아는 것처럼 결코 진정으로 해결되지 않았다. 그 문제는 국제주의의 실제 뿌리와 실질적 성격이다. 국제주의는 그 하에서 피착취계급이 세계 정치에 특정한 방침을 강제할 수 있는 형태로 나타났다. 또는 그렇지 않기도 했다. 국제주의의 ‘현실검증’은 정확히 전쟁 중에 이루어졌다. <공산주의자 선언>에서 기정사실로 묘사했던 것, 즉 프롤레타리아 내부에서 애국주의 또는 민족주의의 소멸은 이제 그 정반대 방향으로의 진화를 향해 열린 위험천만한 과정으로 보였다. 한편으로 국제주의는 평화주의와(마르크스주의적 용어로 평화주의를 설명한 최근 가장 뛰어난 사례는 아마도 반핵 사회운동을 위한 프로그램을 개념화한 E. P. 톰슨의 ‘절멸주의’ 이론일 것이다), 특히 트로츠키 전통이 옹호했던 이른바 혁명적 패배주의 사이에서 동요했다. 다른 한편, 고려 대상인 대중들이 동일한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의 유사한 노동자계급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 다른 주민들이라는 사실, 즉 거대한 식민지 분할과 포스트-식민지 분할의 양측에 있는 국가들과 지역들에 속하며,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와 또한 아마도 상당할 정도로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이해관계를 지닌 주민들이라는 사실로 인해 국제주의는 심대하게 교란되었다. 3. 마지막으로 우리는 전쟁행위의 ‘유물론적’ 이론이라는 관념과 그 관념의 역사적 기능이 소련의 군사 교리에 야기한 결과에 대한 토론을 피할 수 없다. 소련의 군사제도는 내전의 결과로서 나타났고, 그 당시에 트로츠키와 다른 이들은 적군을 창설하고 그 전략을 고안했다. 정치-군사-산업 복합체가 소련 국가의 핵심부에서 획득한 중요성을 고려할 때 (2차 세계대전 전에 이미 그러한 중요성을 획득했지만, 무엇보다도 나치 독일과 벌인 ‘대조국수호전쟁’에서 거둔 값비싼 승리 이후 그 중요성은 더욱 커졌다) 정치-군사-산업 복합체의 구성은 냉전 동안에 소련과 그 위성국을 실제로 지배했다. 따라서 『대소비에트백과사전』의 연속적 판본이 완벽하게 전쟁 문제를 다루며, 그곳에서 클라우제비츠의 정식이 성전(聖典)화 된다는 것은 전혀 놀랍지 않다. 따라서 전쟁행위가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끼친 영향에 대한 역사적-비판적 검토는 우리를 국제주의라는 쟁점으로 이끈다. 『공산주의자 선언』에서 국제주의는 고전적인 세계시민주의(cosmopolitanism)로부터 일부 영감을 끌어왔지만 그것이 유토피아와 맺는 강한 관계를 끊기 위해 분투하면서 역사의 실제 경향으로 제시되었다. ‘군사주의’와 ‘민족주의’는 사실상 이미 ‘과거’의 것이 되었고(이는 분명히 생시몽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은 관념이다), 혁명적 계급투쟁의 내부에 영향을 줄 수 없을 것이다. 이 문제는 사실 추측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인 문제이고, 지극히 해결하기 어렵지만 점점 더 계급투쟁 그 자체의 관점에서 볼 때 중심적인 문제가 되었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이는 민족 기능의 변화, 민족의 역사적 역할에 대한 인식의 변화와 분리될 수 없다. 실제로 한 세기 내내 지속된 탈식민화 과정에서 사회운동과 민족해방운동의 조합은 역사에서 계급 요인과 민족 요인의 연계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인식을 이끌었고, 또한 코민테른 시대로부터 삼대륙[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의 시대와 그 이후 시대까지 이론과 조직 양 측면에서 부활한 국제주의에 관한 완전히 새로운 인식을 이끌었다. 이러한 국제주의에 관한 새로운 인식도 이제는 과거에 속하며, 해방된 식민지 또는 반(半)식민지가 그 후 민족주의적이거나 군사주의적인 권력이 되었으므로 비판적 평가를 요청한다. 그러나 이는 마르크스주의에서 ‘전쟁과 정치’라는 문제의 세 번째 핵심적 측면을 토론하는 것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그 세 번째 문제는 ‘혁명전쟁’의 형태와 효과와 관련된다. 전쟁과 혁명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이제야 비로소 문제의 ‘심장부’를 구성하는 것에 도달했다. 우리가 분리해서 고찰했던 두 개의 안내선, 즉 (일반화된) 내전으로서 계급투쟁과 자본주의의 표현으로서 군사주의는 하나의 단일한 실제적 문제로 합병된다. 곧 어떻게 혁명을 ‘만들’ 것인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신이 개입한 혁명을 어떻게 만들고 어떻게 생각하였는가, 무엇이 그들의 핵심적 목표였는가? 이념적으로 말하자면, 여기서 우리는 역사적 변형의 하나의 거대한 ‘순환’으로서 ‘현대성’ 전체를 고려해야 한다. 마르크스주의는 그 순환 속에 자신을 ‘혁명 내부의 혁명’으로서 끼워 넣고자 노력했다. 마르크스주의는 우리가 ‘포스트-현대성’의 순간에 도달할 때까지 그렇게 노력했다. 여기서 ‘포스트-현대성’이란 부분적으로, 또는 완전히 포스트-민족적인 ‘새로운 전쟁’의 출현이다. 새로운 전쟁이 여전히 고전적인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 다뤄질 수 있는지 여부는 가장 흥미로운 문제인데, 왜냐하면 여러 측면에서 볼 때 새로운 전쟁이라는 개념은 특정 혁명 이론들을 그 이론들의 원래 의도에 반하여 전도함으로써 역사적으로 정교화되었기 때문이다. ‘혁명전쟁’이란 문제는 최소한 프랑스혁명과 그것이 유럽 정치질서에 끼친 영향으로 그 기원을 추적할 수 있다. 그것은 그 후 벌어진 토론의 모든 요소에 원형을 창출했다. 즉 공세적인 반혁명에 대항하는 ‘방어적 전쟁’, 규율과 사기가 지휘관만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에 기반을 둔 ‘대중’ 군대라는 새로운 유형의 창출(따라서 ‘정치위원’의 출현, 또는 슈미트적 용어법에 따르면 ‘독재’라는 고대 관념의 부활), 사회적이고 이데올로기적 동기를 조합하는 혁명세력과 반혁명세력의 대결(예를 들어 공포정치와 방데 반란의 사례처럼, 양측에서 ‘봉기’의 순간을 지니는 대결), ‘파르티잔 전쟁’과 ‘게릴라 전투’라는 관념의 탄생(그것의 혁명적 성격은 즉각 쟁점이 되는데, 왜냐하면 러시아, 스페인, 독일에서 그것이 제국주의 등등으로 전환된 ‘혁명적 민족’[프랑스]에 대항하여 수행되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마르크스주의는 이처럼 전형적인 ‘현대적’ 패러다임의 한계를 넘어선 적이 없지만 그 패러다임을 변형하거나 재접합하고자 했다. 전쟁의 혁명적 활용과 맺는 관계는 ‘혁명’ 그 자체의 개념이 하나의 의미만을 지녔는지 여부를 질문하게 하는 기준이 되었다. 프랑스 (부르주아) 혁명에서 전쟁은 단지 하나의 사건처럼 보였지만 이러한 사건은 그 결과를 변화시켰다. 무엇보다도 [전쟁이라는] 그 사건을 영토적 정복 체계로 변형했을 뿐만 아니라 마르크스의 『브뤼메르의 18일』에서 ‘국가 기계’(State Machine)라고 부른 것을 재창조하고 더욱 확장함으로써 [혁명의 결과를 변화시켰다]. 어떤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전쟁은 계급 없는 사회로 가는 특권적인 혁명적 길이 되었다. 그러나 어떤 전쟁인가? 또는 어떤 수단을 사용하는 전쟁인가? 두 가지 경향이 출현한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항상 분리되지는 않더라도 개념적으로 대립된다. 두 경향은 (농촌과 도시에서 벌어지는 ‘게릴라’ 전쟁을 포함하는) 혁명적인 대중의 전쟁, 그리고 전쟁에 대한 대중의 저항, 즉 내부로부터 수행되는 ‘전쟁에 대항하는 혁명적인 전쟁’이다. 우리는 1914-1917년 동안 레닌의 활동과, 일본의 점령에 대항하여 중국 공산당이 이끈 ‘인민전쟁’ 동안 마오쩌둥의 활동에서 이러한 지향들을 발견한다. 두 사례에서 그것은 클라우제비츠적 공리 일부로의 놀라운 귀환과 관련되며, 그 공리들은 이제 완전히 다른 틀로 이동된다. 이러한 틀은 엥겔스가 준비한 것으로, 그와 동시에 엥겔스는 클라우제비츠가 도덕적 요인을 이른바 ‘관념론적’으로 강조한 것을 비판하며 그에 대응하는 유물론적 등가물을 찾으려 했다. 이러한 등가물은 전쟁의 기술적, 경제적, 사회적 요인을 강조하는 것과 양립할 수 있다는 것이 판명되어야 했다. 이러한 등가물은 인민의 군대, 또는 대중 징병제가 계급투쟁을 군대 그 자체의 내부에 잠재적으로 도입한다는 관념에서 발견되었고, 따라서 군사 문제에 대중의 관여에 대한 클라우제비츠의 전형적인 공포를 국가와 그 군사기구에 대항하여 대중이 새로운 전략적 행위자로 등장한다는 예언으로 역전시켰다. 그러나 오직 레닌과 마오쩌둥을 통해서만, 클라우제비츠적 조합이 국가-군대-인민의 통일체로부터 계급, 인민, 혁명정당이라는 새로운 역사적 통일체로 대체됨으로써 그러한 변증법적 원칙이 전쟁과 정치의 새로운 접합에 도달할 수 있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레닌은 2차 인터내셔널과 그것의 평화주의적 의제가 붕괴된 후 클라우제비츠를 집중적으로 독해했고, 『전쟁론』에 주석을 달고 그 여백에 논평을 썼다. 그는 ‘제국주의 전쟁의 혁명적 내전으로의 전환’이라는 구호를 입안했고, (최소한 자신의 나라에서) 성공적으로 시도했다. 그 구호는 ‘도덕적 요인’(국제주의적 계급의식)이 ‘인민의’ 전쟁(즉 대중으로 구성된 민족 군대가 수행하는 전쟁)이 동반하는 공포가 시간이 지남이 따라 [귀결되는] 정치적 결과라고 묘사했다. 그 구호는 ‘절대적’ 전쟁행위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지탱될 수 없게 된다는 필연성에서 비롯되는 ‘방어’ 내부에서 준비되는 ‘공세’라는 관념에 완벽히 독창적인 해석을 부여한다. 따라서 그 구호는 국가를 희생하여 계급정치의 조건을 재창조해야 하며,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오직 인민을 무장시킬 수 있는 능력과 인민이 받아들인 무장력을 인민이 사용하는 것을 통제할 수 능력을 보유하는 한에서만 정치를 실현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구호는 이러한 능력을 박탈당하자마자 정치적 환상이 될 것이다. 또는 역사가 적법한 폭력의 국가독점으로부터 역사적으로 결정적인 폭력의 계급 독점으로 이동하자마자 그 구호가 정치적 환상이 될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나는 이러한 클라우제비츠적 조합의 대체가 ‘정치적인’ 것에 대한 슈미트의 비정치적 개념의 출발점을 형성한다고 제안한다. 슈미트의 개념에서 주권 개념은 국가의 핵심부에 ‘예외상태’를 설치할 수 있는 능력과 동일시되는데, 이는 계급투쟁을 선제적 방식으로 억압하기 위한 것이며, 따라서 ‘내부의 적’, 즉 ‘계급적 내전’의 적에 대한 정의가 국가의 독점과, 대외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위해 활용된다. 그러나 우리는 오직 마오쩌둥의 ‘유격대의 지구전’ 이론에서만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계속’이라는 클라우제비츠의 개념을 구출하면서 동시에 정치적인 것에 대한 클라우제비츠의 관념에 대안을 제시한다고 간주할 수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사실 나는 마오쩌둥이 마르크스주의 전통에서 아마 가장 일관성 있게 클라우제비츠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클라우제비츠 이후 절대적으로 아마 가장 클라우제비츠적이라고 믿는다. 왜냐하면 마오쩌둥은 클라우제비츠의 공리 중 한 개나 두 개가 아니라 모든 공리를 재해석했기 때문이다. ‘대장정’을 마친 후, 1938년 옌안(延安)에서 마오는 클라우제비츠의 저작에 관한 특별 세미나를 조직했고 그는 심지어 그 세미나를 위해 『전쟁론』의 일부를 중국어로 번역했다. 마오의 핵심 사상은 다음과 같다. 초기에 제국주의 적과 지배 부르주아는 무장을 한 반면 프롤레타리아와 소농은 무장을 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강제하는 방어전략은 궁극적으로 그 반대로 역전되며, ‘가장 강한 것’이 ‘가장 약한 것’에 의해 실제 전멸에 이르게 된다. (마오의 전략 사상이 전통적인 중국 철학과 역사기록에도 뿌리를 둔 것이 아닌지 조사하는 것도 여기서 중요할 것이다.) 따라서 클라우제비츠적 ‘마찰’의 변증법적 등가물은 이제 ‘지구전’으로 불리며, 전쟁의 지속시간은 혁명적 노동자와 지식인들의 소세포핵이 삼중의 결과를 동시에 달성하기 위해 소농 대중 내부에서 피난처를 찾는 데 필요한 시간이 된다. 삼중의 목표란 다음과 같다. (1)침략군의 고립된 분견대에 대항해 지역적인 게릴라 공격을 수행함으로써 적군을 희생시켜 자신을 무장한다, (2)전투지역을 전국적 수준으로 확대함으로써 전략술을 ‘학습한다’, (3)마지막으로, 민족의 모든 피지배계급의 공통된 이해를 표현하여 외부 권력으로부터 내재적 권력으로 헤게모니를 이전시킴으로써 ‘인민 내부의 모순을 해결하고’ 인민을 적으로부터 분리시킨다. 공산당은 바로 그 내재적 권력이 되어야 한다(그리고 장기간 내재적 권력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 이러한 분석의 맹점은 현재 오히려 분명해 보인다. 즉 2차 세계대전이라는 국제적 맥락이 실질적으로 무시된다는 사실, 마치 민족적 세력들만이 반제국주의 투쟁에서 전략적 계산에 포함되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다. 마오의 위대한 구호인 ‘자력갱생’은 잠재적으로 민족주의적 차원을 지니고, 그것은 그 후 중국혁명의 전개과정에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전쟁과 그 정치적 주체의 정치적 합리성에 대한 새로운 역사적 해석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그 결과는 여전히 인상적이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완전한 순환에 도착했고, 이러한 순환의 종결점이 국가가 수행하는 제도적 전쟁행위와 대중의 게릴라 전쟁 간 위계적 관계의 역전에 있다는 것은 아마도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러한 역전이 재래식 전쟁에서 ‘극단으로의 상승’이라는 클라우제비츠의 모델에 영향을 주는 아포리아를 얼마나 ‘해결’하는가? 오히려 그러한 역전은 아포리아를 대체한다. 즉 클라우제비츠의 난점은 전쟁이 ‘절대전쟁’(즉 무장한 인민이 수행하는 전쟁)으로 변형되는 과정에서 국가가 자신이 구축하고 활용해야 하는 ‘도구’의 절대적 주인이 된다고 선험적으로 말할 수 없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마오의 난점은 인민을 군대 즉 혁명정당으로 변형하는 조직의 내재적 권력이 오직 국가 그 자체가 될 때만이 전략적 역전을 완전히 수행하고 정치적 기관으로 남아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문화혁명’ 동안에 마오주의적 비전이 가르쳐 주었던 것처럼 심지어 국가가 혁명적 사건들에 의해 주기적으로 파괴되고 재건되더라도 그러했다.)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민족해방전쟁이라는 상황에서 그 가망성이 매우 낮지만) 그것이 ‘권력을 획득하는 것’을 억제하거나 혁명전쟁을 ‘최종’ 목적(Zweck)까지, 즉 적의 완전한 파괴에 이르기까지 수행하는 것을 억제하는 것(즉 ‘절대 전쟁’을 ‘제한 전쟁’으로 축소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략적 과정의 주체는 모든 상황에서 분열된 주체 또는 주권과 봉기 사이에서 진동하는 주체로 남아 있다. ‘분자 전쟁’(엔첸스베르거), 또는 ‘제국 전쟁’(하트와 네그리) 에 대한 일부 현대 이론가와 논평자는 주체 범주를 단순히 제거하거나 그것을 부정적이거나 불완전한 모습(예를 들어 ‘대중’(multitude))으로 감축함으로써 아포리아를 해결한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는 은유를 제외한다면 어떻게 ‘전쟁’의 범주 그 자체가 유지될 수 있는지를 설명해야 하는 문제가 남는다. 이러한 질문이 ‘게릴라 전쟁’을 둘러싼 토론에서 중심이 되었다는 것도 주목할 수 있다. 게릴라 전쟁은 1960년대와 1970년대, 특히 쿠바 혁명의 승리와 그 모델을 지방의 파르티잔 거점(focos)을 연결하는 대륙적 (또는 심지어 다대륙적) 반제국주의 네트워크를 창출하는 프로젝트로 확장하려는 시도 후에 전면에 부상했다. 이러한 최근 역사의 많은 사건들은 여전히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채 남아 있다. 왜냐하면 결국 군사독재와 미국의 개입, 내부의 분열과 정치적 모험주의에 의해 분쇄된 혁명의 한 시대가 남긴 결과와 유산에 대한 동시대의 평가에 개인적 논란과 배신이라는 문제가 여전히 늘 동반될 뿐만 아니라, 군사화된 계급투쟁의 각 사건이 사실상 지역과 민족의 역사가 다른 이름으로 계속된 것이라는 사실이 지니는 중요도를 그 많은 논쟁이 무시하면서 그 논쟁이 여전히 추상적인 채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다른 기원을 지니는 운동과 이데올로기의 개입을 이해하는 것이 핵심적이다. 그러한 운동과 이데올로기는 내부로부터 마르크스주의적 담론을 사실상 상당히 대체하거나 그것에 영향을 끼쳤다. 라틴 아메리카 경우에 넓은 의미의 ‘정치신학’, 예를 들자면 특히 ‘해방신학’의 형태를 취하는 ‘정치신학’은 그 분명한 사례다. 그러한 개입이 없다면 최근의 멕시코 사파티스타와 같은 ‘포스트-군사적’ 게릴라 운동의 출현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사파티스타는 ‘방어 전략’이라는 클라우제비츠적 관념을 극단으로 밀고 나아갔고, 대중적 저항을 국가권력 장악과 자발적으로 분리함으로써 지배적 사회질서의 점증하는 군사화와 사회운동에 테러행위를 수행하는 예방적 반혁명 기법에 대응했다. 따라서 사파티스타는 정치적 ‘자기억제’라는 점에서 ‘진지전’이라는 그람시적 관념에 새롭고 예상할 수 없었던 내용을 부여했다. 윤리, 정치, 인간학 위에서 환기시킨 문제들 중 많은 것들은 이제 21세기 초반에는 비가역적인 과거 시대에 속하는 것으로 보이며, 그 문제들이 논의된 변증법적 용어들도 그러한 것처럼 보인다. ‘새로운 전쟁’은 정교한 기술과 ‘고대적’ 야만을 결합시키며 외부적 개입을 ‘시민들의’ 적대 또는 내생적 적대와 연결시킨다. 새로운 전쟁은 우리를 둘러싼 세계의 모든 곳에서 벌어진다. 새로운 전쟁은 마르크스가 우선시한 계급 결정론보다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이라는 ‘홉스적’ 모형의 부활로 보인다. 일반화된 적대라는 새로운 전쟁의 모형이 ‘적법한 폭력을 독점’하는 현대 국가제도 이전에 출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이후에 출현했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그렇다. 그 모형은 ‘포스트-제도적’이다. 하지만 그 전쟁이 제국주의의 정복 또는 지배에 대한 저항이라는 중요한 요인을 동반하더라도 그것은 특유한 ‘혁명적’ 내용이나 전망이 없으며 오히려 민족주의적, 종교적, 또는 문화적 내용이나 전망을 지니고 있다. 이는 정치, 전쟁, 혁명이라는 범주를 지속적으로 긴밀히 엮었던 마르크스주의의 고심과 노력의 거대한 순환이 모든 관심을 잃었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첫째, 그것은 정치적 교훈을 깨닫게 한다. 『공산주의자 선언』 이후 150년 이상으로 ‘평화적 전략’(더욱 근본적으로 말하자면, 평화주의적이고 반군사주의적인 혁명 전략)과 ‘무장혁명’ 전략(즉 비판의 무기와 무기의 비판) 양자는 자본주의를 탈안정화하는 데 실패했다. 자본주의를 탈안정화하는 것은 오직 자본주의일 뿐이며, 자본주의는 거대한 영역의 사회적인 무정부 상태 또는 아노미 상태를 발전시킨다. 이는 혁명적 변혁이라는 문제가 잘못 정식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더욱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혁명에서 전쟁이 전략 또는 전략적 도구가 아니라 오히려 조건, 요소이며 근본적인 사회적 변혁이라는 의미에서 어떤 ‘혁명적’ 전망도 착취의 영구적 구조를 다뤄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극단적 폭력의 영구적 구조를 다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전쟁’이 역사유물론의 경계 또는 한계(Grenze)라면 (종교도 마찬가지인데, 부분적으로는 동일한 이유 때문이다), 전쟁은 역사유물론의 갱생(또는 아마도 초월)을 위한 가능성의 조건도 될 것이다. 계급투쟁과 착취 과정이 (다른 요인들도 기여하는) 폭력의 일반경제[일반질서]에 기여한다는 관점에서 계급투쟁과 내전의 최초 등식이 대체되거나 다시 개념화될 수 있다면 그렇다. 그 결과로, 상이한 형태의 ‘전쟁’은 항상 이미 정치의 ‘정상적’ 수단이지만 정치를 만드는 ‘다른 수단’에 대한 탐색은 영구적이며, 잠재적으로 전복적이다.
쿠바 미사일 위기 50년, 남과 북의 민중이 반드시 알아야 할 교훈 - 핵무기는 곧 핵전쟁의 유발 요인 임필수 | 사회진보연대 반전팀 혹자는 현재의 한반도 전쟁 위험이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와 닮았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쿠바 미사일 위기란 무엇이었나? 미국 역사학자 아서 슐레진저는 쿠바 미사일 위기를 ‘인류 역사에서 가장 위험했던 순간’이라고 말했다. 미국과 소련의 핵전쟁이 벌어졌다면 단시간 내에 최소 1억 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했을 것이라는 추산도 있다. 과연 인류 역사의 최고 위험이라 불릴 만했다. 쿠바 카스트로 정권을 전복하려는 미국의 시도, 즉 1961년 4월 피그스만 침공(몽구스 작전)이 실패한 후, 1962년 5월 소련 흐루시초프는 미국의 쿠바 침공을 억제하기 위해 쿠바에 소련 핵미사일을 배치한다는 구상을 제안했다. 7월에 흐루시초프와 카스트로는 비밀합의를 체결했고 미사일 기지 건설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시도는 미국이 터키에 미사일을 배치한 것에 대한 맞대응이기도 했다. 1962년 10월 14일 미국 U-2 정찰기는 준중거리 미사일(사거리 1,000-2,500km) 기지와 중거리 미사일(사거리 2,500-3,5000km) 기지 건설 장면을 촬영했다. 이로부터 13일 간의 쿠바 미사일 위기가 시작되었다. 미국은 공중과 해상을 통해 쿠바를 공격하는 계획을 검토했으나 군사봉쇄를 선택했다. (케네디 정부는 여러 이유 때문에 이른 ‘격리’라고 불렀다.) 미국은 공격용 무기가 쿠바에 전달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했고 쿠바에 건설 중이거나 완성된 소련 미사일 기지를 해체하라고 요구했다. 10월 24일, 후르시초프는 봉쇄는 인류를 핵전쟁의 심연으로 몰아넣은 공격행위라 규정하며 맞대응했으나, 비밀협상 채널이 개설되었다. 이 와중에 소련 선박은 봉쇄를 뚫기 위한 시도를 지속했고 미국은 해군 전함에 경고사격 후 발포하라는 명명을 내렸다. 10월 27일 미국 U-2 정찰기가 격추되면서 즉각적 보복조치가 검토되었으나 케네디는 협상을 지속하기로 결정했다. 10월 28일 양국은 극적으로 협상 타결에 도달했다. 소련은 쿠바의 공격무기를 해체하여 소련으로 되돌려 보내며 이를 국제연합을 통해 검증하고, 미국은 쿠바를 결코 침공하지 않는다고 공개 선언한다는 것이 공개된 합의였다. 하지만 미국은 소련에 대항에 터키와 이탈리아에 배치한 핵탄두 장착 중거리미사일 주피터를 해체하다는 비밀합의도 제공해야 했다. 쿠바 미사일 위기는 세계 외교사의 전설로 남아 있고 국제정치학이나 협상학에는 영감의 원천이다. 그 후 50년 동안 쿠바 미사일 위기를 다룬 수만 페이지의 해석과 분석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당시 미국과 소련 핵전력의 포괄적 전투서열을 다룬 것은 거의 없다. 1962년 10월 중반부터 쿠바 해상봉쇄가 끝나는 1962년 11월 20일까지 미국과 소련의 핵무기 중 일부는 높은 수준의 경계태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미국과 소련의 무기 체계 상태를 상세히 평가하면 위기의 성격을 분명히 파악할 수 있다. 그 결과 쿠바 미사일 위기는 그 이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하고 위험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이번 글에서는 『핵과학자회보』에 실린 로버트 S. 노리스와 한스 M. 크리스텐의 「쿠바 미사일 위기: 1962년 10월·11월의 핵 전투서열」을 소개하며 당시에 발발할 수도 있었던 세계 핵전쟁의 가능성과 위험성을 검토한다. 그로부터 한반도 전쟁 위험에 관한 중요한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쿠바 미사일 위기의 위험성 평가 위기가 최고조가 달할 당시 미국은 약 3,500개의 핵무기가 명령에 따라 사용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반면 소련은 아마도 300-500개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나 많은 규모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양측의 6개 정도의 미사일로도 파국이 벌어질 수 있고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미국의 케네디와 소련의 흐루시초프가 핵전쟁을 시작할 의도가 없었고 핵전쟁을 막기 위해 모든 시도를 다했다는 것은 명백하지만 그들이 예측할 수 없거나 통제할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었다. 1962년 10월 전면 핵전쟁이 발발했을 가능성을 계측하기 위해선 양국의 핵전력 전투서열을 쿠바 인근 지방의 핵전력, 유럽 지역의 핵전력, 세계전력이란 세 범주로 나눠 검토해야 한다. 지방 전력은 쿠바 내부 또는 그 주변에 배치될 수 있는 핵무기를 뜻한다. 지역전력은 유럽에 배치되어 소련의 목표물을 타격할 수 있는 미국 전술핵무기와 소련 서부에 배치되어 유럽의 목표물을 조준한 소련 핵무기를 말한다. 세계전력은 세계적 핵전쟁에 사용되는 전략핵무기로서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 잠수함 발사 탄도미사일(SLBM), 장거리 폭격기로서, 이는 미국과 소련, 상대방 영토에 도달할 수 있다. 쿠바 인근 지방의 핵전력 쿠바 또는 그 인근에서 핵무기가 사용될 가능성이 가장 높았던 시나리오는 쿠바를 침입한 미군을 격퇴하기 위해 소련이 전술핵무기를 사용하는 것이었다. 만약 미국 군인이 피살되었다면 미국은 보복하고 소련은 그에 대응해야 했을 것이다. 미국의 군사봉쇄가 개시된 10월 24일 시점에 쿠바에는 다섯 개 유형의 핵탄두 158개가 배치되었거나 배치될 예정이었다. 이는 1990년대 초반까지 미국이 정확히 몰랐던 사실이다. 그 중 95~100개가 사용될 수 있는 상태였다. 중거리 탄도미사일 SS-5는 쿠바에 도착하지 않았다. 10월 28일 준중거리 탄도미사일 SS-4 중 6-8기가 작전태세에 도달했다. 또한 핵무기를 탑재할 수 있는 폭격기 IL-28(일류신-28)은 아직 나무상자에 담겨 있었다. 가장 수가 많고 위험한 사용가능 핵무기는 대지 순항미사일, FKR-1 2개 연대를 위한 80개의 핵탄두였다. 만약 미국이 침공했다면 이 미사일이 관타나모의 미 해군기지와 쿠바 해안의 미군 해병대 합동부대를 공격했을 것이다. 여전히 알려지지 않은 사실은 미국의 쿠바 침공을 위한 핵무기 계획이다. 작전계획이 처음 수립되었을 때는 미 합동참모부가 핵무기 사용을 고려했으나 10월 31일에는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또한 쿠바에 배치된 소련군을 지휘하는 대장 이사 플리예프가 FROG 단거리 미사일(일명 루나)이나 FKR-1 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는지 여부에 대해서도 논쟁이 많다. 그러나 학자인 스티븐 자로가는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최근 공개된 문서에 따르면 크레믈린의 특별한 허가가 없다면 쿠바에 배치된 소련군 지휘부가 FRK, 루나, IL-28에 핵탄두를 장착할 수 없다. 하지만 여러 증거를 볼 때 모스크바는 핵무기 사용을 막을 수 있는 실제적인 기술적 수단이 없었고, 쿠바 지휘부는 전쟁이 발발한다면 핵무기 보관 부대의 동의라는 조건에서 모스크바의 승인 없이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었다.” 또한 그는 소련의 전술핵무기 배치가 핵전쟁 억지라는 목적을 지닌 게 아니라 실제 사용을 염두에 둔 것이라고 주장했다. “소련은 전술핵무기의 존재를 공개할 계획이 전혀 없었다. 전술핵무기의 존재는 소련이 붕괴한 후 1990년대 초반에야 세상에 드러났다. 전술핵무기는 소련이 쿠바를 침공할 때 사용하기 위해 배치되었고 미국의 정보기구는 당시에 그 사실을 전혀 몰랐다.” 미국으로서는 준중거리 미사일 SS-4가 미국 도시를 조준하는 게 가장 심각한 상황이었다. 쿠바에 배치된 소련 미사일부대의 지휘자였던 이고르 스테첸코에 따르면 모스크바에서 미사일 해체 지시가 내려온 10월 28일 시점에 6-8기만이 작전태세에 도달할 수 있었다.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미사일이 미국 도시 중 어디를 조준했는지 알려진 바가 없다. 동부해안을 따라, 사거리 1,300km 내에는 북쪽으로는 워싱턴디시, 서쪽으로는 뉴올리언즈, 휴스턴, 달라스, 북서쪽으로 신시내티가 있다. 정확성이 매우 떨어진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도시 내부 또는 주변에서 1 메가톤의 폭파로 수십만 명이 사망할 것이다. 미국과 소련의 유럽지역 핵전력 유럽 전역(戰域)에서 미국과 나토, 소련은 준중거리 미사일, 중거리 미사일, 전폭기를 보유했다. 만약 핵전쟁이 유럽과 소련 서부 지역에 한정된다면 양측이 보유한 핵무기 규모는 비슷했다. 하지만 핵전쟁에 관한 미국의 최고 작전계획인 단일통합작전계획(SIOP)에 따라 대서양 사령부와 유럽사령부의 작전계획이 통합되었기 때문에 핵전쟁이 유럽과 소련 서부에 한정될 가능성은 매우 낮아졌다. (SIOP은 사령부들의 중복 공격을 피하기 위해 공격목표를 조정하려고 도입되었다.) 하지만 위기 상황에서 유럽의 역할을 검토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 1962년 미국은 약 4,375개의 핵무기를 유럽에 배치했다. 대부분은 전술핵무기로, 155mm 포탄과 203mm 포탄, 나이키 허큘리스 지대공 미사일, 핵지뢰, 단거리 미사일로 구성되었다. 그렇지만 약 10%, 도는 450개의 핵무기가 탄도미사일(토르, 주피터), 순항미사일(마타도르, 메이스), 미공군 전폭기, 미해군의 항공모함 탑재기에 배치되었다. 미국과 나토의 전폭기는 독일, 이탈리아, 그리스, 터키, 영국, 네덜란드의 기지와 미국 6함대 항공모함에 배치된 핵폭탄을 공급 받을 수 있었다. 소련은 550개의 SS-4, SS-5 미사일을 보유하고 있었다. 다수는 유럽의 목표물을 겨냥하고 있었고, 일부는 태평양 연안 지역의 미군 기지와 미국의 동맹국을 겨냥했을 것이다. 소련의 전폭기도 서유럽을 타격할 임무를 안고 있었을 것이다. 미국과 소련의 세계 핵전력 만약 쿠바에서 핵무기가 사용되었다면 핵전쟁의 단계적 상승이 일어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전략핵무기의 사용가능성도 상당히 컸다. 10월 22일 케네디 대통령은 대국민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쿠바에서 서반구 어떤 국가로 미사일을 발사한다면 소련이 미국에 공격을 가한 것으로 간주하는 게 우리의 정책이 되어야 한다. 이는 소련에 대한 전면적 보복 대응을 요구할 것이다.” 1962년 시점에서 미국의 전략 핵전력 규모는 소련보다 수 배 더 컸고, 훨씬 더 신뢰성이 높았다. 예를 들어 10월 시점에 완전히 준비를 갖춘 3,500개의 핵무기를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었고, 이는 도합 6,300 메가톤의 위력을 지녔다. 경계 태세가 최고조에 오른 11월 4일에 미국 전략 공군 사령부는 1,479개의 폭격기, 182개의 탄도미사일, 총합 2,952개의 핵무기와 1,003개의 공중급유기를 대기시켜서 보복공격을 준비했다. 소련은 미국 본토에 도달할 수 있는 약 42개의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보유했다. 잠수함발사 탄도미사일은 보유하지 못했다. 160개의 장거리 폭격기는 무시무시한 미국-캐나다 공중방어체계에 대면해야 했다. 미국-캐나다 방어체계는 공대공 요격 핵미사일을 탑재한 전투기, 지대공 요격미사일 BOMARC, 나이키 허큘리스 지대공 미사일로 구성되었다. 소련의 장군 아나톨리 그리코프에 따르면 흐루시초프와 그의 군사고문은 1962년 시점에 “미국의 전략 핵전력이 소련보다 17 대 1로 앞선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쿠바 미사일 위기에 관한 새로운 인식 쿠바 미사일 위기는 양측의 핵전력이 상대적으로 미완성된 무기경쟁의 초기 단계에 전개되었다. 1970년대 후반에는 미국과 소련의 핵전력이 대략적으로 평형성을 갖추게 되었다. 미국과 소련의 핵경쟁이 더욱 위험한 단계에 이른 것이다. 이제 우발적이든 아니면 고의적이든 간에 어떤 사건이 발생하면 폭포효과로 인해 곧바로 대재앙을 낳게 되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러한 조치들은 매우 논리적이고, 신중하며, 별로 과격하지 않은 대응으로 인식되었다는 점이다. 혹자는 쿠바 미사일 위기가 한반도 전쟁위험에 주는 교훈을 위기를 이겨내는 리더십이나 협상의 기술에서 찾는다. ‘합리적 선택을 위한 시간을 확보하라’, ‘열린 토론을 통해 대안을 만들어라’, ‘오해가 생겼을 때 바로잡을 수 있는 안정적인 소통경로를 확보하라’ 등등. 물론 이는 어떤 위기에 대처했을 때나 필요한 덕목일 것이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 쿠바 미사일 위기가 주는 교훈은 매우 단순한 것이다. 핵무기를 개발 또는 도입해 배치하려는 구상이나 고도의 핵무기 체계를 운영하는 것 자체가 핵전쟁 유발요인이라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정치지도자의 리더십이나 협상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핵위기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핵무기가 존재하기 때문에 핵전쟁이 벌어질 위험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미국의 세계적 핵전력은 북한을 비롯해 세계 곳곳에서 핵개발 계획을 자극한다. 역으로 북한의 핵개발 프로그램은 미국의 한반도 핵우산 정책, 즉 북한에 대한 핵공격 계획을 영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핵무기는 억지력의 원천이 아니라 전쟁 유발의 원천이 된다. 바로 이 사실이 남과 북의 민중이 분명히 깨달아야 할 교훈이다. <끝>
강정마을 천막 야만적인 강제철거 강력히 규탄한다 해군기지 불법공사 감시활동 보장하라 과도한 공권력 투입으로 강동균 마을회장 등 4명 연행, 부상자 속출 1. 오늘(5/10) 오전 8시경 제주 서귀포시는 공무원 약 100여명, 경찰병력 약 800여명을 투입해 강정마을 해군기지 공사장 주변 천막을 강제 철거했다. 이 과정에서 강동균 마을회장 등 4명이 연행되고 마을 주민 한 명이 6m 높이의 강정천 다리 아래로 떨어져 중상을 입는 등 과도한 공권력 투입으로 인한 피해가 잇달았다. 제주해군기지건설 저지를 위한 전국대책회의(이하 전국대책회의)는 과도한 공권력을 앞세운 강정마을 천막 강제철거를 강력히 규탄한다. 2. 행정대집행 과정에서 서귀포시와 서귀포 경찰서는 40여명에 불과한 강정마을 주민들과 평화활동가들이 머무르고 있던 천막을 철거하기 위해 900여명에 달하는 공권력을 투입했다. 강동균 마을회장을 비롯한 마을 주민들이 할 수 있었던 것은 이에 저항하기 위해 어떠한 물리적 수단도 없이 천막에 쇠사슬을 묶고 스스로의 목을 천막에 걸어 행정대집행에 저항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행정대집행은 이들에 대한 안전조치가 전무한 상황에서 진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강동균 마을회장이 수 초간 공중에 매달려 부상을 입었고 이에 불구하고 곧바로 연행되었다. 3. 그런데 이처럼 비폭력적으로 저항한 주민들의 20여배의 공권력을 동원해 행정대집행을 실시한 이유는 그 자리에는 화단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900여명의 공권력 중 어느 하나도 주민들의 안전과 인권을 고려하지 않았고 주민들은 길가의 잡초만도 못하게 짓밟혔다. 무리한 공권력은 사람의 목숨을 위협하면서까지 인정사정없이 자행되었다. 천막 설치와 관련해 강정마을회는 두 차례에 걸쳐 불법공사 감시 등을 목적으로 강정천변 하천부지 점용사용 신청서를 서귀포시에 제출하였으나 정부는 이를 불허하고 협의나 대화 대신 행정대집행을 강행해 이번 사태를 야기했다. 화단조성이 900여명의 공권력을 동원할만큼 시급하고도 중차대한 일이었는지 정부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 평화롭게 저항하는 주민들을 고착시키고 강제로 나무와 꽃을 심을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자연과 마을 공동체를 파괴하는 불법 해군기지공사부터 중단해야 할 것이다. 4. 해군기지 공사장 주변 천막은 지난 11월 해군기지 불법공사와 공사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환경오염을 감시하고 불법공사에 대한 항의표시로 강정마을회와 군사기지 저지와 평화의 섬 실현을 위한 범도민 대책위원회(제주 범대위)에서 설치하였다. 해군과 시공업체들의 불법행위를 수수방관하는 정부를 대신해 강정마을 주민들은 공사장 앞에 천막을 설치하고 해군기지건설로 인한 하천오염 실태 및 불법공사를 감시하는 활동을 벌인 것이다. 정부는 해군기지 불법공사를 처벌하기는커녕 이를 감시하고 항의하는 강정마을 주민들을 폭력적으로 봉쇄하고 억압한 것은 공권력이 불법행위의 방패막이임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5. 정부의 무자비한 탄압은 정당하게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힘없는 사람들을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천막을 철거하고 투쟁 현장을 무력으로 억누른다고 해서 제주해군기지건설에 반대하는 우리의 의지를 결코 꺾을 수 없다. 정부는 즉각 연행자들을 전원 석방하고 불법 해군기지공사를 중단해야 한다. 전국대책회의는 강정주민들과 함께 평화로운 방식으로 해군기지건설 저지 투쟁을 계속해 나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