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 2025-12-20

    국제무역과 금융의 분절화, 달러체제의 위기 가능성과 한국경제

    2026년 세계경제·한국경제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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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년 세계경제·한국경제 전망

    1. 서론: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로 형성된 국제무역과 금융 질서의 변화

     

    트럼프의 재집권으로 세계경제는 예측 불가능한 정치권력이 가하는 충격을 맞고 있다. 지난해 말 사회진보연대는 “트럼프주의자가 제시하는 미국의 대외경제정책으로 인해 길게는 2차 세계전쟁 이후, 짧게는 1990년대 탈냉전과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의 시대에 미국이 주도했던 규칙 기반 다자적 질서가 최종적으로 후퇴할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된다”며, “중국이 권위주의와 국가자본주의를 강화하는 가운데, 트럼프 행정부가 중국과의 ‘전략적 경쟁’을 넘어 탈동조화를 추구하고 일방적이고 불확실성이 높은 거래에 몰두한다면, 세계는 미국과 중국이라는 두 대국이 ‘공공악’을 제공하는 ‘G 마이너스 2’의 시대로 진입하게 될 것”이라 전망했다. (임지섭, 「구조적 위기와 불확실성이 교차하는 세계경제」, 《계간 사회진보연대》, 2024년 겨울호)

     

    불행히도 이 예측이 현실이 되고 있는 지금, 이번 경제전망은 수많은 경제학자가 논하고 있는 국제무역·금융의 ‘분절화’(fragmentation)의 양상을 확인하며, 규칙 기반 다자적 경제질서의 해체가 세계경제와 한국경제에 어떤 경제적 충격을 줄 것인지 보고자 한다.

     

    먼저 ‘길게는 2차 세계전쟁 이후, 짧게는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시대에 미국이 주도했던 질서’가 무엇인지 짚자. 미국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의 애덤 포즌 소장은 트럼프 재집권이 단지 무역과 같은 경제적 측면에만 아니라 세계 질서에 더 심원한 충격을 가한다며, 2차 세계전쟁 이후 미국이 세계에 제공해 온 공공재를 더는 제공하지 않겠다는 트럼프 행정부의 위협에 주목하자고 말한다. 포즌은 그런 글로벌 공공재의 사례로 항공·해상에서의 안전한 항행 능력, 재산이 수용으로부터 안전하다는 확신, 국제무역의 규칙, 그리고 거래 및 자산 저장을 가능케 하는 안정적 달러 자산을 드는데, 이를 ‘안보, 법치, 화폐’라 요약할 수 있겠다.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이들 공공재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재생산을 위한 것으로, 포즌은 트럼프 행정부가 자본주의 체계를 위협하고 있다고 비판하는 셈이다.

     

    이 글은 안보, 법치, 화폐 중 마지막에 가해지는 위협에 초점을 맞추겠다. 화폐 관리의 측면에서 2차 세계전쟁 이후의 질서는 미국이 관리통화제를 확립하고 달러를 세계화폐로 삼으며 형성됐다. 20세기 중반에는 미국의 경제성장과 재정을 주요 토대로 하여 달러의 가치를 지지했으나, 스태그플레이션·재정위기 이후 신자유주의적 정책개혁은 세계화폐로서 달러 가치를 지지하는 방식을 변화시켰다. 미국 민간의 구조조정에 상응하여, 신흥시장의 경제성장에 기초한 수출달러 환류를 주요 토대로 삼은 것이다.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로 형성된 질서 하에서 국제무역·금융의 핵심 패턴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미국의 상품시장 개방과 무역적자 확대에 상응해 (중국을 필두로 한) 신흥시장의 수출 부문이 성장했다. 미국 외 선진국 역시 신흥시장으로부터 저부가가치 제품을 수입하고 고부가가치 제품을 수출하는 분업 구조 속에서 성장했다. 미국은 기술혁신을 통해 첨단 산업에서 우위를 유지하는 한편, 자국 산업의 구조조정과 세계경제의 성장이 결합된 결과로 이른바 ‘특권적 이익’(exorbitant privilege)을 누리게 됐다.

     

    둘째, 미국이 누리는 ‘특권적 이익’의 핵심은 낮은 국채 금리, 즉 나머지 세계로부터 가장 낮은 비용으로 차입할 수 있는 능력이다. 신흥시장과 무역흑자국의 수출달러 환류는 달러와 미 국채의 가치를 지지했다. 또한 저임금을 토대로 한 신흥시장의 수출 확대는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이 낮은 금리를 유지하더라도 과도한 인플레이션에 직면하지 않게 했다. 그 결과 금 태환 보장이 사라진 이후에도 달러(미 국채)는 안전자산의 지위를 더욱 공고히 했다. 이렇게 무역적자는 재정조달 비용을 낮추는 역할을 했고, 미국은 1970년대의 재정위기를 넘어 재정적자를 더 확대할 수 있었다. 무역적자·재정적자는 대규모 자본유입을 수반했지만, 낮은 금리 덕에 미국의 대외부채는 상대적으로 완만한 속도로 증가했다.

     

    셋째, 앞의 두 요인이 결합하면서 미국은 두 번째 특권적 이익을 얻게 된다. 이는 미국의 낮은 차입금리와 성장하는 나머지 세계에 대한 투자수익률 간의 격차다. 미국의 민간 부문은 낮은 비용으로 차입해 신흥시장과 성장하는 국가들에 대한 직접투자(FDI)와 주식 투자를 확대하고 대외자산을 축적했으며, 그 수익률 격차로 이윤을 증대시켰다. 이로 인해 미국의 대외자산 증가 속도는 대외부채 증가 속도를 상회했다. 물론 무역적자·재정적자에 따른 자본유입 규모가 대외투자 규모를 초과했기 때문에 미국은 1980년대 말 이후 줄곧 순대외채무국이었지만, 순대외채무의 증가 속도는 상대적으로 완만했다. 이러한 금융적 우위는 상술한 기술적 우위와 결합해 미국의 경제성장을 뒷받침했다.

     

    넷째, 미국과 선진국의 신흥시장 대상 투자, 특히 FDI는 신흥시장의 수출 부문에 자본과 기술을 공급했다. 이는 다시 신흥시장의 수출 확대로 이어지며, 첫째부터 설명한 패턴이 반복되는 순환 구조를 형성했다. (이런 패턴이 뒷받침하는 미국의 ‘특권적 이익’에 대한 더 깊은 설명은 케네스 로고프의 『달러 이후의 질서』(2025; 국역: 윌북, 2025)를 참고할 수 있다)

     

    이렇듯 1990년대 이래 달러(미 국채)의 가치는 이전처럼 미국의 재정이나 달러 기반 국제금융 질서에 참여하는 몇몇 선진국에 의해서만 지지되지 않았다. 그 가치는 미국·선진국과 신흥시장 간 상품과 자본 거래의 확대로서 무역과 금융의 세계화와 그 결과로 세계경제, 특히 신흥시장 경제가 성장한 것에 의해 지지되었다. 따라서 포즌이 말하는 화폐 관리에 대한 위협이나, 로고프가 말하는 ‘달러체제(dollar regime)의 위기’란, 단지 미국 내의 재정적자가 심각하다는 얘기만이 아니라 상술한 국제무역·금융의 패턴 전반이 위협받고 있다는 뜻이다.

     

    마르크스주의적 입장에서 그 구조적 원인은 신흥시장의 필두인 중국경제의 이윤율 하락이다. 이는 2007~09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미국보다 더 낮아진다. 당시 경제학자들은 중국이 자본축적에만 의존한 성장의 한계에 직면했다고 지적했다. 중국이 ‘중진국 함정’에서 벗어나려면 기술혁신으로 총요소생산성을 높여야 한다며 그 수단으로 저임금·낮은 위안화 가치에 의존한 성장모델의 개혁과 FDI 유입의 질적 고도화를 권고했다. 또한, 세계 금융위기 이후 미국의 무역적자·재정적자 확대가 지속 가능한가에 관한 의문이 더욱 강해졌다. 2010년대 중반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는 세계경제 불균형의 두 축인 미국의 과도한 소비와 중국의 과도한 저축을 감축하며 달러 체제의 위기를 예방할 수단으로 G2의 협력에 기초한 ‘아시아판 플라자합의’(위안화 절상)를 제안했다. 이는 미국 인민의 생활수준을 낮추고, 중국 인민의 생활수준을 높여 중국의 내수를 활성화함과 동시에, (이를 명시한 것은 아니나 암묵적으로는) 중국 인민에 대한 중국 당국의 통제를 약화하며, 중국 자본과 중국에 투자된 선진국 자본의 단기적 이익은 침해하나 장기적으로는 개혁과 생산성 향상을 유도하는 안이었다.

     

    그러나 정치적 요인들로 인해 이러한 대안은 채택되지 않았고, 앞서 살펴본 국제무역·국제금융의 기존 패턴에 대한 위협은 오히려 심화됐다. 시진핑 체제하의 중국공산당은 위안화 가치와 임금 통제, 보조금에 기반한 수출 구조를 개혁하고 민간소비를 확대해 과도한 무역흑자를 축소하는 대안 대신, 국가자본주의를 강화하는 경로를 선택했다. 그 결과 국유 부문 중심의 과잉투자와 비효율이 누적됐고, 이는 지방정부 재정 구조와 결합해 부동산 부문의 불균형과 거품 붕괴를 심화시키며 현재까지 중국경제에 중대한 하방 압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한편 미국에서는 장기화된 무역적자와 중국의 불공정 무역 관행에 대한 불만이 정치적으로 결집되며 트럼프 행정부의 출범으로 이어졌다. 이후 미국 공화당과 민주당은 (1990년대의 초당적 합의였던 ‘워싱턴 컨센서스’를 대체하는) 중국과의 ‘전략적 경쟁’ 노선에 초당적 합의를 형성했으나, 정책 수단에서는 차이를 보였다. 트럼프 1기 행정부가 대중 관세를 주요 수단으로 활용한 반면, 바이든 행정부는 대중 관세를 유지하는 동시에 반도체를 중심으로 한 특정 기술·제품에 대한 수출통제와 투자 규제를 강화했다.

     

    중국은 한편으로는 국유 자본의 과잉과 수익성 악화라는 문제에 직면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미·중 전략적 경쟁의 심화에 대응하면서, 성장과 안보를 결합하는 ‘쌍순환 전략’을 추진하여 국가자본주의를 더욱 공고화했다. 이 전략은 기술과 공급망의 자립을 목표로, 국내적으로는 정부투자와 보조금을 통해 산업 고도화를 추진하는 한편, 대외적으로는 자원수출국과 개발도상국을 대상으로 국유 부문의 과잉자본 수출을 확대하는 방식으로 전개됐다. (미국의 ‘전략적 경쟁’과 중국의 쌍순환 전략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다음을 보라. 임지섭, 「심화하는 전략적 경쟁, 어떻게 볼 것인가?」, 《계간 사회진보연대》, 2023년 가을호)

     

    세계 금융위기 이후 미국과 중국, 이른바 G2의 정책 노선이 변화하면서 앞서 살펴본 국제무역·국제금융의 패턴이 달라졌다는 연구가 최근 급증했다. 이러한 변화를 설명하는 핵심 키워드는 ‘분절화’(fragmentation)다. 분절화의 시작 시점을 두고는 학자마다 견해가 갈려, 멀게는 세계 금융위기 직후인 2010년 전후부터, 가깝게는 트럼프 1기 행정부가 출범한 2017년 이후로 본다. 그러나 세계경제에서 분절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인식 자체는 이제 지배적인 시각이 됐다. 최근 몇 년의 논의에서 분절화는 주로 ‘블록화’를 의미한다. 즉 1990~2000년대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과 신흥시장 간 상품·자본 거래가 확대되던 세계화 국면에서 벗어나, 미국을 필두로 유럽·동아시아의 선진국과 일부 신흥시장이 결합한 미국 블록과, 중국을 중심으로 이른바 ‘글로벌 사우스’라 불리는 다수의 개발도상국이 포진한 중국 블록 사이에서 무역과 금융 거래가 감소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분절화·블록화의 주요 원인으로는 지정학적 요인이 지목된다. 이에 따라 경제 분석에서도 지정학, 나아가 지경학(geoeconomics)의 관점을 적극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이 점차 확산하고 있다. 민간기업의 이윤 극대화와 국민경제의 성장을 중심에 둔 자유주의적 경제학의 시각과 달리, 오늘날에는 중상주의적 전통에 가까운 방식으로 국가들이 무역, 제재, 투자와 같은 경제적 수단을 활용해 전략적·정치적 목표를 추구하는 행위가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는 시각이다. 즉 경제를 상호 간 질서를 구축하고 상호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른바 ‘윈win-윈win 게임’)보다는, 한쪽이 다른 쪽의 것을 뺏는 것(이른바 ‘윈win-루즈lose 게임’)으로 보자는 것이다.

     

    반면 사회진보연대는 2010년대의 경제 정세 변화를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의 한계 하에서 인민주의·권위주의의 난입’으로 본다. (사회진보연대, 「25주년 기념좌담」, 《계간 사회진보연대》, 2023년 겨울호.) 요컨대, 성장의 한계를 일으키는 원인인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노동자연합의 건설로 대체하거나(마르크스주의), 한계 안에서도 기존 질서를 재생산하며 최대한의 성장을 일으키려 노력하는(주류경제학) 대신,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는 내버려두면서도 이를 재생산하는 제도와 이념을 공격하며 경제성장을 해침으로써 인민 전반의 생활수준을 하락시키고, 나아가 내부 대결을 조장해 ‘공멸’로 이끄는 경향이 지배력을 얻고 있다. 포즌은 이를 모두가 피해를 입는 ‘루즈(lose)-루즈(lose) 게임’의 도래로 표현한다.

     

    이런 기준에서 사회진보연대는 ‘전략적 경쟁’ 국면에서도 트럼프 1기 행정부와 바이든 행정부의 접근 방식은 성격이 다르다고 보았다. 전자가 중국 블록과의 ‘윈-루즈 게임’을 추구했다면, 후자는 여전히 규칙 기반의 다자적 질서를 유지하면서 그로부터 이탈하는 중국 블록을 견제하고 동시에 재포섭하려 했다는 것이다. (앞서 인용한 임지섭의 글을 참조하라) 그런데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포즌, 옵스펠트, 로고프와 같은 논자들은 보편적 기본관세와 상호관세를 중심으로 한 트럼프 2기 정책이 기존의 분절화를 한층 더 심화시킬 뿐 아니라, 초점 자체도 변화시키고 있다고 우려한다. 바이든 행정부나 심지어 트럼프 1기와도 다르게, 트럼프 2기의 통상정책은 중국보다는 오히려 미국 블록 내부의 경제에 더 큰 위협을 가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요컨대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속에서 확대됐던 선진국과 신흥시장 간 상품·자본 거래는 2010년대를 거치며 블록화라는 형태로 정체됐는데, 트럼프 2기 정책은 여기서 더 나아가 진정한 의미의 ‘미국 우선주의’, 즉 미국과 나머지 세계의 대결 구도를 지향하고 있다는 평가를 낳고 있다. 이러한 노선이 지속될 경우 미국 블록 내부의 분절화가 심화되고, 궁극적으로는 세계경제가 1930년대 대공황 이후 제2차 세계전쟁까지의 시기처럼 안정적인 세계화폐와 국제무역·금융 질서가 부재한 상태로 회귀할 수 있다는 우려도 심각하게 제기되고 있다.

     

    이 글은 이러한 질서 해체의 양상과 경제적 효과를 무역 측면(2장)과 금융 측면(3장)으로 나눠 논한 후, 그러한 세계경제 속에서 한국경제가 처한 상황(4장)을 살펴보겠다.

     

     

    2. 국제무역 분절화의 양상과 그 경제적 효과

     

    1) 국제무역의 분절화: ‘블록화’에서 ‘탈세계화’(de-globalization) 국면으로

     

    무역 세계화의 대표적 지표는 세계 GDP 대비 무역량의 비율이다. 이 비율이 상승하면 무역의 세계화가 심화되고, 하락하면 ‘탈세계화’가 진행된다고 해석할 수 있다.

     

    아래 [그림]의 상단을 보면, 2007-09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이 비율이 뚜렷한 상승 없이 둔화·정체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을 가리켜 ‘슬로벌라이제이션’(slobalization)이라 부르기도 한다. 해당 지표는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급락했다가 일시적으로 회복했으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한 2022년부터 다시 하락 국면에 들어섰다. 당시에는 이 하락이 단기간에 그칠 것이라는 전망도 있었지만, [그림]의 하단에서 확인할 수 있듯 최근 IMF를 비롯한 주요 경제기구는 트럼프 2기 관세정책의 충격으로 하락세가 장기화하리라 전망한다. 하락세는 세계 수준만이 아니라 주요 경제권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며, 특히 2010년대 이래 중국의 GDP 대비 무역 비중 하락이 두드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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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무역의 세계화와 탈세계화 (자료출처: CEPR, IMF)

    위: 1870-2023년 세계 GDP 중 무역량(수출+수입)의 비율 (%)

    아래: 2008-2030년 세계 및 각국 GDP 중 수출(왼쪽)과 수입(오른쪽)의 비율과 그 전망 (%)

     

    장기적 관점에서 보면, 무역 세계화의 지표가 1915년까지의 상승, 1915~1945년의 하락, 1945~2010년의 재상승이라는 세 국면을 거친 뒤, 2010~2022년의 정체 국면을 지나 2022년 이후 본격적인 하락, 즉 ‘탈세계화’ 국면에 진입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는 2010년대 중반부터 무역의 ‘블록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분석이 다수 제기돼 왔다. 2015년 이후 세계경제를 미국·중국·EU·기타로 나눠 볼 때, 미국과 중국은 서로에 대한 교역 비중이 뚜렷하게 감소했다. 대신 미국은 EU, 기타 국가와의 수입·수출 비중을 확대했고, 중국은 EU에 대한 수출 비중과 기타 국가와의 수출·수입 비중을 늘렸다. 이 과정에서 미국과 중국을 제외한 다수 국가도 관세, 무역 규제, 지정학적 요인 등으로 인한 무역비용 변화에 따라 미국 블록 또는 중국 블록으로 편입되는 무역의 블록화가 진행됐다. 그런데 이는 일부 국가의 경제적 이익에 부합하지 않았고, 양 블록 전반의 성장률을 낮추는 효과를 가한 것으로 평가된다. 따라서 무역 블록화는 순수한 경제적 논리라기보다 지정학적 갈등의 결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무역 블록화는 특히 에너지와 반도체 부문에서 두드러진다. 에너지 무역의 경우, 미국이 셰일혁명을 통해 2020년을 기점으로 에너지 순수출국으로 전환한 데 이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유럽이 러시아산 에너지 수입을 중단하고 중국과 인도 등이 유럽이 수입하던 몫을 대신 수입하면서, 미국 블록과 중국-러시아-중동 블록 간의 분절화가 뚜렷해졌다. 반도체 무역에서는 미국이 ‘전략적 경쟁’의 일환으로 고급 반도체와 반도체 제조 장비가 중국으로 수출되는 것을 통제하면서, 미국-유럽-대만·한국-동남아 일부 국가로 구성된 공급망 연계가 강화됐다. 이러한 반도체 공급망 분절은 미중 양국 모두에 경제적 손실을 초래하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제 2022년 이후 본격화된 무역의 ‘탈세계화’ 국면에서, 국제무역 패턴 변화의 구체적 특징을 살펴보자.

     

    2) 이른바 ‘2차 차이나 쇼크’의 경제적 효과

     

    ① 중국의 무역, 특히 수출 구성의 변화: 트럼프 2기 대중 관세의 효과는 상대적으로 제한적

     

    2020년대 들어 중국이 추진한 ‘쌍순환 전략’의 효과는 국제무역 측면에서 이른바 ‘2차 차이나 쇼크’로 나타나고 있다. 중국의 GDP 대비 수출·수입 비중은 2010년대에 걸쳐 꾸준히 하락해, 세계시장으로부터의 이탈과 ‘자립’이 진전되는 듯하다. [그림]에서 보듯 수출·수입의 절대 규모도 2022년 이후 증가세가 둔화하기 시작했다. 이는 수출달러 환류의 주요 기반으로서 중국의 역할이 축소됨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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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중국의 수출액(위)과 수출 성장률(아래)

    위: 2020년 11월~2025년 10월 중국의 총수출액(왼쪽) 및 미국·EU·ASEAN 대상 수출액(오른쪽) (달러, 월 단위)

    아래: 동기간 중국의 수출 성장률 (%, 월 단위, 전년 동월 대비)

    (자료출처: MacroMicro, TradingEconomics)

     

    수출과 수입의 구성도 변하고 있다. 수출에서는 전자제품·기계류·고부가가치 제품의 비중이 상승했고, 전기차·에너지 부문 신산업의 수출과 생산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반도체 산업에서 중국은 수입이 통제된 첨단 반도체를 자체 생산하지는 못하나, 선진국의 데이터센터 투자가 확대되며 이에 필요한 구형(legacy) 반도체를 사실상 독점 공급하고 있다. 다만 중국 제조업 무역흑자의 약 70%는 여전히 저가 소비재와 중간재에서 발생한다.

     

    수출 대상국의 구성도 바뀌고 있다. [그림]에서 보듯 2022년 이후 중국의 대미 수출 규모는 감소세로 전환됐다. 총 수출 중 대미수출 비중 역시 하락하다가 2025년 트럼프 2기 행정부의 대중 관세 부과 이후에는 약 15%까지 떨어져, 미국은 ASEAN과 EU에 밀려 중국의 수출국 중 3위로 내려갔다. 이 때문에 포즌은 트럼프 2기 행정부의 대중 관세가 중국의 수출에 부정적 충격을 주기는 하겠지만, 시간상으로는 트럼프 1기 때보다, 공간적으로는 관세를 처음 맞은 다른 국가들과 비교하면 충격이 상대적으로 제한적일 것으로 전망한다.

     

    한편 중국의 수입은 여전히 중간재와 자본재 중심으로 글로벌 공급망 의존이 지속되고 있으나, 일부 중간재와 기계 부문에서는 국산화가 진행되며 수입 의존도가 완만히 낮아지고 있다. 동시에 에너지와 원자재는 러시아·중동·아프리카·동남아 등 ‘글로벌 사우스’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는 한편, 이들 지역에 대한 투자를 확대하며 경제적 종속 관계를 강화하는 전략도 병행한다. (이는 3장 1절에서 다룬다)

     

    ② ‘2차 차이나 쇼크’의 파급력: 개발도상국의 수출 억제와 세계적 무역장벽 강화

     

    문제는 이러한 중국의 전략이 트럼프 2기 행정부의 대중 관세 충격을 완화하는 데에는 일정 부분 기여했으나, 동시에 EU·일본·한국 등 미국 외 선진국과 ASEAN을 비롯한 ‘글로벌 사우스’와의 새로운 무역 갈등을 촉발한다는 점이다. 이는 중국의 수출 전환 전략에 내포된 구조적 한계를 보여준다.

     

    중국은 전기차·배터리·반도체·전자기기 부문에서 정부투자와 보조금에 기반한 과잉생산을 통해 저가 공세를 펼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이른바 ‘2차 차이나 쇼크’가 선진국 경제를 압박하고 있다. 예컨대 EU의 대중 무역적자는 최근 급격히 확대돼, 2025년에 연간 3375억 유로로 사상 최고 수준에 이르렀다. 트럼프 2기 행정부의 대중 관세 부과 이후 중국이 대미 수출 감소를 대EU 수출 증가로 보완하며 이런 추세는 더욱 강화됐다. 이에 현재 진행 중인 EU의 불공정 무역 조사 가운데 다수가 중국 관련 사안이며, 2024년 EU의 반덤핑 조치 74건 중 46%, 반보조금 조치 11건 중 38%가 중국산 수입품을 대상으로 한다.

     

    ‘2차 차이나 쇼크’의 충격은 선진국에 그치지 않고 오히려 ‘글로벌 사우스’에서 더욱 크게 나타나고 있다. 여전히 수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저숙련 제품 부문에서, 중국은 민간소비 부진과 대미 수출 의존 축소의 결과로 개도국 시장에 물량을 집중적으로 밀어내고 있다. 이로 인해 저소득·중소득국 전체의 저숙련 제품 수출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해당 국가들의 노동인구 중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보다 28%p나 높다. 이는 중국이 가난한 나라들에서 수천만 개의 제조업 일자리를 떠받칠 수 있는 ‘수출 공간’을 지속적으로 점유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다른 개도국에 대한 중국의 생산성 우위가 아닌, 국가 보조금, 환율 통제, 과잉 생산능력 유지에 기초한 것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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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각국의 국내생산 중 중국산 수입 증가에 노출된 부분의 비율(%) (자료출처: 국제금융센터)

     

    실제로 [그림]에서 중국산 수입 증가에 노출된 비율이 가장 높은 10개국 가운데 9개국이 저소득·중소득국이다. 2024년 기준 중국의 무역흑자 가운데 약 54%가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에서 발생했다는 점 역시 이러한 평가를 뒷받침한다. 이에 대응해 브릭스 회원국과 파트너국을 중심으로 대중 무역장벽을 강화하는 조치가 잇따르고 있다. (구체적 사례는 작년 경제전망을 보라. 임지섭, 「구조적 위기와 불확실성이 교차하는 세계경제」, 《계간 사회진보연대》 2024년 겨울호)

     

    최근 중국은 더 가난한 국가들에 대해 무관세 접근을 허용하거나, WTO에서 개도국 특별 혜택 요청을 중단하겠다고 선언했으나, 이는 상징적 수준에 머물 가능성이 크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처럼 수출 공간을 의도적으로 내주는 전략적 전환이 없는 한, 중국의 수출 전략은 갈등을 누적시킬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중국은 상환 능력이 부족한 개도국에 자본을 수출하고 이를 담보로 자원이나 시설 운영권을 확보하는 방식을 확대하고 있는데, 이 역시 ‘글로벌 사우스’와의 마찰을 키우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는 3장 1절에서 다룬다)

     

    ③ 중국 수출전략의 구조적 한계와 인민주의적 반중 정서의 추동

     

    무엇보다 이러한 외부 갈등의 심화는 중국 내부의 구조적 모순과 맞물려 있다. 이윤율이 하락하는 가운데 환율과 임금 통제를 유지하고, 정부투자와 보조금으로 수출 부문의 가격경쟁력을 지탱하면서, 수출량은 늘어나되 수익성은 악화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IMF는 중국 제조업 수출의 성장 동력이 앞으로도 지속될 수 있을지 불투명하다고 전망한다. 실제로 중국의 산업정책 지출은 2011~2023년 동안 GDP의 약 4% 수준을 유지했으며, 낭비적인 중복·과잉투자로 인한 과잉생산과 감산은 총요소생산성과 GDP 수준을 각각 1.2%와 2%씩 낮추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약 1년 치 성장분이 소멸하는 규모다.

     

    정리하면, 2010년대 중반 이후 중국의 GDP 대비 무역량 비중은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있다. 수출은 여전히 증가하고 있으나 2022년 이후 그 속도는 둔화하고 있다. 대미 수출은 감소 추세에 접어들면서, 수출달러 환류의 주요 기반으로서 중국의 역할도 점차 축소되고 있다. 대신 중국은 EU와 ASEAN을 비롯한 나머지 세계를 향해 수출 확대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으며, 트럼프 2기 행정부의 대중 관세 부과는 이러한 흐름을 더 가속화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지출과 보조금에 기초한 중국의 ‘저가 출혈경쟁’ 전략이 심화하면서, 최근에는 미국 외 선진국과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의 대중 무역적자가 빠르게 확대되고 있다. 이는 전 세계적으로 무역 분쟁을 촉발하고, 각국에서 인민주의적 반중 정서를 자극할 가능성을 높인다. 실제로 상품시장 개방성을 낮추는 각국의 정책 대응은 이미 현실화하고 있다. 미국 바이든 행정부는 무역적자 자체에 대한 인민주의적 불만과 중국의 불공정 무역 관행에 대한 합리적 비판을 구분하며, 이를 ‘전략적 경쟁’이라는 틀로 관리하려 했다. 그러나 지금은 트럼프 2기 행정부의 관세정책 탓에 인민주의와 권위주의가 상호 강화되는 악순환이 심화하며 무역의 ‘탈세계화’가 장기화하리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3) 트럼프 2기 행정부 관세정책의 성격과 경제적 효과

     

    사회진보연대는 작년 경제전망에서, 트럼프 후보가 공약했던 관세와 감세 정책의 결합이 물가와 금리를 끌어올려 미국의 부채위기를 심화시킬 것이며, 그로 인한 경제적 악영향이 1기보다 훨씬 클 것이라 보았다. 문제는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출범 1년도 채 되지 않아 공약 대부분을 실행에 옮겼다는 점이다. 그 결과 경제학자 사이에서 미국의 부채위기를 넘어 20세기 초 형성된 달러 기반 국제금융 체계의 위기 가능성까지 거론되는 지경이다. 본 절에서는 트럼프 2기 관세정책의 성격과 지금까지 낳은 실물경제 측면의 효과를 먼저 살펴보겠다.

     

    ① 관세 정책의 범위와 실효관세율의 급등

     

    트럼프 2기에서 예고·실행된 관세는 보편적 기본관세, 상호관세, 품목별 관세, 마약·이민자 이슈와 연계된 관세 등 유형이 다양하며, 대상 국가와 품목도 광범위하다. 관세율 역시 잦은 협상과 번복으로 계속 변해 그 전모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에 따라 학계에서는 국가별 실효관세율, 즉 특정 국가로부터의 총수입액 대비 실제 납부된 관세 비율로 단순화해 정책 효과를 분석한다.

     

    [%=사진4%]

    [그림] 미국의 중국/나머지 국가에 대한 실효관세율과 중국의 미국/나머지 국가에 대한 실효관세율(%) 

    (자료출처: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

     

    트럼프 1기부터 바이든 행정부까지 미국의 대중 실효관세율은 19.3%였고, 나머지 국가 대상 실효관세율은 3.0%에 그쳤다. 그러나 이는 [그림]에서 보듯 트럼프 2기 들어 급격히 상승해, 2025년 11월 10일 기준 각각 47.5%, 18.5%에 이르렀다. 관세 정책의 범위와 강도가 1기와 질적으로 다른 수준에 도달했다고 볼 수 있다.

     

    ② 1기와 다른 점: 중국보다 ‘미국 블록’이 더 표적이 되다

     

    트럼프 1기 관세 정책과 2기의 가장 큰 차이는 두 가지다. 첫째, 1기에는 대중 관세가 핵심이었고, 나머지 국가에는 철강·알루미늄 등 일부 품목에만 제한적으로 관세가 적용됐다. 반면 2기에는 ‘무역적자’ 자체를 줄인다는 목적을 선명히 하며, 아래 [그림]에서 보듯 1기 무역전쟁의 ‘풍선 효과’로 대미 수출이 늘어났던 미국의 동맹국과 ‘프렌드쇼어링’(friend-shoring) 지역, 즉 EU, 일본, 한국, 대만, 멕시코, 동남아 등이 관세의 적용 대상이 됐다. 선진국들은 단지 미국의 수입에서 중국의 빈자리를 메운 것만이 아니라, ‘전략적 경쟁’ 과정에서 중국의 생산기지나 중간재 수출지를 동남아·멕시코 등지로 이전시켰는데, 바로 그곳들이 이번 관세 부과 대상이 되면서 이중 타격을 받고 있다.

     

    [%=사진5%]

    [그림] 2017~2022년 사이 미국의 수출에서 각국이 점한 비중의 변화 (%p)

    이는 트럼프 1기 대중 관세의 결과로 나타난 ‘풍선 효과’를 보여준다. 미국의 수입에서 중국을 대체한 이들 국가가 트럼프 2기 관세의 표적이 됐다. (출처: CEPR)

     

    둘째, 관세를 협상 수단으로 활용해 대미 직접투자(FDI)를 끌어내는 전략이 본격화됐다. 그 대상 역시 중국 블록의 국가들보다는, 협상이 가능한 미국의 동맹국이었다. 이번 한미 관세 협상에서 확인됐듯, 양국 기업이 투자를 통해 어떤 이익을 얻을지 논하기보다 액수를 늘리는 데 치중하며 고압적인 트럼프의 협상 태도는 동맹국에서조차 큰 반발을 일으켰다. ‘프렌드쇼어링’을 허용하지 않고 오직 미국으로의 ‘리쇼어링’(reshoring)만 고수하는 트럼프의 전략은 동맹국의 투자·성장 여력을 훼손한다. 게다가 이를 비효율적으로 사용할 위험성이 제기된다. (이는 3장 3절에서 다루겠다)

     

    이런 맥락에서 포즌이 제시한,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실제로 더 중시하는 목표는 중국보다는 ‘미국 블록’ 국가들로부터 받는 불이익을 줄이는 것이라는 해석이 설득력 있다. 이는 미중 블록 간 탈동조화라기보다, ‘미국 대 나머지 세계’의 구도를 강화하는 조치에 가깝다는 것이다. 한편, 최근 트럼프 행정부가 중국에 엔비디아의 첨단 반도체 수출을 허용하며 ‘전략적 경쟁’을 거스른 것도 상징적이다. 이에 미국 공화당과 민주당은 초당적으로 미 상무부 장관이 30개월 동안 첨단 칩의 대중국 수출 허가를 거부하도록 의무화하는 법안을 발의했다.

     

    그러나 트럼프 2기에서 더 강력해진 정책이 궁극적으로 미국의 무역적자를 줄이거나 제조업을 재건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전망이 지배적이다.

     

    ③ 무역적자 감축 효과: 단기적으로 있으나 장기적으로는 불확실

     

    트럼프 2기 관세 정책으로 먼저 대중 무역적자 감축이 이뤄지고 있는지 보자. 올해 미국의 대중 실효관세율은 한때 127%까지 치솟았고(121쪽 그림), 2025년 1~7월 미국의 대중 수입은 전년 동기 대비 16.9% 감소했다가 관세가 유예된 후 8월에 일부 회복됐다. 이 과정에서 대중 무역적자는 아래 [그림]에서 보듯 올해 2분기 크게 감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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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트럼프 관세 부과 후 미국의 상품(서비스 제외) 무역적자 (달러, 분기 단위)

    트럼프 1기 관세 부과 이후 1년 정도 무역적자가 감소했으나, 관세율이 유지되었음에도 결국 무역적자가 크게 증가했다(왼쪽 위). 이는 대중 무역적자가 초기에 감소했음에도 ‘풍선 효과’로 다른 나라 대상 무역적자가 증가했으며, 심지어 대중 무역적자도 결국 증가했기 때문이다(왼쪽 아래). 트럼프 2기에서는 2025년 1분기에 무역적자가 증가했다(오른쪽 위). 이는 관세 발효 전 미리 수입을 해놓으려는 효과에 의한 것으로 분석된다. 2분기부터는 무역적자가 감소 추세에 접어들었으나, 베트남과 대만(반도체 관련) 대상 무역적자가 증가하는 추세다(오른쪽 아래). 이후 1기처럼 최소 1년 정도는 무역적자가 감소하리라 전망되나, 장기적 전망은 불투명하다. (자료출처: 미 경제분석국(BEA))

     

    수십 개 국가를 대상으로 한 전방위적 관세 부과로, 미국의 무역적자 자체를 감소시키겠다는 목표도 실현되는 듯 보인다. 미국의 무역적자는 관세 발효 이전에 미리 수입을 대거 해놓으려는 ‘선제 수입’(front-loading) 효과로 올해 초에 오히려 증가했다가, 그 효과가 차츰 사라지며 감소 추세에 접어들었다.

     

    다만 지금까지의 이런 결과는 트럼프 1기 때 관찰됐던 범위 내에 있다. [그림]에서 보듯 1기 때도 대중 관세 부과 후 약 1년간 대중 무역적자가 줄었다가, 실효관세율이 변하지 않았음에도 다시 커져 2022년 1분기에 사상 최대치를 기록한 바 있다. 이후의 대중 무역적자 감소는 관세 효과라기보다, 1장에서 본 바이든 행정부의 ‘전략적 경쟁’과 중국의 ‘쌍순환 전략’이 맞물린 결과였다. 미국 제조업이 충분한 생산성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특정 국가에 장벽을 세우면, 수입은 다른 국가로 이전될 뿐이라는 점, 그리고 관세가 중간재 수입가격을 올려 수출에 타격을 줘 수입 감소를 상쇄한다는 점 역시 1기 무역전쟁의 교훈이었다.

     

    미국이 제조업 무역 적자를 해소하려는 목표를 달성하려면 2025년 9월까지 부과된 관세보다 최소 두 배 높은 관세율이 부과되어야 할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미국이 기술적 우위를 지닌 첨단 산업을 제외한) 전통적 제조업 영역에서 미국의 비교우위가 여전히 없다는 점을 보여준다. 따라서 장기적으로 무역적자가 감축될지는 불확실하다. 다만, 이번 2기 관세는 1기와 달리 매우 광범위하므로, IMF는 적어도 내년까지는 무역적자 감소 추세가 지속하리라 전망한다.

     

    ④ 관세와 FDI 유치의 제조업 부흥 효과

     

    관세로 제조업 고용을 늘리겠다는 목표 역시 실증적으로 뒷받침되지 않고 있다. 2기 관세 이후 현재까지의 자료에 따르면, 관세에 민감한 제조업 부문의 고용은 전체 제조업 고용 감소 추세 속에서 소폭 줄었다. 1기 무역전쟁에 관한 다수의 연구도 관세가 제조업 고용을 늘리지 못했거나 감소시켰다는 일관된 결론을 내린다. 이는 상술했듯 미국 제조업의 비교우위가 없는 탓인데, 현재 시점에서 더 높은 관세를 통해 서비스업 일자리를 제조업으로 이전하는 데 드는 미국 소비자의 연간 비용은 20만 달러를 상회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관세를 지렛대로 대미 FDI를 유치해 제조업을 부흥시키겠다는 구상도 단기적으로는 투자 액수를 늘릴 수 있으나, 장기적으로는 불확실성과 동맹국과의 갈등을 키워 역효과를 낼 가능성이 지적된다. (이는 3장 3절에서 다룬다)

     

    ⑤ 미국 연방정부 재정에 대한 효과: 조세정책으로서의 관세?

     

    트럼프 행정부는 관세를 감세와 결합해, 장기적으로 소득세를 관세로 대체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올해 관세 수입은 전년보다 크게 늘었지만, 이미 예견됐듯 재정적자를 해소하거나 소득세 수입을 대체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럼에도 트럼프 행정부는 ‘하나의 크고 아름다운 법’(One Big Beautiful Bill Act, 이하 ‘OBBBA’)을 통해 대규모 감세를 단행했고, 이는 미국의 재정위기 가능성을 한층 더 높이고 있다. (이는 3장 2절에서 다룬다)

     

    ⑥ 미국 물가를 상승시키는 효과

     

    미국의 물가 흐름은 세계 전반의 추세와 점차 괴리되고 있다. IMF는 세계 소비자물가상승률(헤드라인 인플레이션)이 2025년 4.2%, 2026년 3.7%로 하락할 것으로 전망한다. 코로나19 이후 나타난 물가 상승 둔화 흐름이 세계적으로 지속될 것으로 전망하며, 그 주요 요인으로는 식료품과 에너지 가격의 하락이 꼽힌다.

     

    문제는 관세를 대폭 인상한 미국이다. 관세 인상 이전에 나타났던 선제 수입·수출 확대와 재고 축적의 효과가 점차 소진되면서, 2025년 하반기부터 미국의 물가상승률이 다시 상승세로 전환될 것이라는 전망이 힘을 얻고 있다. IMF는 2025년 미국 물가상승률 전망치를 2.7%로 제시했는데, 이는 트럼프 당선 이전인 2024년 10월 당시 하락세를 반영해 제시됐던 1.9%에서 크게 상향 조정된 수치다.

     

    이러한 전망은 미시적 자료 분석에서도 뒷받침된다. 올해 하버드경영대학원 가격연구소는 미국의 5대 소매업체 데이터를 활용해 ▲ 수입 상품, ▲ 관세의 영향을 받는 국내산 상품, ▲ 관세의 영향을 받지 않는 국내산 상품의 가격 변동을 비교 분석했다. 그 결과 트럼프 관세 부과 이후, 수입 상품과 관세의 영향을 받는 국내산 상품의 가격이 관세 영향이 없는 국내산 상품에 비해 빠르게 상승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관세가 수입 상품 가격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국내산 상품의 가격 상승으로까지 파급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미국산 제품도 관세가 부과된 국가로부터 수입한 원자재와 중간재에 의존하며, 관세로 인해 수입품 가격이 오르면 소비자 수요가 국내산으로 이동하면서 가격이 동반 상승하는 효과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IMF의 미국경제 성장 전망과 물가 전망을 함께 보면, 2024년 10월과 비교해 트럼프 관세의 충격으로 2025년 성장률 전망은 하향 조정된 반면(아래 [그림]), 물가상승률 전망은 상향 조정됐다. 세계경제가 전반적으로 성장률은 하락하면서도 물가 상승 압력은 점차 약해지는 흐름을 보이는 것과 달리, 미국경제는 다시금 스태그플레이션 국면에 빠질 수 있다는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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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2024~2026년 세계 및 각국 경제성장률 전망 (%)

    2025년 경제성장률 전망에서, 트럼프 당선 이전인 2024년 10월의 전망치와 관세정책을 발표한 2025년 4월의 전망치 간의 격차가 (물론 다른 요인도 있으나) 트럼프 관세정책의 충격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전시경제와 제재로 예외적인 경우인 러시아와 반도체 수출 호황이 강한 대만을 제외한 모든 곳에서 경제성장률 전망이 하락했으며, 특히 멕시코·베트남의 하락이 기록적이다. 도표의 ‘아세안 5’는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 싱가포르, 태국을 뜻한다. (자료출처: IMF)

     

    ⑦ 세계 경제성장률에 대한 효과

     

    트럼프 2기 관세 정책의 가장 중요한 거시경제적 효과는 세계 경제성장률을 하락시키는 데 있다. IMF에 따르면 2025년 세계 경제성장률 전망치는 트럼프 당선 이전인 2024년 10월의 3.2%에서, 2025년 4월에는 2.8%로 0.4%p 하향 조정됐다. 이는 트럼프 2기 관세 정책이 촉발할 무역전쟁이 각국의 실물경제에 미칠 부정적 영향을 반영한 결과다(위 [그림]). 이후 대중 관세가 일부 유예되고 주요국 간 관세 협상이 진행되면서 2025년 10월 전망치는 다시 3.2%로 상향 조정됐으나, IMF는 이 회복이 올해 상반기에 나타난 선제 수입 효과에 상당 부분 기인한 것이라고 평가한다. 그 효과를 제거하고자 하반기에 한정해 보면, 2025년 세계 경제성장률은 연율 기준 약 3.0%로 전망되며, 이는 2024년 하반기의 연율 기준 3.6% 성장에 비해 0.6%p 낮다.

     

    문제는 이러한 충격이 단기에 그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미국의 실질 관세율은 여전히 약 19%로 높은 수준이며, 무역정책 불확실성 또한 해소되지 않고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선제 수입 효과는 소멸하고, 기업은 점차 관세 부담을 소비자에게 전가하게 되며, 무역의 우회 경로가 고착할 가능성이 크다. 세계경제 전반의 효율성이 저하할 수밖에 없다. 이런 이유로 IMF는 단기 지표만을 근거로 관세 충격이 제한적이라고 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중기적 관점에서 보면 이런 우려는 더욱 분명해진다. ‘탈세계화’가 본격화한 2022년을 기점으로 세계 경제성장률의 중기 평균은 뚜렷하게 하락하는 것으로 전망된다. 2027~2030년의 연평균 성장률은 3.2%로 예상되는데, 이는 팬데믹과 지정학적 충격, 보호무역 강화 이전의 중기 평균인 3.7%에 비해 크게 낮은 수준이다. IMF는 세계경제의 약 3분의 2에서 중기 성장 전망이 악화하고 있으며, 하락 폭은 특히 신흥시장과 중간소득국에서 더 크게 나타난다고 지적한다.

     

    지역별로 보면 아시아가 특히 취약하다. IMF는 무역과 FDI 재편 과정에서 글로벌 가치사슬에 깊이 통합되고, 최근 몇 년간 대미 수출이 확대된 아시아 지역이 무역정책 충격에 가장 민감한 곳 중 하나라고 평가한다. 실제로 관세 인상과 무역정책 불확실성 확대를 반영해, 아시아 국가 대부분에서 2025년과 2026년 GDP 성장률 전망치는 2024년 10월 전망보다 하향 조정됐다. 실증 분석에 따르면 미국의 무역정책 불확실성이 1표준편차 증가할 경우, 단기적으로 아시아 지역의 투자는 약 1% 감소하며, 이 효과는 신흥시장 경제에서 약 두 배 크게 나타난다. ASEAN 국가들의 성장률도 2024년 4.8%에서 2025년 4.3%로 둔화될 것으로 전망되는데, 이 수치조차도 관세 협상 타결을 반영해 상향 조정된 결과다.

     

    라틴아메리카에서는 대미 무역 의존도의 차이가 성장 전망의 희비를 가른다. 대미 수출 비중이 약 12%에 불과한 브라질은 미국의 관세 인상이 성장에 미치는 영향이 비교적 제한적일 것으로 예상된다. 반면 대미 수출 비중이 80%를 넘는 멕시코는 미국의 관세 부과로 소비와 투자가 위축되고, 지속되는 무역 불확실성이 성장에 장기적인 부담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이처럼 트럼프 2기 관세 정책은 교역량 변화에 그치지 않고, 중기적으로 세계경제의 성장 경로 자체를 하향 이동시키는 효과를 낳고 있다. 특히 무역과 투자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신흥시장과 중소국가일수록 충격은 더 크게 나타날 것이다.

     

    4) 소결: 국제무역 분절화의 귀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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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저소득·중소득 국가의 고소득 국가와의 소득 수렴 속도와 국제무역 참여도의 상관관계 (자료출처: WTO)

     

    1990년대 중반부터 세계화는 선진국에서 개도국으로의 FDI 확대와 개도국에서 선진국으로의 제조업 수출 확대를 핵심 동력으로 삼아, 저소득·중소득 국가의 빠른 성장을 이끌고 국가 간 소득 수렴과 불평등 완화에 기여해 왔다(위 [그림]). 국제상품무역의 중심도 고소득 국가 간 교역에서 선진국과 신흥시장 간 교역으로 이동했다. 물론 모든 개도국이 소득 수렴을 경험한 것은 아니었다. 실패한 사례는 대체로 국제무역 참여도가 낮거나, 참여하더라도 자원 수출에만 의존해 제조업 수출로 전환하지 못한 경우였다. 이러한 국가들은 공통적으로 FDI 유치에도 실패했다. 이는 과거 사회진보연대가 지적해 온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질서로의 ‘포섭과 배제’라는 구조와 정확히 맞물린다.

     

    그러나 2010년대 들어 이러한 세계화 질서는 구조적·정치적 요인에 의해 흔들리기 시작했다. 개도국, 특히 중국에서 자본축적 심화와 이윤율 하락으로 기존 성장모델의 한계가 드러난 가운데, 이에 대한 정치적 대응은 세계화의 조정이 아니라 왜곡된 방향으로 전개됐다. 중국과 러시아 등 권위주의 국가들은 국가자본주의와 자립화·블록화를 추구했고, 선진국에서는 무역적자와 제조업 쇠퇴에 대한 불만을 토대로 상품시장 개방성 자체를 낮추려는 인민주의가 정치세력으로 등장했다. 이 두 흐름은 상호 강화되며 2010년대 중반 이후 미중 간 무역비용 상승, 무역의 블록화, FDI의 블록 내부 집중(프렌드쇼어링)이라는 탈동조화 국면을 형성했다. 다만 이 시기에는 두 블록 사이의 일부 신흥시장(베트남·멕시코 등)이 단기적 수혜를 얻기도 했으며, 미국 블록의 선진국(유럽·일본·한국·대만 등)도 중국의 빈자리를 대체해 수출을 늘렸다.

     

    2025년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이러한 흐름은 질적으로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 국제무역이 세계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감소하는 추세가 확고해지며, 무역과 FDI가 동시에 위축되는 ‘탈세계화’ 국면으로의 진입이 본격화했기 때문이다. (FDI에 대해서는 3장 3절에서 다룬다) 미국은 전면적 관세와 리쇼어링 전략을 통해 제조업을 자국으로 되돌리려 하며, 중국은 국유자본에 기초한 자립화와 과잉생산을 통해 수출 공간을 유지하는 전략을 강화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글로벌 가치사슬은 효율성과 비용 측면에서 심각한 손실을 입고 있으며, 그 결과 세계경제의 성장 잠재력이 전반적으로 약화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국가 간 소득 수렴을 저해한다.

     

    이러한 탈세계화의 비용은 모든 국가에 악영향을 주나, 가장 큰 피해는 국내 시장이 충분히 크지 않은 저소득국과 하위 중소득국에 집중될 전망이다. 인민주의적 관세로 인한 수출시장 축소와 리쇼어링·자립화로 인한 투자 위축은 이들 국가의 성장 경로를 제한한다. 한국경제와 같이 소규모이면서 글로벌 가치사슬에 고도로 통합된 경제도 충격을 크게 받을 수밖에 없다. 포즌의 표현대로, 현재 전개되고 있는 무역정책의 변화는 승자가 없는 ‘루즈(lose)–루즈(lose) 게임’의 성격을 띤다. 다만 그 가운데에서도 중국을 제외한 신흥국과 미국의 전통적 동맹국들이 ‘시진핑의 중국’과 ‘트럼프의 미국’이라는 두 문제적 대국의 사이에서 동시에 압박을 받으며 상대적으로 더 큰 비용을 떠안고 있다. 이는 즉각적 피해만 문제가 아니다. 근본적으로 게임의 규칙과 WTO 같은 심판이 사라지고 힘 싸움만이 지배하게 되면, 각국 경제와 인민이 생존을 위해 치러야 할 잠재적 비용은 엄청날 것이다.

     

    이렇듯 ‘배제’의 영역을 확대하는 국제무역의 분절화와 탈세계화의 악효과는 국제무역에 그치지 않고 달러를 축으로 한 국제금융 질서와 각국의 금융 안정성으로 파급된다. 다음 장에서는 무역 분절화에 상응하는 국제금융 분절화의 경제적 효과를 살펴본다.

     

     

    3. 국제금융의 분절화: 달러 체계의 위기와 금융 불안정성 확대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로 형성된 질서에서, 선진국과 개도국 간 무역 확대는 두 가지 자본 이동 유형의 확대와 맞물려 전개됐다. 하나는 개도국의 무역흑자를 통해 축적된 달러가 다시 선진국 금융시장으로 환류되는 수출달러 환류였고, 다른 하나는 개도국에 대한 선진국의 대외직접투자(FDI) 확대였다. 이러한 무역과 금융의 결합은 달러를 중심으로 한 국제금융 체계를 지탱하는 핵심 메커니즘으로 작동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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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지정학적 거리별 대외 금융자산 배분의 세계 평균 대비 초과 비중 (%p)

    간단히 말해, 수치가 0보다 크면 세계 평균보다 해당 집단으로부터 그만큼 더 많이 투자받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도표는 지정학적 거리에 따라 자본 흐름이 분절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지정학적 거리’에 따른 세 범주는 UN에서의 투표 성향 등 외교정책을 기준으로 가까운 순서대로 1/3씩 나눈 것이다. (자료출처: CEPR)

     

    그러나 러시아의 크림반도·우크라이나 침공과 미·중 전략적 경쟁의 심화로 국제금융 흐름에서도 뚜렷한 균열선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앞 장에서 살펴본, 국제무역이 탈동조화와 블록화를 거쳐 탈세계화 국면으로 심화되는 과정에서, 자본 이동 역시 점차 지정학적 요인을 따라 재편되었다. 유럽 경제정책연구센터(CEPR)의 분석에 따르면, 2017년 이후 국제 자본 흐름에서도 국가 간 정치적 관계에 따른 분절화가 점진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나아가 2025년 트럼프 2기 행정부가 동맹국을 포함한 광범위한 교역 파트너 국가들에 관세를 부과하면서, 국제금융 분절화는 기존의 글로벌 북반구와 남반구 간, 혹은 기존 강대국과 신흥 강대국 간의 긴장을 넘어 서방 내부의 금융 질서와 ‘달러 체제’ 자체로 이동하고 있다. CEPR은 트럼프 2기가 일으키는 이런 새로운 변화를 국제금융 질서에 대한 “더 근본적인 위협”으로 규정한다.

     

    이 장에서는 국제금융의 분절화가 달러 체계에 어떤 구조적 압력을 가하고 있으며, 그 결과 세계적으로 금융 불안정성이 어떻게 확대되고 있는지를 살펴본다.

     

    1) 국제금융의 분절화: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의 정체

     

    금융세계화의 지표로 국제금융 통합도가 있다. 이는 세계 GDP 대비 대외자산과 대외채무 합계의 비율이다. 아래 [그림]에서 보듯 이 지표는 1990~2000년대 급격히 상승하며 금융세계화의 심화를 보여주었으나, 2010년대 들어서는 둔화·정체 국면에 접어들었다. 요컨대 국제무역과 같이 금융세계화의 속도도 현저히 낮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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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국제금융 통합도: 세계 GDP 대비 세계 대외자산·부채 총합의 비율 (%)

    왼쪽은 영국이나 역외 조세피난처 등 금융중심지를 ‘세계 나머지’에 넣지 않은 경우고, 오른쪽은 금융중심지를 ‘세계 나머지’에 넣은 경우다. 어떤 국가나 지역을 기준으로 그 내국인이 외국에 직접 투자하거나 외국 자산을 구입하면 대외자산이 증가하고, 반대로 외국인이 해당 국가나 지역에 투자하면 그곳의 대외부채가 증가한다. (자료출처: CEPR)

     

    대외자산·부채의 분포는 무역과 달리 극도로 편중돼 있다. 2023년 기준 세계 대외자산과 채무의 약 65%는 미국과 미국에 지정학적으로 가까운 국가들에 집중돼 있다. 반면 중국과 중국에 지정학적으로 가까운 국가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최근 몇 년 사이 2~3% 수준으로 소폭 증가했을 뿐, 여전히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 물론 국제금융에서는 역외 금융중심지를 매개로 한 자본 이동 규모가 커 이러한 수치를 그대로 해당 국가·지역에 귀속시키는 식으로 해석할 수 없음에 유의해야 한다. 그러나 국제금융의 중심이 여전히 미국 블록이라는 점 자체는 분명하다. 아래 [그림]의 순대외투자 지위(NIIP)은 금융세계화 질서의 작동 방식과 그 변화를 보다 분명히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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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5개 범주에 속한 국가들의 순대외투자 지위 (세계 GDP 대비 비율, %)

    순대외투자 지위(NIIP, net international investment position)란, 한 국가의 모든 대외 금융자산과 채무의 차이를 나타내는 경제 지표다. 양수일 경우 자산이 채무보다 많은 순대외자산국 지위, 음수일 경우 채무가 자산보다 많은 순대외채무국 지위에 있다고 한다. (자료출처: CEPR)

     

    ① 2000년대: 수출달러 환류와 FDI·주식 투자의 순환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에 따른 국제금융 흐름의 패턴을 보자. 2000년대 중국의 순대외자산(+) 규모가 커진다. 이 시기 중국을 필두로 한 신흥시장의 대외채무는 주로 FDI로 구성됐고, 대외자산은 외환보유고, 특히 미국 국채를 중심으로 축적됐다. 이는 FDI에 기초한 신흥국 수출 부문의 성장과, 그 결과로 발생한 수출달러의 환류가 결합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에 상응해 같은 시기 미국은 순대외채무국(-)이었으며, 2010년까지 순대외채무의 규모는 비교적 완만하게 확대됐다. 이는 1장에서 설명했듯 미국의 대외부채가 주로 국채로 구성된 반면, 대외자산은 FDI·주식의 고수익 자산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수익률 격차 덕분에 미국은 막대한 자본유입에도 불구하고 순대외채무가 급격히 증가하지 않는 ‘특권적 이익’을 누렸다.

     

    2000년대에는 미국뿐 아니라 미국 블록에 속한 선진국도 순대외채무국(-) 지위에 있었다. 이는 달러체제의 확장 속에서 미국 블록 전체가 세계의 저축을 흡수하는 금융 중심지 역할을 수행한 결과다. 글로벌 저축은 미국 국채 외에도 유럽·영국·일본 등 미국 블록의 금융시장 전반으로 분산 유입됐다. 동시에 이들 국가 역시 저성장에 직면하여 신흥시장 대상 대외자산을 증가시켰다.

     

    ② 2010년대: 중국·러시아 측면에서의 변화

     

    2010년대에 들어, 위의 [그림]에서 보듯 중국의 순대외자산(+) 지위는 유지됐지만 대외채무와 자산의 구성은 뚜렷하게 변화했다. 먼저 채무 측면을 보면, 미국과 선진국으로부터 유입되던 직접투자(FDI)가 점차 감소했다. 이는 세계 금융위기 이후 중국의 성장 둔화, 국가자본주의적 전략과 국유 부문의 비중 확대, 미·중 전략적 경쟁의 심화에 따른 투자 환경 악화를 반영했다. 자산 측면에서는 중국의 외환 보유에서 미국 국채가 정점을 찍은 후 감소하는 대신, 중국 블록의 신흥시장·개도국을 대상으로 한 은행대출과 FDI가 빠르게 확대됐다. 이는 이른바 ‘일대일로’ 사업을 매개로 한 중국의 자본 수출 확대와 직결돼 있다. (아래 [그림]을 참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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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2017-2023년 중국의 대상국별 순대외자산 증감(위)과 2023년 중국의 대외자산·부채(아래) (10억 달러)

    2017~23년 동안 중국은 신흥시장·개도국에 대한 순자산이 증가했으며, 역외 금융중심지 및 식별 불가의 경로를 통한 순자산 증가도 확인된다. 2023년 기준, 중국의 외환 보유는 미국·유럽·식별 불가에 편중되어 있는데, 외환 보유를 제외하면 중국의 대외자산 보유 대상에서 영국령 버진아일랜드·케이맨 제도와 홍콩·마카오 같은 역외 금융중심지와 ‘식별 불가’의 비중이 크다. 대외자산 구성에서 세 범주 대상 FDI와 기타 투자(대출)의 크기가 상당함에 주목할 수 있다. 한편, 2023년 기준 중국의 대외부채는 여전히 대부분 FDI로 구성되어 있고, 이 또한 대부분 역외 금융중심지를 거친다.

    수출달러 환류의 핵심인 중국의 미 국채 보유를 구체적으로 보자. 세계 금융위기 당시 미국 국채는 세계의 안전자산 기능을 했고, 신규 발행 물량의 약 절반이 해외로 판매됐으며, 이 가운데 약 3분의 1을 중국이 흡수했다. 그러나 중국은 2015년 대규모 자본유출 사태와 미중 무역 전쟁, 금융·기술 제재를 거치며 달러 자산에 대한 의존을 줄이는 전략을 추진했다. 그 결과 중국의 미 국채 보유액은 2013년 11월 1조 3200억 달러로 정점을 찍은 뒤 지속적으로 감소해, 2025년 7월에는 7307억 달러로 약 45% 급감했다. (작년 경제전망에 관련 그래프가 제시되어 있다. 임지섭, 「구조적 위기와 불확실성이 교차하는 세계경제」, 2024년 겨울호)

     

    한편, 중국 블록 국가들도 2010년대에 순대외자산(+) 지위로 이동하는데(앞의 순대외투자 지위 [그림]), 러시아는 이런 변화의 극단적 사례다. 2014년 크림반도 병합 이후 서방의 금융제재를 받은 러시아는 서방 금융시장으로부터 차츰 이탈했고, 2022년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에는 사실상 서방 금융 체계에서 거의 완전히 배제됐다. 이에 따라 러시아는 대외자산 구성을 급격히 재편했으며, 외환보유고와 자산을 비서방 통화와 실물자산 중심으로 이동시켰다. 동시에 대외채무 측면에서 FDI 유입이 급감했다. 그 결과 러시아가 순대외자산국이 된 것이다. 이는 국제금융 분절화가 지정학적 충격으로 급격히 가속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2010년대 중국의 대외금융 전략에서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신흥시장과 개발도상국에 대한 투자 방식이다. 중국은 FDI보다 은행대출을 선호하며, 특히 국유 금융기관을 통한 공공보증 대출이 핵심 수단으로 활용된다. (위 [그림]에서도 대외자산에서 ‘기타 투자’의 크기가 상당함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전모가 잘 알려지지 않은 중국의 대출 관행에 대한 최근 조사에 따르면, 중국 국유기관이 신흥시장·개도국에 제공한 공공보증 대출의 거의 절반이 사실상 담보화돼 있으며, 그 규모는 57개국에 걸쳐 약 4200억 달러에 이른다. 담보는 현금화가 불확실한 인프라 프로젝트 자산보다는, 중국 내 은행 계좌에 예치된 현금이나 기존 원자재 수출에서 발생하는 외화 수익처럼 유동성이 높고 중국 당국이 통제하기 쉬운 자산에 설정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구체적으로 신흥시장·개도국 정부와 국영기업은 원자재 수출로 발생한 외화를 중국 대출기관이 통제하는 계좌를 통해 처리해야 하며, 이 계좌에 적립되는 현금 규모는 저소득 원자재 수출국의 경우 전체 공공보증 외채 상환액의 평균 20%를 초과한다. 이는 중국이 채무 불이행 위험을 회피하는 데에는 효과적이지만, 해당 국가들의 외화 유동성을 제약하고 중국 블록 내부 신흥국 경제에 상당한 압박을 가한다.

     

    요컨대 2010년대 이후 중국과 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중국 블록의 국제금융 전략은, 달러 체계로부터의 점진적 이탈과 역내·개도국을 향한 자본 재배치를 특징으로 한다. 이는 표면적으로는 순대외자산 지위를 유지하거나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지만, 그 과정에서 중국 블록 내부의 금융 불균형과 신흥국에 대한 압박을 심화시키며, 국제금융의 분절화를 한층 더 공고히 하고 있다.

     

    ③ 2010~2024년: 미국 및 선진국에서의 변화

     

    아래 [그림] 상단에서 보듯, 2010년대에 들어 미국의 순대외채무(-)의 증가 속도가 빨라질뿐더러, 그 구성도 변화했다. 첫째, 채권 부문의 순대외채무 규모가 정체하거나 심지어 감소했다. 둘째, 2018년을 기점으로 FDI가, 2020년을 기점으로 주식 부문까지 순대외자산(+)에서 순대외채무(-)로 전환됐다. 이는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시기의 전형적인 구조, 즉 ‘나머지 세계가 미국 국채를 보유하고, 이를 기반으로 미국은 대외 투자를 확대한다’는 패턴이 약해졌음을 뜻한다. 다시 말해, 미국은 이제 신흥시장의 수출 기반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자본을 잘 공급하지 않으며, [그림] 하단에서 보듯 오히려 미국 외 국가들, 특히 미국 블록의 선진국이 대미 FDI와 미국 주식 투자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자본 흐름이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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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위: 미국 순대외자산(채무)의 항목별 추이 (%, 미국 GDP 대비 비중)

    아래: 2017과 2023년 미국의 대상국별 순대외자산 지위 (10억 달러)

    서론에서 설명한 ‘특권적 이익’ 덕에 2010년대 중반까지 느리게 증가하던 순대외채무는, 2010년대 말부터 매우 빠르게 증가한다. 2003년 이래 약 10여년 간 FDI·주식 투자에서 미국은 순대외자산국(+)이었으나, 2010년대 중반부터 순대외채무국(-)으로 전환했다. 한편, 채권에서 미국은 줄곧 순대외채무국(-)이었는데, 2000년대에는 그 규모가 상대적으로 빠르게 확대된 반면, 2010년대부터 둔화·정체하고 있다. 요컨대, 수출달러 환류와 미국의 대외투자 간의 순환이 2010년대 중반부터 약화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아래의 그림은 이러한 전환이 시작된 이후, 미국의 순대외채무 증가를 책임진 것은 주로 아시아 선진국, 유로존, 기타 유럽 선진국이었음을 보여준다. (자료출처: CEPR)

     

    요컨대 이러한 변화는 두 가지 중요한 함의를 갖는다. 한편으로 이는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를 통해 미국이 누려왔던 ‘특권적 이익’이 약화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미국의 대외채무 증가 속도를 고수익 대외자산으로 상쇄해 왔던 구조가 약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보면, 이는 미국 외 신흥국과 한국 등 후발 선진국들이 더 이상 충분한 자본 유입을 받지 못하고 있으며, 반대로 자본이 미국으로 회귀 내지는 도피하고 있음을 뜻하기도 한다. 즉, 단순히 미국경제만의 쇠퇴가 아닌 세계경제 전반의 쇠퇴를 반영하는 현상이다. (마치 한국의 부동산 경기가 전반적으로 침체하면, 지방 부동산 가격은 하락하나 되려 서울 강남으로 쏠림이 심해지며 여기서는 가격이 폭등하듯 말이다)

     

    [그림] 하단에서 2017~2023년 사이 미국의 순대외투자 지위 변화를 대상별로 살펴보면, 중국에 대한 순대외채무(-)는 소폭 증가하는 데 그친 반면, 유럽과 아시아의 선진국을 대상으로 한 순대외채무(-)는 매우 급격히 확대됐다. 앞 절에서 서술했듯, 중국 블록이 달러 자산으로부터 이탈하기 시작했음에도, 미국 블록의 선진국이 미 국채와 금융자산의 가치를 지지해 왔음을 의미한다.

     

    한편, 미국 블록 내부에서도 재편이 진행됐다. 2010년대 미국 블록의 선진국들은 순대외자산국으로 전환했다(앞의 순대외투자 지위 [그림]). 가령 유럽은 2017~2023년 사이 중국에 대해서는 순대외채무(-) 규모가 커진 한편, 미국과 유럽의 신흥시장, 중국 블록을 제외한 일부 신흥시장(대표적으로 베트남과 멕시코)에 대해서는 순대외자산(+)을 확대해 왔다. (그래프는 생락) 바로 이러한 자본 흐름의 재편 위에서,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이들 전반에 관세를 부과하고, 관세 협상 과정에서 미국 블록 국가들에게 대미 투자 확대를 요구한 것이다.

     

    요컨대 2010년대 중반부터의 국제금융의 분절화는 중국과 러시아가 이탈함에도 미국 블록이 미국을 지지하는 형국으로 나타났다. 이 가운데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질서에서 전형적이었던 자본 흐름 패턴이 변했다. 그런데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정책은 미중 블록 간의 분절화를 넘어, 미국 블록 내부의 자본 흐름을 재조정하려는 시도로 나가고 있다. 다음 절부터 트럼프가 가하는 위협이 미 국채, FDI, 주식이라는 세 가지 경로를 통해 어떻게 금융 불안정성을 심화하는지 살펴본다.

     

    2) 미 국채: 달러체제(dollar regime)의 위기?

     

    상술했듯 2010년대 중국과 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달러 자산으로부터의 이탈, 수출달러 환류 기반의 약화에도 불구하고, 팬데믹 전까지 미 국채 금리는 낮은 수준에서 유지됐다. 이는 여러 요인이 동시에 작용한 결과였다. 연준의 대규모 양적 완화(그럼에도 물가가 급등하지 않는 상황), 세계 금융위기 이후 강화된 안전자산 선호 성향, 그리고 세계적으로 대체 투자자산의 기대수익률이 낮았던 환경 덕분에 미 국채를 향한 수요가 지속됐기 때문이다. 특히 중국 블록의 이탈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미 국채 수요국인 유럽과 일본 등 선진국이 그 공백을 보완하며 달러체제를 지지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균형은 코로나19 팬데믹을 계기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세계경제는 스태그플레이션 국면에 진입했고, 이에 대응한 대규모 재정지출은 미국의 부채 지속 가능성에 대한 우려를 증폭시켰다. 동시에 글로벌 공급망 붕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무역 블록화에 따른 비용 상승, 그리고 신흥국 수출 부문의 동력 약화가 겹치며 물가 상승이 급격했다. 여기에 더해 AI 산업이 출현하며 미국 주식시장을 중심으로 글로벌 자산 수익률이 상승하면서, 국채의 매력은 약해졌다. 이러한 요인들이 결합되며, 앞 절에서 봤듯 2020년대 들어 미국 순대외자산 구성에서 채권 부문의 순대외채무 규모가 정체·축소되고, 미국을 비롯한 주요 통화국의 장기 국채 금리가 급등한 것이다. (코로나 위기 후 주요국 장기 국채 금리 급등에 관해서는 작년 경제전망에 그래프가 제시되어 있다. 임지섭, 「구조적 위기와 불확실성이 교차하는 세계경제」, 2024년 겨울호)

     

    문제는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정책이 이러한 추세를 명백히 가속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포즌, 옵스펠트, 로고프 등 주요 경제학자들이 최근 들어 ‘달러체제의 위기’을 거론하는 배경도 여기에 있다.

     

    첫째, 트럼프 행정부가 추진하는 ‘관세와 감세의 결합’은 연방정부의 재정수입 기반을 불안정하게 만들며 재정적자 확대를 가속화하고 있다.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에 따르면, OBBBA로 인해 향후 10년간 미국은 기존 전망치보다 약 4조 달러를 추가 차입해야 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럼에도 트럼프 행정부가 공언한 재정적자 감축이 실제로 이행되고 있는지는 불투명하다. 옵스펠트는 특히 트럼프 행정부가 공적개발원조(ODA)는 축소한 반면, 최근 아르헨티나에 (연준이 아닌) 재무부를 통해 200억 달러 규모의 스왑을 제공한 사례를 들며, 행정부가 정치적 목적으로 재정을 자의적으로 운용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둘째, 2장에서 설명했듯 관세 정책 탓에 미국경제가 성장률 둔화와 인플레이션 상승을 동시에 겪을 것이라는 전망이 확산되면서, 장기 국채 금리에 추가적인 상승 압력이 가해지고 있다. 이는 중앙은행의 통화정책 완화, 즉 금리 인하 기대와 무관하게 채권 금리가 상승하는 최근의 세계적 현상과도 맞물리지만, [그림]에서 보듯 관세 발표 후 미국에서 그런 현상이 더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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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2024년 1월부터 달러지수 및 미국과 G10의 장기채 명목금리 격차

    달러는 안전자산으로 인정받는다. 2007~09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미 국채 금리가 하락함에도 달러 가치는 상승할 정도로 그 지위는 공고했다. 그러나 코로나 위기 이후 스태그플레이션과 재정위기 심화 우려에 국채 금리 상승과 동시에 달러 가치 하락이 동시에 일어난 적이 있었다. 올해 4월 2일 트럼프 관세 발표 이후 같은 현상이 일어났는데, 코로나 위기 때와 다른 점은 미국에서 그런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는 점이다. 미 국채 금리가 다른 선진국의 그것보다 더 높음에도 불구하고 달러 가치가 하락한다는 것은, 달러의 안전자산 지위가 의심받는다는 뜻이다. (자료출처: IMF)

    셋째, 더 근본적인 문제는 미 국채를 둘러싼 제도적 안정성 자체가 훼손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우려되는 것은 이미 이탈한 중국 블록이 아닌, 미국의 전통적 동맹국과 민간 보유자의 신뢰 상실이다. 트럼프 2기 행정부 초기 제기됐던 이른바 ‘마러라고 협상’ 구상은 실현되진 않았으나, 강한 신호를 준 상징적 사례로 꼽힌다. 이는 외국인 투자자가 보유한 미 국채를 장기채나 영구채로 강제 전환하거나, 달러 외 통화를 사용하는 국가를 처벌하고, 외국인 투자자에게 차별적 과세를 부과하는 방안 등을 포함해, 사실상 국채 투자자를 미국에 ‘가두겠다는’ 위협으로 해석됐다. 이런 위협보다 현실적으로는 의도적인 인플레이션이 우려된다. 연준의 독립성에 대한 반복적인 공격과 달러 가치를 낮추겠다는 트럼프 행정부의 정치적 발언은 제도적 신뢰를 훼손하고 있다. 이런 우려는 최근 케빈 해싯 백악관 국가경제위원회(NEC) 위원장이 차기 연준 의장으로 유력해지며 더 커지고 있다.

     

    한편, 최근 통과된 이른바 ‘지니어스 법’(Genius Act)은 느슨한 규제 아래 달러 연동 스테이블코인의 대규모 확산을 가능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논란을 낳고 있다. 이는 글로벌 투기 수요나 일부 국가의 통화 대체 수요를 통해 미국 국채 수요를 떠받치려는 구상으로 해석될 수 있으나, 오히려 달러 자산의 안정성을 훼손할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포즌은 올해 트럼프 행정부가 경제 변동성을 키우는 정책 변화를 기습적으로 발표할 때마다, 실제로 달러 가치가 하락하고 미국 장기 국채 금리가 상승하는 현상이 반복됐다고 지적한다. 과거에는 관세 부과가 달러 강세로 이어지는 경향이 있었고 트럼프 1기 때도 그러했으나, 2025년에는 관세를 발표할수록 달러가 오히려 약세를 보이는 모습이 관측되고 있다. 이는 미국 정책의 불안정성에 대한 전 세계적 우려가 전통적인 안전자산 선호 경향을 압도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위 [그림]에서 보듯 달러는 올해 들어 주요 통화 대비 약 10% 절하됐다. 미국–G10 금리차가 여전히 큰 상황에서도 나타난 이례적인 현상이다.

     

    요컨대, 최근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장기 국채 금리 상승과 달러 약세가 함께 나타나는 현상은 단순한 경기 순환이나 통화정책 변화로 설명하기 어렵다. 이는 무엇보다 미국 정책과 제도에 대한 신뢰가 훼손된 결과로, 달러체제가 흔들리고 있다는 가능성을 시사한다. 물론 당장 달러 체제가 붕괴하진 않을 것이나, 코로나 위기 이후 특히 트럼프 2기를 기점으로 불안정성이 심화하는 중이며, 내년 트럼프 행정부의 행보에 따라 속도가 더 빨라질 수 있다.

     

    그렇다면 달러는 다른 통화로 대체될 수 있는가? 달러의 대체 가능성을 논할 때, 미국과 동맹국 간 관계 변화의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포즌은 트럼프 행정부가 동맹국을 상대로 취해온 적대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태도와, 미국이 주도해 온 동맹 체제가 제공하던 안보 효과가 약화되면서 각국 정부가 방위비 지출을 확대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이러한 변화는 일부 동맹국 통화의 상대적 매력을 높이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다만 이는 달러가 해당 통화들로 직접 대체된다는 뜻이라기보다는, 달러에 대한 의존이 완만하게 분산될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달러의 대체 가능성을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위해 세계 외환보유고의 구성을 보자. 달러의 비중은 2000년 무렵 약 70%에서 최근 약 58% 수준으로 낮아졌다. 그러나 이 감소분이 유로의 비중 증가로 이어진 것은 아니다. 유로는 지난 20여 년간 약 20% 내외의 비중을 비교적 안정적으로 유지해 왔다. 대신 비중이 가장 뚜렷하게 증가한 것은 이른바 ‘비전통적’ 준비통화들이다. 뉴질랜드 달러, 싱가포르 달러 등 소규모 선진국 통화들의 합산 비중은 약 10%에서 20%로 확대됐다. 반면 위안화의 비중은 글로벌 외환보유액의 약 2% 수준에 머물러 있으며, 지난 5년간에도 큰 변화가 없다.

     

    또 하나 주목할 요소는 금이다. 현재 공식 준비자산의 약 20%가 금으로 보유되고 있으며, 이는 달러 비중이 준비자산 전체의 절반 이하, 유로는 약 16~17% 수준이라는 의미다. 중앙은행들의 금 매입은 최근 몇 년간 크게 늘어났다. 이는 장기적으로 달러의 중심성이 점진적으로 약화될 가능성에 대비하는 움직임으로 해석할 수 있다.

     

    유로의 경우, 한편으로는 통화의 국제적 역할을 확대할 수 있는 조건들이 일부 형성되고 있다. 트럼프 2기 행정부가 방위비 부담을 동맹국에 전가하는 과정에서, 북유럽·동유럽 국가들을 중심으로 국채 발행을 통한 방위비 지출이 늘어나며 EU 국채 시장의 규모와 깊이가 확대되고 있다. 또한 유로는 우크라이나, 발칸 국가들, 중동과 북아프리카 일부 국가들에 법적 안정성과 제도적 예측 가능성 측면에서 매력적인 통화로 인식되고 있다. EU는 일단 결정을 내리면 이를 쉽게 번복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신뢰를 준다.

     

    그러나 유로화의 경제적 매력도는 여전히 논쟁적이다. 유럽 경제의 성장 흐름은 최근까지도 전반적으로 부진한 모습을 보인다. 또한 2장에서 봤듯 트럼프 2기 미국과 중국으로부터 동시에 압박을 받고 있다. 무엇보다 자본시장 통합에서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지정학적 측면에서도 유럽연합은 여전히 미국의 안보 보장에 크게 의존하며, 완전한 전략적 자율성을 갖췄다고 보기는 어렵다. 유럽의 방위비 확대가 실제 군사 역량 강화로 이어지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최근 재정적자를 둘러싼 EU 주요 회원국들의 정치적 갈등이 심화되면서, 재정 안정성에 대한 우려 역시 적지 않다. (군비와 재정을 둘러싼 유럽의 위기에 관해서는 이번 호 김영진의 「정치와 질서가 해체되어 가는 세계」를 보라)

     

    위안화는 세계 외환보유고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극히 낮은데, 이는 중국의 국가자본주의적 정책 방향과 깊이 연관된다. 중국은 2015년 대규모 자본유출 사태 이후 환율 제도의 유연성을 일부 확대했으나, 여전히 수출을 위해 위안화 가치를 낮게 통제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동시에 선진국은 물론 저소득·중소득국과도 수출 경쟁을 벌이며, 저숙련 제조업 분야에서도 신흥국의 수출 확대를 제한하려는 정책을 유지하고 있다. 여기에 자본통제와 금융시장 발전의 제약, 그리고 GDP 대비 300%에 이르는 높은 부채 수준은 위안화의 국제화를 제약한다. 법치, 금융시장의 깊이와 유동성, 가격 형성의 자율성 측면에서 중국은 여전히 미국이나 유럽에 크게 뒤쳐진다.

     

    종합하면, 현재로서는 달러를 대체할 가능성이 있는 단일한 세계화폐는 존재하지 않는다. 유럽이나 중국이 미국보다 먼저 재정·금융 불안정에 직면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트럼프 행정부가 달러 가치를 낮추거나 미 국채의 사용을 유지·확대하는 다양한 시도를 할 경우, 단기적으로는 일정한 효과를 거둘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안전자산으로서 달러의 신뢰를 훼손하고, 국제금융 체계의 안정성을 약화할 위험을 내포한 도박에 가깝다.

     

    포즌은 이렇게 말한다. “미국이 (세계에 공급한 글로벌 공공재의) 체제에 가한 변화 중 아마 가장 중요한 것은 달러의 유동성을 약화한 것이다. 이는 전 세계 저축자의 포트폴리오 안전성을 떨어뜨린다. 과거에는 거의 무위험으로 여겨지던 미국 자산이 이제는 완전히 안전하다고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는 전 세계 자본의 가용성과 흐름에 장기적·심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3) FDI: 대미 투자 확대의 성격과 트럼프 2기 FDI 유치의 한계

     

    미중 ‘전략적 경쟁’으로 2010년대 후반부터 세계 FDI는 이미 분절화되기 시작했다. 연구들에 따르면 이 과정은 이념적으로 먼 국가(가령 중국과 러시아)로부터의 이탈, 정치적으로 정렬된 국가 중심의 투자(프렌드쇼어링), 고위험 국가에 대한 노출 축소(디리스킹), 생산의 인근 이전(니어쇼어링), 그리고 일부 본국 회귀(리쇼어링)라는 다섯 가지 방향으로 진행됐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대미 FDI는 트럼프 2기 이전부터 이미 확대되고 있었다. 2020년대 들어 세계 전체 FDI가 감소 추세에 접어든 가운데, 미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오히려 크게 상승했다. 이 시기 대미 FDI 증가는 전기차·배터리·재생에너지·반도체 등 첨단기술 분야의 대형 프로젝트가 주도했다. 이는 미국의 기술적 우위와 인재·벤처 생태계, 그리고 바이든 행정부 시기의 IRA·CHIPS법과 같은 산업정책에 따른 유인 효과로 설명된다. 다시 말해 대미 FDI 확대는 관세 압박의 결과라기보다, 투자수익률과 제도적 안정성에 기초한 현상이었다.

     

    2010년대 중반 이후 한국 등에서 국내 투자수익률이 대외 투자수익률을 하회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신자유주의 시기 FDI 대상이었던 중국에서는 수익성이 악화되는 가운데 국가자본주의 강화로 제도적 불확실성이 커졌다. 이 두 요인이 결합하며 글로벌 기업의 투자 방향은 점차 중국을 벗어나 미국과 일부 신흥국으로 이동했다. 실제로 중국이 받는 FDI는 2022년 이후 급격히 둔화됐다.

     

    [%=사진15%]

    [그림] 중국과 중국 외 신흥시장의 자본유입(위)

    동남아 5개국의 FDI 유치(아래)

    왼쪽: 중국과 신흥시장의 명목 GDP 대비 FDI, 채권·주식 투자, 기타 투자 유입액 비중 (%, 분기 단위, 4개 분기 이동평균)

    오른쪽: 동남아 5개국(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필리핀·태국·베트남)의 FDI 유치 발표 건수 (건수, 분기 단위)

    (자료출처: 브루킹스연구소, IMF)

     

    이런 맥락에서 트럼프 2기 행정부가 관세 협상을 통해 대미 FDI를 ‘강요’하는 방식은, 전략적 경쟁 속에서 이미 진행 중이던 FDI 재편 흐름을 오히려 교란할 가능성이 크다는 평가가 나온다. 트럼프는 12조 달러 규모의 신규 FDI 유치를 공언했고, 벌써 9조 6천억 달러를 달성했다고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이는 민간 기업의 자발적 투자 계획까지 포함한 수치이며, 12조 달러 목표는 과거 실적을 크게 상회하는 매우 비현실적인 규모다. 특히 관세 압박으로 끌어낸 투자 약속은 자원 배분과 수익성에 대한 구체 계획이 불분명해, 대규모의 비효율로 이어질 가능성이 지적된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접근이 장기적으로 대미 FDI의 제도적 유인을 약화할 수 있다는 점이다. 투자된 기업이 처할 수입 관세의 불확실성, 외국 기업에 대한 차별적 과세 가능성(다만 OBBBA 국세법 899조 신설안은 철회되었다), 반이민 기조와 비자 정책의 경직성 등이 법인세 감면 효과를 상쇄하리라 전망된다. 포즌은 이런 환경이 지속되면 단기적으로는 압박을 통해 FDI 유입을 늘릴 수 있을지 몰라도, 중장기적으로는 대미 투자를 위축시킬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아울러 트럼프 2기 정책은 신흥국으로 향하던 FDI 흐름을 추가로 위축시키는 효과를 낳을 수 있다. 바이든 행정부 시기에는 중국·러시아에서 이탈한 FDI가 동남아나 멕시코 등 일부 신흥국으로 재배치될 경로가 열려 있었으나, 트럼프 2기 행정부는 오직 미국으로의 대규모 투자만을 요구한다. 이는 선진국의 부담을 가중하는 동시에, 신흥국의 성장과 산업화에 필요한 자본 공급을 축소시키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그 공백을 중국의 국유 금융이 채우면서, 신흥시장·개도국이 중국에 대한 금융적 의존을 더 키우는 역설적 결과가 나타날 수도 있다. 즉 ‘전략적 경쟁’의 구도를 스스로 약화하는 효과가 있다.

     

    4) 위험자산 쏠림과 금융 불안정성의 확대

     

    국제금융 분절화가 심화하면서 세계의 저축을 안정적으로 흡수하던 안전자산의 지반이 점차 흔들리고 있다. 그 결과 비달러 통화, 금, 그리고 최근에는 암호화폐와 같은 대체 자산의 가격이 급등했다. 그러나 이들 자산은 유동성이 낮아 가격 상승이 곧바로 높은 변동성과 주기적인 금융 불안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글로벌 자금은 위험자산 중 상대적으로 시장이 깊고 유동성이 높은 미국 금융시장, 특히 주식시장으로 집중되고 있다. 비미국 투자자의 미국 증권 보유액은 2015년 16조 달러에서 2024년 31조 달러로 거의 두 배 증가했으며, 최근에는 달러 약세에도 불구하고 위험자산 가격이 동반 상승하는 이례적인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무역 긴장, 지정학적 불확실성, 재정적자 확대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음에도 금리가 낮아지며 금융 여건은 완화된 상태를 유지하고 있고, 자산 가격은 다시 높은 평가 수준(valuation)으로 복귀했다.

     

    [%=사진16%]

    [그림] 2025년 각국 주식시장의 시가총액 지수(왼쪽)

    미국 S&P500 전체 기업과 기술 기업의 주가수익비율 및 집중 위험도(오른쪽)

    주식시장의 집중 위험도(concentration risk)는 허핀달-허쉬만 지수(Herfindahl-Hirschman Index)를 이용하여 구한 것인데, 이는 주식시장의 시가총액 기준 상위 기업들이 전체 시가총액에서 점하는 비율을 기반으로 지수화한 것이다. (자료출처: IMF)

     

    미국 주식시장 내부에서도 극단적 쏠림이 나타난다. 최근 주가 상승은 광범위한 분야의 기업 실적 개선보다는 AI 관련 초대형 기술주에 집중되어 있으며, 이른바 ‘매그니피센트 7’(애플, 마이크로소프트, 알파벳, 아마존, 엔비디아, 테슬라, 메타)이 S&P 500 전체 시가총액의 35% 이상을 차지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IMF 금융안정보고서의 평가 수준 지표들은 위험자산 가격이 펀더멘털을 상당히 상회하고 있음을 시사하며, 부정적 충격이 발생했을 때 급격한 가격 조정의 가능성이 높아짐을 보여준다.

     

    실물 투자 역시 이러한 불균형을 반영한다. 미국의 기업 설비투자는 올해 견조한 증가세를 보이고 있으나, 증가분 대부분은 AI 관련 부문에 집중되어 있다. 즉 현재의 투자 확대는 특정 기술과 산업에 대한 기대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문제는 AI 산업이 아직 본격적인 이윤 창출 단계에 도달하지 못한 가운데 대규모 자본투자가 계속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현재 상황을 단순히 ‘AI 버블’로 단정하기는 이르지만, 안전자산 부족과 자본의 편중, 그리고 위험자산 평가 수준의 급등이 결합하며 금융 시스템의 취약성이 누적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는 국제금융 분절화와 달러 체제의 불안정성이 금융시장 전반으로 전이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후라 할 수 있다.

     

    5) 소결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를 거치며 세계화폐로서 달러의 가치는 국제무역·국제금융의 순환 구조 속에서 지탱되어 왔다. 신흥시장의 수출 성장에 기반한 수출달러 환류와 선진국의 대외투자가 다시 달러와 미국 국채의 가치를 지지하며, 낮은 금리와 높은 대외투자 수익률의 결합이라는 이른바 ‘특권적 이익’을 재생산했다. 이러한 순환은 미국과 선진국, 그리고 일부 신흥시장 모두의 성장에 기여했다. 그러나 지정학적 갈등의 심화와 중국·러시아의 전략 변화, 여기에 미국의 정책 기조 변화가 맞물리며 이 순환은 더 이상 원활하게 작동하지 않고 있다.

     

    첫째, 신흥시장의 수출 성장은 둔화되고, 과잉경쟁이 심화되며, 성장의 동력이 약화되고 있다. 이에 따라 둘째, 수출달러 환류의 기반 역시 약화되었고, 특히 중국 블록의 이탈과 더불어 환류 흐름이 점차 블록화되는 양상을 보인다. 셋째, 신흥시장과 미국 간의 수익률 격차가 축소되거나 일부에서는 역전되면서, 신흥시장으로의 직접투자 유인이 약해지고 있다. 넷째, FDI는 점차 블록 내부로 집중되어 왔다. 나아가 트럼프 2기 행정부에 들어서는 미국으로의 일방적 집중이 강하게 요구되고 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국제금융 거래의 세계적 범위는 점차 축소되었다. 그 결과 미국 국채의 안전자산 지위는 약화한 반면, 미국 주식시장으로 전 세계 자본이 쏠리는 불균형한 흐름이 강화되고 있다.

     

    그러나 달러를 대체할 명확한 대안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이러한 변화가 새로운 안정적 질서로의 이행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세계경제가 오랫동안 의존한 안전자산 공급의 구조 자체가 점차 취약해지고 있을 뿐이다. 트럼프 2기 행정부의 ‘관세와 감세의 결합’, 나아가 자본시장의 제도적 안정성을 훼손할 수 있는 여러 시도는 이러한 취약화를 가속하며 제2차 세계전쟁 이후 형성된 국제금융 체계를 흔들고 있다. 무역·금융세계화를 통해 확장된 지반 위에서 유지되어 온 달러의 가치는, 이미 그에 상응해 미국의 재정적자가 크게 확대된 상황에서, 국제무역·금융을 제약하며 그 지반을 미국 내부로 축소하면 유지될 수 없다. 대안을 동반하지 않은 채 기존 질서를 무너뜨리는 길이라는 점에서, 트럼프식 정책 전환은 세계경제 전반에 상당한 위협을 가한다.

     

     

    4. 한국경제: 성장이 멈춘 가운데 재정적자와 금융 불안정성이 급격히 확대

     

    국제무역과 금융의 상황이 이렇다보니, 수출에 의존하는 한국경제는 상당한 부정적 영향을 받고 있다. 먼저 한국은행·KDI 등의 경제전망을 토대로 1) 전체적인 그림을 그린 후, 2) 무역 전쟁의 효과, 3) 재정적자 확대, 4) 금융 불안정성 확대를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1) 전체 그림: 양극화의 심화

     

    대다수 기관은 한국의 경제성장률이 2024년 2.0%에서 올해 0.9%로 급락한 뒤, 2026년에는 잠재성장률과 같은 1.8%로 반등할 것으로 전망했다. 올해 3분기 반도체 수출 호조로 성장률이 예상보다 개선되면서, 11월에 한국은행은 올해 성장률 전망치를 1.0%로 0.1%p 상향 조정하기도 했다.

     

    회복 전망의 배경으로는 크게 세 가지 요인이 거론된다. 첫째, 수출의 선방이다. 관세 부과 전 ‘선제 수입’의 효과로 자동차 수출이 예상과 달리 증가했고, 더 중요한 요인으로는 미국의 AI 설비투자 확대에 따른 반도체 수출 급증이 있다. 둘째, 대미 관세협상이 타결되면서 성장률에 예상됐던 부정적 충격이 일정 부분 완화됐다는 점이다. 트럼프 관세 부과로 수출 둔화는 불가피하지만, 타결 이전 전망에 비해 낙폭은 다소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셋째, 내수의 완만한 회복이다. 지난해 말부터 올해 초까지 급격히 위축됐던 민간소비가 점차 회복됐으며, 이재명 정부의 소비쿠폰 지급은 회복세를 더 가속했다. 건설업은 여전히 마이너스 성장을 하고 있으나 느린 속도로 회복하고 있으며, 내년 정부의 SOC 투자 예산이 크게 늘며 회복세가 한층 빨라질 것이란 기대도 나온다.

     

    그러나 이러한 일부 회복 신호가 한국경제 전반의 여건이 개선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먼저 수출 부문 내부의 양극화가 빠르게 심화되고 있다. 코로나19 이후 수출 회복 국면에서 수출 부문 내 양극화는 더욱 뚜렷해졌다. 수출액에서 상위 10대 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2023년 2분기 31.1%에서 2025년 3분기 40.0%까지 상승했다. 특히 최근 1년 사이 급격한 집중이 나타났다.

     

    최근 수출 호조는 반도체와 조선 등 특정 산업과 일부 대기업에 집중돼 있으며, 관세 충격으로 전체 수출 증가율이 둔화하는 가운데 다수 산업은 오히려 타격을 받고 있다. 반도체 수출 호조는 세계 AI 투자 확대라는 외생적 요인에 크게 의존한 것으로, 한국경제 전반의 투자·생산성 회복을 견인하는 내생적 동력으로 전환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반도체 부문을 제외한 대부분 산업에서는 설비투자도 정체 상태에 머물고 있다.

     

    [%=사진17%]

    [그림] 제조업과 서비스업의 대기업/중소기업 생산지수 증감율 (위)

    제조업과 서비스업의 세부 업종별 생산지수 증감율 (아래)

    제조업에서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성장률 격차가 확대되고 있다. 2025년 3분기 제조업의 생산 확대는 반도체 수출 호황에 의한 것으로 분석된다. 한편, 서비스업에서는 25년 3분기 중소기업의 생산이 확대되고 있는데, 이를 이끄는 업종은 도소매 및 숙박·음식업으로, 이재명 정부의 소비쿠폰 발행의 영향으로 분석된다. (자료출처: 중소벤처기업연구원, KDI)

     

    둘째, 제조업을 중심으로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성장률 격차도 구조적으로 지속되고 있다. 중소 제조업의 성장률은 대기업을 따라가지 못한 채 낮은 수준에 머문다. 올해 9월 이후 수출 개선 덕분에 일부 중소 제조기업의 성장률이 간신히 플러스로 전환됐지만, 그 이전까지는 생산 규모 자체가 축소되는 흐름이었다. 앞서 언급한 수출 부문의 양극화를 감안하면, 일부 기업을 제외한 중소 제조기업의 업황은 여전히 부진할 가능성이 크다. 여기에 관세 충격 역시 중소기업에 더 크게 작용할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중소 제조기업의 부문별 경기전망지수(SBHI)도 대부분 부문에서 올해 중반 이후 큰 폭의 하락이 나타났다.

     

    셋째, 수출 둔화 속에서 내수의 성장 기여도가 상대적으로 높아지는 현상을 긍정적으로만 해석하기 어렵다는 점도 문제다. 내수 의존도가 높은 서비스업은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성장률 격차가 상대적으로 크지 않지만, 민간소비가 회복되더라도 성장률 자체는 수출 제조업에 비해 구조적으로 낮을 수밖에 없다. 소비쿠폰 지급 이후 서비스업 중에서도 특히 소상공인과 전통시장 부문의 기업경기실사지수(BSI)가 급등했는데, 이는 고질적인 저생산성 구조의 서비스업이 정부 재정지출에 더욱 의존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 또한 양극화의 한 단면이다.

     

    [%=사진18%]

    [그림] 경제성장률에 대한 지출 부문별(왼쪽) 및 내수·수출(오른쪽)의 성장 기여도 (자료출처: 한국은행)

     

    수요 측면에서 성장률 전망을 분해해 보면, 재화수출과 설비투자의 기여도는 하락하는 반면, 민간소비의 기여도는 상승하고 건설투자는 음의 기여에서 소폭의 양의 기여로 전환될 전망이다. 이 가운데 민간소비와 건설투자 요인은 정부 재정지출의 영향이 크다. 민간에서는 수출 제조업에서 일부 대기업만 호황을 누리고 중소기업은 약화되는 반면, 설비투자는 전반적으로 부진하다. 서비스업은 계속 성장하지만 이는 저임금·저생산성 부문이 중심이다. 정부 지출이 떠받치는 건설업이 마이너스 성장에서 벗어나는 정도다. 결국 일부 수출 대기업만 성장하고, 그 외 다수 부문은 정체 또는 후퇴하는 가운데 저임금 서비스업만 확대되는 구조가 고착화하며, 정부 재정에 대한 성장의 의존이 심해지고 있다. 정부 재정지출은 단기적으로 경기 하방을 완충하는 역할을 하지만, 민간 투자와 생산성 개선이 아니라 재정지출에 점점 더 의존하여 성장하는 것은 중장기적 취약성을 내포한다.

     

    이러한 성장 구조에 상응하여 고용 전망도 양극화의 심화를 보여준다. 건설업과 제조업 고용은 건설경기 회복 지연과 미국 관세 영향으로 예상보다 부진한 반면, 서비스업 고용은 정부의 일자리 정책과 소비 개선 효과로 증가폭이 소폭 확대될 것으로 전망된다. KDI는 내수 회복에 따라 고용 여건이 완만히 개선되겠지만 인구 구조 변화로 내년 취업자 수 증가는 올해 17만 명보다 줄어든 15만 명 수준에 그칠 것으로 내다봤다. 그러나 이런 고용 증가의 상당 부분은 몇몇 수출 대기업을 제외하면 대부분 저임금 서비스업 일자리에 집중될 전망이다. 결국 고용 측면에서도 양극화는 더욱 심화될 것이다. (더 자세한 고용 전망은 이번 호 이소형의 「2026년 노동 정세전망」을 보라)

     

    2) 무역 전쟁과 트럼프 관세의 효과

     

    한국경제에서 무역 전쟁의 효과는 단지 수출 증감의 수치만이 아니라, 중국 시장의 구조적 상실과 미국 시장 의존의 불안정성 확대라는 이중 충격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미 201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한국경제의 국내 투자수익률이 해외 투자수익률을 하회하며 성장 동력이 약화된 상황에서, 미·중 전략적 경쟁과 트럼프 관세는 이러한 취약성을 한층 심화시켰다.

     

    먼저 ‘2차 차이나 쇼크’가 주는 충격이다. 한국의 대중 수출은 중간재·자본재에 크게 의존했으나, 2010년대 중반 이후 반도체를 제외한 대부분 품목에서 수출이 정체되거나 감소했다. 그 결과 2024년에는 수교 이래 처음으로 대중 무역적자를 기록했다. 직접 수출뿐 아니라, 중국 생산에 한국 중간재가 얼마나 투입되는지를 보여주는 수출연계생산 역시 2021년을 기점으로 감소세로 전환되었다. 이는 경기 요인에 의한 것이라기보다, 중국의 중간재 자립, 최종재 자국화, 그리고 공급망 재편이라는 구조적 변화의 결과다. 섬유·의복에서 시작된 이러한 변화는 철강, 화학·정유를 거쳐 최근에는 IT 산업까지 확산되며, 한국 제조업의 중국 의존적 성장 모델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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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산업별 총산출 중 대중 수출연계생산의 비중 변화 (%p)

    대중 수출연계생산이란, 중국에 직접 수출한 것 외에 중국에서의 생산의 후방산업(중간재 생산) 전반을 포괄한 것이다. 가령 중국으로의 수출품에 들어가나 국내에서 생산된 중간재, 한국 기업이 베트남 등지에서 생산했으나 중국으로 수출된 중간재 등을 포함한다. (자료출처: 한국은행)

     

    여기에 트럼프 관세의 효과가 더해졌다. 트럼프 1기 미중 무역전쟁의 결과 2010년대 후반부터 한국의 대미 수출과 대미 투자가 증가했다. 물론 멕시코 등으로의 수출과 투자도 증가했다. 투자된 기업은 다시 한국이나 ASEAN의 한국 기업의 고숙련/저숙련 중간재를 수입했다. 다만 최근에는 미국 내 현지 조달 비중이 점차 확대 중이다. 트럼프 2기 관세 정책은 그런 흐름을 강화하고, 멕시코나 베트남 등 대체 경로를 제한하려 한다.

     

    작년 산업연구원의 관세 시나리오 분석에 따르면, 미국의 현 관세와 가장 유사한 시나리오(멕시코·캐나다에는 10%, 중국에 60%, 한국을 포함한 그 외 국가들에 20%의 관세를 부과)에서 한국의 대미 수출은 13.1% 감소, 부가가치 손실도 10.6조 원으로 추정되며 상당한 크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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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트럼프 2기 관세가 한국 제조업에 미치는 영향 추정치 (%, 조 원)

    이는 작년에 트럼프 행정부가 멕시코·캐나다 10%, 중국 60%, 한국 포함 나머지 국가 20%의 관세를 부과할 것이라는 시나리오 하에서 추정된 것이다. 실제 관세 부과와 협상 이후의 조건에서 추정한 분석은 아직 없다. (자료출처: 산업연구원)

     

    무엇보다 무역전쟁의 비용은 중소기업과 후방산업에 집중되고 있다. 설문조사에 따르면, 미국 관세의 간접 영향권에 속한 한국의 제조업 기업이 절반에 육박해, 이들과 직접 영향권에 속한 기업을 합치면 3분의 2 정도를 점한다. 트럼프 2기 관세의 광범위함 탓에, 미국에 완제품을 수출하는 기업뿐만 아니라, 미국 수출기업에 부품·원자재를 납품하는 기업, 미국 기업에 부품·원자재를 수출하는 기업, 중국에 부품·원자재를 수출하는 기업, 멕시코·캐나다로 수출하는 기업, 제3국(중국·멕시코·캐나다 제외) 수출 및 내수기업이 전방위적으로 타격을 받는다. 대응 능력 또한 기업 규모에 따라 크게 갈리며, 중소기업일수록 대응 계획이 없는 비중이 높다.

     

    ① 석유화학: ‘2차 차이나 쇼크’의 효과

     

    국제무역 구조의 변화가 가하는 충격은 석유화학산업에서 가장 전형적으로 나타난다. 국내 석유화학산업은 나프타를 원료로 하는 구조상 원유 정제와 글로벌 공급망에 대한 의존도가 매우 높으며, 그동안 중국을 최대 수출시장으로 삼아 성장했다. 그러나 2020년대에 접어들며 이 성장 경로는 구조적 전환점에 직면하고 있다.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중국의 자급률 상승이다. 중국은 2018년 대비 2023년 글로벌 에틸렌 생산능력 증가분의 절반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대규모 증설을 단행했으며, 이는 한국의 증설 규모를 크게 상회한다. 그 결과 한국 석유화학산업의 최대 수출시장인 중국의 수입 수요가 구조적으로 축소되었다. 2010년대 후반까지 전체 석유화학 수출의 절반가량을 흡수하던 중국의 비중은 최근 40% 초반 수준으로 하락했다. 이는 단순한 경기 변동이 아니라, 중국의 자립화 전략과 과잉증설에 따른 구조적 변화다.

     

    여기에 보호무역 강화가 겹쳤다. 미·중 무역 분쟁의 장기화와 블록화된 가치사슬의 형성, EU의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도입, 반덤핑 제소 증가 등은 석유화학과 같은 범용 소재 산업의 교역 환경을 전반적으로 악화시키고 있다. 특히 중국의 과잉 생산능력이 글로벌 시장으로 방출되는 상황에서, 한국 기업들은 가격 경쟁과 무역 장벽이라는 이중 압력에 노출되고 있다.

     

    지정학적 리스크 역시 구조적 취약성을 강화한다. 국내 석유화학산업은 원료를 전량 수입에 의존하기 때문에, 중동·러시아를 둘러싼 지정학적 불안정성은 원가 변동성을 크게 확대한다. 다만 여기에는 조달선 다변화를 통해 일정 부분 대응이 이뤄져 왔다는 점에서, 전문가들은 지정학적 리스크 자체보다는 중국의 자급률 상승과 보호무역 강화가 더 근본적인 위협이라고 평가한다.

     

    트럼프 2기 행정부의 관세 정책은 석유화학산업에 직접적인 타격을 주기보다는, 이미 진행 중인 이러한 구조적 변화를 가속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한국의 대미 석유화학 수출 비중이 크지 않다는 점에서 단기적 영향은 제한적일 수 있으나, 보호무역 강화와 블록화된 공급망이라는 장기적 환경 변화 속에서 한국 석유화학산업의 입지는 점차 축소되고 있다.

     

    ② 철강: ‘2차 차이나 쇼크’와 트럼프 관세의 결합

     

    철강산업은 ‘2차 차이나 쇼크’와 트럼프 관세의 효과가 결합한 대표적 부문이다. 국내에서는 건설경기 침체 장기화와 제조업 성숙화로 내수가 위축되며 2024년 내수와 생산이 모두 감소했고, 중국의 내수 부진과 과잉공급은 중국산 수입 급증으로 이어져 국내 가동률 하락과 수익성 악화를 초래했다. 이에 기업들은 다른 시장으로의 수출 비중을 높이며 버티고 있으나, 수출단가 하락이 지속되면서 물량 증가에도 금액 기준 수출은 약화되는 ‘저가 압박’이 심화되고 있다.

     

    게다가 주요 시장의 보호무역 강화가 수출 여력을 제약한다. 미국은 철강 수요가 생산을 상회해 구조적으로 수입 의존도가 높지만, 2025년 관세 강화 이후 미국 시장에서 수입산 점유율이 낮아지고 있다. 이에 미국 외 지역으로의 수출 확대(인도·베트남·튀르키예·브라질 등)로 충격을 완화하려는 다변화가 진행 중이다. 다만 강관류처럼 대미 의존도가 높은 품목은 대체 시장이 제한적이고, 미국 시장에서 경쟁국 간 점유율 경쟁이 나타나 관세 환경이 장기화할수록 수익성과 물량 모두 압박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

     

    ③ 자동차 및 부품: 트럼프 관세의 효과

     

    미국 시장 의존도가 매우 높은 자동차산업은 트럼프 관세의 단기 효과와 중기 효과가 가장 잘 나타나는 사례다. 관세 부과 이후 대미 자동차 수출은 감소했으나, 감속 폭은 예상보다 제한적이었다. 전체 자동차 수출도 다른 지역으로의 수출 증가에 힘입어 큰 감소 없이 유지되었다. 특히 중앙아시아와 유럽 일부 국가로의 수출 확대는 대미 수출 감소분을 상당 부분 흡수했다. 또한 현대차의 미국 신공장 가동 확대에 따라 미국 내 생산과 판매가 빠르게 늘면서, 현대·기아차의 미국 시장 점유율은 오히려 상승했다. 표면적으로 보면 관세 부과에도 불구하고 자동차산업은 수출, 생산, 판매 측면에서 비교적 안정적인 모습을 보인 셈이다.

     

    그러나 이러한 안정성은 관세 충격을 흡수한 결과라기보다, 기업이 비용을 내부화한 결과에 가깝다. 관세 부과 이후에도 미국 시장에서 판매 가격을 인상하지 않아, 관세 부담은 고스란히 기업 이익 감소로 전가되었다. 실제로 현대자동차와 기아는 매출이 증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영업이익과 영업이익률이 큰 폭으로 하락했으며, 미국 수출 의존도가 높은 한국GM은 관세 부과 이후 빠르게 적자로 전환되었다. 관세를 고려해 출고가와 수출 단가를 낮추는 방식으로 가격을 유지한 결과, 대미 수출 평균 단가는 관세 부과 이전보다 뚜렷하게 하락했다.

     

    요컨대 신공장 가동과 지역 다변화를 통해 단기적인 물량 조정은 가능했으나, 가격 경쟁이 치열한 글로벌 자동차 시장에서 관세를 판매 가격에 전가하기는 어려웠다. 그 결과 관세는 이익 감소라는 형태로 누적되고 있다. 이는 자동차산업 역시 석유화학·철강과 마찬가지로, 겉보기와 달리 중기적으로는 투자 여력과 고용, 하청 구조에 부담을 축적하는 경로에 놓여 있음을 시사한다.

     

    자동차산업 내부에서도 관세 충격은 가치사슬 하단으로 갈수록 더 크게 작용하고 있다. 완성차 업체와 달리 자동차 부품업체는 미국 수출 감소를 다른 지역 수출로 대체하기가 훨씬 어렵다. 한국의 자동차 부품 수출은 대부분 한국 완성차 업체의 해외 생산에 연동되어 있는데, 현지에서 부품을 조달하는 비중은 이미 장기적으로 확대되어 왔다. 여기에 미국의 자동차 부품 관세가 더해지면서, 완성차 업체들은 미국 내 조달을 더욱 늘릴 유인이 생겼다. 이는 국내 부품업체의 수출 기반을 직접적으로 약화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다.

     

    또한 관세 부담을 소비자 가격으로 전가하지 못한 완성차 업체들이 출고 가격을 낮추는 전략을 택하면서, 부담은 부품 단가 인하 요구로 전가되고 있다. 미국 시장뿐 아니라 제3국 시장으로 수출을 다변화하기 위해서도 가격 인하가 불가피해, 부품업체들은 이중의 가격 압박에 직면해 있다. 이런 하방 압력에 의한 조정은 단기적인 경쟁력 유지에는 기여할 수 있으나, 중소 부품업체의 수익성과 투자 여력을 크게 훼손함으로써 자동차산업 전반의 중기적 안정성을 약화시킬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올해 관세 협상에서 쟁점이 됐던 대미투자 문제를 짚자. 2장 3절에서 언급했듯 트럼프 행정부가 요구하는 3,500억 달러 규모의 대미투자는 과도한 요구다. 다만 통합된 세계경제에서 무역이나 대외투자 자체가 단순히 ‘악’은 아니며, 그 경제적 이익과 손실을 구체적으로 논해야 한다. 요컨대 ‘투자 여부’ 자체가 아니라 ‘어떤 투자이며, 무엇을 대가로 얻는가’가 문제다. 미국은 여전히 반도체, 첨단 제조, 에너지, 방위산업, 디지털 기술 등에서 기술적 우위를 보유하고 있으며, 미국과의 전략적 협력과 공동 투자를 통해 기술·시장·표준을 확보할 여지는 존재한다.

     

    문제는 관세 협상에서 조선업을 제외하면 대미투자의 구체적 용도나 산업적 연계에 대해 구체적으로 논의된 바가 별로 없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는 미국 측의 일방성 탓만이 아니라, 한국 정부가 산업별로 ‘무엇을 얻을 것인가’에 대한 준비된 전략을 제시하지 못한 측면도 있다. 단순한 투자 총액이나 수익 배분에 관한 논의를 넘어, 산업별로 기술 이전, 공급망 지위, 시장 접근, 표준 선점 등 구체적 교환 조건을 설정하지 않는다면, 대미투자는 3장에서 서술했듯 비효율로, 국내에서는 그저 산업 공동화를 가속하는 비용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다.

     

    3) 재정적자와 정부부채의 급격한 확대

     

    사회진보연대는 작년 한국경제 전망에서 이미 한국 정부부채의 절대 규모와 증가 속도가 위험 수준에 있음을 지적했다. 한국은 코로나19 이후 정부부채가 명목 GDP 성장률을 크게 상회하는 속도로 증가해 왔다. 이는 사실상 폰지 재정 상태다. 부채의 질적 구성도 악화하고 있다. 대응 자산이 있는 금융성 채무보다, 향후 조세로 상환해야 하는 적자성 채무의 비중이 빠르게 높아졌다. 여기에 공기업 부채와 정책금융 부채까지 포함한 공공부문 부채(D3)를 고려하면, 그 규모는 세계 최고 수준에 달한다. 게다가 2년째 세수 결손이 발생하고, 국고채의 차환 발행 비중이 증가하며 순발행 비중이 하락하고 있다. (이아림, 「한국경제 전망과 제약 조건」, 《계간 사회진보연대》, 2024년 겨울호)

     

    이러한 구조적 취약성 위에서, 최근 재정정책 기조의 변화는 부채 문제를 더욱 가속화하고 있다.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올해에만 두 차례의 추가경정예산이 편성·집행되었고, 그 규모는 42조 원이 넘는다. 이는 경기 대응을 넘어 재정 확장 기조의 신호였다. 2026년도 본예산안에서도 그런 기조 변화가 분명히 드러났다. 총지출 증가율은 8%를 상회하며, 이는 코로나19 시기를 제외하면 이례적으로 높은 수준이다. 국가재정운용계획(2025~2029년)에 따르면 향후 수년간 관리재정수지 적자는 GDP 대비 4%대에서 고착화되고, 국가채무비율 역시 빠른 속도로 상승할 것으로 전망된다. 확장 기조가 중기적으로 고정되는 양상이다.

     

    재정 기조 변화의 결과는 금융시장의 반응을 통해 즉각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올해 들어 기준금리는 인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국고채 장기금리는 오히려 상승하며, 이례적인 정책·시장금리의 탈동조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는 재정 확대와 국채 공급 증가에 대한 시장의 우려가 장기금리에 반영되며, 금리 정책으로 시장금리를 조절하기 어려워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12월 9일 기준 국고채 3년물을 비롯한 5년물과 10년물의 금리는 각각 3.084%, 3.302%, 3.453%로 연중 최고치를 갱신했다.

     

    국고채의 차환 발행 비중이 높아지고 순발행 여력이 줄어드는 가운데, 향후 대규모 국채 발행이 예고되면서 재정 조달 비용은 구조적으로 상승 압력을 받고 있다. 정부부채 증가에 따른 국채 금리 상승을 추정한 KDI의 연구에 따르면, 금리가 지속적으로 상승하여 정부부채가 2000조원에 도달하는 2030년에는 4.847% 수준에, 2040년에는 6.952%에 육박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는 확장 재정이 더이상 저금리 환경 속에서 무리 없이 흡수되지 않는 국면으로 진입했음을 시사한다.

     

    [%=사진21%]

    [그림] 정부부채 증가율 및 국채 이자율에 대한 장기 전망치 (%)

    이는 작년에 추정된 것으로,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재정지출 전망의 변화를 반영한 것이 아님에 유의해야 한다. (자료출처: 양주영, 2024)

     

    이런 상황에서 이재명 정부가 올해 행한 정부조직 개편은 우려를 더욱 키운다. 기획재정부의 축소, 예산 기능의 분리, 금융정책 조직의 재편은 대통령의 재정·금융 정책 통제력을 강화하는 방향이다. 이번에 개편된 재정·금융기구의 구조는 과거 박정희 정권 시절 개발국가 모형이나 IMF 위기 대응 국면의 김대중 정부에서 나타났던, 강한 국가 통제 모델과 유사하다. 재정 규율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할 장치들이 약화되는 가운데, 재정정책의 정치화 위험성이 커지고 있다. 재정준칙 도입 논의가 사실상 후퇴한 상황에서, 확장재정과 제도적 견제 약화가 결합할 경우 재정 신뢰는 빠르게 훼손될 수 있다.

     

    이는 3장에서 서술한 국제적인 자본도피의 흐름 속에서, 원화 가치 하락과 국채 금리 상승, 나아가 자본 유출로 이어질 가능성을 내포한다. 이미 환율의 구조적 상승이 실제 문제가 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절에서 다룬다) 부담은 결국 저축 여력이 낮고 금융자산을 충분히 보유하지 못한 소득 하위계층 가계에 집중될 것이다.

     

    4) 금융 불안정성의 급격한 확대와 자본유출

     

    ① 유동성 확대

     

    올해 한국은행은 유동성 완충을 확보하는 기조를 보였다. (유동성 완충(Liquidity Buffer)은 금융기관이나 기업이 예상치 못한 유동성 위기나 혼란기에 자금을 즉시 조달하여 현금을 확보할 수 있도록 미리 준비해두는 안전 자산이나 예비 자금을 의미한다.) 한국은행은 올해 7월부터 환매조건부채권(RP) 매입을 처음으로 정기화했다.

     

    환매조건부채권이란, 채권 매입자/매도자가 정해진 미래의 날짜에 채권을 다시 팔기/사기로 약속하는 조건이 붙은 채권이다. 한국은행이 RP 매입을 하면, 시중은행은 잠시 채권을 내어주고 유동성을 얻은 뒤 정해진 날짜가 되면 다시 채권을 얻고 유동성을 돌려준다. 그런데 한국은행은 이를 정례화하여, 사실상 일시적인 매입을 연속화하여 유동성을 정기적으로 공급하는 것이다.

     

    실제 유동성 조절 규모를 보면 이러한 변화는 분명하다. 통화안정증권 발행과 환매조건부채권(RP) 순매각을 포함한 한국은행의 유동성 흡수 규모는 올해 상반기 93조 원 수준이다. 통계를 공개하기 시작한 2020년 이후 처음으로 100조 원을 밑돌았다. (통화안정증권 발행이란 한국은행이 직접 채권을 발행해 팔아 시중의 유동성을 흡수하는 것이다. 환매조건부채권의 순매각이란 매각 규모가 매입 규모를 초과하는 것으로, RP 매각의 효과는 앞 문단의 매입 효과를 반대로 생각하면 된다) 반면 환매조건부채권(RP) 매매는 지난해 하반기 순매입으로 전환된 데 이어, 올해에 순매입 규모가 15조 원을 넘어섰다.

     

    나아가 한국은행은 11월 4일 국고채 단순매입 계획이 없다고 밝혔음에도, 한 달여 만에 1조 5천억 원 규모의 국고채를 매입했다. (국고채 단순매입은, 앞서 RP 매매처럼 일시적으로만 채권을 사고 다시 되파는 게 아니라, 한국은행이 국고채를 사서 소유하는 것으로, 사실상 양적 완화다.) 이는 코로나 위기 이후 3년 3개월 만의 매입이다. 명목상 이유는 향후 RP 매각을 위한 국채 확보였으나, 사실상 RP 순매입 기조인 상황에서 실제 이유는 앞 절에서 본 채권 금리 급등을 진정시키기 위한 조치였다고 해석된다. 문제는 이 조치가 금리 안정으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국채 매입 이후에도 장기 국채 금리는 오히려 연중 최고치를 경신하며 상승했고, 정책 목적과 효과 간의 괴리가 드러났다.

     

    한편, 기준금리 정책 역시 금융안정 리스크에 종속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11월 27일 한국은행은 기준금리를 네 차례 연속 동결하며, 금리 인하 사이클이 종료될 가능성을 시사했다. 이는 원화 가치 하락과 부동산 시장 과열이라는 금융 불안 요인이 금리 정책의 제약 조건으로 작용함을 보여준다. 실제로 원/달러 환율은 1,470원대까지 상승했고, 미국과의 기준금리 격차가 확대되면 자본유출 압력이 더 커질 수 있는 상황이다. 동시에 서울을 중심으로 주택 가격 상승세가 이어지면서, 금리 인하를 통한 경기 대응이 자산시장 과열을 자극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졌다. 한국은행 역시 통화정책방향의 표현을 수정하며, 금리 인하의 지속 여부에 유보적인 태도로 전환했다. 다만 금리 인상에 대해서는 시일이 걸릴 것이라 봤다.

     

    이러한 상황에서 통화량 지표는 유동성 압력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준다. 올해 9월 기준 광의통화(M2)는 전년 대비 8.5% 증가해, 코로나19 시기 대규모 재정지출 국면에 근접한 증가율을 보였다. 금리 인하 국면에서 수익증권으로 자금이 유입되는 가운데, 확장적 재정 기조가 맞물리며 시중 유동성은 다시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한국은행은 M2에 ETF도 포함됨을 들어 증가세가 과장되었다고 설명하지만, 자산시장과 환율에 동시에 압력이 가해지는 사실 자체는 부인하기 어렵다.

     

    ② 부동산시장: 금융규제의 과잉

     

    한국은행은 수도권과 비수도권 간 부동산 시장의 양극화가 구조적으로 심화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인구와 산업의 수도권 집중, 다주택 규제에 따른 서울 주택 선호 쏠림이 맞물리면서, 정책 변화에 따른 수도권 주택 가격의 민감도가 매우 높아졌다는 것이다. 한국은행은 이러한 상황에서 가계부채 관리와 부동산 정책의 일관성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며, 장기적으로는 자금이 부동산에서 생산적 부문으로 이동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한국은행이 말하는 ‘생산적 부문’은 실물 투자와 생산성 제고를 의미하는 반면, 이재명 정부가 상정하는 생산적 부문은 주식시장에 가깝다는 점에서 양자의 인식에는 간극이 있다. 더 중요한 문제는, 정부가 서울·수도권 주택 가격 상승에 대응하는 방식이 금융규제를 중심으로 극단화되었다는 점이다. 최근 발표된 10·15 부동산 대책은 집값 안정이라는 목표를 넘어, 주택시장의 거래 기능 자체를 크게 위축시키는 방향으로 설계되었다.

     

    이번 대책은 서울 전역과 수도권 일부 지역을 다시 규제지역으로 묶고, 주택담보인정비율(LTV)을 40%로 제한했다. 그 결과 근로소득을 기반으로 한 실수요자조차 대출을 통한 주택 구입이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예컨대 10억 원 주택을 구입하려면 6억 원 이상의 자기자본이 필요하고, 25억 원 이상 주택은 2억 원까지만 대출이 허용된다. 이는 거래 가능성을 현금 보유 여부에 따라 극단적으로 분절시키는 구조로, 시장을 사실상 고액 자산가 중심으로 재편하는 효과를 낳는다.

     

    토지거래허가구역 확대와 2년 실거주 의무 부과 역시 주거 이동의 자유를 제약한다. 직장 이동이나 자녀 교육과 같은 현실적 사유에도 불구하고 주택 처분이나 이전이 어려워지면서, 기존 소유자의 지위는 고착되고 거래는 급감한다. 전세대출과 신용대출까지 동시에 규제되면서, 과거 무주택자가 전세를 거쳐 자가로 이동하던 ‘주거 사다리’ 역시 사실상 붕괴되었다. 실제로 10.15 대책 이후, 전월세 가격 상승폭이 확대됐다.

     

    이러한 정책 방향은 문재인 정부 시기의 초고가 주택 대출 규제를 연상시킨다. 당시에도 정부는 투기 억제를 명분으로 들어 주택 가격을 기준으로 대출을 전면 금지했으나, 이는 국제적으로도 유례가 드문 정책이었다. 결과적으로 규제는 투기를 억제하기보다 가격 양극화를 심화시켰다. 고가 주택 시장은 현금 부유층 중심으로 고착되었고, 상대적으로 규제가 덜한 구간으로 수요가 몰리면서 서울 평균 주택 가격은 빠르게 상승했다. 불과 몇 년 사이 ‘초고가 주택’의 기준 자체가 상향 조정된 것은 이러한 정책의 귀결이라 할 수 있다.

     

    여론도 이재명 정부의 과도한 시장 개입에 비판적이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부동산 규제 확대와 대출 제한 강화가 ‘적절하지 않다’는 응답이 ‘적절하다’는 응답을 상회했다. 이는 정부가 부동산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오히려 스스로 정치적·경제적 부담을 키우고 있음을 보여준다.

     

    정책 담당자들이 금리 인상기에 집값 상승세가 둔화되는 모습을 보며 금융규제의 효과를 과신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금리라는 거시적 조건이 아니라, 주택 가격·지역·거래자의 속성에 따라 대출 한도와 이자율을 세세하게 구분해 정하는 방식은 세계적으로도 매우 이례적이다. 더욱이 이러한 규제는 한국은행이 지적한 서울·수도권 주택 가격 상승의 근본 요인, 즉 인구·산업 집중과 과잉 유동성이라는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오히려 거래 위축과 시장 경직을 일으켜 향후 가격 급등의 토대를 만들 위험이 있다.

     

    결국 이재명 정부의 부동산 정책은 금융 불안정성을 완화하기보다, 시장 기능을 약화시키고 정책 리스크를 키우는 방향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는 자산시장 불안이 정부와 금융시스템 전체를 제약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징후다.

     

    ③ 주식시장: 유동성 확대와 정책이 주도한 상승의 불안정성

     

    올해 4월 9일 2293이었던 코스피 지수는 11월 3일 4,221까지 약 7개월간 가파르게 상승했다. 그러나 11월 초를 기점으로 하락세로 전환되면서 시장 전반에 불안이 확산되었고, 단기 조정이 아닌 공황 가능성에 대한 우려까지 제기되고 있다. 실제로 투자자들의 불안을 반영하는 코스피 변동성지수(VKOSPI)는 4월 주식시장 급락 당시 수준까지 상승했다.

     

    지난 몇 개월간의 기록적인 주가 상승에는 세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첫째, 미국을 중심으로 한 AI 산업 투자 확대에 따라 반도체 수요가 급증하면서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의 실적이 크게 개선되었다. 여기에 방위산업, 조선, 배터리 제조업 등 일부 수출 산업의 호조도 주가 상승을 뒷받침했다. 즉 실물 기반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둘째, 7월 민주당과 이재명 행정부가 추진한 상법 개정이 주주환원 기대를 높이며, 한국 주식시장의 구조적 저평가 문제를 완화할 것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셋째, 외국인 투자 자금이 대거 유입되며 상승 흐름을 강화했다. 특히 세계적 수준보다 낮은 한국의 주가수익비율(PER)과 주가순자산비율(PBR)이 일련의 법 개정으로 개선될 것이라는 기대가 외국인 수급을 자극했다.

     

    그러나 이러한 상승이 지속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된다. 첫째, 한국경제 전반이 침체 국면에 놓인 가운데, AI와 연관된 소수 산업과 기업의 주가만 급등하고 나머지 부문은 정체되거나 하락하는 모습이 뚜렷하다. 일부 대형주의 상승이 지수 전체를 왜곡하는 구조다. 둘째,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 등 주가 상승을 주도한 기업들의 실적이 개선된 것은 사실이지만, 실적 개선 속도에 비해 주가 상승 속도가 훨씬 빨랐다는 점에서 기대에 기초한 과잉 반영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실제로 일부 연구자들은 2025년의 이론적 적정 코스피 지수를 3,200선 내외로 제시하고 있다. 셋째, 유동성이 과도하게 주식시장으로 집중되고 있다. 올해 10월 기준 광의통화(M2) 대비 코스피 시가총액 비율은 75.6%로, 장기 평균 수준인 57.5%를 크게 상회한다.

     

    특히 문제적인 것은 개인투자자의 참여 양상이다. 코스피의 상승 국면에서는 외국인과 국내 기관투자자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나, 10월 말 이후 개인투자자 자금이 대거 유입되었다. 10월 30일 기준 투자자 예탁금은 85조 7천억 원으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고, 신용거래융자 잔고도 25조 원을 넘어 역사적 고점에 근접했다. 이른바 ‘빚투’가 확대된 상황에서, 11월 초 주가가 하락세로 전환되자 개인투자자의 손실과 불안이 빠르게 확산되었다. 실제로 불과 2주 만에 투자자 예탁금이 10조 원 이상 감소했고, 11월 한 달간 개인투자자의 국내외 주식 수익률은 모두 큰 폭의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식시장은 점차 정책과 정치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다. 심지어 이재명 정부는 ‘코스피 5000’을 정책 목표로 제시하는데, 특정 주가를 목표로 삼는 정책은 세계적으로 전례가 없는 일이다. 일각에서는 이재명 정부가 부동산 정책에서의 실책을 주식시장 상승으로 상쇄하려 시도하고 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민주당과 정부는 상법 개정을 비롯해 배당소득 분리과세, 자사주 소각 의무화 등 일련의 ‘증시 부양 입법’을 추진하며 시장에 추가적인 기대를 불어넣었다. 그러나 주가 하락이 시작되자, 개인투자자 사이에서 추가적인 상법 개정과 정책 개입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동시에 하락의 책임을 둘러싼 정치적 공방도 격화했다. 최근에는 한국은행 총재가 금리 인상 기조로의 전환을 시사한 것이 주가 하락과 환율 상승의 원인이라는 비판까지 제기되었으나, 실제로 한국은행은 완화적 기조를 상당 기간 유지해 왔다. 정책 부작용이 가시화되자 통화당국에 책임을 전가하는 양상이다.

     

    무엇보다 우려되는 것은 민주당과 이재명 정부가 주가 부양을 위해 준비한 정책 수단들의 위험성이다. 부동산 규제를 통해 자금을 주식시장으로 유도하며 유동성을 키웠다. 자사주 소각 의무화는 기업의 자율성과 재무 전략을 제약할 수 있다는 점에서 논란이 크다. 여기에 국내주식 비중을 중기적으로 줄이고 자산을 다변화한다는 국민연금의 중기 자산배분 원칙을, 전술적 자산배분제도(단기적인 시장 상황 변화에 맞춰 자산군 간 비중을 적극적으로 조정하는 투자 전략)을 통해 무력화하여, 최대 30조 원 규모의 자금을 주식시장에 투입하려는 시도까지 더해졌다. 이는 단기적으로 주가를 떠받칠 수는 있으나, 장기적으로는 연기금의 안정성과 금융 시스템 전반의 위험을 크게 키울 수 있다.

     

    결국 현재의 주식시장 상승은 실물경제의 회복에 기초했다기보다, 유동성 집중과 정책 주도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이러한 구조에서는 조정이 시작되면 변동성이 급격히 확대될 가능성이 높으며, 그 부담은 레버리지를 동원해 뒤늦게 진입한 개인투자자에게 집중될 수밖에 없다. 금융 불안정성 확대가 정치와 정책 전반을 압박하고, 다시 정치가 개입하며 그 위험성의 판을 더 키우는 악순환으로 이어질 수 있다.

     

    ④ 외환시장: 자본흐름 구조 전환과 원화 약세의 고착화

     

    최근 1470원을 돌파한 원/달러 환율의 상승은 단기적 불안이나 외국인 자본 이탈만으로 설명되기 어렵다. KDI에 따르면, 환율 상승의 구조적 배경에는 앞서 3장에서 살펴봤듯 한국경제의 자본수익성 하락과 이에 따른 자본흐름의 근본적 전환이 자리하고 있다. 200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국내 투자수익률이 점진적으로 하락한 반면, 해외 투자수익률은 상대적으로 높게 유지되었고, 2010년대 중반에 이르러 국내·해외 투자수익률이 역전되었다. 이로 인해 한국의 순해외투자는 빠르게 증가했고, 결국 소득수지가 구조적으로 흑자(+)로 전환되는 단계에 이르렀다.

     

    [%=사진22%]

    [그림] 한국의 국내/대외 투자수익률, 순해외투자 지위 변화, 순대외자산 증가

    3장의 국제 자본흐름 변화에서 확인했듯, 한국도 2010년대 국내/대외 투자수익률이 역전되며 순대외자산국으로 전환했다. 내국인에 의한 지속적인 자본유출 증가가 환율을 상승시키는 구조적 요인이 되었다.

     

    이 변화는 외환위기 위험의 성격을 바꿨다. 1990년대 후반 외환위기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한국경제의 핵심 위험은 외국인에 의한 급작스런 자본유출이었다. 그러나 2014년 이후 한국이 순대외자산국으로 전환되면서, 외국인 단기자본 유출로 인한 전통적 외환위기 가능성은 크게 약화되었다. 대신 내국인(기업, 국민연금, 개인)에 의한 구조적 해외자본 유출이 새로운 문제가 됐다.

     

    이제 환율에 상방 압력을 가하는 주된 요인은 외국인이 아니라 내국인이다. 국내에서 기대할 수 있는 수익률이 낮아지면서, 기업은 해외 직접투자와 현지 생산을 확대하고, 연기금과 기관투자자는 해외 증권투자 비중을 늘리며, 개인도 해외 자산으로 이동하고 있다. 이는 원화를 보유하기보다 달러 자산을 선호하는 행태가 구조적으로 확산했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과거에는 ‘외국인이 원화를 떠나는 것’이 문제였다면, 이제는 ‘내국인이 원화를 버리는 것’이 장기적 환율 상승 압력의 핵심 요인이 되었다.

     

    물론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달러의 국제적 위상은 약화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달러 약세보다 원화 약세가 더 빠르고 더 깊게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의 재정적자와 통화정책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글로벌 자본은 여전히 달러를 원화보다는 안전한 자산으로 인식하는 반면, 한국경제의 낮은 성장률, 높은 부채 증가 속도, 자산시장 불안정성이라는 요인이 결합되며 원화의 매력도가 빠르게 저하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이재명 정부는 환율 안정을 위해 국민연금을 동원하고, 외환시장 규제를 완화하고 있다. 국민연금을 환율 방어의 정책 수단으로 사용하는 조치는 논란의 소지가 클뿐더러, 이를 노린 환투기를 유발할 수 있고, 국민연금의 수익률에 부담을 키울 수 있다. 게다가 금융기관의 외환 건전성 관련 규제 완화나 외국인의 국내주식 투자를 늘리려는 조치는 금융 불안정성을 더욱 심화시킬 수 있다.

     

    결국 현재의 환율 문제는 일시적 충격이나 심리 요인이 아니라, 성장 둔화와 수익성 하락, 자본흐름의 구조적 전환, 그리고 재정·금융 정책의 누적된 제약이 결합된 결과다. 외환위기의 형태는 달라졌지만, 원화 약세는 새로운 방식으로 한국경제의 취약성을 드러내고 있다. 이는 앞서 살펴본 재정적자 확대, 자산시장 불안정성, 금융정책의 제약과 맞물리며 한국경제가 점점 더 좁은 궁지로 밀려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5) 소결: 성장 둔화와 정책 의존 속에서 증폭되는 불안정성

     

    이 장에서 살펴본 한국경제의 모습은 성장의 구조적 약화 위에 정책 개입이 중첩되며 불안정성이 증폭되는 과정으로 요약할 수 있다. 반도체를 중심으로 한 일부 수출 대기업을 제외하면, 한국경제의 다수 부문은 이미 성장이 멈추었거나 후퇴 국면에 접어들었다. 2장에서 본 무역 전쟁과 글로벌 분절화는 이런 추세를 더욱 고착화하고 있다. 중국의 자립화와 트럼프 2기 행정부의 관세 정책이 한국 제조업의 중간재·자본재 수출 기반을 동시에 압박하며, 자동차·철강·석유화학 등 핵심 산업에서도 수출을 유지함에도 수익성이 하락하는 문제가 심화하고 있다.

     

    이러한 실물 부문의 약화는 재정과 금융으로 전이되고 있다. 성장 둔화에 대응해 정부는 재정지출 확대에 점점 더 의존하고 있으나, 그 결과 정부부채는 명목 GDP 성장률을 상회하는 속도로 증가하며 질적으로도 악화되고 있다. 재정적자와 국채 발행 확대는 장기금리 상승으로 이어지고, 이는 통화정책의 유효성을 제약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기준금리를 낮추더라도 시장금리는 이를 따라오지 않는 이례적 디커플링이 나타나는 배경에는 바로 이러한 재정·금융 구조의 변화가 있다.

     

    금융 불안정성은 자산시장 전반에서 동시에 확대되고 있다. 유동성은 축소되지 않은 채 유지되거나 오히려 확대되고 있으며, 이는 부동산과 주식시장으로 방향을 바꿔 유입되고 있다. 부동산 시장에서는 수도권 집중과 거래 경색이 동시에 심화했고, 주식시장에서는 미국의 AI 투자 관련 소수 종목을 중심으로 한 과도한 기대가 지수를 떠받치다 조정 국면에 진입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개인투자자의 위험 노출은 오히려 확대되었으며, 정책 당국은 자산시장 하락의 정치적 부담을 우려해 추가적인 부양책에 더 깊이 개입하는 악순환에 빠지고 있다.

     

    환율 역시 이러한 구조적 압력을 집약적으로 드러내는 지표다. 3장에서 확인한 국제 자본 흐름의 미국 쏠림이 심해지는 가운데, 내국인의 대외투자(자본도피) 확대가 원화 약세를 주도하는 상황에서, 환율 상승은 단기적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성장성과 수익성의 격차가 해소되지 않는 한, 원화 약세는 장기화될 가능성이 크다. 이를 막기 위해 연기금을 동원하고 금융시장 규제를 완화하는 정책은 또 다른 위험을 내포하며, 한국경제를 막다른 궁지에 몰아넣을 수 있다.

     

    결국 한국경제는 지금, 성장은 약화되고, 재정과 금융에 대한 의존은 커지며, 그 결과 불안정성은 더 빠르게 확대되는 국면에 놓여 있다. 문제는 이러한 상황에서 정책이 단기적인 완충과 자산시장 방어에 집중되는 점이다. 이는 단기적으로 충격을 늦출 수는 있어도, 중장기적으로는 부채와 금융 불안정성을 더욱 키우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

     

     

    5. 결론

     

    서론에서 살펴보았듯, 현재 세계경제는 포즌이 말한 ‘루즈-루즈 게임’의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국제무역과 국제금융의 분절화는 각국의 성장 잠재력을 동시에 훼손하는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달러 체제는 점차 약화 중이나 이를 대체할 안정적인 국제통화 질서는 여전히 부재하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인민주의와 권위주의라는 두 정치적 흐름은 서로를 자극하며 강화하고, 점점 더 정치권력, 즉 힘과 강제에 의해 특정한 이익을 확보하려는 경향이 대세가 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한국경제에 결코 먼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은 달러 체제에 깊이 편입된 개방경제이자, 글로벌 가치사슬과 국제금융 흐름에 강하게 의존해 온 국가다. 상술한 상황은 한국과 같은 수출 의존 경제에 특히 불리하게 작용한다. 세계경제의 균열 속에서 한국은 ‘시진핑의 중국’과 ‘트럼프의 미국’ 양쪽으로부터 동시에 충격을 받는, 구조적으로 협공당하는 위치에 놓여 있다.

     

    이처럼 세계경제와 한국경제의 성장 전망이 모두 어두워지고 안전자산의 지위가 약화하는 가운데, 사실상 AI 부문과 연계된 일부 기업만이 성장하고 있다. 갈 곳을 잃은 글로벌 유동성이 그 좁은 영역으로 집중되고, 흘러넘쳐 온갖 자산들을 향하고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재정지출 확대가 성장을 떠받친다. 이는 안전자산 지위 약화 과정의 일부다. 그러나 재정지출 확대, 유동성 공급, 자산시장 부양은 구조적 해법이라기보다 지연 장치에 가깝다. 실물경제의 생산성과 수익성이 회복되지 않는 한, 이러한 정책은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문제의 표면화를 늦추며 불안정성을 누적시킬 뿐이다.

     

    겉으로 뚜렷한 위기가 아직 폭발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특별히 문제가 없는 것으로 인식하는 착시를 경계해야 한다. 금융 불안정성은 주식시장, 부동산시장, 외환시장을 가로지르며 동시에 축적되고 있다. 특히 한국에서 이재명 정부의 정책은 이 모든 영역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으며, 그 결과 정책이 스스로를 금융시장 변동성의 인질로 묶는 구조가 형성되고 있다. 자산가격 하락이 곧바로 정치적 부담으로 전이될수록, 조정은 더 어려워지고 비용은 사회 전체로 확대될 가능성이 커진다.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이후 형성된 국제무역·국제금융 질서는 분절화되고 있지만, 이를 대체할 새로운 성장 경로와 모델은 아직 수립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포즌이 지적하듯 트럼프주의가 자본주의의 재생산 조건 자체를 약화시키거나 위협한다면, 그 충격은 세계 인민에게 전가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재명 정부의 정책 실패로 한국경제의 불안정성이 가시화된 위기로 나타난다면, 그 비용 역시 한국 인민이 감내하게 될 것이다.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집권으로 정세가 급변하는 지금, 사회운동은 그 어느 때보다도 냉정하고 명료하게 경제정세를 인식해야 한다. ●

  • 2025-07-10

    트럼프 행정부 관세정책의 현황과 문제점

    포퓰리즘의 무기가 된 관세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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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퓰리즘의 무기가 된 관세정책

    트럼프 2기 행정부 관세정책의 현황

     
    지난 7일,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과 일본을 비롯한 14개 국가에 8월부터 상호관세를 부과할 것이라고 통보하는 서한을 보냈다. 그는 서한에서 “불행하게도 우리의 무역관계는 상호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면서 “한국의 관세 및 비관세, 정책, 무역장벽으로 인해 오랜 기간 지속되어 온 무역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이제는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라고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이 첫 상호관세 통보 대상으로 사실상 한국과 일본을 표적으로 삼은 것은, 대미 제조업 수출 비중이 높다는 점과 안보 문제를 고려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많다.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정책은 궁극적으로 무엇을 목표로 하는 것일까? 취임 이후 현재까지 트럼프 대통령은 수많은 관세 조치를 발표했다가 이내 철회하거나 유예하며 정책 불확실성을 높였다. 그런 가운데, 트럼프 관세 조치의 현황을 몇 가지 특징을 중심으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취임 직후 미국의 ‘불법 이민자’와 마약 유입 문제를 강조하며 이를 해결하는 수단으로 부과하는 관세다. 이 문제와 관련된 특정 국가에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밝힌 뒤, 해당국으로부터 관련 통제를 강화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관세 부과를 보류하거나 철회한 것이다. 취임 6일 뒤인 1월 26일, 트럼프 대통령은 콜롬비아에 25% 긴급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밝혔다. 미국에 불법으로 들어온 콜롬비아 출신 이민자를 항공기에 태워 콜롬비아로 강제 이송하고자 했는데, 이 항공기가 착륙하는 것을 콜롬비아 정부가 거부했다는 이유였다. 이후 콜롬비아가 미국의 모든 조건을 수용하기로 하면서, 해당 관세는 보류되었다.
     
    2월 1일에 트럼프 대통령은 ‘불법 이민자’와 마약 유입을 이유로 캐나다·멕시코와 중국을 표적으로 하여 관세를 부과하는 행정명령을 발표했다. 캐나다와 멕시코에는 25% 관세를 부과했으나, 이틀 뒤인 2월 3일 이를 30일간 유예한다고 밝혔다. 이후 캐나다와 멕시코가 국경 통제를 강화하겠다는 뜻을 밝히자, 3월 6일에는 미국·멕시코·캐나다 자유무역협정(USMCA)이 적용되는 품목에 관세를 면제한다고 밝혀 사실상 관세 부과 조치를 철회했다. 반면, 중국과는 계속해서 관세 부과 조치를 주고받으며 4월 9일 누적 관세율이 145%(중국의 보복관세는 125%)로 최고조에 달한 뒤, 5월 12일 협상을 통해 양국이 관세를 각각 115%포인트 인하하기로 합의하면서 휴전 상태에 머무르고 있다.
     
    둘째, 가장 일관되게 부과되고 있는 관세인 철강·알루미늄과 자동차·부품에 대한 품목별 관세다. 트럼프 행정부는 3월 12일 철강·알루미늄 수입품에 25% 관세를 부과하기 시작하여, 6월 4일에는 이를 50%까지 인상했다. 철강·알루미늄 관세는 트럼프 1기 행정부 시기의 대표적 관세 조치이기도 한데, 당시에는 기본 강철과 알루미늄 상품을 중심으로 각각 25%, 10%의 관세를 부과했다. (바이든 행정부 역시 큰 틀에서 이 조치를 유지했다) 이번에는 관세율을 높였을 뿐만 아니라 품목을 광범위하게 확대하고 예외 국가를 두지 않았다는 점이 특징이다. 지난 5월 9일 처음으로 미국과 무역합의를 발표한 영국만이, 유일하게 철강·알루미늄 관세를 면제받는 상태다.
     
    수입산 완성차에는 4월 3일부터 25% 관세가 부과됐다. 또한, 5월 3일부터는 수입산 자동차 부품에 25% 관세가 부과됐다. 다만, 향후 2년간 관세 일부를 완화하는 조치가 발표됐다. 이에 따르면, 미국에 완성차 생산설비를 갖춘 기업은 자동차 가격의 15%에 해당하는 부품 관세가 1년간 면제된다. 내년에는 그 비율이 10%로 낮아지고, 그다음 해부터는 면제되지 않는다. 즉, 2년 안에 미국 내로 자동차 생산설비를 이전하고, 미국을 중심으로 부품 공급망을 구축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셋째, 세계경제와 국제무역질서에 가장 파급력이 큰 조치인 10% 기본관세와 상호관세 계획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4월 2일을 ‘미국 해방의 날’로 일컬으며, 기본관세와 상호관세 계획을 발표했다. 모든 국가를 대상으로 부과되는 10% 기본관세는 4월 5일부터 발효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상호관세란 무역상대국이 미국에 부과하는 관세 수준에 상응하는 추가 관세를 부과하는 것으로, 트럼프 대통령의 핵심 공약 중 하나다. 실제 발표된 내용을 보면, 상대국에 대한 미국의 무역적자액을 상대국의 미국산 상품 수입액으로 나눈 값 기준으로 관세율을 산정했다. 예를 들어, 한국 상호관세율 25%는 한국에 대한 미국의 무역적자 660억 달러를 한국의 미국산 수입액 1315억 달러로 나눈 무역수지 비율 50.2%를 절반으로 나눈 수치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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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상호관세 계획 발표 직후 미 국채금리가 급등하자, 트럼프 행정부는 일주일만인 4월 9일, 상호관세 부과를 90일간 유예하겠다고 발표했다. 상호관세 계획을 발표한 이후 현재까지 미국과 무역합의에 이른 나라는 영국과 베트남뿐이다. 처음으로 무역 협상을 타결한 영국은 미국에 농산물과 기계류 시장을 개방하고, 100억 달러 규모의 보잉 항공기도 구매하며, 비관세 장벽을 줄일 것을 약속했다. 미국은 영국에 자동차 연간 10만대에 대한 관세를 25%에서 10%로 낮추기로 했고, 철강·알루미늄에 대한 25% 관세를 폐지하기로 했다. 영국 다음으로 무역 협상을 타결한 베트남은 상호관세율을 46%에서 20%로 낮추는 대신, 미국에 무관세로 시장을 개방하기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른 각국과의 협상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는 아직까지 안갯속에 놓인 상황이다.
     
    이후 트럼프 행정부는 ‘무역합의 아니면 상호관세 부과’를 강조하며, 7월까지 무역협상이 마무리되지 않은 나라에 상호관세를 부과하기 시작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따라 7월 7일, 트럼프 행정부는 한국과 일본을 비롯한 7개국에 8월 1일부터 상호관세를 부과할 것이라는 서한을 보냈다. 그러면서 관세율과 8월 1일이라는 기한 역시 확정된 것은 아니며, 향후 협상에 따라 조율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국내 정치를 위한 인기영합적 수단으로서 관세정책

     
    트럼프 행정부가 출범한 이후 현재까지의 관세 정책 현황을 이렇게 정리해 볼 때, 관세 정책은 일차적으로 미국 내에서 정치적 지지를 확보하기 위한 인기영합적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국내에서 심각한 사회적 쟁점으로 떠오른 마약과 이민자 문제와 금융세계화에 따른 미국 내 제조업 쇠퇴 문제를 ‘미국 우선주의’ 정책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해 왔다. 그는 복잡하고 어려운 다자간 합의가 아니라 단순하고 즉자적인 양자 간 협상을 추구하는데, 관세 부과 조치는 그러한 협상을 유도하는 주요한 수단 중 하나다. 즉, 실제로 해당 문제를 해결하는 효과가 있는가와는 별개로, 관세 부과를 지렛대로 삼아 양자 간 협상에서 상대국이 가시적인 조치를 공표하는 ‘정치적 성과’를 내는 것이 핵심이다.
     
    취임 직후 이민자와 마약 문제 해결을 요구하며 콜롬비아, 캐나다, 멕시코를 표적으로 관세 부과 조치를 부과한 것이 대표적이다. 또한 상호관세 역시, 현재까지 트럼프 행정부의 행보를 볼 때, 이를 실제로 부과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라기보다는 각국과의 ‘양자간 협상’을 통해 미국의 이익을 끌어내는 성과를 보이는 것이 주된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상호관세는 아주 단순명료하게 미국의 무역적자를 감축하는 조치를 상대국에 일방적으로 요구하고, 이를 무역합의로 발표하도록 하기 위한 지렛대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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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강·알루미늄과 자동차·부품에 대한 품목별 관세를 일관되게 부과하는 것 역시, 철강과 자동차 산업을 중심으로 제조업을 부흥하고 양질의 일자리를 늘릴 것을 요구하는 미국 노동자와 러스트벨트 지역의 지지를 얻기 위한 수단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100일을 기념하는 대규모 집회를 (러스트벨트 지역에 해당하는) 미시간주 머콤카운티에서 열고, 철강과 자동차에 부과한 관세가 미국으로 제조업과 일자리를 다시 가져올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여러분은 드디어 노동자를 위한 투사를 백악관에 가지게 됐다. 난 중국을 우선하는 대신에 미시간을 우선하겠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정작 중국에 대해서는 전략적 접근 없이 관세율을 높이는 데에만 몰두하다가, 물가와 장기 국채 금리에 파괴적 영향이 가해질 것이라는 우려가 빗발치자, 환율 협상을 비롯한 다른 현안에 대한 합의는 전혀 없이 관세율을 서로 낮추는 데에만 합의했다.
     
    그러나 미국의 거대한 무역적자와 제조업 해외 이전의 진정한 원인은 각국의 불공정한 무역관행보다는 미국이 주도하는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그 자체에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관세 조치나 각국과의 협상이 실제로 미국의 무역적자를 해소하는 효과는 매우 제한적일 것이다. 무엇보다, 금융세계화 이후 세계경제에서 가장 큰 불균형은 미국의 과도한 소비와 중국의 과도한 저축이므로, 미국은 재정긴축으로 수요를 억제하고 중국은 저축을 해소하는 정책이 수반되어야 한다. 그러나 양국의 정책 방향은 이와는 거리가 멀고, 상호 간에 유의미한 대화도 부재한 상태다.
     
    금융세계화와 수출달러환류가 지속되는 한, 품목별 관세 조치가 미국 내 제조업을 부흥하고 일자리를 늘릴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 역시 크다. 실제로 지난 트럼프 1기 행정부에서 시행했던 관세 조치는 미국의 무역적자를 감축하지도, 국내 투자와 일자리를 증가시키지도 못했다는 지적이 많다. 2020년대 이후 반도체산업과 자동차산업 일부를 중심으로 미국에 대한 투자가 증가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대부분 노동조합에 적대적이고 노동조건이 상대적으로 열악한 미국 남부 지역에 집중되어 미국 노동자의 계급적 단결을 저해하고 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는 문제다. 호주 라트로브 대학의 티모시 민친 교수는 미국 남부 지역이 ‘부유한 국가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의 빈곤한 지역으로 자본과 생산을 이전하는 세계화’의 사례라고 지적했다.
     
    결국, 트럼프 대통령에게 관세는 경제적 효과를 노리는 정책 수단이라기보다는, 직관적으로 ‘미국의 이익’으로 여겨지는 바를 상대국으로부터 얻어내기 위한 정치적 수단이다. 그마저도 미국이 마주한 현실적 문제를 실제로 해결하는 것과는 관계없이, 단지 그러한 문제의 원인을 타국으로 돌리고 관세 부과로 협상을 압박하며 ‘트럼프 행정부는 합니다’라는 이미지를 창출하는 전형적인 포퓰리즘적 방식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미국경제의 구조적 위기를 심화하는 관세정책

     
    그렇다면 트럼프 행정부는 어째서 그렇게까지 무역적자 문제에 집착하며 관세를 협상 수단으로 활용하는 것일까? 트럼프 대통령 집권 후 백악관 경제자문위원장에 임명된 스티븐 미란이 지난해 11월 작성한 이른바 ‘미란 보고서’(원제는 ‘A User’s Guide to Restructuring the Global Trading System’)에서 그 힌트를 얻을 수 있다. 트럼프 행정부의 보호무역주의와 미국 우선주의를 경제학적 이론과 정책으로 표현하는 미란 보고서는, 관세를 일종의 ‘경제 주권을 위한 무기’로 간주한다. 미국이 세계 최대의 소비시장이라는 점을 활용하여, 상대국에게 미국 시장에 대한 접근을 허용하는 대신 외국 기업의 미국 생산설비 투자 확대, 동맹국의 방위비 분담이나 미국 상품 수입 확대와 같은 대가를 요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미란은 달러를 기축통화로 하는 국제금융체계와 세계 무역질서가 미국에 구조적으로 불리하게 작동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특히 달러 과대평가가 미국의 제조업 기반을 침식하고, 무역적자와 재정적자를 고착한다고 강조한다. 따라서 그는 미국경제가 마주한 핵심 문제인 달러 과대평가, 무역적자, 국채 이자 부담을 해결하기 위해 관세 부과를 협상 지렛대로 삼아 재정 수입을 늘리고 다자간 또는 양자 간 통화 협정을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그는 주요국이 보유한 달러와 단기 국채를 만기 100년 이상의 초장기물로 교환하도록 하고 이에 응하는 국가와만 달러 스왑을 보장하도록 하여 미국의 국채 이자 부담을 축소하자는 놀라운 제안을 제시한다. 물론 그는 단기간 내에 이러한 통화 협정이 이루어지긴 어렵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관세와 안보를 핵심 수단으로 무역상대국에 지속적인 압력을 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재 시점에서 트럼프 행정부가 미란 보고서에 따라 달러 가치에 주목하며 통화 협정을 추구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상호관세를 협상 지렛대로 삼아 미국의 이익을 추구해야 한다는 제언은 충실히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정책과 이를 뒷받침하는 미란 보고서는, 미국이 부채위기와 스태그플레이션의 결합이라는 경제의 구조적 위기로 인해 더 이상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와 그에 기반한 국제질서를 유지하기 어렵다는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금융세계화의 지속불가능성을 가시적으로 보여준 것은 지난 2007~09년 세계금융위기였다. 당시 금융위기의 직접적 원인은 금융혁신으로 인한 신용의 증권화와 미국의 이중적자였는데, 미국은 연방준비제도의 수량완화정책과 재무부의 구제금융을 통해 민간의 부실자산을 국가의 부실자산으로 이전함으로써 금융위기가 은행위기와 대불황으로 확산하는 것을 막는 데에는 성공했다.
     
    그러나 그러한 정책이 야기한 재정위기와 달러위기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부르주아 경제학은, 미국의 이중적자를 관리하며 ‘그럭저럭 버티는’ 대응방안을 모색하는 데 그칠 수밖에 없었다. 당시 국제경제연구소의 버그스텐은 미국의 재정위기와 달러위기를 예방하려면 재정적자와 무역적자를 국내총생산(GDP)의 4% 수준으로 유지해야 하고, 달러 가치를 1979년의 저점 수준으로 평가절하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또한 세계적 불균형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중국과의 G2 대화도 제안했다)
     
    이에 비추어볼 때, 금융위기 이후 미국은 (트럼프 행정부의 인식과는 달리) 달러의 실질실효가치가 상승하는 국면임에도 무역적자를 GDP 대비 3% 수준에서 적절히 유지하는 데에는 성공했다. 그러나 미국은 코로나19 위기와 인플레이션을 거치며 지속불가능한 막대한 재정적자와 부채위기의 부담을 지게 되었다. 예를 들어, 2020년 미국의 본원통화 잔고는 그 전년도 3조 달러 수준에서 6조 달러로 급증했는데, 쉽게 말해 달러를 두 배로 찍어내면서도 주변국에 인플레이션을 전가하며 코로나19 위기를 넘긴 셈이다. 그러나 그 결과 2024년 미국의 재정적자는 1조 8천억 달러로 GDP의 6%를 넘어섰고, 정부 부채는 이전 해보다 2조 3천억 달러 증가한 35조 7천억 달러(약 4경8900조 원)에 달했다. 특히 모든 국채의 가중 평균 이자율이 3.32%로 전년도보다 0.35% 상승하고 이자 비용이 GDP의 3.9%를 초과하기에 이르렀다.
     
    요컨대,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정책은, 세계 금융위기와 코로나19 위기를 거치며 미국경제가 부채위기와 스태그플레이션의 결합이라는 구조적 위기를 마주하며 더 이상 금융세계화와 달러환류를 유지하지 못하는 붕괴의 길로 나아가고 있다는 현실을 반영한다. 그러나 트럼프 행정부의 포퓰리즘적 관세정책은 이러한 미국의 위기와 대중적 불만을 타국으로 돌리기 위한 기만적 방편에 불과하며, 국제적이고 다자적인 해법을 가로막고 세계를 막다른 길로 내몰고 있다. 게다가, 최근 상하원을 통과한 대규모 감세법안(이른바 ‘하나의 크고 아름다운 법안’)에서 알 수 있듯, 관세와 감세를 결합하는 트럼프 행정부의 경제정책은 재정위기와 부채위기를 더욱 악화하면서 미국경제의 구조적 모순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 2025-05-23

    한국경제의 구조적 위기를 말하지 않는 대선

    이재명 후보와 김문수 후보의 책임 없는 공약 남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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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명 후보와 김문수 후보의 책임 없는 공약 남발

     
     
     
    낮은 잠재성장률, 급속한 정부부채 증가, 한계에 처한 수출 대기업
     
    한국경제의 성장 여력이 급속히 소진되고 있는데, 그 속도는 OECD 평균에 비해 훨씬 빠르다. 노동투입, 자본투입, 총요소생산성이 모두 성장 둔화하고 있다. 특히 인구 고령화로 생산가능인구가 감소하고 있고 노동시간도 감소하는 추세여서, 노동의 잠재성장률 기여도가 곧 마이너스대로 진입한다. 자본 투입의 경우, 이윤율 하락과 함께 투자 증가율이 꾸준히 낮아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 생산성 증가율도 낮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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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경제 잠재성장률 전망 (출처: 한국개발연구원)
     
    이는 한국경제가 총수요 측면에 작용하는 경기부양책(재정·통화정책)으로 대처 불가능한, 장기 성장의 차원에서 구조적 한계에 직면했다는 뜻이다. 이 한계는 역으로 재정·통화정책을 시행하는 데 큰 제약을 가한다. 어떤 식으로든 구조개혁 없이는, 한국경제가 0%대의 장기 저성장의 고착화를 피할 방도가 없을 것이다.
     
    재정·통화정책을 제약하는 족쇄로 가계·기업·정부의 부채 급증을 꼽을 수 있다. 이중 특히 정부부채의 엄청난 증가 속도에 주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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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부부채 규모 및 GDP 대비 비율 (출처: 열린재정 재정정보공개시스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우리나라의 정부부채 규모가 선진국과 비교해 그리 크지 않으니 더 늘려도 괜찮다는 지론을 이번 대선에서도 견지하고 있다. 그러나 남이 빚을 얼마 지고 있냐가 아니라, 내가 향후 늘어가는 빚을 소득 증가로 따라잡을 수 있는지를 따져야 한다. 지난 5년간 부채의 연평균 증가율은 국가채무(D1) 9.3%, 정부부채(D2) 8.5%, 공공부문 부채(D3) 8.1%로, 같은 기간의 경제성장률을 크게 앞질렀다. 이미 늘어나는 빚을 감당 못 하는 상태라는 뜻이다. 게다가 경기 부진 탓에 법인세와 소득세를 중심으로 세입이 대폭 줄어, 세수 결손이 2년째 발생하고 있다. 국고채 평균 조달 금리가 2020년 1.38%에서 2023년 3.57%로 상승했고, 국고채 총발행량 중 순발행 비중이 2020년 66.1%에서 2024년 31.5%로 감소하는 대신 차환 발행(쉽게 말해 빚을 갚기 위해 다시 빚을 지는 것) 비중이 증가했다. 돌려막기를 하며 추가로 빚을 지는 비용도 올라가고 있는 셈이다.
     
    수출 대기업과 그 외 부문 간의 양극화는 한국경제의 고질적 문제인데, 최근에는 수출 부문 자체도 한계에 봉착했다. 중국의 기술 추격과 미국의 공급망 재편이라는 압력에 더해, 재벌의 비효율성이 원인으로 분석된다. 특히 한국 수출의 약 20%를 차지하는 반도체, 그중 80~90%를 점하는 삼성전자의 위기가 지적된다. 대규모 자금조달과 정부 지원을 바탕으로 범용 반도체를 저렴하게 생산하는 데는 재벌구조가 유리했으나, 그룹 지배권을 우선하며 파운드리 분사를 거부하는 등 비효율적 사업구조를 유지한 탓에 첨단 반도체 시장에서는 삼성전자가 TSMC에 밀렸다는 것이다.
     
    수출이 둔화하는 가운데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연 글로벌 관세전쟁은 외부 충격을 배가하며, 수출 의존도가 높은 한국경제에 상당한 피해를 주리라 예상된다.
     
    한국경제의 저성장 고착화에 대해 대처하려면, 근본적으로는 생산성 둔화를 어떻게 지연 내지는 막을 것인가와 더불어, 급증하는 정부부채, 수출 대기업과 그 외 부문의 양극화 및 재벌체제의 비효율성, 트럼프의 재집권으로 가속된 수출위기 등 어렵고 복잡한 문제를 직시하고 풀어야 한다. 한국경제의 이러한 구조적 위기를 다루지 않는 일시적 경기부양책들은 대책으로서 적합하지 않으며, 오히려 구조적 위기를 심화시키고 대응력을 더 약화시키는 요인으로 작동할 수 있다.
     
     
    특정 부문·기업 대상의 산업정책으로 점철된 경제 공약
    : 경제적 효과에 대한 고려와 전략이 없고, 재정 낭비와 정치적 논란만 낳을 수 있다
     
    이번 대선에서 한국 정치를 책임지는 거대 양당은 한국경제의 구조적 위기를 다루기는커녕, 재정정책에도 미달하는 산업정책이나 소득 지원 정책을 남발하고 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의 ‘인공지능(AI) 기본사회’와 김문수 국민의힘 후보의 ‘GTX(수도권 광역급행철도) 전국 확대’를 대표 사례로 들 수 있겠다. (두 공약은 사실 양 후보가 모두 내건 것이나, 상대적으로 더 내세우는 쪽의 내용을 기준으로 서술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이번 대선에서 전면에 내세운 경제 공약은 ‘AI 기본사회’ 건설이다. “AI 투자 100조 원 시대를 열겠다”, “국민 누구나 쓸 수 있는 ‘한국형 챗GPT’를 만들겠다”, “엔비디아 같은 회사를 설립해 70%는 민간이 가지고 30%는 국민 모두가 나누면 세금에 의존하지 않아도 된다” 등 야심 찬 발언과 함께 말이다. (김문수 후보도 이에 덩달아 ‘AI 투자 100조 원’을 공약했다.) 올해 AI 관련 정부 예산이 추경을 포함해도 약 3.6조 원인데 100조 원을 어찌 조달하겠다는 것인지 현실성이 없고 구체적 계획이 없다는 비판이 이어지자, 이재명 후보는 지난 18일 대선 토론회에서 정부가 연구개발 예산을 지원해 민간 기업들과 합동으로 국내 LLM(거대 언어모델), “주권(sovereign) AI”를 개발하며 그 방식은 해당 주체들이 알아서 정할 것이다, 그리고 ‘100조 원’은 ‘당장 한 번에 그만큼 투자하겠다는 뜻이 아니’라는 식으로 부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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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공지능(AI) 산업의 가치사슬 (출처: 한국개발연구원)
     
    그런데 산업정책 자체의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상당한 국가재정을 투여하겠다면서 이 후보의 설명에서 AI 산업 생태계 이해에 기초한 산업전략마저 없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내수용 LLM(거대 언어모델) 구축과 같은 국내 AI 기초모델 개발에 초점을 맞출 것인지, 기업들의 AI 활용과 관련된 특수 서비스 개발과 수출에 초점을 맞출 것인지 등 말이다. 전자는 대규모 투자가 요구되기에 대기업 중심이며, 후자는 스타트업 중심으로 현재 한국 AI 산업에서는 후자의 기업 사례가 더 많다. “한국형 GPT” 같은 표현처럼 이 후보의 초점은 전자에 맞춰져 있는데, 국내 LLM의 경우 이미 네이버 등의 민간기업이 모델을 구축해 온 바 있다. 따라서 최소한 이 후보가 말한 “주권 AI”가 그런 민간 모델과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인지 정도는 내용이 있어야 했지만 없었다. 게다가 현재 AI 기업들이 정부에 주로 요구하는 것은 인프라 투자, 특히 고성능 GPU 확보와 국내 특화 데이터셋의 구축인데, 이 후보가 말한 방향은 그와 초점이 다르다. 산업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데 산업정책을 말하고 있는 셈이다.
     
    어찌저찌 민간 부문을 끌어들인다 쳐도, 100조 원 규모면 (‘당장은 아니’라 하더라도) 국내 투자 규모를 봤을 때 글로벌 펀드를 대거 유치해야 하는 수준인데, 그들이 “국민이 무료로 사용하는” 내수용 LLM 개발에 투자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글로벌 펀드에 상당한 이권을 보장해 주지 않는 한 말이다. ‘주권 AI’에 기초한 ‘AI 기본사회’를 만들겠다는 공약은 허황되거나 모순인 셈이며, 정부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몇몇 기업에 돈을 뿌리는 것으로 끝날 가능성이 크다.
     
    상술했듯 한국의 국가재정 지출 여력이 상당히 제약된 상황에서 산업정책을 쓴다면, 한정된 자원을 어떻게 사용해 민간의 새로운 산업부문 형성과 자립을 도울 것인지, 나아가 이것이 한국경제 전반에 어떤 식으로 파급되게 할지 고려해야 한다. 특히 기존 산업이 AI를 활용하는 데서 생산성이 어떤 방식으로 변화하는지, 이것이 노동시장에는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등을 세심히 고려하여 정책을 세워야 한다. 또한, 개인정보 보호나 지적재산권 이슈 등도 고려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 후보의 발언을 볼 때, 기술의 경제적·사회적 효과에 대한 논의를 꼼꼼이 살피지 않고 그저 ‘AI 기술이 유망하다고 하니 국가재정을 때려 넣겠다’는 수준에 머무는 듯하다. 군사독재 시절의 발상인데, 지금의 한국경제는 신기술의 도입이 경제성장이나 구조 개선으로 곧장 이어지지 않는다.
     
    이러한 결함은 김문수 국민의힘 후보도 공유한다. 그는 경기도지사 시절 GTX(수도권 광역급행철도) 건설을 치적으로 강조하며 ‘GTX 전국 확대’를 주요 경제 공약으로 제시했다. (이재명 후보도 이를 공약했지만, 김 후보 측이 주로 강조하고 있다.) 이는 교통 인프라 격차를 해소하고 지역 균형발전을 도모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이 목표를 해치는 국가주도적 산업정책이자 포퓰리즘의 전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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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TX 전국화 공약 (출처: 김문수 후보 대선 공보물)
     
    GTX의 1km당 건설비는 약 712억 원으로, 광역도로(277억)나 간선급행버스(67억)에 비해 훨씬 비싸다. 현재 수도권에 추진 중인 GTX 노선도 한 노선당 총사업비가 3~4조 원에 이르며, 전국화를 한다면 그 액수가 수십조 원에서 수백조 원에 달할 수 있다. 그런데 한국교통연구원에 따르면, 지방에서는 근교 이동시 다른 교통수단 대비 철도 수요가 극히 낮다. 가령 수도권에서는 시·도 간 이동 시 철도 이용 비율이 27.1% 정도지만, 광주·전남권은 0.4%에 불과하다. 김 후보가 ‘경기도에서 해냈으니 전국에서도 할 수 있다’는 식으로 말하는 건 오류라는 것이다. 당연히 민간투자를 끌어들이기 어려울 것이고, 만약 건설을 강행한다면 그 손실은 정부가 부담하게 될 것이다.
     
    지역의 인구와 산업 분포, 입지, 소득 구조에 대한 세밀한 분석에 기초해 ‘GTX 전국화’의 경제적 효과나 지방발전 전략을 판단하지 않고, 그저 ‘국가재정을 때려 넣으면 지역경제가 살아난다’는 수준으로 접근한다면, 오히려 지역발전에 해를 끼칠 수 있다. 수요가 없는 대규모 사회간접자본(SOC) 투자는 지역경제에 별반 기여하지 못한 채, 단지 지자체 나아가 중앙정부의 재정 부담으로 이어진다. 이는 지역발전에 더 유용하게 쓰일 수 있던 재원을 버리는 셈이다. 나아가 지역발전의 명분 자체를 손상시킬 수 있다.
     
    김문수 후보는 이재명 후보의 국가주도적 경제관을 비판하며 민간주도 성장을 강조하고 ‘규제 완화’를 제1의 경제 공약으로 내세운다. 그런데 그는 지난 18일 대선 토론회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규제 완화의 대표 사례로 반도체특별법의 ‘주 52시간 제한’ 완화를 들었다. 이는 김 후보가 ‘민간주도 성장’을 ‘특정 기업의 요구를 편향적으로 들어주는 것’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상술했듯 반도체 산업의 대표 기업인 삼성전자의 위기는 그 경영구조의 비효율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는 반도체 산업에서 주 52시간 규제를 푼다고 될 일이 아니고, 근본적으로는 수익성보다 그룹 지배권 유지를 우선하게 만드는 재벌구조를 개혁해야 할 일이다. 김문수 후보는 앞서 ‘GTX 전국화’도 그렇고, ‘규제 완화’의 사례로 꼽은 것도 그렇고, 말하는 것과 달리 실제로는 국가주도적 경제관을 공유하고 있다.
     
    ‘주 52시간 제한’ 쟁점보다 더 근본적으로는, ‘AI 기본사회’든 반도체특별법이든 특정 산업을 선별적으로 지원하는 산업정책 자체의 쟁점도 생각해 봐야 한다. (‘GTX 전국화’는 ‘산업’정책은 아니지만 비슷하게 평가할 수 있다.) 산업정책은 외국 기업과의 경쟁에서 국내 산업·기업을 보호하나, 한편으로는 특혜를 받는 기업들이 경쟁력 없이 정부 재정에 의존하는 ‘좀비 기업’이 되거나, 특정 기업과 정부 간의 정치적 거래와 부패로 이어질 위험성이 있다. 이는 국민이 낸 세금으로 왜 특정 부문·기업을 지원해야 하는가의 형평성 문제를 낳으며, 정치 양극화가 극심한 한국에서 그런 논쟁은 정책의 경제적 효과에 대한 분석을 향하기보다 정쟁(政爭)으로 흘러가기 십상이다.
     
    가령 반도체특별법과 관련해서 해당 산업의 재벌 특혜가 논란이 될 수밖에 없으며, 같은 맥락에서 더불어민주당이 내세우는 지역화폐 사업이나 재생에너지 사업도 논란이 될 수 있다. 가령 이번 대선에서 이재명 후보는 서해안에 지역 재생에너지 생산지를 구축하고 일명 ‘에너지고속도로’를 지어 전국에 “RE100(재생에너지 100%)” 산업단지를 조성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공약이 실현되면 앞서 'AI 기본사회' 공약과 마찬가지로 사업에 참여하는 몇몇 기업에 이익이 돌아갈 것인데, 재생에너지 사업은 앞서 ‘GTX 전국화’와 마찬가지로 수익성 문제가 지적된다. 만약 공약을 강행한다면 과거 박정희 정부가 재벌을 육성했듯 정치권과 연결된 특정 산업·기업·지역에만 세금을 쏟는 것에 대해, 대중적 반감이 초래될 수 있다. 특혜 논란은 재생에너지 쟁점에 관한 합리적 논의를 불가능하게 만들 수 있다.
     
     
    재정지출 확대와 감세의 결합
    : 역진적 효과를 낳을 수 있다
     
    이재명 후보와 김문수 후보 모두 경쟁적으로 특정 집단을 타겟으로 혜택을 주는 공약을 쏟아내고, 그 재원 조달의 현실성과 정책의 효과를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그런데 덜 논의되고 있지만 경제적 효과는 더 클 수 있는 감세 공약에도 주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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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행 근로소득세 과세표준 구간과 세율 (출처: 중앙일보)
     
    근로소득세제 개편(과세표준 구간 물가연동제, 공제액 및 공제 범위 확대)은 양대 후보가 다 제기하는 공약이다. 과세표준 구간이 오랫동안 고정돼, 명목임금 상승이 물가 상승을 반영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소득세율이 오른다는 게 주요 근거다. 물론 현행 과세표준 구간이 2008년 이래 변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기에, 물가 상승에 따른 과표 구간의 변경 내지는 물가연동제가 필요하다는 주장 자체는 일리가 있다.
     
    문제는 현재 한국의 실효 소득세율이 다른 선진국에 비해 상당히 낮다는 점이다. 세율 자체도 낮을뿐더러 각종 공제가 적용되어, 전체 노동자의 33.6%가 소득세를 전혀 내지 않는 상황이다. 이런 상태에서 과표 구간을 상향 조정하고 공제액을 확대한다면, 사실상 소득 중상위층 이상의 근로소득자가 감세 혜택을 추가로 얻게 될 것이다. 근로소득제 개편 공약이 수도권 중산층을 노린 공약이라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이는 세율이 높은 집단의 부담을 완화함으로써, 안 그래도 결손이 발생하고 있는 소득세 수입을 더욱 줄일 것이다. 조세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후보들의 공약과 반대로, 전 구간에서 실효 소득세율을 높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다.
     
    김문수 후보는 근로소득세제 개편에 더해, 법인세와 상속세 인하까지 약속하고 있다. 기업 세금을 깎아 주면 투자가 늘어 경제가 성장한다는, ‘공급 중심 경제학’의 전형적 논리를 제시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이는 ‘부두 경제학(voodoo economics, 미신과 같이 비합리적인 경제이론)’이라는 말의 효시가 됐는데, 세금 감면이 투자의 증가로 반드시 이어진다는 보장이 없으며 실제로도 그렇지 않았던 탓이다. 기업의 투자 결정의 가장 주요한 요인은 수익성(이윤율)이라는 점에서, 세금 감면이라는 대증요법보다 경제구조의 개혁이 더 중요할 것이다. 게다가 소득세와 마찬가지로, 안 그래도 결손이 나고 있는 법인세를 감면한다면 정부재정 관리가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상속세 인하에 관해 국민의힘은 중소기업 승계의 어려움을 명분으로 들며, 실제로 한국 중소기업이 창업 세대 이후 대를 잇지 못하고 파산하는 문제는 노동시장 측면에서도 현재 중요한 쟁점이다. 그러나 이 문제 역시 근본적으로는 한국 경제구조가 양극화된 상태에서 중소기업의 저생산성으로 인한 2세대의 경영 회피가 원인일 것이다. 상속세 인하는 명분과 달리, 실제로는 부동산을 상속하려는 수도권 중산층의 표를 노린 것이라는 지적도 많다. 근로소득세제 개편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상속세 감면에 관해 더 자세히는, 지난 사회운동포커스 <상속세 완화, 무분별한 감세 경쟁을 멈춰야 한다>을 보라.)
     
    문제는 양당 후보 모두 감세를 공약하는 동시에 정부재정으로 특정 층위의 집단에 혜택을 주는 공약을 수도 없이 쏟아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재명 후보의 경우, 물론 5월 22일에 전가의 보도인 ‘기본사회’를 다시 꺼내 들긴 했지만, 지금까지는 ‘보편적 기본소득’보다는 선별적 소득지원 정책을 여러 집단에 펼치는 식으로 얘기하고 있다. 김문수 후보도 마찬가지지만, 이런 공약들을 합치면 천문학적인 재정지출을 요구하는데, 과연 각각의 선별적 지원책이 어떤 경제적 효과가 있는지, 한국경제의 구조적 위기에 대처하는데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에 관한 논의가 없다. 보편적 지원이냐 선별적 지원이냐는 잘못된 쟁점인데, 후자 역시 (앞서 산업정책의 단점처럼) 경제적 효과는커녕 그저 특정 집단에 돈을 뿌리고 끝날 수 있고, 이는 형평성 논란과 정쟁으로 귀결될 수 있다. 상술했듯 정부재정의 여력이 극히 제한된 상황에서, 그 지출은 신중히 즉 분석과 논의에 입각해 풍부한 근거를 갖추고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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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명 '호텔경제학'에 대한 설명 (출처: 경향신문)
     
    이재명 후보가 과거에 제시했던 이른바 ‘호텔경제학’이 지금 화제가 된 데에는 국가재정 낭비에 대한 대중적 반감이 배경일 것이다. 그러나 이를 둘러싼 정치권 논쟁의 초점은 엇나가 있다. ‘한계소비성향 1 미달’(이준석 개혁신당 후보)이냐 ‘승수효과’(이재명 후보)냐를 말하기 이전에, 애초에 케인즈주의적 재정정책은 총수요관리정책이지 경제성장과 관련된 정책이 아니며, 심지어 이번 대선에서 쏟아지는 공약의 대다수는 케인즈주의적 재정정책조차 아닌, 소득지원 정책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돈이 결국 얼만큼 돌게 되는지와는 상관 없이, 돈이 도는 것은 단기적일뿐 생산력의 기본선을 상승시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재 한국경제가 ‘구조적 위기’에 처했다는 것은, 경기순환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상술했듯 생산력의 측면에서 노동투입, 자본투입과 생산성이 모두 둔화하는 상태라는 뜻이며, 이는 재정정책·통화정책과 같은 총수요관리정책으로 대처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물론 이에 미달하는 선심성 소득지원 정책은 더더욱 그러하다.
     
    한편 재정지출 확대를 경제성장이 아닌, 복지나 소득 재분배 측면에서 요구하는 여론도 있다. 그런데 재정 불안에 따른 피해를 소득 하위층이 가장 심하게 받을 수 있다는 점도 생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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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러 대비 원화 환율의 추이 (출처: 구글)
     
    상술했듯 한국경제가 구조적 위기에 수출 둔화까지 겹치며 기업 수익성이 악화하고, 정부재정 상황이 계속 안 좋아지면서, 국채를 비롯한 원화 자산 보유의 이점이 사라지고 달러 대비 원화 환율이 꾸준히 상승하는 추세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의 상호관세 발표(4월 2일) 및 한미 환율 협의(5월 5일)로 잠시 하락했으나, 그 직전에 환율이 1997년 외환위기 당시 수준에 육박했으며 (국가채무 증가가 미래세대의 부담이라는 점에서 비판이 많지만) 이 상태가 계속되면 미래세대가 오기도 전에 환율위기가 발생할 수 있다. 이를 인지하며 한국의 부유층은 물론이거니와 중산층도 이미 광범위하게 해외자산 특히 미국자산으로 도피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국가재정 불안과 원화가치 하락, 이에 따른 인플레이션 등의 부담을 떠안는 집단은 미래세대 혹은 해외자산으로의 도피가 어려운 소득 하위계층일 것이다. 각종 선심성 소득지원 정책이 역진적 결과로 귀결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국가재정 운영의 실패는 전 국민의 불행으로 이어지기에 매우 신중해야 한다. 얼마 남지 않은 재정적 여력을 한국경제의 구조적 위기에 대응할 수 있는 방식으로 최대한 효율적으로 써야 할 것이다.
     
     
    관세전쟁의 국내 경제적 효과 분석과 대책 논의가 시급하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4월 2일 발표한 국가별 상호관세는 유예됐으나, 철강 및 알루미늄 수입에 대한 관세(3월 12일), 자동차 및 자동차 부품 수입에 대한 관세(3월 27일)는 부과됐고, 향후 반도체·전자제품 관세도 예상되는 상황이다. 이는 모두 한국의 주력 산업을 심히 타격하며, 미국으로 직접 수출하는 업체뿐만 아니라, 그 하청업체, 미국 외 다른 나라와 거래하는 업체 등 다방면으로 충격을 주고 있다. 수출 거래 축소 내지는 중단 위험 증가, 수출 수요 위축에 따른 물량 감소, 수익성 악화에 따른 납품단가 인하 압박, 현지 공급 압박에 따른 투자 및 생산비용 증가, 국내 산업공동화, 미국 외 수출시장 경쟁 격화에 따른 수익성 악화 등의 경제적 효과가 서로 처지가 다른 업체들에 상이한 방식으로 가해질 것이다. 가령 자동차 산업만 하더라도, 대미투자를 꾸준히 추진해 온 현대·기아차와 대미수출에 집중해 온 한국GM, 그리고 부품사 중에서도 미국 이전이 가능한 곳과 그렇지 못한 곳 간의 처지가 갈리고 있다.
     
    문제는 대선 후보들의 발언에서든 토론회에서든 관세 부과가 한국경제와 산업들에 어떤 식으로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인식과 해법 논의가 실종됐다는 점이다. 지난 18일 대선 토론회에서는 통상 문제 대응이 주요 주제 중 하나였음에도, 외교노선 그것도 ‘한미동맹’과 ‘친중’을 둘러싼 이념공방에 논의가 머물렀다. 물론 통상 문제는 외교와 분리할 수 없지만, 후보들에게 통상 문제 대응 자체에 관한 구체적 전략이 없어 보인다. 국내 기업들의 이해관계가 갈리는 가운데, 이를 분석하며 정부는 그런 복잡성을 고려한 균형 있는 대책을 어떻게 낼 것인지 논의하지 않으면, 결국 방위비 부담금 인상과 같이 또 국가재정으로 관세 부담을 완화하는 수준에서 그칠 수 있다. 이는 시장에서 협상력이 보다 약한 처지의 기업, 주로는 국내 중소기업이 타격을 입고 양극화가 더욱 심해지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국가재정으로 다 해결해 주겠다는 말 속에서
    눈을 감지 말자고 이야기하자
     
    현재 한국경제는 구조적 저성장, 가계·기업·정부의 삼중 부채 급증, 수출위기 심화, 재벌체제의 비효율성이라는 복합적 문제에 직면해 있다. 사회진보연대는 이런 상황일수록 사회운동이 경제의 객관적 현실을 마주할 수 있어야 하며, 정치권의 선심성 정책을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지적해 왔다.
     
    지금 대선에서 거대 양당 후보의 공약이나 그 저변의 경제 인식을 볼 때, 현재 한국경제가 처한 구조적 위기를 직면하고 이를 국민에게 그대로 설명하며 해법을 모색하려는 태도를 찾기 어렵다. 과거 발전주의 시절처럼 여전히 ‘국가가 재정을 쓰면 경제는 좋아진다’는 인식, 자기 지지율과 표를 우선으로 고려하는 선심성 지원 정책의 난무가 계속되고 있다. 이는 현재의 장기 저성장을 더욱 고착화하며, 그로 인한 경제위기의 피해는 당연히 취약층부터 받을 것이다. 아무리 급하게 치러지는 대선이라 하지만, 그동안 한국의 거대 정당이 한국경제의 상태를 이해하려 노력하지 않았다는 증거다.
     
    사회운동은 시민에게 결국 피해를 줄 수 있고, 국가의 구제에 시민사회가 종속되도록 만드는 방향을 따라가서는 안 된다. 이런 상황일수록 시민들이 경제 현실을 이해할 수 있도록, 그리하여 현실을 호도하고 대증요법이나 선심성 공약을 남발하며 자신에게 궁극적으로 피해를 줄 정치인을 경계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 2024-12-23

    한국경제 전망과 제약 조건

    낮은 잠재성장률, 막대한 부채, 한계에 처한 수출 대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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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낮은 잠재성장률, 막대한 부채, 한계에 처한 수출 대기업

    사회진보연대가 그간 전망했듯, 2007~09년 금융위기 이후 세계 경제는 구조적 위기에 봉착해 이전과 같은 성장 흐름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금융위기 시기 이뤄진 제로금리와 수량완화 정책을 종료하고 출구전략을 시작하는 시기가 상당히 늦어지자 사실상 2차 대불황이 아니냐는 얘기가 나오는 가운데, 2017년 미중 간 무역전쟁이 개시되며 세계경제는 성장에 제동이 걸렸다. 급기야 코로나19 경제위기로 세계는 다시 이례적인 완화정책을 추진했고, 이는 결국 인플레이션을 일으켰다. 그 후 세계는 경제주체의 고통을 수반하는 강제조정의 시기를 보내는 중이다. 요컨대, 세계 경제는 2010년대 중후반 반도체 호황기를 제외하곤 저성장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국경제 역시 마찬가지인데, 경제구조의 특성상 저성장 시대에 진입하는 속도가 굉장히 빠르다.

    한국경제는 코로나19 위기를 기점으로 초저성장이 고착했다. 3%대의 경제성장률은 코로나19 위기를 거치며 과거의 일이 되어버렸고, 성장률과 잠재성장률 모두 2%대를 간신히 유지하고 있다. 게다가, 최근 들어 경제 상황이 심각하다는 신호가 곳곳에서 포착된다. 2024년 3분기 성장률이 0.1%가 나오면서 ‘상저하고’라는 말은 쏙 들어갔고, 모든 기관에서 2025년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하향 수정했다. 게다가 트럼프 행정부의 출범으로 부정적 전망이 더욱 강해졌다. 이번 글에서는 2025년 경제 상황이 어떨 것인지를 살펴보고, 특히 트럼프 행정부 출범이 한국경제에 끼치는 영향을 따져본다. 

    다음으로, 장기적 관점에서 한국경제가 처한 객관적 현실이 어떠한가를 세 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다룬다. 사실 현재 한국경제가 처한 조건은 아무리 잘해봐야 2%의 성장률을 유지할 수 있는 정도다. 다시 말해, 한 해마다의 단기적 경제 전망보다는, 한국 경제가 어떤 구조적 제약을 마주하고 있는가를 인식하는 것이 더 중요할 수 있다. 아래에서는 이를 잠재성장률, 부채, 수출 대기업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본다. 
     
     

    1. 2024년보다 더 안 좋아질 2025년

     
    국제통화기금(IMF)이 11월 말 한국의 경제성장률을 올해 2.2%, 내년 2.0%로 전망했다. 불과 한 달 전에는 올해 2.5%, 내년 2.2%로 전망했는데, 성장률 전망치를 낮춘 것이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내년 성장률 전망치를 2.1%에서 2%로 낮추고, 한국은행(한은)이 지난 8월 전망치 2.1%에서 최근 11월 전망치를 1.9%로 낮춘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한국은행은 성장률을 1%대로 낮춘 이유를 “내수는 소비를 중심으로 완만한 회복세를 이어가겠지만, 수출 증가세가 예상보다 낮아질 것으로 전망”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에 더해 상·하원 모두 공화당이 다수를 점할 상황까지는 예상치 못했으며, 올해 3분기 때 수출 증가세가 낮아진 것이 일시적인 요인이 아니라 중국과의 경쟁 등 구조적인 요인이 크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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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부진한 내수, 빠르게 회복될 수 있을까?

    내수는 민간소비와 총고정자본형성의 합으로, 국내총생산(GDP)에서 경상수지와 정부지출을 제외한 부분을 뜻한다. 한국은행과 KDI는 금리 인하를 반영하여 올해에 비해 내년에는 민간소비를 중심으로 내수가 완만한 회복세를 이어갈 것으로 전망한다. 그러나 수출기업의 부진과 민간의 부채 상환부담으로 인해 그 회복 속도는 느릴 것으로 본다. 

    설비투자의 경우 금리 인하로 자본조달이 좀 더 쉬워지기에, 투자심리가 회복할 것으로 예상한다. 그러나 몇 가지 난관이 있다. 첫째, 금리가 인하되더라도 중소기업의 설비투자는 곧장 확대되지 않을 수 있다. 2024년 8월 대한상공회의소의 조사에 따르면, 중소기업의 65.8%가 이자 부담이 줄어들 경우 가장 먼저 취할 조치로 “부채상환 등 재무구조 건전화”를 꼽았다. 둘째, 수출기업을 중심으로 통상마찰을 줄이기 위해서 미국 현지 직접투자를 확대하고 우회 진출 경로 확보에 주력할수록 국내 투자가 줄어들 수 있다. 셋째, 세계적으로 보호무역주의가 강화되고 중국의 저가 상품 공급이 확대돼 수출 전망이 불투명해지면서 수출뿐만 아니라 설비투자 역시 회복이 늦어질 수 있다. 

    건설투자의 경우 2025년에도 부진할 예정이다. 연초 태영건설 워크아웃으로 가시화된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부실에서 드러났듯 건설업의 부진은 심각하다. 주택 건설 인허가가 감소하는 추세고 착공이 들어간 곳도 대폭 줄었다. 게다가 악성 미분양이 증가하고 있고 내년도 정부의 사회간접자본 예산도 축소된 상황이다. 이에 건설경기가 IMF 경제위기 때보다 심한 수준이라는 말이 공공연히 나오고 있으며, 올해 9월까지 폐업을 신고한 종합건설사가 357개로 전년동기대비 21.42%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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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간소비 부진에 관해 좀 더 살펴보자. 민간소비가 2025년 들어 소폭 증가할 것으로 보이지만, 과거 추세선에서 이탈한 것은 분명하다. [그림2]를 보면, 현재 민간소비는 코로나19 이전 추세에서 이탈한 것을 넘어, 금리 인상 이전의 예상추세에도 미달한 실정이다. 소비 악화로 가장 큰 타격을 입는 업종은 도소매업과 숙박·음식점업이며, 관련 업종 종사자인 판매직 감소 폭이 코로나19 시기에 버금갈 정도다. 요컨대, 코로나19로 타격받은 내수 서비스업이 다시 과거 추세로 회복하지 못한 채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주저앉아버린 형국이다. 

    고금리·고물가로 인한 민간소비 위축은 세계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한국의 민간소비 위축이 유독 심각한 데에는 몇 가지 원인이 있다. 우선, 금리상승 손해층과 이득층을 나눴을 때, 손해층이 이득층에 비해 소비성향이 훨씬 높다. 즉, 소비 여력이 있는 3~40대 중산층이 대출로 주택을 구매해 ‘금리상승 손해층’인 경우가 많아 소비 위축이 강해진 것이다. (금리민감 자산보다 금리민감 부채를 더 많이 소유하고 유동성자산보다 비유동성자산이 많은 ‘금리상승 손해층’은 금리가 상승했을 때 손해를 본다. 반대의 경우는 ‘금리상승 이득층’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국내 주택담보대출에서 변동금리가 차지하는 비중이 커서, 체감 금리 상승 폭이 주요국에 비해 컸다. 2022년 4분기 주택담보대출 잔액에서 그 비중은 한국이 65.1%, 스웨덴 51.0%, 덴마크 35.8%, 영국 13.1%, 미국 6.1%다.

    이에 더해, 민간소비 부진은 지난 20년간 이어진 고질적인 문제였다는 지적도 있다. 첫째, 잠재성장률이 2% 내외로 추정되는 상황에서 민간소비가 기본적으로 둔화할 수밖에 없으며, 둘째, GDP 대비 민간소비와 정부소비를 합한 총소비 비중은 대체로 동일한 상황에서 정부소비 비중이 지속해 확대되면서 민간소비 비중이 줄었고, 셋째, 소비재의 가격이 투자재나 수출품의 가격보다 빠르게 오르면서 실질 민간소비가 축소됐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현재 시점에서 잠재성장률보다 낮은 1%대 중반 정도가 실질민간소비의 추세적 증가율이다. 

    그러므로 2025년 이후 금리 인하 국면에서 내수가 곧바로 회복될 것이라 기대하는 것은 다소 낙관적이다. 게다가 물가상승률은 낮아졌지만 이미 물가수준 자체가 높아 소비회복이 좀처럼 쉽지 않은 상황에다, 금리 인하조차도 예상보다 늦어질 것으로 보인다. 
     

    2) 금리 인하, 순조롭게 될까?

    한국은행은 지난 10월 기준금리를 3.25%로 인하했다. 2023년 초 기준금리를 3.5%로 인상한 이후, 2년 가까이 유지하던 금리를 인하한 것이다. 이어서 지난 11월에도 금리를 인하해 현재 기준금리는 3%가 되었다. 3개월 내 추가 인하는 없다고 예고했음도 불구하고, 예상을 깨고 연속으로 금리를 인하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금리 인하가 시작되었으니 고환율·고물가·고금리의 ‘3고 현상’은 곧 끝나는 것일까? 안심하긴 이르다. 

    우선 금리 인상의 이유였던 인플레이션은 목표치에 수렴한 것으로 보인다. 물가상승률은 지난 10월 중 전년동월대비 1.3% 수준으로 낮아졌으며, 2025년도 역시 1.9%로 전망하고 있다. 그러나 애초에 미국보다 금리를 훨씬 덜 올린 터라 한국의 금리 인하 강도는 미국에 비해 약할 수밖에 없기에 올해는 더는 금리 인하를 못할 것이라는 전망이 많았다. 게다가 미 대선 이후 원·달러 환율이 1400원을 돌파하고 환율 변동성이 확대됨에 따라 금리를 인하하기에 더욱 곤란한 조건이었다. (환율이 상승하면 수입물가를 자극해 물가 인상 요인이 되며, 금리를 내리면 자본 유출로 환율이 오르는 경향이 있기에 환율이 오르는 상황에서 금리를 낮추기 어렵다.) 그런데도 한국은행이 두 달 연속 금리 인하를 결정했다는 것은 경제 상황을 그만큼 심각히 여기고 있다는 증거다. 11월 28일 통화정책방향 기자간담회에서 이창용 총재는 “성장과 외환시장 안정 간의 상충 관계에 있어서 많은 고민과 논의”가 있었다고 밝혔다. 요컨대, 금융시장 불안정성이 확대되면 금리 인하 기조는 언제든 중단될 수 있는 상황이다.

    게다가 미국의 금리 인하가 예상보다 늦어질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는 트럼프 정책으로 인해, 다시 고금리 정책으로 회귀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마저 들린다. 트럼프 당선인은 ‘연방준비제도이사회의 독립성 제한’을 지렛대 삼아 금리 인하를 압박하고 수출 활성화를 위해 약달러를 추구하지만, 시장의 반응은 정반대다. 금융시장은 트럼프의 정책이 고금리·강달러를 야기할 것임을 고려해 반응했다. 

    트럼프 정책대로 감세를 관세로 감당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해, 공약을 지키고자 한다면 지금보다도 더 많이 국채를 발행해야 한다. 연방준비제도(FED)가 국채를 매입하는 과정에서 늘어난 유동성은 인플레이션을 발생시킬 수밖에 없다. 또한, 이민 제한과 대중 관세 인상은 각각 임금 및 수입물가 상승으로 이어져 인플레이션을 자극할 수 있다. 더불어 우크라이나 전쟁과 중동 전쟁의 불확실성, 보호무역주의에 따른 글로벌 교역 감소로 인해 안전자산인 달러가 선호되어 달러 강세를 유발할 수 있다. 이처럼 강달러 현상이 계속되면 원·달러 환율은 상승할 것이고 한국의 금리 인하는 점차 어려워질 것이다. 
     
     

    2. 다시 돌아온 트럼프 행정부, 한국경제에 끼칠 영향은?

     
    트럼프 행정부의 등장이 한국경제에 끼칠 영향은 통화정책에 그치지 않는다. 수출 경제로 먹고사는 한국에 불리한 통상환경이 조성될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결국 올해 성장률이 수정된 가장 큰 이유도 트럼프 등장으로 인한 불확실성과 수출 둔화 전망이 원인이었다. 물론 산업에 따라 체감하는 바는 다를 것이다. 미국이 화석연료 중심으로 에너지 정책을 전환하게 되면 LNG선의 수요 확대 등 조선업이 얻는 이익은 증가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 수출의 양대 산맥인 반도체와 자동차 부문을 중심으로 부정적 영향이 더 클 것으로 보인다. 

    또한 트럼프 당선이 금융시장에 주는 파급력 또한 무시할 수 없다. 당선 직후 한국 주식시장에서 자금이 급속히 빠지고 미국 증시에 돈이 몰리거나, 비트코인 시장 규모가 다시 확대되면서 금융시장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1) 앞뒤 안 가리는 트럼프식 관세전쟁

    트럼프와 해리스 중 누가 당선되더라도 미중 무역전쟁은 격화될 수 있었다. 바이든과 해리스는 동맹과 보조를 맞춰 정교한 압박을 추구한다면, 트럼프는 대대적인 관세전쟁을 치르겠다는 전략이다. 그런데 트럼프는 그 전장을 더욱 확대하려고 한다. “관세는 사전(辭典)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어”라는 트럼프는 당선된 지 한 달도 채 안 되어, 중국에는 추가로 10% 관세를 부과하고 미국멕시코캐나다협정(USMCA)에서 무관세를 약속했던 멕시코와 캐나다에 25%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겉으로는 이민과 마약 대응을 내세웠지만, 중국이 멕시코를 우회 수출 통로로 활용하는 것을 방지하겠다는 속내다. 이에, 미국 시장을 노리고 멕시코에 진출한 현대차그룹과 그 협력사들이 피해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게다가 무역적자 규모가 멕시코 다음으로 큰 베트남, 그리고 경제권 전체로는 무역적자 규모가 중국과 비슷한 EU가 트럼프의 다음 표적이 될 가능성이 크다. 특히 베트남은 예전 중국처럼 한국산 중간재를 가공해 미국으로 수출하는 산업 구조가 자리 잡았기 때문에, 한국 기업도 타격을 입을 수 있다.

    또한 자신이 체결한 협정조차 쉽게 무시하는 트럼프의 태도는 한미자유무역협정(FTA)도 무사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준다. 실제 트럼프 1기 행정부는 한국에 세이프가드 발동(긴급 수입제한 조치), 세탁기·철강제품 관세 부과, FTA재협상 요구 등 통상압력을 가했다. 한편, 한국의 대미 무역흑자가 작년에는 444억 달러, 올해도 500억 달러 이상으로 확대될 계획이라 트럼프 1기보다 더 강한 통상압력을 받을 것이다. 완성차의 미국 수출 비중은 최근 5년간 상승세다. 2023년 완성차의 미국 수출 비중은 45.5%, 전기차는 35.0%로 높은 수준이다. 무관세로 지금껏 큰 혜택을 입었던 한국 자동차 산업이 표적이 될 가능성이 크다. 트럼프의 관세 공약이 현실화될 경우 한국경제가 얼마큼 타격 받을지를 여러 기관이 예측한 자료에 따르면, 최악의 경우 성장률이 1.1%P 하락할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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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의 대중국 제재가 한국에 반사이익이 될 것이란 전망도 있다. 실제로 트럼프 1기 행정부 때 중국산 대체 수요로 한국이 이익을 얻은 측면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동차·배터리·반도체·철강 등 현재 한국의 대미 주력 수출 품목은 이미 미국 수입시장 내 중국 비중이 낮은 상황이라 그 영향이 제한적이다.

    게다가 한국 기업은 글로벌 생산설비의 15~20%가 중국에 있어 여전히 중국 공급업체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중국 공장 운영에 따른 위험도 더욱 커질 전망이다. 또한 미중 무역전쟁의 여파로 중국의 성장이 둔화하고 내수침체가 지속하면, 중국이 공급과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3국에 초저가 수출 공세를 할 우려가 있다. 이렇게 되면, 한국의 수출 경쟁력에 타격을 줄 것이다. 즉 미국의 대중국 제재에 따른 반사이익은 없거나 있어도 미미할 것으로 보인다. 
     

    2) 자동차·반도체 산업, 보조금 물 건너가나?

    트럼프 행정부는 바이든 행정부의 정책 지우기에 돌입할 것으로 보인다. 유세 과정에서 “부유한 기업들을 위해 수십억 달러를 지급한 꼴”이라며 바이든 행정부의 전기차 세액공제와 반도체법의 보조금을 정조준했다. 트럼프는 보조금 대신 고율 관세를 부과하면 기업들이 아무런 대가 없이 공장을 설립하러 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당근보다 채찍이 더 효과적이라는 논리다. 

    물론 대다수가 인플레이션감축법(IRA) 전면 백지화는 어려울 것으로 전망한다. IRA 보조금을 받기 위해 타국 업체들이 공장을 지은 조지아·미시간·오하이오는 공화당 지지가 강한 공업지역이다. 또한, 반도체지원법(칩스법)은 초당적 지지가 있는 사안이다. 다만 행정부의 재량권이 커서, 보조금 지급조건을 까다롭게 하거나 의도적으로 지연하는 방식으로 IRA를 실질적으로 무효화하려고 시도할 수 있다. 

    한국은 IRA 시행 후 미국에 가장 많은 투자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나라 중 하나다. 지난 2년간 한국 기업이 발표한 투자 프로젝트는 총 37개로 투자 규모는 해외 기업이나 미 주정부와의 합작 투자 프로젝트를 제외하고도 198억 4320만 달러에 달한다. 물론 미 대선이 다가오면서 불확실성이 커져 프로젝트가 지연되거나 중단되었다고 해도, 이미 매몰 비용이 상당하다. 게다가 보조금 지급이 까다로워지는 것도 문제지만, 애초의 중요한 투자 목적 중 하나였던 통상마찰 회피를 이루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 큰 문제다.
     

    3) 금융시장 리스크를 키우는 트럼프 트레이드

    트럼프 행정부의 재등장으로 원·달러 환율이 오르는 것과 함께 한국 주식시장은 폭락했고, 그동안 잠잠했던 코인 시장에 자금이 몰렸다. 트럼프 정책에 따라 이익을 볼 수 있는 자산에 투자하는 ‘트럼프 트레이드’가 끼친 효과다. (물론 주가가 하락한 것은 트럼프 효과 때문만은 아니고, 삼성전자 등 주요 기업 실적이 예상보다 낮았던 것도 한몫했다.) 

    트럼프 트레이드는 고위험 투자에 몰두하는 개인투자자의 세태를 부채질한다. 사회진보연대는 코로나19를 거치며 주식소유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현상에 대해 비판한 바 있다. 국내 주식시장은 개인투자자 비율이 비상식적으로 높고, 그중에서도 단기 시세차익을 노려 하루 안에 주식을 사고파는 당일 매매 비중이 절반 이상이다. 국내 주식시장이 빠르게 하락한 것도 개인투자자가 미국 주식시장으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트럼프 트레이드에 힘입어 국내 투자자의 미국 주식 보관 금액이 11월 14일 현재 처음으로 1,000억 달러(약 140조 원)를 넘었다. 2022년 말만 해도 440억 달러 수준이었는데, 2년도 안 돼서 배 이상으로 뛴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코인 시장의 부활이다. 트럼프는 대선 과정에서 비트코인 2024년 콘퍼런스에 참석해 자신이 집권하면 미국 정부가 비트코인을 전략 자산으로 지정해 비축한다는 계획을 내놓기도 했고, 얼마 뒤 “미국을 가상 화폐의 수도”로 만들겠다고 공언했다. 실제로 미국 공화당의 폴 라이언 전 하원의장은 스테이블코인을 보급해서 미국의 부채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었다. 

    트럼프가 당선되자 전 세계적으로 코인 시장에 자금이 다시 몰렸고, 그에 한국인이 가장 열광적으로 반응했다. 국내 5대 가상자산 거래소의 하루 거래대금이 코스피·코스닥 시장을 추월하는 일도 벌어졌다. 미국 성인 중에 5~10%가 코인을 보유하고 있어 트럼프의 공약이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하는데, 한국의 경우 성인의 코인 보유 비율이 20%가 족히 넘는다. 금융정보분석원에 따르면 2024년 상반기 기준으로 코인거래 이용자가 778만 명인데, 트럼프 당선 이후 이보다 더 급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블록체인 암호화폐는 결국 대응하는 가치 실체가 전혀 없기 때문에, 각종 금융상품 중에서 가장 변동성이 높으며 본질적으로 다단계 금융사기에 가깝다. 따라서 우연한 계기로 금융시스템 전반에 큰 혼란을 일으킬 수 있다. 개인투자자의 투기적 행태는 이전부터 있어 왔지만, 트럼프 당선을 매개로 더욱 활개 치고 있다. 이런 와중에 여야가 합심해 가상자산 과세 유예를 결정했는데, 인기영합주의적 정책을 추수하는 정치권도 이런 세태를 더욱 부추기고 있는 형국이다.

    2025년 경제 정세를 좌우할 트럼프의 귀환은 분명 외부적 요인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외부적 요인에 대응할 한국경제의 기초체력은 이미 바닥난 상태다. 지금부터는 한국경제의 취약성을 보여주는 세 가지 제약 조건에 대해 알아본다.
     
     

    3. 잠재성장률 하락: 초고령화·초저성장 사회라는 예견된 미래

     
    2024년 이례적으로 한국은행이 여론의 도마 위에 오르는 일이 잦았다. 물론 전세계가 고물가·고금리에 신음했기에 중앙은행의 동향에 주목하는 게 비단 한국에서만 일어난 일은 아니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 별도의 맥락이 있었는데, 최근 한국은행이 논란이 될 각종 이슈에 대한 보고서를 발간했기 때문이다. 급기야 농산물 수입을 고려해야 한다는 내용의 한국은행 보고서를 농축산부 장관이 직접 반박하는 일도 있었고, 돌봄서비스업에 이주노동자 유입을 확대하자는 보고서에 대해서는 즉각 폐기를 주장하는 기자회견도 개최되었다. 이 글에서는 한은이 이렇게까지 논란이 될 행보를 하는 ‘이유’를 환기하고자 한다.

    이창용 총재는 한국은행 창립 74주년 기념사에서 ‘시끄러운 연구’를 통해 “통화정책뿐 아니라 구조개혁과 관련한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 10월 통화정책방향 결정 회의에서는 “구조조정을 하지 않으면 … 잠재성장률이 몇십 년 뒤에는 거의 0% 수준으로 날아갈 그럴 위험”에 처했다고 발언하기도 했다. 즉, 논란을 감수하고서라도 구조개혁이 시급하다는 목소리를 낸 것이다. 그만큼 한국경제가 위기에 봉착했으며 이를 혁신하지 못한다면 이대로 가라앉아 버릴 것이라는 우려가 널리 확산하고 있다. (사회진보연대는 한국경제의 이러한 장기침체의 상황을 마르크스의 구조적 위기론 관점에서 이미 다룬 바 있다.
    임필수, 「장기침체와 인플레이션이라는 쟁점으로 살펴본 세계경제」, 《계간 사회진보연대》 2022년 겨울호.)
     

    1) 현황: 빠른 속도로 하락하는 잠재성장률

    한국이 2025년부터 65세 이상의 인구가 전체 인구의 20%가 넘는 초고령사회에 진입한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초저성장 사회에 진입했다는 사실은 쉽게 간과된다. 이제 다시는 성장률이 3~5% 정도 유지되었던 과거로 돌아갈 수 없는 게 현실이다. 동원 가능한 생산요소를 투입해 물가 상승 없이 최대로 이뤄낼 수 있는 성장률이자 한 나라 경제의 기초체력을 보여주는 지표인 잠재성장률이 한국의 경우 곧 1%대로 내려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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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재성장률은 기본적으로 생산함수를 통해 추정한다. 생산함수는 자본과 노동이라는 생산요소를 투입해 국민소득을 결정한다는 이론이다. 한편, 자본과 노동을 제외하고 성장률에 기여하는 부분을 총요소생산성이라 부른다. 동일한 고정자본과 노동을 투입해도 국민소득이 더 높은 나라가 있는데, 이는 총요소생산성이 더 높기 때문이라는 논리다. 총요소생산성은 보통 GDP에서 생산요소(자본, 노동) 기여분을 차감하여 그 추세를 계산한다. 즉, 총요소생산성은 사후적으로 추정되는 것이다.

    한국의 잠재성장률은 다른 나라와 비교했을 때 매우 가파르게 떨어지는 중이다. 빠른 속도로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것처럼, 급격하게 초저성장으로 진입한 셈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세계 주요국의 장기 1인당 잠재성장률을 추정한 결과에 따르면, 한국의 1인당 잠재 GDP 성장률은 2000~2007년 연간 3.8%에서 2007~2020년 2.8%, 2020~30년 1.9%, 2030~60년 0.8%로 급속히 떨어진다. 2020~30년까지는 OECD 평균인 1.3%보다 높지만, 2030~60년에는 OECD 평균인 1.1%와 G20 평균인 1.0%를 밑돌면서 회원국 중 가장 낮은 수치가 된다. 이는 각각 1.0%와 1.1%로 추정되는 미국이나 일본보다도 낮은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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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경제 성장률이 정점을 찍고 하락하기 시작한 1990년대부터 생산 요소별 장기 추이를 살펴보자. 1990년대 경제성장률 하락이 노동 투입 증가세 둔화에 기인했다면, 2000년대에는 자본투자 부진이 성장률 하락을 주도했다. 그런데 2010년대에는 생산성 증가세 둔화가 주된 원인으로 나타났다. 생산성 증가세가 둔화한다는 것은 아무리 자본과 노동력을 투입해도 성장이 한계에 봉착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한국경제의 구조적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다. 생산성 증가세 둔화는 총요소생산성 증가율 하락으로 확인할 수 있는데, 2000년만 해도 2%씩 늘었던 총요소생산성 증가율은 2008년 금융위기를 기점으로 감소하기 시작해 2022년 0.8%까지 떨어졌다. 

    게다가, 최근에는 코로나19 위기가 잠재성장률 하락에 큰 영향을 미쳤다. 코로나19 위기가 포함된 2019~20년 중 잠재성장률 추정치는 2.2% 내외로, 기존 추정치였던 2.5~2.6%에 비해 0.3~0.4%P가량 낮아졌다. 코로나19 충격은 공급망 약화, 재택근무 확대에 따른 조정비용 증가, 서비스업 생산능력 저하 및 자원배분 비효율성 증대 등 총요소생산성 저하 경로를 통해 나타난 것으로 판단된다. 이와 더불어 온라인 수업 확대에 따른 육아부담 증가, 대면서비스업 폐업으로 여성들의 경제활동참가율이 크게 하락하면서 노동 투입이 감소했고, 고령층의 비자발적 실업이 증가한 것도 또 다른 요인으로 작용했다. 엔데믹 시기 추세선을 다시 회복한 노동 투입과 달리, 생산성은 다시 회복하지 못하면서 잠재성장률을 더욱 낮춘 것으로 보인다. 


    2) 전망: 예견된 미래

    잠재성장률이 1%대로 떨어진다는 말은 1%대 경제성장률이 일상이 된다는 의미다. 그간 한국경제는 외환위기에 필적하는 경제위기 시기를 제외하면, 2년 연속 1%대 경제성장률이라는 성적표를 받아 본 전례가 없다. 게다가 장기적으로는 이 1%대 성장률조차 유지할 수 있을지도 불확실하다.

    한국의 생산가능인구(15~64세)가 2017년을 정점으로 감소하고 있고 노동시간 역시 감소하는 추세에서, 고용률의 획기적인 제고가 이뤄지지 않는 이상 노동 투입의 하락은 변수가 아닌 상수다. 노동 투입을 추산하는 방식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존재하지만, 노동의 잠재성장률 기여도는 이미 마이너스이거나 곧 마이너스대로 진입한다. 즉, 노동은 단순재생산조차 이뤄지지 않으면서 성장에 악재로 작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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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본 투입의 경우 이윤율 하락과 함께 투자 증가율이 꾸준히 낮아지고 있으며 2040년대에는 그 증가율이 1% 정도로 낮아질 것으로 전망한다. 따라서 향후 경제성장은 총요소생산성의 기여도가 어느 정도 수준을 유지하느냐에 달렸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대다수 전문가가 생산성 향상을 위한 대책으로 구조개혁을 주문하는 것이다. 

    그러나 전망은 어둡다. 저생산성은 세계적 기조로 선진국 역시 총요소생산성 증가율이 모두 낮다. 총요소생산성을 국제 비교한 자료에 따르면, 선진국의 총요소생산성 증가율 역시 한국과 대동소이한 수준이다. 한국은행에서 추산한 그래프를 보면(그림6), 심지어 구조개혁을 통해 생산성 향상에 성공하더라도 극적 반전을 꾀하기 어렵다. 게다가 구조개혁은 정치적으로 실현가능성이 작을 뿐만 아니라, 개혁을 어렵게 하는 구조적 요인도 존재한다. 바로 부채 문제다. 
     
     

    4. 부채 삼중고에 빠진 한국경제

     
    한국경제의 세 주체인 가계, 기업, 정부의 총부채 규모는 2023년 2분기 기준으로 GDP 대비 273.1%에 달한다. 한국은 OECD 회원국 중 유일하게 GDP 대비 총부채 비율이 전년동기대비 상승한 나라다. 즉, 코로나19 위기를 거치며 부채가 증가한 것은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지만, 다른 나라와 달리 한국은 고금리 시기에도 그 규모를 축소하지 못했다. 막대한 규모의 부채는 경제정책을 시행하는 데 큰 제약으로 작용하며, 급작스러운 위기가 닥쳤을 때 쉽게 경제 전반을 흔들 수 있다.
     

    1) 통화정책 전환의 발목을 잡은 가계부채

    8월 24일 “정책을 조정할 시기가 왔다”는 연방준비제도이사회 파월 의장의 발언을 기점으로 금리 인하의 막이 올랐고, 9월 18일 연준은 기준금리를 0.5%P 인하했다. (물론 이 역시도 기존 예상보다 훨씬 늦어진 것이다.) 이에 한국은행 역시 10월 기준금리를 3.5%에서 3.25%로 인하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 이르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2024년 2~3분기부터 물가상승률이 목표치인 2%에 근접함에 따라, 금리 인하 시점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었다. 또한, 하반기 들어 ‘상저하고’라는 말이 무색하게 내수 부진이 여전한 가운데 수출 역시 예상보다 부진하면서, 경기부양을 위해 금리 인하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져 한은을 압박하는 모양새가 조성됐다. 2024년 6월 성태윤 대통령실 정책실장의 “통화정책을 유연히 가져가야 한다”는 발언을 시작으로, 7월에는 “금리는 내려갈 방향밖에 없다”는 한덕수 국무총리의 언급이 있었으며, KDI 역시 8월에 금리를 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8월 통화정책방향 결정 회의에서 한은은 금리를 동결했고, 이에 대해 대통령실이 공개적으로 “아쉽다”는 의견 표명을 하는 이례적인 일이 발생했다.

    금리 인하의 발목을 잡은 것은 바로 막대한 가계부채였다. 6월 말 기준 가계신용 잔액은 거의 1천 900조 원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이는 2002년 4분기부터 관련 통계를 공표한 이래로 역대 최대치다. 스트레스 DSR(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 도입 시기가 미뤄짐에 따라 수도권 아파트 가격이 다시 증가세로 전환하는 시점에 금리 인하가 이뤄질 경우 간신히 축소하고 있는 가계부채가 다시 확대할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간 한은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섣부른 금리 인하가 부동산 가격상승으로 연결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입장을 강조했다. 총재가 직접 기준금리가 예전 0.5% 수준으로 빠르게 내려가지 않을 것이므로 “영끌했을 때 부담이 적을 거로 생각하면 안 된다”며 강하게 경고를 하기도 했다. 한은 입장에선 내수부진에 대응해 성급하게 금리를 인하했다간 가계부채가 더 확대될 수 있고, 부채가 확대되면 금융위기에 취약해지기에 쉽사리 금리를 낮출 수 없었다. (물가안정과 완전고용이 통화정책의 양대 목표인 연준과 달리, 한국은행의 경우 물가안정이 일차 목표이며 2011년 한국은행법 개정 이후 금융안정 책무를 명시적으로 부여받았다.)

    IMF가 2023년에 발표한 『2023 한국 연례협의 보고서』에 따르면, 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이 100%를 초과하는 나라 중에서 코로나19 이전 기준인 2019년보다 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이 상승한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그림7 위). 게다가, 다른 나라와 달리 한국은 DSR이 꾸준하게 증가하는 추세에 있다는 점도 눈길을 끈다(그림7 아래). 게다가 연체율도 2022년 2분기 말 0.56%에서 2024년 1분기 말 0.98%로 상승했다. 특히, 소득 하위 30%에 속하거나 3개 이상 금융기관에 채무가 있는 다중 채무자(취약차주)의 경우 연체율이 2024년 1분기 말 현재 9.97%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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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한국의 가계부채 규모가 확대한 원인으로는 보통 세 가지가 지적된다. 첫째,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은행에서 높은 수익성과 안정성을 기대하며 가계대출을 대폭 늘렸고, 이후 은행 대출에서 가계대출 비중은 기업대출 비중을 항상 상회했다. 둘째, 한국의 경우 대출 관행이 주요국에 비해 완화적이다. 대부분의 대출이 DSR에 포함되는 주요국과는 달리, 한국은 전세자금이나 중도금 대출 등 상당수의 대출이 DSR 적용을 받지 않고 있다. 셋째, 저금리 기조가 장기화하면서 부동산 시장에 유동성이 공급되었고, 전세 수요가 급증했다. 여기에 더해, 최근에는 정책대출과 집값 상승의 악순환이 원인으로 지적된다. 공적보증은 2015년 229조에서 2023년 701조로 증가했고, 공적보증 중에서도 주택담보대출 비중이 같은 기간 35.8%에서 65.9%로 상승했다.

    나아가, 가계부채 증가와 부동산 가격상승은 악순환을 형성하게 된다. 우선 높은 담보자산 가치를 보유한 고소득층이 더 많은 부채를 통해 순자산을 증가시킴에 따라 자산 불평등이 확대된다. 이렇게 되면 저소득층에 대해 대출을 촉진하려는 정치적 압력이 발생하여 가계부채 증가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또한 가계부채의 상승은 비효율적인 자원배분을 낳는다. 국내은행의 업종별 대출자산 비중을 보면 부동산과 임대업에 대한 대출 비중이 2012년 8%에서 2019년 12%로 늘어났지만, 제조업에 대한 대출 비중은 동 기간 중 23%에서 19%로 줄었다. 

    또한, 가계부채의 경제위기 위험성을 계랑 분석한 보고서에 따르면, 가계부채가 GDP 대비 80%를 넘는 시점부터는 경기침체 가능성을 단기적으로도 높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보고서는 과거 50년간 34개국 데이터를 활용해 생산성 증대가 동반되지 않은 민간신용 증가는 궁극적으로 위기를 유발했다고 주장한다. 실제 일본의 거품경제 붕괴 직전과 미국의 2007년 금융위기 직전 모두 급속하게 가계부채가 증가했다. 일본의 경우 GDP 대비 70%, 미국의 경우 GDP 100%가 고점이었다. 현재 GDP 대비 100%가 넘는 가계부채 규모에 경각심을 가져야 할 이유다. 
     

    2) 고금리 시기에도 늘어나기만 한 기업부채

    GDP 대비 기업부채 비율이 작년 2분기 말 기준 124.0%로 역대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했다. 이는 IMF 외환위기 당시 최고비율 113.7%를 넘는 수치다. 결정적 분기점은 역시 코로나19인데, 2010~19년 동안 연평균 4.8%씩 증가하던 부채가 코로나19 위기를 경유하며 2020~23년 동안 연평균 9.3%씩 대폭 증가했다. 코로나19 기간 중 GDP 대비 민간부채 비율 상승의 상당 부분을 기업부채가 이끌었다. 2023년 말 현재 GDP 대비 민간부채 비율은 225.3%로, 2019년 말에 비해 29.0%P 증가했다. 이 중 기업부채가 23.9%P, 가계부채가 5.1%P 상승했다. 한국의 민간부채 비율은 신흥국 평균 152.1%는 물론 선진국 평균 160.1%도 크게 상회한다.

    그런데 코로나19 종료 후 시작된 고금리 상황에서 대부분 나라의 기업부채 증가세가 주춤했던 것과는 달리, 한국은 오히려 증가세가 지속됐다는 점에서 특히 우려스럽다. 부채의 질 역시 악화했는데, 코로나19를 거치면서 금리 수준이 높고 금리변동 위험에 쉽게 노출되는 비은행권·중소기업·단기대출이 확대됐다. 우선, 전체 기업대출에서 비은행권 대출이 차지하는 비중이 2019년 말 25.7%에서 2023년 3분기 말 32.3%로 상승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새마을금고 등 상호금융의 기업대출이 2019년 말 대비 2023년 3분기 말 현재 140.9%로 대폭 증가해 비은행권 기업대출 증가세를 주도했다. 상호금융의 기업대출 증가에는 부동산 PF 대출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2019년 말 이후 대기업 대출보다 중소법인과 개인사업자 대출 증가세가 더 높았다. 대기업은 대부분 은행권 대출을 중심으로 늘어났지만, 중소기업은 비은행권 대출이 전체 대출 증가 규모의 절반 이상을 차지해 부채의 질이 더욱 악화했다. 게다가 2023년 3/4분기 말 현재, 만기가 1년 이내로 남은 단기대출이 은행권 기업대출의 67.0%를 차지한다. 이는 코로나19 이전인 2019년 말에 비해 증가한 수치다. 단기대출 비중 역시 중소기업이 대기업에 비해 훨씬 크다. 이에 따라 연체율도 상승하는 추세다. [그림9]에서 확인할 수 있듯, 지난해 하반기부터 중소기업·개인사업자와 비은행권 대출에서 연체율이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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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업부채가 악화하고 있다면 부채의 악순환이 초래되어 경제위기가 발발할 가능성은 없을까? 몇 가지 지표를 통해 현재 상황이 녹록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먼저 이자보상배율을 살펴보자. 영업이익을 이자 비용으로 나눈 이자보상배율이 1이면 번 돈으로 이자를 지불하고 나면 남는 돈이 없다는 의미인데, 심지어 1 미만인 위험기업의 차입금이 총차입금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023년 상반기 기준 57.4%다(외환위기 당시 67.8%). 

    다음으로 차입금상환배율을 살펴보자. ‘총차입금’을 ‘세금이나 이자 및 감가상각비 차감 전 이익’으로 나눈 차입금상환배율이 5~6배를 넘어서는 경우 상환능력에 비해 차입금 규모가 과다한 것으로 평가하는데, 6배를 초과하는 기업의 차입금이 총차입금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023년 상반기 기준 50.5%다(외환위기 당시 62.0%). 

    물론 현금흐름(flow)이 아니라 자본 규모(stock)로 봤을 때는 현재 상황이 외환위기에 비해 심각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최근에는 이익을 못 내고 있지만 그래도 그동안 벌어놓은 자산이 있기 때문이다. 자기자본 대비 부채비율이 200%를 넘는 경우 취약기업으로 분류하는데, 취약기업의 차입금이 총차입금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외환위기 당시에는 84.3%였던 반면, 2023년 상반기에는 35.8%다.

    최근 기업부채 증가의 상당 부분은 부동산 PF와 관련된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코로나19 시기 전체 대출 증가 규모의 약 40% 정도를 부동산업과 건설업이 차지하고 있다. 부동산 PF의 경우 현재 구조조정에 들어간 상황이며, 현재로선 경제 전반의 시스템 위기로 전이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기업부채가 가파르게 상승하면서, 부동산 PF 외에도 예상치 못한 사태에 직면했을 경우 경제가 쉽게 위기에 봉착할 수 있는 허약체질이 되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요컨대, 가계부채와 함께 기업부채 역시 한국경제에 큰 제약 조건으로 기능하고 있다.
     

    3) 급속한 정부부채 증가로 인한 제약

    가계부채와 기업부채 문제의 심각성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는 것과 달리, 정부부채에 대해서는 다소 논란이 있다. 우리나라의 정부부채 규모가 선진국과 비교해 그리 크지 않으니 재정 여력이 충분하다는 주장이 제기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축통화국과 한국을 비교해선 곤란하다. 어떤 나라도 원화를 안전자산으로 여기거나 국부(國富)로 보유하지 않는다. 국채 수요 규모의 차원이 다르다는 점을 잊으면 안 된다. 

    게다가 부채의 절대 규모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부채의 증가 속도다. 만약 부채증가율이 명목 GDP 성장률보다 높다면, 빚이 늘어나는 속도가 수입이 늘어나는 속도보다 빠른 사실상의 ‘폰지 재정’ 상태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정부부채를 걱정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 시기 코로나19 국면을 거치며 한국의 국가채무(D1)가 빠른 속도로 증가했는데, 국가채무 연평균 증가율이 10.1%에 달해 명목 GDP 연평균 성장률 3.67%를 크게 웃돌았다. 

    2017년 GDP 대비 정부부채(D2) 비율 역시 5년 만에 40.1%에서 54.1%로 14%P 높아졌다. 같은 기간 IMF가 분류하는 선진국 35개국의 정부 부채비율은 5.5%P 증가했으니, 한국의 부채 증가 속도가 선진국의 2.5배 가량 빨랐다는 의미다. 선진국의 정부부채 비율은 2020년 정점을 찍은 후 2021년, 2022년에 다소 하락한 데 반해, 한국은 계속해서 상승세를 보이는 중이다. 기업부채와 마찬가지로, 코로나 시기 확대한 부채 규모를 고금리 시기에 조금도 조정하지 못한 것이다. 인구구조가 전환되는 상황에서 이 추세는 계속될 것이다. 국회예산정책처는 GDP 대비 국가채무(D1) 비율이 2040년이 되면 100.7%, 2060년이 되면 161.0%가 될 것으로 전망한다. 

    또한, 부채의 질적 하락도 우려된다. 국가채무는 금융성 채무와 적자성 채무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금융성 채무는 융자금, 외화자산 등 대응 자산이 존재하여 이를 기반으로 발생한 채무를 나타내며, 대응 자산이 있으니 유사시 별도의 재원 조성 없이도 상환할 수 있다. 반면 적자성 채무는 대응 자산이 없고 상환할 때 조세수입 등 별도의 재원 조성이 필요한 채무를 의미한다. 따라서, 자산가치가 급변하는 상황에서는 금융성 채무도 안전하지 않을 수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적자성 채무의 비중이 높아지면 국가채무가 질적으로 악화했다고 판단한다. 한국은 2011년부터 2021년까지 적자성 채무의 비중이 49.2%에서 61.6%로 총 12.4%P 증가했다는 점에서, 국가부채의 질적 하락이 눈에 띈다. 

    게다가 암묵적인 지급보증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시장에서 평가되는 공공부문 부채(D3)로까지 범위를 확장하면, 그 규모는 세계 최고 수준에 달한다. 한국의 비금융 공기업 부채 규모는 GDP 대비 20%가 넘어, 33개 비교 대상국의 평균(12.8%)보다 크게 높고, 공공부문 부채가 극히 높은 일본(17.2%)보다도 높은 수준이다. 

    나아가, 최근 10년간 크게 확대한 정책금융, 즉, 산업은행, 주택도시공사 등 사실상 정부의 정책을 대행하는 금융공기업에서 발생하는 부채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2019년 기준 한국의 GDP 대비 금융공기업 부채비율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금융공기업의 부채가 ‘공공부문 부채’(D3)에 포함되지 않는 이유는 금융기관의 특성상 부채 규모가 비금융기관보다 높은 경향이 있고, 이를 일반적인 정부나 비금융기관의 부채와 동등한 선에서 비교하기 어렵다는 현실적인 문제 때문이다. 물론 금융공기업의 부채는 보수적으로 담보 가치를 인정하기에 정부의 부담으로 전이될 가능성은 크지 않으나, 그중 일부만 국가 부담으로 전이되더라도 재정에 부담이 가해진다는 점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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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상황에서 경기 부진이 이어지면서 2년째 세수 결손이 발생했다. 지난해 세수 결손 규모가 역대 최대인 56조 4천억 원이었고, 올해도 29조 6천억 원의 세수 펑크가 예상된다. 법인세와 소득세를 중심으로 세수가 대폭 줄었는데, 2022년 103.6조가 걷혔던 법인세가 2023년 80.4조(예산 105조), 2022년 128.7조가 걷혔던 소득세가 2023년 115.8조(예산 131.9조) 걷히면서 2023년 세수 결손 규모가 커졌다. 올해 역시 법인세와 소득세가 예상보다 감소할 것으로 보이는데, 법인세가 63.2조(예산 77.7조)가 걷힐 것으로 보이며 소득세는 117.4조(예산 125.8조) 걷힐 것으로 전망된다. 

    정부는 수입이 줄어든다고 해서 가계처럼 곧바로 지출을 줄이긴 어렵다. 결국 기금을 끌어 쓰는 것도 한계에 봉착할 것인데, 그러면 추가로 국채를 발행해야 한다. 그런데 이미 방대해진 국채 규모를 추가로 늘리는 데는 제약이 존재한다. 우선 고금리로 인해 이자 부담이 증가했다. 2020년 국고채 평균 조달 금리가 1.38%인데 반해, 2023년은 3.57%에 이른다. 또한, 총발행량 중 차환 발행 비중이 증가하는 한편, 순발행 비중은 2020년 66.1%, 2021년 66.8%, 2022년 57.7%, 2023년 37.1%, 2024년 31.5%로 감소하고 있다.

    차환 발행은 채권 만기가 다 돼서 갚아야 하거나 조기상환을 위해 다시 채권을 발행하는 것으로, 쉽게 말해 돌려막기다. 개인에 비유하자면, 월급은 계속 줄어드는데 이미 빚이 많은 상태에서 돌려막기를 위해 추가로 빌리는 데에도 비용이 증가하고 있는 셈이다. 
     
     

    5. 수출 대기업은 한계에 도달 중

     

    1) 수출로 먹고살기 어려워지고 있다

    수출로 먹고사는 한국경제가 한계에 봉착했다. 한국은 30년 만에 처음으로 2022년과 2023년 2년 연속으로 무역수지 적자를 보았다. 이는 수입 원자재 가격상승이라는 일시적인 요인도 있었지만, 한국의 수출 환경이 근본적으로 변화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한국의 수출은 2017년을 정점으로 하여, 이후 성장세가 주요국 수출 성장세를 밑돌며 정체하고 있다. 이는 한국의 수출구조가 변화했기 때문이다. 지난 10여 년의 추이를 봤을 때 지금까지 무역흑자에 크게 기여했던 휴대폰·디스플레이·선박·자동차 수출이 상당 기간 둔화 흐름을 보이고 있다. 휴대폰·디스플레이 수출은 생산기지 해외 이전, 중국업체와의 경쟁으로 감소하고 있고, 선박은 과거의 공급과잉 여파가 이어졌으며, 자동차도 해외시장 점유율 하락으로 정체 흐름을 보였다. 
     
    그런 와중에 반도체 수출만이 2010년대 중반 이후 크게 확대하면서 한국경제에 일종의 착시효과를 냈다. 최근의 수출 회복세 역시 반도체가 견인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미래가 그리 밝지 못하다. (이는 아래서 자세히 살펴본다.) 한국의 반도체 산업은 생산과정에서 투입되는 중간재 중 특히 중국으로부터의 수입재 비중이 크기 때문에 수출이 확대되더라도 순수출 증대 효과가 줄어든다. 또한, 한국은 고가의 반도체 제조장비 같은 자본재를 선진국으로부터 수입해야 하는 처지기에 이 역시도 순수출 증가를 제약한다.

    한국의 수출을 제약하는 외적 요인도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중국과의 경쟁이다. 이렇게 국내 수출입 구조가 변화하는 와중에 중국의 산업구조가 고도화되면서 자급률도 올라, 앞으로 대중 수출이 점차 어려워질 전망이다. 중국 수입시장에서 한국 점유율은 2000년 이래로 꾸준히 축소되고 있다. 예를 들어 무선통신기기, 디스플레이의 경우 중국업체의 기술력 향상과 저가 전략으로 인해, 2021년 수출금액이 2015년 대비 무선통신기기는 40%, 디스플레이는 26%까지 축소했다. 중국의 기술 발전으로 한국의 중국산 중간재 수입도 증가하면서 2023년부터는 대중 무역수지가 적자로 돌아섰다. 

    실제로 중국산 저가 철강재 유입으로 철강 대기업이 직격탄을 맞고 있다. 최근 실적 악화에 시달리고 있는 포스코는 영업이익이 전년동기대비 39.8% 감소했으며, 수익성 개선을 위해 포항제철소의 몇몇 공장을 폐쇄했다. 현대제철 역시 같은 이유로 공장 폐쇄를 추진 중이다. 자동차 수출의 경우 철강 기업만큼은 아니더라도 중국의 공격적인 전기차 시장 장악으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현대·기아차의 경우 전기차 판매량이 올해 상반기 17.6%P 감소했으나, 하이브리드차의 약진으로 전기차 수출 부진을 보완해 올해 1~3분기 판매량이 2.2%P 감소에 그쳤다. 그러나 문제는 앞으로인데, 이미 유럽, 아세안에서 중국 전기차 수출이 급격히 늘어난 상태다. 

    이외에, 미국 수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자동차는 장기적으로 미국 내 생산을 확대하려는 추세다. 또한, 최근 엔저의 장기화로 일본과 수출경합도가 높은 석유제품, 자동차·부품, 선박, 반도체 등 한국 5대 수출품목 모두 상대적 경쟁력이 저하되고 있다. 이처럼, 첨단 IT 품목을 제외한 대부분 수출산업이 하방 압력을 받고 있다. 대외적 조건을 고려했을 때, 이런 상황은 앞으로도 지속할 것으로 보인다.
     

    2) 삼성전자 위기론

    2024년 10월 기준 월별 수출액의 21.8%를 차지하는 반도체, 그중에서도 약 80~90%의 비중을 차지하는 삼성전자가 요즘 심상치 않다. 삼성전자는 한국경제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데, 일례로 2019년 삼성전자가 납부한 법인세가 그해 정부 법인세수의 14.6%를 차지했다. 최근 2년간 세수 부족은 삼성전자가 부진한 탓도 크다. 반도체 착시 현상이 걷히자, 한국 수출기업의 취약함이 드러난 셈이다.

    사실 삼성전자가 메모리 반도체 업계에서 선두를 달릴 수 있었던 비법은 간단했다. 1980년대 실리콘밸리는 메모리 칩 분야에서 일본의 국제적 경쟁에 맞서기 위해 훨씬 더 저렴한 공급원을 찾아내는 동시에 미국의 연구개발 노력을 범용 D램보다 부가가치가 높은 제품에 집중하고자 했다. 이에 이미 미국과 일본에서 만든 칩의 조립과 패키징을 아웃소싱하고 있던 한국이 그 적임자가 되었다. 삼성은 정부 지원을 등에 업고 거대 자금을 투여해 시장을 장악했다. 막대한 고정자본 투자가 필요한 반도체 생산에서 시장을 독식하는 데에는 대규모 자금 조달이 쉬운 재벌구조가 유리하게 작용했다. 

    최근 메모리 반도체 업계의 상황은 삼성전자의 위치가 바뀌었을 뿐 1980년대의 양상과 똑같다. D램을 대량 생산하는 삼성의 자리를 중국이 꿰차려 하는 가운데, 삼성이 기술력 격차를 극복하지 못하며 대만의 TSMC가 범용 메모리반도체를 제외한 첨단 반도체 시장을 장악한 것이다. 예를 들어 중국 최대 메모리 기업인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는 중국 정부의 보조금에 힘입어 범용 메모리 반도체를 반값에 판매하는 덤핑전략으로 전세계 D램 생산량의 10% 이상을 차지했다. 또한 삼성전자 메모리 반도체를 전량 수입하던 중국 전자 업계가 자국 회사의 반도체를 쓰기 시작하면서 삼성의 시장 점유율이 빠르게 줄고 있다. 이에 삼성은 메모리 반도체의 사업성을 우려하면서 시스템 반도체 생산에 박차를 가하며 TSMC와의 위탁 생산(파운드리) 경쟁에 뛰어들었지만, 기술력 격차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반도체는 미세공정으로 갈수록 기술개발비용과 시간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데, 과거에는 삼성과 TSMC도 비슷한 공정 수율(생산품 대비 정상품의 비율)을 보였지만, 이제는 격차가 10% 이상 벌어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삼성전자는 반도체 부문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미중갈등과 디커플링에 취약하다. 삼성전자는 막대한 자본을 투입해 선진국에서 장비용 부품을 수입하여 반도체 대량 생산 체제를 구축하고, 그렇게 생산한 반도체를 중국에서 후공정을 거쳐 판매해 왔다. 반도체 장비와 부품은 일본을 비롯한 선진국에 대한 의존도가 매우 높은 한편, 생산할 반도체를 수출할 시장은 중국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상황에서 어느 쪽도 선택하기 어려운 상황인 것이다. 따라서 향후에 2017년과 같은 세계적인 반도체 호황기가 다시 돌아오더라도, 삼성전자가 그 호황을 누릴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다.
     

    3) 재벌체제의 결함 때문

    삼성전자의 미래를 걱정하는 전문가들은 반도체 고객인 설계업체(팹리스)와 경쟁하지 않도록 장기적으로 파운드리 사업을 분사할 것을 권고한다. 완제품도 제조하는 삼성에 위탁 생산을 맡기면 자신의 기술이 삼성으로 흘러갈 수 있다는 고객사의 의구심을 해소할 수 없기 때문이다. TSMC가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애플의 반도체를 위탁 생산하면서다. 따라서 메모리 반도체와 파운드리에 더해 직접 설계까지 하는 삼성전자의 사업구조로는 전망이 어둡다는 얘기다. 게다가 투자가 분산되니 기술격차는 계속 벌어지게 된다. 파운드리만 전문적으로 하는 TSMC는 매년 약 40조 원이 넘는 자금을 투자했지만, 삼성전자는 지난해 전체 투자액 48조 원 중에서 약 25~30조 원을 메모리반도체에, 약 15~20조 원을 파운드리에 투자했다.

    하지만 수많은 계열사를 거느리며 그룹 내 총수일가의 지배구조를 확고히 하는 것이 제1 목표인 재벌기업에서 그런 결정을 내리기 어렵다. 실제 분사에 관한 얘기가 안팎으로 들려오자,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파운드리 사업부의 분사 가능성을 일축했다. 이처럼 지배력 확보를 위해 비효율적인 사업구조를 유지하려고 하는 것이 재벌체제의 가장 큰 결함이다. 그 결과 수익성이 무시된다. 실제 스마트폰의 경우, 삼성전자 매출액이 애플의 5분의 1정도 밖에 되지 않고 영업이익률도 3배나 차이 난다. 반도체 사업에서도, TSMC가 삼성전자보다 매출액도 크고 2023년 기준으로 영업이익률은 세 배나 높다. 2024년에는 이러한 격차가 더욱 확대될 예정이다. 삼성전자가 겉으로 보기에는 압도적인 시장점유율을 자랑하며 경쟁기업과 1, 2위를 다투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수익률은 3분의 1 수준에 불과한 것이다.

    삼성을 정점으로 하는 수출 대기업이 한계에 봉착한 현 상황은 한국경제의 앞날을 불투명하게 만들고 있다. 특히나 재벌체제는 소수의 총수 일가가 초래한 위험을 주주와 노동자, 나아가 IMF 외환위기 때처럼 국가 경제의 시스템적 위험으로까지 확산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한국의 경제구조에 큰 제약으로 작용한다. 
     
     

    6. 나가며: 포퓰리즘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

     
    사회운동이 경제정세를 전망하는 이유는 결국 객관적 현실이 어떠한지를 직시하기 위해서다. 위에서 살펴본 한국경제의 제약들이 하루아침에 해결될 수는 없을 것이다. 지금껏 한국경제 구조가 걸어왔던 길이 누적된 결과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인구구조가 변화하면 잠재성장률은 더욱 낮아질 것이며, 정부부채가 증가하고 각종 복지제도의 기반이 흔들릴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대중의 분노는 어떻게 귀결될까? 미국에서 고물가로 인한 대중의 공분은 트럼프주의에 불을 지폈다. 그 저변에는 세계화의 여파로 제조업이 쇠퇴하면서 일자리를 잃었던 인민의 설움이 있었다. 한국 역시 마찬가지로, 성장이 멈추고 생활 수준의 하락이 시작되면 대중의 분노가 어디선가 분출할 것이다. 그러나 경제문제의 원인을 누군가의 음모나 탓으로 돌리며 그 분노가 엉뚱한 곳으로 향하게 되면 사태는 더욱 악화할 것이다. 

    포퓰리즘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선 객관적 현실을 마주할 수 있어야 한다. 사회운동은 정치권의 인기영합적인 정책 비판할 수 있어야 하고, 경제의 객관적 제약 조건을 무시해선 안 된다. 그리고 대중의 분노를 부채질하는 방식이 아니라, 그 분노를 더 나은 사회를 조직하는 데 보탬이 될 수 있도록 전환해야 한다. ●
     
     

  • 2024-12-23

    구조적 위기와 불확실성이 교차하는 세계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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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세계경제 전망: 정책 전환과 세 가지 위협

     

    1) 인플레이션 완화와 통화정책 전환

    지난해 발표한 2024년 경제전망에서, 사회진보연대는 세계경제가 “여전히 인플레이션 위협이 상존한 가운데 고금리 기조가 장기화하면서 전반적으로 가계·기업의 부채와 정부의 재정에 부담이 가중되고” 있다고 보았다. 올해가 마무리되는 현재 시점에서도, 비록 인플레이션율이 꾸준하게 하락하고 있고 경제성장률이 유지되고 있지만, 여전히 ‘중·고금리-고부채-중물가’ 시대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 트럼프의 귀환이 상징하듯, 규칙 기반 세계질서와 다자간 공조가 더욱 퇴조하면서 전반적인 세계경제의 불확실성이 증대할 우려가 커지고 있다.

    먼저 인플레이션 전망을 살펴보자. 올해 하반기를 기점으로, 2022년부터 이어진 ‘인플레이션과의 전쟁’은 점차 휴전 상태로 접어들고 있다는 것이 지배적인 평가다. 세계경제의 헤드라인 인플레이션(전년 대비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2022년 3분기에 9.4%로 정점에 도달한 뒤, 2023년 6.7%로 하락한 데 이어 올해는 5.8%, 내년인 2025년에는 4.3%로 하락할 것으로 전망된다. 지난해 전망과 비교할 때, 선진국은 신흥국이나 개발도상국보다 더 빨리 인플레이션율이 중앙은행의 정책목표인 2%에 도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예를 들어 유럽(유로존)은 빠르면 2025년 초, 미국은 2025년 말에 인플레이션율이 2%에 도달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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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적인 인플레이션율의 급등은 코로나19 대유행에 이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공급망이 붕괴하고 원자재 가격이 급등한 데다, 대유행 시기 급격한 완화적 통화정책을 시행한 이후 회복기에 강력한 수요 증가와 견조한 고용 상황이라는 요인이 결합하여 발생한 것이었다. 따라서 공급 차질이 점차 완화되고 각국 중앙은행이 강력한 통화 긴축 정책을 펼치자, 인플레이션은 급격한 경기침체나 성장률 하락 없이 어느 정도 진정될 수 있었다. 이를 반영해, 올해와 내년에도 세계경제 성장률은 3.2%로 회복세를 보일 것으로 전망된다. 또한, 경기순환 불균형이 완화하면서 실제 경제성장률과 잠재 경제성장률이 점차 일치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다만,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간의 격차, 나아가 각국 간의 편차가 더욱 커지고 있다. 미국은 성장률과 고용을 희생하지 않으면서 인플레이션을 안정화하는 데 성공하고 있는 반면, 유럽은 인플레이션 안정세는 명확하지만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올해와 내년에도 1% 내외의 저성장을 이어갈 전망이다. 특히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유럽경제 회복세는 서비스 부문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산업 부문은 여전히 회복세가 저조하여, 독일과 같은 제조업 중심 국가의 경기 침체가 두드러지고 있다. 일본은 지난해 소비자물가지수가 3.1% 상승하며 1982년 이래 41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한 데 이어 올해도 2.6% 상승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에 일본 정부는 임금인상을 장려하고 최저임금을 인상하는 한편, 기준금리를 3월과 7월 두 차례에 걸쳐 –0.1%에서 0.25%까지 인상했다. 2013년 디플레이션과 장기침체 탈출을 위해 대규모 양적완화와 마이너스 금리정책을 펼쳤던 ‘아베노믹스’ 기조가 변화하고 있다. 한편, 개발도상국은 여전히 대규모 생산 감소와 통화정책의 불안정이 지속하면서 높은 수준의 인플레이션을 겪고 있다. 나아가 많은 나라에서 인구 고령화나 생산성 저하와 같은 구조적 요인으로 인해 잠재성장률이 하락하고 있다.

    주요 선진국 중앙은행은 하반기로 넘어가면서부터, 통화정책 기조를 전환해 기준금리를 인하하기 시작했다. 이는 인플레이션율 하락과 함께, 경기 침체로 전환될 것이라는 우려를 반영한 것이었다. 유럽 중앙은행은 올해 6월 0.25%p 인하한 데 이어 9월 0.6%p, 10월 0.25%p 인하하여, 12월 초 현재 기준금리는 3.4%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연준)는 올해 9월과 11월에 기준금리를 각각 0.5%p, 0.25%p 인하한 데 이어 12월에도 0.25%p 추가 인하해 기준금리는 4.25~4.5%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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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만 지난해에 전망했던 대로, 주요국 중앙은행의 통화정책 전환은 서서히 이루어졌다. 내년에도 금리 인하 속도는 빠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미국은 2025년 4분기까지 약 0.5%p 추가 인하하여 4.0% 내외의 기준금리를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인플레이션의 완화에도 불구하고 세계경제에 드리우는 위협의 증대를 반영하는 것이다.
     

    2) 세계경제에 드리우는 세 가지 위협

    첫째, 인플레이션 고착화 내지는 재발생 우려다. 주요국에서 인플레이션율 하락은 대체로 예상대로 진행되고 있지만,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인플레이션 수준이 고착화되는 ‘끈적한 인플레이션’(sticky inflation)에 대한 우려가 여전히 남아 있다. 가격 변동이 심한 농산물이나 에너지를 제외한 품목의 물가상승률을 나타내는 근원물가지수가 여전히 경직적인 가운데, 선진국은 명목임금 상승을 반영해 서비스 부문의 인플레이션이 4.2%로 코로나19 팬데믹 이전보다 2배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으며, 신흥국은 식량과 에너지 가격으로 인해 인플레이션 압력을 더 크게 받고 있다. 

    무엇보다, 새로운 팬데믹, 기상이변, 전쟁과 분쟁으로 인해 공급망이 붕괴하거나 원자재 가격이 급등해 물가 상승과 생산량 감소가 동시에 발생하는 충격이 다시 발생할 가능성이 남아있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지난 30년간 상품가격 변동의 세계적인 동조화가 심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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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히, 산업 원자재 가격 변동에서 공통 요인(세계적 요인)의 역할이 상당히 증가했고, 이러한 추세는 코로나19 팬데믹이 발생한 2020년 이후 더욱 뚜렷해졌다. 예를 들어, 지난 4년간 에너지 가격 변동의 41.7%, 비금속(卑金屬, base metal) 가격 변동의 61.4%를 공통 요인이 설명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팬데믹이나 분쟁과 같은 요인이 각 원자재 시장에 미치는 충격이, 전반적인 원자재 가격의 동반 상승으로 쉽게 이어져 다시금 인플레이션 압력을 가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규칙 기반 세계질서의 후퇴와 트럼프의 귀환이다. 2007~09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중국은 국가자본주의를 강화하는 한편, 강군몽을 이루기 위해 군민융합을 내세우며 ‘중국제조2025’ 계획을 추진했다. 이에 미국과 유럽을 비롯한 자유주의 국가는 중국이 자유무역 질서에 깊이 편입되어 있으면서도 불공정한 기술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이를 악용해 배타적인 민족적 이익을 강화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을 느끼게 되었다. 

    나아가, 미국에서는 중국의 대규모 무역흑자와 이를 가능케 하는 세계 무역질서가 금융위기 이후 미국 제조업의 위기와 각종 사회적 문제의 핵심 원인이라고 주장한 트럼프가 광범위한 탈세계화 정서를 등에 업고 2016년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국제문제에서 양자 간 거래를 선호하는 한편 다자간 규칙 기반 세계질서에 대한 불신을 드러냈는데, 대표적인 사례로 2017년 세계무역기구(WTO)의 상소기구 위원 선임을 미국이 거부하면서 2019년부터 그 기능이 정지된 것을 들 수 있다. 

    바이든 행정부는 중국과의 ‘전략적 경쟁’을 이어가되 트럼프 행정부 시기에 훼손된 규칙 기반의 다자적 질서와 동맹 질서를 복원하고자 했다. 다만 WTO 분쟁 조정 기능이 여전히 사실상 정지 상태인 가운데, 인도·태평양 지역 국가들과 무역·노동·디지털 경제 표준 정립, 공급망 회복력 제고, 청정에너지 발전과 인프라 구축을 위한 경제협력체인 ‘인도-태평양 경제 프레임워크’(IPEF)를 발족했지만, 아직 뚜렷한 활동과 성과를 보이고 있지는 않다.

    다른 한편, 바이든 행정부는 통상정책 주요 의제 중 하나로 ‘노동자 중심 무역정책’을 제기하면서 인권·노동권과 무역을 연계해 독자적인 규제와 제재를 강화했는데, 여기에 중국이 강하게 반발했다. 나아가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고, 미국과 유럽연합을 비롯한 G7이 러시아에 경제제재를 가하면서 국제 질서의 분절화는 더욱 심화했다. 러시아와 중국은 이러한 서방의 제재가 오히려 국제법에 반하는 일방적 조치라고 반발하고 있는데, 이는 올해 브릭스(BRICS) 정상회의에서 채택된 카잔 선언에 그대로 담겼다. (브릭스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자세히 다룬다.)

    요컨대, 2020년대는 세계적 수준의 상호의존성과 모순은 여전히 심화하고 있지만 대안세계화의 가능성은 요원한 상황에서, 기존의 신자유주의 규칙 기반 세계질서에 대한 미국의 후퇴와 러시아·중국의 교란·도전이 중첩되어 무질서와 불확실성이 증대하고 있는 정세라고 할 수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최근 블록 간 무역량보다 블록 내 무역량이 늘어나고 있고, 많은 국가가 일방적인 보호주의 정책을 강화하는 추세가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이것이 곧바로 급속한 탈세계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세계 공급망의 복원력을 떨어뜨리고 불확실성을 증대하는 문제가 있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2025년 트럼프의 복귀는 이러한 경향을 더욱 가속할 것이다. 

    셋째, 장기저성장 시대에 가중되는 재정위기와 부채위기다. 코로나19 대유행과 경제위기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각국 정부는 재정적자와 부채를 크게 늘렸다. 이후 인플레이션과 금리 인상이 이어진 가운데서도 공공부채는 여전히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올해 유엔 무역개발회의(UNCTAD)가 발표한 ‘부채 세계’ 보고서에 따르면, 2023년 세계 전체의 공공부채 규모는 2022년 대비 5.7% 늘어난 97조 달러(약 13경 원)다.

    보고서는 특히 세계경제의 부진하고 불균등한 성장으로 인해 선진국보다 개발도상국에서 두 배 빠른 속도로 부채가 증가하고 있다고 우려한다. 전체 부채 규모에서 개발도상국의 부채 규모가 차지하는 비중은 2010년의 16%에서 빠르게 커져 2023년 30%(약 29조 달러)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보고서는 많은 개발도상국이 빚을 갚는 것과 국민을 위한 의료·복지·교육에 투자하는 것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고 있다고 지적한다.

    한편, IMF는 개발도상국뿐만 아니라 세계경제의 중심인 미국과 중국의 부채위기가 지속 불가능한 상황이라는 점 역시 강조한다. 양국 모두 현재까지 쌓인 절대적인 부채 규모가 이미 막대할 뿐만 아니라, 고금리로 인해 이자 부담이 급격하게 늘어나는 가운데 여전히 대규모 재정적자를 유지하거나 오히려 확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과 중국의 부채위기는 아래에서 자세히 다룬다.) 여기에 더해, 주요국 중앙은행이 통화정책을 전환하는 과정에서 금융시장의 변동성이 급격히 확대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예를 들어, 지난 8월 일본이 마이너스 금리 정책에서 금리 인상 정책으로 선회한 가운데 미국이 금리를 인하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해지자, 일본 금융기관에서 저금리로 엔화를 빌린 뒤 이를 달러로 바꾸어 미국 금융시장에 투자하는 이른바 ‘앤 캐리 트레이드’ 자금이 대규모로 빠져나가 미국 증시가 폭락하고 환율이 급변하는 일이 있었다. IMF는 이러한 세계 금융시장 변동성의 확대가 금융 여건을 긴축하면서 부채위기를 강화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나아가, 장기저성장 시대에 가중되는 부채위기는 역으로 투자와 성장을 저해하고 금융시장 불안을 자극하는 악순환을 그린다고도 지적한다. 결국, 부채위기가 2020년대 세계경제에 중대한 기저질환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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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미국경제: 트럼프주의의 불확실성과 가중되는 구조적 위기

     

    1) 견조한 거시경제 지표에 가려진 양극화

    미국경제는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올해 역시 경기침체 없이 인플레이션을 완화하면서, 선진국 가운데 가장 양호한 흐름을 보인다. 미국의 개인소비지출(PCE) 물가지수는 2022년 7월 6.6%를 정점으로 올해 10월 2.1%까지 하락했다.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는 PCE 물가지수가 2024년 4분기에 2.4%, 2025년 4분기에는 2.3%일 것으로 전망한다. 

    다만 전년 대비 소비자물가상승률(CPI)을 기준으로 보면, 여전히 인플레이션 완화 속도가 둔화하고 물가 수준이 고착할 우려를 떨칠 수 없다. CPI는 올해 10월 2.6%로 나타났는데, 특히 근원 CPI가 전달보다 0.3%p 오른 3.3%로 나타났다.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근원 상품 물가상승률은 0%에 근접했지만 근원 서비스 물가상승률과 주거비 인플레이션이 약 4%여서, 서비스 물가와 주거비 상승이 인플레이션 대부분을 설명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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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업률은 지난해 말 3.9%에서 소폭 상승한 4.1%인 가운데, 내년에도 비슷한 수준을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다만 서비스 부문을 중심으로 이어지던 취업자 수 증가세가 대폭 축소하고, 그간 민간소비 회복의 주된 요인으로 작용했던 초과저축이 대부분 고갈되면서, 전체적인 경기는 둔화하는 방향일 것으로 전망된다. 이에 따라 연준은 미국의 실질 경제성장률이 2024~27년에 연간 2.0% 수준에서 이어질 것으로 예측한다.

    그런데 이렇게 비교적 견조한 거시경제 지표와 달리, 미국인의 여론은 전반적으로 경제 상황이 좋지 않다고 인식하는 ‘바이브세션’(vibecession) 현상이 올해 내내 두드러졌다. 예를 들어, 지난 6월 한 여론조사에서 미국인의 56%가 미국이 경기 침체에 빠졌다고 답변했고, 72%가 인플레이션율이 상승하고 있다고 답변했으며, 58%가 바이든 행정부의 잘못된 정책으로 인해 경제가 악화하고 있다고 답변했다. 경제 상황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하반기 미국 대통령 선거와 상하원 선거가 트럼프와 공화당의 승리로 귀결된 주요 요인 중 하나로 평가된다. 

    미국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마이클 로버츠는 이러한 현상이 미국경제 내의 양극화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첫째, 거시경제가 성장하고 금융시장이 호황이지만, 일반 미국 가계는 그렇지 못하다. 무엇보다 물가상승률과 물가 수준을 구별해야 하는데, 가계가 체감하는 인플레이션은 ‘물가 상승 속도’보다는 ‘물가 수준’의 영향을 더 크게 받는다. 바이든 행정부가 취임한 2021년 1월의 소비자물가지수를 100이라고 할 때, 최근의 소비자물가지수는 120으로 20% 상승했으며, 특히 필수구매 항목에 해당하는 에너지(41%), 교통(40%), 주거(22%), 식료품(21%)의 가격 수준이 두드러지게 상승했다. 요컨대, 기본 생필품 물가 수준의 대폭 상승이 인플레이션율의 하락을 압도하고 있는 셈이다. 그는 이런 가운데 소득과 부의 불평등이 더욱 심해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2022년에 미국인 상위 1%가 전체 개인 소득의 20.8%와 전체 개인 부의 35%를 소유한 반면, 하위 50%는 각각 10.3%와 1.5%만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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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둘째, 자본 내 격차 역시 심화하고 있다. 미국 증권거래소에 상장된 500대 기업 가운데 7대 주요 기술 기업(알파벳, 아마존, 애플, 메타, 마이크로소프트, 엔비디아, 테슬라)의 연간 수익성장률은 2023년에 58%였고 2024년에는 20.8%일 것으로 전망되는 반면, 나머지 493개 기업의 연간 수익성장률은 2023년에는 오히려 2% 감소했고 2024년에는 6.7%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고금리 정책이 장기화하는 가운데서도 기업 시가총액을 총실물자본 구입 가격으로 나눈 ‘토빈의 Q’가 올해 1월 1.48로 역사적 고점을 기록할 만큼 미국 주식시장 열광이 계속되고 있다(역사적 평균은 0.83). 이렇게 미국 기업 주식이 실제 자산 가치보다 훨씬 높게 평가되는 현상 역시 거의 전적으로 7대 주요 기술 기업이 주도하고 있다. 

    특히 미국의 비금융 기업 부문과 중소기업은 수익 감소와 높은 이자율로 인한 비용 증가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미국 중소기업의 약 37%가 지난 3개월 동안 수익이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는데, 이는 세계 금융위기 시기인 2009년과 비슷한 수치다. 나아가 미국 비금융 기업 부문의 부채 규모는 2021년 GDP 대비 약 0.95%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한 뒤 2023년 말에도 약 0.75% 수준이다. 2025년까지 만기가 도래하는 기업 부채의 규모가 1.8조 달러에 달할 것으로 추정되는 가운데, 평균 이자율은 2024년에 4.3%에서 2025년 4.5%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2) 돌아온 트럼프 경제정책의 불확실성

    이런 가운데 트럼프 2기 행정부의 경제정책은 미국경제에 거대한 불확실성으로 작용할 것이다. 이는 트럼프 행정부와 공화당이 추진할 경제정책의 방향이 불확실하기 때문인 것은 아니다. 전체적으로 볼 때, 트럼프주의 경제정책이 미국경제의 물가 상승을 자극하고 연방정부의 재정위기와 부채위기를 악화하는 방향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다만 그러한 정책의 속도와 강도가 어느 정도 수준일 것이며 그에 따라 경제 전반에 미칠 영향이 어느 정도일지에 대해서는 불확실성이 있다. 그리고 국가 간 관계나 국내 경제 문제를 제로섬 게임으로 간주하며 불확실성을 무기로 일회성 거래를 극대화하려는 트럼프의 태도가 정책결정의 예측 가능성을 떨어뜨린다. 마지막으로, 저물가·저금리·약달러를 선호하면서도 실제로는 그와 정반대의 효과를 나타내는 경제정책을 추진하는 트럼프가, 저물가·저금리·약달러를 강제하기 위해 연방준비제도의 통화정책 결정에 얼마나 개입하려 할지가 미국 거시경제에 미칠 중요한 불안 요소다.

    지난 가을호 글 「더욱 강해져서 돌아온 트럼프 경제정책의 위험성」에서 살펴보았듯, 트럼프 2기 행정부가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구호를 앞세우며 추진하고자 하는 경제정책의 핵심은 ‘감세와 관세의 결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트럼프 행정부는 행정명령을 통해, 이번 선거로 상원과 하원의 다수당이 된 공화당은 입법을 통해 감세정책과 관세정책을 취임 직후부터 빠르게 추진할 것이라는 전망이 제기된다.

    무엇보다 공화당은 트럼프 당선인이 내년 1월 취임한 뒤 100일 이내에 감세 법안을 연장하는 입법을 속도감 있게 추진할 것으로 보인다. 지난 2017년 트럼프 1기 행정부 시기에 입법된 ‘감세와 일자리법’(TCJA)은 최고 법인세율을 35%에서 21%로 내리고 개인 소득세 최고세율을 39.6%에서 37%로 내리는 것이 골자였다. 이 법안의 개인 소득세율 인하 항목은 내년에 만료될 예정인데, 공화당은 이를 연장하는 한편 최고 법인세율을 트럼프 공약에 따라 15%까지 낮추는 입법안을 빠르게 처리하려는 것으로 알려졌다. 

    다음으로 관세정책 전망을 살펴보자. 트럼프는 대선 기간에 미국 우선주의라는 기치 아래 ▲ 미국 제조업 부흥 ▲ 무역적자 축소 ▲ 중국과의 경쟁에서 우위 확보라는 세 가지 목표를 위해 관세를 중심으로 하는 보호무역 조치를 적극 활용하겠다고 공약했다. 구체적으로는 모든 국가를 상대로 10%p의 관세를 추가로 부과하는 보편적 기본관세와, 상대국이 미국 상품에 부과하는 관세와 동일한 관세율을 상대국 수입 상품에 부과하는 상호주의 관세, 그리고 중국에 대한 60%에 이르는 고율의 관세를 추진하겠다는 것이다.

    11월 25일에 트럼프 당선인은 내년 1월 20일 취임 첫날부터 멕시코와 캐나다에서 수입하는 모든 상품에 25%의 관세를 부과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두 나라에서 미국으로 들어오는 마약(특히 펜타닐)과 불법 이민자 문제를 해결할 때까지 이러한 관세를 유지할 것이며, 중국에 대해서도 중국에서 생산돼 멕시코를 거쳐 미국으로 유입되는 펜타닐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모든 중국산 상품에 10%p의 추가 관세를 부과할 것이라고 했다. 이와 함께 그는 자신의 관세 확대 정책을 지지하는 하워드 러트닉과 스콧 베센트를 각각 2기 행정부의 상무부 장관과 재무부 장관으로 지명했다. 특히 트럼프 당선인은 러트닉을 상무부 장관으로 지명하면서 ‘미국 무역대표부(USTR)에 대한 직접적 책임을 맡으면서 관세 및 무역 의제를 이끌 것’이라고 밝혔는데, 이에 따라 대통령의 행정명령과 함께 상무부와 USTR이 실제로 어느 정도 속도와 강도로 관세정책을 추진할 것인지에 주목해야 한다. 

    공화당 역시 상호주의 관세법 제정을 비롯해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정책을 입법화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알려졌다. 다만 수출에 민감한 주 출신 의원의 이해관계가 얽혀있고 극단적인 관세정책에 대한 당내 이견이 있어서, 감세 입법과 비교할 때 관세 입법의 속도는 빠르지 않을 수 있다는 전망도 있다. 그렇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트럼프 2기 행정부는 중국을 비롯한 대미 무역수지 흑자국을 상대로 하여 행정명령을 통해 구체적인 관세를 부과하는 조치를 1기 행정부 시기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시행하거나 협상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할 것은 분명하다. 이에 따라 트럼프 2기 행정부의 관세정책이 미국의 무역과 국제질서에 미치는 영향은 1기 행정부나 바이든 행정부 시기에 비해 훨씬 커질 가능성이 높다.

    한편, 산업정책에서는 급격한 방향 전환의 가능성이 비교적 크지 않다는 전망이다. 트럼프는 바이든 행정부의 친환경 에너지 정책이 ‘신종 녹색 사기’이며 화석연료 채굴과 사용을 억제해 에너지 가격을 올려 인플레이션을 야기했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그러면서 그는 바이든 행정부 시기에 입법된 ‘인플레이션감축법’(IRA)에 관련 기금을 회수하고 화석연료 채굴과 관련한 규제를 대폭 완화할 것이라고 공약했다. 다만 트럼프 행정부와 공화당이 인플레이션감축법을 완전히 축소하거나 폐지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공화당 지지가 강한 지역 중 인플레이션감축법을 통해 태양광·풍력 발전이나 전기차에 지급되는 보조금의 혜택을 받는 곳이 많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바이든 행정부 시기에 입법된 ‘반도체와 과학법’(CHIPS Act)에 따른 반도체 보조금 역시, 공화당과 민주당의 초당적 지지를 받는다는 점에서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이를 완전히 무효로 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
     

    3) 스태그플레이션과 부채위기 결합의 가능성

    이렇게 감세와 관세를 핵심으로 하는 트럼프 경제정책의 속도와 강도가 실제로 어느 정도 수준일 것인지는 아직 단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러한 경제정책이 임기 초부터 시행되어, 미국경제의 인플레이션과 부채위기를 악화할 것이라는 점은 명확하다. 먼저, 트럼프 행정부가 추진할 감세정책은 연방정부의 재정적자를 확대해 부채위기를 가중할 것이다. 미국의 재정적자 규모는 이미 코로나19 팬데믹이 한창이던 2020년 3조 1천억 달러로 역사상 최대치를 기록한 뒤 2024년에도 1조 8천억 달러(GDP 대비 6.4%)에 이를 정도로 막대하다. 

    미국 책임있는 연방 예산위원회(CRFB)는, 트럼프의 공약이 시행되면 미국의 재정적자가 향후 10년간 최대 15조 5천억 달러 증가할 것이고, 장기 국채금리가 상승해 순이자 지급액도 1조 달러 증가할 것으로 예상했다. 역사적으로 장기 국채금리는 GDP 대비 정부 부채 비율이 1%p 상승할 때 약 2~3bp(1bp는 0.01%p) 상승하는데, 한국은행은 트럼프의 공약이 향후 10년간 장기 국채금리를 43bp 상승시키는 압력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장기 국채금리의 상승은 다시 부채의 지속 가능성을 위협하는 악순환을 만든다. 이에 따라, CRFB는 GDP 대비 정부 부채 비율이 현재 97%(전체 국가 부채 규모는 36조 달러)에서 2035년 최대 161%까지 폭발적으로 증가할 것으로 추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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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럼프는 감세정책으로 인한 세입 감소를 앞서 언급한 보편적 기본관세·상호주의 관세나 대중국 고율 관세와 같은 관세정책으로 메울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현재 미국의 관세 규모는 연간 약 800억 달러(전체 세입의 약 2%) 수준이며, 트럼프가 제안하는 보편적 기본관세·상호주의 관세법을 시행하더라도 관세 규모는 최대 2천2백억 달러에 그칠 것으로 추산된다. 트럼프의 주장과 달리, 관세 인상을 통한 세입 증가액은 감세정책으로 인한 세입 감소액보다 훨씬 적기 때문에, 관세정책으로 재정적자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히려 트럼프 행정부가 추진할 대규모 관세정책은 인플레이션 압력을 높이고, 그에 따라 금리 상승 압력을 높여 부채위기를 가중할 것이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은 보편적 기본관세와 상호주의 관세가 시행되면 미국의 소비자물가가 1.8%p~3.6%p 상승할 것으로 추정하고, 특히 상대국이 미국에 보복관세를 부과할 경우 물가 상승 압력이 더욱 커질 것으로 보았다. (한편, 경제정책의 영역은 아니지만, 트럼프가 대선 시기 공언한 대규모 이민자 추방 계획 역시 미국경제에 노동력 공급 충격을 가해 인플레이션 상승과 경제성장률 하락이 결합하는 스태그플레이션을 야기할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이로 인한 물가 상승 압력은 연준의 금리 인하를 가로막아 고금리를 장기화하는 효과를 미칠 것이다. 

    향후 3년간 미국의 경제성장률이 2.0%에 수렴할 것으로 전망되는 가운데 물가상승률과 이자율이 경제성장률을 상회하고, 지속 불가능한 재정적자와 이자 지출 부담이 확대하며 부채위기가 가중하는 상황은 미국경제의 구조적 위기를 보여줄 따름이다. 여기에 더해 현재는 세계 금융위기 이후 저금리·저물가 상황에서 고용 없는 회복이 문제였던 트럼프 1기 행정부 시기와 다른 정세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감세와 관세의 결합으로 대표되는 트럼프 2기 행정부의 경제정책은 정책결정의 불확실성을 증대하는 한편, 인플레이션과 부채위기를 가중함으로써 미국경제의 구조적 위기를 더욱 심화할 것이다.
     
     

    3. 중국 경제: 성장 둔화에 대응하는 국가자본주의 강화

     

    1) 장기화하는 부동산 부문 침체와 내수 부진

    중국 경제는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세계적인 인플레이션 문제를 겪지 않는 대신, GDP의 약 40%를 차지하는 부동산 부문의 침체와 부채위기가 지속하면서 경기회복이 부진한 상태다. 중국의 2024년 경제성장률은 전년동기대비 1분기에 5.3%를 달성했지만 2분기에 4.7%, 3분기에는 4.6%로 하락하면서, 3분기까지 누적 성장률은 4.8%를 기록했다. 4분기에도 성장률이 반등할 가능성은 크지 않기에, 2024년 연간 경제성장률은 중국 정부의 목표치인 5%에 미달하는 4% 후반일 것으로 전망된다. 나아가 이러한 성장세 둔화 흐름은 내년에도 이어져, 2025년 경제성장률은 4.5%일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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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내수가 둔화하면서 소비와 투자의 성장기여도가 큰 폭으로 축소하는 가운데 순수출이 성장률을 그나마 뒷받침하고 있다. 소매판매는 전년동기대비 1분기에 4.7% 증가했으나, 2분기와 3분기에 각각 2.7% 증가하는 데 그쳤다. 소비의 성장기여도 역시 1분기 3.9%p에서 2분기 2.2%p와 3분기 1.3%p로 계속해서 하락했다. 

    투자 역시 부동산투자가 부진하고 인프라투자 증가세가 둔화하면서 3분기에 3.4% 증가하는 데 그쳤고, 성장기여도 역시 1.3%p로 하락했다. 특히 첨단산업을 육성하기 위한 중국 정부의 정책지원 덕에 국유기업 투자는 7%대를 유지했지만, 민간투자는 2분기 0.1% 성장하는 데 그쳤고 3분기에는 –0.2%를 기록했다. 수출 확대 역시 국내 수요가 부진하면서, 낮은 가격으로 수출 물량을 확대한 데 따른 것으로 분석된다. 요컨대, 지난해에 이어 계속해서 민간부문이 위축된 상태에서 국유 부문이 중국 경제의 성장을 떠받치고 있다.

    이러한 경기둔화에 대응하기 위해 중국 정부는 하반기 들어서 연달아 경기부양 정책을 발표했다. 9월 24일에는 중국 인민은행을 비롯한 주요 금융부처 기자간담회에서 통화정책을 완화하고 부동산 시장과 주식시장 부양을 위한 정책 계획을 발표했다. 먼저 은행 지급준비율을 50bp 인하(10월에 25bp 추가 인하)하고 단기 정책금리인 7일물 역레포 금리도 1.7%에서 1.5%로 인하해 완화적 통화정책 기조를 이어갔다. 또한 부동산 대출우대금리를 50bp 인하하고 지방 국유기업의 주택 매입 대출 지원을 확대했다. 그리고 자격을 갖춘 증권사·펀드·보험사가 자산을 담보로 인민은행에서 국채나 중앙은행 어음과 같은 유동성 자산을 확보해 주식 보유를 확대할 수 있도록 하는 5천억 위안 규모의 스왑 프로그램(SFISF)을 개시했다.

    이어 10월 8일과 12일에는 발전개혁위원회가 내년도 예산을 2천억 위안 조기 할당하여 올해 10월 말까지 ‘양중’(兩重, 국가 중대 전략과 안전·안보 관련 중점 분야) 건설 프로젝트와 정부 투자 계획 실행을 촉진하겠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경기부양 정책을 발표했으며, 재정부 역시 국채 발행을 대폭 늘려 지방정부 부채를 감축하고 부동산 시장을 안정화하겠다고 발표했다. 이후 11월 8일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는 지방정부 부채한도를 6조 위안 확대하고 4조 위안의 지방정부 특수채를 발행해 음성부채를 양성화하는 데 지원하겠다고 결정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중국 정부가 이번 하반기에 발표한 경기부양 정책은 이전 시기와 달리 직접적인 대규모 재정투여보다는, 완화적인 통화정책과 정부 투자 확대를 통해 간접적으로 수요를 촉진하는 한편 지방정부 부채를 관리하는 안정화 정책에 가깝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는 전체 세입의 약 20%를 차지하는 토지매각수입이 3년 연속 크게 줄면서 대규모 확장적 재정정책을 펼칠 여력이 줄어든 가운데, 향후 경기부양을 위해서라도 지방정부의 재정건전성과 부채위기를 관리하는 것이 우선시되어야 한다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를 위해 국채를 대규모로 발행하겠다고 밝힌 만큼, 중국 경제는 계속해서 부채에 의존하며 중앙정부로 부담을 집중하는 경로로 나아갈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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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집중통일영도 체제와 국가자본주의 강화

    지난해 경제전망 글에서 정리한 것처럼, 최근 중국 경제가 마주하고 있는 성장 둔화는 세계 금융위기 이후 국유 부문과 부동산 부문을 중심으로 부채에 의존하는 경제성장이 한계에 다다른 데서 기인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가운데 중국은 국가자본주의를 더욱 강화하고 경제 전반에 대한 당의 통제와 관리를 심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으로 보인다. 먼저 2022년 중국공산당 20차 당대회와 2023년 양회(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와 전국인민대표대회)를 거쳐 시진핑 1인 지도체제를 확고히 했다. 아울러 올해 7월 중국공산당 제20기 중앙위원회 3차 전체회의(20기 3중전회)에서 시진핑 3기 지도부의 국정 운영 방향과 경제정책 방향을 제시했다.

    중국공산당은 개혁·개방 이후 10년 주기로 3중전회에서 장기 정책방향을 담은 「결정」을 발표했는데, 이번 3중전회에서는 「중공중앙의 진일보한 전면적 개혁 심화 및 중국식 현대화 추진에 관한 결정」을 발표했다. 대내적으로는 부동산 부문 침체로 인한 지방정부 부채위기와 내수 부진에 대응하고 대외적으로는 미중 전략적 경쟁 심화에 대처하기 위해, 국가자본주의를 더욱 강화하고 경제 전반에 대한 당의 통제와 관리를 심화하겠다는 것이 그 요지였다. 이를 시진핑 집권 1기인 2013년 18기 3중전회의 「결정」과 비교해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이번 「결정」에서는 2035년까지 높은 수준의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를 전면적으로 구축하겠다는 기본 목표 아래 △ 새로운 질적 생산력 제고 △ 국유자본 집중 강화 △ 공급망과 안보 강화 △ 부동산 개혁 △ 당의 집중통일영도 강화를 강조한 것이 특징이다.

    먼저, 시진핑 주석이 직접 강조한 ‘새로운 질적 생산력’은 8대 전략산업인 차세대 정보기술, 인공지능, 항공우주, 신에너지, 신소재, 첨단장비, 바이오의약 및 양자기술에 국가자원과 정부투자를 집중하고 이를 지역별로 특화하겠다는 것이 요지다. 아울러 이러한 전략적 신흥산업과 국가·경제안보의 핵심 분야에 대한 국유자본의 집중을 강조했다. 이는 국유자본이 통제하는 영역을 자연독점 산업으로 국한했던 2013년 18기 3중전회와 비교할 때, 국가전략에서 국유자본의 중요성을 더욱 증대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국유자본 중심의 산업고도화를 통해, 중국이 취약한 반도체와 산업 소프트웨어 부문의 공급망 안전성과 경제안보를 강화하며 미국과의 전략적 경쟁 심화에 대응하려는 것이다.

    한편, 이번 「결정」에서 부동산 개혁을 거시경제나 금융개혁의 영역이 아니라 민생 부분의 사회보장제도 개혁 영역에서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즉, 주택 과잉 공급과 주택 수요의 구조적 축소를 감안해, 이전과 같이 부동산 개발투자에 지원하기보다는, 정부가 적극적으로 시중 주택을 매입하여 보장성 임대주택으로 활용하는 새로운 부동산 발전 방식을 마련하겠다는 것이다. 아울러 부동산 부문 침체로 두드러진 지방정부의 부채위기를 관리하기 위해, 부동산세와 도시토지사용세 입법화를 추진하고 국세인 소비세 징수권한을 지방정부로 이관해 지방정부의 세입을 늘리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개혁 과정에서 당 중앙의 결정이 모든 지역과 부서에서 효과적으로 시행되도록 중앙의 집중통일영도를 강조했다. 지난 2022년 1중전회에서 당 헌장에 추가된 ‘집중통일영도’는 기존 중국공산당의 집단지도체제를 대체하여 시진핑 총서기를 중심으로 하는 1인 지도체제를 의미함과 동시에, 국가 전반에 대한 당의 직접적 관리와 통제 강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중국공산당은 지난해 당내에 중앙과학기술위원회를 신설해 기존에 국무원 산하의 과학기술부가 수행하던 과학기술정책을 통솔하도록 했다. 요컨대, 성장동력 소진과 미국과의 전략적 경쟁 심화를 마주한 중국은, 국가자본주의와 당 중심의 통치를 오히려 더욱 강화하는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다.
     

    3) 미국의 탈동조화와 중국의 위험억제

    중국이 당과 시진핑 중심의 집중통일영도와 국가자본주의를 강화하는 가운데, 미국은 강경한 대중국정책을 공약한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향후 미중관계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에 대한 관심이 높다. 지난 가을호 글 「더욱 강해져서 돌아온 트럼프 경제정책의 위험성」에서 살펴본 것처럼, 트럼프 대선 캠프는 중국에 대해 바이든 행정부의 ‘위험억제’(de-risking)를 넘어서 더 강도 높은 단절을 추구하는 ‘전략적 탈동조화’(strategic decoupling)를 위한 경제정책과 무역정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중국으로부터의 필수품 수입을 단계적으로 축소하고, 안보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이중용도기술 분야에서 모든 협력과 교류를 중단하며, 중국에 대한 최혜국대우(항구적 정상무역관계)를 폐지하고 고율의 관세를 부과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경제정책과 마찬가지로, 트럼프 2기 행정부의 대중국정책 역시 그 속도와 강도가 얼마나 될지 현재로서 확언하긴 어렵지만, 동맹국 간 공조나 다자적 규칙 기반 질서가 아닌 일방적이고 양자적인 방식으로 미국과 중국 간의 경제적 상호작용을 줄이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은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방향은 관세 부과, 투자 제한, 중국 기업에 대한 제재 강화라는 방식으로 추진될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최근 트럼프 당선인은 중국에서 멕시코를 거쳐 미국으로 유입되는 펜타닐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모든 중국산 상품에 10%p의 추가 관세를 부과하는 조치를 취임 첫날부터 시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런데 이러한 트럼프 2기 행정부의 대중국정책은 2010년대 중반부터 공화당과 민주당 양당의 초당적 합의로 이어진 중국과의 전략적 경쟁을 심화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로부터 ‘이탈’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본래 전략적 경쟁은 좁은 의미에서 중국을 견제하고 미국의 현실적 이익을 증대한다는 측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중국이 국가자본주의와 권위주의 체제를 강화하며 국제질서를 교란하려는 흐름에 대응하여 자유주의적 다자간 국제질서를 재편한다는 측면도 있다. 

    그런 점에서 바이든 행정부는 트럼프 행정부의 대중국 관세 조치와 투자 제한을 심화하면서도 무역·노동·환경·디지털 분야에서 다자적인 규칙 기반의 질서를 재구축하고자 했다. 그런데 트럼프 캠프와 최근 공화당의 대중국정책에서는 후자의 문제의식을 전혀 찾아볼 수 없으며, 오히려 미국 우선주의를 고수하며 스스로 규칙 기반 세계질서를 무너뜨리려 한다.

    그렇다면 중국은 트럼프 행정부의 대중국정책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중국은 기본적으로 트럼프 행정부 정책의 속도와 강도에 따라 대응할 것으로 보인다. 먼저 트럼프 1기 행정부 시기에 벌어진 무역 분쟁처럼, 미국의 관세 부과에 맞대응하여 관세를 부과하거나, 미국 기업에 대한 비관세 장벽을 강화하거나, 위안화 환율을 절하하는 보복 조처를 할 수 있다. 다만, 스위스 투자은행 UBS의 중국 수석 경제학자 왕타오는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 대담에서, 이번에는 중국이 곧바로 보복관세나 환율 절하로 강력히 대응하기보다는, 내수를 증대하고 수출을 다변화하는 전략을 더욱 강화하는 방향으로 대응할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한다. 

    그에 따르면, 이는 중국이 여전히 세계경제와의 통합을 유지하는 것이 자국의 이익에 부합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실제로 중국은 대내적으로 내수를 키우고 대외적으로 세계경제와의 통합을 강화하면서도 미국 경제에 대한 의존도와 위험을 축소하는 ‘쌍순환’ 전략을 트럼프 1기 행정부의 등장과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며 2020년대 주요 전략으로 본격화했는데, 트럼프 2기 행정부의 등장으로 이를 더욱 가속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이러한 중국의 대응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가 중국의 미 국채 투자 잔액 감소다. 중국의 미 국채 투자 잔액은 올해 6월 약 7천8백억 달러로, 3년 전인 2021년과 비교할 때 26.5% 감소했다. 이에 따라 중국의 전체 외환보유액 중 미 국채가 차지하는 비중도 2021년 31.7%에서 역대 최저 수준인 22.6%로 하락했다. 

    여기에는 경제적 요인과 정치적 요인이 함께 작용했다. 경제적으로는, 중국이 2010년대부터 외환보유 다변화 정책을 추진하며 외환보유액 중 달러화 비중을 2010년 65%에서 2024년 52%로, 점진적으로 축소했다. 그런 가운데 2015년 대규모 자본유출 시기와 최근 3년간 환율 절하 압력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미 국채 매도가 두드러졌다. 정치적으로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것에 대응해 미국이 러시아에 전방위적인 금융제재를 시행하는 것을 보고, 중국에서는 미 국채 보유가 중국의 경제안보를 위협할 수 있다는 경계감이 고조되었다. 미중갈등이 지속되면서 중국의 미 국채 보유 축소 역시 점진적으로 이어질 전망인데, 미중관계에 대한 중국식 위험억제 전략의 일환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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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브레튼우즈 체제 80년과 브릭스의 미래

     

    1) 전후 국제질서의 위기와 브릭스의 부상

    2020년대 세계경제와 국제질서는 어떻게 변하고 있고,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무성하다.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가 당선된 것과 함께, 브레튼우즈 체제 80주년이자 브릭스가 외연적 확장을 시도한 첫해인 올해에는 미국 헤게모니 하에 구성된 전후 국제질서가 해체되는 것인지, 브릭스가 주도하는 다극질서가 대안으로 떠오르는 것인지와 같은 논의가 주목받았다. 

    브레튼우즈 체제는 1944년 미국의 달러를 기축통화로 하는 고정환율제를 중심으로 재건된 국제통화체제를 말한다. 브레튼우즈 체제는 이렇게 재형성한 국제통화체제를 위협하는 각국의 자의적 통화가치 변동과 보호무역주의를 방지하기 위해, 참여국이 경제 규모와 무역 규모에 비례해 출연금을 내고 국제수지 문제가 발생했을 때 자금을 지원하는 국제통화기금(IMF)과 경제성장을 지원하는 다자개발은행인 세계은행(WB)을 설립하고, 규칙에 기반을 둔 자유무역 질서를 확립하고자 향후 세계무역기구(WTO)로 발전하는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GATT)을 맺었다. 1973년 미국이 금 태환을 정지하면서 고정환율제가 변동환율제로 전환되었지만, 탈냉전 이후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가 확대되면서 달러를 기축통화로 하는 자유무역과 금융질서는 큰 틀에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세계 금융위기 이후 2020년대 들어 미중 전략적 경쟁이 본격화하는 가운데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며 국제질서에서 이탈하면서, 탈냉전 이후 신자유주의가 내세웠던 규칙 기반의 다자간 질서와 공동지배가 분절화되고 불안정해지는 경향이 심화하고 있다. 또한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한 경제위기와 이어진 세계적 고물가·고금리 상황에서 선진국과 이른바 글로벌 사우스로 지칭되는 개발도상국 사이의 격차가 확대되는 가운데, 각국이 보호무역주의를 강화하면서 전후 국제질서와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의 한계와 모순이 두드러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 사회운동 일각에서는 다자주의를 내세우며 외연을 확장하기 시작한 브릭스가 전후 국제질서와 미국 헤게모니를 대체하는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주장한다. 세계 인구의 약 44%와 세계 명목 GDP의 26%를 차지하는 브릭스 회원국이 미국의 달러 패권과 국제통화체제를 비판하며 진정으로 평등과 호혜에 기반한 주권국가 간의 새로운 세계질서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논지다. 

    그러나 브릭스가 대안적 세계질서를 구축할 수 있는지 또는 적어도 여러 국가가 주도권을 나눠갖는 다극세계의 한 축으로 발전할 수 있는지를 평가하려면, 브릭스가 달러를 대체하는 국제통화체제를 구축하는지, 그러한 국제통화체제를 재생산하는 무역질서와 금융질서를 어떻게 구축하는지를 따져보아야 한다. 각국 사이의 상품·서비스, 자본, 노동의 이동과 교환을 완전히 단절할 것이 아니라면, 어떤 형태와 원리로 국가 간 체계를 형성할 것인지에 대한 구상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브릭스는 어떤 원리와 구상을 제시하고 있는지를 최근 브릭스 정상회의의 주요 논의 내용을 살펴보며 파악해보자.
     

    2) 16차 브릭스 정상회의와 카잔 선언

    올해 10월 러시아 카잔에서 개최된 16차 브릭스 정상회의 주제는 ‘공정한 글로벌 개발·안보를 위한 다자주의 강화’였고, 9개 회원국은 △ 더 정의롭고 민주적인 세계질서를 위한 다자주의 강화 △ 세계 및 지역의 안정과 안보를 위한 협력 강화 △ 정의로운 세계 발전을 위한 경제·금융 협력 증진 △ 사회·경제 발전을 위한 인적교류 확대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카잔 선언을 채택했다.

    카잔 선언에서 세계경제 또는 국제질서에 관련된 핵심은 다음 두 가지라고 할 수 있다. 첫째, 다자주의를 지지하며 신흥 개발도상국의 대표성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유엔과 브레튼우즈 체제를 개혁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그러면서 일방적이고 국제법에 반하는 경제제재와 2차 제재를 해제할 것을 촉구했는데, 이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와 중국의 불공정 무역행위와 신장위구르 탄압에 대한 미국과 서방의 제재를 겨냥한 것이다. 

    둘째, 브릭스 회원국 간의 경제와 금융 협력을 증진하자고 선언했다. 경제협력에서는 천연자원과 식량 주요 생산국이 모인 브릭스 내에 별도의 거래 플랫폼을 구축하자는 제안이 담겼다. 금융 부문에서는 포용적이고 공정한 국제금융제도가 필요하다면서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에 대당하는 신개발은행(NDB)을 새로운 브릭스 투자 플랫폼으로서 발전시키자는 제안과 브릭스 국가 간 자국통화 결제 시스템 구축을 추진하자는 제안이 담겼다. 

    종합해보면, 현재 시점에서 브릭스는 달러를 대체하는 대안적 국제통화제도나 금융체계를 구축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이번 브릭스 정상회의에서 의장국인 러시아가 미국의 달러 패권을 비판하며 브릭스 단일통화나 암호화폐 사용을 추진할 것이라는 예측도 있었지만, 카잔 선언에 그러한 내용은 담기지 않았다. 브릭스가 세계 금융위기 직후인 2011년 3차 정상회의에서 ‘탈달러’를 선언하며 여신·공여협정을 체결해 브릭스 간에 돈을 빌려줄 때 달러가 아닌 각국 통화를 사용하기로 합의한 이후 13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자발적이고 구속력 없는 브릭스 국경 간 자국 통화 결제 시스템을 구축해 보자는 정도의 제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이는 브릭스가 유럽연합과 같은 화폐동맹을 구축한다거나 나아가 대안적 국제통화제도를 추구한다기보다는, 미국과 서방의 금융제재를 회피하거나 달러를 우회할 수 있는 결제 수단을 모색하는 데 집중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무역 역시, 새로운 무역질서를 구축한다거나, 관세동맹을 추진해 브릭스만의 경제블록을 형성하고 있다고 평가하기 어렵다. 오히려 브릭스 회원국인 브라질과 인도를 비롯해 올해 브릭스 파트너국으로 참여한 튀르키예·태국·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베트남 등은 최근 중국에 대한 무역장벽을 강화하는 조치를 추진하고 있다. 

    예를 들어, 브라질은 지난해 9월 중국산 전기차 면세 혜택을 종료하고 3년에 걸쳐 관세를 35%까지 인상하기로 한 데 이어 올해 4월에는 중국산 저가 철강 수입품에 대한 관세를 1년간 기존 10%대에서 25%로 인상하기로 했다. 인도는 지난해 9월과 올해 1월 각각 중국산 철강과 알루미늄 합금 로드 휠에 대한 반덤핑 관세 부과를 5년 연장했다. 튀르키예는 지난해 중국산 전기자동차에 40%의 추가 관세를 부과한 데 이어, 올해 6월에는 이를 모든 중국산 자동차에 확대 적용했다. 태국은 올해 7월 전자상거래를 통한 중국산 저가 수입품 유입을 저지하기 위해 1500밧 이하 수입품에 7% 부가가치세를 부과한 데 이어, 8월에는 중국산 합금 열연코일에 대해 30.91%의 반덤핑 관세를 부과했다. 이 외에 말레이시아와 베트남은 중국산 철강 일부 품목에 대한 반덤핑 조사에 착수했고, 인도네시아는 중국산 수입 직물에 최대 200%의 관세를 부과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이는 앞서 살펴보았듯 중국이 내수가 부진하고 미국에 대한 수출의존도를 줄이는 과정에서 신흥국으로 저가의 수출 물량이 쏠리는 것에 대한 대응이다. 결국 브릭스 역시 회원국 간의 자유무역을 확대하거나 블록 경제를 형성하기보다는, 오히려 중국에 대한 무역장벽을 강화하며 세계적인 보호무역주의의 확산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것이다. 

    정의로운 발전을 내세우며 글로벌 사우스를 포용하겠다는 브릭스의 구상 역시 미래가 불투명하다. 개발도상국의 부채위기가 심각한 가운데 브릭스 국가의 출연금으로 세운 신개발은행이 비교적 주목받고 있지만, 브릭스 전체 경제 규모의 절반을 차지하는 중국이 경제성장의 한계를 마주한 상황에서, 브릭스가 각국의 부채위기를 해결하며 경제성장을 이루는 지속가능한 발전을 주도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크다. 오히려 중국의 일대일로 정책에서 드러난 중국식 ‘부채의 덫’ 문제, 즉 상환 능력이 부족한 개발도상국에 대규모 투자자금을 지원하고 이를 갚지 못하면 자원이나 시설 운영권을 가져가는 문제가 반복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이렇게 볼 때, 브릭스 회원국 간의 경제와 금융 협력이 갖는 실제적 의미는,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미국과 서방의 전방위적 제재를 받는 러시아가 이를 우회하거나 회피할 수 있는 길을 미국과 서방에 비판적인 신흥국과 함께 모색해 보려는 것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브릭스의 등장과 외연 확장은 분명히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의 한계와 모순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러나 브릭스의 중심인 러시아가 전후 국제질서를 파괴하는 데 앞장서고 중국이 이를 사실상 묵인하는 오늘날 국제정세를 고려하면, 브릭스가 이념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대안세계화 내지는 대안적 세계질서에 가까운 미래를 보여줄 것인지에 대해 부정적인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5. 결론

     
    2020년대 세계경제에 큰 충격을 준 코로나19 팬데믹과 그에 이은 세계적 인플레이션은 지난해를 거쳐 올해까지 다소 진정되는 모양새다. 그러나 장기저성장이 지속되는 가운데 끈적한 인플레이션과 부채위기가 앞으로 세계경제에 명확하지만 해법은 뚜렷하지 않은 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여기에 더해, 2025년에는 우크라이나·팔레스타인 전쟁을 비롯해 빈발하고 있는 분쟁과 각국 중앙은행의 정책 전환에 따른 금융시장 변동성이 세계경제를 위협하는 추가적인 압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 부르주아 경제학은 유일한 대안으로 재정적자를 줄이고 부채를 관리하며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구조개혁을 추진해야 할 때라고 역설하지만, 개발도상국뿐만 아니라 양대 경제인 미국 경제와 중국 경제 모두 그러한 개혁에 성공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이렇게 세계경제가 마주한 위협은 뚜렷한 가운데, 내년 1월로 다가온 트럼프 대통령의 복귀는 미국경제를 비롯한 세계경제에 거대한 불확실성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트럼프가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구호 아래 추진할 관세정책과 감세정책의 결합은, 아직은 그 수준과 속도가 어느 정도일지는 불확실하지만, 미국경제의 인플레이션 압력과 부채위기를 가중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은 분명하다. 게다가 트럼프 행정부가 연방준비제도이사회의 통화정책에 직간접적인 개입을 시도할 경우, 불확실성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질 수 있다. 

    나아가, 트럼프와 트럼프주의자가 제시하는 미국의 대외경제정책으로 인해 길게는 2차 세계전쟁 이후, 짧게는 1990년대 탈냉전과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의 시대에 미국이 주도했던 규칙 기반 다자적 질서가 최종적으로 후퇴할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된다. 금융세계화는 지속되지만 기존 국제질서에 대한 러시아의 교란과 중국의 도전이 이어지는 가운데, 이제 미국이 먼저 기존 국제질서로부터 퇴각하거나 오히려 교란하면서, 국제공조를 통한 관리와 조정의 여지가 더욱 축소하고 경계에서의 분쟁과 혼란이 증대하리라는 것이다. 중국이 권위주의와 국가자본주의를 강화하는 가운데, 트럼프 행정부가 중국과의 ‘전략적 경쟁’을 넘어 전략적 탈동조화를 추구하고 다자적 질서 수립이 아닌 일방적이고 불확실성이 높은 거래에 몰두한다면, 세계는 미국과 중국이라는 두 대국이 ‘공공악’(public bads)을 제공하는 ‘G 마이너스 2’의 시대로 진입하게 될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관리 없는 금융세계화와 불안전성 심화의 시대를 곧바로 미국 헤게모니를 대체하는 대안적 세계가 도래하는 시대라고 여기기 어렵다는 것이다. 사회운동 일각에서는 브릭스가 주도하는 다극질서가 미국이 주도하는 일극질서의 대안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현재 단계에서 브릭스는 현실적으로 새로운 국제 통화·금융 질서나 무역 질서를 구축할 의지나 역량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올해 카잔 정상회의에서 논의된 브릭스 회원국 간의 경제와 금융 협력은 미국과 서방의 제재와 달러 결제를 우회하거나 회피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 보려는 정도일 따름이다. 

    게다가, 우크라이나 침공에서 명확하게 드러나듯 러시아가 주권과 영토의 완결성을 내세우며 전후 국제질서를 파괴하는 데 앞장서고 중국이 이를 사실상 묵인하는 가운데, 이들이 주도하는 브릭스가 그리는 다극질서라는 미래가 과연 진정으로 평등과 호혜에 기반한 대안적 세계질서일지 면밀히 따져봐야 한다. 오랫동안 사회진보연대는 사회운동이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를 비판하면서도, ‘반세계화’가 아니라 국제적 노동기준 형성이나 금융거래과세와 같은 요구를 매개로 노동자운동의 사회적 역량을 강화하는 ‘대안세계화’ 운동을 지향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사회운동이 오늘날 국제정세에서 대안세계를 모색하고자 한다면, 그 첫걸음은 세계경제의 구조적 위기와 불확실성이 교차하는 상황에서 트럼프주의와 다극질서가 제기하는 위협을 직시하는 것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
     
     
     

  • 2024-09-06

    트럼프는 어떻게 민주주의를 위협하는가

    원한의 정치와 우파식 행동주의, 헌정 파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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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한의 정치와 우파식 행동주의, 헌정 파괴


    미국 대선이 두 달 남았다. 글을 쓰는 시점에서 해리스 후보가 트럼프를 근소하게 앞선다는 관측이 많다. (8월 30일 기준 뉴욕타임스의 여론조사에서 해리스와 트럼프의 지지율은 49% 대 45%인데 다른 기관의 수치도 대부분 이와 유사하다.) 물론 아직 시간이 꽤 남았기에 누가 당선될지 예측할 수는 없으나,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트럼프가 당선되든 안 되든 골칫거리가 되리라는 점이다.

    트럼프가 당선될 시 발생할 문제는 이후 임지섭의
    「더욱 강해져서 돌아온 트럼프 경제정책의 위험성」과 김진영의 「미국 공화당의 변화와 트럼프의 귀환이 열 ‘미국 없는 세계’」에서 다룰 것이다. 그가 낙선한다면, 2021년에 국회의사당 점거 사태를 일으켰던 것처럼 또다시 대선 결과에 불복할 가능성이 크다. 트럼프는 올해 이미 여러 번 대선에 관한 음모론을 제기했다. 가령 자신에 우호적인 소셜미디어인 트루스소셜(Truth Social)에서, 그는 민주당이 불법 이민자를 이용해 선거를 왜곡하고 있다거나, 정부가 선거에 간섭하고 있다는 주장을 지지자에게 설파해왔다. “[민주당이] 수백만 명의 불법 이민자를 범람시키고 … 우편 투표를 합법화하며, 서명 검증과 시민권 증명 요구사항을 없애도록 주(州) 투표법을 변경하려 한다”, “법무부와 FBI가 민주당의 2024년 대선 캠페인을 운영하고 있다”, “[자신이 기소된 사건의] 파니 윌리스 검사는 … 2024년 대통령 선거에 간섭하는 음모를 꾸몄다”와 같이 말이다.

    트럼프가 이외에도 결함이 많은 인물이라는 점은 잘 알려져 있다. (예를 들어, 그는 거짓말을 너무 많이 해서, 이를 기록하는 작업이 존재할 정도이다.) 처음 후보로 나오는 것도 아니고, 대통령을 이미 한 번 했으며, 그 와중에 의회에서 탄핵 소추를 두 번이나 당했고, 재선에 실패했으며, 지금도 여러 재판에 걸려 있는 이런 인물이 세 번 연속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됐다는 현실은 의아하다. 이런 결함에도 불구하고 트럼프에 대한 지지가 여전히 강하게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2016년에 일본 아사히신문의 미국 특파원 가나리 류이치는 트럼프 돌풍을 취재하며 ‘어째서 트럼프인가?’라는 문제에 답하고자 했다. 8년이 지난 지금, 어째서 트럼프주의가 일시적 현상에 그치지 않고 지금까지 꾸준히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글은 두 가지 요인에 주목한다. 먼저는 아래로부터의 트럼프주의 운동이다. 글은 2016년 대선을 계기로 출현한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 이하 MAGA로 줄임) 운동의 참여자가 누구인지, 그리고 특히 러스트벨트의 노동자를 중심으로 이들이 어떤 불만을 품고 있는지, 왜 트럼프를 지지하는지 살핀다. 나아가 트럼프주의 운동이 그러한 불만을 조직하는 방식을 검토하며 트럼프 지지자들의 정신세계를 설명하고, 그런 토대 위에서 미국의 정치적 양극화가 극심해졌음을 확인할 것이다. 두 번째 요인은 트럼프주의가 일으킨 미국 정치제도 차원의 변화다. 특히 트럼프 행정부 시기가 중요하다. 이때 공화당이 트럼프주의 정당으로 변모했고, 대통령 트럼프는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를 장악하려 했다. 한편 트럼프 개인을 넘어 트럼프주의자 지식인 집단의 세력화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변화는 트럼프주의의 영향력이 확산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글은 마지막으로, 이런 현실의 심각성을 인식하며 생각해볼 지점들을 제시할 것이다.
     
     

    1. 이른바 ‘개탄스러운 자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트럼프가 처음 정치무대에 등장했던 2015~16년부터 되짚어보자. 이때 최초의 트럼프 지지자들이 ‘난 개탄스러워’(I’m deplorable)라는 구호를 내세우며 일어섰고,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운동이 폭발했다. 이 구호는 2016년 대선 당시 민주당 후보 힐러리 클린턴의 발언으로부터 나왔다. 그녀는 9월 9일 뉴욕 맨해튼에서 열린 자금 모금 파티에서 트럼프 지지자 중 절반은 “개탄스러운 자들의 집단”(basket of deplorables)이고 “인종차별주의자, 성차별주의자, 동성애혐오자, 외국인혐오자, 이슬람혐오자”라고 발언했다. ‘deplorable’은 ‘개탄스럽다, 한심하다, 비참하다’라는 뜻이다. 클린턴의 발언에 트럼프 지지자들은 분노하며 결속했고, ‘[그래] 난 개탄스러워’라는 구호가 크게 유행했다.
     
    가령 전직 병원노동자 여성 샌디 앨버레즈는 이렇게 말했다. “일해도 일해도 월급이 오르지 않는 삶이 ‘개탄스럽다’는 것쯤은 우리 자신이 제일 잘 알아요! 20년 넘게 워싱턴 정계에 있는 힐러리한테만큼은 듣고 싶지 않아. 왜냐하면 힐러리한테는 노동자의 삶에 일부 책임이 있잖아요?” 사실 클린턴의 발언은 정체성을 기준으로 한 차별을 비판했다는 점에서 문화전쟁(cultural war)의 측면이 있었지만, 많은 트럼프 지지자는 이를 특권층이 서민을 깔보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사진1%]
     

    1) 트럼프 돌풍의 주역은 백인 노동자계급?

    트럼프를 당선시킨 MAGA 운동의 주역이 누구인가에 관하여, 주요 언론은 2016년 대선 출구조사 자료를 분석하며 ‘백인 노동자계급’(working-class whites)의 역할에 주목했다. ‘러스트벨트’(Rust Belt, 쇠락한 공업지역)라 불리는 북동부·중서부의 경합주(swing state, 선거 때마다 지지하는 정당 후보가 바뀌는 주)에서 전통적으로 민주당을 지지해왔던 그 집단이 트럼프 쪽으로 전향함으로써 ‘이변’을 만들어 냈다는 분석이다. 

    다만 당시 출구조사 결과를 두고 ‘백인 노동자계급’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옳지 않다는 지적이 있다. 응답자의 연령, 성별, 인종, 소득, 학력은 조사됐지만, 직업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저소득이 곧 노동자임을 뜻하진 않는다.) 어쨌든 이 변수들 중 소득, 인종, 학력을 기준으로 2004년부터 2016년까지 대선 출구조사 자료를 대조하면 아래와 같다.
     
    [%=사진2%]

    소득별로 보면, 2016년에도 과거 대선들과 마찬가지로 하층에서는 민주당 지지율, 상층에서는 공화당 지지율이 더 높았다. 다만 12년 대비 16년에서 하층에서 공화당 지지율 상승, 반대로 상층에서 민주당 지지율 상승이 돋보인다. 인종별로 보면, 전통적으로 백인과 이외 인종 간 지지정당 차이가 유지됐으나, 12년 대비 16년에 모든 인종에서 비슷하게 공화당 지지율이 증가했다는 점에서, 인종이 지지율 변동의 중요한 요인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2012년에서 2016년 사이의 지지율 변화의 정도를 기준으로 했을 때, 가장 중요한 변수는 백인 내에서 교육수준 차이였다. 2012년과 비교했을 때, 대학 학위가 없는 백인의 공화당 지지율이 치솟았던 반면, 대학 학위가 있는 백인의 민주당 지지율이 상승해 공화당 지지율에 근접했다. 

    정리하면, 2012년과 비교했을 때 2016년에 민주당에서 공화당 지지로 이동한 주요 집단은 소득수준이 낮은 집단과 대학 학위가 없는 백인 집단이었다. 반대로 소득수준이 높은 집단과 대학 학위가 있는 백인 집단에서는 2012년과 비교해 2016년에 민주당 지지율이 상승했다. 양당의 전통적 지지기반이 2016년 대선을 계기로 변화한 것이다.
     

    2) 러스트벨트 노동자들의 목소리

    출구조사 자료로는 이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들인지 깊이 추적할 수는 없다. 서두에서 소개한 가나리 류이치는 러스트벨트에서 민주당으로부터 트럼프 지지로 전향한 이들을 취재했다.

    이들은 주로 대도시가 아닌 지방의, 은퇴한 고령 노동자층과 실직하거나 상대적으로 임금이 낮은 일자리로 몰린 청년·중년 노동차층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가나리는 이들을 ‘몰락하는 중류계급’이라 표현했는데, 몇 명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먼저 오랫동안 노동조합원으로 활동하며 줄곧 민주당을 지지했고 당 지구위원도 역임한, 전직 제철소 노동자 조셉 슈로딘(2016년 당시 62세)의 이야기다. 그는 러스트벨트와 같은 지역이 겪은 일자리 변화를 설명한다. 

    “이 주변의 블루칼라는 다들 민주당을 지지했었는데, 미국은 자유무역에서 연패하고 있고 제조업도 멕시코로 나가버렸어. 여기에 남아 있는 건 월마트와 K마트로, 딴 나라의 제품을 파는 일뿐이지. 나는 현역 시절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일급으로 200달러(약 22만 4천원)는 받았어. 근데 지금 서비스업 종사자는 기껏해야 시급으로 12달러(약 1만 3천 원)를 받지. 그 돈으로 젊은이가 생활할 수 있을 리 없잖아? … 대학을 졸업할 때 이미 10만 달러(약 1억 1천만 원)의 빚을 지고 있는데, 만족스러운 일자리조차 찾을 수 없다니, 어떻게 된 건지! 난 고등학교 졸업 전부터 돈을 벌었는데. … 이제 정당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어. 미국을 강력하게 재건하기 위해서는 트럼프 같은 사업가가 필요해.”

    다음은 청년 여성 데이나 카즈맥(당시 38세)의 이야기다. 그녀는 어머니가 점장으로 일하던 식당에 취직해 함께 일했다. 

    “2012년 10월에 제가 일하던 가게가 폐점 위기에 빠졌어요. 트럭 교통량이 격감한 게 이유였어요. 제가 일하기 시작했던 1990년대부터 이미 제철소가 차례로 폐쇄되면서 손님도 조금씩 줄기 시작했어요. 16년간이나 근무했던 식당이 문을 닫으면서 엄마랑 같이 동시에 실업자가 됐어요. … 근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고등학교 때 친구의 40%가 이미 마을을 떠났더라고요. 이 직업 저 직업을 전전하는 애도 많았어요. … 여기서 젊은이가 밝은 미래를 그리는 건 어려운 일이에요. 겨우 남아 있는 제철소에서 일자리를 구한다면 좋겠지만 그것 외에 일자리라고는 음식점하고, 소매점하고, 병원뿐이니깐요. … 그래서 지금도 카페하고 바에서 평일 주말 할 것 없이 일하고 있는 거에요. 임금이 싸니까 아무래도 장시간 노동을 할 수밖에 없죠. 흔히 말하는 워킹푸어(working poor)에요.” 

    가나리는 지방의 청년·중년층 사이에 확산하는 마약 문제의 심각성도 지적한다. 미국 내 다른 인종 및 연령층은 의료 발전의 영향으로 사망률이 낮아지고 있는 데 반해, 예외적으로 미국 백인 남성(45~54세)의 사망률만 높아지고 있다는 연구 결과를 언급하면서 말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고졸 이하 중년 백인의 사망률이 눈에 띄게 상승했는데, 원인은 질병이 아닌 자살과 약물 남용이었다. 앞서 데이나 씨의 남동생도 그 사례다. 그는 2008년에 제철소가 폐쇄되면서 실직한 후 4년 뒤 33살 나이에 헤로인 중독으로 사망했다. 실의에 빠져있었던 데이나를 다시 일으킨 것은 트럼프의 연설이었다. 

    “솔직히 말해 동생이 죽기 전까지는 정치에 관심이 전혀 없었어요. … 투표조차 해본 적이 없어요. 그랬던 제가 트럼프를 응원하는 데 나선 거예요.”

    펜스 공장의 노동자 로니 리카도나(당시 38세)는 이주민 가정 3세대로 트럼프의 인종차별적 발언에 거부감을 느낀다. 게다가 항공관제사로 근무하던 아버지가 레이건 정권 때 해고당한 후 앞으로 공화당을 찍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런 그도 트럼프를 보며 생각이 바뀌었다. 

    “내가 근무하는 펜스 공장은 전 세계에서 쇠파이프랑 철관을 수입해. 놀랍지 않아? 예전에 이 일대는 세계 유수의 철 생산지였었는데 지금은 인도, 중국, 이탈리아에서 수입을 한다니까. 이 도시는 지역 경제가 붕괴한 ‘쇠락한 도시’야. … 여기에서 꼼짝도 할 수가 없어. 꼼짝도 못 한 채 성장 가능성이 없는 일을 하고 있어. … [공화당을 찍지 않겠다고 맹세했었지만] 지금의 생활, 그리고 도시를 생각하면 이번에는 트럼프를 찍어도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그는 오바마하고는 정반대로 품위가 없어. 하지만 생각하는 바를 솔직하게 말하지. … 그 녀석은 상대가 권위 있는 사람이라도 기죽지 않고 맞받아치는 카우보이야. 엘리트가 지배하는 워싱턴을 부수기 위해서는 그 정도는 되는 꼴통이 필요해.”

    고등학교 졸업 후 자동자 관련 공장 12곳을 옮기며 일했고, 최근 근무했던 자동차 부품 공장이 폐쇄되며 해고된 레트 로(당시 51세)는 이렇게 말했다. 

    “난 별다른 큰 걸 바라는 게 아냐. 성실하게 일하면 평범하게 살 수 있던 예전의 미국으로 회복시켜주길 바랄 뿐이지. … [기업들은] 미국 노동자를 생각하지 않게 됐어. 주주 이익의 최대화를 위해 노동자를 버리고 아무렇지 않게 해외로 이전해. 그리고 그런 기업이 대통령 선거 후보에게 거액의 헌금을 갖다 바치지. 그 돈을 받는 정치인에게 당당히 맞설 수 있는 건 트럼프뿐이야.”

    본래 미국은 성실하게 일하면 평범하게 살 수 있었으나,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는 생각은 반대로 누군가는 특권을 누리고 있다는 생각, ‘공평하지 않다’라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가령 전직 보안관대리 데이비드 에이(당시 52세)는 이렇게 말했다. 

    “대략 10~15년 전부터 민주당은 노동자한테서 긁어모은 돈을, 사실은 일할 수 있는데 일하려고 하지 않는 놈들에게 나눠주는 정당으로 바뀌었어. 돈을 노동자 계급에게 지불케 하는 정당이 된 거야. … 불법 이민자와 일하지 않는 놈들의 생활비를 우리가 지불하고 있다는 건 사실 다들 진작부터 눈치채고 있었어. 문제라는 것은 알았지만 우리에게 여유가 있어서 생활에 별다른 영향이 없었을 때는 그냥 방치했었지. 그런데 수입이 눈에 띄게 줄어들기 시작했고, 더는 예전 같은 생활을 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됐을 때 많은 중류계급이 ‘더는 남의 생활비까진 지불하지 못하겠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어. … ‘일을 공평하게 처리하라!’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한계에 달하려는 시점에 트럼프가 등장한 거야. 우리가 생각하던 것을 한 번에 대통령 선거의 중심 테마로 부상시켜주었어. 그것만으로도 트럼프에게 감사해.”

    뒤의 3절에서 공화당 유권자의 이념적 구성을 보겠지만, 러스트벨트의 트럼프 지지자들의 목소리가 공화당 지지자 전부의 견해는 아니다. 허나 ‘열심히 일하면 잘 살 수 있다’라는 순리가 이제는 지나간 유물이 되어버렸다는 허무감과 세계화, 국제무역과 금융, 엘리트, 불법 이민자, 마약 등에 대한 반감이 트럼프 열풍과 MAGA 운동의 근원에 있던 것은 사실이다. 이런 불만과 분노 위에서, 노동자들은 기존 엘리트 정치인과는 다른 트럼프를 지지하게 됐다.
     

    3) 소결

    이 절은 8년 전 상황을 묘사하나, 2016년 이래 지금까지 트럼프 지지층의 인적 구성이 크게 변하지 않았다는 분석이 많다. 2020년 대선을 계기로 이탈자가 조금 있었으나 8년 전의 지지층이 거의 동일하게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트럼프 행정부 이후에도 여전히 그를 지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실제로 트럼프 행정부에 대한 평가는 처참하며, 이 탓에 공화당은 2018년 하원의원 선거와 2020년 대선에서 패배했다. 지금까지 본 불만의 목소리를 트럼프가 현실에서 해결하지 못했음에도 그 지지가 지속한 이유를 알려면, 지난 8년 간 트럼프 지지층의 질적 변화, 즉 트럼프주의가 점점 더 강력해진 과정을 살펴봐야 한다.
     
     

    2. 트럼프 행정부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트럼프주의는 어떻게 강해졌는가?

     
    이에 답하려면, 트럼프 지지자들이 여러 실천을 통해 재생산하는 트럼프주의의 논리 내지는 “감정적-도덕적 틀”(emotional-moral framework)을 살펴봐야 한다. 트럼프는 이 틀을 16년 대선 캠페인에서, 나아가 재임 중에 수많은 집회를 통해 발전시켰다. 그 감정적-도덕적 틀로써 트럼프는 자신의 지지층을 단지 현실의 특정 문제에 각기 불만을 가진 이들로부터, ‘복수심에 불타는 피해자’로 변모시키고 동질화하는 데 성공했다. 당선 이후 트럼프 역시 지지자들의 복지에 책임을 지는 지위에 있다는 점에서 대선 캠페인 당시의 동원력이 지속하지 않을 가능성이 지적됐으나, 트럼프는 매우 이례적인 방식으로 대통령직을 수행하면서 실패의 책임을 되려 자신에 대한 강력한 지지로 전환했다. 

    재임 당시 트럼프 대통령은 대통령직을 수행하기보다는 ‘운동을 주재하는’ 활동가처럼 행동했다. “다른 대통령들은 선거 캠페인 차량에서 백악관으로 넘어오면, 국가를 통합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트럼프는 워싱턴에 처음 도착한 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정치적 싸움을 즐기는 듯 했다. 그는 뉴스 미디어부터 자신의 행정부 내부의 구성원들, 양당의 선출된 공직자들, 외국 국가 원수에 이르기까지 식별된 적들의 긴 목록을 비판하는 데 대통령의 메가폰을 사용했다. 대통령으로서 보낸 2만6천 개가 넘는 트윗은 그의 생각을 광범위한 이슈에 대해 솔직하고 실시간으로 제공했다.” 

    트럼프는 재임 기간 4년 동안 집회에 158회 참석했는데, 이는 역대 대통령 중 이례적으로 높은 수치다. 158회는 취임 후 집회 10회, 2018년 중간선거 집회 46회, 2020년 이전의 선거운동 집회 5회, 공화당 예비선거운동 관련 28회, 2020년 선거운동 집회 66회, 선거 후 집회 3회로 구성됐다. 주로 트럼프 자신이나 공화당과 관련된 각종 단체가 연 집회에 연사로 참여하는 식이었다.

    트럼프가 참석한 수많은 집회, 나아가 MAGA 운동의 목적은 무엇이었는가? 혹자는 “대통령으로서 트럼프의 과제가 ‘지지자들을 끊임없이 분노 상태에 두는 것’”이라 설명했다. 어떻게 이를 실현할 수 있었는가? 먼저 그런 집회와 운동 속에서 발전한 ‘감정적-도덕적 틀’을 설명한 후, 지지자들이 이를 확대재생산하는 방식을 살펴보겠다. 핵심적으로, 그 운동은 1960~70년대 흑인운동이나 여성운동으로부터 “역사적으로 소외된 집단에 대한 인권 수사학”, 일회적인 분노를 영구화하여 대중을 주체화하는 방법론을 차용했다.  
     

    1) 트럼프주의의 ‘감정적-도덕적 틀’

    트럼프가 활용하는 수사법(rhetoric)의 ‘감정적-도덕적 틀’은 다음의 네 단계로 정리할 수 있다.

    ① 청중이 각자 느끼는 특정한 고통, 부정적 감정을 사회화하며 공적인 것으로 전환한다. “우리의 도심지에서 빈곤에 갇힌 어머니와 아이들, 나라 곳곳에 무덤처럼 흩어져 있는 녹슨 공장들, 젊고 아름다운 학생들을 지식 없이 내버려 두는 교육 시스템, 너무나 많은 생명을 앗아가고 우리의 실현되지 않은 잠재력을 훔쳐 간 범죄, 갱단, 마약. 이 미국의 참상은 지금 여기서 끝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의 국민(nation)이고, 그들의 고통은 우리의 고통입니다. 그들의 꿈은 우리의 꿈이며, 그들의 성공은 우리의 성공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의 마음, 하나의 집, 하나의 영광스러운 운명을 공유합니다.” 트럼프는 자신의 지지자 중 가장 취약한 누군가의 사례를 언급하면서도, 그 구체적 고통과 분노를 보다 일반적인 개념으로 전환시켜, 가령 자신이 실직한 광부가 아닐지라도 그 감정에 강렬히 이입할 수 있게 한다. 이는 지지자들 사이의 여러 차이(계층 등)를 삭제하여 ‘우리’를 형성하는 효과가 있다.

    타인의 상처에 수반되는 분노를 공유하는 것이 ‘국민’이라 지칭되는 정치적 공동체의 토대가 된다. 즉 여기서 ‘국민’이란 “공유된 트라우마에 의해 통합된 집단”을 뜻한다. 트럼프는 미국을 “버려진 공장과 부식된 기반시설의 잔해로 뒤덮인 묵시론적 황무지 … 범죄조직, 불법 이민자, 외국 경쟁자들로 이루어진 외부세력에 사로잡혀 모욕당하는 곳”으로 묘사하며, 국민을 “불만을 품고, 원한을 가지며, 불공정하게 대우받고, 무력하며, 경제적 불운과 통제할 수 없는 세계적 요인 탓에 모욕당했다고 생각하는 특정한 문화적 인물”로 좁혀서 규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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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② 공유된 고통과 분노를 도덕적이며 정당한 것으로 추켜올린다. 거꾸로 말해, 이를 느끼지 못하고 ‘상처받은 이’를 비판하는 인물은 부도덕적이고 악한 자다. 이렇게 감정의 공유를 통해 일회적 고통과 분노를 도덕적 선악 관념으로 잇는 것을 “피해자 의식”이라 부를 수 있다. ‘국민’은 훌륭하며 덕성이 있기에, 악한 자들로부터 공격받는다. 가령 2018년에 트럼프가 연방대법관으로 지명한 브렛 캐버노가 성폭력 혐의로 고발당하자, 집회에서 트럼프는 그를 고발한 여성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이 여자는 완벽한 인간, 훌륭한 아버지, 훌륭한 남편에게 가장 끔찍한 혐의를 제기했습니다. … 한 남자의 삶이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그의 아내도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그의 딸들, 아름답고 놀라운 젊은 아이들이... 그들은 사람들을 파괴하고 싶어 합니다. 그들은 정말로 악한 사람들입니다.” 상술했듯 자기 지지자의 특정한 고통을 공유하면서도 구체적 상황으로부터 분리하여 도덕적인 것(‘훌륭함’)으로 전환시킨 후, 이를 공격하는 행위를 악(惡)으로 판단하며 “집단적 선(善)을 전도”시킨다.

    ③ 악한 자들에 대한 복수의 권리와 투쟁을 주장한다. 즉 도덕성에 기초하여 폭력을 정당화한다. 가령 트럼프는 이민 문제를 논하며, 자신의 행정부가 범죄조직에 맞서 투쟁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우리는 하나하나씩 불법 갱단원, 마약 딜러, 도둑, 강도, 범죄자, 살인자들을 찾아내고 있습니다. … 마약으로 우리 공동체를 오염시키고 무고한 젊은이들, 이 아름다운 젊은이들을 노리는 포식자들과 범죄자 외국인들은 우리나라 어디에서도 안전한 피난처를 찾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피에 굶주린 범죄조직을 해체하고 파괴하고 있습니다. … 우리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방식으로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거칠게 하고 있습니다.” 트럼프는 자신과 지지자에게 가해진 상처에 대한 보복을 요구하며, 나아가 피해를 입은 사람의 복수를 올바른 행위로 승격시킨다. 사소한 모욕과 상처라도 응징적 폭력으로 맞서 싸워야 하는 것이다.

    ④ 그러나 ‘적’은 너무나 거대하고 추상적이다. 트럼프가 열거하는 외부의 적은 다양하며 정체를 알 수 없다. “오랫동안 세계를 지배해 온 부패한 세계화주의자 통치계급”, “엘리트”, “좌익적 혐오자”(‘정치적 올바름’을 말하는 자), “딥스테이트 급진주의자”(딥스테이트란 미국 정부 깊숙히 사익을 추구하는 지배계급이 숨어 있다는 뜻에서 나온 말이다), “기득권층의 동료”, “가짜뉴스의 동맹”, “MS-13”(갱단 이름), “이민자”, “중국”, “이슬람 테러리스트”, “이들에게 인질로 잡혀 있는 민주당” 등 말이다. 결국은 민주당이 그들의 대표자이나, 그 배후에 일관되지 않은 온갖 집단이 암약하고 있다. 이런 생각은 두 가지 결론으로 이어진다.

    첫째, 적들의 행위는 음모적이며 비민주적이다. “유권자들에 반(反)하여 자기들만의 비밀 의제를 추진하는, 선출되지 않은 딥스테이트 요원들이야말로 민주주의에 대한 진정한 위협이다.” “그들은 모든 공정성, 품위, 그리고 정당한 절차의 개념을 위반한다.” 그렇기에 상술했듯, 이들에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맞설 수 없으며 폭력적 투쟁이 필요하다.

    둘째, 그럼에도 적이 은밀하고 강력하기에, ‘국민’의 투쟁은 영원히 승리할 수 없다. “복수, 증오, 악의, 질투는 종종 명확한 대상에 대해 형성되며, 특정 이념적으로 유도된 행동에 의해 충족될 수 있다.” 따라서 “해결불가능한 적”을 상상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장벽을 제시함으로써, 감정적 긴장상태를 유지한다. “악을 치유하길 원하지 않는다. 악은 단지 비판의 구실일 뿐이다.” 힐러리 클린턴을 정말로 감옥에 넣는다면 ‘그녀를 감옥에 보내라!’라고 더는 외칠 수 없게 될 것이다. 트럼프는 집회에서 청중의 분노를 일정 정도 해소하지만, 다시금 더욱 거대한 적에게 겪은 패배와 굴욕의 경험을 공유하며 만족감을 사라지게 하고, 새로운 분노의 저수지를 구축한다. ①로 돌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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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럼프는 이렇게 “정권을 잡았음에도 지지자들의 ‘정치적 유배’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대통령직 첫 2년 동안 입법, 행정, 사법부 모두에서 보수파가 다수였음에도, 트럼프는 일관되게 자신과 지지자들을 연약하고 불안정한 소수자로 묘사했다.”

    이러한 감정적-도덕적 틀 위에서 트럼프는 자신이야말로 ‘국민’의 고통과 분노를 가장 잘 공감하며 대변하여 투쟁할 수 있는 인물이라 주장했다. “매일 아침 저는 이 나라 전역에서 제가 만난 무시당하고, 소외되고, 버려진 사람들을 위해 일하기로 결심합니다. 나는 해고된 공장 노동자들과 끔찍하고 불공정한 무역 협정에 짓밟힌 공동체들을 방문했습니다. 이들은 우리나라의 잊혀진 남성과 여성들입니다. 열심히 일하지만 더 이상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당신들의 목소리입니다!” 

    트럼프는 자신이 음모적 지배계급에 포섭되지 않은, 자수성가한 부자이며 독립된 권력을 갖고 있기에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바로 이 탓에 자신은 적들의 최우선 표적이 되었다. “이민 문제에 관해서 … 여러분이 ‘그거 정말 끔찍하다’라고 생각하더라도, 누가 여러분의 말을 들어주겠습니까? 하지만 그들[적]이 저를 대하는 방식에 비하면, 그건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공격받습니다. 저보다 더 많이 공격받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저는 우리나라를 위해 가장 위대한 일을 할 수 있지만, 언론은 저를 나쁘게 보도할 것입니다.” 자신이 ‘우리’를 대표하기에 공격받으며, 자신에 대한 공격은 곧 ‘우리’에 대한 공격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④에서 봤듯, 트럼프는 적의 공격이 너무 거대하며 자신의 힘이 모자라기에 자신에게 더 큰 지지와 권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는 대선 승리 후 “저는 비열한 힐러리 클린턴을 상대할 특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제가 비열한 클린턴을 이겼습니다”라며 만족감을 드러냈지만, 그녀의 범죄를 조사하라는 요구가 무시당하는 상황을 언급하며 “그녀가 어떻게 무사히 빠져나가고 있는지를 보십시오”라고 허탈감을 표현했다. 대통령의 권한에 대한 견제가 복수에 해가 된다고 지적하면서 말이다. “가장 슬픈 것은, 내가 미국의 대통령이기 때문에 법무부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나는 FBI에 관여해서는 안 됩니다. …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다는 점이 정말 답답합니다.” 요컨대 법치와 권력분립의 원리 대신, 적들에게 복수할 수단으로서 대통령 권력의 무제한적 강화를 요구한다.
     

    2) MAGA 운동에서 ‘피해자 의식’의 훈련

    대중적인 MAGA 운동 역시 이런 ‘감정적-도덕적 틀’을 따른다. 나아가 운동의 참여자들은 의도적으로 ‘적’의 부정적 반응, 비난을 유도함으로써 “피해자 의식”을 “훈련”하기까지 한다. 가령 아프리카계 미국인 역사문화박물관과 같은 곳에서 MAGA 상징물을 착용하고 과시함으로써 ‘적’에게 공격당하려 하는 것이다. 이런 연습은 ‘정치적 올바름’의 방식을 모방하는 양상을 띤다.

    MAGA 운동의 참여자는 전통적인 인권운동의 행동방식(가령 불복종운동)을 차용하여 자신에 대한 비난을 ‘피해자 의식’으로 전환한다. 예를 들어, 캘리포니아 클로비스노스 고등학교는 학생이 MAGA 상징물을 착용하지 못하게 했는데, MAGA 운동가들은 학교의 이런 조치가 학생의 기본권 침해라고 주장한다. “아이들은 빨간 MAGA 모자를 쓸 용기를 가졌기 때문에 표적이 되었다.” “좌파는 당신이 원하는 무엇이든 입을 권리를 빼앗으려 한다.” 심지어 여성운동이 해왔던 말을 빌리기도 한다. “[‘정치적 올바름’을 말하는] 당신이 강간을 당한 여성에게 ‘저런 치마를 입고 있으면 당연히 그럴 만하지’라는 말을 한다면 어떨까 상상해보라. 이는 말도 안 되는 것이다.” MAGA 상징물을 착용한 사람들이 상점과 식당에서 서비스를 거부당한 사례에 대해, 과거 흑인운동이 흑인이 겪는 일상적 차별을 증언했던 방식을 모방하기도 한다. “나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무례하게 굴지 않았다. 그저 친구들과 커피를 즐기며 앉아 있었다. … 그런데 직원들이 테이블을 둘러싸고 손가락질하며, [MAGA] 모자가 벗겨질 정도로 머리를 세게 때리겠다고 위협했다.” “만약 오바마의 ‘HOPE’ 티셔츠를 입은 사람을 향한 반발이 있었다면, 진보주의자들이 뭐라고 말했을지 상상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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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럼프 지지자는 반복적으로 스스로를 위험에 노출시키며, 그 과정에서 자신이 진보주의자로부터 굴욕당한 경험을 기록하고 공유하며 주체화한다. 특히 2020년 대선 이후 이런 경향은 더욱 심해졌고, 국회의사당 점거 사태에서 기이하게 드러났다. 가령 공화당의 폴 고사르 하원의원은 의사당 하원 회의실로 침입하려다가 경찰에 의해 치명상을 입은 애쉴리 배빗을 “처형당했다”라고 표현했다. 다른 한 시위자는 소셜미디어에 널리 유포된 비디오에서 자신이 최루탄을 맞았다고 호소하며 어떻게 이런 ‘탄압’이 일어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분노했다. 

    2016년 대선에서 트럼프 행정부에 이르는 시기에 미투 운동과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 운동이 잇따라 일어났음을 상기하자. 이들과 대립하고 그 행동방식을 모방하며 MAGA 운동이 발전했다. 이렇게 2010년대 후반 ‘문화전쟁’이 격화하는 가운데 미국 유권자의 정치적 양극화가 매우 심해졌다.
     

    3) 정치적 양극화와 엇갈린 트럼프 행정부 평가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2016년 대선 캠페인과 대통령 재임 기간을 거치며 트럼프는 지난 30년 동안의 어느 대통령보다 공화당과 민주당을 갈라놓았다. 그의 재임 기간에 걸쳐 평균적으로 공화당원의 86%가 트럼프의 직무 수행을 긍정했으나, 민주당원에서 그 수치는 6%에 불과했다. 이는 여론조사가 생긴 이후 어느 대통령보다도 가장 넓은 정당 간 격차였다. 참고로 트럼프 1기 행정부에 대한 전체 평가 여론은 다음과 같은데, 전반적으로 역대 정부보다 좋지 않았다. 코로나-19 사태 이전까지는 경제지표가 나쁘지 않았으나, 이후 실업률이 치솟았으며, 전체적인 평가 여론도 더욱 안 좋아졌다.

    공화당과 민주당은 트럼프 대통령의 직무 수행뿐만 아니라 그 개인에 대해서도 극심히 분열됐다. 2019년 설문 조사에서, 공화당원 중 적어도 4분의 3이 대통령의 발언이 때때로 또는 자주 희망적이거나, 즐겁거나, 정보를 제공하거나, 행복하거나, 자랑스럽게 느끼게 했다고 답했다. 반면, 민주당원은 더 큰 비율로 대통령의 발언이 때때로 또는 자주 그들을 우려하게 하거나, 지치게 하거나, 화나게 하거나, 모욕감을 주거나, 혼란스럽게 했다고 답했다.

    정치적 가치와 이슈에 대해서도 공화당원과 민주당원 간의 견해 차이가 크게 벌어졌다. 열 가지 주제에 관한 설문에서 공화당원과 민주당원 간 응답의 격차는 1994년에 15%였던 반면 2017년에는 36%로 벌어졌다. 특히 인종, 성별, 고등교육에 관한 견해가 그러했다. 가령 2015년에서 2017년 사이에 대학교가 미국의 상황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응답한 공화당원의 비율이 37%에서 58%로 상승한 반면, 민주당원의 약 70%는 긍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답했다. 트럼프 대통령 재임 기간에 공화당원과 민주당원이 동의한 몇 안 되는 사항 중 하나는 그들이 동일한 사실을 공유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2019년 조사에서 미국인의 73%가 공화당과 민주당 유권자가 정강·정책뿐 아니라 ‘기본적인 사실’에 대해서도 의견이 엇갈린다고 답했다. 그 원인은 가짜뉴스와 잘못된 정보인데, 2019년에 미국인의 절반은 이것이 미국의 심각한 문제라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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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히 정권에 위기를 가하고 지지율을 낮춘 코로나-19 사태에 관해 트럼프가 확산시킨 음모론이 2020년 대선에 큰 역할을 했다. 트럼프는 이른바 ‘큐어넌(QAnon) 음모론’을 지지하고 퍼뜨렸다. 이는 코로나-19가 전 세계적인 엘리트가 대중을 통제하고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고의로 만들어진 생물학적 무기라는 주장이다. 이 음모론의 지지자들은 특히 민주당과 같은 특정 정치세력이 바이러스를 통해 정부의 통제를 강화하고 경제를 재편하려는 음모를 꾸몄다고 믿었다. 그들은 코로나 백신에 대해서도 부정적 시각을 견지했다. 백신이 인간의 건강을 해치거나, 인구를 감시하고 통제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된다고 여기면서 말이다. 

    2020년 4월, 미국 성인의 64%가 팬데믹에 대한 날조된 뉴스와 정보를 최소한 어느 정도 보았다고 답했으며, 49%는 이러한 오보가 발병에 대한 ‘기본적인 사실’에 관해 큰 혼란을 야기했다고 답했다. 2020년 9월에 미국인의 거의 절반(47%)이 이른바 ‘큐어넌 음모론’에 대해 들어봤다고 답했으며, 이 47% 중 대다수는 트럼프가 그 음모론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답했다. 대선 직후 2020년 11월 중순에 실시된 설문조사에서, 성인 10명 중 6명이 날조된 뉴스와 정보가 선거에서 주요한 역할을 했다고 답했다.

    물론 음모론의 최고봉은 대선조작설이었다. 트럼프는 투표일 약 3개월 전인 2020년 8월에 “이 선거에서 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선거가 조작되는 경우뿐이다”라고 경고했다. 투표일 직후 그는 백악관에서 (밤늦게까지 투표 집계가 일반적임에도) 밤늦게 집계된 투표용지가 의심스럽다고 연설했다. “이것은 미국 대중에 대한 사기이다. … 우리는 이 선거에서 승리할 것이었다. 솔직히 말해, 우리는 선거에서 이겼다. … 모든 투표가 중단되어야 한다.” 선거인단이 바이든을 차기 대통령으로 공식 선출한 후에도 트럼프는 결과가 뒤집혀야 한다고 계속 주장했다. “이 가짜 선거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 공화당원들이여, 움직여라!” 결국 이에 호응한 트럼프 지지자들이 ‘선거 도둑질을 멈춰라!’(Stop the Steal)라는 구호를 외치며 국회의사당을 무단으로 점거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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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제는 이 초유의 사태에 관해서도 여론이 심히 갈렸다는 점이다. 설문조사에 따르면, 2021년 1월 즉 의사당 점거 사태 직후에 공화당 지지자의 46%는 트럼프가 그 사태에 책임이 ‘전혀 없다’고 답했으며, 34%는 ‘일부 있다’고 답했다. 반면 민주당 지지자의 81%는 트럼프가 그 사태에 책임이 ‘매우 많다’고 답했다. 특히 2020년 대선에서 실은 트럼프가 이겼다고 답한 사람일수록 점거 사태에 트럼프의 책임이 없다고 답하는 비중이 높았다. 대선에서 트럼프가 ‘확실히 승리했다’라고 답한 공화당원의 82%와 ‘아마도 승리했다’라고 답한 공화당원의 63%는 점거 사태에 관해 트럼프의 책임이 ‘전혀 없다’라고 답했다. 심지어 사태 후 거의 1년이 지난 2021년 말의 조사에서도 공화당원의 3분의 2는 바이든이 합법적으로 선출되었다고 믿지 않았다. 게다가 63%의 공화당원은 사태 당시 트럼프를 비판했던 공화당 정치인을 용납할 수 없다고 답했다. 증거가 부족함에도 트럼프 지지자들은 ‘선거가 도둑질당했고 트럼프가 승리했다’는 생각을 견지한 것이다. 
     

    4) 소결

    트럼프는 당선된 이후에도 대통령이라기보다는 ‘활동가’로 행동하며 대중운동을 조직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특히 2016년 이후 미투 운동이나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 운동과 MAGA 운동 간의 거대한 ‘문화전쟁’ 속에서 유권자의 정치적 양극화가 극심해졌다. 그 가운데서 MAGA 운동 초기의 지지자들을 변모시켜 트럼프주의적 주체를 형성해내려는 시도가 성공했다. 이러한 극단적 운동 위에서 현실이 어떻든 트럼프를 무조건 지지하는, 동질적인 강경 지지층이 나타났다. 하지만 아래로부터의 흐름만으로 ‘어째서 다시 트럼프인가?’라는 질문에 충분히 답할 수는 없다. 다른 한편으로 트럼프 행정부가 미국의 정치제도에 준 충격도 살펴봐야 한다.
     
     

    3. 트럼프는 공화당을 비롯한 정치제도를 어떻게 변화시켰는가?

     
    대통령 트럼프가 변화시킨 정치제도는 다시금 트럼프주의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요인이 됐다. 그중 먼저 레이건 이래의 공화당이 트럼프주의 정당으로 변모한 과정이 중요하다. 이는 상술한 아래로부터의 트럼프주의 대중운동과 이후 설명할 2016년부터의 정치제도 변화를 매개한다. 그다음 트럼프 행정부와 의회의 갈등, 트럼프 대통령의 행정부·사법부 장악 시도를 살펴봐야 한다. 마지막으로, 특히 2020년 대선 패배를 기점으로 트럼프주의를 표방하고 발전시키려는 정책집단이 어떻게 형성되고 세력화했는지 확인하겠다.
     

    1) 공화당의 트럼프주의 정당화

    정당과 그 지지자·당원 내지는 사회운동 간의 관계에서, 전자에 대한 후자의 영향력이 강화해온 데는 좀 더 긴 역사가 있다. (가령 정당을 보다 민주화하려는 취지에서 공개예비선거[open primary, 당원 자격 유무에 상관없이 투표할 수 있는 직접예비선거]가 도입된 것이 있겠다.) 지면상 그 역사를 모두 다룰 수는 없고, 2000년대 말에 출현한 티파티 운동이 공화당에 준 충격부터 살펴보겠다.

    오바마가 승리했던 2008년 대선을 계기로, 미국 유권자의 인종 구성 변화 추세상 백인의 지지에 의존하는 공화당이 서서히 소멸할 것이라는 관측이 확산했다. 공화당 지도부는 이에 대응하여 지지층을 다변화하려는 전략을 추구하려 했으나, 이 시도는 오바마 행정부가 들어선 직후 티파티 운동이 출현해 공화당원 사이에서 확산되며 무산됐다. 티파티 운동의 지향은 앞서 본 MAGA 운동과 약간 달랐다. 그 운동은 오바마 정부의 건강보험 개혁(오바마케어)에 맞서 작은 정부, 재정 건전성, 시장자유주의를 주창했다. 허나 엘리트 정치인보다는 당원 중심의 운동이면서 백인우월주의를 강조했다는 점에서 티파티 운동은 MAGA 운동의 선례였다. “21세기 초 공화당 정치인들은 선거 패배를 두려워했다. 그러나 많은 공화당 지지자는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을 잃을까봐 두려워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의 나라였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 나라 안에서 그들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였다.”

    티파티 운동은 당에 대한 당원과 사회운동의 영향력을 강화했고, 공화당의 지지기반을 좀 더 반동적이고 인민주의적 방향으로 이동시켰으며, 테드 크루즈 등 전통적인 정치인 육성의 길을 밟지 않은 새로운 당 지도자들이 출현시켰다. 이는 MAGA 운동과 트럼프가 공화당에 침투하기 위한 길을 닦았다. 트럼프가 공화당 후보로 지명된 후 티파티 운동과 지도자는 상당 부분 트럼프주의 쪽으로 흡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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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론 티파티 운동세력의 공화당 진입이 2016년에 트럼프가 공화당 대선 후보로 지명되기 위한 충분조건은 아니었다. 당시 민주당과 공화당을 대조해보면, 당 지도부의 분열도 중요한 요인이었다. 아래로부터의 운동이 강하더라도, 당의 고참 지도자들이 특정 후보를 일관되게 지지하면서 당원들을 이끌 수도 있었다. 가령 2016년에 민주당에서도 버니 샌더스 돌풍이 있었지만, 저명한 민주당 정치인들이 전부 힐러리를 지지함으로써 그 영향력을 약화시켰다. 반면 공화당 지도부의 경우, 처음에는 젭 부시를 밀려 했으나, 승리할 확신이 없는 가운데 일부가 마르코 루비오나 테드 크루즈를 지지하는 등 당원에게 주는 신호가 분산됐다. 이렇게 지도부가 분열한 가운데 공화당 역사상 가장 많은 17명이 경선 출마를 선언했고, 당 활동가들은 혼란에 빠졌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들의 선호대로 행동할 자율성이 높아졌다. 아래로부터의 MAGA 운동과 트럼프가 공화당으로 치고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상황 덕이었다.

    당선 이후 트럼프가 공화당과 상호작용한 방식은, 앞서 대통령직 수행에 대한 평가와 마찬가지로 매우 이례적이었다. 이전의 공화당 대통령들은 자기 정부에 대한 더 넓은 층의 지지를 창출하고자 당을 지배하려 하고 당에 자원을 투자하려 했다면, 트럼프는 자신의 지지기반을 더욱 강경한 방향으로 이끌고, 자신의 개인적 권력을 증대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당을 변모시켰다.

    먼저 트럼프는 ‘공포’를 통해 공화당원 및 의원들의 충성을 확보하고 반대파를 제거했다. 이전 당 지도자들은 설득이나 막후에서의 압박을 통해 자신을 따르게 했다면, 트럼프는 트위터라는 메가폰으로 MAGA 운동세력을 동원해 반대자들을 괴롭히는 데 집중했다. 민주당 상원의원 셰러드 브라운은 공화당 상원의원 동료들의 트럼프를 향한 충성심이 “두려움”에서 비롯했으며, 이 두려움은 충성스런 트럼프주의 활동가들로 이루어진 당 내외 네트워크의 (특히 온라인을 통한) ‘24시간 지원’에서 기인한다고 지적했다. “그들은 트럼프가 ‘무기력한 젭’이나 ‘거짓말쟁이 테드’와 같은 별명을 붙일까, 또는 자신의 불충성에 대해 트위터에 올릴까 두려워한다. 혹은 최악의 경우 트럼프가 공화당 예비선거에서 자신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벌이기 위해 자신의 주에 올까 걱정한다. 그들은 이렇게 고민한다. ‘폭스뉴스 진행자들이 나를 공격할까?’, ‘라디오 토크쇼 진행자들이 나를 공격할까?’, ‘트위터 트롤(troll)들이 나를 반대하는 여론을 조성할까?’ 내 동료들은 이 모든 일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물론 ‘채찍’만 사용한 게 아니라 자신에 충성하는 자들에게 ‘당근’도 주었다. 이를 위해 트럼프와 그의 팀은 수십 개 주의 당조직을 체계적으로 재편했다. 트럼프 백악관 정치국장 빌 스테피언과 백악관 공보국장 저스틴 클락이 이끈 그 팀은 전국을 돌며 트럼프가 선호하는 후보가 주 당위원장 선거에서 승리하도록 개입했다. 그 결과 2019년 말까지 트럼프 충성파가 42개 주에서 위원장에 임명됐다. 트럼프와 그 팀이 주 당위원장을 목표로 삼은 이유는 이들이 대통령 후보 재지명에서 열쇠를 쥐고 있기 때문이다. 2020년 대선을 앞두고, 트럼프 팀은 주 당조직에 전국대회에 보낼 대의원 배정 계획을 변경하도록 지시했으며, 37개 주와 지역의 당조직이 이를 따랐다. 또한, 주 당위원장은 주 당조직의 모금 활동을 조율하고 지출 우선순위를 결정하며 특정 캠페인에 유급 직원을 지원하는 데 결정권이 있다. 트럼프는 이들을 통해 자기 뜻대로 당내 진급 경로를 형성하고, 선출직 공직에 대한 접근을 조정하며, 후보자들 간 경쟁을 관리하고, 자신에게 헌신적인 지지자들만 출마하도록 보장하며, 이들만이 당의 서비스와 지원을 받도록 하였다.

    트럼프는 또한 상당한 자원을 당 활동가 육성에 투자했다. 2018년 선거에서 공화당이 하원을 잃은 후, 트럼프와 공화당 전국위원회는 공동 모금 활동으로 확보한 자금을 주 당위원회에 투입해 각종 선거를 지원하고 인력을 육성했다. 2019년 말까지 당은 2백만 명의 ‘자원봉사자 군대’와 이를 이끌 6만 명의 상급자를 훈련시키는 과정을 진행했다. 이 자원봉사자 군대는 풀뿌리 유권자 등록, 활동가 모집, 투표 독려 활동을 수행하며 트럼프의 지지층을 동원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트럼프 대통령은 공화당에 대한 전례 없는 지배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트럼프가 자부하듯 1기 행정부 시기에 트럼프와 공화당은 “완벽한 연결”을 유지했는데, 트럼프에 대한 공화당 유권자의 지지율은 2017년, 2018년, 2019년에 각각 83%, 87%, 89%를 기록했다. 그는 당을 철저히 사조직화하고, 자신을 정치적으로 홍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트럼프는 2020년 재선 캠페인에 밀접하게 결합하는 “단일하고 효율적인 당조직”을 창출했다. 이는 오바마 대통령이 2012년 재선 캠페인에서 민주당과 다소 독립적인 관계를 유지했던 것과 달랐다.

    물론 트럼프 이전의 공화당 대통령들도 자신의 충성파를 당의 요직에 배치하고, 당의 운영을 장악하며, 당이 자신의 의제를 옹호하도록 요구했던 것은 마찬가지다. 공화당은 20세기 후반 대부분 의회와 주 정부 및 유권자 사이에서 소수당이었으며, 아이젠하워, 닉슨, 포드, 레이건, 부시 부자(父子)까지 공화당 대통령은 모두 공화당보다 인기가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공화당을 대통령의 정치적 브랜드를 더 잘 반영할 수 있도록 재편하는 것은 당의 세력을 확대하는 전략이기도 했다. 

    트럼프와 이전 공화당 대통령의 가장 큰 차이점은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구축하는 전략 자체였다. 이전 공화당 대통령들이 당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했던 목적은, 자신의 정부에 대한 보다 넓은 층의 지지를 확보하고, 자신이 퇴임한 후에도 자신의 정치적 비전을 반영하고 유지할 수 있는 새로운 공화당 다수파를 구축하기 위함이었다. 그들은 공화당을 수평적으로 다양화하여 더 넓은 범위의 유권자들과 관계를 맺기 위해 공화당을 활용하고 당에 투자했다. 이런 전략은 대통령이 자신의 정책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능력은 강화하나, 당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할 위험성이 있다. 범위를 넓히는 전략은 필연적으로 당내에서 새로운 후보들을 출현시키며, 그 새로운 후보들이 다시 더 넓은 범위의 새로운 유권자 집단을 끌어들이는 과정에서 대통령의 당 지배력이 차츰 약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트럼프는 수직적으로 자신의 지지기반을 강화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지지기반을 확대하고자 할 때 동질적인 지지자들의 수를 늘리는 전략을 택했다는 것이다. 이런 목적에서 당내 반대파를 제거하고, 당 지도부를 자신의 충성파로 채우며, 당의 자원을 자신의 강경 지지층에 투자하고, 그들의 열정을 동원하는 순환을 만들어냈다는 점이 이전 공화당 대통령들과 트럼프가 다른 점이었다. 그는 선임자들의 외연 확장 전략을 기반 동원 전략으로 대체함으로써, 대통령과 정당 간의 전례 없는 일치성을 달성했다.

    트럼프의 이런 전략은 2020년 대선에서 확인할 수 있듯 재선을 달성하지 못했다. 트럼프는 민주당 지지자나 부동층을 끌어오는 것보다 자신의 지지층이 한 명도 빠짐없이 투표할 수 있도록 강력히 동원하는 방식을 고수했다. 유권자 간 정치적 양극화가 심해지는 가운데 이는 영리한 전략일 수 있으나, 2020년 대선에서 트럼프 1기 행정부에 실망한 공화당 지지자, 특히 대도시 지역의 고학력자 집단이 일부 민주당 쪽으로 이탈하면서 결국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다만 이를 단지 실패로만 볼 수는 없다. “전통적 기준 즉 대통령이 자신의 정책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능력의 측면에서 보자면 트럼프는 상당히 약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트럼프가 자신의 권위에 대한 더 근본적인 도전으로부터 보호받고 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트럼프의 당 건설 노력은 … 그의 권력 남용과 의심스러운 판단에 대한 방어막을 제공했다.” “강화된 지지기반과 당 조직, 그리고 잠재적 반대자들이 당 지도부로부터 추방된 상황에서, 당의 집단성은 대통령의 거의 모든 행동을 지지하는 응원단, 변호자, 비판 없는 지지자들의 통일된 전선을 형성한다. 이는 트럼프의 더 무모하고 위험한 충동(가령 폭력 선동, 선거 결과의 정당성에 대한 의문 제기, 정치적 반대자에 대한 조사와 처벌 위협 등)에 대한 당의 집단적 찬성을 제공한다. 달리 말해, … 그의 행동에 ‘민주적 정당성’의 외양을 부여한다. … [이는] 당파적 양극화를 악화시키고, 사람들이 트럼프의 행동을 오직 그런 [당파적] 관점에서만 보도록 부추겼으며, 그리하여 헌정 체계(constitutional system)의 약화를 초래했다.” 

    이는 2020년 대선 불복 사태에서 많은 공화당 하원의원이 트럼프의 선거 사기설을 지지했다는 점으로 확인할 수 있다. 앞서 살펴봤던 이 사태에 관한 공화당원의 태도에 더해, 공화당 의원의 다수도 적극적 지지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침묵함으로써 트럼프의 행동을 묵인했다.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이나 밋 롬니 상원의원은 민주적 과정과 선거 승자에 대한 존중을 촉구했음에도, 2020년 12월 11일까지 196명의 공화당 하원의원 중 126명이 선거 결과를 뒤집으려는 소송을 지지했다.
     

    2) 공화당원의 이념적 구성

    이러한 변모 과정을 거쳐 지금에 이른 공화당원의 이념적 구성을 살펴보자. 뉴욕타임스의 한 칼럼은 이를 다음의 6개 집단으로 분류했다.

    ① 온건파 기성세대(Moderate Establishment)
    당원의 14%. 학력이 높고 부유함. 낙태나 동성 결혼과 같은 사회적 이슈에 대해서는 온건하거나 심지어 진보적. 이민, 무역, 외교정책에 대해서는 레이건-부시의 견해 지지. 반(反)트럼프.

    ② 전통적 보수주의자(Traditional Conservatives)
    당원의 26%. 트럼프 이전 레이건-부시 시절 공화당의 핵심 지지층. 낙태나 동성 결혼에 반대하고, 친기업 및 세금 감면을 선호하는 구식의 경제적·사회적 보수주의자. 아래의 우파나 블루칼라 인민주의자와 달리, 레이건의 밝은 낙관주의를 어느 정도 유지함. 이 그룹의 32%만이 미국의 문제가 너무 심각하여 국가가 실패할 위험에 처해 있다고 답함. 친트럼프도 반트럼프도 아님.

    ③ 우파(Right Wing)
    당원의 26%. 상대적으로 나이가 많으며 노동자 계층임. 폭스뉴스와 뉴스맥스를 시청하고, 스스로를 ‘매우 보수적’이라 답하며, 복음주의자가 많은 비율을 차지. 미국이 재앙 직전에 있다고 믿음. 8년 전에 이 그룹은 티파티 지도자 크루즈와 트럼프 사이에서 나뉘어져 있었으나, 오늘날 대부분 트럼프를 중심으로 결집함.

    ④ 블루칼라 인민주의자(Blue Collar Populists)
    당원의 12%. 주로 러스트벨트 출신으로, 대학 학위가 없는 백인이 대부분. 우파와 비교하여 사회적 이슈에 관해서는 온건함. 다수가 낙태와 동성 결혼을 지지하며, 단지 18%만이 자신을 ‘매우 보수적’이라 답함. 그러나 무역 등 경제 문제에 관하여서는 인민주의 성향. 인종과 이민 문제에 대해서도 보수적 견해를 가짐. 우파와 마찬가지로 트럼프를 강력히 지지함.

    ⑤ 자유지상주의 보수주의자(Libertarian Conservatives)
    당원의 14%. 주로 서부와 중서부 출신의 보수주의자로 작은 정부와 고립주의 중시. 경제적 인민주의에 반대함. 사회적 이슈에 관해서는 온건함. 자유를 극단적으로 추구한다는 점에서 온건파 기성세대와 구분됨. 온건파 기성세대 다음으로 트럼프를 덜 지지함.

    ⑥ 신입 청년(Newcomers)
    당원의 8%. 젊고, 다양한 배경을 가짐. 이 그룹의 59%만이 백인. 경제적 비관주의가 강함. 거의 90%가 경제가 나쁘다고 답하며, 나라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답함. 전통적인 의미의 보수주의자는 아니지만, 민주당과 ‘깨어있는’(woke) 좌파에 대한 반감이 큼.

    이 6개 집단을 트럼프 지지율에 따라 나열하면, ③ 우파 > ④ 블루칼라 인민주의자 > ⑥ 신입 청년 = ② 전통적 보수주의자 > ⑤ 자유지상주의 보수주의자 > ① 온건파 기성세대 순이다. 좁게는 우파와 블루칼라 인민주의자의 연합(당원의 약 40%), 넓게는 신입 청년과 전통적 보수주의자까지 포함하는 연합(당원의 약 75%)이 트럼프의 지지층이라 할 수 있다. 레이건 이래 공화당의 전통적 지지기반에 트럼프를 매개로 진입한 새로운 집단은 ④ 블루칼라 인민주의자와 ⑥ 신입 청년이다. 이들의 유입되고 반대로 ① 온건파 기성세대가 공화당 지지를 점차 철회하면서, 1980년대부터 지속되어 온 공화당과 민주당의 구도가 변화했다고 평할 수 있다.

    두 집단 중 블루칼라 인민주의자에 관해서는 앞에서 살펴봤으므로, ‘신입 청년’에 관해 설명을 보충하겠다. 청년층 사이에서 공화당 지지가 확산한 데는 특히 트럼프의 등장과 당선을 계기로 대학가에서 ‘정치적 올바름’ 운동과 이에 반대하는 경향 간의 ‘문화전쟁’이 극단으로 치달은 상황이 있었다. 관련하여 최근 두각을 드러내고 있는 청년단체 ‘터닝포인트 USA’(Turning Point USA, 이하 TPUSA)의 사례를 살펴보자.

    이 단체는 2012년에 청년 활동가 찰리 커크(당시 19세)가 설립한 이래, 현재 미국 전역에 약 3,500개의 지부와 75만 명의 회원을 보유한 최대의 보수 성향 청년단체로 성장했다. TPUSA는 주로 대학생 및 젊은 세대를 대상으로 보수적 가치에 대한 지지를 확산하는 것을 목표로 하여, 각 고등학교와 대학교 내 모임을 운영하고, 학생 행동 서밋(Student Action Summit)과 같은 대규모 컨퍼런스를 개최하며, 소셜미디어 캠페인을 전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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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활동의 초점은 ‘정치적 올바름’ 비판과 MAGA 이념의 확산이다. 앞서 MAGA 운동에서 살펴봤듯, TPUSA도 캠퍼스에서 좌파적 이념을 가진 교수와 학생들에 의해 보수적 견해가 배척당하거나 억압당하는 사례를 강조하며, 이를 ‘표현의 자유’를 위협하는 ‘검열’이라 주장한다. 정치적 올바름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정작 자신들과 의견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관용을 베풀지 않는 이중 잣대를 가지고 있다고 비판하며, 특히 그들이 보수적 목소리를 억압하면서도 자신들은 보호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태도를 문제 삼는다. 소셜미디어에서 ‘예민한 자들에게 안전한 공간을!’(Safe Spaces Are For Snowflakes)과 같은 구호로 풍자하면서 말이다. (‘snowflake’는 ‘눈송이’라는 뜻인데, 사소한 행위나 말에 상처받고 불편해하는 ‘정치적 올바름’ 지지자를 유약하다고 비꼬는 용어로 쓰이고 있다.) TPUSA가 직접 만든 것은 아니더라도, 유튜브(Youtube)와 같은 동영상 플랫폼에서 육식을 비롯해 온갖 것들에 불편함을 호소하는 ‘사회주의자’를 풍자하는 영상이 인기를 끄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이다.

    TPUSA는 트럼프의 MAGA 이념, 특히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 정책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홍보해왔다. 찰리 커크 본인이 트럼프와 직접적인 교류가 있으며, 트럼프의 측근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트럼프도 TPUSA의 행사인 학생 행동 서밋에 연사로 여러 차례 참여하여 연설했다. 2020년 대선 때 TPUSA는 트럼프의 재선 캠페인에 적극 참여하며, 청년층의 트럼프 지지율을 높이기 위한 활동을 전개했다. 특히, TPUSA는 트럼프의 대선 결과에 의문을 제기하고, 선거 부정 의혹을 제기하는 데도 목소리를 높였다.
     

    3) 2024년 공화당 정강

    마지막으로 2016년 대선과 2024년 대선에서 공화당의 정강을 비교하며, 지난 8년에 걸쳐 공화당이 완전히 트럼프주의 정당으로 변모했음을 다시금 확인해보자. 2016년 공화당 정강은 여러 주제에 걸쳐 보수적 입장을 명확히 하며, 전통적인 가치와 경제적 자유, 국가 안보 강화를 강조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경제 및 규제
    세금 인하와 정부 규제 축소를 통한 경제 성장 촉진. 또한, 자유시장 경제와 개인의 경제적 자유를 중요시, 중소기업의 성장 지원 정책 제안.
    - 국가 안보
    강력한 군사력 유지와 테러리즘에 대한 단호한 대응. 국경 보안 강화와 이민 제도 개혁을 통한 불법 이민을 감축.
    - 건강보험    
    ‘오바마케어’(Affordable Care Act) 폐지, 대신 개인의 선택을 존중하는 자유로운 시장 기반의 대안 제시.
    - 사회적 이슈
    낙태 반대, 전통적인 결혼 제도(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합) 지지, 종교의 자유 보호와 같은 보수적 사회 가치 옹호.
    - 헌법적 가치
    수정헌법 제2조(총기 소지의 권리) 보호, 연방정부의 권한 제한, 주권(州權) 강조 등 헌법적 원칙을 존중.
    - 외교 정책
    미국의 주권(主權)과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외교 정책 추구, 나토(NATO)와 같은 동맹 강화. 한편, 중국, 이란, 러시아와의 전략적 경쟁에서 미국의 우위 주장.

    반면 2024년 미국 공화당의 정강은 MAGA 이념에 따라 미국의 핵심 가치와 강점을 복원하는 것을 강조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경제
    미국을 세계적인 에너지 생산국으로 만들고, 아웃소싱을 중단하며 미국 산업을 부흥시켜 제조업 강국으로 전환. 인플레이션 종식. 노동자를 위한 대규모 감세, 사회 보장 및 의료 보험을 삭감 반대. 모든 수입품에 관세 부과. 
    - 이민 및 국경 보안
    국경 장벽 완성, 불법 이민자에 대한 역사상 최대 규모의 추방 작전 시행, 이민자의 범죄 확산 방지, 외국의 마약 카르텔 해체, 갱단 폭력 분쇄, 폭력 범죄자 수감.
    - 국가 안보
    미국에서 생산한 군수품으로 미국 전역에 광범위한 미사일 방어 시스템 구축. 군의 강화와 현대화. 3차 세계대전 방지. 유럽과 중동의 평화 회복.
    - 사회 정책
    부적절한 인종적, 성적 혹은 정치적 내용을 강요하는 교육기관에 대한 연방 지원금 삭감. 대학에서 친(親)하마스 급진주의자 추방. 남성의 여성 스포츠 참여 금지.
    - 정부 개혁 및 투표법
    (트럼프에 대한 기소와 같이) 연방정부를 국민을 향한 무기로 삼는 일의 종식. 당일 투표, 유권자 신분증, 종이 투표, 시민권 증명으로 선거를 안전하게 보호.

    경제 측면을 보면, 2016년 정강에서 작은 정부를 강조했던 것에 비해, 2024년 정강에는 감세와 규제 완화가 있지만 ‘노동자를 위한’이라는 표현을 달거나, 사회보장지출 유지를 비슷하게 강조한다. (그런데 뒤의 임지섭의 글에서 설명하겠지만, ‘노동자를 위한’이라는 표현은 근거가 없다.) 미국 내 제조업 일자리 증가, 에너지 자체 생산, 관세 부과는 2024년 정강에 새로 등장한 부분이다. 

    한편 2016년에 비해 2024년 정강은 (불법이민의 감축을 넘어) 이민자를 향한 공격을 주창하며(특히 투표법 부분), 사회문화적 이슈에서도 (보수적 가치의 옹호를 넘어) ‘정치적 올바름’을 몰아내자며 ‘문화전쟁’의 측면을 부각한다.

    국방·외교 문제에서 2016년 정강이 미국의 이익을 우선하더라도 ‘외교’를 통해서 이를 추구했다면, 2024년에는 ‘3차 세계대전을 방지하고 유럽과 중동의 평화를 회복하겠다’는 추상적 문구 외에 현안에 관한 구체적 서술이 없고, 대신에 군수품의 국내 생산과 자국 방어를 강조한다. 

    마지막으로 2024년 정강은 트럼프의 선거 사기설이나 바이든 행정부가 트럼프를 공격한다는 주장을 반영했다. 종합해보면, 공화당 정강에서 트럼프주의의 색채가 훨씬 강해졌다고 할 수 있다.
     

    4) 의회와의 투쟁

    트럼프 행정부는 집권 기간 내내 의회와 충돌했다. 출범 당시에는 상하원 모두에서 공화당이 우세했으나, 트럼프 행정부는 법안 처리 과정에서 무능함을 보였고, 민주당은 물론 공화당 일각과도 다투었으며, 결국 협의보다는 협박과 충성 요구로 입법 과정을 변질시켰다.

    정권 초기 대표적 사례는 ‘오바마케어’의 폐지 시도였다. 그러나 2017년에 공화당의 주도로 하원이 발의한 미국건강보험법(AHCA)은 문제가 많았다.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의회예산국(CBO)은 이 법안이 법률로 제정될 경우 발생할 예상 피해액을 제시했고, 이를 두고 공화당 내 의견 불일치가 발생했다. 결국 하원은 법안을 최종 표결에 부치지 않기로 결정했다. 트럼프는 협상을 중단한 후 표결을 강행하려 했으나, 강압적 전술은 법안 통과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이후 공화당 의원 20명이 이탈했음에도, ‘오바마케어의 부분적 폐지’라 불린, 이전 법안의 수정된 형태가 하원을 통과했다. 그러나 공화당 상원의원 존 매케인이 반대 여론을 이끌며 이를 좌초시켰다. 

    정치경제학자 라인하르트는 공화당의 건강보험 개혁 시도를 “집단적 무지”라고 표현하며 이렇게 말했다. “‘아무도 건강보험이 이렇게 복잡할 줄 몰랐다’라는 트럼프의 발언은 1990년대 클린턴 건강보험 개혁 계획의 실패와 2010년 오바마케어의 어려운 탄생 이후에도 그가 이러한 사실을 몰랐던 유일한 사람임을 보여준다.” 물론 트럼프는 정치 신인으로서 미숙할 수 있으며, “미숙함은 정보에 입각한 일관된 정책을 추구하는 적극적인 노력으로 극복될 수 있다.” 그러나 트럼프에게서 “의회 의원들과의 협력, 세부 정책에 대한 관심 등 이러한 리더십 요소들은 결정적으로 결여되어 있었다.” 그는 입법 실패를 한편으로는 민주당의 방해 탓으로 돌리며 “그들 모두가 문명화된다면” 민주당과 협상하겠다고 발언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실패로부터 “우리는 충성에 관해 많은 것을 배웠다”라는 교훈을 도출하며, 공화당 내 배신자를 공격했다.

    2018년 중간선거에서 하원을 민주당에 뺏기기 전까지 트럼프는 정책을 주도할 기회가 충분히 있었으나, 그러한 무능함으로 성과를 내지 못했다. 거의 유일하게 통과시킨 ‘세금 감면 및 일자리 법안’(TCJA)의 경우 트럼프의 성과라기보다, 레이건 이래 공화당의 숙원이었기에 공화당 의원들이 단결하여 통과시킨 것에 가까웠다. 물론 여기서도 트럼프는 법안에 반대 투표를 한 유일한 공화당 상원의원 밥 코커를 공격하는 데 집중했다. “트럼프는 특유의 방식으로 정책 논쟁에 참여하지 않고 코커의 인격과 직업적 평판을 깎아내리는 데 집중하며, 그를 반복적으로 ‘작은 밥 코커’라고 부르고, ‘위대한 테네시 주에서 재선되지 못한 하찮은 상원의원 밥 코커가 이제는 감세와 싸울 것이라니 슬프다!’라고 트위터에 올렸다.” 이러한 압박에 밥 코커는 최종적으로는 찬성표를 던졌다.

    유례없이 길었던, 2019년의 행정부 셧다운 사태도 트럼프와 의회의 갈등에서 비롯했다. 트럼프는 국경 장벽 건설에 대한 의회의 자금 지원을 요청했으나, 민주당이 다수가 된 하원에서 거절당했다. 그러자 그는 2018년 12월 11일 슈머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와 곧 하원의장이 될 펠로시 의원에게 공개적으로 정부를 셧다운하겠다고 협박했다. 트럼프는 자기는 셧다운의 결과에 개의치 않으며, 의회가 말을 들을 때까지 셧다운을 수년간 지속할 무한한 인내심이 있다며 오기를 부렸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우리나라의 안보 때문에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할 수 있다”며 의회를 우회할 권한을 사용하겠다고 발언하기도 했다. 이런 태도는 의회에서 민주당과 공화당 간의 협상을 극도로 어렵게 만들었다. 사태가 장기간 지속하며 결국 공화당 의원들 가운데서도 우려가 커졌고, 공화당 지도부가 개입하여 셧다운을 끝냈다. 슈머는 이 사태에 대해 “우리는 짜증 부리는 식으로 통치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남겼다.

    가장 중요한 사건은 역시나 유례가 없는 두 번의 탄핵 소추였다. 2019년의 첫 번째 탄핵은 같은 해에 트럼프가 우크라이나 정부에 정치적 조사를 요청한 사건과 관련 있다. 당시 트럼프는 우크라이나 대통령 젤렌스키에게 전화하여, 자신의 정치적 경쟁자인 조 바이든과 그의 아들 헌터 바이든에 대한 조사를 요청했다. 이 과정에서 트럼프가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 원조를 이 조사에 대한 대가로 사용하려 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결국 그는 2019년 12월 18일 하원에서 두 가지 혐의로 탄핵 소추를 당했다. 첫째, 권력 남용. 트럼프는 외국 정부(우크라이나)로부터 정치적 이익을 얻고자 자신의 권한을 남용했다. 둘째, 의회 방해. 하원의 탄핵 조사 과정에서 증거 제출을 거부하고 증인 출석을 방해한 혐의가 있다. 공화당이 다수를 차지한 상원은 2020년 2월 5일에 이 탄핵을 심리하고, 첫 번째 혐의(권력 남용)에 대해 유죄 52대 무죄 48, 두 번째 혐의(의회 방해)에 대해 유죄 53대 무죄 47로 탄핵 무효 판결을 받았다. (상원에서 탄핵안이 가결되려면 3분의 2 이상이 찬성해야 한다.)

    두 번째 탄핵은 2021년 1월 6일 국회의사당 점거 사태와 관련 있다. 이로 인해 다수의 사상자와 물적 피해가 발생했다. 2021년 1월 13일, 트럼프는 하원에서 내란 선동 혐의로 탄핵되었다. 하원은 그가 대선 결과에 불복하고, 폭력을 조장함으로써 내란을 선동했다고 주장했다. 상원은 2021년 2월 13일에 탄핵 심판을 열었지만, 트럼프를 유죄로 판결하기 위한 3분의 2(67명)의 찬성을 얻지 못해 무죄로 판결했다. 57명의 상원의원이 유죄에 찬성했지만, 43명의 의원이 무죄에 투표하여 최종적으로 탄핵 무효가 선고되었다.

    두 번의 탄핵 시도에도 불구하고 트럼프 대통령은 상원에서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아 임기 중 파면되지 않았다. 허나 이 두 번의 탄핵은 미국 정치사에 중요한 사건으로 남았다.
     

    5) 행정부와 사법부 장악 시도

    의회를 지배하지 못한 트럼프는 행정부와 사법부를 장악하려고 시도했다. 행정부에 대해서는 2020년 대선 직전에 ‘스케줄F’ 행정명령(13957호)을 발동했다. 이는 최대 5만 명의 직업공무원을 정치적 임명직으로 교체하는 명령이다. 해당 공무원의 상시 해고를 가능하게 만들어, 트럼프의 국정기조에 반대하는 진보적 성향의 공무원들을 분류하여 충성파 인사들로 대체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명령은 임기 내 실행되지 못했고, 바이든 행정부는 이를 취소했다. (트럼프는 2024년 재집권 시 이 명령을 재발동하겠다고 공언했다. 최근 트럼프 캠프가 낸 ‘어젠다 47’에서 트럼프는 “국방부, 국무부, 국가안보산업체에 존재하는 전쟁광과 국제주의자들을 물리치고, 국가안보의 전 분야에 유능한 새로운 관료들을 임명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행정부를 장악하려는 시도도 실패했으나, 트럼프는 재임 기간에 사법부를 재편하는 데 성공했다. 단 한 번의 임기 동안 그는 연방대법원에 3명의 대법관을, 연방항소법원에 54명의 판사를, 연방지방법원에 174명의 판사를 임명했다. 트럼프의 사법부 장악에서 보수적 법률가단체 연방주의자협회(Federalist Society)와 당시 공화당 상원 원내대표 미치 맥코넬(Mitch McConnell)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트럼프는 2016년 5월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후 대법관 후보자 명단을 발표했는데, 이는 대통령 선거에서 유례없는 일이었다. 대통령 후보들은 종종 연방 사법부 특히 연방대법원에 지명할 인물의 유형에 대해 의견을 표명하긴 하나, 일반적으로 특정 인물을 지목하진 않는다. (가령 2016년에 힐러리 클린턴 후보는 “헌법상의 자유와 평등의 원칙을 보호하고, 정의의 저울이 개인이 아닌 기업과 특별 이익단체를 향하지 않도록 하며, 시민의 투표권을 보호할 판사를 선택하겠다”고 발언했다.) 2004년 대선 후보 토론회에서 조지 부시는 닉슨 이후 대부분의 공화당 후보와 유사하게 “엄격한 해석주의자를 선택하겠다”라고 발언했다.

    트럼프의 대법관 후보자 명단을 작성한 것은 법률가단체 연방주의자협회였다. 이 단체는 스스로를 “법률 질서의 현재 상태에 관심 있는 보수주의자와 자유지상주의자들의 집단”이라 소개한다. 1980년대 초에 설립된 연방주의자협회는 법조계에 광범위하게 자리잡은 진보주의자들에 맞서 보수적 법률가들을 위한 네트워크를 형성하고자 했다. 레이건 행정부 때 협회원들은 백악관 법률고문실과 법무부에서 일하며 연방 사법부 판사 선정에 관여했다. 부시 행정부는 연방법원 판사직을 선정하는 데서 전통적으로 관여해 왔던 미국변호사협회(ABA)를 배제하고 연방주의자협회와 협력했다. (아이젠하워에서 클린턴 행정부에 이르기까지, 미국변호사협회가 사전에 후보자 명단을 제공받아 그들에 대한 평가를 상원 사법위원회에 제출하는 절차를 거쳐왔다.) 오바마 대통령은 전통적 절차로 돌아갔으나, 트럼프 대통령이 이를 또다시 되돌린 것이다. 다만 이전 공화당 대통령과 달리, 트럼프는 후보자 명단을 선거 캠페인에서 대중에게 공개했다는 차이점이 있다. 트럼프의 이런 행동은 대선 캠페인에서 낙태, 동성결혼, 인종차별과 같은 문제에 관하여 공화당의 전통적 보수층의 지지를 얻기 위함이었다.

    한편 트럼프가 취임하자마자 연방대법원 판사를 임명하는 기회를 얻었던 것은 미치 맥코넬 덕분이었다. 그는 오바마 행정부 말기에 보수 성향의 스칼리아 대법관이 사망하자, 그 공석은 오바마 대통령의 몫이 아니며, 2016년 대선에서 미국 국민이 그 임명을 결정할 기회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바마 대통령이 지명한 후보인 메릭 갈랜드 판사는 보수와 진보 양측에서 존경받는 인물로, 상원의 공화당 의원들로부터도 상당한 지지를 받을 가능성이 컸다. 그럼에도 맥코넬은 상원 공화당 간부회의를 열어 갈랜드와의 만남조차 거부하며 대법원의 공석을 유지했다. 반면, 트럼프 행정부 말기에 진보 성향의 긴즈버그 대법관이 사망하자, 2020년 대선이 두 달도 안 남은 시점에서 맥코넬은 그 임명은 2020년 대선의 승자가 아니라 트럼프 대통령의 몫이라 주장했다. 이는 2016년 때 그의 논리와 모순됐으나, 맥코넬은 2016년과 달리 상원과 백악관이 모두 공화당의 통제 하에 있으므로, 사실상 미국 국민이 공화당 대통령에게 긴즈버그의 후임자를 임명하라는 명확한 의사를 밝힌 셈이라고 강변했다.

    맥코넬의 활약 덕에 트럼프 행정부는 연방대법관에 닐 고서치(2017년 임명), 브렛 캐버노(2018년 임명), 에이미 배럿(2020년 임명) 세 명을 임명할 수 있었다. 트럼프는 보통 자신의 성과에 대해 다른 사람과 공로를 나누는 성격이 아니지만, 맥코넬에 대해서만큼은 “[대법관] 자리가 비어있었던 것은 그 덕분이었다”라고 감사함을 표했다.

    그러나 이 대법관 임명 과정에는 문제가 많았다. 2017년 고서치 판사 인준 투표 이후 공화당은 상원 규칙을 변경하여, 2020년에 단 한 명의 민주당 표도 없이 배럿 판사를 임명했다. 민주당이 토론 종결을 막기 위해 44표를 모으자, 맥코넬은 상원의원들에게 대법관 지명자에 대한 투표에서 필리버스터를 제거하는 결의안을 표결에 부칠 것을 요청했고, 52명의 모든 공화당 상원의원은 맥코넬의 결의안을 지지하며 대법관 인준 투표에서 필리버스터를 제거했다. 이로써 상원을 장악한 당의 대통령은 소수당 의원들의 동의 없이 대법관을 임명할 권한을 갖게 되었다.

    맥코넬은 트럼프 백악관 법률 고문실과 협력하여 연방항소법원 공석을 우선적으로 처리했다. 연방대법원이 연간 약 70건 정도의 사건만 처리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연방항소법원은 사실상 연방법원 체계에서 대부분의 사건에 대한 최종결정권을 가진다. (연방항소법원 13곳은 연방지방법원에서 판결된 사건 중 항소된 사건을 처리하며, 1년에 약 5만 건의 사건을 처리한다. 반면 최종 항소법원인 연방대법원은 1년에 약 7천 건의 청원을 받지만, 그중 중요한 70건만을 심리한다.) 이 중요성을 알고 트럼프의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목적으로, 맥코넬은 특히 연방항소법원 후보자들을 신속하게 임명했다. 트럼프는 단 4년 만에 연방항소법원 판사 54명을 임명했는데, 오바마 정부가 8년 동안 임명한 연방항소법원 판사 수가 55명이었다.

    또한, 맥코넬은 연방지방법원 판사 지명을 검토하는 시간을 단축하고자 상원 규칙을 변경했다. 2019년 4월, 민주당의 단 한 명의 지지도 받지 않은 채, 연방지방법원 후보에 대한 토론 시간을 최대 30시간에서 2시간으로 줄였다. 그리하여 상원이 연방항소법원 판사의 인준 절차를 좀 더 신속하게 처리할 수 있도록 하였다. 반면 맥코넬은 오바마 행정부 하에서는 임명 절차를 크게 지연시켰는데, 그리하여 트럼프가 취임했을 때 103개의 연방지방법원 공석을 받을 수 있었다. 이는 2008년 오바마 행정부가 물려받은 54개의 공석의 거의 두 배였다. 이를 토대로 트럼프 대통령은 단 4년 만에 연방지방법원의 구성을 크게 재편했다. 그는 임기 동안 174명의 연방지방법원 판사를 임명했다. 이는 그의 임기 말까지 활동 중인 판사 전체의 28%에 해당한다.

    트럼프의 사법부 장악은 장기적 효과를 줄 것으로 예상된다. 대통령 임기가 제한되어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평생 임기로 연방법원에 종사하는 판사를 임명하는 것은 대통령이 퇴임 후에도 오랫동안 공공정책과 연방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트럼프 행정부가 상대적으로 젊은 인사들을 연방법원에 임명하는 데 주력했기에, 이들의 영향력은 특히 오래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 트럼프가 임명한 연방항소법원 판사 54명의 평균 연령은 47세로, 오바마 대통령이 임명한 판사들보다 5년 이상 젊다. 만약 이들이 모두 68세까지 재직한다고 가정하면, 오바마가 임명한 판사들보다 총 270년을 더 근무하게 될 것이다. 트럼프주의가 법관들을 통하여 영향력을 행사할 토대가 갖춰진 셈이다. 

    사법부 재편의 효과는 이미 나타나고 있다. 바이든 행정부 때인 2022년 6월 24일에 연방대법원은 낙태권을 보장했던 과거 대법원 판결(로 대 웨이드 사건)을 뒤집었다. 여기서 트럼프 재임 기간에 임명된 고서치, 캐버노, 배럿 모두 로 대 웨이드 사건 판결을 뒤집는 데 찬성했다. ‘문화전쟁’에서 공화당의 입장을 사법적으로 관철한 것이다.

    또한, 최근 연방대법원은 행정법을 둘러싼 주요 판결에서, 행정부가 시행한 조치가 심각하게 불합리하지 않다면 사법부가 이를 존중하고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다는 1980년대 이래의 ‘쉐브론 원칙’(Chevron deference)을 뒤집고, 모호한 법령에 대해서는 판사가 최선의 해석을 결정할 책임을 진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는 법과 그에 따른 행정조치에 대해 사법부의 심사와 개입을 강화하는 경향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2024년 대선에서 트럼프가 당선된다면,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의회를 통해 바이든 행정부 시절 입법된 법들을 변경하거나 폐지하긴 쉽지 않더라도, 다양한 행정조치를 통해 의회를 우회하기 쉬울 것으로 전망할 수 있다.
     

    6) 트럼프주의 정책집단 형성

    마지막으로 트럼프주의 정책집단을 형성하려는 노력을 살펴보자. 트럼프 1기 행정부 시기 상술한 수많은 시도가 이루어졌으나, 트럼프주의를 밀어붙이기에 인물과 역량이 부족했다는 평가가 있었다. “워싱턴에 도착했을 때, 트럼프는 백악관과 행정부 기관의 수천 개의 직위를 채울 대기 인물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정책을 조용히 반대하는 레이건과 부시의 베테랑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2020년 대선에서 준비가 불철저했다는 반성도 있었다. 이에 보수세력의 세대교체를 주도할 트럼프주의자들을 훈련시키며, 트럼프주의 정강을 개발하고, 2기 행정부를 준비하려는 플랫폼들이 등장했다. 아메리칸어페어스(American Affairs)와 같은 저널이나, 아메리칸컴패스(American Compass), 미국우선주의정책연구소(America First Policy Institute), 이번 대선에서 공화당 부통령 후보인 밴스가 이사로 있는 아메리칸모먼트(American Moment) 등의 단체들이 사례이다. 지면상 기존 보수 성향의 싱크탱크 헤리티지재단(Heritage Foundation)의 변화만을 살펴보겠다.

    2021년에 헤리티지재단의 회장이 케빈 로버츠로 교체됐다. 로버츠 지도부는 재단이 보수주의 운동의 지적 엔진으로서 본래 임무를 되찾고, 보수주의의 목소리를 결집시켜 나라를 이끌 통합된 계획을 수립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특히 트럼프 시대 보수주의 운동의 성격 진화, 공화당의 지지기반과 우선순위 변화, 풀뿌리 운동의 부상과 새로운 소통수단(소셜미디어)의 확산에 발맞추어, 더욱 직접적인 정치적 행동주의를 추구할 것을 요청했다. 새 지도부는 의원들에게 더 큰 압력을 가하기 위한 로비 조직인 ‘헤리티지 액션’을 창설하고, 풀뿌리 운동과의 연계를 강화하며, 보다 공격적인 옹호 활동을 추구하겠다고 밝혔다. 

    정책의 방향성도 트럼프주의 쪽으로 조정했다. (전통적 보수주의가 중요시했던) 재정과 외교정책 문제보다 이민이나 교육, 문화 문제에 더욱 집중하고, 무역과 중국에 관하여 대중적인 보수적 견해를 대폭 수용하며, 자유시장과 세계화를 더 회의적인 시각에서 보고, 관세와 경제적 민족주의를 지지하겠다 밝혔다. 이러한 방향 전환 속에서, 특히 국방과 외교정책 분야에서 다수의 직원이 이탈했으며, 재단은 로버츠 지도부의 새로운 비전에 맞는 신입 직원으로 그들을 대체했다.

    이러한 트럼프주의 플랫폼의 출현, 트럼프 개인을 넘어선 트럼프주의자 집단의 조직화 시도는, 트럼프 1기 때와 달리 2기 행정부에서는 트럼프주의를 관철하고자 철저히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7) 소결

    아래로부터의 운동뿐만 아니라, 특히 트럼프 행정부 시기 정치제도가 받은 충격 역시 트럼프주의를 지속하는 요인이 됐다. 먼저 공화당이 트럼프주의 정당으로 변모했다. 트럼프 이후 공화당은 더 넓은 유권자 연합을 구축하기보다는, 트럼프주의적 메시지를 설파하며 강경 지지층을 동원하고 당내 반대파를 제거하는 데 더 집중했다. 이로써 트럼프는 자신의 논란이 되는 행동과 판단을 집단적으로 승인해주고, ‘민주적 정당성’이라는 외피를 씌워주며, 자신의 권력 남용을 더는 제어하지 않고, 당파적 양극화를 강화하며, 민주당을 공격하는 데 쓸 수 있는 강력한 수단을 얻었다. 이는 트럼프가 각종 사법 리스크에도 불구하고 2024년 공화당 후보로 무난하게 지명되는 결과를 낳았다.

    트럼프는 재임 시절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를 공격하고 장악하려 시도했다. 다만 2018년 선거에서 민주당이 하원을 탈환했고, 기존 공화당 의원 중 일부가 트럼프에 반대하며 제동을 걸었다. 트럼프는 지지자를 동원한 협박으로 대응했으나, 의회를 완전히 굴복시키진 못했다. 행정명령으로 트럼프의 기조에 반대하는 직업공무원들을 대체하려 했던 시도도 실패했다. 그러나 상원 원내대표 맥코넬의 도움으로 트럼프는 연방 사법부를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이는 트럼프주의자들이 의회를 우회하여 사법심사를 통해 정책에 간섭할 가능성이 커졌다.

    1기 행정부에서의 미숙함과 2020년 대선 패배를 계기로 트럼프주의 지식인을 육성하고 결집시켜 2기 행정부를 준비하려는 흐름이 있었다. 만약 이번 대선에서 트럼프가 승리한다면, 이미 공화당과 사법부가 정파적으로 구성된 상태에서, 이미 공언한 대로 행정부를 장악하는 명령을 다시 시도하고, 1기 때와 달리 준비된 트럼프주의자들을 정계에 진입시키며, 트럼프주의적인 2024년 공화당 정강을 관철할 힘을 갖출 수 있다. 
     
     

    4. 나가며

     
    2016년 미국 대선을 계기로 전면화하여 지금까지도 점점 더 강력해진 트럼프주의는 미국 정치의 전망에 암운을 드리우고 있다. 물론 민주당 후보 교체 이후 해리스가 근소하게 트럼프에 앞서고 있지만, 실제 결과가 어찌 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특히 경제 문제를 중심으로 바이든 정부에 대한 유권자의 부정적 여론이 강하기 때문이다. 

    한편, 대선 결과를 떠나, 트럼프주의 이념과 운동이 계속 발전될 가능성을 생각해야 한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대한 불만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이를 자극하며 특정한 방향으로 수렴시키는 트럼프주의 운동은 계속 일어날 것이다. 미국 유권자의 정치적 양극화는 매우 심각하며, 트럼프의 강경 지지층을 토대로 트럼프주의 정당이 되어버린 공화당이 존재한다. 이 기반 위에서 트럼프의 권력이 지속될뿐더러 (부통령 후보 밴스와 같은) 트럼프주의 정치인들이 부상하고 세력화하고 있다. 이들은 미국이 그간 쌓아 올렸던 정치제도를 계속 변질시키려 시도할 것이다. 

    임지섭과 김진영의 글에서 자세히 다루겠지만, 2024년 공화당 정강에 나타난 트럼프주의 정책은 자본주의 경제의 작동 원리에 대한 최소한의 인식조차 결여하고 있으며, 자유무역·자유기업에 기초하여 구축된 세계 질서를 1930년대의 무질서한 상태로 퇴보시킬 수 있다. 이외에도 수많은 결함을 가진 그 정책들이 트럼프 지지자들의 삶을 진정으로 개선할 수는 없을 것이다. 트럼프주의자들은 기성 엘리트의 저항을 탓하나, 경제나 국가 간 관계 문제에 대한 분석 부재와 정치적 접근, 대통령의 권력을 견제하는 각종 장치를 깨고 입법·행정·사법의 삼권을 장악하려는 시도가 이를 곳은 대안적 세계가 아닌, 권위주의와 무질서의 세계다. 이는 미국 인민뿐만 아니라 전 세계 인민의 안녕을 위협한다.

    트럼프주의 정강의 모순과 결함을 비판해야 하나, 토론이 불가능한 그 지지자들의 심리상태도 분석해야 한다. 특히 트럼프주의 운동이 ‘정치적 올바름’ 운동과 같은 미국 좌파의 방식을 모방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각자의 구체적 불만과 분노를 동원하면서도, 이를 ‘피해자 의식’을 통해 현실과 유리된 도덕적인 선악의 문제로 치환하고, 거대한 힘을 가진 해결 불가능한 ‘적’을 상정하여 분노와 투쟁을 영속화하는 그 방식이, 트럼프 지지자들이 현실의 고난을 딛고 나아가는 데 도움이 되진 않을 것이다. 트럼프주의 정책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비판을 수용하지 않는 상태의 사람들에게 어떠한 메시지가 필요할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트럼프주의 대중운동에서부터 정치제도의 변화에 이르기까지, 현재의 미국, 나아가 세계는 매우 위험한 상태에 처해 있다. 이 글에서 서술한 각 층위의 문제들, 트럼프 지지자들의 구체적 불만들, 이를 모아내는 트럼프주의 운동의 방식, 극단적인 정치적 양극화, 현실 인식의 결여, 지도자에 대한 무조건적 지지, 경제나 외교 사안의 정치화, 의회의 무력화, 사법의 정치화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여기에 우리의 미래가 걸려 있기에, 사회운동은 반드시 이 문제들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
     
     

  • 2024-09-06

    더욱 강해져서 돌아온 트럼프 경제정책의 위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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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들어가며

     
    바이든과 트럼프의 양자 대결 구도로 치러질 전망이었던 미국 대선은 트럼프 총격 사건과 바이든에서 해리스로의 민주당 대선 후보 교체를 거치며 더욱 복잡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렇게 예측불허의 미국 대선에 여러 복잡한 쟁점이 중첩된 가운데, 핵심 화두 중 하나는 역시 경제라고 할 수 있다. 지난 6월 《이코노미스트》와 유고브(YouGov)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 유권자는 이번 선거에서 가장 중요한 쟁점이 무엇이냐는 설문에 인플레이션(25%), 이민(13%), 일자리와 경제(12%) 순으로 답했다.

    지난해 발표한 2024년 경제전망 글
    「연착륙 기대에 드리우는 장기침체와 부채위기의 그림자」에서 지적한 것처럼, 미국경제는 비교적 빠르게 인플레이션율이 하락하면서도 양호한 성장세와 고용 상황을 보였지만, 이미 높아진 물가수준이 고착하는 가운데 재정위기와 부채위기의 압력이 증대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파이낸셜타임스》는 미국 유권자의 58%가 바이든 행정부의 경제정책에 불만이 있고, 오직 28%만이 바이든 행정부의 경제정책이 미국경제에 도움 된다고 답변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특히 바이든 행정부 출범 직후인 2021년 대비 20% 상승한 높은 물가수준이 유권자에게 가장 큰 압박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렇게 바이든 행정부의 경제정책과 미국의 경제 상황에 대한 여론의 부정적 평가는 트럼프 지지의 중요한 일부를 구성하고 있다. 그렇다면 트럼프는 이번 대선을 앞두고 어떤 경제정책을 공약하고 있을까? 과연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시행할 경제정책은 2020년대 미국경제의 핵심 문제로 지적되는 인플레이션과 부채위기를 해결할 수 있을까?

    2016년 트럼프 1기 행정부가 출범할 당시 과연 어떤 경제정책이 시행될지를 두고 전 세계적으로 많은 혼란과 불안이 있었던 것과 비교하면,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시행할 것으로 예상되는 경제정책은 비교적 명확하다. 트럼프 1기 행정부의 주요 인사가 참여한 보수 싱크탱크 헤리티지 재단의 ‘프로젝트 2025’ 보고서 『리더십의 사명: 보수의 약속』, 트럼프 캠프의 공약 ‘어젠다 47’, 공화당의 ‘2024년 정강정책’이 트럼프 2기 행정부에서 시행되어야 할 경제정책의 방향을 구체적으로 제안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바탕으로, 아래에서는 트럼프 2기 행정부에서 시행될 수 있는 경제정책을 대외정책과 국내정책으로 나누어 살펴보고, 그 함의와 평가를 정리해본다. 
     
     

    2. 미국과 세계를 1930년대로 되돌리는 대외경제정책

     

    1) 무역정책: 관세로 무역적자 해소하기

    트럼프 1기 행정부의 경제정책과 마찬가지로, 2기 행정부 공약의 핵심 중 하나는 무역정책이고 그 수단은 관세라고 할 수 있다. 1990년대 이후 탈냉전과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가 전개되는 가운데 자유무역이 확대되면서 관세는 주요 정책 수단으로 고려되지 않았다. 그러나 2007~09년 금융위기 이후 미국 내에서 글로벌 무역불균형과 고용 없는 회복이라는 문제가 주목받고, 그 원인으로 중국을 비롯한 대미국 무역 흑자국의 불공정무역관행이 지목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지형에서 트럼프는 무역불균형을 해소하고 국내 산업을 보호하여 제조업 일자리를 늘리는 것이 필요하다고 역설하며, 그 수단으로 관세를 적극 활용하기 시작했다.

    트럼프 1기 행정부가 실제로 시행했던 주요 관세 조치는 두 가지다. 하나는 특정 수입품이 국가안보에 위협을 가할 경우 대통령이 해당 상품의 수입을 조절할 수 있도록 하는 ‘1962년 무역확장법 232조’에 근거해, 2018년 철강과 알루미늄에 각각 25%p와 10%p의 추가 관세를 부과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무역 상대국의 불공정한 관행에 대해 대통령이 무역협정을 철회하거나 관세나 수입 제한 조치를 부과할 수 있도록 하는 ‘1974년 무역법 301조’에 근거해, 중국 상품에 네 단계를 거처 7.5%p~25%p의 추가 관세를 부과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2018~19년에 전개된 중국과의 무역갈등이었다.

    바이든 행정부 역시 무역과 대외정책 수단으로, 특히 중국을 대상으로 관세 조치를 계속해서 활용하고 있다. 2022년과 2023년에 걸쳐 동맹국인 유럽연합, 일본, 영국과 협의해, 트럼프 행정부 시기 부과되었던 철강과 알루미늄 추가 관세를 저율할당관세로 대체했을 뿐, 그 외의 관세 조치는 유지하고 있다. 특히 ‘1974년 무역법 301조’에 근거한 대중국 관세의 경우, 중국의 불공정 무역 관행을 시정하는 데 필요하다고 평가하며 유지하는 가운데, 올해 5월 14일에는 중국의 전기차(100%), 태양광 패널(50%), 철강·알루미늄(25%) 등 14개 품목에 대해 추가적인 관세를 내년부터 부과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그런데 트럼프 행정부 2기의 관세정책은 그 대상과 범위가 이전보다 훨씬 확대될 전망이다. 트럼프 대선 캠프는 보편적 기본관세와 상호주의관세법 제정을 공약했다. 먼저 보편적 기본관세란, 미국으로 수입되는 모든 상품에 10%p의 추가 관세를 부과하겠다는 것이다. 트럼프 캠프의 공약이 구체적인 시행 조치까지 상술하진 않았기 때문에, 보편적 기본관세를 유럽연합이나 일본과 같은 동맹국이나, 한국과 같은 FTA 체결국에까지 적용할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다만 트럼프 1기 행정부 시기 미국무역대표부(USTR) 대표였던 로버트 라이트하이저가 보편적 기본관세가 기존 수입상품에 부과되고 있는 관세에 추가될 것이라고 언급한 바 있고, 트럼프 캠프가 미국 무역적자의 원인으로 한국, 일본, 유럽연합, 멕시코와 캐나다의 자동차와 부품을 지목했다는 점에서, 보편적 기본관세가 정말 ‘보편적’으로 부과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상호주의관세법은 상대국이 미국 상품에 부과하는 관세와 동일한 관세율을 상대국 수입 상품에 부과하겠다는 것이다. 트럼프 1기 행정부의 무역정책 핵심 참모였던 피터 나바로는 ‘프로젝트 2025’ 보고서에서 세계무역기구(WTO) 최혜국대우 의무로 인해 모든 국가에 낮은 관세가 적용됨으로써 미국이 만성적인 무역적자를 보고 있다고 주장한다. 각 WTO 회원국은 어떤 회원국에 적용하는 가장 낮은 관세를 다른 모든 회원국에 적용해야 하지만, 상대국이 그것과 동일한 관세율로 맞춰야 하는 의무는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자동차에 대한 관세의 경우, 최혜국대우 의무에 따라 미국은 2.5%인 반면 유럽연합은 10%, 중국은 15%, 브라질은 35%에 이르기 때문에 미국의 자동차산업이 불공정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나바로는 이어서 상호주의관세법을 통해 미국이 각 132개 무역 상대국과의 관세를 상호 같은 수준으로 맞추면, 미국의 무역적자가 전체 무역적자의 약 10% 정도인 58~63억 달러 감소하고 35~38만 개의 일자리가 창출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공화당 역시 지난 7월 8일 채택한 2024년 정강정책에서 트럼프 캠프의 상호주의관세법 공약을 그대로 수용해 제안하고 있다.
     

    2) 대중국정책: ‘위험억제’에서 ‘전략적 탈동조화’로

    트럼프 2기 행정부 공약에서 또 하나의 축을 이루고 있는 것은 강경한 대중국정책이다. 트럼프 캠프는 중국으로부터의 경제적 자립을 공약하면서, 미국의 국가안보와 경제안보를 위해 에너지, 기술, 통신, 자원, 의료, 국가자산과 같은 핵심 인프라를 중국이 소유할 수 없도록 규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아울러 중국으로부터의 필수품 수입을 4년에 걸쳐 단계적으로 축소하는 계획을 도입하고, 중국에 투자하는 기업은 연방정부와의 모든 계약을 금지하도록 만들겠다고 공약한다.

    ‘프로젝트 2025’ 보고서는 중국을 전략적 동반자나 공정한 경쟁자가 아니라 ‘전체주의 적’으로 규정하며, 중국과의 경제적 관여를 종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앞서 언급한 라이트하이저 역시, 바이든 행정부의 ‘위험억제’(de-risking)가 아니라 중국과의 ‘전략적 탈동조화’(strategic decoupling)를 목표로 하는 경제정책과 무역정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즉 중국경제와의 강도 높은 단절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국익에 해가 되는 중국과의 교류를 중단하고, 안보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이중용도기술 분야에서 모든 협력을 중단하며, 나아가 중국에 대한 최혜국대우를 폐지하고 모든 중국산 수입품에 대한 관세를 인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중국에 대한 최혜국대우를 폐지하자는 주장은 비교적 최근 제기되기 시작했다. 1990년대 사회주의권이 붕괴한 이후, 미국은 기존 사회주의권의 ‘비시장경제국’을 세계시장에 통합하는 과정에서 점차 이들 국가에 항구적 정상무역관계 지위를 부여하고 최혜국대우를 적용해 왔다. 2000년 중국, 2012년 러시아가 대표적이다. 그런데 2022년 바이든 행정부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계기로 러시아의 정상무역관계 지위를 철회하고 더 높은 관세율을 적용한 바 있는데, 중국에 대해서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주장이 공화당과 트럼프 진영의 인사를 중심으로 제기된 것이다. 트럼프 본인 역시 재선에 성공하면 중국의 항구적 정상무역관계를 철회하고 최대 60%에 이르는 고율의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3) ‘G 마이너스 2’의 세계로 이끌 트럼프의 대외경제정책

    종합해보면, 트럼프가 제시하는 대외경제정책의 목적은 1기 행정부 시기의 목적과 기본적으로 같다. 즉, 무역불균형을 해소하고 국내 제조업 산업을 보호해 일자리를 늘리겠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중국과의 전략적 경쟁에서 더 나아가 강도 높은 경제적 단절을 추구하며, 중국뿐만 아니라 미국에 무역흑자를 내는 국가가 미국과 공정하고 상호적 무역을 하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리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핵심 정책 수단으로 대규모 관세 조치를 제안한다.

    그러나 미국의 거대한 무역적자는 무역 상대국의 불공정한 관행보다는 미국이 주도하는 금융세계화 자체에서 구조적으로 발생하는 것이다. 금융세계화와 미국경제는 기축통화로서 달러의 지위에 기반한 동아시아 수출 달러 환류로 유지되고 있다. 동아시아 수출 달러 환류란, 동아시아가 생산한 상품을 미국에 수출해 벌어들인 달러를 미국 금융시장, 특히 미국 국채에 투자하는 메커니즘을 말한다. 이 과정에서 동아시아 국가는 무역흑자를 바탕으로 경제성장을 이루었고, 미국은 금융적 지배를 누리는 한편 비교적 저렴한 물가로 소비할 수 있었다. 2010년대부터 미국과 중국의 경쟁이 격화하고 있지만, 동아시아 수출 달러 환류와 금융세계화는 여전히 큰 틀에서 유지되고 있다. 

    물론 금융세계화는 계급적 모순을 내포한 것이었다. 중심부의 금융자본가와 신흥국의 산업자본가가 수억 명의 신흥국 노동자를 착취하는 동맹을 맺은 셈이기 때문이다. 또한 미국 국내로 보면, 엄청난 이윤을 누린 초국적 금융자본의 성장과 가격경쟁력을 잃은 제조업이 해외로 떠나면서 일자리를 잃은 중산층의 몰락이 대비되었다. 트럼프는 금융세계화에 내재한 계급적 모순을 반세계화와 보호무역주의로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1기 행정부에서 시행된 관세 조치는 무역적자를 감축하지도, 국내 투자와 일자리를 증가시키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트럼프는 다시금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우며 관세를 핵심 정책 수단으로 내세우고 있다. 차이점이 있다면, 트럼프가 새롭게 제안하는 관세 조치가 무역에 미치는 대상과 규모가 트럼프 1기 행정부와 바이든 행정부에 비해 훨씬 크다는 점이다. 중국에 대한 고율의 관세를 포함해 트럼프가 제안하는 보편관세와 상호주의관세는 중국으로부터의 수입 4천억 달러를 포함해 약 3조 달러 이상의 미국 무역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는 트럼프 1기 행정부에서 중국과의 무역갈등이 영향을 미쳤던 무역 규모의 약 10배이고, 바이든 행정부에서 새롭게 부과하기로 한 대중국 관세의 약 150배에 달한다.

    그렇다면 트럼프가 제안한 보편적 기본관세와 상호주의관세가 실제로 시행될 경우 나타날 교역효과를 전망한 분석을 [그림1]을 통해 살펴보자. 대외경제정책연구원에 따르면, 보편적 기본관세·상호주의관세·중국에 대한 고율의 관세를 시행하는 각 시나리오에서, 미국의 수입액은 약 2551억 달러에서 최대 4997억 달러 감소하고, 수출액은 약 836억 달러에서 최대 1844억 달러 감소할 것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무역수지는 약 1715억 달러에서 최대 3153억 달러 개선될 것으로 나타났다. (2023년 기준 미국의 전체 무역수지 적자 규모는 7734억 달러다) 
     
    [%=사진1%]

    이렇게 볼 때, 트럼프의 대규모 관세 조치는 미국의 수입을 상대적으로 더 많이 감소시켜 무역적자를 어느 정도 줄이는 것 자체는 가능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미국은 그 대가로 경제성장 저하와 물가 상승이라는 막대한 거시경제적 비용을 치러야 할 것이다. 같은 분석에서, 보편적 기본관세를 시행할 경우 미국의 실질 GDP 성장률이 약 0.12%p에서 최대 0.36%p 감소하고, 상호주의관세를 시행할 경우 약 0.17%p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무엇보다, 보편적 기본관세와 상호주의관세는 미국의 소비자물가를 1.8%p~3.6%p 상승시킬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상대국이 미국에 보복관세를 부과할 경우에는 물가상승 압력이 더욱 커질 것으로 나타났다.
     
    [%=사진2%]

    또한,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는 2017년 이후 새롭게 부과된 관세가 미국 구매자(사실상 소비자)에게 모두 전가되었다는 연구 결과를 제시한다. 그러면서 트럼프의 대규모 관세 제안이 실제로 시행될 경우, 연간 5천억 달러의 비용이 소비자에게 부과될 것으로 예측한다. 즉, 트럼프의 주장과 달리, 트럼프가 공약하는 대규모 관세 조치는 일부 국내 생산자에게 도움이 될 수 있겠지만, 경제성장을 저해할 뿐만 아니라 인플레이션을 자극하고 소비자 부담을 증대하여 결과적으로 미국 노동자계급에 전체적인 해를 끼칠 것이다.

    나아가, 트럼프의 급진적인 관세정책은 미국과 세계를 1930년대 또는 그 이전 시대로 되돌리려는 시도로 비판받고 있다.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의 와이스먼은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글에서, 트럼프의 관세정책이 1980년대 이후 공화당과 민주당이 합의했던 신자유주의적 거시경제 관리 정책에서 이탈하여, 관세와 보호무역에 집착했던 20세기 초의 공화당으로 퇴보하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1차 세계전쟁과 2차 세계전쟁 사이에 의회 다수를 차지한 공화당이 1929년 대공황 이후 미국 산업과 농민을 보호하기 위해 입법한 ‘스무트-홀리 관세법’이 낳은 결과를 잊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스무트-홀리 관세법’은 2만여 개의 수입품에 평균 59%, 최고 400%의 관세를 부과하는 것이었는데, 이것이 각국의 보복관세나 환율통제와 같은 보호무역주의를 추동하여 1930년대 대불황을 심화하고, 결과적으로 2차 세계전쟁을 불러일으키는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은 트럼프의 대외경제정책이 미국이 2차 세계전쟁 이후 형성한 규칙 기반의 세계 질서를 스스로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비판과 연결된다. 전후의 브레튼우즈 체제는 철저히 미국의 세계전략에 부합하는 것이었지만, 동시에 개방된 시장과 자유무역의 확대라는 일종의 ‘세계적 공공재’를 제공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후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로 각국 경제의 상호의존성이 더욱 심화하는 가운데, 세계 금융위기, 기후위기,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인한 보건위기와 같이 국제협력이 아니면 해결의 실마리조차 찾을 수 없는 세계적 차원의 위기가 심화하고 있다. 이러한 정세에서 트럼프가 이끄는 미국의 일방주의는 WTO 무력화와 파리기후협정 탈퇴에서 드러나듯 경제와 정치 모두에서 국제협력이 이루어질 수 있는 토대를 파괴한다.

    이런 점에서, 트럼프 캠프와 헤리티지 재단의 ‘프로젝트 2025’ 보고서가 제기하는 대중국정책은 공화당과 민주당이 합의하는 ‘전략적 경쟁’으로부터 이탈하는 방향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양당이 합의한 중국과의 전략적 경쟁의 핵심은, 중국이 자유무역 질서에 편입되면서 점차 공정한 경쟁자이자 책임 있는 국제사회 일원으로 역할을 할 것이라는 관여정책의 기대가 깨졌음을 인정하는 가운데, 중국과의 경쟁을 대비하면서도 규칙 기반의 국제질서를 재정립하여 장기적으로 중국을 포섭할 수 있도록 하자는 데 있었다. 그러나 트럼프가 제기하는 미국 우선주의와 일방주의는 동맹국·제휴국과의 공조나 연대마저 무역분쟁으로 훼손함으로써 규칙 기반의 다자적 국제질서 재정립이라는 목표에 완전히 반한다. 게다가, 최종적으로 중국과의 완전한 단절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세계의 분열을 오히려 심화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미국과 중국이 세계에 공공선은커녕 혼란과 공공악을 제공하는 ‘G 마이너스 2’의 세계로 나아가는 길일 것이다.
     
     

    3. 인플레이션과 부채위기를 심화하는 ‘부두 경제학’

     

    1) 조세정책: 감세와 관세의 결합

    트럼프의 대외경제정책 공약의 핵심이 관세라면, 국내 경제정책 공약에서 핵심은 감세다. 그리고 감세 역시 트럼프 1기 행정부가 활용한 주요 정책수단 중 하나였다. 트럼프 1기 행정부 시기에 입법된 2017년 ‘세금감면 및 고용법’(이하 TCJA, Tax Cuts and Jobs Act of 2017)은 최고 법인세율을 35%에서 21%로 크게 인하하고, 개인 소득세율을 구간별로 2~3%p 인하(최고소득 구간은 39.6%에서 37%로 인하)하는 내용이 골자였다. 개인 소득세율 인하는 2025년에 만료될 예정인데, 트럼프는 이를 영구화하겠다고 공약하는 한편 법인세율을 15%까지 낮추겠다고 공언한다.

    트럼프의 감세 정책은 1980년대 레이건 대통령의 ‘레이거노믹스’에서 이어지는 공화당의 공급 주도 경제학을 따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공급 주도 경제학이란, 세율 인하를 통해 기업의 투자 확대를 유도하여 경제 전체의 총공급을 늘리고자 하는 경제정책을 말한다. 그런데 세율 인하가 실제로 투자 확대와 경제성장을 유발해 결과적으로 세입 역시 확충되는 효과를 일으키는, 이른바 ‘낙수효과’가 있는지는 논란이 많다. 대다수 경제학자는 조세 인하가 노동 공급과 저축을 증가시킨다는 논리 자체에는 동의할 수 있지만, 공급 주도 경제학이 그 영향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한다고 비판한다. 루비니는 역사적이고 실증적으로 볼 때, 세율 인하가 실제로 산출량 수준과 성장률에 미치는 영향은 거의 없었으며 전체 세수입 역시 증가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공급 주도 경제학은 ‘부두 경제학’(voodoo economics)일 따름이라고 평가한다.  

    트럼프 1기 행정부 시기의 TCJA 역시 불과 몇 년 뒤 벌어진 코로나19 대유행과 인플레이션 국면으로 인해 실제 공급 측면의 효과가 있는지는 실증하기 어렵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러한 감세 정책이 재정적자를 심화한다는 점이다. 브루킹스연구소에 따르면, TCJA 발효 다음 해인 2018년 회계연도에 실제 징수된 세수액은 TCJA 입법 이전인 2017년 1월에 미국 의회예산국(CBO)이 예측한 세수액보다 2750억 달러 적었다. 경제가 성장했고 다른 정책 요인이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중 대부분을 TCJA로 인한 세수 감소로 볼 수 있다. 아울러 의회예산국은 TCJA를 연장하면 2033년까지 재정적자가 3조 5천억 달러 증가할 것으로 추산했다. 즉, 이미 미국의 재정위기와 부채위기가 ‘결정적인 선을 넘었다’는 경고의 목소리가 높은 상황에서, 트럼프의 감세 공약이 이를 더욱 가속할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2023년 회계연도 기준으로 미국의 재정적자는 1조 7천억 달러로, GDP의 6.3%에 달했다. 정부의 재정적자는 기초재정수지 적자와 이자지출로 나눌 수 있다. 의회예산국의 향후 10년 예측에 따르면, 미국의 기초재정수지 적자는 평균 GDP의 2.1%가 될 것이다. 이는 사회보장과 건강보험 지출이 세입보다 훨씬 빠르게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정부 부채의 평균 명목 이자율이 2041년까지 명목 경제성장률을 초과하여, 순이자 지출액은 현재 GDP의 2.4%에서 2034년에는 3.9%로 증가할 것이다. 이에 따라 정부 부채가 폭발적으로 증가할 것인데, 현재 부채 총규모가 35조 달러로 GDP의 97%인 상황에서 2034년 116%로 증가할 것이다. 2054년에는 순이자 지출액과 부채규모가 GDP의 6.4%, 172%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연방정부의 재정위기와 부채위기가 심화하는 가운데, 트럼프 2기의 조세정책 공약에서 주목해야 하는 점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연방정부의 세입 기반을 소득세에서 관세로 바꾸겠다는 트럼프의 구상이다. 트럼프는 감세에서 더 나아가 궁극적으로 연방소득세를 폐지하고, 앞서 언급했던 보편적 기본관세·상호주의관세나 대중국 고율 관세와 같은 관세로 이를 대체하겠다고 여러 차례 밝힌 바 있다. 연방소득세를 폐지하고 관세로 이를 대체하겠다는 트럼프의 구상은 부두 경제학을 넘어 미국경제를 19세기로 되돌리겠다는 터무니없는 발상에 가깝다.

    물론 이러한 트럼프의 구상이 그 자체로 완전히 실현될 가능성은 크지 않다. 무엇보다 현실의 관세 규모가 소득세 규모에 훨씬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2023년 기준으로 관세 규모는 연간 약 800억 달러로 전체 세입의 약 2% 수준인 데 비해, 소득세 규모는 무려 2조 달러에 이른다. 트럼프가 제안한 보편적 기본관세·상호주의관세법을 시행하더라도, 관세 규모는 최대 2천2백억 달러에 그칠 것으로 전망된다. 따라서 관세로 소득세 전체를 대체하는 것은 말 그대로 불가능하다.

    다만 연방정부의 세입에서 소득세 일부를 관세로 대체하는 감세와 관세의 결합은 1기 행정부에서도 일부분 시행된 바 있다. 철강·알루미늄 관세와 대중국 관세를 인상하는 한편, 2017년 TCJA로 법인세와 소득세를 인하한 것이다. 당시에는 관세와 감세의 결합 규모가 미미한 수준이었지만, 트럼프 2기 행정부에서는 그 규모가 더욱 커질 수 있다. 트럼프 캠프가 내년 만료될 예정인 TCJA의 개인소득세 감면을 의회 입법으로 연장하는 한편, 이로 인한 연방정부의 세입 감소를 보편적 기본관세·상호주의관세와 대중국 고율 관세로 채우겠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이러한 감세와 관세의 결합은 재정위기를 심화할 뿐만 아니라, 조세부담의 역진성을 강화한다는 문제가 있다. 소득세 감면이 소득 증가에 미치는 영향은 소득 수준이 높은 계층일수록 큰 반면, 관세 인상이 소득 감소에 미치는 영향은 소득 수준이 낮은 계층일수록 크기 때문이다.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의 분석은 이를 잘 보여준다.  

    트럼프의 정책을 끝까지 밀어붙여 관세 수입을 7천8백억 달러 늘리고 소득세 수입을 그만큼 줄인다고 가정할 때, 소득 분위별로 세후소득이 얼마나 증감하는지를 살펴보자. [그림2]에 따르면, 소득 하위 5분위 가구는 소득세 감면으로 인한 세후소득 증가는 없으면서 관세 인상으로 인한 세후소득 감소는 8.5%에 이른다. 반면 상위 1분위 가구는 관세 인상으로 소득이 3.8% 감소하지만, 소득세 감면으로 6% 증가하여, 결과적으로 세후소득이 2.2% 순증가한다. 상위 1% 가구는 세후소득이 11.6% 순증가한다.
     
    [%=사진3%]

    한편, 이보다 좀 더 현실성 있는 가정, 즉 대부분의 수입품에 20%의 관세를 부과하고 중국에 60%의 관세를 부과하면서 TCJA의 감세를 연장하는 경우에는 소득 분위별로 세후소득이 얼마나 증감하는지도 살펴볼 수 있다. [그림3]에 따르면, 모든 소득 분위 가구에서 세후소득이 역진적으로 순감소하는 가운데, 상위 1%의 세후소득만이 0.9% 순증가한다. 전형적인 미국 가구라고 할 수 있는 중간 분위의 세후소득은 2.7% 순감소하는데, 이는 중간 분위 가구가 트럼프가 시행할 관세정책으로 인해 연간 2600달러의 비용을 더 지출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진4%]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 역시, 전략적으로 표적화된 관세는 미국의 경제적·국제적 이익을 보호하는 주요한 수단이 될 수 있지만, 연방정부의 세입에서 관세 의존도를 높이는 것은 장기적으로 소득불평등 추세를 악화하고 거시경제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지적한다. 또한 20세기 이후 연방정부의 역할 증대와 소득재분배를 고려하여 형성된 누진적 소득세 제도를 19세기 이전으로 되돌리려는 퇴보적 시도라고 비판한다.
     

    2) 통화정책: 약달러와 저금리를 위한 연준 독립성 공격

    트럼프가 내세우는 미국 우선주의와 무역적자 해소를 향한 의지는 그가 제시하는 통화정책에 대한 우려와도 연결된다. 트럼프 캠프나 공화당 정강정책이 명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트럼프와 그의 측근들이 달러 환율을 약세로 만드는 ‘약달러’와 연방준비제도의 금리 결정에 대한 대통령의 통제를 강화해 ‘저금리’를 압박하는 통화정책을 논의하고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가 달러 약세를 원하는 이유는, 현재 달러가 너무 고평가되어 대규모 무역적자가 발생하고 있다는 로버트 라이트하이저의 믿음에 따른 것이다. 즉 달러가 중국, 일본, 유럽과 같은 무역 상대국의 통화보다 고평가된 ‘강달러’ 현상 때문에 미국의 수출품이 가격경쟁력을 잃게 되는 한편 수입품의 가격경쟁력은 높아져 수출은 감소하고 수입이 증가한다는 것이다. 달러 강세를 완화하기 위해 트럼프가 실제로 선택할 수 있는 유력한 수단은 금리 인하다. 그러나 중앙은행 통화정책의 목적은 무역적자 감축이 아니라 거시경제 관리, 즉 물가와 실업률의 안정이다. 따라서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는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된다면 달러 약세와 저금리를 관철하기 위해 연방준비제도의 독립성을 공격하는 개편을 시도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이에 따르면, 첫째, 트럼프는 기존의 제도를 존중하는 선에서 연방준비제도 의장과 부의장을 지명할 수 있다. 이 경우 현재 의장인 제롬 파월의 임기가 끝나는 2026년 5월이 기점이 될 수 있다. 둘째, 트럼프는 더 나아가 연방준비제도 의장·부의장의 임기가 만료되기 전에 이들을 일반 이사로 강등시키고 새로운 의장·부의장을 임명하려 할 수도 있다. 다만 그렇더라도 새 의장은 현직 이사 가운데에서 임명해야 하고, 금리를 결정하는 연방공개시장위원회 위원 중 5명은 대통령이 임명하지 않는 준비은행의 총재이기 때문에 통화정책에 개입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마지막으로, 트럼프는 연방정부의 집행권을 오직 대통령에게만 부여하는 미국 헌법 제2조에 따르면 연방준비제도와 같은 독립 기관은 위헌이라는 보수적 법조계의 ‘단일행정부론’(unitary executive theory)을 활용해, 통화정책의 결정 권한을 대통령에게 넘기는 식으로 연방준비제도를 완전히 개편하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강달러로 인해 미국의 무역적자가 심화한다는 트럼프와 라이트하이저의 인식은 “무역과 경제에 대한 근시안적이고 17세기적인(중상주의적인) 시각”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무역적자와 마찬가지로 강달러 현상 역시 기본적으로 기축통화국으로서 미국이 주도하는 금융세계화 자체에서 기인한다는 사실을 무시하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미국과의 무역에서 달러를 벌어들인 국가는 다시 미국 국채에 투자하며, 세계 모든 금융기관은 안전 자산으로 달러 또는 달러와 언제든 교환 가능한 금융자산을 보유한다. 이러한 달러에 대한 세계적 수요는 경제위기일수록 ‘최후의 도피처’인 달러를 찾아 더욱 강해진다.

    특히 최근의 강달러 현상은 코로나19 대유행 이후 발생한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 위한 연방준비제도의 고금리 정책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인플레이션과 부채위기가 고착하는 2020년대의 거시경제 조건에서, 트럼프가 추진하는 관세 인상과 조세 인하의 결합은 인플레이션을 자극하는 한편 재정적자를 한층 심화해 금리 인상 압력으로 작용할 것이다. 만약 여기에 더해 트럼프가 달러 약세를 위해 통화정책 결정을 정치화하고 자의적으로 금리 인하를 추진한다면, 인플레이션은 더욱 심화할 것이고 중앙은행의 일관된 정책에 대한 신뢰가 훼손되어 거시경제 관리에 대혼란을 가져올 것이다.
     

    3) 에너지정책: 탈탄소에서 화석연료로의 복귀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우는 트럼프 캠프의 공약은 에너지정책에서도 두드러진다. 1기 행정부 시기에 파리기후협정을 일방적으로 탈퇴하고 각종 환경 규제를 완화한 바 있는 트럼프는, 이번 대선에서도 인플레이션을 해결하고 에너지 안보를 확보하기 위해 바이든 행정부의 그린뉴딜 정책을 폐지하는 한편 화석연료 생산을 더욱 확대하겠다고 공약한다.
     
    먼저 트럼프 캠프는 바이든의 그린뉴딜 정책이 ‘산업과 일자리를 죽이는 친중반미 정책’이라고 비난한다. 특히 인플레이션감축법(IRA)에 따라 전기차에 지급되는 보조금의 최대 수혜자가 중국이라고 주장하면서, 미국의 자동차산업과 시장을 보호하기 위해 전기차 보조금을 대폭 삭감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또한, 트럼프는 제조업 선진 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저비용 에너지와 전력 생산이 필요하다고 강조하면서, 화석연료 우위로의 ‘복귀’를 지속적으로 강조한다. 이를 위해 연방정부 토지에서 석유와 가스 시추를 허가하는 절차를 완화하고, 화석연료 생산 기업에 세금 감면 혜택을 제공하며, 화석연료 발전소와 천연가스 파이프라인 건설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프로젝트 2025’ 보고서 역시 세계 최대 에너지 생산국인 미국의 에너지 위기는 과도한 녹색정책 때문이라고 지적하면서, 친환경·탈탄소 보조금을 대부분 축소하고 민간 에너지 부문에 대한 각종 정부 규제를 완화할 것을 제언한다.

    아울러 트럼프는 적극적인 화석연료 시추 정책을 상징하는 “드릴 베이비 드릴”(Drill, baby, drill)을 연설에서 종종 활용하면서, 이를 통해 미국의 에너지 비용을 50% 절감하고 인플레이션을 감축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버냉키와 블랑샤르의 분석에 따르면, 실제로 코로나19 대유행 이후 현재까지 이어지는 미국의 인플레이션 국면에서 에너지 가격은 중요한 요인 중 하나였다. 특히 2021년 4분기부터 2022년 2분기까지 인플레이션율이 최대 9%에 이르렀던 기간에 에너지 가격상승이 인플레이션의 가장 큰 기여분을 차지했고, 2022년 3분기에 인플레이션율이 3%대로 하락할 때 역시 에너지 가격 하락이 가장 큰 기여분을 차지했다. 이를 고려하면, 저비용 에너지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트럼프의 에너지 정책에 대한 대중적 지지를 무시할 수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이 곧바로 적극적인 화석연료 시추 정책이 실제로 트럼프가 공언하는 것만큼 미국의 에너지 가격을 낮출 수 있다는 주장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브루킹스연구소는 무엇보다 미국의 시추량 변화가 석유의 세계시장 가격에 미치는 영향이 그리 크지 않다고 지적한다. 석유 가격이 하락하여 수익성이 떨어지면, 미국을 포함해 세계의 석유 생산자는 기본적으로 석유 생산량을 줄이는 방식으로 대응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트럼프 행정부 1기 말기에 에너지 가격이 매우 낮았던 것은 미국 내 화석연료 시추량이 증가해서라기보다는 코로나19 대유행 기간에 이루어진 세계적인 경제 봉쇄의 영향이 더 크다고 본다.

    그러면서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의회를 통해 바이든 행정부 시기에 입법된 ‘인프라와 투자 및 일자리에 관한 법’(IIJA)이나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을 바꾸거나 폐지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다양한 행정조치를 통해 의회를 우회하며 에너지 분야의 규제를 철회하기는 쉬울 것으로 전망한다. 이에 따르면, 최근 연방대법원은 행정법을 둘러싼 주요 판결에서, 행정부가 시행한 조치가 심각하게 불합리하지 않다면 사법부가 이를 존중하고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다는 1980년대 이래의 ‘쉐브론 원칙’(Chevron deference)을 뒤집고, 중요한 경제적·정치적 결과에 대한 문제는 법률상 명시적인 의회의 승인이 필요하다는 ‘중요문제원칙’(major questions doctrine)을 새롭게 제기하는 한편, 모호한 법령에 대해서는 판사가 최선의 해석을 결정할 책임을 진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는 입법과 그에 따르는 행정조치에 대한 사법부의 심사와 개입을 강화하는 경향이라고 할 수 있다. 

    환경 관련 법안과 그에 따른 행정조치는 이러한 연방대법원의 새로운 경향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을 수 있다. 환경 관련 법안은 종종 규제기관이 새로운 변화나 기술에 대응해 권한을 사용할 수 있도록 다소 넓고 모호하게 입법되는데, 트럼프 행정부가 이러한 환경 관련 법안의 모호성을 공격하며 기존의 규제를 완화하거나 폐지하는 데 있어 연방대법원의 새로운 경향이 사법적인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4. 결론

     
    2024년 대선으로 돌아온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와 그에 따른 경제정책 공약은 1기 행정부 시기의 정책과 문제의식은 같지만, 그 수단이 더욱 강력해졌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8년 전과 마찬가지로, 트럼프와 그의 경제 참모들은 미국의 무역 상대국이 자유무역 국제질서를 악용해 미국에 불리하고 불공정한 무역관행을 강요하면서 미국에 대규모 무역적자를 야기하고 수많은 제조업 일자리를 빼앗아 갔다고 주장한다. 

    이제 트럼프는 한 발 더 나아가 더욱 강력한 관세조치와 중국경제와의 단절로 이를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한다. 트럼프가 새롭게 제안하는 보편적 기본관세와 상호주의관세가 영향을 미칠 무역 규모는 트럼프 1기 행정부에서 중국과의 무역갈등이 영향을 미쳤던 무역 규모의 약 10배에 달하며, 적용 대상도 중국을 넘어 미국을 상대로 무역흑자를 내는 국가 전체로 확대될 수 있다. 국내에서 투자와 일자리를 늘리겠다며 시행하려는 감세정책 역시 1기 행정부 시기보다 한 발 더 나아간다. 트럼프는 최고 법인세율을 15%까지 인하하고 TCJA에 따른 소득세 감면을 연장하며, 궁극적으로는 연방정부의 세입기반을 누진적 소득세에서 관세로 대체하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관세와 감세의 결합을 유지하기 위해 통화정책 결정에 대통령이 개입할 수 있도록 중앙은행 제도를 개편하려 할 수도 있다.

    이러한 트럼프의 경제정책은 본질적으로 반(反)경제학 내지는 ‘부두 경제학’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미국의 대규모 무역적자가 거시경제적 요인과 세계체계적 요인에서 발생한다는 사실을 부정하면서, 무역적자를 단순히 수입액과 수출액의 차이로 환원하기 때문이다. 거시경제 관점에서 무역적자는 국내 투자의 증가에 비해 저축률이 낮거나, 소비가 저축보다 많을 때 발생한다. 저축을 초과하는 투자는 해외로부터 자본 유입으로 조달되며, 저축을 초과하는 소비는 해외로부터 수입으로 이어진다. 미국은 대표적인 자본수입국이자 과잉소비 경제인데, 이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달러 기축통화국으로서 미국이 주도하는 금융세계화와 동아시아 달러 환류로 지탱된다. 관세와 같은 무역 장벽은 이러한 구조적 요인을 바꿀 수 없는데, 이런 점에서 트럼프의 경제정책은 금융세계화의 모순으로 인한 미국 대중의 불만을 외국 탓으로 돌리려는 것에 불과하다.

    트럼프의 부두 경제학과 반세계화 정책은 금융세계화의 모순을 해결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미국경제와 노동자계급에 해로운 결과를 낳는다. 특히 트럼프가 추진하는 관세와 감세의 결합이 2020년대 미국경제의 핵심 문제인 인플레이션과 부채위기를 오히려 심화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대규모 관세로 인한 비용 상승은 소비자물가 상승으로 이어지며, 대규모 감세는 소득불평등을 강화하고 연방정부의 세입기반을 약화해 재정위기를 악화한다. 나아가 약달러와 저금리라는 목적을 위해 통화정책 결정에 자의적으로 개입하려는 시도는 거시경제 관리의 안정성과 신뢰성을 위협하며 불확실성과 경제적 혼란을 증대할 것이다. 

    나아가 트럼프 경제정책의 위험성은 미국경제의 혼란을 심화하는 것을 넘어 세계의 무질서를 심화한다는 데 있다. 트럼프가 제기하는 대중국정책은 중국에 대한 규제 강화와 더 강력한 경제적 단절만을 추구할 뿐, 규칙 기반의 다자적 국제질서를 재형성하자는 문제의식이 전혀 없다는 점에서, 공화당과 민주당이 초당적으로 합의했던 중국과의 ‘전략적 경쟁’에서 점차 이탈하는 방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트럼프가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우며 그리는 세계는 국가 간에 협력과 규칙을 쌓아가는 세계가 아니라, 양자 간의 힘에 의해 결정되는 세계다. 사회운동이 제기했던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의 대안은 반세계화가 아니라 대안세계화였음을 돌이켜본다면, 트럼프가 미국을 ‘G 마이너스 2’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한 축으로 세우려는 시도에 대한 비판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1기 행정부 시기와 비교할 때, 두 가지 차이점이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위험성을 더욱 강화한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째는 공화당 내에서 ‘트럼프주의’가 훨씬 강화되었다는 점이다. 이를 상징하는 것이 △ 상호주의관세법 입법, △ 중국에 대한 최혜국 대우 폐지, △ 대규모 감세, △ ‘사회주의적인 그린뉴딜 정책’ 폐지와 같은 트럼프 캠프의 ‘어젠다 47’을 대부분 수용한 2024년 공화당 정강정책과, 트럼프 충성파를 자처하는 밴스 부통령 후보의 부상이다. 트럼프 1기 행정부의 경제정책과 대외정책에서 불확실성을 그나마 제어했던 것은 의회였는데, 이는 민주당 외에도 공화당 내에서 트럼프를 견제하는 전통적 엘리트 정치세력이 존재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나 이제 공화당 자체가 트럼프화된 상황에서, 2기 트럼프 행정부의 경제정책과 대외정책이 별다른 견제 없이 시행될 가능성이 있다.
     
    둘째는 세계금융위기 이후 저금리와 저물가 상황에서 고용 없는 회복이 문제가 되었던 2010년대 후반과 달리, 현재는 코로나19 대유행 이후 고착된 인플레이션과 부채위기의 압력이 훨씬 강해진 정세라는 점이다. 이는 트럼프의 경제정책이 거시경제와 세계경제에 불러일으킬 혼란이 더 큰 파급력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사회운동은 다시 돌아온 트럼프의 위험성이 그가 그저 ‘괴상하다’(weird)라는 데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
     
     

  • 2024-09-02

    상속세 완화, 무분별한 감세 경쟁을 멈춰야 한다

    저성장 시대 감세 기조 옳지 않아, 집값 상승으로 이득 봤으면 세금도 내야, 주가부양 위한 상속세 인하는 본말이 전도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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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성장 시대 감세 기조 옳지 않아, 집값 상승으로 이득 봤으면 세금도 내야, 주가부양 위한 상속세 인하는 본말이 전도된 것

    지난 7월 25일 정부가 2024년 세제개편안을 제출하면서 상속세(상속세 및 증여세법) 완화를 둘러싼 논란이 뜨겁다. (올 초에 공언한 금융투자소득세 폐지도 담겼는데, 자세한 사항은 사회운동포커스 <금융투자소득세 폐지, 총선을 앞두고 금융 포퓰리즘으로 퇴행하는 윤석열 정부(2024.1.19.)>을 참고하라.) 2년 연속 세수가 부족할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감세는 옳지 않다는 비판이 이어지고 있다. 이번 정기국회를 시작으로 국정감사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하반기 정국에 세제개편 문제는 내년도 예산안과 연동해 주요 쟁점이 될 것이다. 이 글에서는 28년 만에 처음으로 다뤄지는 상속세 개편 방안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이 문제가 지금 시점에 왜 등장했는지를 검토한다. 이어서 민주당의 ‘중산층 감세가 필요하다’는 논리를 비판하고, 현재 정부가 추진하는 상속세 완화가 왜 문제인지를 다룬다.
     
     
    상속세 개정안: 상속세 부담을 낮추고, 기업의 상속을 쉽게
     
    이번 상속세 개정안에 의해 정부가 추정한 상속세 감세분은 2024년 세제개편안 세수 효과의 90%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개정안의 핵심을 이룬다. 크게 세 가지 내용이 중요한데, 첫째는 과세표준과 최대세율을 조정하고 자녀공제 금액을 확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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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표를 보면, 개정안에서 과세표준 1억 원 이하를 2억 원 이하로 상향하고, 30억 원 구간을 삭제해 최고세율을 50%에서 40%로 낮춘 것을 알 수 있다. 더욱 파격적인 부분은 공제금액인데, 배우자공제 5억 원과 기초공제 2억 원, 일괄공제 5억 원은 현행대로지만, 자녀공제금액을 인당 5천만 원에서 인당 5억 원으로 대폭 상향했다.
     
    상속재산 25억 원을 배우자에게 상속하는 것으로 예를 들어보자. 이때 자녀는 두 명으로 가정한다. 현행 제도에서는 자녀공제 1억 원과 기초공제 2억 원을 합친 금액이 일괄공제 5억 원 미만이라 일괄공제 5억 원이 적용된다. 여기에 배우자 공제 5억 원을 더한 값인 10억 원이 공제되기에, 총 15억 원에 대한 세금 4억 4천만 원을 낸다. (1억 원 × 0.1 + 4억 원 × 0.2 + 5억 원 × 0.3 + 5억 원 × 0.4 = 4억 4천만 원.) 반면, 개정안으로 계산하면 무려 27천만 원의 절세효과가 발생한다. 개정안은 자녀공제 10억 원과 기초공제 2억 원이 일괄공제 5억 원을 초과하게 되어, 총 12억 원이 적용되며, 여기에 배우자 공제 5억 원을 추가해 공제 규모가 17억 원으로 늘어난다. 따라서 8억 원에 대한 세금 1억 7천만 원만 내면 된다. (2억 원 × 0.1 + 3억 원 × 0.2 + 3억 원 × 0.3 = 1억 7천만 원.)
     
    개정안의 둘째 내용은 대기업에만 적용되던 최대 주주 보유주식 할증평가 제도를 폐지하는 것이다. 여기서 최대 주주란, 주주 1인과 특수관계인의 보유 주식 합계가 가장 많은 경우를 뜻한다. 1993년에 도입된 할증제도는 최대 주주의 주식엔 기업 경영권이라는 프리미엄이 있다는 논리로 최대 주주 지분을 상속할 때 해당 주식 가치를 20% 높여 평가해 온 제도다. 2020년부터 중소기업은 폐지되어 대기업에만 적용하고 있었다. 최대세율이 사실상 60% 아니냐는 볼멘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10조 원 가치의 주식에 대한 세금이라고 했을 때, 워낙 큰 금액이라 과세표준 구간을 무시하면 원래는 약 5조 원을 세금으로 내야 하는데, 주식이 12조 원으로 할증평가 되면 6조 원을 세금으로 내야 하기 때문이다.)
     
    개정안에서 셋째로 눈여겨봐야 할 내용은 가업상속 공제의 적용대상과 한도를 확대한 것이다. 기존에는 중소기업과 중견기업의 경우에만 가업 영위 기간에 따라 최대 600억 원의 상속세 공제를 해주었다면, 개정안에는 밸류업, 스케일업이라는 특정 조건을 만족하는 기업에 공제 한도를 두 배로 상향했다. 세법에서 말하는 중소기업은 업종별로 다르나 대략 매출액 1천억 원 미만을 의미하며, 중견기업은 매출액 5천억 원 미만을 의미한다. 그런데, 주주환원액 비율이 높은 밸류업이나, R&D지출액이 높은 스케일업의 경우 매출액 제한을 폐지한다. 즉, 기업의 주가부양과 투자를 권장하는 맥락이다. 게다가 지역균형발전을 명목으로 기회발전특구에 창업하거나 이전하는 기업에 한해, 상속세를 면세한다고 밝혔다. (구체적인 요건은 개정안을 참고하라.)
     
     
    상속세 개편 논의가 지금 시점에 나온 이유
     
    최근에 상속세 논의가 불붙은 가장 큰 이유는 상속세를 납부하는 인원이 급격히 증가했기 때문이다. 현행 상속세가 자리 잡은 1997년 이래로 연간 2천 명대에 불과했던 납부 인원이 2020년 처음으로 1만 명을 넘더니 작년에 상속세를 납부한 인원이 2만 명에 육박했다. (그럼에도 상속세를 납부하는 인원은 피상속인의 6.5%에 불과하다.) 갑자기 사망자가 늘어난 것은 아닌데, 전체 피상속인 수는 일정하다. 상속세를 내야 할 만큼 물려받는 자산 금액이 큰 사람이 몇 년 사이에 급격히 늘어난 탓이다. 2018년 전체 상속액이 약 46조 원이었고, 이 중 28조 원은 공제되어 실제 과세 대상이 된 금액은 18조 원이었다. 반면, 2022년에는 상속액 총합은 96조 원이었고, 29조 원 정도가 공제되어 실제 67조 원이 과세 대상이 되었다. 2020~22년 문재인 정부 시기의 부동산가격 급상승, 즉 문 정부의 정책 실패가 상속세 개편 논란까지 이어진 것이다.
     
    여기에 상속세 감세의 직접적 수혜를 입는 집단의 특성도 작용한다. 우선 세대 상으로는 2022년 기준 평균수명이 82.7세임을 고려했을 때, 1930~40년생이 사망하면서 1950~60년생이 상속을 받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들 베이비붐 세대는 본인의 상속세에 대비할 나이대에 접어들기도 하여 상속세에 관한 관심이 뜨거울 수밖에 없다. 또한 실제 상속세를 납부할 만큼의 자산 규모를 생각해 봤을 때, 주로는 수도권 아파트 소유자에 관련한 문제가 된다. 자녀 세대까지 고려하면, 상속세 감세에 대한 우호적 여론이 수도권을 중심으로 상당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조원씨앤아이가 2024년 8월 10~12일에 진행한 여론조사에서 상속세 개편안 찬성이 53.1%, 반대가 38.5%로 나왔다.
     
    더불어서 기업의 상속과 관련한 쟁점도 있는데, 애초에 상속세 개편은 재계의 숙원 사업이었다. 재벌을 정점으로 가족경영이 흔한 한국의 특성상 상속세가 기업 경영에도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중소기업의 경우에는 상속세 부담에 회사를 폐업해 버리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있었다. 그런데, 이 문제가 최근에 수면 위로 부상할 수 있게 된 계기는 바로 ‘동학개미’의 등장이다. 현재 한국은 국내 증시 거래액의 60% 이상을 개미가 차지할 정도로 개인 비중이 세계 최고 수준이다. 코로나19 이전 500만 명이던 주식거래자가 현재 1400만 명이며 이들이 정치권에 끼치는 영향도 매우 크다. (이들의 비이성적인 행태에 대한 비판은 사회운동포커스 <누가 동학개미를 찬양하는가(2020.11.9.)>를 참고하라.)
     
    따라서, 이번 세제 개편안 역시 정부에서 추진하는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를 위한 기업 밸류업 프로젝트의 일환이라 할 수 있다. (코리아 디스카운트란 한국증권거래소에 상장된 기업의 가치를 낮게 평가하는 현상을 뜻한다.) 총수 일가가 상속세 낼 돈을 마련하려고 배당을 안 하고 돈을 차곡차곡 모아두거나, 상속세 납부를 위해 주식을 대량으로 팔아서, 혹은 그러한 전망으로 주가가 폭락하는 일이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학개미를 중심으로 코리아 디스카운트에 대한 불만이 폭증하는 가운데, 물 들어올 때 노 젓자는 식으로, 기업의 주가 부양을 위해 상속세를 깎아야 한다는 제안이 나온 것이다.
     
     
    민주당의 일명 ‘중산층 감세’도 문제
     
    그런데,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세제 개편안에 대한 민주당의 비판이다. 민주당은 개정안을 거부하는 것은 물론이고 일명 ‘재정 파탄 청문회’를 추진하겠다는 입장이다. “금융투자소득세 폐지, 상속세 최고세율 인하 등 부자 감세로 세입 기반이 훼손”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주장은 과장되었다. 애초에 상속세는 국세 수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적다. 2020년 기준 OECD 국가의 평균 상속세 규모는 GDP 대비 0.1%에 불과하다. 한국은 높은 편임에도 0.5% 정도다.
     
    그러나 본질적인 문제는 민주당도 상속세 감세를 주장한다는 사실이다. 개정안의 첫째 부분, 즉 과세표준을 조정하자는 주장은 애초에 민주당에서 먼저 나왔다. 지난 6월 4일 임광현 원내부대표가 “집값이 올라 상속세 대상이 된 중산층의 세 부담을 합리적으로 미세조정”해야 한다며 상속세 개편 논의에 불을 붙였다. 최고세율을 내리거나 최대주주 보유주식 할증폐지는 부자 감세라서 반대하지만, 과세표준 조정은 중산층 감세기에 민생문제로 시급히 해결해야 한다는 논리다. 이재명 대표도 당대표 연임을 확정한 직후 상속세 일괄공제와 배우자 공제를 상향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이에 임광현 의원은 일괄공제액을 현행 5억 원에서 8억 원으로, 배우자 공제를 5억 원에서 10억 원으로 올리는 상속세 개정안을 발의했다. 이 안에 따르면, 자녀가 한두 명일 때는 오히려 정부안보다 면세 혜택이 더 크다. (임광현 의원 안 18억 원, 정부안 한 명일 때 12억 원, 두 명일 때 17억 원.)
     
    현행도 일괄공제와 배우자 공제를 합해 10억 원은 공제된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민주당이 말하는 중산층이란 10~18억 원가량의 아파트를 소유한 집단을 뜻한다. 쉽게 말해, 강남에 아파트를 가진 사람은 상속세를 물어도 괜찮지만, 최근 집값이 폭등한 마포·용산·성동 아파트 소유자는 상속세를 낼 필요가 없다는 의미다. 자신의 지지층과 중도 표심을 노린 다분히 정치적 고려가 깔린 셈이다. 그러나 10~18억 원가량의 아파트를 소유한 세대에 대한 감세를 중산층 감세라고 주장하는 것은 넌센스다. 중산층은 OECD기준 중위소득의 75~200%까지의 소득을 가진 집단을 의미한다. 2023년 가구 순자산 기준으로 보자면 순자산 중간값이 2억 4000만 원이므로, 대략 1억 8천만 원에서 4억 5천만 원 정도를 의미한다.
     
    게다가 민주당이 주장하는 것처럼 최고세율은 손대지 않고 면세점만 높이는 감세 정책조차도 실제 혜택은 고소득층에게 더 많이 돌아간다. 예를 들어 현행 제도와 임광현 의원 안을 비교해 보자. 18억 원의 아파트를 상속할 때 현행 제도에서는 기본 공제 10억 원을 제하고 총 8억 원에 과세해 1억 8천만 원의 세금을 납부하게 되는데(1억 원 × 0.1 + 4억 원 × 0.2 + 3억 원 × 0.3 = 1억 8천만 원.), 임광현 의원 안에서는 공제 한도가 상향되어 면세 혜택을 받는다. 반면, 30억 원의 아파트를 상속할 때 현행 제도에서는 20억 원에 과세해 6억 4천만 원의 세금이 부과되나(1억 원 × 0.1 + 4억 원 × 0.2 + 5억 원 × 0.3 + 10억 원 × 0.4 = 6억 4천만 원.), 임광현 의원 안에서는 12억 원에 과세해 3억 2천만 원을 내게 된다(1억 원 × 0.1 + 4억 원 × 0.2 + 5억 원 × 0.3 + 2억 원 × 0.4 = 3억 2천만 원.). 총 3억 2천만 원의 절세 효과가 발생하는 것이다. 즉, 민주당의 방안도 따지고 보면 고소득층에게 더 큰 혜택이 돌아가는 부자 감세가 된다.
     
     
    상속세 완화가 문제인 이유 세 가지
     
    우선, 저성장 시대에 감세 기조는 옳지 않다
     
    저성장기의 한국은 고성장기의 빠른 세입 증가를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인 데다, GDP가 늘어날 때 세수가 확대되는 비율인 국세탄력성이 2010년 이후에는 1을 밑도는 상황이다(한국조세재정연구원, 2017.12.). 즉, 소득이 잘 늘지 않는 데다 늘어도 그에 따른 세수가 예전만큼 늘지 않는 상태다. 따라서 저성장기일수록 세입 확보 노력을 강화할 필요가 커진다. 또한, 앞으로 인구 고령화와 저출산으로 인한 복지비용을 감당하려면 중장기적인 시야로 재정 기반을 확충할 필요가 있다.
     
    물론, 과거에 비해 늘어나던 상속세를 조정하는 이번 개편안이 민주당이 과장하는 것처럼 재정 파탄을 불러오지는 않겠지만, 거듭되는 감세 정책은 건전재정 정책의 수용성을 낮추게 된다. 현 정부는 지난 정부 시기 늘어난 국가부채를 관리하기 위해 재정준칙 수립을 요구하고 있는데, 그러려면 감세보다는 지출 구조조정 노력을 우선하는 것이 타당하다. 감세로 투자를 활성화해 성장을 견인할 수 있다는 말은 가계에 현금을 살포해 경기를 진작시킨다는 말만큼이나 불황기에 잘 먹히지 않는다. 뾰족한 수가 없는 저성장 시대에 장기적 관점에서 재정확충 노력이 필요하며, 재정정책은 타깃을 명확히 해 차별적으로 운용되어야 한다.
     
    또한, 집값 상승으로 이득은 보고 세금은 못 내겠다는 건 도둑놈 심보다
     
    경제성장으로 자산가치가 늘어나면서 상속세를 내는 사람이 늘어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상속세를 납부하는 비율을 고정해 면세점을 조정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 부동산 가치 상승으로 이득을 본 만큼, 조세체계에도 이러한 측면이 반영되는 것은 당연하다. 게다가, 집값이 급등한 상황에서 상속세를 크게 완화하면 사실상 양도세가 사라지는 효과를 낼 수 있다. 부동산의 매매차익에 부과하는 자본이득세인 양도세를 자식에게 물려준다는 이유로 안 낼 수 있게 된 것이다. “누구는 두 배로 오른 부동산을 세금 한 푼도 안 내고 물려줄 때, 누구는 인플레이션 때문에 가치가 줄어든 전세금이나 물려주는 양극화의 확대 대물림이 예상된다”는 한 오피니언의 지적이 백번 옳다. (동아일보, <상속세 완화하려면 생전 불로소득 과세부터 제대로(2024.8.6.)>)
     
    게다가, 주가 올리자고 기업의 상속을 쉽게 해주는 건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한국의 상속세가 세계적으로 높은 편이라는 점은 사실이다. OECD 회원국 평균 상속세 최고세율은 26%이며, 한국처럼 최대 주주 보유 주식을 20% 할증하는 나라는 없다. 그러나 이는 한국의 특수성에 기인하는데, 회사에 대한 소유권과 경영권 모두를 확보하려는 재벌체제가 공고하기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한국 기업의 최대 주주 주식에는 단지 기업의 이익을 배당으로 공유받을 수 있는 권리만 포함되는 게 아니라, 사실상 기업을 지배하기 위한 지분율의 의미가 더 크기에 경영권 프리미엄을 붙이는 게 논리적으로 부당하지 않다.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핵심 이유는 이러한 재벌의 특수구조 그 자체다. 최대 주주의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해 알짜배기 사업부를 분할하고 주가를 인위적으로 낮추는 일이 공공연히 일어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최대 주주의 상속세 부담을 줄이면 주식시장이 살아난다는 논리는 이 구조를 더욱 공고히 해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지속시킬 뿐이다.
     
     
    무분별한 감세 경쟁을 멈춰야
     
    22대 국회에서 발의된 세법 개정안의 무려 96%가 감세 법안이라고 한다. (51.4%인 73건은 더불어민주당과 조국혁신당이, 44.4%인 63건은 국민의힘에서, 나머지 6건은 여야 의원이 공동 발의했다.) 무분별한 감세는 다시 되돌리기도 어려울뿐더러 고스란히 미래세대에 부담으로 작용한다.
     
    감세 정책이 의미가 있으려면, 미래의 더 큰 증세를 위해서 일 때뿐이다. 하지만 저성장 시대에 그 효과가 불투명한 게 현실이다. 그렇다면, 감세에 머리를 맞댈 것이 아니라 미래를 대비하는 재원 마련에 머리를 맞대야 한다. 더불어, 매년 200개가 넘는 세제개편안을 발표하는 것은 득보다 실이 크다. 미국에서는 1983년 세제개편에 대한 평가가 아직도 이루어지고 있는데, 기대했던 효과가 실제 나타나는지 철저히 평가해 차후 세제개편에 반영하려는 취지다. 국회와 정부는 세제개편에 더욱 신중할 필요가 있다.
     

  • 2024-03-15

    금융투자소득세 폐지의 문제점 

    총선을 앞두고 ‘금융 포퓰리즘’으로 퇴행하는 윤석열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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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선을 앞두고 ‘금융 포퓰리즘’으로 퇴행하는 윤석열 정부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월 2일과 17일 한국거래소를 방문해 금융투자소득세(금투세) 폐지를 공언했다. 지난해 11월 공매도를 전면 금지하고, 12월 말 주식 양도세가 부과되는 대주주 기준을 완화하겠다는 시행령 입법예고를 한 데 이어,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증권시장 개장식에 참석한 자리에서 2025년부터 시행될 예정인 금융투자소득세를 폐지하겠다고 공언한 것이다. 이는 시기상으로나 내용상으로나 총선을 앞두고, 오로지 증시 부양에 몰두하는 이른바 ‘개미투자자’의 표심을 노린 ‘금융 포퓰리즘’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한국의 금융소득 과세체계와 그 문제점

     
    금융투자소득세를 둘러싼 논쟁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먼저 금융소득의 종류와 한국의 금융소득 과세체계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금융상품에는 수신상품, 금융투자상품, 보험상품이 있다. 은행이 제공하는 수신상품은 투자 원금 지급이 약속된 금융상품으로, 예·적금이 대표적이다. 금융투자업자가 제공하는 금융투자상품은 원금 손실 또는 원금을 초과하는 손실이 가능한 위험이 있는 상품으로, 전자는 증권(주식과 채권)이고 후자는 파생상품이다. 마지막으로 보험상품은 미래 위험에 대한 금전적 보상을 약속하는 상품이다.

    이러한 금융상품으로부터 발생하는 소득은 이자소득, 배당소득, 양도소득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은행이 제공하는 수신상품이나 금융투자상품 중 채권과 같이 일정 기간 금전을 대여한 것에 대한 대가로 발생한 소득은 이자소득으로 분류된다. 한편 주식 등에 투자하여 지분투자에 대한 사업이익의 분배금을 받으면서 발생한 소득은 배당소득으로 분류된다. 마지막으로 채권가격이나 주식가격이 상승하여, 이를 매도해 매매 차익을 얻으면서 발생한 소득은 양도소득(자본이득)으로 분류된다.

    한국은 현재 이자소득과 배당소득에 대해서는 소득 발생 시점에 14%의 단일세율로 금융기관이 원천 징수한다. 다만 연간 이자소득과 배당소득의 총액이 2천만 원을 넘는 경우 종합소득세로 부과되어 전체 소득에 따른 누진적 소득세율을 적용받게 된다. 한편 증권의 가격 변동으로 인한 자본이득을 실현한 양도소득에는 양도소득세가 부과된다. 다만 개인의 채권 매매 차익, 소액주주의 상장주식 매매 차익, 파생상품 거래 차익은 비과세된다. 양도소득세가 부과되는 대상은 장외주식거래와 해외주식거래 차익, 그리고 대주주의 주식거래 차익이다. 즉 여기에 해당하면 양도차익과 보유 기간에 따라 20~30%의 세율로 양도세를 납부해야 한다. 요컨대, 대주주 기준에 해당하지 않는 대다수 개인투자자는 상장주식 거래 차익을 실현한 양도소득에 대해 과세를 면제받고 있는 것이다. 대신 주식을 거래(매도)할 때마다 납부하는 증권거래세가 부과되고 있다.

    이러한 한국의 금융투자소득 과세체계에 대해서는 그간 많은 비판이 제기되어 왔다. 무엇보다 개인투자자의 상장주식 거래 차익을 실현한 양도소득에 대한 비과세는 ‘소득이 있는 곳에 조세가 있다’는 조세의 대원칙에 어긋난다는 지적이 대표적이다. 또한 금융투자상품의 종류에 따라 과세 여부, 소득 구분, 과세표준 계산방식, 세율 등이 모두 달라 비슷한 성격과 소득을 갖는 금융투자상품 간의 과세 형평성이 저해되고 세무효율성도 떨어진다는 비판 역시 제기되어 왔다. IMF나 OECD조차 상장주식 양도차익에 대한 비과세를 포함해 각종 비과세 감면제도를 최대한 줄이고, 이를 바탕으로 종합과세를 철저히 시행하는 방향을 선택하거나 금융소득을 여타 소득과 분리해 과세하는 이원적 소득세제를 도입하는 방향을 선택할 것을 한국에 권고하고 있다.
     
     

    주식 양도소득 과세 대상 범위를 확대해 온 지난 10여 년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한국 정부는 우선 2010년대부터 일관되게 주식 양도소득에 대한 과세 대상 범위를 확대해 왔다. 즉 양도소득세 부과 대상이 되는 대주주 기준을 낮춰온 것이다. 기존에 종목당 100억 원 이상 또는 지분율 3%(코스피 기준) 이상 보유였던 대주주 기준은 2013년 50억 원 이상 또는 지분율 2% 이상 보유로 낮아진 것을 시작으로, 2016년과 2017년을 거쳐 계속해서 낮아져 왔다. 2020년부터는 10억 원 이상 또는 지분율 1% 이상 보유를 대주주 기준으로 삼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21년 기준으로 주식 양도소득세를 신고한 인원은 약 7천 명으로, 전체 주식투자 인구 1천4백만 명의 약 0.05%에 불과해 과세 대상이 여전히 너무 좁다는 지적이 많다.

    2020년에는 문재인 정부가 ‘자본시장 선진화 방안’의 일환으로 추진한 금융투자소득세가 소득세법 개정으로 입법되었다. 금융투자소득세는 그간 사실상 비과세되었던 증권과 파생상품을 비롯한 금융투자상품 일체의 양도차익을 과세 대상에 포함하고, 각 금융투자상품의 소득 구분·과세표준·세율을 통일하며, 금융투자상품 간 손익통산과 5년간 결손금 이월공제를 허용하는 것이 골자다. 쉽게 말해, 금융투자소득세는 주식·펀드·파생상품 등 금융투자에 따른 손익을 합산해 실현된 소득을 금융투자소득으로 통합하고, 이에 대해 과세표준에 따라 20~25% 세율로 세금을 징수하는 것이다.
     
    [%=사진1%]

    다만 주식시장 투자자의 반발을 고려하여, 다른 금융상품에서 발생한 양도소득에 대한 기본공제는 250만 원으로 설정한 것과 달리 주식투자에서 발생한 양도소득에 대한 기본공제는 기존 2천만 원에서 5천만 원으로 상향했다. (아울러 증권거래세도 금융투자소득세 도입을 전제로 2023년까지 단계적으로 먼저 인하하였다.) 이에 따라 기존보다는 과세대상이 확대되긴 하지만, 금융투자소득세 역시 전체 국내 주식투자자의 약 95%가 기본공제 대상에 해당하여 과세 대상이 여전히 너무 좁고, 조세 형평성 문제가 남아 있다는 한계를 지적하는 의견이 많다.

    이러한 한계가 분명하지만, 지난 10여 년간 주식 양도소득세 부과 대상이 되는 대주주를 확대해 온 과정이나 금융투자상품 일체의 양도차익을 과세 대상에 포함하는 금융투자소득세를 신설한 것은 조세정의에 부합하고 금융소득에 대한 과세형평성과 세무효율성을 제고하는, 이른바 금융세계화 시대의 ‘글로벌 스탠더드’에 부합하는 흐름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세계 주요국 역시 과세 형평성과 세무효율성을 고려하여, 자본이득에 대한 과세를 최대한 포함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일본, 영국, 독일은 모두 주식·채권의 양도차익에 대해 과세하고 있다. 일본과 영국은 이를 여타 종합소득과 분리해 금융투자소득 또는 자본이득으로 규정하고 따로 과세하고 있으며, 미국과 독일은 종합소득세와 분리과세를 병행하고 있다. 특히 일본은 오랜 기간에 걸쳐 자본이득을 포함하는 금융소득에 대한 과세 범위를 확대하면서, 증권거래세는 폐지한 대신 원칙적으로 기본공제나 면세소득을 적용하지 않고 있다.
     
     

    총선을 앞두고 ‘금융 포퓰리즘’으로 퇴행하는 윤석열 정부

     
    그런데 윤석열 정부는 지난해 12월 말 주식시장 부양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대주주 기준을 50억 원 이상으로 다시 상향하는 소득세법 시행령 개정을 입법예고 한 데 이어, 연초에는 2025년부터 시행될 예정인 금융투자소득세를 전면 폐지하겠다고 밝히면서 그간 이루어진 금융투자소득 과세체계 개혁 흐름에 완전히 역행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금투세 폐지가 필요한 이유로 ‘코리아 디스카운트’(한국 주식시장 저평가)를 언급하면서,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지 않는 자본시장 규제를 과감하게 혁파”하고 “주식시장 발전을 저해하는 과도한 세제를 개혁”하면 이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른바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요인으로는 재벌의 기형적인 기업지배구조, 미흡한 주주환원, 회계정보의 불투명성, 개인 주식투자자의 단기 투자 행태가 지적된다. 자본시장연구원은 그중에서 특히 미흡한 주주환원과 함께 상장기업의 저조한 수익성과 성장성이 실증적으로 유의미한 요인이라고 지적한다. 결국 한국 증시는 저평가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한국경제에 특징적인 재벌의 낮은 수익성과 기형적 지배구조의 문제가 제대로 평가된 결과일 따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고려하면, 재벌의 기업지배구조 개혁이나 금융소득에 대한 조세제도의 합리화가 아니라, 그간의 세제개편 방향에 역행하는 단순한 세제 감면만으로 국내 증시를 부양하겠다는 윤석열 정부의 정책은 퇴행적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윤석열 정부의 행보는 총선을 앞둔 시점에서 공매도 금지와 금투세 폐지를 요구해 온 개미투자자의 표심을 노린 것으로 보인다. 코로나19 대유행 시기 본격적으로 세력이 커진 개미투자자는 테마주 중심의 단기 투자에 몰두하면서 오로지 증시 부양에 도움이 되는 정책만을 집단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사회진보연대는 한국경제가 금융세계화로 편입되면서 ‘금융적 종속’ 상태에 빠진 가운데, 기관투자자와 외국인 투자자를 적으로 규정하며 자신의 사익 추구를 애국으로 포장하는 이른바 개미투자자의 행태를 비판한 바 있다. 이러한 행태는 한국경제의 금융적 종속을 완화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마르크스가 언급했던 것처럼 “자본의 ‘금융화’에 조응하는 노동과 사회의 ‘도덕적 타락’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누가 동학개미를 찬양하는가’, 《사회운동포커스》, 2020년 11월 9일.) 당정은 조세정의를 제고하는 금융소득 과세체계 개편 흐름에 완전히 역행하면서, 이러한 ‘금융 포퓰리즘’에 기름을 붓고 있다. ●
     
     

  • 2024-03-15

    부동산 PF 문제 해설

    빚으로 쌓아 올린 한국의 부동산 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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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빚으로 쌓아 올린 한국의 부동산 시장


    도급 순위 16위인 태영건설의 워크아웃이 1월 11일 확정되었다. 이제 채권단은 총선 다음날인 4월 11일까지 태영건설의 부실 규모를 실사하여 워크아웃 계획을 수립하게 된다. 대형건설사의 워크아웃은 쌍용건설 이후 10년 만이다. 그런데 태영건설의 워크아웃은 ‘단군 이래 가장 복잡한 워크아웃’이라는 평가를 받는데, 태영건설이 참여 중인 부동산 PF 사업장이 60곳이나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복잡한 이해관계를 조정하지 못하면 워크아웃이 실패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태영건설은 법정관리로 들어간다.

    부동산, 금융업계는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분위기다. 사실 2022년부터 꾸준히 부동산 프로젝트 파이낸싱(Project Financing, 이하 ‘부동산 PF’) 부실 문제는 한국경제의 뇌관으로 지목되었다. 부동산 PF 부실 문제는 왜 발생한 것일까? 한마디로 말해 부동산 시장이 호황일 때 과도하게 불려 놓은 빚잔치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고위험을 감수하고 고수익을 추구한 개인이 파산하면 끝나는 문제 아닐까? 부동산 PF를 매개로 금융기관이 연결되어 있기에 문제가 그리 간단치 않다. 이 글에서는 부동산 경기변동에 유독 취약한 한국의 부동산 PF 구조를 살펴보고, 이를 바탕으로 현재 문제가 되는 부동산 PF 부실 사태의 현황을 짚고자 한다.
     
     

    부동산 프로젝트 파이낸싱이란 무엇인가

     
    프로젝트 파이낸싱이란, 돈을 빌리는 사람의 신용도나 담보 대신에 프로젝트의 미래 수익성을 예측하여 이를 기반으로 금융기관에서 자금을 조달하는 금융기법이다. 돈을 빌리는 사람의 신용이 튼튼하지 않고 담보로 할 자산이 없어도, 사업계획이 좋아 미래에 돈을 많이 벌 것으로 예측된다면 금융기관에서 선뜻 자금을 빌려준다는 의미다. 그래서 PF는 주로 개발도상국의 사회간접자본 건설에 사용되던 금융기법이었다. PF는 돈을 빌려주는 사람에게는 고위험 고수익 투자가 된다.

    기업이 직접 자금을 조달하는 것과 달리, PF는 다소 복잡한 과정을 거친다. 우선 기업이 특정한 사업을 목적으로 하는 특수목적법인을 세운 뒤, 이 법인이(흔히 페이퍼 컴퍼니로 세워진다) 차주가 되어 프로젝트의 미래 현금흐름, 그리고 프로젝트 자체에서 나오는 자산(즉, 건물을 짓기 위해 땅을 산다면 땅)을 담보로 자금을 조달한다. PF는 기업어음이나 회사채보다 금리가 높지만 기업에 큰 장점이 있다. 기업의 이전 실적과 기업 자산에 대한 담보가 바탕이 되어 재무제표에 부채로 명시되는 은행대출이나 기업어음·회사채와 달리, PF는 명목상으로 별도의 페이퍼 컴퍼니가 빌린 돈이기 때문에 장부에 남지 않는다. 즉, 부외금융(off-balance-sheet financing)이다. 따라서 공식적인 채무비율을 높이지 않으면서도 레버리지를 일으킬 수 있다.

    또한, 사업 부실 시 리스크를 분담할 수 있다. PF는 물적 담보가 있는 게 아니라 프로젝트의 미래 현금흐름을 근거로 투자하는 것이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모회사에 상환을 청구할 수 없다. 게다가 은행권뿐만 아니라 비은행권, 보험회사, 증권회사 등 제2금융권에서도 돈을 빌려주기 때문에 대주(채권자) 역시 리스크를 분담할 수 있어 다양한 금융회사가 광범하게 PF에 참여한다.

    ‘부동산’ PF는 아파트, 주상복합, 상가의 미래 예상 분양 수입금을 기반으로 건설 자금을 조달하는 금융기법이다. 부동산개발은 큰돈이 필요하고, 장기프로젝트이기 때문에 해외에서도 PF 방식이 일반적이다. 기업 입장에서도 큰돈을 조달하다 보니 채무비율을 높이지 않는 부외금융 형식을 선호하게 되고, 장기프로젝트이기에 리스크 분산을 중시하게 된다. 그러나 집값이 오를 때 떼돈을 벌다가 집값이 내릴 때 하루아침에 줄도산에 이르는 한국의 부동산 PF 구조에는 외국과 다른 특수성이 존재한다.
     
     

    경기변동에 취약한 한국의 부동산 PF 구조

     
    주택을 공급하기 위해서는 세 단계를 거쳐야 한다. 자금조달 과정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착공 전까지의 단계에서 브릿지론으로 땅을 사고, 공사 단계에서 본PF대출을 통해 브릿지론을 갚고 선분양과 중도금을 보태 건물을 짓는다. 이후 준공이 완료된 마지막 단계에서 분양대금을 통해 최종 상환이 이뤄진다. 이 과정에서 각각 한국의 부동산 PF 구조의 고유한 취약성이 드러난다.
     

    1) 착공 사전 단계: 시행사가 땅을 사고 인허가를 얻는다

    사실 부동산개발의 핵심 주체는 PF대출의 차주이며 개발계획을 총괄하는 시행사다. 하지만 한국의 시행사는 대개 영세하며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기업이 많다. IMF 경제위기 이전에는 건설사(시공사)가 시행사의 역할을 담당했는데, 외환위기 이후 정부에서 기업 부채에 신경을 쓰기 시작하자, 건설사도 예전처럼 과도한 차입을 꺼리게 되면서 리스크 분담과 수월한 자금조달을 위해 시행사를 앞세우게 된다. 이때부터 건설사에서 많은 인력이 넘어가 시행사가 우후죽순 생겨나기 시작한다. 시행사는 땅 계약금 정도만 자기자본으로 가지고 나머지를 차입하기 때문에 개발만 성공하면 몇십 배에 달하는 이익을 회수할 수 있다. 극단적으로 화천대유자산관리가 5천만 원을 가지고 대장동 개발사업 시행사였던 ‘성남의뜰’ 지분에 참여해 수천억 원대의 이득을 볼 수 있었던 것을 떠올려 보면 쉽게 이해된다.

    하지만 대박을 터트리기 위해서는 여러 가시밭길을 지나야 한다. 일단 땅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소문이 돌아 땅값이 심하게 뛰거나 소위 알박기가 일어날 수 있다. 게다가 개발 목적에 맞게 용도를 변경하는 인허가 과정에서 예상치 못하게 시일이 늦어질 수 있다. 또한 부동산개발 자체가 장기프로젝트이기 때문에 정부의 정책 기조 변경이나 부동산 시장의 변동 위험에 노출된다.

    자기자본이 별로 없는 영세한 한국의 시행사가 이토록 위험한 사업에 어떻게 큰돈을 조달할 수 있었을까? 제2금융권을 중심으로 한 고금리 대출(브릿지론)과 건설사의 지급보증(신용보강의 일종)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사업 인가 전 시행사가 받는 브릿지론(bridge loan, 자금이 필요한 시점과 유입 시점이 일치하지 않을 때 다리 역할을 해주는 단기자금)은 토지잔금대출이라고도 불린다. 보통의 경우 땅을 확보하기 위해 들어가야 할 돈이 현재 땅의 가치보다 훨씬 크기 때문에(개발소식이 들리면 땅값이 오른다), 땅의 담보력을 바탕으로 토지구입에 필요한 자금을 전부 대출할 수가 없다. 따라서 담보력이 없는 부분까지 포함해 제2금융권을 통해 고금리로 받게 되는 것이다. 이때 빌려주는 금융권은 경험도 돈도 없는 시행사를 온전히 믿을 수 없기에, 실질적인 개발사업의 주인인 건설사의 지급보증을 요구하게 된다. 건설사 입장에서도 수주를 많이 받기 위해 경쟁적으로 지급보증을 서게 된다. 이렇게 법률적, 형식적 주체인 시행사가 건설사의 바지사장에 불과한 기이한 구조가 형성된다.

    그러나 해외의 부동산 PF는 사업의 미래현금, 즉 아파트가 목표한 가격에 다 팔릴지, 상가 분양이 잘 이뤄질지에 따라 대출이 이뤄진다. 이러한 미래의 현금흐름 역시 100% 장담하기 어렵지만, 이와 달리 알박기의 유무와 같은 해당 토지에서 개발사업이 시작할 수 있느냐의 문제는 불확실성이 매우 큰 영역이다. 따라서 해외의 부동산개발에서도 땅을 구입하는 과정까지 PF대출을 받지는 않는다.
     
    [%=사진1%]

    대표적으로 미국의 부동산 개발사업 과정과 비교해 보자([그림1]). 미국의 시행사는 토지매입 단계에서 투자자로부터 자금을 모아 자기자본을 합해 총사업비의 대략 2~30% 정도를 초기자금으로 확보한다. 반면 한국의 경우는 총사업비의 3~5% 내외가 시행사의 자기자본이다. 또, 미국은 시행사의 자기자본을 토대로 대출을 일으키기 때문에 LTV(담보가치에 대한 대출 비율)가 4~50% 수준이다. 이와 비교해 한국은 LTV가 매우 높은데, 평균 77.5%(대형증권사)에서 93.4%(중소형증권사) 수준으로 매우 높다. 이후 미국의 시행사는 더 많은 투자자로부터 추가자금을 확보해 공사에 들어가기 전에 대출금을 모두 상환하고 토지 담보를 해제하는 과정을 거친다. 따라서 공사 자금을 대출하는 과정에서만 PF대출이 이뤄진다. 반면, 한국은 토지매입 금액까지 전부 PF대출을 통해 조달한다.

    시행사가 투자자를 유치하는 것과 은행에 대출받는 것 모두 결국에는 돈을 빌리는 것인데, 무엇이 그리 문제일까? 미국에서는 부동산 경기가 나쁘면 투자자와 합의해 땅을 좀 놀리다가 경기가 좋아질 때 건물을 지을 수 있다. 반면, 한국의 경우 땅을 구입하는 자금부터 대출로 충당하기 때문에 이자가 계속 나가고, 만기까지 돈을 갚아야 하기에 경기가 좋든 나쁘든 곧바로 건물을 올려야 한다. 또한 미국의 경우 공사 단계에서 자금조달 부담이 적기에 수월하게 PF대출이 가능하다. 토지를 바탕으로 건설 자금만 확보하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은 본PF를 통해 브릿지론을 상환하고 건설 자금이나 사업비 일부를 충당해야 한다. 따라서 대출규모가 상대적으로 크고, 돈을 빌려주는 금융기관 입장에서는 담보력이 온전치 못하게 되니 건설사의 지급보증을 요구하게 된다. 쉽게 말해, 아파트를 지으려고 하는 시행사가 너무 돈 없이 시작해서 생기는 문제다.
     

    2) 공사 단계: 건설사가 건물을 짓는다

    착공에서 준공까지 보통 2~3년이 걸리기에 예측하지 못한 변수로 프로젝트가 좌초될 위험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첫 삽을 뜨게 되면 착공 전 단계보다 불확실성이 많이 해소된다. 이때부터 시행사는 본격적으로 PF대출을 받는데, 이를 본PF라 부른다. 건설회사 입장에서 브릿지론보다는 본PF 지급보증을 더 수월하게 서주는 편이다. 본PF대출에 제1금융권은 선순위로 들어가고 제2금융권은 고금리로 후순위로 들어간다. 본PF 전체 대출에서 브릿지론을 상환하는 비중이 가장 크고, 나머지로 공사비 일부를 조달한다. 그럼 부족한 공사비, 각종 사업비는 어떻게 조달할까? [그림2]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나라에는 선분양 제도가 있어서 계약금, 중도금을 받아서 공사비로 쓸 수 있다. 즉, 계약금·중도금으로 공사를 하고, 공사비 명목으로 빌린 돈으로는 땅을 사는 식으로 돌려막는다.
     
    [%=사진2%]

    선분양을 통해 공사자금을 조달하는 방식은 한국의 독특한 특징인데, 미국, 캐나다, 영국, 호주 등에서도 선분양 제도는 있지만 사업비를 확보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사업성을 증명하는 용도일 따름이다. (선분양 비율이 높을수록 대출 이자율이 낮아진다.) 따라서 수분양자(분양을 받는 사람)의 계약금을 공사비, 사업비로 사용하지 않고 제3기관에 예치한다. 또한 분양계약을 사인 간 계약으로 보아 보증기관이 개입하지 않는다. 한국은 수분양자의 자금으로 사업비를 충당하기 때문에 이들이 토지 및 건물의 담보권에 있어 대주단(채권단, 대출을 해준 금융기관들이 모여 결성한 단체)과 우선순위가 비슷해지고, 수분양자 보호를 위한 주택도시보증공사의 분양보증으로 인해 대주단은 유사시 보증기관에 담보물의 소유권을 이전해야 하는 등 온전한 담보권 확보가 어렵다. 따라서 대주단은 보통 본PF대출 시 시공사의 지급보증을 요구하게 된다.

    이처럼 본PF로 브릿지론을 상환하고 계약금·중도금으로 건물을 짓는 단계적 상환, 즉 돌려막기 구조는 부동산 경기 변화에 따라 부실 가능성을 키운다. 부동산 경기가 호황일 때 브릿지론을 받아 비싸게 땅을 샀는데 집값이 내려가고 금리가 너무 올라, 분양이 다 되어도 사업비를 보전하지 못할 것 같게 되면 본PF를 해주려는 금융기관을 구할 수 없게 된다. 또한 건물을 다 지어도 예상만큼 분양 이익을 거두지 못하게 되면 건설사의 부채로 남게 된다. 심한 경우 도중에 공사가 중단되기도 한다. 현재가 딱 이런 상황이다.
     

    3) 준공 및 입주 단계: 입주자가 분양대금을 완납한다

    분양대금으로 본PF를 상환해야 하는 개발사업의 최종 단계다. 분양만 성공적으로 완료된다면 이전의 모든 위험성은 사라지고 땅 주인도, 시행사도, 건설사도, 수분양자도, 금융기관도 모두가 행복한 상황이 펼쳐진다. 이제 남은 것은 최종소비자인 가계가 은행에 주택담보대출을 착실히 갚으면 되는 문제다. (고금리 시대의 가계부채 문제라는 쟁점이 있지만 이 글에서 다루지는 않겠다.) 시행사가 개발계획을 세우는 단계에서 분양이 완료되는 전 과정을 봤을 때, 결과적으로 미래의 분양대금을 끌어와 소자본의 시행사가 엄청난 레버리지를 일으켜 사업을 벌이는 구조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대형건설사의 신용이다. 따라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일차적인 타격은 건설사가 지게 된다. 결국은 금융기관과 보증기관(즉 세금)에도 그 여파가 오겠지만 말이다.

    시행사가 아파트 개발사업의 바지사장인 증거는 시행사가 아니라 건설사의 시공능력평가순위를 토대로 PF대출을 판단하고, 건설사의 신용등급이 PF금리를 결정하고, PF유동화증권도 결국에는 건설사의 신용도와 신용보강을 기초로 발행된다는 점이다. 결국 국내 부동산 PF는 사실상 건설사의 신용을 기초로 하여 실행된 일종의 담보대출, 사실상 기업금융적인 성격이 강하다고 볼 수 있다.

    부동산개발의 특성상 불확실성이 크기 때문에 미국 역시 금융기관이 담보 및 모기업의 신용보강을 요구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향후 임대 수입이나 선분양비율을 통해 확인한 수요가 투자를 결정하는 핵심 요소다. 또한 미국에서는 반드시 건설사만 신용보강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금융기관도 나서서 장기대출로 전환해 주거나 신용을 추가로 제공하기도 한다. 한국과 미국의 이러한 차이는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한국에서는 대주단이 온전히 담보력을 행사할 수 없기에 생기는 문제다. 이러한 이유로 대주단은 시행사에 돈을 빌려주면서 건설사의 신용보강을 요구하게 된다. 따라서 부동산 경기가 호황일 때 건설사의 지급보증과 같은 우발채무(특정한 조건이 되면 갚아야 할 잠정적인 채무)가 급속히 증가했다.

    이처럼 리스크를 분담하려는 PF의 취지가 무색하게 결과적으로 최종 리스크를 건설사가 지는 구조가 형성되었다. 그러므로 부동산 거품이 조정되는 국면에서 PF 부실 문제가 건설사의 부도위기로 비화한다. 대형건설사의 파산은 경제에 큰 부담을 지운다. 당장 태영건설만 해도 500여 곳이 넘는 협력사가 있다. 그런데, 부동산 PF 부실 사태는 단지 돈 빌려준 금융기관과 돈을 빌린 시행사, 그리고 보증은 선 건설사만의 문제에서 그치지 않는다. 지난 레고랜드 사태에서 확인했듯이 금융시장 전체로 확대될 수 있는데 그 매개는 PF대출채권을 바탕으로 한 유동화증권이다.
     
     

    금융시스템 위기로 전염될 위험성을 높이는 부동산 PF 유동화시장

     
    2007~09년 금융위기 당시에 확인했듯이 자산유동화가 위험한 이유는 기초로 하는 자산이 실물자산의 가치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는 가공자산이라는 데 있다. 부동산이라는 담보물은 실물자산이지만, 부동산 PF를 빌려줬고 갚겠다는 약속이 담긴 대출증서는 금융자산이다. 자산유동화는 후자를 기초자산으로 하여 증권을 발행한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없는데 김칫국부터 마시는 일이다. 또한, 만기까지 자금을 회수할 수 없는 대출증서를 언제든 사고팔 수 있는 유동자산으로 변화시키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채권-채무 관계가 불투명해진다. 부동산 PF가 연체되면 돈을 빌려준 금융기관뿐만 아니라 이를 바탕으로 발행된 유동화증권을 매개로 채권시장 전체에 타격을 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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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3]의 8번부터 12번까지가 부동산 PF의 유동화 과정이다. 대략의 메커니즘은 이러하다. 아무리 부동산 경기가 호황이라고 하더라도 장기간 거금을 통째로 빌려줄 ‘대주’를 구하기는 쉽지 않다. 따라서 시행사는 증권사의 도움을 받아 유동화 회사(SPC)를 설립해 단기 채권을 발행한다. 즉, 1000억 원을 5년 뒤 상환하겠다는 장기 계약을 토대로, ‘3개월 뒤에 1억 1000만 원을 준다’는 채권을 1매당 1억 원으로 발행해 1000장을 판매하여 자금을 조달한다. 3개월마다 이 작업을 반복해 빚을 빚으로 갚는 식으로 5년을 버티기 위해서는 20번의 차환이 필요하다. 이 과정이 원활히 이뤄지지 않을 시 증권사가 채권매입을 하겠다는 신용보강을 해주기 때문에 PF 유동화증권이 폭발적으로 증가할 수 있었다. 이처럼 유동화 과정을 통해 기존에는 본PF가 어려웠던 사업장까지 부동산 PF 시장이 더욱 확대될 수 있었다.

    지난 몇 년간 한국의 부동산 PF 유동화시장은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표1]을 보면, 국내 유동화증권 전체에서 부동산 PF 유동화증권이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함을 알 수 있다. (자산담보부 단기사채(ABSTB)의 비중이 가장 높은 이유는 만기가 통상 3개월 이하인 초단기증권이기 때문이다. 또한, 발행 주체의 입장에서도 공시의무를 면제받을 수 있다는 제도적 편리성이 존재한다.) 「국내 증권업 부동산PF 유동화시장의 추이와 위험 분석」(자본시장연구원, 2019.)에 따르면 2014년부터 2018년 사이, 부동산 PF 대출잔액이 42.5조 원에서 64조 원으로 1.5배, 유동화증권의 발행잔액은 11.7조 원에서 25.0조 원으로 2.1배 증가했다. 부동산 PF의 대출과 유동화증권 모두 꾸준한 성장세를 보였고, 그중에서도 유동화시장의 성장세가 더 두드러진 모습이다.
     
    [%=사진4%]

    이 성장세를 주도한 금융기관은 증권사였다. 2014년에서 2018년까지 단 5년 만에 증권사의 부동산 PF 유동화시장점유율은 37.4%에서 54.9%로 증가했다. 이러한 급속한 성장에 힘입어 증권사 투자은행(IB)부문의 수익은 2013년 말 6349억 원에서 2018년 말 2조 6376억 원으로 크게 확대되었다. 증권사는 부동산개발 수요가 확대되던 시기에 틈새를 노렸다. 공동주택보다는 오피스텔, 지식산업센터 등 상업용 부동산이 경기 변화에 더 큰 타격을 입기 때문에 보통은 주거용 부동산보다 위험성이 크다. 은행은 대형건설사를 끼고 공동주택(아파트)처럼 대규모 대출이 요구되는 부동산 PF에 대출을 해주었지만, 증권사는 중소건설사를 통한 개발사업이나 오피스텔, 지식산업센터 같은 소규모 자금조달이 필요한 곳을 파고들었다. 부동산개발 시행사를 상대로 유동화증권 발행 방식의 부동산 PF를 선택하도록 각종 인센티브를 제공하며 경쟁적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신규 준공 건수 기준 오피스텔, 지식산업센터의 비중이 각각 2017년 상반기 14%, 6%에서 2018년 하반기 23%와 14%로 1년 반 만에 큰 폭으로 증가했다.

    2007~09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처럼 기초가 된 금융자산이 모두 휴지 조각이 되는 극단적인 상황이 아니더라도 부동산 PF 유동화증권은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이미 발행된 유동화증권의 만기시점에 어떤 이유에서든지 차환이 원활히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유동성 위기에 처할 수 있다.

    2022년 레고랜드 사태 때 이 문제가 불거졌다. 강원도가 강원중도개발공사의 기업회생 신청을 결정함에 따라 개발공사의 대출채권을 기초로 강원도가 보증해 발행한 PF 유동화증권 ABCP 2050억 원이 미상환되면서, AAA등급의 한전채가 유찰되는 일이 빚어질 만큼 채권시장에 엄청난 파급력을 일으켰다. 이 사건 이후 각종 부동산 PF 유동화증권이 차환발행에 실패하기도 했는데, 대표적으로 둔촌주공아파트 재건축 PF가 차환에 실패해 파장을 일으켰다. 이후 정부가 50조 원이 넘는 유동성 공급 프로그램을 통해 진화에 나섰지만, 이때부터 부동산 PF 시장 전반에 위기감이 고조되기 시작한다.

    정리해보자. 개발연대 시기 한국은 분양받는 사람들의 돈을 빌려 아파트를 짓기 시작했다. 이후에는 이러한 선분양 제도와 함께 건설사가 은행에 빚을 지고 집을 짓게 된다. 그러다 외환위기 이후 건설사의 채무비율을 늘리지 않기 위해 시행사가 PF대출을 받는 구조가 정착되었다. 2011년 저축은행 사태로 건설사의 우발채무를 공시하게끔 규제가 가해지자 이제는 증권사가 유동화증권을 발행해 건설 자금 조달에 이바지하게 된다. 빚을 내는 주체만 바뀌어 왔을 뿐이지 부동산 경기를 타고 엄청난 레버리지를 통해 무서운 속도로 주택을 공급하는 시스템은 바뀌지 않았다. 시행사, 건설사, 증권사, 수분양자 모두 개발이익을 통한 일확천금을 바랐기에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러나 과도한 레버리지를 바탕으로 굴러가는 시장은 거품이 형성되기 마련이다. 
     
     

    저축은행 사태 이후에도 부동산 PF 시장은 확대

     
    이제부터는 2024년 한국의 부동산 PF 부실 실태를 확인하고자 한다. 수영장 물이 빠지면 누가 발가벗고 수영하는지 알 수 있다는 말처럼, 부동산 경기가 호황에서 불황으로 반전되면 돌려막기 구조가 더는 지탱되지 못하고 돈맥경화가 발생한다. 부동산 PF 대출 부실로 촉발된 2011년 저축은행 사태가 바로 그러했다. 그 여파는 심각했는데, 2011~13년 동안 상호저축은행 29곳이 파산했고, 당시 예금자 보호를 받지 못한 10만 명이 1조 3천억 원을 날렸다. 같은 기간 100대 건설사 중 거의 절반에 이르는 회사가 워크아웃을 경험했고 25개는 부도처리 된다. 그러나 이토록 심각한 사회문제를 겪고도 근본적인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부동산 PF 대출 규모는 증가했다.

    2011~13년 사태로 저축은행이 부동산 PF 시장에서 주춤하게 되자 여신전문, 상호금융기관, 새마을금고, 피투피업체의 참여가 확대된다. 2014년부터 2022년 6월까지 PF 대출 증가액은 은행권이 6.9조 원, 비은행권이 70.1조 원이다. 자기자본대비 PF 대출 비율을 보면 증권사, 보험사, 여전사가 큰 폭으로 상승한다. 또한 비은행권 PF 대출은 부실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큰 아파트 외 사업장이 다수를 차지했다. 2023년 9월 현재, 부동산 시장 전체 규모는 2700조로 2022년 연간 명목 GDP 2100조를 크게 웃돈다. 이중 부동산 PF 규모는 163조이며 여기서 제2금융권이 70%를 담당하고 있다.
    이혁준 나이스신용평가 금융평가본부장은 이렇게 말한다. “2013~2014년 부동산 경기가 바닥일 때 A증권사가 PF에 공격적으로 뛰어들었다. 그때 다른 증권사들은 ‘저러다 큰일난다’며 비난했다. 그런데 A사 이익이 급증하니 2018~2019년엔 모든 증권사가 PF를 취급하고 있더라. 증권사들이 PF에 뛰어들기 전엔 연간 이익이 4조 원 정도였는데 그 이후엔 8조 원이 됐다. 2011년 PF 투자로 호되게 당한 저축은행은 2018년부터 다시 들어갔다.”
     
     

    건설사의 실질적인 우발채무는 오히려 증가

     
    저축은행 사태를 거치면서 재무제표에도 잡히지 않는 건설사의 지급보증이 문제라는 인식이 확산하고, 2011년 국제회계기준을 전면 적용하면서 건설사의 지급보증이 감사보고서 주석사항에 ‘우발채무’로 기재되게 된다. 즉, 잠정적인 부채로 간주하겠다는 의미다. 따라서 건설사도 2010년대에 들어서면 지급보증과 같은 직접적인 신용보강을 축소하고자 노력하게 된다.

    2009년 자본시장법 제정으로 증권사에 채무보증이 법적으로 허용되면서 이 틈을 타고 부동산 PF나 부동산 PF 유동화증권에 대한 증권사의 신용보강이 크게 확대되기 시작했다. 증권사의 PF 대출 관련 채무보증은 2013년 말 5.9조 원에서 2022년 6월 말이 되면 24.9조 원으로 증가한다. 아래 [표2]를 보면, 최근에 확대된 부동산 PF 유동화증권 발행에서 신용보강의 주체가 주로 증권사였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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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건설사 입장에서는 우발채무가 줄었으니 상황이 좀 나아진 것일까? 실제로 건설사의 우발채무가 확대하는 추세는 아니다. 그러나 실질적인 우발채무가 감소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지금도 건설사가 다양한 방식으로 시행사에 신용보강을 해주기 때문이다. 게다가 증권사의 신용보강 역시 결국 그 토대에는 건설사의 신용이 있다.

    [그림4]의 왼쪽 그래프를 보면 도급 순위 상위권의 대형건설사 우발채무의 총액이 감소하는 추세를 확인할 수 있다. 반면, 오른쪽의 변형된 PF 신용보강을 포함한 우발채무 현황을 보면 2013년을 기점으로 오히려 증가함을 알 수 있다. (현재 의무적으로 공시가 이루어지는 PF 우발채무와 달리, 업체 재량에 따라 공시범위가 정해지는 변형된 PF 신용보강의 경우 업체별로 공시 규모가 크게 달라서 비교적 상세히 공시하는 GS건설, 롯데건설 사례를 바탕으로 추산되었다. 보고서는 타 건설업체도 유사한 추이를 보일 것으로 판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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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대표적인 변형된 PF 신용보강의 사례는 ‘책임준공약정’이다. 원래 ‘책임준공’이란 용어는 공사비가 계약 일정에 따라 지급되었을 때 건설사가 건축물을 완공시킬 의무라는 의미로 업계에서 사용된다. 그러나 PF 구조에서 체결되는 책임준공약정은 ‘공사비 지급여부나 시행사의 의무이행 여부와 관계없이 건설사의 책임으로 공사도급계약서에 정한 공사 기간 이내에 해당 건물을 준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선분양에 실패해 공사자금이 들어오지 않거나 이러저러한 문제로 시행사가 파산한 상황에서도, 건설사는 정해진 기한 내에 공사를 완료해야 한다. 따라서 예전처럼 PF 대출에 대한 직접적 보증은 아니더라도, 공사가 중단될 상황에 부닥치면 건설사는 빚을 지더라도 아파트 준공을 완료해야 한다.
    또한 증권사가 PF 유동화증권을 발행하면서 제공하는 신용보강인 ‘매입보장약정’은 증권사가 유동성을 공급해 차환을 보장해 주는 방식인데, 신용위험 회피를 위한 조건이 포함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조건이란, 건설사의 신용등급이 정해진 수준 이상으로 하락하게 되면 증권회사의 매입보장 의무가 소멸한다는 조약이다. 이렇게 되면 건설사가 유동성 위험을 추가로 부담하게 된다.

    이외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변형된 우발채무가 존재하는데, 분양성과가 저조할 때를 대비해 정해진 시점까지 책임분양금액이 입금되지 않으면 건설사가 미입금된 부족분을 지불하는 책임분양제도 있다. 이 모든 사항은 궁극적으로 PF 대출원리금의 적기상환을 위해 건설사가 책임을 부담한다는 원리로 작동한다. 저축은행 사태 이전에는 건설사가 직접 리스크를 졌다면 이제는 제2금융권이 리스크를 분담하지만, 최후의 순간에는 건설사에 다시 리스크가 돌아오게 설계되었다. 건설사가 화수분은 아닐진대 도대체 무엇을 믿고 이러한 구조가 온존하게 된 것일까? 대마불사가 정형화된 사실로 자리 잡은 한국이라 가능한 구조라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풍선을 터트리지 않기 위해 서서히 바람을 뺀다

     
    문재인 정부 시기 부동산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코로나 사태 이후 유동성이 많이 공급되어 세계적으로 부동산 가격이 상승한 이유도 있겠지만, 그 진폭이 극심했던 데에는 세금을 통해 수요를 통제하려는 정부의 정책실패가 있었다. 2015년 대비 2020년 기준 개발사업 추진 건수 자체가 2.3배 이상 늘었다. 사업성이 확인되지 않은 사업장까지 자금이 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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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5]에서 확인할 수 있듯 2020~2021년 동안 급격하게 오른 부동산 가격은 2022년 들어 급전직하했다. 부동산 시장의 거품이 조정되는 상황과 동시에 2022년부터 본격적으로 기준금리가 올랐고,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로 원자재 가격이 급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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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3]에서 확인할 수 있는 현재 상황을 바탕으로 예를 들어보자. A건설사가 책임준공을 확약한 100억 원짜리 아파트 분양 공사가 있다고 치자. 토지 확보 금액으로 40억, 공사비로 30억이 필요해 본PF로 70억을 대출받는다. 금융비용 수수료는 10억 정도로 예상된다(70억 × 연이자율5% × 차입금평균사용기간 2년 = 7억, 각종 컨설팅 및 법률비용을 약 3%로 가정해 3억). 원래는 건설사와 시행사 각각 마진 10억씩을 남기는 사업이다. 그런데 공사비용이 자재대금 상승으로 평균 24%가 올라 37.2억이 되었다. 이자율은 10%대로 상승하였으니 금융비용과 수수료는 18억(70억 × 연이자율10% × 2년 = 14억, 각종 컨설팅 및 법률비용을 약 4%로 가정해 4억)으로 치솟았다. 분양가 하락 없이 100% 분양되어도 이미 95.2억이 비용이다. 그런데 부동산 시장 거품조정으로 분양가가 하락했다. 아파트매매가격지수 91을 적용할 경우 당장 건설사는 적자로 전환하고 차입금도 다 갚지 못하는 상황이 된다(현행 매매가격 91억 – 공사원가 95.2억 = 손실 4.2억). 여기에 분양률마저 하락하면 건설사는 공사대금을 받지 못하고 아파트를 떠안는다.

    그나마 아파트를 준공한 곳은 나은 지경일지 모른다. 40억을 주고 땅을 샀는데, 사업성이 불투명해 본PF 대출을 못 받고 멈춰있는 경우는 답이 없다. 시간이 갈수록 이자는 쌓여가고, 결국 만기연장에 실패하면 경매로 가야 하는데, 최근 브릿지론 단계 토지가 경매로 30~50%만큼 할인된 가격에 낙찰이 된다고 한다. 20~28억으로는 브릿지론 조차 다 못 갚기에, 시행사는 파산하고 채무보증을 선 건설사와 은행에 빚으로 쌓이게 된다. 그런데 지난 1년간 브리지론에서 착공 단계인 본PF로 진입한 사례가 거의 없다. 그만큼 심각한 상황이다. 위의 표를 보면 브릿지론 금리가 100% 상승하고 공사비용도 24% 상승하는 동안 아파트 가격은 9%밖에 떨어지지 않았다. 똑같은 경제환경에서 코스피가 24% 하락하는 동안 말이다. 아직도 꺼질 거품이 많이 남았다는 증거다.

    금리와 원자재 가격이 올랐던 2022년에 이미 위기는 예견되었다. 그런데 지난 1~2년간 위기가 유예되었다. 부동산 PF 부실 문제가 금융시장에 끼치는 영향이 광범하고, 자칫하다간 시행사와 건설사의 줄도산 및 협력사의 타격으로 이어질 수 있기에 정부는 일단 브릿지론, 본PF의 만기를 연장할 수 있도록 개입했다. 2023년 4월 PF 대주단 협약을 체결해 만기연장 의결 요건을 2/3로 낮추었다. 채권단이 모두 동의해야 만기를 연장하거나 이자를 탕감해주는 자율협약과 비교해봤을 때, 의결 요건을 낮추게 되면 대형 은행권을 중심으로 금융당국의 정책 방향과 발을 맞추기 쉽기 때문이다. 마치 언제 터질지 모르는 빵빵한 풍선에 바람만 막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을 영원히 지속할 수는 없는 법이니, 터지기 직전 서서히 바람을 빼는 과정에 돌입한다. 지난해 12월 12일 이복현 금감원장이 PF 사업장의 옥석가리기가 불가피하다고 발언하고, 일몰된 상태였던 기업구조조정촉진법이 12월 8일 국회에서 통과되어 26일 재시행되자 약속이나 한 듯 12월 28일 태영건설이 워크아웃을 신청한다.

    얼마나 심각한 상황이기에 금융당국이 결국 메스를 들이댄 것일까? [그림6]의 부동산 PF 대출 연체율을 살펴보자. 연체율 평균치는 2.4%대로 그다지 높지 않지만, 증권사의 연체율은 17.3%에 달한다. 저축은행 사태 때 저축은행의 PF 대출 연체율이 25%였던 것과 비교해 적은 수치지만, 그때보다 제2금융권의 규모가 훨씬 커진 상황이라는 점을 고려했을 때 문제는 심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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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설사의 우발채무, 특히 앞서 살펴본 실질적인 우발채무의 규모를 정확하게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벌써 다음 워크아웃 건설사는 어디냐는 이야기가 언론에 오르내린다. 태영건설은 지난해 6월 이미 신용등급이 강등되었고 자기자본대비 우발채무가 400%가 넘는 상황이었다. 특히 본PF보다 브릿지론 보증이 많았다. 롯데건설 역시 지난해 신용등급이 강등되었고 자기자본대비 PF 우발채무가 200%가 넘는 상황이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실질적인 우발채무의 규모도 상당할 것으로 보여 안심할 수 없어 보인다. 2011년처럼 건설사의 줄도산이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이익의 사유화 손실의 사회화로 끝나선 안 된다

     
    금융시스템 전반을 위험에 빠지게 하는 부동산 PF 같은 문제에 대처할 때에는 딜레마에 처하기 쉽다. 소수가 고위험 투자를 통해 막대한 이익을 거둬드릴 때는 그냥 지켜봐놓고, 그런 투자가 잘 안 될 때에는 왜 다수가 그 후폭풍을 감내해야 하냐는 저항에 부닥치게 된다. 정부가 금융기관 중심으로 85조원 시장안정기금을 마련하고 대주단 위주로 지원책을 강구해 혈세 지원은 피하겠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면 다른 곳에 쓰였을 사회적 자원이 낭비되는 꼴이다. 게다가 최상목 기재부 장관은 “필요할 경우 한국은행도 공개시장운영을 통해 유동성 지원을 뒷받침할 계획”이라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또한, 펀드 조성에 참여한 공공금융기관, 대주단에 포함된 국책은행이나 태영건설 PF 사업장에 지급보증을 한 주택도시보증공사가 존재하기에 지금도 이미 손실의 사회화는 진행중이다. 그렇다고 정부가 손을 놓고 있기에는, 금융시스템이 마비되고 줄도산이 일어날 위험이 존재한다. 일이 잘못되면 태영건설의 협력사, 이와 거래하는 곳까지 부도 위기에 처할 수 있다. 아무 죄 없는 노동자의 임금체불 문제도 불거질 수 있다. 울며 겨자 먹기로 만기를 연장하는 동안 좀비기업 역시 계속해서 양산될 것이다. ‘옥석가리기’라는 말은 쉽지만, 이 과정에서 심각한 사회적 갈등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

    땅 주인처럼 단기간에 떼돈을 벌었던 사람들이 있었던 만큼, 거품이 꺼지고 나서 단기간에 무너지는 사람들이 생기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이치다. 따라서 금융기관의 도덕적 해이를 단죄하고 재발을 방지할 수 있는 규제가 필요하다. 부동산 PF 시장이 확대하는 동안 증권사 간부가 차명으로 시행업체를 만들어서 PF를 통해 떼돈을 버는 일이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대형증권사 부동산 PF 성과급이 합계 8,510억 원에 달했다는 보도도 있다. 어떤 방식으로든지 고위험을 추구한 시장참여자에 대한 페널티가 필요하다. 또한, 근본적으로 빚으로 건물을 올리는 한국의 부동산 구조 전반을 손보겠다는 계획이 수립되어야 기업구조조정에 대한 사회구성원 간 합의가 이뤄질 수 있을 것이다. 일례로, 현재는 법정자본금 3억을 들고 신고만 하면 설립 가능한 시행사의 설립 요건을 강화할 수 있다. 선분양비율을 축소하거나 중도금 비중을 줄이는 정책을 제시할 수도 있다. 집값이 이례적으로 오르는 데는 거시경제적 상황과 정부의 정책뿐만 아니라 가계의 비이성적인 행동과 기대도 한몫한다. 오르는 집값에 배팅해 과도한 레버리지를 일으키며 부동산 시장에 참가하는 사람들이 많기에 현재와 같은 구조가 꿋꿋이 버틸 수 있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