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 2006-09-06

    시민권 체제의 재구조화: 1990년 프랑스와 캐나다의 여성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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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 류미경 (정책편집국장), 장진범 (정책편집부장) 세계화의 영향하에 진행되는 구조조정은 복잡한 현상이다. 사회 정책은 해체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개조되었다. 정치적 참여의 형태와 제도도 변화하고 있다. 새로운 시민적 권리와 인식이 획득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세계화의 다양한 측면에 맞서고 그 다양한 측면을 이해하기 위한 사회운동들의 투쟁의 결과에 따라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시민권 체제가 변화하고 있다. 이 글은 여성 운동 및 그 조직이 1945년 이후 시민권 체제를 설계하는 데 참여했고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그 체제에 중요한 프로그램을 확대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행위자였던 점을 관찰하는 것으로 출발한다. 따라서 1980년대 중반 이후 시민권의 축소․재설계라는 상황에 직면한 이 운동 및 조직의 활동에 초점을 두고 있다. 또한 여성의 참여와 영향력이 운동들마다 크게 다를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 캐나다와 프랑스의 사례를 들고 있다. 요컨대, 이 글은 프랑스 운동의 중도파가 정치적 게임의 규칙, 좀 더 구체적으로는 선거법을 바꾸는 데 초점을 두면서 전략을 크게 변경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1)그런 가운데 이들은 공화주의적 시민권을 정치적 평등으로 제한하는 정치적 담론을 확대하는 데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한편 사회적ㆍ경제적 평등의 쟁점을 시장의 영향력 하에 남도록 허용하면서, 사회적 의제를 경시했다. 1990년대까지, 프랑스 여성들은 선출직 의회에서의 젠더 평형(Gender parity)을 쟁취하기 위한 유럽차원의 운동을 주도했으며, 몇 가지 중요한 성공을 거두었다. 여러 입법기관 선거에서 (이전의 유럽 의회 선거에서처럼), 오랜 기간 동안 의회에서의 여성이 과소 대표되는 상황을 뛰어넘어, 선거가 거듭될수록 이전에 비해 두 배에 이르는 당선자를 배출하여 결국 1997년에는 10.9%에 이르렀다. 이러한 변화는 좌파 정당, 특히 사회당(Socialist party)에 집중되었는데, 이는 젠더 평형 쟁취 운동에 대한 분명한 반응이었다. 사회당의 경우, [지역구] 후보의 30%를 여성으로 배정했다. 그리고 수 해 동안의 개혁을 위한 능동적인 동원을 거친 후, 프랑스 의회는 1999년 제 5공화국 헌법 개정을 위한 투표를 실시했다. 현재 3절은 “법은 공직에 대한 여성과 남성의 평등한 접근을 보장한다.”라고 규정하고 있으며, 다음 절은 정당들에 이러한 평등을 달성할 것을 지시한다. 반면 캐나다의 [여성] 운동은 전후 시민권 체제를 중심적으로 방어했다. 당시 정부를 지배했던 신보수주의적 수사에도 불구하고 캐나다의 운동은 자신의 입법 의제에서의 진전을 이루어냈다. 이러한 운동은 미치레이크 협정(Meech Lake Accord, 1988-90)2) 및 샬롯타운 협정( Charlottetown Agreement, 1991-92)3)을 둘러싼 헌법 정치와 미국-캐나다 자유무역협정(FTA)(1985-90)과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반대 운동에도 깊숙이 개입했다. 이들은 항상 사회 프로그램의 평등을 방어하는 입장을 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운동은 현재 눈에 드러나지 않을 정도로 축소되었고, 국가 내에서 이에 대한 제도적 지원은 사라졌고(Jenson and Philips, 1996), 재정의 감소로 조직적 기반도 약화되었다. 시민권 체제의 재구축에서 여성 및 여성조직의 참여에 관한 위의 두 가지 사례 연구는 우리에게 체제 변화에 있어서 여성 참여에 관한 참조점을 제공해준다는 측면에서 유용하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 논문은 정치와 동맹에 관한 전략적 선택은 여성운동이 체계 재설계과정에 참여하여 영향력을 행사하는 역량의 효과를 규정했다고 주장한다. 포섭 또는 배제 어떤 것도 자동적인 것은 아니다. 이는 과거의 참여, 동맹의 상황, 그리고 시민권 체제를 바꾸기 위한 다른 행위자들의 노력에 대한 대응방식의 전략적 평가에 의해 좌우된다. 시민권 체제: 간략한 소개4) 시민권은 사회적 구성물이다.5) 따라서 공간과 시간에 따라 변화한다. 우리는 시민권 체계를 국가의 정책 결정과 예산 지출을 이끌고 구체화하는 제도적 장치, 국가와 시민에 의한 문제 정의, 시민들에 의한 권리 주장으로 정의한다. 시민권 체제는 그 안에서 “국민”, “표준 시민”, “이등 시민”, “비-시민” 등의 전형적인 동일성의 표상을 규약화한다. 또한 이러한 범주들 간의, 혹은 각 범주 내의 적절하고 합법적인 사회적 관계, 그리고 “공”과 “사”의 경계의 표현을 규약화한다. 다시 말하면 시민권 체제는 주로 정치를 정의하는 데 기여하는데, 이러한 정치는 각각의 관할권 내에서의 정치적 논쟁 및 문제 인식의 경계를 조직한다. 이러한 동일성 및 사회적 관계의 표상은 권리 주장을 위한 토대다. 이는 집단과 개인이 그들의 이익을 자신,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동일성을 표현함으로써만 가능하다. 다시 말해, 자아의 표상은 이익의 표상의 통합적인 측면이다. 국가도 일정한 역할을 갖는데, 그 안에서 국가는 일반적으로, 그리고 시민의 특정한 범주로서 시민을 인정할 권한을 갖는다. 국가는 이러한 인정을 국가를 향해 제기된 주장을 이해하는 데 사용한다. 시민권 체제는 체제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안정적이다. 실제로 우리는 제공된 지위와 기대한 지위가 일치하는, 그럼으로써 국가에 의한 시민의 표상이 시민들 자신에 의한 표상과 조화를 이루는 체제를 안정적인 것이라고 특징지을 수 있다. 체제이기 때문에, 시민권은 신속하고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정치적⋅경제적 동요의 시기에 변화를 발견하기를 기대할 수 있다. 이렇게 국가의 역할이 근본적으로 재구축되는 시기에, 국가와 시장 사이에서의 노동의 경계,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경계, “국민”의 정의와 “표준 시민”의 정의는 바뀔 수 있다. 동일한 일반적 특징이 시민권 체제의 재설계에 포함되는데, 국가와 그 제도, 사회운동을 포함한 시민 사회의 정치 세력이 이에 해당한다. 1985년 이후 캐나다 여성운동: 진보 세력의 최후?6) 1970년대 중반까지, 전후 시민권 체제에는 전국 규모의 기관들이 포함되었다. 이 기관들은 시민을 개별 “캐나다인”으로 언급했고, 단 수 십년 동안 시민을 동일화하는 단일한 정치적 공간으로서 국가 전체를 그렸다. 그러나 동시에 시민의 특정한 범주에 대한 상징적이고 실용적인 인식이 있었다. 그리고 이에 따라 이러한 특정한 이익을 대표하는 시민사회의 각 부문을 매개하는 연합은 합법성을 부여받았다.(Jenson 1991) 처음에는 이러한 매개 연합은 시민권 체제의 사활적인 측면으로 인식되었다. 왜냐하면 주변화된 집단을 조직화함으로써 이들은 미숙한 민족적 동일성을 강화했고, 이에 대한 충성을 확립했다. 1970년대까지, 이러한 연합은 시민 동일성의 중요한 표상으로 받아들여졌고 사회ㆍ경제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놓인 사람들에게 목소리를 부여함으로써 민주주의적 과정의 공정성에 기여하면서 사회적 권리를 옹호했다. 캐나다인의 동일성은 사회적 요소를 포함하게 되었다. 체계의 구축은 장기적인 계획이었다. 이는 전쟁 시기에 시작했고, 영국 신민이 아닌 캐나다 시민을 탄생시켰던 1946년 시민법은 민족적인 동일성을 정의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계기였다. 이는 1982년 헌법에 삽입된 권리와 자유 헌장(Charter of Rights and Freedoms)에서 가장 정교한 형태에 이르렀다.7) 평등 및 사회발전의 담론은 사회적 권리의 자유주의적 토대를 보충했다. 전후 시대를 거치며, 진보 세력은 국가 발전을 달성하는 데 가장 중요한 기관은 연방정부라고 사고했다.8) 그 결과는 연방주의적 활동을 강력하게 선호하며 “지방분권주의”와 지방정부에 대한 지나친 책임 부여를 불신하는 좌파 및 진보적인 정치 속에 유산으로 자리 잡았다.9) 넘쳐나는 평등과 사회 정의의 담론은 정당 재정구조의 개혁에서부터 보건의료에 이르는 모든 것을 위한 제안을 형성했다. 이는 또한 국가에 대한, 그리고 국가 내에서의 시민의 표상을 확고히 하기 위한 매개 조직들을 지원하는 붐이 일면서 더욱 견고해졌다.10) 이러한 담론 내에서 시민권이라는 정치적 권리를 실현하는 데에는 시민들에 대한 접근을 보장하는 이러한 기초적인 기관에 대한 국가의 지원과 규범이 필요했다. 연방정부 시민국 차관보를 지낸 버나드 오스트리 (Bernard Ostrry)에 따르면, 이 부서의 목표는 “참여를 지원하고 사회적 불평등 의식을 완화하는 프로그램을 통해 캐나다 시민권의 개념을 강화 발전시키는 것”이었다.(Pal 1993: 109에서 인용) 여성운동은 정부 지원금 지급의 우선적인 대상이었다. 왜냐하면 젠더 불평등이 사회적 불평등의 한 형태로 인식되었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왕실여성지위위원회>(Royal Commission on the Status or Women)는 이등 시민에 관한 기록을 만들고 이를 비판했는데, 이러한 이등 시민은 여성을 옹호하는 기능을 하는 조직들을 지원함으로써 (그리고 창조함으로써) 바꾸어내야 하는 것이었다. <왕실여성지위위원회>의 이러한 권고의 결과로 <전국 행동 위원회>(NAC, National Action Committee)가 탄생했고, 1972년 이 조직이 창립할 당시 연방정부로부터 15,000 달러를 받았다. 그 후에도 NAC은 계속해서 지원금을 받았고 (1980년대 초반 지원금의 90%가 연방정부에서 나왔다[Bashevikin 1996:220]) 다른 여러 여성 단체들도 마찬가지였다 (국무부만 놓고 보더라도 여성 단체를 위한 예산이 1973년 22만 3천 달러에서 1985년 천 2백 5십만 달러로 증가했다[Burt, 1995:p.87].). 여성운동의 의제는 시민권 체제 안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반영한다. 1984년 산드라 버트(Sandra Burt)는 여성 단체들의 우선적 과제를 조사한 결과, “그들이 주로 낙태법, 작업장에서의 성평등, 여성에 대한 폭력의 종식, 국가 차원의 보육 정책에 집중하고 있다”고 파악했다.(Burt 1995:88) 전국 규모 조직의 하부 조직에 있어서, “그들의 목표는 여성-중심적인 체계를 만드는 것이었고 가정과 직장에서 여성을 공정하고 평등하게 취급하는 것을 가로막는 장벽을 제거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Burt 1995:89). 이러한 과제는 모두 연방정부에 전적으로 책임이 있거나 “개입주의적 연방주의” 시절에 중심적인 역할을 하던 것들이었다. 그러므로 바세프킨(Bashevkin)의 초기 저작에 나타난 NAC에 관한 묘사는 비단 이 조직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고, 광범위한 다른 여성 단체에도 적용될 수 있는 것이었다. “전반적으로 NAC의 견해는 법적 권리, 평등한 고용기회를 비롯한 여타 형태의 제도적 개혁을 강조하는 자유주의적 시각뿐만 아니라 연방정부를 정책 변화의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 보는 중앙집권주의적 시각 역시 반영하고 있었다”(Bashevkin 1996:221).11) 최근 여성운동의 작업과 투쟁은 시민권 체제에 적합하도록 맞추어졌다. 이들은 아직 완전한 시민권을 갖지 못하여 이를 획득하기 위해 투쟁하는 집단을 대변한다. “맞추어졌다”는 것은 획득한 것들이 접시에 담긴 채 전달되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명백하게도 이는 사실이 아니다. 심지어 대부분의 “시민권” 투쟁에서, 1980년대 초반 헌법 내에서의 평등한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투쟁에서 28절은 오직 대규모 동원과 정치적 행동을 통해서 쟁취되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운동이 젠더 불평등에 저항하는 행동을 조직할 때, 이들은 진보적인 세력뿐만 아니라 여성운동가 출신 관료(femocrat)들이 정당 내에서 중요한 정책적 역할을 담당하는 연방 정부 내에서도 동맹 세력을 물색한다. 이들의 주장은 당시의 정치적 담론 내에서도 “이치에 맞는” 것이었으며 다른 정치 세력 뿐 아니라 엘리트 가운데에서도 동맹 세력이 있었다. 운동이 제기하는 주장이 이치에 맞는 것이었던 이유는 형평(equity)과 평등(equality)에 관한 광범한 정치적 담론 내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급여에 있어서의 형평(Pay equity)’이 캐나다에서 제기되면서 이는 여성운동이 사회 정의의 언어를 사용하고 사회 정의가 무엇인지 정의하도록 돕는 방법의 사례를 제공했다. 캐나다에서 “동일 가치”를 이야기하는 방식은 ― 다시 말해, ‘급여에 있어서의 형평’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 여성들이 노동조합 운동과의 연계 속에서 투쟁을 조직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그 과정에서 노동조합을 포함한 집단적 행위자들의 역할을 유지하는 가운데 법적인 처방을 추구했다. 그러므로 이는 미국과 비교해 볼 때 법정에서의 소송에 덜 의존적인 투쟁이었다. 이는 노동조합에 반하는 여성들의 투쟁이 아니라 여성과 노동조합이 함께하는 투쟁이었으며, 이들의 공통된 생각은 시민 사회가 제대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매개 연합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법정보다는 정치적 과정을 활용하고자 했다. 실제로, “형평”을 위한 투쟁을 호소하기로 한 결정은 시민권 체계가 얼마나 “공정함”이라는 개념에 중심을 두었는지를 반영한다. 산드라 버트는 1993년 전국적인 조직에 대한 두 번제 조사 연구 작업에서 기본적인 연속성을 확인했다. 운동들은 여성들의 욕구를 보다 포괄적으로 정의하고자 했다. 이는 소수자와 이민 여성의 권리를 강조하는 데에도 반영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집단들은 페미니즘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 계속해서 평등의 언어를 사용했다. “이들에게 페미니즘은 여성의 완전한 평등, 여성에 대한 동등한 기회, 여성의 법적 평등의 달성이었다”(Burt 1995:90-91). 게다가 이러한 집단들이 제시한 평등에 이르는 길은 꽤 구체적이었다. “페미니즘을 옹호하는 그룹이 제기하는 평등한 권리의 요구는 우선적으로 정부의 사회적 프로그램 혹은 여성 단체들에 대한 재정 지원이라는 형태의 조치를 요구하는 것이었다”(Burt 1995:92). 불행하게도 평등을 달성하는 방법에 대한 이러한 묘사는 ― 그리고 심지어 평등의 언어 역시 ― 소귀에 경 읽기였다. 1985년 브라이언 멀로니가 이끄는 토리당은 여성단체를 비롯한 시민 단체(advocacy group)에 지원하는 재정을 삭감했다. 1993년 자유당이 재집권했을 때, 이들도 계속해서 재정을 삭감했다. 우익 파퓰리스트 개혁당도 이에 동참했으며, 토리당은 대부분의 시민단체에 “특수한 이익”을 옹호하며, 결국 아무도 대표하지 않는 집단이라는 꼬리표를 붙였다(Phillips 1991). 자유당 정부는 여성 관련 부서를 폐쇄해버리기까지 했다. 왕실위원회의 권고로 설치된 <여성지위에관한 자문위원회>(Advisory Council on the Status of Women)도 사라졌다(Jenson and Phillips 1996). 게다가 토리당 정부의 뒤를 이어 자유당 정부는 캐나다 국가를 재설계하는데 개입했다. 사회 서비스에 대한 책임은 지방정부, “제 3 섹터”, 그리고 시장이라는 세 방향으로 분산되었다. 이러한 변화가 특별히 여성을 겨냥한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전후 시민권 체계의 붕괴와 신자유주의라는 정치적 담론의 출현을 의미했다. 연방정부는 자신의 역할을 버리는 데 여념이 없었다. 연방정부는 FTA 및 NAFTA에 참여하면서 국가 주권의 한 부분을 “자유 무역”의 규칙에 양도했다. 또한 이전에는 공적으로 제공되었던 서비스를 “제 3 섹터 파트너”가 공급하도록 설득을 시도하고 있다. 게다가, 연방정부는 “중앙 정부”로서의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기를 포기하면서 지방정부로의 “분권화”를 옹호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캐나다의 영어권 지역에서는 운동의 방향이 형평을 추구하던 것에서 시장화를 추구하는 것으로 바뀌고 있다.12) 시장과 국가, 그리고 지역공동체 간의 관계를 신자유주의적으로 정의하는 것에 대한 늘어나는 지지가 이러한 변화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시장의 유비가 시민권의 개념과 실천을 직접적으로 뒤덮고 있다. 이러한 유비에 따르면, 이익의 표상은 경쟁적 시장 ― 이상적으로는 자유 시장―이며, 이에 적합한 참여자는 개인이다. 신자유주의자들이 보기에 개인은 자신과 가족의 이익을 책임져야 하며 그들의 사회⋅경제⋅정치적 성공과 실패를 대해 책임진다. 정당은 시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경쟁할 수 있지만 매개 연합은 아무런 역할이 없다. 경쟁에 놓여있는 가치는 광범위한 시민이 실제로 대표될 수 있도록 보장하는데 있어서나 불이익을 당하는 시민의 범주가 모두 참여할 수 있는 역량을 발전시키도록 지원하는데 있어서나 시민권에 대한 평등한 접근을 보장하기 위한 국가의 개입을 최소화 할 것을 함축하고 있다. 형식적인 시민권과 이에 대한 실질적인 접근권 사이의 간극은 개인적인 차이 또는 차등적인 참여의 결과인 것이다. 구래의 시민권 체제를 대체할 이러한 제안이 즉각적으로 대중적인 지지를 얻지는 못했다. 실제로 1980년 중반 자유무역협정을 위한 협상이 개시되면서 진보적인 세력들은 ― 스스로 “대중 부문(Popular sector)”이라 칭함 ― 연방 정부의 전략을 구성하는 각각의 요소들과 싸웠다. 이들은 미국의 자유주의에 이끌리는 것에 저항하고 사회 프로그램, 특히 공공 의료로 상징화된 캐나다의 동일성을 보호할 수 있는 강력한 중앙정부에 대한 그들의 헌신을 명목으로 이러한 싸움을 전개했다. 대중 부문은 (이전에는 지배적이었던) 캐나다 시민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자신의 정의를 방어하기 위해 투쟁했다. 대중 부문을 구성하는 집단들은 분명히 자신들이 캐나다인이 되는 것이 의미하는 바를 쟁취하기 위해 투쟁하고 있다고 여겼다.13) 이러한 모든 투쟁에서 NAC와 여타 다른 많은 여성운동은 앞장섰고, 또 중심적인 역할을 차지했다.14) 우선 자유무역과 일자리 감소가 특별히 여성을 공격했고, 자유무역협정이 캐나다의 정치 체제를 위협했다(Cohen 1992). 미치레이크(Meech Lake) 헌법 개정안과 샬롯타운(Charlottetown) 개정안이 퀘벡주에 (미치레이크 협정이 이에 해당), 그리고 원주민 자치 기관에 (샬롯타운 협정) 지나치게 많은 결정권을 부여함으로써 평등 권리 헌장을 약화시킴에 따라 이러한 개정안에 대한 반대가 형성되었으며, 이 두 법안이 폐지됨으로써 이러한 반대는 신뢰를 얻게 되었다. (당시 전국행동위원회의 대표였던 Rebick(1993)의 글에서 그 사례를 확인할 수 있다). 그 사이에 정부의 보육 정책에 반대하는 흐름이 있었는데, 이러한 반대는 관련 법안을 사문화시키는 데에 기여했다(Philips 1989). 또한, 상품 및 서비스 세금(Goods and Service Tax)에 반대하는 투쟁도 있었다(Cohen 1992). 이 모두는 1980년대 후반 및 1990년대에 발생했던 큰 투쟁이었는데, 캐나다의 사회적 전통을 신자유주의로부터 방어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방어는 점차 축소되었다. 미치레이크 헌법개정안이 폐기된 후 퀘벡주의 몇몇 단체들은 (비록 이들이 연방주의적인 입장으로 기울어 있었지만) 사라졌고, 이는 능동적인 국가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사라졌음을 의미했다. 1993년 대선에서 자유당이 당선되었을 때, 이들은 그 의제가 단순히 “신보수주의”적인 것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의 생각을 바로잡아주었다. 자유당은 멀로니 정부의 프로그램을 열성적으로 시행했다. 실제로 그들은 이를 더욱 심화했다. 보수당과 마찬가지로, 자유당은 개혁당의 파퓰리즘과 시장개인주의보다 우익적인 입장에서 자신을 방어해야 했다. 주요 지방(알베르타, 이후 온타리오)들은 더욱 분명한 우파 정부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다시 말하면, 1990년대 중반까지 여성운동의 구래의 시민권 체계를 방어하기 위한 활동 및 그 안에서의 그들의 입지는 점점 더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바세프킨이 1980년대 중반 이후의 시기에 대해 이야기한 바와 같이, “NAC는 점차 조정자라기보다는 중요한 이해 집단으로 기능했고, 점차 반대집단으로서 규정되었다”(1996;223). 문제는 “왜?”이다. 우리는 정치적 기회의 구조가 근본적으로 변경되었음을 확인했다. 엘리트 및 국가 내부에 존재했던 운동 단체들의 동맹은 실종되었다.15) 그러나 그보다 중요하게는 운동들이 방어하고자했고 그 동일성을 규정했던 프로젝트가 반향을 잃었다. 여성운동은 젠더 쟁점을 넘어서는 시민권에 대한 시각을 표출하는 일련의 프로그램과 실천을 방어해왔다. 여성의 평등은 사회 정의를 위한 폭넓은 주장과 겹쳐졌으며, 이를 위한 운동과 조직은 국가와 개인 간의 중요한 매개자 중의 하나였다. 민주주의와 정의는 이러한 운동의 주장에 의존했으며, 이 모든 것은 캐나다의 동일성으로 표현되었다. 이러한 프로젝트는 “변화를 거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이것의 중심적인 표현이자 그 가치를 핵심적인 전달하는 제 2세대 여성운동은 이를 이해하는 사람이 점점 줄어들고 있음을 확인했다. 투쟁의 어려움 속에서도 1980년대 커다란 변화를 이끌어냈던 이전의 강력한 운동은 옆으로 밀려나 국가, 언론으로부터 사라져 내적인 침체에 직면해 있다. 프랑스의 “평형을 위한 운동”(Mouvement pour la parite): 미래의 물결? 독자들이 알아챘기를 바라지만, 캐나다 여성운동의 다양한 요구와 서술 목록 안에서 성별 현존/진출(presence)의 정치는 의제에 오른 주요 항목이 아니었다. 샬롯타운 협정으로 귀결된 회담에서 상원 개혁에 관한 약간의 토론이 있었는데, 이는 상원을 선출 기관으로 만들 뿐만 아니라 성별 평형을 보장하게끔 하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착상은 브리티쉬 컬럼비아(British Columbia)의 신민주당 정부가 입장을 바꾸면서 지지를 철회하자 논의에서 밀려났다. 마지막 분석에서, 이 협상에 깊숙이 관여한 페미니스트 법률가는 다음과 같이 썼다: NAC는 정부 제도들이 유색 남성과 장애 남성, 동성애 남성이나 빈곤 남성과 마찬가지로, 이 모든 다양한 여성들을 포괄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에 처음부터 관심을 기울여 왔다. 우리는 여전히 백인 비장애인 이성애 전문직 남성이 지배하는 완벽하게 성별 균형적인 제도보다는 40%의 여성을 포괄하는 제도를 선호할 것이다. 이는 프랑스와 그 밖의 유럽 연합에서 벌어진 평형 운동의 입장과 같지 않다. 프랑스에서 이 운동이 지지자를 획득하기 시작한 것은, 1992년 프랑수아 가스파르, 클로드 세르방-슈레베, 안 르 골이 『시민 권력을 향하여: 자유, 평등, 평형』을 출판하면서부터다. 1993년에는 평형에 기초한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577인 선언(여성 289명과 남성 288명)이 발표되었다. 1996년 6월에는 우파 및 좌파 정부 출신 여성 전임 장관 열 명이 『렉스프레스』지에 평형을 위한 선언을 발표했다.16) 사적 구성원들의 장전이 국회 논의 석상에 올랐는데, 당시 제안된 평형 획득 방안은 헌법 개정에서부터 정치 정당의 공적 지원 변화 및 할당제까지 걸쳐 있었다. 정치 정당들과 후보자들 역시 반응을 보였다. 1994년 공식 여론 조사를 흘낏 본 후, 유럽 의회 선거에 대응하는 사회주의 정당 명부(Socialist list)의 수장 미셸 로카르는 평형 명단을 운영할 것이라고 선포했다.17) 정말 족히 여섯 개나 되는(fully six) 명단은 꽤 평형적으로 보였다.18) 1995년 대통령 선거에서 (장-마리 르펭을 제외한) 모든 후보자들은 “평형”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19) 자크 시락은 당선된 후 공약 하나만을 이행했는데, 평형 감시기구의 창립이 그것이다. 이 기구는 2세대 [페미니즘]의 “역사적인 페미니스트” 중 한 사람인 지젤 알리미에게 보고서를 의뢰했다. 이 보고서는 1996년 12월에 제출되었고, 헌법 개정을 권고했다. 좌파가 다수파로 복귀한 1997년 6월의 놀라운 입법부 선거 후, 리오넬 조스팽 수상은 헌법 개정이 자신의 정부 강령 중 일부라고 선언했다. 결국 1999년에 헌법이 개정된다. 이 운동은 어디에서 왔는가? 이를 통해 [운동이] 여성을 선출 기관에서 실질적으로 배제한 것에 오랫동안 좌절해 왔음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1968년에 국회의 98.4%가 남성이었다. 20년간의 2세대 페미니즘 이후, 그 숫자는 1993년 93.9%로 줄어들었다. 정말이지 국회의 여성 비율 6%는, 비록 1945년 이래 가장 높은 수치이긴 하지만, 프랑스의 여성 대표율이 유럽 연합 전체의 절반이며, 또한 1993년 EU의 그리스를 제외하면 최저임을 의미했다. 제 5공화국 헌법에 성별 평형을 기입하겠다는 착상은 이전 전략의 실패에서 직접 유래한다. 1982년, 사회주의 정부는 국회의 만장일치로 지방자치 선거 명부에 25% 할당제를 발의했다. 실질적으로 이 법은 모든 명부에서 동일한 성의 후보자 상한선을 75%로 제한했을 것이다. 할당제를 부과하려는 이 소심한 시도에 대해 헌법 위원회(Conseil constitutionnel)는 즉각 위헌 판결을 내렸는데, 이들은 1982년 11월 18일에 이 법이 제 5공화국 헌법 제 3항과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 제 6조에 위배된다고 선언했다. 본질적으로 이 논변은 적극적 차별 시정 조치(affirmative action)라는 명목 하의 25% 할당제는 모든 시민의 법 앞의 평등에 저촉된다는 것이었다. 할당제와 적극적 차별 시정 조치에 반하는 판결을 우회하기 위해, 일부 활동가들은 헌법 개정을 권고한다. 제안된 명제와 양식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목적 면에서 중요한 것은 평형을 위한 운동에 관한 세 가지 점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 구성, 선거제도에 대한 초점, 그리고 그 담론이 그것이다. 이들은 전후 프랑스 시민권 체제의 기본 전제에서 벗어나, 공화주의적 틀 안의 정치적 시민권만을 강조하는 대체를 제안한다. 이 운동은 전통적인 정치적 경계를 가로지르는데, 정치인들의 선언은 이를 잘 보여준다. 우파 선출직 여성들이 좌파 선출직 여성들과 나란히 섰던 것이다(Besnier 1997: 2). 더욱이, 극좌 특히 트로츠키주의자들을 예외로 하면, 성별 평형을 달성하려는 어떤 종류의 제도적 조정에 대한 광범위한 지지가 있다.20) 조직적으로 보자면 이는 풀뿌리 운동이 아니다. 예를 들어 주요한 조정 기관이 “내일은 평형”이었는데, 이들은 스스로가 종교적, 정치적 또는 종족적 분열을 넘어선다고 묘사한다. 8개의 가입 협회나 연맹은 다음과 같다: <전체 여성 카톨릭 행동>(ACGF), <프랑스 대졸 여성 연합>(AFFDU), <유럽 압력단체를 위한 프랑스 여성 연합>(CLEF), <그녀들 역시>(Elles Aussi), <국제 시온주의 여성 조직>(WIZO), <평형-뉴스>(Parite-Infos), <공민적ㆍ사회적 여성 연합>, 그리고 <여성 전문가 연합>(Masse 1996: 4).21) <녹색당> 역시 이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는데, 이들은 알랭 리피에츠를 지명하여 공식 회의에서 자주 발언하게 했다. 사실 생태주의자들은 이 운동 내부의 얼마 안 되는 실질적으로 너른 토대를 갖춘 조직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나머지는 전통적인 여성 협회이거나 직업 활동가들의 소규모 엘리트 집단이다. 운동의 초점이 선거 제도에 있다는 점은 명백하다. 정말이지 이 운동은 평형을 쟁취함으로써 기대되는 정책 내용에 관해서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않고 심지어 그런 쟁점의 제기를 거부한다. 목적은 제도의 작동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 운동은 일부 1세대나 2세대 페미니스트들이 밟아간 미끄러운 길을 따르려 하지 않았는데, 이들은 여성들을 선출하면 특별하고 긍정적인 정치적 성과가 나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활동가들은 보통 정치적 성향 상 좌파 출신이면서 우익 여성보다는 강고한 좌익 남성을 선호하는 이들에 맞서 스스로를 방어해야 한다. 이 운동의 근본적인 정치철학은 시민권 체제들에서 변경의 고리를 드러낸다. 우리는 이 철학을 두 단계로 식별할 수 있다. 여기서 첫 번째로 제시되는 원리는 두 번째로 제시되는 원리에 실제로 종속된다. 그것은 어떻게(how)다. 할당제는 없어야 한다. 완전한 평등, 50/50은 할당제가 아니며, 따라서 ‘특별대우’가 아니다. 차라리 그것은 형식적 평등을 현실로 옮기는 하나의 방식이다. 지젤 알리미가 주장하듯, 이는 “형식적 평등에서 실질적 권리로 이행”하는 것을 보장하는 하나의 방식이다(Sineau, 1996:9).22) 이런 방식을 취하면 “법은 여성에게, 모든 영역에서, 남성의 그것과 평등한 권리를 보증한다.”는 헌법과 『인권 선언』에 위배되는 것으로 법정에서 기각되는 것을 피할 수 있다고 활동가들은 주장한다. 모든 구조가 그 위에서 세워지는 중심 원리는 “왜?”다. 운동을 기초하는 문서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문구를 볼 수 있다. “여성이 계급으로, 범주로 취급될 수 있다는 해로운 생각[을 비난한다]… 여성은 조합기관(corporate body)도 아니고 압력단체도 아니다. 그들은 주권적 인민의 절반, 인류의 절반을 이룬다.”(Gaspard et al. 1992: 164-66; 임의 번역). 이것이 운동의 기초가 되는 착상이다. 이는 끊임없이 반복되고, 프랑스의 1945년 이후 시민권 체제의 구성에 기본적인 방식으로 도전하는데, 그러면서도 그것을 대체하기 위해 제안된 요소들과 잘 들어맞는다. 프랑스의 전후 시민권이 공화주의를 촉진시켰다는 것은 분명하다.23) 제 4공화국과 5공화국의 헌법은 『인간의 권리와 시민의 권리 선언』과 함께 혁명적 전통의 요소를 보존했다. 따라서 국가는, 공화국의 표현으로서, 사회 정의를 달성하는 데 사용될 것이었다. 공화주의는 일련의 “보편적” 권리를 정의했는데, 여기서 자유와 평등은 모든 시민들에게 보장됨과 동시에 사회는 연대의 이름으로 모든 구성원들의 복리에 대한 책임을 자임했다. 국가는 이 권리들을 보장하는 특권적 대행자였고, 특권적 행위자는 인민들의 조직으로서, 이는 코퍼러티즘적(corporate) 기관들의 대표자로 인정된다면 정당일 수도 협회일 수도 있었다.24) 더욱이 우리가 방금 보았던 것처럼 캐나다의 근본적 자유주의가 개인과 국가의 연결을 보장하는 매개적 제도들에 의존하는 대표의 정의와 사회정의의 담론에 따라 변형되었다면, 프랑스의 전후 공화주의를 변형시킨 것은 다른 담론들이었다. 특히 중요한 것은 계급 담론이다. 제도 면에서 볼 때 이는 평형에 기초한 수많은 기관들이 전후 기간 동안 설립되거나 강화되었음을 의미했다. 그러나 평형의 정의는 오늘날과 같지 않다. 당시 그것은 작업장의 관계를 지배하던 다양한 기관들 및 다른 장소에서 고용주와 노동자를 평등하게 대표하는 것을 의미했다. 성별 평형 운동은 이 역사적 선례를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만일 정치 제도가 한 종류의 평형을 통합할 수 있었다면, 왜 다른 것에 대해서는 그토록 격렬하게 반대하는가? 사회 계급 간, 좌우 간 구별이 프랑스 시민권 체제의 핵심적인 사회․정치적 차이라는 점은 1960년대 중반에 이르면 의심할 도리가 없게 된다. 제 5공화국의 선거 정책은 이 점에서 선명하게 둘로 나뉘는데, 공산주의자들이 합법 정당의 지위를 다시 인정받고 중앙파적 기독민주당은 도산한다. 모든 다른 정치는 동일한 좌우 구별에 좌우됐다. 예컨대 전후 기간 내내 어떤 인구 “범주”를 대표하는 연합들은 적어도 정치 집단과 제휴했고, 그리고 종종 정치 정당[과 제휴했다]. 후자의 사례는 프랑스 여성 연합으로, 이 단체는 공산당의 측면 조직이었다. 뿐만 아니라 학부모-교사 연합, 교사와 교수 노조, 수렵 및 어업 연합 등도 정치 집단에 따라 분할되었다. 그 결과 프랑스 시민들의 정치적 동일성은 좌우 정치성향 안에서 그들이 어디에 위치하는가에 전적으로 의존했다. 노조처럼 분할선이 좌우를 가로지르기 보다는(비록 기독교와 비기독교의 분할이 오랜 기간 존속했지만) 좌파 내부에 그어지는 경우도 많았다. 따라서 1968년 이후 2세대 여성운동이 출현했을 때, 그 조직들은 선택에 직면했다. 좌우 정치성향 안에 속한 누군가와 제휴하든가, 아니면 “자율적”이든가. <정신분석과 정치회>(Psych et Po)나 <운동하는 여성> 등과 같은 자율적 집단들은 운동 내에서의 거대한 전투와 함께 “유명한 프랑스 페미니즘”을 촉진했기 때문에 아마 가장 가시적이었을 테지만, 대다수의 페메니스트들은 ― 혁명적이건, 평등주의적이건, 아니면 생디칼리즘적이건 ― 운동을 넘어서는 정치적 충성심을 갖고 있었다(Duchen 1986). 이 같은 충성심 중 다수가 격한 관계를 낳았음에 분명하지만, 그러나 그 중요성을 부인할 도리는 없다. 선택을 강제한 것은 시민권 체제의 두 가지 구체적 결과였다. 첫째, 프랑스 페미니즘은 결코 무당파적이지 않았다. “여성”이 통일된 전체라는 말들에도 불구하고 집단들은 계속 별도로 행동했고, 보통 그녀들의 당이나 진영의 기치 아래 섰다. 둘째, 마르크스주의와 페미니즘을 통일된 전체로 결합시키려는 모든 노력 또는 성별 평등을 경제적 평등만큼 중요한 것으로 만들려는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2세대 페미니스트들은 좌익 담론을 변경하는 데 결코 성공하지 못했다. 여성들은 하나의 범주에, 계급적 힘의 승리로 혜택을 입을 모든 이들의 명단에 추가되는 “그리고 또”(and the) 중 하나에 머물렀다. 물론 우파에서 여성들은 설사 약간의 가시성을 획득했다손 치더라도 하나의 범주와 다를 바 없었다. 이 시민권 체제는 1980년대 중반 흔들리게 되고 그 기반을 상실하기 시작했다. 미테랑 대통령과 파비우스 수상이 유럽연합의 경제 정책과 맞붙어 싸우지 않겠다는 역사적 선택으로 사회주의 정부를 이끈 것이 중요한 계기 중 하나였다. 이 역사적 선택으로 미테랑은 사회주의 정부의 경제 정책을 노골적인 중앙파적 공화주의 전통 쪽으로 이동시키면서, 사회적이고 성적인 불평등의 축소라는 목적을 전면에 그리고 중심에 내세웠던 공화주의의 보다 좌익적인 판본에서 벗어났다. 대통령, 그리고 사회당과 다른 곳의 지지자들에 따르면 목표는 국가의 역할 및 국가와 시민사회의 관계를 변경함으로써 프랑스를 “현대화”하는 것이었다. 전환점(tournant)의 본성과 범위는 파비우스가 2년간 총리에 재직한 후 내려진 다음과 같은 평가로써 포착된다. 이 평가에서 우리는 전후 시민권 체제의 모든 요소가 변경되었다는 점을 발견한다. 로랑 파비우스가 좌우 간의 차이들을 열거할 때, 그는 사회적 불평등을 축소하는 것에 관해서가 아니라, 보다 온건하게 ‘기회의 평등’에 관해 말한다. 그리고 리오넬 조스팽은 ‘집단적 이해와 개인의 이해를 더 잘 조화시킬’ 필요성을 강조한다. 서서히 우리는 불평등에 대한 비난에서 차이의 인정으로 이동하는 중이다. 전반적으로 유연성과 효율성, 경제적 현대화의 제약이, 연대적이고 사회 정의를 촉진하며 불평등을 축소하려는 압력을 대체한다... 따라서 마치 모든 것은, 과거 부당한 불평등으로 보였던 것이, 오늘날엔 정당한 차이가 되어 가는 것처럼 진행된다. “평등의 추구는 차이나기 위한 권리에 길을 내 줘 버린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어떤 차이들인가? 여기 인용문에서 강조점은 경제적 불평등, 그리고 사실상 부유해지거나 가난해질 “권리”에 놓인다. 프랑스는 우리가 앞서 본 것처럼 경쟁적 개인주의에 대한 동일한 열광에 굴복했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은 또한 사회적이고 종교적인 차이에 대한 권리를 둘러싼 갈등이 출현한다는 특징을 갖는다. 무슬림 소녀들이 공화국의 학교에서 베일을 쓸 수 있는지 여부에 관한 쟁점은 보편주의가 위기에 처했다는 징조의 하나일 뿐이었다. “공동체주의”가 도처에서 부상하고 있다는 공포가 등장했다. 둘째, 이 이동을 “유럽”이 자극했다는 점을 필히 기억해야 한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Commission)의 경제 규율에 순종하기 위해 내려진 선택은 1983년 이래 프랑스가 유럽 건설에 독일과 힘을 합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프랑스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관한 정의 자체가 바뀌게 될 것이었다. 민족적 동일성은 다원적이 되었다. 프랑스인들은 훌륭한 유럽인이 됨으로써 훌륭한 프랑스 시민들이 될 것을 요청받았다. 시민권 체제를 근본적으로 뒤흔든 세 번째 요소는 공화국의 가장 기본적인 제도들, 그 선출 의회의 정당성이 쇠퇴한 것이었다. <국민전선>이 부상하고 있었다. 그 인종주의 탓에 나머지 우파들은 국민전선을 흡수하거나 수용할 수 없었다. 그것이 선거에 성공하면서 정치 제도의 작동은 도전에 직면했다. 정당성 역시 선거 자금 및 정당의 부당이익에 관한 막대한 양의 일상적 추문에 시달렸다. 선거 민주주의의 안녕은 바라는 바에 미치지 못했다. 물론 이 같은 시민권 체제의 변화가 적당하거나 바람직한가에 관해서는, 캐나다 사이에서처럼 프랑스인 사이에서도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다. 유럽[연합]에 대한 헌신(마스트리히트 조약에 관한 국민투표는 간신히 통과되었다…), 공화주의적 동화주의 대 다문화주의, <국민전선>(어쨌든 유권자들은 르펭을 선택했다…), 그리고 경제 정책에 관해 사람들은 깊이 분할되었다. 후자의 경우, 좌우 정부 모두 높아지는 반대에 직면했고, 이 같은 반대는 이른바 “사회 운동”이 조직했는데, 이는 기존의 좌우 범주에 들어맞거나 제도적 규율을 수용하기를 거부하는 연합들, 집단들, 개인들 등의 집합이었다. ‘평형을 위한 운동’이 무대에 도착하여, 시민권 체제에 대한 … 변화의 힘과 효과적으로 제휴한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다. 그것은 기왕의 것을 방어하지 않고 새로운 것을 촉진시켰다. 그것은 공화주의 정치 엘리트의 진영에 속한다. 더욱이 그것은 공화주의와 그 제도들에 대한 위협에 맞서는 몇 가지 논변을 통해 쓸모를 발휘한다. 이 운동은 정치 제도들이 절대적으로 결정적이라고 주장했다. 정말이지 필히 여성들이 제도에 공평하게 허용되어야 할 만큼 아주 중요하다. 제도 그 자체에 대한 공격은 평형에 관한 담론 안에 포함되지 않는다. 논변은 항상 그녀들이 남성들과 그들만의 이익을 위한 평형에 의해 어떻게 악용(misappropriated)되어 왔는지에 관한 것이다. 이 운동은 또한 기회 평등이라는 주제를 강화했다. 여성들은 어떤 특별 대우도 요구하지 않았으며, 다만 평평한(level) 경기장을 요구할 뿐이었다. 성별 이외의 (사회경제적 또는 종족적 같은) 견지에서 누가 선거에게 이길 것인가 는 기존 제도의 작동에 맡겨졌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앞서 보았던 것처럼, 평형은 어떤 특수한 정책적 내용도 내포하거나 [그것에] 의존하지 않는다고 주장함으로써 ― 안 필립스(1995)의 용어로 말하자면, 평형은 현존/진출에 관한 것이지 관념에 관한 것이 아니다 ― 경제적이고 사회적 정책을 가지고 여성들에게, 그리고 여성들을 위해 정부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라는 쟁점은 논의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다른 주제들, 무엇보다 공화주의 시민권의 정의와 유럽이라는 질문에 관해 보자면, 이 운동의 목적은 전후 시민권 체제를 재구조화하는 정치적 힘들의 목표에 부합했다. 그 기원에서부터 이 운동은 철저히 유럽적이다. 집행위원회가 조직한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유럽 여성 네트워크>(The European Network of Women in Decision-making)는 1990년대 초반 이래 활동을 지속했다. 최초의 산물 중 하나는 1992년 아테네 선언이었는데, 그에 따르면 “민주주의 체계는 공적이고 정치적 생활에서 시민의 평등한 참여를 반드시 보장해야 한다. 여성들은 인구의 절반을 대표한다. 평등은 국가들의 행정과 대표에서 평형을 필요로 한다.” <평등기회부(部) 3차 행동 계획>(The Third Action Plan of the Equality Opportunities Unit) (1990-1995)는 이 같은 평등을 근본적인 원리와 행동의 초점으로 만드는 한편, 암스테르담 조약 초안은 로마 헌장을 포함시켰다.25) 따라서 평형을 요구하는 것은 지역 기구에 대한 프랑스의 헌신에 조금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헌신을 강화하는데, 프랑스 활동가들에게 민주주의적 결핍을 제거하기 위한 운동에서 ‘첨단’의 배역을 맡기기 때문이다. 새로운 시민권 체제를 위한 발의와 평형 운동이 가장 분명하게 들어맞는 것은 공화주의를 정의내릴 때다. 혹자가 이들에게 공화주의의 적이라는 배역을 제시하기는 하지만, 이는 전혀 그렇지가 않다. 조운 스콧이 지적하듯, 이 운동은 보편주의적이다(1997: 5; Schor 1995). 평형의 담론은 어떤 훌륭한 공화주의 담론도 그래야 하듯 심원하게 개인주의적이다. 이 운동은 단지 “남성-주류”(male-stream) 문헌이 그렇게나 자주 상상해 온 ‘추상적’이고 무성적인 개인이라기보다는, 개인 자체가 항상 남성이거나 여성이라고 주장할 뿐이다. 따라서 평등은 아무도 이 같은 불가피한 차이 때문에 고통 받지 않아야 한다고 요구한다. 그 반-범주적 입장 때문에 이 운동은 공화주의의 보편주의가 프랑스의 많은 종족 집단을 비롯한 여타 집단들이 인정받고자 했던 ― 또는 북미의 “다양성의 정치”가 정상적인 것으로 취급하는 ― 무수한 차이들을 통합하기 위해 마땅히 노력해야 한다는 식의 어떤 통념도 차단했다. 이 운동은 다른 집단을 위한 보다 나은 대표라는 요구로 이어질 수 있는 “미끄러운 경사면” 논변에 맞서는 보호막을 제공한다. 성은 별도의 사례로서, 종족성이나 인종, 계급 또는 언어와 전혀 비교할 수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말이다. 개인주의 및 성과 다른 “차이”들 간의 가차 없는 구별 이 양자는 평형을 위한 운동이 우호적인 정치적 기회 구조를 발견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특히 전후 시민권 체제와 거리를 두면서 새로운 체제를 건설하고자 한 엘리트들에서 제휴세력을 찾을 수 있는데, 이 체제에서는 국가가 사회적 권리가 아닌 정치적인 권리만을 보장할 것이고, 일단 여성에게 접근권이 있고 성별 경기장이 평탄하다는 것이 보장되는 식으로 바뀐 다음에는 성공의 책임이 각 개인에게 귀속될 것이다. 우리는 이제 평형 운동이 질풍노도 같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정치 안에서 실제로 전진할 수 있는 이유를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제도적 공간과 동맹자가 있다. 평형 운동의 놀라운 특성 중 하나는, 아테네와 로마 선언 및 프랑스 전임 장관들의 7월 선언 모두에서 예시되었듯, 다-당파적이었다는 점이다. 어떤 유럽 수준의 선언도, 회원국 선거 결과의 함수로서, 정의상 광범위한 다양한 정치 전통 출신 여성들을 포함할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의 사례는 더 거대한 당파제(partisanship) 실험을 표상한다. 왜 다양한 정치적 지평의 여성들이 단일한 목소리로 말하기를 수용했을까? 이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정당 연계의 약화인데, 정당 체계 자체가 대통령제의 제도적 강화 및 이 신자유주의 시대 우파 정치와 좌파 정치를 가르는 것이 거의 없다는 통념 앞에서 녹아내린다. 이 같은 맥락에서 좌우간의 깊은 균열은 어느 정도 또는 적어도 제도적 변화에 관한 공동 행동을 벌이기에 충분할 정도로 사라진다. 그러므로 평형에 관한 논쟁은, 사회적 권리나 사회 정책에 대해서는 거의 주목하지 않으면서, 보편주의와 정치적 공화주의의 견지에서 실행될 수 있다, 반대자들은 찬성자들만큼이나 인권 선언의 보편적 가치의 이름으로 발언한다고 주장한다. 보편주의에 대한 이 같은 헌신은 프랑스에서 전통적으로 좌우를 나누는 기준이 아니었다. 이데올로기적 분할선의 양쪽 편 모두 혁명의 상속자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전통적인 좌우파 남성과 여성들이 공동 전선을 펼쳐 평형을 통해 쟁취된 “실질적 평등”이 공화주의의 발로와 같다는 정의를 지지하는 것이 가능하며, 마찬가지로 전통적인 좌우파 출신의 다른 이들이 동일한 공화주의의 이름하에 이를 기각하는 것 역시 가능하다. 결론 나는 세계화와 시민권 체제의 재구조화를 염두에 두면서, 이 장을 인식론적 주석과 함께 사변적인 주석으로 마무리하고 싶다. 첫째, 이 두 가지 사례 연구가 우리에게 상기시키듯, 이 세계화 시대에 만들어지고 있는 시민권 체제에 대한 조정이라는 사실과 떨어져서는 사회운동을 포함한 행위자들의 역할을 결코 읽을 수 없다는 점을 재차 확인할 필요가 있다. 국가 행동 안에 스며든 공통점들이 있다. 우리는 구조조정, 그리고 국가 지출을 제한함으로써 국가 적자를 통제하는 것에 대한 강력한 헌신을 목격해 왔다. 우리는 유럽과 북미 모두에서 스스로의 주권에 형식적 제한을 부과하려는 국가들의 움직임들을 목격해 왔는데, 그 수단은 행동 형태에 엄격한 규칙을 설정하는 지역 협정에 진입하는 것이다. 구조조정과 주권에 대한 제한 모두는 국가-사회 관계의 주요한 재편성 및 국가와 시민 사회의 이데올로기적 표상 면에서의 변화를 동반한다. 시민권의 “보편적” 권리들과 평등의 원리는 “차별화된 시민권”의 통념으로 대체되어 왔고, 이는 종종 보완성 원리의 활성화를 통해 실현되었는데, 이에 따르면 가능한 가장 낮은 수준의 정부와 가족이나 공동체 협회 같은 다른 사회 제도들은 사회 서비스를 실행하고 기획하는 책임을 할당받는다. 이는 분명 시민권 체제의 재설계에서 나타나는 “묵직한 경향”이다. 정책 혼합 면에서 사소한 차이, 그리고 이 같은 재편성을 정당화하는 정치 담론 면에서 약간 더 큰 차이는 있겠지만, 변화의 방향은 동일하다. 만일 누군가가 “객관적”이고 구조적인 관점을 채택한다면, 그는 이 같은 구조 변경으로부터 여성이 완전한 시민권을 쟁취하고 성별 평등[을 확립하는 것]에 대한 공통적인 위협이 나온다는 사실을 식별할 수조차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운동은 결코 이 같은 국가 행동과 시민권의 구조 변경의 단순한 “희생자”가 아니다. 그녀들은 그것을 강화시키거나 심지어 일정한 방식으로 그것을 설계하는 데 참여할 수도 있다. 여성운동이 결국 1945년 이후 복지 국가가 된 사회 정책들의 특성에 의미 있게 기여했던 것처럼(Koven and Michel 1993), 또한 여성운동은 이 복지국가를 대체하는 데 나름대로 기여하거나 또는 참여에서 배제되고 있다. 우리는 또한 지금 이 같은 초기 운동 중 일부는 여성 의제를 전진시키는 능력 면에서 다른 것보다 덜 “진보적”이었다고 간주할 수 있음을 안다. 그 교훈은 달리 말하면 항상 전략적 선택들이 있다는 것, 그리고 여성운동은 자신들의 미래나 평등 의제의 장기적 성장을 위해 항상 “올바른” 선택을 하는 것은 아닐 수 있다는 점이다. 둘째는 사변이다. 프랑스 여성운동은 여성운동의 “세 번째 물결”(3세대)의 출현인가? 만일 2세대 여성운동이 국가 내부와 외부에서 싸워 경제 및 사회 개혁과 함께 문화 변화를 통해 여성이 완전한 시민이 되도록 했다면, 이제 우리는 사회적 경제적 평등을 의제에서 제거하는 시민권 체제의 재구조화와 시민권의 재정의에 ― 비록 완전히 의식하고 있는 것은 반드시 아닐지라도 ― 참여하는 3세대를 목격하는 것인가? 뉴질랜드, 유럽, 캐나다 같은 지역은 1945년 이후 복지 국가들의 특정한 사회 민주적 주제들에 깊이 영향 받았지만, 이제는 시민권이 제한되고, 사회적 권리 없는 정치적 권리에 한정된다. 또한 집단적인 행동보다는 사적인 행동과 개인을 강조하는 분명한 경향이 있다. 이는 안 필립스가 “현전/진출의 정치”라고 부르는 것에 관해 사고하는 거의 모든 경우들에서 발견된다. 오늘날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들 중 많은 부분은 우리가 정치적 현전/진출에 대한 요구라고 불렀을 법한 것 주위를 회전한다. 남성과 여성의 평등한 대표에 대한 요구. 각각의 사회를 구성하는 서로 다른 종족적 집단들 간의 보다 공정한 균형에 대한 요구. 자신을 주변화하거나 침묵당하거나 배제된다고 간주하게 된 집단들을 정치적으로 포괄하라는 요구. 민주주의적 평등 문제를 이처럼 전반적으로 재구성할 때, ‘누구’를 대표할 것인가와 ‘무엇’[을 대표할 것인가]를 분리하고, 후자를 전자에 종속시키는 것은 매우 큰 문제가 된다. 관념들의 정치는 대안적인 현전/진출의 정치에 의해 도전받고 있다(1995: 5). 선거법을 바꾸려는 운동은 1990년대 초반에 걸친 캐나다 운동의 정치보다 구조 변경된 국가들의 정치에 보다 잘 어울리는데, 후자[캐나다 운동의 정치]는 2세대 페미니즘 및 보다 일반적으로 진보적인 세력의 사회적 의제를 옹호하고 전진시키려는 투쟁을 지속하고 있다. 개별화된 시민권이라는 새로운 통념은, 사회적 평등의 기준을 포함하는 사회적 기획에서 선거 민주주의에 대한 초점으로 시민권 의제를 축소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현전/진출”의 요구에 부합한다. 현 정세에서 국가들은 집단적 선택과 사회적 발전을 둘러싼 갈등을 해결하는데 점점 더 적은 책임을 부여받고 주장한다. 사회적 기획과 사회 정의에 관한 “관념”들의 갈등은 결정들이 다른 곳, 즉 시장이나 상위민족적인 기관에 서 내려질 때 중요성이 줄어든다. 선택들이 집단적인 선택 기제보다는 사적으로 내려질 때, 정치는 ‘무엇’이나 ‘왜’보다는 ‘누가’라는 문제로 안전하게 축소될 수 있다. 1) 1960년대와 1970년대 프랑스 여성운동의 지배적인 경향은 국가 기구, 특히 선거에 참여하는 것을 회피했다. 선거법을 별도로 하면, 선거는 결코 관심사가 아니었다. 1981년까지 “혁명적 페미니즘”을 옹호하는 주된 그룹들은 선거에서의 기권을 주장했다. 반면 나머지 대부분은 선출의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한 행동을 조직했다.본문으로 2) [역주] 1987년 6월 3일 캐나다 수상과 10개 주 수상간에 합의된 헌법 개정안으로 퀘벡주의 특수한 지위를 인정하고 주 정부의 권한을 강화하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뉴펀들랜드, 마니토바 주에서 기한 내에 비준되지 못하여 결국 폐기되었다.본문으로 3) 미치레이크 협정의 주요 내용을 반영한 헌법개정안으로 원주민 자치권 확대, 연방 정부에서 지방정부로의 분권, 퀘벡주의 사회?문화적 특수성 인정 등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1992년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부결되었다.본문으로 4) 시민권 체제 개념은 젠슨과 필립스(Jenson and Phillips)(1996)에서 발전되었다. 이에 관한 설명의 출처는 같은 자료이다.본문으로 5) 마샬 (T.H Marshall)은 자신의 역사 사회학 작업에서 영국 남성들의 시민적 권리에서 출발하여 정치적 권리를 거쳐 사회적 권리로 진보하는 과정을 언급했다. 민족간 차이는 불가피한데, 그 이유는 다른 나라, 그리고 다른 사회 집단은 각자의 역사를 겪도록 운명 지어졌기 때문이다. 우리가 마샬로부터 받은 두 번째 유산은 시간을 관통하는 변화에 대한 생각이다. 그의 이야기는 새로운 권리, 시민권에 대한 접근을 획득한 새로운 집단,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공동체에 대한 정의 중 하나이다.본문으로 6) 여기서 적용하는 이론적 입장은 정치경제에 대한 규범적 접근 및 역사적 사회학의 입장이다. 양자는 우리에게 새로운 권리, 동일성, 그리고 이에 대한 접근권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의 결과는 결코 미리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누군가가 운동과 국가의 전략적 선택에 무게를 싣기 위해 제도화된 정치적 유산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창조된 목록을 기대하더라도 동일한 궤적을 유지한다는 보장은 없다.본문으로 7)체제는 다앙한 장소에서 제도화된다. 가장 분명하게는 헌법, 그리고 시민법과 같은 부속 법률이 이에 해당한다. 그러나 국가 관료, 준-공적인 자문 기관, 연방주의적 제도, 여타 대리기구, 특히 연방 정당 체계 모두가 다방면에 걸쳐 실천적으로 이에 증요한 기여를 한다.본문으로 8) 여기서 퀘벡 내의 진보적인 세력은 예외였는데, 이들은 1960년 이후 사회 정의에 대한 최선의 보장은 강력한 지방정부라고 생각했다.본문으로 9) 지방적 기관에 대한 신뢰가 부족했던 또 다른 이유는 이러한 시민권 체제를 형성하는데 참여했던 많은 사람들이 퀘벡 출신이거나 (퀘벡 소재 민족주의자들의 계획들에 맞서기 위해 오타와로 완전히 옮겨왔던 트뤼도 수상과 같은), 또는 온타리오 (최근까지 자신의 이익이 국가 전체의 이익이라고 가정하는) 출신이었기 때문이다.본문으로 10)예를 들어 선거 체제와 정당 재정구조의 의 개혁은 언론이 주도한 정당들에 대한 형평성 있는 대우를 보장한다는 목표와 사회집단들 사이에서 자원 배분이 공평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인식에 의해 추동되었다. 그러므로 1974년에 확립된 선거 체제에서 최초로 정당을 인정했고, 뒤이어 정당의 언론 접근을 규제했고, 가장 부유한 정당과 정당이 나머지 정당을 압도하지 못하도록 선거운동 비용을 제한하는 한 편 평등 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정당에 선거운동을 위한 공적 기금을 지급했다(Paltiel 1970).본문으로 11) 반복하건데, 퀘벡 소재 단체들은 여기서 예외다. 그러나 초반에는 이들도 연방 정부가 수행해야 할 역할이 있다는 점을 받아들였다. 1980년대에 NAC와 다른 지역의 여타 여성운동이 분리되었다.본문으로 12) 퀘벡과 다른 지역의 시민권 체계의 차이에 대해서는 젠슨(1997)을 참고하시오.본문으로 13) 캐나다의 정치 담론 내에서 “대중 부문”은 일련의 의제-기반 집단을 의미하는데, 반-빈곤 운동조직에서부터 교회, 페미니스트, 환경주의자, 농민 조합, 학생, 실업자, 장애인, 민족주의자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이러한 대중 부분은 1987년 친-캐나다 네트워크 (Pro-Canada Network, 1991년 액션 캐나다로 개칭)가 FTA에 반대하는 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형성되고, 노동운동으로부터 상당한 정도의 재정을 지원받으면서 조직된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Robinson 1993).본문으로 14) 최근 바세프킨이 인터뷰한 페미니스트 활동가들은 정치제도로부터 자신들이 배제되기 시작한 균열지점은 NAC이 자유무역에 반대하기로 결정하면서 부터였다고 이해한다. 이들은 자유무역을 멀로니가 대표하는 토리당의 신보수주의적 의제와 연결시켰다. 이는 “… 근대 캐나다 페미니즘의 개입주의적, 사회복지적 의제에 대한 도전이었다”(Bashevkin1996:235).본문으로 15) 여성관련 부서가 폐쇄될 당시 정부는 여성운동가 출신 관료들에게 새로운 시대가 곧 올 것이라는 징조를 보이는 것 이상이었다. 이들은 국가 페미니즘의 전달자 역할을 했던 정책 네트워크를 해체했다. “주류화(mainstreaming)"를 통한 ”지방분권화“는 정책 네트워크를 대체할 수 없었다. 주류화는 더 이상 정책네트워크가 필요하지 않다고 선언했다. 여성 관련 부서를 형성하는 과정에서의 이러한 네트워크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가장 활동적인 여성운동가 출신 관료였던 Freda Paltiel(1997)의 증언을 참조하시오. 본문으로 16) 이 전략은 많은 점에서 1970년대 초반 낙태 합법화를 끌어내기 위해 사용된 전략과 많은 면에서 유사했다. 유명한 여성 혹은 그렇지 않은 여성들의 선언운동을 활용했으며, 체계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일종의 증언이었다. 1970년대에 여성들은 낙태를 경험했으며, 그토록 많은 보통 여성들에게 부과된 비용들에서 벗어났다고 증언했다. 이번에 그녀들은 장관 등으로의 개인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이 상황이 대다수 여성들에게 견딜 수 없는 것이라고 증언한 셈이다.본문으로 17) 엄격히 말하자면 그렇지 않았다. 의석 확보를 위한 결정적인 “분획점”(cut-off)에서, 교호순번(alternation)은 몇몇 장소에서 단속되었다.본문으로 18) 이들 중 하나가 <녹색당>이었는데, 이들은 항상 “교호순번” 명부를 제시해 왔다.본문으로 19) 이 같은 선언이 정치적으로 의미가 있긴 하지만, 모든 후보자들이 평형을 달성하는 방법에 관해서, 심지어 그것이 무엇인지에 관해서 동일한 관념을 갖고 있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해 둘 필요가 있다. 예컨대 우파 후보자 에두아르 발라뒤르는 이를 할당제로 정의하곤 했는데, 이는 <평형을 위한 운동>이 거부한 정의다.본문으로 20) 지지자와 반대자가 서로 대결한 초기 논쟁은, 『페미니즘의 새로운 질문들』(Nouvelles Questions Feministes) 15:4, 1994와 16:1, 1995를 보라.본문으로 21) <프랑스 여성 연합>과 같은 거대 여성 조직이 공동행동에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공산주의자들 역시 평형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본문으로 22) 또는 벨기에의 지도적 법률가이자 유럽법 전문가 엘리아니 포겔-폴스키는 다음과 같이 쓴다. “우리는 소수자의 이름으로가 아니라 평등한 지위의 이름으로 평행을 주장한다.”(Sineau 1996: 9).본문으로 23) 1983년 “전환점”과 공화주의의 묘사는 젠슨과 시노(1995)에서 직접 가져온 것이다.본문으로 24)는 않지만, 특정 부문의 고용에 의존하고 이 체제를 관리하기 위해 다양한 연합들에 대표(성)을 부여하는 일련의 다른 체제들에 기초한다.본문으로 25) 1996년 5월 유럽 연합 15개 회원국의 13명 여성 장관이 이 문서에 서명했다(EC: 1997). 이 헌장은 정부간 회의(IGC, Intergovernmental Conference)의 일차적 책임이 민주주의의 강화에 있다고 규정한다. 이 맥락에서 이 장관들은 남녀 간의 협력과 평등한 참여를 낳을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행동에 우선권을 주는 것이 민주주의에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더욱이 이 같은 평등한 참여를 통해서만 시민들은 자신들의 정치 제도들을 신뢰할 수 있을 것이다. 즉 헌장에 서명한 이들에게 유럽적 제도들을 건설하는 다음 단계에서 필요한 것은 ― 민주적 결핍을 제거함으로써 ― 모든 의사결정 제도에서 여성의 현전/진출을 근본적으로 증가시키는 것이다.본문으로

  • 2006-09-06

    결혼이야기 - 여남의 다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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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부쩍 “여남이 정말로 다르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이게 결혼하였기 때문에 그런 걸 느낄 계기가 많았는지는 확실치도 않으면서 무작정 제목은 "결혼 이야기-여남의 다른 이야기"로 낙찰되었다. 사실 이론적인 어떤 다른 점을 조망해보고, 또 왜 다른지 분석할 역량은 되지 못한다. 오히려 제목은 그럴싸하게 썼지만, 나의 답답함을 온 세상에 이야기하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 나만의 방에서 혼자 술을 먹으며 끙끙거리는 걸로는 도저히 해결 안 되는 성질상. 요즘 우리 신랑과 나의 다툼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려고 노력중이다. 하지만, 정확히 객관적일 수는 없으리라고 나도 생각한다. 나는 여성이고 신랑은 남성인데, 어떻게 객관적일 수 있으랴. 이를테면 이런 거다. 나는 아이들을 정말 좋아한다. 어쩔 때는 팔불출보다 더 심한 표현이 있다면 그게 나이지 싶다. 나는 우리 조합원들이 있는 어린이집에 가서 아이들과 뒹구는 게 제일 좋다. 그냥 창문에서 보기만 해도 너무 좋다. 아이들은 정말 솔직하고, 순수하다. 꾸밈이 없다. 아이들과의 소통은 어른들과의 소통과는 느낌이 너무도 다르다. 물론 우리 조합원들이 10시간씩 아이들을 돌보지만, 나는 기껏해야 1시간 남짓 아이들을 보니 사랑하는 마음을 유지(?)시킬 수가 있는 것도 인정한다. 내가 지금까지 정말 행복했던 적을 이야기해보라면 나는 우리 애들이 나에게 '엄마'라고 불렀을 때라고 망설임 없이 대답할 것이다. 기어 다니지도 못하던 것들이 몸을 뒤집고, 또 기어 다니다가 걷기도 하고, 옹알이를 하다가 나에게 엄마라고 할 때 그 때의 느낌이란… 근데 주책이긴 하다. 진짜 엄마도 아니면서… 끄응… 암튼 그런 나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 조합원들은 '아이구, 사무장님 얼른 애기 가지세요' 그런다. 내가 요사이 운동을 안 하면서 배가 나오게 되었는데, 그걸 보고 맨날 '혹시~~~'라며 자기들이 더 좋아라 한다. 하지만, 나는 아이를 갖는 것이 너무도 두렵다. 일단 내가 아이를 가져도 낳을 수 없기 때문에, 아니, 키울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아이를 가지게 되면 수술을 할 생각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를 가지면 수술을 해야 하기 때문에 나는 임신이 두렵다. 내 주변에 한번쯤 임신중절 수술을 하지 않은 여성활동가가 많지 않고, 그녀들은 정신적, 육체적 고통이 있었다. 그리고 그 고통이 얼마나 크고, 또 정확히 어떤 것인지 사실 밝혀진 것 이상으로 불명확하다. 모름지기 불명확하다는 것처럼 사람을 불안하게 하는 것도 없다. 아무튼, 나는 아이들을 좋아하지만, 내가 아이를 갖는 것을 두려워했고, 그래서 내가 임신한다는 것에 늘 민감해했다. 생리불순이 있는 나로서는 혹시 임신한 게 아닌가하여 늘 불안했다. 나는 내가 불안해하는 것도 싫었고, 부차적이지만 내가 늘 테스트 약을 사서 테스트를 해보는 것도 너무 싫었다. 그런데, 이러한 나의 불평에 신랑의 반응은 "너의 무의식은 아이를 정말 원하고 있어. 너는 상상임신을 할 거야"였다. 나는 정말 너무도 화가 났다. 나도 내가 아이를 좋아한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지금 아이가 생길까봐 걱정인 상태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쉽게 나의 무의식을 단정할 수 있는지? 그리고 상상임신이라니… 그래서 화를 냈더니, 신랑은 내가 사람들 사이의 대화의 예의를 지키지 않고 화를 내는 문제에 대하여 지적을 한다. 그것에 내가 더욱 화가 나서 지랄을 한다. 신랑은 자신의 지적에도 내가 화를 내니 화가 난다. 그리고 정상적인 대화가 되지 않는다. 지나고 나서 내가 화를 내는 자체가 아니라 화를 내는 이유를 보라고 이야기해도, 신랑은 자기도 화가 나는 일들이 많지만 나에게 화를 내지 않는다고 이야기를 한다. 그래서 나는 화도 못 참고 마음 내키는 대로 화를 내는 이상한 사람, 사람관계에서 예의도 없는 사람이 되어 간다. 문득 남자는 이런 상황에 처할 일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날 일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임신의 불안감, 여성이 아니고서는 가지지 못하는 그런 종류의 불안감. 물론 신랑도 아이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내가 임신하는 것에 있어서 민감하지만, 중절수술에 대한 불안감에 대해서 그는 잘 알 수는 없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상상임신할거야'라는 말이 얼마나 상처인지도 알기 힘들 것이다. 그리고 이걸로 가지게 되는 '화'의 성질은 일상생활에서 가지는 남성의 '화'랑 다를 거 같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일에서 여성이 화를 내는 것이 정당하다는 주장까지 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성질이 조금 다른 것은 같다. 그리고 여성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살면서 겪게 되는 구조적, 상징적 폭력 속에 가지게 되는 분노들은 분명 내 안에 존재하고 있는 것 같다. 그게 이런 계기에서 결합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게 여남의 차이점을 실생활에서 느낀 에피소드 1이다. 여기까지 쓰고 나니, 소심, 걱정, 근심 대마왕은 신랑이 이 글에 대하여 어떤 말을 할 지 너무 두려워진다. 하지만, 오늘 나는 술을 한잔 했고, 술 한 잔의 용기로 그냥 글을 올리련다. 뭐, 다른 사람의 이글에 대한 격려가 있으면 다음 에피소드도 올려보든가…

  • 2006-09-06

    결혼이야기 - 여남의 다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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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부쩍 “여남이 정말로 다르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이게 결혼하였기 때문에 그런 걸 느낄 계기가 많았는지는 확실치도 않으면서 무작정 제목은 "결혼 이야기-여남의 다른 이야기"로 낙찰되었다. 사실 이론적인 어떤 다른 점을 조망해보고, 또 왜 다른지 분석할 역량은 되지 못한다. 오히려 제목은 그럴싸하게 썼지만, 나의 답답함을 온 세상에 이야기하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 나만의 방에서 혼자 술을 먹으며 끙끙거리는 걸로는 도저히 해결 안 되는 성질상. 요즘 우리 신랑과 나의 다툼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려고 노력중이다. 하지만, 정확히 객관적일 수는 없으리라고 나도 생각한다. 나는 여성이고 신랑은 남성인데, 어떻게 객관적일 수 있으랴. 이를테면 이런 거다. 나는 아이들을 정말 좋아한다. 어쩔 때는 팔불출보다 더 심한 표현이 있다면 그게 나이지 싶다. 나는 우리 조합원들이 있는 어린이집에 가서 아이들과 뒹구는 게 제일 좋다. 그냥 창문에서 보기만 해도 너무 좋다. 아이들은 정말 솔직하고, 순수하다. 꾸밈이 없다. 아이들과의 소통은 어른들과의 소통과는 느낌이 너무도 다르다. 물론 우리 조합원들이 10시간씩 아이들을 돌보지만, 나는 기껏해야 1시간 남짓 아이들을 보니 사랑하는 마음을 유지(?)시킬 수가 있는 것도 인정한다. 내가 지금까지 정말 행복했던 적을 이야기해보라면 나는 우리 애들이 나에게 '엄마'라고 불렀을 때라고 망설임 없이 대답할 것이다. 기어 다니지도 못하던 것들이 몸을 뒤집고, 또 기어 다니다가 걷기도 하고, 옹알이를 하다가 나에게 엄마라고 할 때 그 때의 느낌이란… 근데 주책이긴 하다. 진짜 엄마도 아니면서… 끄응… 암튼 그런 나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 조합원들은 '아이구, 사무장님 얼른 애기 가지세요' 그런다. 내가 요사이 운동을 안 하면서 배가 나오게 되었는데, 그걸 보고 맨날 '혹시~~~'라며 자기들이 더 좋아라 한다. 하지만, 나는 아이를 갖는 것이 너무도 두렵다. 일단 내가 아이를 가져도 낳을 수 없기 때문에, 아니, 키울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아이를 가지게 되면 수술을 할 생각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를 가지면 수술을 해야 하기 때문에 나는 임신이 두렵다. 내 주변에 한번쯤 임신중절 수술을 하지 않은 여성활동가가 많지 않고, 그녀들은 정신적, 육체적 고통이 있었다. 그리고 그 고통이 얼마나 크고, 또 정확히 어떤 것인지 사실 밝혀진 것 이상으로 불명확하다. 모름지기 불명확하다는 것처럼 사람을 불안하게 하는 것도 없다. 아무튼, 나는 아이들을 좋아하지만, 내가 아이를 갖는 것을 두려워했고, 그래서 내가 임신한다는 것에 늘 민감해했다. 생리불순이 있는 나로서는 혹시 임신한 게 아닌가하여 늘 불안했다. 나는 내가 불안해하는 것도 싫었고, 부차적이지만 내가 늘 테스트 약을 사서 테스트를 해보는 것도 너무 싫었다. 그런데, 이러한 나의 불평에 신랑의 반응은 "너의 무의식은 아이를 정말 원하고 있어. 너는 상상임신을 할 거야"였다. 나는 정말 너무도 화가 났다. 나도 내가 아이를 좋아한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지금 아이가 생길까봐 걱정인 상태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쉽게 나의 무의식을 단정할 수 있는지? 그리고 상상임신이라니… 그래서 화를 냈더니, 신랑은 내가 사람들 사이의 대화의 예의를 지키지 않고 화를 내는 문제에 대하여 지적을 한다. 그것에 내가 더욱 화가 나서 지랄을 한다. 신랑은 자신의 지적에도 내가 화를 내니 화가 난다. 그리고 정상적인 대화가 되지 않는다. 지나고 나서 내가 화를 내는 자체가 아니라 화를 내는 이유를 보라고 이야기해도, 신랑은 자기도 화가 나는 일들이 많지만 나에게 화를 내지 않는다고 이야기를 한다. 그래서 나는 화도 못 참고 마음 내키는 대로 화를 내는 이상한 사람, 사람관계에서 예의도 없는 사람이 되어 간다. 문득 남자는 이런 상황에 처할 일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날 일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임신의 불안감, 여성이 아니고서는 가지지 못하는 그런 종류의 불안감. 물론 신랑도 아이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내가 임신하는 것에 있어서 민감하지만, 중절수술에 대한 불안감에 대해서 그는 잘 알 수는 없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상상임신할거야'라는 말이 얼마나 상처인지도 알기 힘들 것이다. 그리고 이걸로 가지게 되는 '화'의 성질은 일상생활에서 가지는 남성의 '화'랑 다를 거 같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일에서 여성이 화를 내는 것이 정당하다는 주장까지 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성질이 조금 다른 것은 같다. 그리고 여성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살면서 겪게 되는 구조적, 상징적 폭력 속에 가지게 되는 분노들은 분명 내 안에 존재하고 있는 것 같다. 그게 이런 계기에서 결합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게 여남의 차이점을 실생활에서 느낀 에피소드 1이다. 여기까지 쓰고 나니, 소심, 걱정, 근심 대마왕은 신랑이 이 글에 대하여 어떤 말을 할 지 너무 두려워진다. 하지만, 오늘 나는 술을 한잔 했고, 술 한 잔의 용기로 그냥 글을 올리련다. 뭐, 다른 사람의 이글에 대한 격려가 있으면 다음 에피소드도 올려보든가…

  • 2006-08-01

    성노동자 운동의 현재적 쟁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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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9 '성노동자의 날' 행사에 다녀와서 지난 6월 29일, <민주성노동자연대>(이하 민성노련)에서 주최하는 성노동자의 날 1주년 행사가 열렸다. '성매매여성을 위한다는' 성특법이 역설적이게도 성노동자들의 권리를 침해하고 낙인을 강화하는 것에 대해 2005년 6월 29일, 성노동자도 인간임을 노동자임을 선포하면서 성노동자들은 스스로 조직하여 <전국성노동자연대 한여연>(이하 전성노련)을 출범시켰다. 이후 지역차를 극복하고 성노동자운동의 활성화와 전망을 찾기 위해 전성노련에서 탈퇴하고 결성된 민성노련은 출범(2005. 8. 27) 이후 지금껏 '성노동자에게 횡행하는 오명과 낙인에 맞서 성노동자들의 권리 쟁취를 위한 투쟁'을 꾸준히 전개해왔다. 이 글에서는 지금껏 전개된 민성노련의 성노동자 운동을 둘러싸고 제기되는 쟁점들을 검토하고자 한다. 성노동자 운동의 과제 평택 집창촌의 성노동자들에게 성노동자의 날은 투쟁의 날이자 휴일이었다. 당일 모든 업소는 문을 닫고, 성노동자의 날 행사에 참여했다. 약 200여명의 성노동자와 <성노동자운동연대를 위한 네트워크>(노동자의 힘 여성활동가모임, 사회진보연대, 세계화반대 여성연대, 여성문화이론연구소 성노동 연구팀, 이성숙, 이하 네트워크) 회원 및 활동가들, <연분홍치마> 등 성노동자 운동을 지지하는 이들이 모였다. 민성노련과 네트워크가 함께 성노동자의 날 행사를 준비하면서 성노동자의 요구를 사회적으로 발언하고 성노동자 운동을 지지하는 다양한 단위들을 결합시키려했던 애초의 기획은 다소 축소되었다. 평택 이외의 다른 지역에서 공동 투쟁은 진행되지 못하였고(다른 지역에서도 성노동자의 날을 기려 다양한 문화행사 등을 전개했다는 소식은 성노동자의 날 행사가 끝나고서야 알 수 있었다), 네크워크 단위가 확대되고 있지 못하는 것처럼 성노동자 운동을 지지하는 단위가 확대되지도 못했다. 성노동자의 요구와 외침을 여론에서조차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 자리에 모인 성노동자들 중에 행사의 의의나 자신들의 조직인 민성노련을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전성노련이나 민성노련의 활동을 함께 하지 못한 신규 조합원의 유입, 성매매가 불법적인 상황에서의 잦은 인원 변동, 장시간 야간 노동 등의 조건이 성노동자 조직화의 현실적 어려움으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성노련의 실천이 기동적인 성명전이나 집행부 중심의 논의와 활동에 한정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민성노련은 내적으로 6.29 성노동자의 날 행사의 부제 '성노동자여 단결하라'처럼 성노동자들의 요구와 의식을 조직화하는 것과 외적으로 성노동자 운동을 지지하는 단위들을 조직해야하는 두 가지의 과제를 안고 있다. 성노동자 운동 지지, 성특법 비판을 넘어서야 성노동자의 날 1주년 기념사에서 민성노련은, 연대하고 있는 네트워크 및 단체를 소개하고, 덧붙여 '성노동자운동을 지지하는' 인사들을 구체적으로 거론하였다. 그런데 이 속에는 성특법을 비판하고 성노동자의 인권을 고려해야 한다는 입장을 거론한 이를 포함하여 '자활정책의 실패'를 언급한 한나라당 김희정 의원, '집창촌에 대해 규제주의를 통해 양성화되길 바란다'는 민주당 김강자 의원, 2004년 국회 앞에서 성노동자들이 단식농성 했을 때 방문해 '격려'해주었다던 경기도지사 김문수 등이 포함되어있다. 이른바 성특법의 한계에 대해 지적하는 개개인들의 발언이 성노동자 운동을 지지하는 것으로 둔갑한 것이다. 그러나 성특법이라는 법이나 정책의 한계 내지 실효성을 지적하는 것이 모두 성노동자의 요구와 권리를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법에 대한 비판에 한정되지 않는 성노동자의 인간 선언과 권리에 대해 그들이 지지하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고 하는 편이 낫다. 소위 저명 인사를 거론하는 것이 성노동자 운동의 정당성을 호소하는 데 이용될 수도 없을 뿐더러, 오히려 이러한 인사(?)들이 성노동자의 지지를 등에 업고 성노동자의 요구와 무관하게 법개정 논의를 끌고 갈 위험마저 존재한다. 성적자기결정권의 자유주의적 한계 성특법에 대한 비판의 한 축으로 성특법이 성인 남녀의 성적자기결정권을 침해한다는 주장도 공존하고 있다. 6.29 집회 연대발언에서, 평등연대 공동대표라는 헌법학자 곽순근은 '성매매를 제한하는 것은 직업선택의 자유를 침해하고 생존권을 위협하는 것으로, 성특법은 위헌 소지가 많으며 성적 자기결정권에 국가가 개입할 수 없다'고 발언했다. 이들이 말하는 성노동자의 권리는 '모든 사람은 자신의 신체에 대한 소유권을 지닌다'는 자유주의 사상에 기대고 있다. 이는 성적자기결정권이 헌법에서 여러 자기결정권1)아시아 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Asia-Pacific Economic Cooperation) 중 하나라는 사실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곽순근 또한 성적자기결정권을 언급하면서 동성애에 대한 국가 억압이 없어져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 이유로 성특법도 없어져야 한다고 언급했다. 이러한 소유권, 노동, 계약적 동의 및 자유에 대한 자유주의적 담론은 경제·사회·정치권력의 불균형을 은폐하거나 자연화 한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성적자기결정권에 따르면 남성에게는 성을 구매할 권리가, 여성에게는 성을 판매할 권리가 제기된다. 그러나 왜 여성만이 성을 판매하는지, 왜 성노동자만 낙인과 차별에 시달리며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권리와 보호를 누리지 못하는지 등은 문제시되지 않는다. 성노동자의 생존권을 빌미로 남성의 성적 구매의 자유를 주장하는 것은 성노동자 운동이 지향해야 할 것과 배치된다. 우리는 성노동의 범죄화를 반대하지만, 남녀의 섹슈얼리티 또한 변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성의 성적 실천은 재생산과 연관된 것만 허용되고, 여성의 육체와 이미지가 대상화, 상품화되는 현재의 상황이나 담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자는 성적 자유주의에 반대한다. 1997년 인도 꼴까따에서 열린 '인도 성노동자 전국회의'에서 채택된 '성노동자 선언'2)아시아 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Asia-Pacific Economic Cooperation) 에서 성노동자들이 '성과 섹슈얼리티에 관한 남녀 불평등을 인식하고, 물질적이고 감정적이고 성적인 수요가 공정하고 행복하게 해결되는 이상사회에서는 성적 거래가 불필요할 지도 모른다'고 언급한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성노동자 운동을 통해 여성의 성적 억압이라는 성적 불평등에 대해 인식하고 싸우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다. 집창촌 '합법화' 요구에 대한 우려 성매매 금지주의에 대한 법률적 대안을 모색하고 있는 민성노련은 '비범죄주의와 합법적 규제주의의 장점을 결합한 비범죄적 규제주의'를 제안하고 있다. 성인 남녀를 비범죄화하되 '일정 지역 내'에서 성거래(성노동)가 이뤄질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집창촌은 음성적 성매매나 일대일로 성구매자를 대해야하는 다른 형식들에 비해 안전하고, 업소들이 모여 있기 때문에 성노동자들이 조직되기 쉬운 상대적 이점이 존재한다. 또한 성노동자들은 집창촌에서는 업주와의 관계가 착취적이지 않다고 말한다. 실제 성특법 시행 이후 민성노련에서는 성산업인들과 단체협약을 맺어 휴가, 임금 협상 등에 있어 주도권을 획득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집창촌이 성노동자에게 안전하고 성노동자 조직화에 유리하다는 것이 집창촌만을 합법화시키자는 주장으로 이어질 수는 없다. 현재의 성특법이 음성적 부문을 비대화하고 있으므로 이를 '대안적으로 축소'해갈 수 있는 조치가 필요하다는 민성노련의 의견은 이를 위해 국가의 경찰력을 동원하여 특정 지역에서만 성노동을 허용하자는 주장으로 이어지고 있다. 성특법이 시행되고 경찰이 단속한 결과는 어떠한가. 경찰은 접근이 용이한 집창촌만을 단속하고 음성적 부문에 대해서는 방치하다시피했다. 결국에는 경찰력의 무능을 드러내며 시민감시단까지 운용하겠다고 나섰다. 오히려 합법적 규제주의는 허가된 지역이나 성노동자만을 손쉽게 통제하고, 음성적 부문은 다시 방치해버리도록 하는 빌미를 주게 될 것이다. 민성노련은 성매매의 비범죄화가 전국을 사창화할 것이고 그리하여 비범죄화가 국민적 설득력을 잃을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은 기존의 금지주의자들이 성매매를 '나쁜 것'으로 보고, 국가가 규제해야 한다고 요청한 것과 연장선상에 존재한다. 이러한 규제에는 허가된 성노동자의 수를 적절히 유지하고 그녀들을 건강하게 관리하는 것이 공공질서를 유지하는 것이라는 관념이 깔려있다. 성매매를 '축소'하는 게 특정 지역에서만 성노동을 허용하는 것으로 대치될 수 없지만 성매매가 확대되거나 축소되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성노동이 행해지는 공간에서의 성노동자의 안전과 노동조건을 확보할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합법적 규제주의 하에서 허가된 업소나 격리 지역에 존재하는 성노동자는 제한적인 권리는 누릴 수 있겠지만 비허가된 업소나 지역에 존재하는 성노동자는 범죄화되며 음성화된 공간에서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이게 된다. 이른바 성노동이 아닌 인신매매나 노예제의 경우, 법적으로 금지한다고 저절로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경찰이 모두 단속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 공간에 존재하는 여성이 낙인이나 범죄화의 우려 없이 법률에 호소할 수 있는 조건이 가능할 때 음성적 부문의 착취나 인권 침해가 해결될 수 있다. 강제된 성매매에 종사하는 피해자를 구제하겠다는 여성단체의 무분별한 시도가 성노동자의 주체성과 생존권을 억압하듯이, 성노동자 일부만을 위한 전략이 성노동자의 분할과 착취를 지속시킬 수 있다. 대만의 타이페이에서 실시되던 '면허 매춘여성 관리 법률'이 폐지된 후, 생존권을 요구하는 (면허)성노동자들이 다시 제한적인 합법화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비범죄화를 내걸고 투쟁하고 있다는 사실에서의 참조점을 되새겨야 할 것이다. 반성매매운동을 넘어 성노동자 운동을 지지하자 지금껏 여성단체들은 성매매를 성적 노예제로 분석하며 '성매매여성'을 피해자화 했다. 물론 노예제, 그것과 유사한 실천이 성산업과 상당한 관련이 있다. 여성이 납치되거나 판매되어 장기간 타인(대리인, 포주, 소개업소)의 소유물이 된다면 그 관계는 노예적인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성매매를 강요받는 여성은 육체의 어떤 부위가 어떤 방식으로 사용될 것인지에 대해 아무런 협상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성매매를 '육체'를 판매하는 것으로 보는 급진주의 페미니즘적 견해는 이러한 노예제적 계급 과정을 통해 성매매가 조직되는 경우에 대한 설명만을 제공한다. 그러나 일부 성매매여성들이 노예제의 상태에 속해 있다는 사실이 모든 성노동이 노예제에 해당한다는 주장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러한 인신매매나 노예제, 그것과 유사한 실천이 성산업과 관련이 있는 것 역시 우연이 아니다. 성산업은 사회의 주변에 법적·관습적 제한 외부에 존재하며, 성노동자들의 권리 및 경제적 기회를 방어할 권력은 이미 사회에서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한 성노동자들이 겪는 착취와 폭력이 낮은 지위에 있는 여타의 직업에서의 상황과 비슷하다는 점을 볼 때, 이른바 그 노동이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 라는 노동에 부과된 낙인이나 편견이 노동자의 취약성과 인권 침해의 원인이 된다는 점 또한 알 수 있다.(Jo Bindman, 「국제적 아젠다에서 매춘을 성노동으로 재정의하기(Redefining Prostitution as Sex Work on the International Agenda)」, 1997, http://www.walnet.org/csis/papers/redefining.html) 성노동자에게 필요한 것은 그들의 노동을 불법적인 것으로 규정함으로써 법 외부에 두는 것을 철폐하는 것, 노동에 부과된 낙인과 편견을 제거하는 것이다. 지금껏 여성단체가 주도해왔던 성산업 특히 집창촌을 없애버리려는 식의 반성매매 운동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아야 한다. 모든 성노동자를 '피해자' 혹은 '노예'화하려고 했던 여성단체의 전략은 성매매를 '신체'와 '자아'를 파는 것으로 간주하는 입장을 전제하는데 이는 성노동자의 존엄성과 주체성을 부정하는 것으로서 오히려 성노동자에 대한 차별과 낙인을 강화하는데 기여하고 있다. 성노동 자체를 '폭력'이라고 간주하는 담론 안에서는 성노동에서 벌어지는 차별과 착취를 인식하고 개선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폭력적인 성매매'에서 즉각 철수할 것만이 성노동자에게 요구되기에 스스로의 결정에 의해 성노동을 지속하거나 그만둘 권리조차 없게 된다는 점에서 성특법은 성노동자의 생계를 위협해왔다. 우리가 이른바 '성매매여성'을 성노동자로 정의하며 성노동자 운동을 펼치는 것은, 자본주의하에서의 성과 노동의 상품화를 막는 전략이 특정한 산업을 즉각 철폐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조합 결성 등을 통해 조직화된 주체들이 그들이 직면하는 착취와 차별에 저항하는 것을 통해 달성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성노동자를 조직화하고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투쟁하는 데 지지지원하는 방향으로 운동을 조직해야 한다. 개인의 인권, 시민권, 노동권, 존중에 대한 권리와 인간으로서의 가치는 그들이 어떠한 노동을 수행하는지와 상관없다. 성노동자들이 권리를 지니고 존중받아야 하는 것은 그들이 성산업에 종사한다는 사실과 상관없이 그들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어떤 인간도 기본적 인권이 부정되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성노동자를 법치의 외부에 두는 모든 법은 철폐되어야 한다. 우리는 성매매를 금지하는 법률의 철폐, 비범죄화를 주장한다. 동의에 기초한 성인의 성거래에 대한 법은 철폐되어야 한다. 사기, 학대, 폭력, 강제를 금지하는 법은 일반 시민과 마찬가지로 성노동자에게도 적용되어야 한다. 앞서 언급한 성노동자 운동의 고유한 한계 및 쟁점에도 불구하고 제 운동단체 및 활동가들은 성노동자에 대해 갖고 있는 낙인과 편견을 깨고 성노동자 운동에 연대할 수 있는 열린 자세를 갖기를 당부한다. 한국의 성노동자 운동은 이제 출발점에 있으며 그 힘이 미약하지만 노동자로서 여성으로서 인간으로서 침해되고 있는 성노동자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이 나아갈 방향은 성노동자 운동을 지지하는 이들의 논의와 노력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1) 김철수 헌법학 개론에 따르면 자기결정권은 자기의 사적인 사항, ①결혼, 이혼, 출산, 피임, 낙태와 같이 자신의 인생 전반의 설계에 관한 사항, ②생명연장치료의 거부, 존엄사와 자살, 장기이식 등 삶과 죽음에 관한 사항, ③개인의 생활양식이나 취미에 관한 사항, ④혼전성교, 혼외성교, 동성애 등 성인간의 합의로 이뤄지는 성적 행동에 관한 사항 등을 스스로 자유롭게 결정하고 그 결정에 따라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우리나라와 일본에서는 이를 '자기결정권'의 개념으로 파악하지만, 미국에서는 '프라이버시권' 개념으로 파악한다(신상숙, 「성폭력의 의미구성과 성적 자기결정권의 딜레마」,『여성과 사회』, 2001).본문으로 2) 성과 섹슈엘리티에 대한 사회규범은 여성과 남성에게 동등하게 적용되지 않는다. 출산 목적이 아닌 성적 욕구가 승인될 때는 그것은 오직 남자들에게 뿐이다. 공동체마다 약간씩의 차이는 있지만, 어떤 곳에서는 근대성의 이름으로 습속이 조금씩 변했지만, 일부다처제를 유지하고 다수의 성적 파트너를 추구할 권리를 향유했던 사람은 거의 남자였다. 여성들은 언제나 한 남자에게 충실할 것이 기대되었다. (중략) 자율적인 섹슈엘리티에 대한 상상을 통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남자들과 여자들은 동등한 접근권을 가질 것이며, 동등하게 참여할 것이며, 'yes' 혹은 'no'라고 말할 권리를 가질 것이며, 심판이나 억압의 공간은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현재 이상적인 사회적 세계에 살지 않고 있다. 언제 이상적인 사회질서가 실현될지 혹은 과연 그렇게 될런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우리의 이상적이지 못한 세계에서 음식이나 건강에 대한 상업적 거래의 비도덕성이 용납된다면, 왜 돈을 받고 하는 섹스는 비윤리적이고 용납불가능한가? 물질적이고 감정적이고 지적이고 성적인 수요가 공정하고 즐겁고 행복하게 해결되는 이상 사회에서는 아마 그러한 거래가 불필요할 것이다. 우리는 모른다. 우리가 현재 할 수 있는 일은 현재의 불평등과 부정의를 탐색하고, 그 근본에 의문을 제기하고, 그것들에 맞서고 도전하고 변화시키는 것이다.' -『세계화에 불만있는 여성들을 위한 자료집: 여성적 사고, 지구적 저항』국제연대정책정보센터 펴냄-에서 발췌본문으로

  • 2006-08-01

    성노동자 운동의 현재적 쟁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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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9 '성노동자의 날' 행사에 다녀와서 지난 6월 29일, <민주성노동자연대>(이하 민성노련)에서 주최하는 성노동자의 날 1주년 행사가 열렸다. '성매매여성을 위한다는' 성특법이 역설적이게도 성노동자들의 권리를 침해하고 낙인을 강화하는 것에 대해 2005년 6월 29일, 성노동자도 인간임을 노동자임을 선포하면서 성노동자들은 스스로 조직하여 <전국성노동자연대 한여연>(이하 전성노련)을 출범시켰다. 이후 지역차를 극복하고 성노동자운동의 활성화와 전망을 찾기 위해 전성노련에서 탈퇴하고 결성된 민성노련은 출범(2005. 8. 27) 이후 지금껏 '성노동자에게 횡행하는 오명과 낙인에 맞서 성노동자들의 권리 쟁취를 위한 투쟁'을 꾸준히 전개해왔다. 이 글에서는 지금껏 전개된 민성노련의 성노동자 운동을 둘러싸고 제기되는 쟁점들을 검토하고자 한다. 성노동자 운동의 과제 평택 집창촌의 성노동자들에게 성노동자의 날은 투쟁의 날이자 휴일이었다. 당일 모든 업소는 문을 닫고, 성노동자의 날 행사에 참여했다. 약 200여명의 성노동자와 <성노동자운동연대를 위한 네트워크>(노동자의 힘 여성활동가모임, 사회진보연대, 세계화반대 여성연대, 여성문화이론연구소 성노동 연구팀, 이성숙, 이하 네트워크) 회원 및 활동가들, <연분홍치마> 등 성노동자 운동을 지지하는 이들이 모였다. 민성노련과 네트워크가 함께 성노동자의 날 행사를 준비하면서 성노동자의 요구를 사회적으로 발언하고 성노동자 운동을 지지하는 다양한 단위들을 결합시키려했던 애초의 기획은 다소 축소되었다. 평택 이외의 다른 지역에서 공동 투쟁은 진행되지 못하였고(다른 지역에서도 성노동자의 날을 기려 다양한 문화행사 등을 전개했다는 소식은 성노동자의 날 행사가 끝나고서야 알 수 있었다), 네크워크 단위가 확대되고 있지 못하는 것처럼 성노동자 운동을 지지하는 단위가 확대되지도 못했다. 성노동자의 요구와 외침을 여론에서조차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 자리에 모인 성노동자들 중에 행사의 의의나 자신들의 조직인 민성노련을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전성노련이나 민성노련의 활동을 함께 하지 못한 신규 조합원의 유입, 성매매가 불법적인 상황에서의 잦은 인원 변동, 장시간 야간 노동 등의 조건이 성노동자 조직화의 현실적 어려움으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성노련의 실천이 기동적인 성명전이나 집행부 중심의 논의와 활동에 한정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민성노련은 내적으로 6.29 성노동자의 날 행사의 부제 '성노동자여 단결하라'처럼 성노동자들의 요구와 의식을 조직화하는 것과 외적으로 성노동자 운동을 지지하는 단위들을 조직해야하는 두 가지의 과제를 안고 있다. 성노동자 운동 지지, 성특법 비판을 넘어서야 성노동자의 날 1주년 기념사에서 민성노련은, 연대하고 있는 네트워크 및 단체를 소개하고, 덧붙여 '성노동자운동을 지지하는' 인사들을 구체적으로 거론하였다. 그런데 이 속에는 성특법을 비판하고 성노동자의 인권을 고려해야 한다는 입장을 거론한 이를 포함하여 '자활정책의 실패'를 언급한 한나라당 김희정 의원, '집창촌에 대해 규제주의를 통해 양성화되길 바란다'는 민주당 김강자 의원, 2004년 국회 앞에서 성노동자들이 단식농성 했을 때 방문해 '격려'해주었다던 경기도지사 김문수 등이 포함되어있다. 이른바 성특법의 한계에 대해 지적하는 개개인들의 발언이 성노동자 운동을 지지하는 것으로 둔갑한 것이다. 그러나 성특법이라는 법이나 정책의 한계 내지 실효성을 지적하는 것이 모두 성노동자의 요구와 권리를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법에 대한 비판에 한정되지 않는 성노동자의 인간 선언과 권리에 대해 그들이 지지하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고 하는 편이 낫다. 소위 저명 인사를 거론하는 것이 성노동자 운동의 정당성을 호소하는 데 이용될 수도 없을 뿐더러, 오히려 이러한 인사(?)들이 성노동자의 지지를 등에 업고 성노동자의 요구와 무관하게 법개정 논의를 끌고 갈 위험마저 존재한다. 성적자기결정권의 자유주의적 한계 성특법에 대한 비판의 한 축으로 성특법이 성인 남녀의 성적자기결정권을 침해한다는 주장도 공존하고 있다. 6.29 집회 연대발언에서, 평등연대 공동대표라는 헌법학자 곽순근은 '성매매를 제한하는 것은 직업선택의 자유를 침해하고 생존권을 위협하는 것으로, 성특법은 위헌 소지가 많으며 성적 자기결정권에 국가가 개입할 수 없다'고 발언했다. 이들이 말하는 성노동자의 권리는 '모든 사람은 자신의 신체에 대한 소유권을 지닌다'는 자유주의 사상에 기대고 있다. 이는 성적자기결정권이 헌법에서 여러 자기결정권1)아시아 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Asia-Pacific Economic Cooperation) 중 하나라는 사실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곽순근 또한 성적자기결정권을 언급하면서 동성애에 대한 국가 억압이 없어져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 이유로 성특법도 없어져야 한다고 언급했다. 이러한 소유권, 노동, 계약적 동의 및 자유에 대한 자유주의적 담론은 경제·사회·정치권력의 불균형을 은폐하거나 자연화 한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성적자기결정권에 따르면 남성에게는 성을 구매할 권리가, 여성에게는 성을 판매할 권리가 제기된다. 그러나 왜 여성만이 성을 판매하는지, 왜 성노동자만 낙인과 차별에 시달리며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권리와 보호를 누리지 못하는지 등은 문제시되지 않는다. 성노동자의 생존권을 빌미로 남성의 성적 구매의 자유를 주장하는 것은 성노동자 운동이 지향해야 할 것과 배치된다. 우리는 성노동의 범죄화를 반대하지만, 남녀의 섹슈얼리티 또한 변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성의 성적 실천은 재생산과 연관된 것만 허용되고, 여성의 육체와 이미지가 대상화, 상품화되는 현재의 상황이나 담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자는 성적 자유주의에 반대한다. 1997년 인도 꼴까따에서 열린 '인도 성노동자 전국회의'에서 채택된 '성노동자 선언'2)아시아 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Asia-Pacific Economic Cooperation) 에서 성노동자들이 '성과 섹슈얼리티에 관한 남녀 불평등을 인식하고, 물질적이고 감정적이고 성적인 수요가 공정하고 행복하게 해결되는 이상사회에서는 성적 거래가 불필요할 지도 모른다'고 언급한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성노동자 운동을 통해 여성의 성적 억압이라는 성적 불평등에 대해 인식하고 싸우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다. 집창촌 '합법화' 요구에 대한 우려 성매매 금지주의에 대한 법률적 대안을 모색하고 있는 민성노련은 '비범죄주의와 합법적 규제주의의 장점을 결합한 비범죄적 규제주의'를 제안하고 있다. 성인 남녀를 비범죄화하되 '일정 지역 내'에서 성거래(성노동)가 이뤄질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집창촌은 음성적 성매매나 일대일로 성구매자를 대해야하는 다른 형식들에 비해 안전하고, 업소들이 모여 있기 때문에 성노동자들이 조직되기 쉬운 상대적 이점이 존재한다. 또한 성노동자들은 집창촌에서는 업주와의 관계가 착취적이지 않다고 말한다. 실제 성특법 시행 이후 민성노련에서는 성산업인들과 단체협약을 맺어 휴가, 임금 협상 등에 있어 주도권을 획득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집창촌이 성노동자에게 안전하고 성노동자 조직화에 유리하다는 것이 집창촌만을 합법화시키자는 주장으로 이어질 수는 없다. 현재의 성특법이 음성적 부문을 비대화하고 있으므로 이를 '대안적으로 축소'해갈 수 있는 조치가 필요하다는 민성노련의 의견은 이를 위해 국가의 경찰력을 동원하여 특정 지역에서만 성노동을 허용하자는 주장으로 이어지고 있다. 성특법이 시행되고 경찰이 단속한 결과는 어떠한가. 경찰은 접근이 용이한 집창촌만을 단속하고 음성적 부문에 대해서는 방치하다시피했다. 결국에는 경찰력의 무능을 드러내며 시민감시단까지 운용하겠다고 나섰다. 오히려 합법적 규제주의는 허가된 지역이나 성노동자만을 손쉽게 통제하고, 음성적 부문은 다시 방치해버리도록 하는 빌미를 주게 될 것이다. 민성노련은 성매매의 비범죄화가 전국을 사창화할 것이고 그리하여 비범죄화가 국민적 설득력을 잃을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은 기존의 금지주의자들이 성매매를 '나쁜 것'으로 보고, 국가가 규제해야 한다고 요청한 것과 연장선상에 존재한다. 이러한 규제에는 허가된 성노동자의 수를 적절히 유지하고 그녀들을 건강하게 관리하는 것이 공공질서를 유지하는 것이라는 관념이 깔려있다. 성매매를 '축소'하는 게 특정 지역에서만 성노동을 허용하는 것으로 대치될 수 없지만 성매매가 확대되거나 축소되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성노동이 행해지는 공간에서의 성노동자의 안전과 노동조건을 확보할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합법적 규제주의 하에서 허가된 업소나 격리 지역에 존재하는 성노동자는 제한적인 권리는 누릴 수 있겠지만 비허가된 업소나 지역에 존재하는 성노동자는 범죄화되며 음성화된 공간에서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이게 된다. 이른바 성노동이 아닌 인신매매나 노예제의 경우, 법적으로 금지한다고 저절로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경찰이 모두 단속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 공간에 존재하는 여성이 낙인이나 범죄화의 우려 없이 법률에 호소할 수 있는 조건이 가능할 때 음성적 부문의 착취나 인권 침해가 해결될 수 있다. 강제된 성매매에 종사하는 피해자를 구제하겠다는 여성단체의 무분별한 시도가 성노동자의 주체성과 생존권을 억압하듯이, 성노동자 일부만을 위한 전략이 성노동자의 분할과 착취를 지속시킬 수 있다. 대만의 타이페이에서 실시되던 '면허 매춘여성 관리 법률'이 폐지된 후, 생존권을 요구하는 (면허)성노동자들이 다시 제한적인 합법화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비범죄화를 내걸고 투쟁하고 있다는 사실에서의 참조점을 되새겨야 할 것이다. 반성매매운동을 넘어 성노동자 운동을 지지하자 지금껏 여성단체들은 성매매를 성적 노예제로 분석하며 '성매매여성'을 피해자화 했다. 물론 노예제, 그것과 유사한 실천이 성산업과 상당한 관련이 있다. 여성이 납치되거나 판매되어 장기간 타인(대리인, 포주, 소개업소)의 소유물이 된다면 그 관계는 노예적인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성매매를 강요받는 여성은 육체의 어떤 부위가 어떤 방식으로 사용될 것인지에 대해 아무런 협상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성매매를 '육체'를 판매하는 것으로 보는 급진주의 페미니즘적 견해는 이러한 노예제적 계급 과정을 통해 성매매가 조직되는 경우에 대한 설명만을 제공한다. 그러나 일부 성매매여성들이 노예제의 상태에 속해 있다는 사실이 모든 성노동이 노예제에 해당한다는 주장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러한 인신매매나 노예제, 그것과 유사한 실천이 성산업과 관련이 있는 것 역시 우연이 아니다. 성산업은 사회의 주변에 법적·관습적 제한 외부에 존재하며, 성노동자들의 권리 및 경제적 기회를 방어할 권력은 이미 사회에서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한 성노동자들이 겪는 착취와 폭력이 낮은 지위에 있는 여타의 직업에서의 상황과 비슷하다는 점을 볼 때, 이른바 그 노동이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 라는 노동에 부과된 낙인이나 편견이 노동자의 취약성과 인권 침해의 원인이 된다는 점 또한 알 수 있다.(Jo Bindman, 「국제적 아젠다에서 매춘을 성노동으로 재정의하기(Redefining Prostitution as Sex Work on the International Agenda)」, 1997, http://www.walnet.org/csis/papers/redefining.html) 성노동자에게 필요한 것은 그들의 노동을 불법적인 것으로 규정함으로써 법 외부에 두는 것을 철폐하는 것, 노동에 부과된 낙인과 편견을 제거하는 것이다. 지금껏 여성단체가 주도해왔던 성산업 특히 집창촌을 없애버리려는 식의 반성매매 운동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아야 한다. 모든 성노동자를 '피해자' 혹은 '노예'화하려고 했던 여성단체의 전략은 성매매를 '신체'와 '자아'를 파는 것으로 간주하는 입장을 전제하는데 이는 성노동자의 존엄성과 주체성을 부정하는 것으로서 오히려 성노동자에 대한 차별과 낙인을 강화하는데 기여하고 있다. 성노동 자체를 '폭력'이라고 간주하는 담론 안에서는 성노동에서 벌어지는 차별과 착취를 인식하고 개선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폭력적인 성매매'에서 즉각 철수할 것만이 성노동자에게 요구되기에 스스로의 결정에 의해 성노동을 지속하거나 그만둘 권리조차 없게 된다는 점에서 성특법은 성노동자의 생계를 위협해왔다. 우리가 이른바 '성매매여성'을 성노동자로 정의하며 성노동자 운동을 펼치는 것은, 자본주의하에서의 성과 노동의 상품화를 막는 전략이 특정한 산업을 즉각 철폐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조합 결성 등을 통해 조직화된 주체들이 그들이 직면하는 착취와 차별에 저항하는 것을 통해 달성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성노동자를 조직화하고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투쟁하는 데 지지지원하는 방향으로 운동을 조직해야 한다. 개인의 인권, 시민권, 노동권, 존중에 대한 권리와 인간으로서의 가치는 그들이 어떠한 노동을 수행하는지와 상관없다. 성노동자들이 권리를 지니고 존중받아야 하는 것은 그들이 성산업에 종사한다는 사실과 상관없이 그들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어떤 인간도 기본적 인권이 부정되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성노동자를 법치의 외부에 두는 모든 법은 철폐되어야 한다. 우리는 성매매를 금지하는 법률의 철폐, 비범죄화를 주장한다. 동의에 기초한 성인의 성거래에 대한 법은 철폐되어야 한다. 사기, 학대, 폭력, 강제를 금지하는 법은 일반 시민과 마찬가지로 성노동자에게도 적용되어야 한다. 앞서 언급한 성노동자 운동의 고유한 한계 및 쟁점에도 불구하고 제 운동단체 및 활동가들은 성노동자에 대해 갖고 있는 낙인과 편견을 깨고 성노동자 운동에 연대할 수 있는 열린 자세를 갖기를 당부한다. 한국의 성노동자 운동은 이제 출발점에 있으며 그 힘이 미약하지만 노동자로서 여성으로서 인간으로서 침해되고 있는 성노동자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이 나아갈 방향은 성노동자 운동을 지지하는 이들의 논의와 노력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1) 김철수 헌법학 개론에 따르면 자기결정권은 자기의 사적인 사항, ①결혼, 이혼, 출산, 피임, 낙태와 같이 자신의 인생 전반의 설계에 관한 사항, ②생명연장치료의 거부, 존엄사와 자살, 장기이식 등 삶과 죽음에 관한 사항, ③개인의 생활양식이나 취미에 관한 사항, ④혼전성교, 혼외성교, 동성애 등 성인간의 합의로 이뤄지는 성적 행동에 관한 사항 등을 스스로 자유롭게 결정하고 그 결정에 따라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우리나라와 일본에서는 이를 '자기결정권'의 개념으로 파악하지만, 미국에서는 '프라이버시권' 개념으로 파악한다(신상숙, 「성폭력의 의미구성과 성적 자기결정권의 딜레마」,『여성과 사회』, 2001).본문으로 2) 성과 섹슈엘리티에 대한 사회규범은 여성과 남성에게 동등하게 적용되지 않는다. 출산 목적이 아닌 성적 욕구가 승인될 때는 그것은 오직 남자들에게 뿐이다. 공동체마다 약간씩의 차이는 있지만, 어떤 곳에서는 근대성의 이름으로 습속이 조금씩 변했지만, 일부다처제를 유지하고 다수의 성적 파트너를 추구할 권리를 향유했던 사람은 거의 남자였다. 여성들은 언제나 한 남자에게 충실할 것이 기대되었다. (중략) 자율적인 섹슈엘리티에 대한 상상을 통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남자들과 여자들은 동등한 접근권을 가질 것이며, 동등하게 참여할 것이며, 'yes' 혹은 'no'라고 말할 권리를 가질 것이며, 심판이나 억압의 공간은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현재 이상적인 사회적 세계에 살지 않고 있다. 언제 이상적인 사회질서가 실현될지 혹은 과연 그렇게 될런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우리의 이상적이지 못한 세계에서 음식이나 건강에 대한 상업적 거래의 비도덕성이 용납된다면, 왜 돈을 받고 하는 섹스는 비윤리적이고 용납불가능한가? 물질적이고 감정적이고 지적이고 성적인 수요가 공정하고 즐겁고 행복하게 해결되는 이상 사회에서는 아마 그러한 거래가 불필요할 것이다. 우리는 모른다. 우리가 현재 할 수 있는 일은 현재의 불평등과 부정의를 탐색하고, 그 근본에 의문을 제기하고, 그것들에 맞서고 도전하고 변화시키는 것이다.' -『세계화에 불만있는 여성들을 위한 자료집: 여성적 사고, 지구적 저항』국제연대정책정보센터 펴냄-에서 발췌본문으로

  • 2006-08-01

    한·미 FTA는 여성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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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Free Trade Agreement) 2차 협상이 끝났다. 1차 협상에서는 상품무역, 원산지/통관, 투자, 서비스, 금융서비스, 통신/전자상거래, 경쟁, 지적재산권, 노동, 환경, 총칙/분쟁 해결, 농업, 위생검역, 섬유, 무역구제 등 총 15개 분과 중 총 11개 분과에서 통합협정문을 작성했고, 농업, 위생검역, 섬유, 무역구제 4개 분과에서는 이견이 커 통합협정문을 구성하지 못했다. 이에 이어 양국 정부는 지난 7월 초에 열린 2차 협상에서 서비스 분야에 대한 양허 유보 리스트를 교환하고, 상품, 농업, 섬유 분야에 대한 양허안을 일괄적으로 8월 초까지 교환한다는 데 합의했다. 한국의 '약제비 적정화 방안‘에 대해 미국이 불만을 표하며 마지막 날 분과회의에 참석하지 않는 등의 사태가 빚어지긴 했지만, 최근 2차 협상의 마지막 날인 14일 미국이 몇 가지 조건을 내걸어 이미 이를 수용했음이 드러났다. 초민족 자본이 더 많은 이윤을 남길 수 있도록 하는 조건을 형성하기 위한 양국의 합의는 척척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섬유쿼터제, 농산물쿼터제, 개성공단 생산품의 한국산 인정 등 몇 가지 문제에 대한 양국의 이견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협상에서 한국 정부가 제기하는 입장이 한국 전체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 말할 수 없다. 애초에 한·미 FTA 자체가 초민족 자본의 이익을 극대화하겠다는 신성불가침의 합의였다. 한미 양국이 협상 전부터 굳건히 합의한 사항은 모든 것에 우선해 투자자의 권리를 보장한다는 원칙이고, 이견이 있는 분야에서도 한국 협상단은 민중의 이해보다는 그 산업의 이해를 우선시한다. 제 아무리 언론이 한국 협상단에게 '국익'을 극대화하는 협상을 주문하고 협상단이 '국익'을 위한 협상안을 만들어낸다 하더라도, 한·미 FTA가 노동자민중의 엄청난 희생을 전제로 한다는 점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결국 명확한 것은 한미 FTA를 둘러싼 진정한 쟁점은 '한국이 더욱 잘 살 수 있을 것이냐'가 아니고 '초민족 자본의 이해와 이를 대변하는 지배 세력의 전망 때문에 노동자, 농민, 여성, 빈민의 삶의 권리가 무참히 짓밟혀야 하느냐'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여성의 통합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심화되면서 수많은 민중들이 삶의 터전을 박탈당하고, 처참한 빈곤을 경험하며, 엄청난 노동착취에 시달린다. 나라 자체가 유지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분쟁과 내전이 끊이지 않는 지역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여성들이 가장 큰 고통을 겪는다는 사실도 점차 명확해졌다.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낳은 이런 파괴적 효과를 보완하고자 국제통화기금(IMF, International Monetary Fund)과 세계은행 같은 국제 기구들은 '인간적인 신자유주의'를 주창하면서 빈곤 친화 정책이나 여성 통합 방안을 내놓는다.1)아시아 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Asia-Pacific Economic Cooperation) 등 경제 협력을 논의하는 기구에 여성 의제가 포함되고, 세계은행이 여성 참여를 중요한 과제로 제시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무역, 투자, 금융의 자유화를 기본 목적으로 하는 자유무역협정의 경우 여성 참여와 같은 포괄적 의제나 사회 전반의 구조조정을 직접적인 의제로 상정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이 협정들이 신자유주의 정책 개혁을 통한 전반적 사회 변화에 무관한 것은 아니다. 일례로 '글로벌 스탠더드'(Global Standard)는 한·미 FTA에서 직접 다뤄지지는 않지만, 여러 분과의 기본 전제로 인식되고 지배 세력 또한 한·미 FTA로 인해 글로벌 스탠더드가 확산되면 한국경제의 경쟁력에 도움이 될 것이라 말한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한·미 FTA는 최근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주창하는 사람들이 강조하는 여성 통합, 여성인력의 활용과 무관하지 않다. 다만 한·미 FTA가 여성의 삶에 미치는 영향이 '여성'이라는 이슈로 가시화되거나 구체화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여성들의 입장은 산업별, 부문별, 협정 내용 별로 달라질 수 있다. 버시바우 주한 미국 대사는 지난 3월 한국 여성경제인연합회 조찬 강연에서 미국 노동시장의 다양성 덕분에 미국 여성들이 얻은 혜택들을 구구절절 설명한 후 ‘FTA로 인한 시장 개방과 경제정책 개혁이 촉진됨에 따라 기업 관행의 투명성이 증진될 것이고 이는 양국 경제 전반과 특히 양국 여성에게 혜택으로 돌아갈 것’이라 말했다. 1970년 대 이래 미국의 경제적 지위 하락에 대응하기 위해 시작된 신자유주의 정책과 이의 세계화는 미국에서 탈산업화, 서비스 부문의 급격한 팽창, 자본의 금융적 팽창을 초래했는데, 이런 전환은 모두 여성 고용의 팽창을 수반했다. 이는 여성들의 고용 확대를 가장 주요한 목표로 사고했던 미국의 여성운동과 맞물렸다. 동일 임금, 훈련과 승진에 대한 접근권, 성희롱에 대한 강력한 대처, 적극적 차별 시정 조치(affirmative action), 동등가치 캠페인 등 미국 여성운동가들은 작업장 내 평등과 여성에 대한 모든 직종의 개방을 위해 싸웠다. 이런 운동은 의료, 법률, 건축, 학술과 같은 전문직 분야에서 가장 성공적이었다. 더불어 많은 여성들이 공직에 진출할 수 있는 기반도 되었다.2) 사실 버시바우가 강조한 미국 노동시장의 다양성은 이런 여성들의 성공에 빚진 바 크고, 이는 세계적으로 널리 선전되면서 세계 곳곳에서 미국 식 자유화, 작업장 내 평등을 보장할 노동시장 기준이 여성에게 기회일 수 있다는 기대를 자극한다. 한국에서도 한·미 FTA가 여성들에게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기대가 생겨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여성의 이중부담 강화 하지만 미국 여성운동이 거뒀다는 이런 성공이 무엇을 대가로 했는가는 그 후광에 가려 은폐될뿐더러, 이것이 오히려 세계화를 보완하는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낳는다는 점이 커다란 문제다.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여성에게 양가적인 효과를 낳는다는 점, 신자유주의 세계화 하에서 자본의 전략이 여성에 대한 이중착취를 강화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는 것이 한·미 FTA가 여성에게 미치는 효과를 분석하는 데 필수적이다. 이윤율의 하락으로 위기에 처한 초민족자본이 1970년대 취한 전략 중 하나는 값싸고 유연한 노동력을 마음껏 착취할 수 있는 제3세계 국가로 공장을 이전하는 것이었다. 이들이 노린 값싼 노동력의 대부분은 여성이었고, 이 여성노동자들은 강도 높은 노동착취와 열악한 노동조건 속에서 저임금에 시달리며 국가 발전에 복무했다. 한국은 분단과 대(對)사회주의권 쇼케이스라는 독특한 지위를 통해 미국 시장을 보장받았고, 섬유, 전자와 같은 산업에서 여성노동자들에 대한 착취를 기반으로 제3세계로 이전한 많은 공장들과 경쟁하면서 발전의 기초를 다졌다.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여성노동자들은 열악한 노동조건 속에서 저임금 장시간 노동을 감내해야 했다. 이를 기반으로 한국은 중화학공업 중심의 발전을 모색할 수 있었고, 미국의 역(逆)개방 정책 하에서 '눈부신' 발전을 이뤄냈다. 하지만 이런 발전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는 단 한 번도 가족임금이 모든 노동자들에게 현실화된 적은 없었다. 이는 몇몇 성장을 주도하는 부문의 노동자들에게 제한된 혜택일 뿐이어서, 이 때문에 대다수 노동자 계급의 여성들은 결혼 후에도 비공식 부문을 통해 가계의 소득을 벌충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노동은 '주부'라는 이름 뒤에 은폐되었다. 가정에서 가사의 일차적인 책임자라는 지위는 이들의 노동을 부차적인 것으로 만들었고, 저임금을 정당화했다. 이런 상황은 한국에서 신자유주의 정책이 본격화하면서 더욱 극적으로 드러났다. ‘맞벌이부부’라고 불렸던 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은 남성가장 모델에 입각해 해고 1순위가 되었으며, 악화된 경제상황은 가계의 지출을 줄이기 위해 여성들이 재생산노동의 강도를 더욱 높이게 했다. 경제위기 속에서 줄어든 가계 소득을 벌충하기 위해 여성들은 비정규직 노동에 더욱 적극적으로 뛰어들어야 했고, '노동의 여성화'라는 말처럼 유연한 노동을 확산시키는 데 여성의 노동이 바탕이 되기까지 한다. 최저임금보다 10원 많은 월급에 비정규직으로 착취당하면서도 아이의 교육비와 가계의 소득을 담당하기 위해 직장을 그만둘 수 없었던 기륭전자 여성노동자들의 현실이 이를 말해 준다. 뿐만 아니라 한국 지배세력이 채택한 재벌 중심의 성장과 세계화, 그리고 적극적인 개방과 자유화 정책을 통한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로의 통합이라는 전략은 아예 농업 포기를 선언한다. 이에 여성 농민들은 재생산 노동과 농업을 수행해야 하는 이중의 부담에 더해 부족한 농가 소득을 메우기 위해 식당이나 인근 공장에서 일을 하거나 성매매에 나서기도 하는 삼중의 부담을 감내해야 한다. 신자유주의 정책의 양가적 효과 신자유주의 정책 개혁은 여성의 이중 부담을 더욱 강화하는 것을 전제로 한 여성 인력 활용 정책을 제시하면서, 여성을 신자유주의 정책에 적극 통합시키려 한다. '직장과 가사의 양립'이라는 정부의 여성정책 기조와 최근 주요 의제로 떠오른 '저출산·고령화 대책'은 이런 흐름을 반영한다. 이 같은 정책은 이중 부담에 내몰린 여성들의 고통이 가중되면서 유연한 여성노동력의 활용이 여의치 않고 결혼과 출산을 거부하는 여성들이 늘어가는 상황을 관리하기 위해 제시된 것이다. 하지만 이런 정책은 가족 내 일차적인 가사 담당자라는 여성의 지위를 전혀 건드리지 않은 채, 보육이나 노인 부양의 부담을 정부의 보조를 받는 시장에 의해 사회화시키는 한편, 이런 노동을 저임금의 유연한 이른바 ‘여성적 일자리’ 형태로 재생산함으로써 여성에 대한 이중 착취의 악순환을 지속시킨다. 더구나 이는 여성노동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출혈판매를 지속하기 위해 다른 여성노동자들의 저임금 노동을 활용케 하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여성들의 단결을 심각히 저해한다는 해악을 갖는다. 더불어 모성이라는 여성의 재생산에 대한 권리마저 '저출산'이라는 담론 하에 국가가 통제하고 여성의 의무로 할당하려는 시도는, 정부가 추진하는 여성정책이 여성의 실제 권리와 전혀 무관함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이는 정부의 인식을 교정하는 것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이는 신자유주의 정책 개혁의 본질적 측면인 바,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한 비판과 반대가 전제되지 않고서는 바꿀 수 없는 문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정책이 기본적으로 여성을 위한 정책이라고 전제하면서, 다만 이를 좀더 여성친화적으로 개혁할 것을 주장하는 여성단체들의 모습은 신자유주의가 여성의 불만과 현실을 관리하고 여성을 통합시켜 내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미 FTA는 여성의 문제다 한·미 FTA는 이런 여성의 현실을 한 치도 개선하지 못한다. 아니 오히려 더욱 악화시킬 것이다. 한·미 FTA는 장기화된 한국 경제의 불황으로 위기에 처한 한국 재벌과 지배 세력이 택한 길이다. 김영삼 정권이 '세계화'라는 용어를 사회화시키면서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에 편입하기 위한 시도를 본격화했지만 재벌을 중심으로 한 세계화는 결국 외환위기라는 사태를 맞이했다. 이후 등장한 김대중 정권은 IMF 구조조정 정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며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을 통해 금융세계화에 더욱 깊숙이 편입했다. 한국의 지배 세력이 택한 이런 전략이 대다수 노동자, 농민, 여성, 빈민의 이익과 날카롭게 대립된다는 사실은 여러 현상을 통해서 이미 드러났다. 한·미 FTA는 세계화를 한 단계 구체화시키는 것인데, 이는 재벌과 지배 세력이 대다수 민중을 희생양 삼아 자신들의 살 길을 모색하겠다는 의미나 다름없다. 이 때문에 한·미 FTA 체결 이후 대다수 여성들은 지금보다 더 악화된 현실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당장 나타나는 부정적인 효과들도 크다. 예를 들어 한·미 FTA를 통해 농업이 파멸에 이를 수밖에 없음은 자명한데, 이렇게 되면 이미 이중·삼중의 부담에 내몰린 여성 농민의 경우 삶의 극단에 놓이게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교육과 의료 등의 공공서비스의 개방과 시장화는 가족 내 재생산 노동에 대한 여성의 부담을 증가시킬 것이다. 여성이 많이 고용되어 있는 청소, 가사도우미, 간병, 전화 교환원 등의 기업 및 개인 서비스 직종에서의 경쟁도 심화될 것이고, 이는 여성들을 더욱 열악한 노동 조건과 엄청난 노동 강도, 저임금 착취로 내몰 것이다. 이런 직접적인 피해가 전부는 아니다. 앞서 지적한 것처럼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로의 편입이 여성을 유연한 저임금 노동력으로 착취하고 재생산 노동의 부담도 가중시키며 이중적으로 활용하는 것인 한, 그리고 한·미 FTA가 이런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를 한층 더 구체화시키는 지배 세력의 전략인 한 여성들의 미래는 암울할 수밖에 없다. 여성들의 한·미 FTA 반대투쟁 따라서 한·미 FTA는 여성들에게 너무나 중요한 문제다. 최근 많은 여성단체들이 한명숙 총리 지명을 촉구·지지했으며, 국회에서 비준되자 환영 성명을 발표했다. 이들은 한명숙 총리가 비정규직 문제, '빈곤의 여성화' 문제 등을 해결하는 데 매진할 것을, 보육 등 돌봄 노동의 사회화를 통한 사회적 일자리 창출 등 사회적 약자를 보살피는 정책을 펼 것을 기대했다. 하지만 한·미 FTA를 앞장 서 추진하는 여당의 총리에게, 그녀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이 같은 기대를 보내는 것이 과연 논리적으로 납득될 수 있는가? 한·미 FTA는 비정규직 문제, 빈곤의 여성화 문제, 여성의 재생산노동 문제와 별개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이런 문제를 더욱 심화시키며 노동자 민중을 희생시켜서라도 자신의 살 길을 모색하겠다는 지배 세력의 적극적인 의지가 여기에 담겨 있다. 따라서 한·미 FTA는 정부의 저출산·고령화 정책이나 여성인력활용방안에 대한 비판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고, 여성들의 한·미 FTA 반대 투쟁에는 이런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이 결합되어야 한다. 여성이 당당히 누려야 할 출산을 비롯한 재생산에 대한 권리조차 국가의 인구 정책과 신자유주의 정책 개혁의 일환으로 통합하면서 여성에게 출산의 의무만을 지우는 현실, 여성이 부담하는 이중의 부담을 다른 여성의 저임금 노동을 통해 덜어내도록 강요하면서도 마치 그것이 여성을 위한 것인 양 포장하는 현실은 현재 한·미 FTA에 반대하는 여성들이 무엇을 위해 투쟁해야 하는지를 명확히 보여준다. 한·미 FTA가 세계의 민중들을 착취하고 삶을 박탈하면서 초민족자본의 이윤과 살 길을 보장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반대하는 투쟁이 되어야 하는 것처럼 여성들의 투쟁도 마찬가지다. 노동자, 농민, 빈민의 권리 없이 여성의 권리가 있을 수 없고, 여성의 권리 없이 노동자, 농민, 빈민의 권리가 있을 수 없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한·미 FTA가 강요하는 미래가 세계의 노동자, 농민, 여성의 권리와는 결코 양립할 수 없음을 명확히 해야 한다. 이번 한·미 FTA 저지 투쟁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맞서는 여성운동의 과제와 방향을 모색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1) 발전 과정에 여성을 통합하려는 시도는 1970년대 페미니스트 경제학자들의 연구에서 비롯되었다. 보세럽은 여성들이 지역에서 생산성 증가에 많은 기여를 했지만, 이런 기여가 국가 통계나 개발 계획에서 무시되고 있음을 밝혔다. 이런 연구들은 유엔이 '세계 여성의 해'(1975~1985)를 선포하고 '발전에서의 여성'(WID, Women in Development) 접근을 채택하는 기반이 되었다. WID 접근은 여성을 발전의 주체로 인식하고 이들을 생산과정에 통합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제기했다. 하지만 1980년대 라틴 아메리카를 휩쓴 외채위기에 대한 대응으로 구조조정 정책이 심화되면서 WID 접근의 한계가 극적으로 드러난다. 대다수 여성이 재생산의 일차 책임자인 상황에서 구조조정 정책은 재생산에 관한 여성의 역량을 무한한 것으로 가정한다. 따라서 여성이 재생산 영역에서 수행하는 역할을 고려하지 않은 채 생산 과정에 통합시키는 것은 여성의 실제 상황을 개선시키는 데 전혀 효과가 없으며, 오히려 구조조정 정책이 재생산의 위기를 심화시킨다는 인식이 대두된다. 이에 따라 WID 접근은 여성의 재생산 역할을 고려하는 '젠더와 발전'(GAD, Gender and Development) 접근으로 전화되며, 이는 이후 성주류화 전략으로 체계화되어 각 국 여성 정책의 기본 방향으로 제기된다. 유엔을 매개로 한 세계적 차원의 여성정책 변화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확산과 궤를 같이 한다. 재생산의 위기가 심각하다는 점을 인지한 세계화 주창자들은 여성·빈곤 친화성 등을 주제로 한 여성 정책을 각 국에 권고하며, 여성에 대한 교육, 여성인력 활용 등을 강조한다. 본문으로 2) 헤스터 에이젠슈타인, 「위험한 불륜? 페미니즘과 법인기업 세계화」, 『사회운동』, 통권 63호, 2006, 6.본문으로

  • 2006-08-01

    한·미 FTA는 여성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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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Free Trade Agreement) 2차 협상이 끝났다. 1차 협상에서는 상품무역, 원산지/통관, 투자, 서비스, 금융서비스, 통신/전자상거래, 경쟁, 지적재산권, 노동, 환경, 총칙/분쟁 해결, 농업, 위생검역, 섬유, 무역구제 등 총 15개 분과 중 총 11개 분과에서 통합협정문을 작성했고, 농업, 위생검역, 섬유, 무역구제 4개 분과에서는 이견이 커 통합협정문을 구성하지 못했다. 이에 이어 양국 정부는 지난 7월 초에 열린 2차 협상에서 서비스 분야에 대한 양허 유보 리스트를 교환하고, 상품, 농업, 섬유 분야에 대한 양허안을 일괄적으로 8월 초까지 교환한다는 데 합의했다. 한국의 '약제비 적정화 방안‘에 대해 미국이 불만을 표하며 마지막 날 분과회의에 참석하지 않는 등의 사태가 빚어지긴 했지만, 최근 2차 협상의 마지막 날인 14일 미국이 몇 가지 조건을 내걸어 이미 이를 수용했음이 드러났다. 초민족 자본이 더 많은 이윤을 남길 수 있도록 하는 조건을 형성하기 위한 양국의 합의는 척척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섬유쿼터제, 농산물쿼터제, 개성공단 생산품의 한국산 인정 등 몇 가지 문제에 대한 양국의 이견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협상에서 한국 정부가 제기하는 입장이 한국 전체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 말할 수 없다. 애초에 한·미 FTA 자체가 초민족 자본의 이익을 극대화하겠다는 신성불가침의 합의였다. 한미 양국이 협상 전부터 굳건히 합의한 사항은 모든 것에 우선해 투자자의 권리를 보장한다는 원칙이고, 이견이 있는 분야에서도 한국 협상단은 민중의 이해보다는 그 산업의 이해를 우선시한다. 제 아무리 언론이 한국 협상단에게 '국익'을 극대화하는 협상을 주문하고 협상단이 '국익'을 위한 협상안을 만들어낸다 하더라도, 한·미 FTA가 노동자민중의 엄청난 희생을 전제로 한다는 점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결국 명확한 것은 한미 FTA를 둘러싼 진정한 쟁점은 '한국이 더욱 잘 살 수 있을 것이냐'가 아니고 '초민족 자본의 이해와 이를 대변하는 지배 세력의 전망 때문에 노동자, 농민, 여성, 빈민의 삶의 권리가 무참히 짓밟혀야 하느냐'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여성의 통합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심화되면서 수많은 민중들이 삶의 터전을 박탈당하고, 처참한 빈곤을 경험하며, 엄청난 노동착취에 시달린다. 나라 자체가 유지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분쟁과 내전이 끊이지 않는 지역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여성들이 가장 큰 고통을 겪는다는 사실도 점차 명확해졌다.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낳은 이런 파괴적 효과를 보완하고자 국제통화기금(IMF, International Monetary Fund)과 세계은행 같은 국제 기구들은 '인간적인 신자유주의'를 주창하면서 빈곤 친화 정책이나 여성 통합 방안을 내놓는다.1)아시아 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Asia-Pacific Economic Cooperation) 등 경제 협력을 논의하는 기구에 여성 의제가 포함되고, 세계은행이 여성 참여를 중요한 과제로 제시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무역, 투자, 금융의 자유화를 기본 목적으로 하는 자유무역협정의 경우 여성 참여와 같은 포괄적 의제나 사회 전반의 구조조정을 직접적인 의제로 상정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이 협정들이 신자유주의 정책 개혁을 통한 전반적 사회 변화에 무관한 것은 아니다. 일례로 '글로벌 스탠더드'(Global Standard)는 한·미 FTA에서 직접 다뤄지지는 않지만, 여러 분과의 기본 전제로 인식되고 지배 세력 또한 한·미 FTA로 인해 글로벌 스탠더드가 확산되면 한국경제의 경쟁력에 도움이 될 것이라 말한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한·미 FTA는 최근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주창하는 사람들이 강조하는 여성 통합, 여성인력의 활용과 무관하지 않다. 다만 한·미 FTA가 여성의 삶에 미치는 영향이 '여성'이라는 이슈로 가시화되거나 구체화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여성들의 입장은 산업별, 부문별, 협정 내용 별로 달라질 수 있다. 버시바우 주한 미국 대사는 지난 3월 한국 여성경제인연합회 조찬 강연에서 미국 노동시장의 다양성 덕분에 미국 여성들이 얻은 혜택들을 구구절절 설명한 후 ‘FTA로 인한 시장 개방과 경제정책 개혁이 촉진됨에 따라 기업 관행의 투명성이 증진될 것이고 이는 양국 경제 전반과 특히 양국 여성에게 혜택으로 돌아갈 것’이라 말했다. 1970년 대 이래 미국의 경제적 지위 하락에 대응하기 위해 시작된 신자유주의 정책과 이의 세계화는 미국에서 탈산업화, 서비스 부문의 급격한 팽창, 자본의 금융적 팽창을 초래했는데, 이런 전환은 모두 여성 고용의 팽창을 수반했다. 이는 여성들의 고용 확대를 가장 주요한 목표로 사고했던 미국의 여성운동과 맞물렸다. 동일 임금, 훈련과 승진에 대한 접근권, 성희롱에 대한 강력한 대처, 적극적 차별 시정 조치(affirmative action), 동등가치 캠페인 등 미국 여성운동가들은 작업장 내 평등과 여성에 대한 모든 직종의 개방을 위해 싸웠다. 이런 운동은 의료, 법률, 건축, 학술과 같은 전문직 분야에서 가장 성공적이었다. 더불어 많은 여성들이 공직에 진출할 수 있는 기반도 되었다.2) 사실 버시바우가 강조한 미국 노동시장의 다양성은 이런 여성들의 성공에 빚진 바 크고, 이는 세계적으로 널리 선전되면서 세계 곳곳에서 미국 식 자유화, 작업장 내 평등을 보장할 노동시장 기준이 여성에게 기회일 수 있다는 기대를 자극한다. 한국에서도 한·미 FTA가 여성들에게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기대가 생겨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여성의 이중부담 강화 하지만 미국 여성운동이 거뒀다는 이런 성공이 무엇을 대가로 했는가는 그 후광에 가려 은폐될뿐더러, 이것이 오히려 세계화를 보완하는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낳는다는 점이 커다란 문제다.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여성에게 양가적인 효과를 낳는다는 점, 신자유주의 세계화 하에서 자본의 전략이 여성에 대한 이중착취를 강화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는 것이 한·미 FTA가 여성에게 미치는 효과를 분석하는 데 필수적이다. 이윤율의 하락으로 위기에 처한 초민족자본이 1970년대 취한 전략 중 하나는 값싸고 유연한 노동력을 마음껏 착취할 수 있는 제3세계 국가로 공장을 이전하는 것이었다. 이들이 노린 값싼 노동력의 대부분은 여성이었고, 이 여성노동자들은 강도 높은 노동착취와 열악한 노동조건 속에서 저임금에 시달리며 국가 발전에 복무했다. 한국은 분단과 대(對)사회주의권 쇼케이스라는 독특한 지위를 통해 미국 시장을 보장받았고, 섬유, 전자와 같은 산업에서 여성노동자들에 대한 착취를 기반으로 제3세계로 이전한 많은 공장들과 경쟁하면서 발전의 기초를 다졌다.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여성노동자들은 열악한 노동조건 속에서 저임금 장시간 노동을 감내해야 했다. 이를 기반으로 한국은 중화학공업 중심의 발전을 모색할 수 있었고, 미국의 역(逆)개방 정책 하에서 '눈부신' 발전을 이뤄냈다. 하지만 이런 발전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는 단 한 번도 가족임금이 모든 노동자들에게 현실화된 적은 없었다. 이는 몇몇 성장을 주도하는 부문의 노동자들에게 제한된 혜택일 뿐이어서, 이 때문에 대다수 노동자 계급의 여성들은 결혼 후에도 비공식 부문을 통해 가계의 소득을 벌충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노동은 '주부'라는 이름 뒤에 은폐되었다. 가정에서 가사의 일차적인 책임자라는 지위는 이들의 노동을 부차적인 것으로 만들었고, 저임금을 정당화했다. 이런 상황은 한국에서 신자유주의 정책이 본격화하면서 더욱 극적으로 드러났다. ‘맞벌이부부’라고 불렸던 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은 남성가장 모델에 입각해 해고 1순위가 되었으며, 악화된 경제상황은 가계의 지출을 줄이기 위해 여성들이 재생산노동의 강도를 더욱 높이게 했다. 경제위기 속에서 줄어든 가계 소득을 벌충하기 위해 여성들은 비정규직 노동에 더욱 적극적으로 뛰어들어야 했고, '노동의 여성화'라는 말처럼 유연한 노동을 확산시키는 데 여성의 노동이 바탕이 되기까지 한다. 최저임금보다 10원 많은 월급에 비정규직으로 착취당하면서도 아이의 교육비와 가계의 소득을 담당하기 위해 직장을 그만둘 수 없었던 기륭전자 여성노동자들의 현실이 이를 말해 준다. 뿐만 아니라 한국 지배세력이 채택한 재벌 중심의 성장과 세계화, 그리고 적극적인 개방과 자유화 정책을 통한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로의 통합이라는 전략은 아예 농업 포기를 선언한다. 이에 여성 농민들은 재생산 노동과 농업을 수행해야 하는 이중의 부담에 더해 부족한 농가 소득을 메우기 위해 식당이나 인근 공장에서 일을 하거나 성매매에 나서기도 하는 삼중의 부담을 감내해야 한다. 신자유주의 정책의 양가적 효과 신자유주의 정책 개혁은 여성의 이중 부담을 더욱 강화하는 것을 전제로 한 여성 인력 활용 정책을 제시하면서, 여성을 신자유주의 정책에 적극 통합시키려 한다. '직장과 가사의 양립'이라는 정부의 여성정책 기조와 최근 주요 의제로 떠오른 '저출산·고령화 대책'은 이런 흐름을 반영한다. 이 같은 정책은 이중 부담에 내몰린 여성들의 고통이 가중되면서 유연한 여성노동력의 활용이 여의치 않고 결혼과 출산을 거부하는 여성들이 늘어가는 상황을 관리하기 위해 제시된 것이다. 하지만 이런 정책은 가족 내 일차적인 가사 담당자라는 여성의 지위를 전혀 건드리지 않은 채, 보육이나 노인 부양의 부담을 정부의 보조를 받는 시장에 의해 사회화시키는 한편, 이런 노동을 저임금의 유연한 이른바 ‘여성적 일자리’ 형태로 재생산함으로써 여성에 대한 이중 착취의 악순환을 지속시킨다. 더구나 이는 여성노동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출혈판매를 지속하기 위해 다른 여성노동자들의 저임금 노동을 활용케 하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여성들의 단결을 심각히 저해한다는 해악을 갖는다. 더불어 모성이라는 여성의 재생산에 대한 권리마저 '저출산'이라는 담론 하에 국가가 통제하고 여성의 의무로 할당하려는 시도는, 정부가 추진하는 여성정책이 여성의 실제 권리와 전혀 무관함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이는 정부의 인식을 교정하는 것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이는 신자유주의 정책 개혁의 본질적 측면인 바,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한 비판과 반대가 전제되지 않고서는 바꿀 수 없는 문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정책이 기본적으로 여성을 위한 정책이라고 전제하면서, 다만 이를 좀더 여성친화적으로 개혁할 것을 주장하는 여성단체들의 모습은 신자유주의가 여성의 불만과 현실을 관리하고 여성을 통합시켜 내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미 FTA는 여성의 문제다 한·미 FTA는 이런 여성의 현실을 한 치도 개선하지 못한다. 아니 오히려 더욱 악화시킬 것이다. 한·미 FTA는 장기화된 한국 경제의 불황으로 위기에 처한 한국 재벌과 지배 세력이 택한 길이다. 김영삼 정권이 '세계화'라는 용어를 사회화시키면서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에 편입하기 위한 시도를 본격화했지만 재벌을 중심으로 한 세계화는 결국 외환위기라는 사태를 맞이했다. 이후 등장한 김대중 정권은 IMF 구조조정 정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며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을 통해 금융세계화에 더욱 깊숙이 편입했다. 한국의 지배 세력이 택한 이런 전략이 대다수 노동자, 농민, 여성, 빈민의 이익과 날카롭게 대립된다는 사실은 여러 현상을 통해서 이미 드러났다. 한·미 FTA는 세계화를 한 단계 구체화시키는 것인데, 이는 재벌과 지배 세력이 대다수 민중을 희생양 삼아 자신들의 살 길을 모색하겠다는 의미나 다름없다. 이 때문에 한·미 FTA 체결 이후 대다수 여성들은 지금보다 더 악화된 현실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당장 나타나는 부정적인 효과들도 크다. 예를 들어 한·미 FTA를 통해 농업이 파멸에 이를 수밖에 없음은 자명한데, 이렇게 되면 이미 이중·삼중의 부담에 내몰린 여성 농민의 경우 삶의 극단에 놓이게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교육과 의료 등의 공공서비스의 개방과 시장화는 가족 내 재생산 노동에 대한 여성의 부담을 증가시킬 것이다. 여성이 많이 고용되어 있는 청소, 가사도우미, 간병, 전화 교환원 등의 기업 및 개인 서비스 직종에서의 경쟁도 심화될 것이고, 이는 여성들을 더욱 열악한 노동 조건과 엄청난 노동 강도, 저임금 착취로 내몰 것이다. 이런 직접적인 피해가 전부는 아니다. 앞서 지적한 것처럼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로의 편입이 여성을 유연한 저임금 노동력으로 착취하고 재생산 노동의 부담도 가중시키며 이중적으로 활용하는 것인 한, 그리고 한·미 FTA가 이런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를 한층 더 구체화시키는 지배 세력의 전략인 한 여성들의 미래는 암울할 수밖에 없다. 여성들의 한·미 FTA 반대투쟁 따라서 한·미 FTA는 여성들에게 너무나 중요한 문제다. 최근 많은 여성단체들이 한명숙 총리 지명을 촉구·지지했으며, 국회에서 비준되자 환영 성명을 발표했다. 이들은 한명숙 총리가 비정규직 문제, '빈곤의 여성화' 문제 등을 해결하는 데 매진할 것을, 보육 등 돌봄 노동의 사회화를 통한 사회적 일자리 창출 등 사회적 약자를 보살피는 정책을 펼 것을 기대했다. 하지만 한·미 FTA를 앞장 서 추진하는 여당의 총리에게, 그녀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이 같은 기대를 보내는 것이 과연 논리적으로 납득될 수 있는가? 한·미 FTA는 비정규직 문제, 빈곤의 여성화 문제, 여성의 재생산노동 문제와 별개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이런 문제를 더욱 심화시키며 노동자 민중을 희생시켜서라도 자신의 살 길을 모색하겠다는 지배 세력의 적극적인 의지가 여기에 담겨 있다. 따라서 한·미 FTA는 정부의 저출산·고령화 정책이나 여성인력활용방안에 대한 비판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고, 여성들의 한·미 FTA 반대 투쟁에는 이런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이 결합되어야 한다. 여성이 당당히 누려야 할 출산을 비롯한 재생산에 대한 권리조차 국가의 인구 정책과 신자유주의 정책 개혁의 일환으로 통합하면서 여성에게 출산의 의무만을 지우는 현실, 여성이 부담하는 이중의 부담을 다른 여성의 저임금 노동을 통해 덜어내도록 강요하면서도 마치 그것이 여성을 위한 것인 양 포장하는 현실은 현재 한·미 FTA에 반대하는 여성들이 무엇을 위해 투쟁해야 하는지를 명확히 보여준다. 한·미 FTA가 세계의 민중들을 착취하고 삶을 박탈하면서 초민족자본의 이윤과 살 길을 보장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반대하는 투쟁이 되어야 하는 것처럼 여성들의 투쟁도 마찬가지다. 노동자, 농민, 빈민의 권리 없이 여성의 권리가 있을 수 없고, 여성의 권리 없이 노동자, 농민, 빈민의 권리가 있을 수 없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한·미 FTA가 강요하는 미래가 세계의 노동자, 농민, 여성의 권리와는 결코 양립할 수 없음을 명확히 해야 한다. 이번 한·미 FTA 저지 투쟁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맞서는 여성운동의 과제와 방향을 모색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1) 발전 과정에 여성을 통합하려는 시도는 1970년대 페미니스트 경제학자들의 연구에서 비롯되었다. 보세럽은 여성들이 지역에서 생산성 증가에 많은 기여를 했지만, 이런 기여가 국가 통계나 개발 계획에서 무시되고 있음을 밝혔다. 이런 연구들은 유엔이 '세계 여성의 해'(1975~1985)를 선포하고 '발전에서의 여성'(WID, Women in Development) 접근을 채택하는 기반이 되었다. WID 접근은 여성을 발전의 주체로 인식하고 이들을 생산과정에 통합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제기했다. 하지만 1980년대 라틴 아메리카를 휩쓴 외채위기에 대한 대응으로 구조조정 정책이 심화되면서 WID 접근의 한계가 극적으로 드러난다. 대다수 여성이 재생산의 일차 책임자인 상황에서 구조조정 정책은 재생산에 관한 여성의 역량을 무한한 것으로 가정한다. 따라서 여성이 재생산 영역에서 수행하는 역할을 고려하지 않은 채 생산 과정에 통합시키는 것은 여성의 실제 상황을 개선시키는 데 전혀 효과가 없으며, 오히려 구조조정 정책이 재생산의 위기를 심화시킨다는 인식이 대두된다. 이에 따라 WID 접근은 여성의 재생산 역할을 고려하는 '젠더와 발전'(GAD, Gender and Development) 접근으로 전화되며, 이는 이후 성주류화 전략으로 체계화되어 각 국 여성 정책의 기본 방향으로 제기된다. 유엔을 매개로 한 세계적 차원의 여성정책 변화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확산과 궤를 같이 한다. 재생산의 위기가 심각하다는 점을 인지한 세계화 주창자들은 여성·빈곤 친화성 등을 주제로 한 여성 정책을 각 국에 권고하며, 여성에 대한 교육, 여성인력 활용 등을 강조한다. 본문으로 2) 헤스터 에이젠슈타인, 「위험한 불륜? 페미니즘과 법인기업 세계화」, 『사회운동』, 통권 63호, 2006, 6.본문으로

  • 2006-08-01

    간병인 노동자의 입장에서 본 <노인수발보험법>의 문제점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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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 가족 책임 중심의 노인부양체계가 한계에 부딪히게 되면서 노인에 대한 사회적 부양체계의 개발이 요구되고 있다. 그러나 복지제도의 기반이 전무한 한국 상황에서 이런 제도의 도입은 여성이 져온 부담을 사회적 책임으로 전환하는 것을 목표로 도입되는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서구 복지개혁의 ‘시장화’ 정책을 곧바로 도입하고 있는 상황이다. 간병인 노동자의 저임금 문제는 한국의 가족 전가적 복지부재 시스템에서 기인한다. 사회서비스의 시장화 과정에서 여성노동에 대한 평가절하가 저임금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 이 글에서는 간병인 노동자의 입장에서 <노인수발보험법>의 문제, 현재 정부의 저출산·고령화 대책의 문제를 분석하고자 한다. <노인수발보험법> 제정 경과와 쟁점 노무현 대통령은 2002년 대선 당시 노인요양보장제도 도입을 공약으로 제출한 바 있다. 정부는 급격한 출산율 하락에 대한 사회적 위기 인식을 확산하면서, 저출산·고령화 대책마련이 시급하다는 입장에서 2005년 4월 임시국회에서 ‘저출산 고령사회 기본법’을 제정하였다. 이의 연장선상에서 2005년 10월 <노인수발보장법>을 입법예고하였고, 1차 시범사업).1)을 거쳐 2006년 2월 사회보험 방식의 <노인수발보험법>이 국무회의를 통과, 2008년 7월부터 시행될 예정이다. 정부는 법이 시행되면, 노인의 삶의 질 향상, 가족의 부양부담 경감, 여성 등 비공식적 수발자의 경제활동 증가, 사회서비스 일자리 확대, 고령친화산업 및 지역경제 활성화, 노인의료비 사용의 효율화 등의 효과를 누릴 수 있다고 선전하고 있다. 그러나 작년 5월 마련된 기본안이 제도의 윤곽을 드러내면서부터, 많은 시민사회단체들은 정부가 제시한 법률안이 요양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대상(수급권자), 재원 확보에 있어서 국가 책임과 국민 부담률 문제, 제도 시행을 위한 인력·시설 기반이나 그 운영방식 등 제도의 핵심적인 내용에서 많은 문제점2)이 드러난다고 지적하고 있다. <노인수발보험법>은 의료보험과 같이 전 국민에게 보험료를 부과하면서도, 장기요양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대상을 65세 이상 노인과 노인성 질환을 가진 64세 이하의 국민으로 제한하고 있으며, 제공하는 서비스조차 실제 요양에 필요한 서비스에 미달하는 수준이다. 또한 정부의 재정부담률이나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책임 범위는 모호하게 명시된 반면에, 국민들은 보험료뿐만 아니라, 서비스 이용 요금의 20%를 부담해야 하는 상황이어서 서비스 접근도 역시 낮을 것이 뻔한 상황이다. 이러한 문제점들은 노동시민사회단체들로 구성된 ‘장기요양보장제도 쟁취를 위한 연대회의’(이하 <요양보장연대회의>) 뿐만 아니라, 정부안과 다르게 추진되고 있는 열린우리당, 한나라당, 민주노동당 법안에서도 지적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 하에서 일하게 될 노동자의 입장에서 제도 시행의 효과와 문제점을 지적하는 흐름은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간병노동자들의 현실과 <노인수발보험법> 2003년 말부터 8개월에 걸쳐 전개된 서울대병원 간병인지부 조합원들의 투쟁으로 간병노동자의 현실이 생생하게 알려지게 되었다. 간병노동자들은 매일 24시간씩 주144시간의 장시간 노동을 하면서도,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저임금(8시간 기준 16,666원, 한편 2006년 현재 법정 최저임금은 시간당 3100원, 8시간 기준 24800원이다)을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유료소개소의 중간착취에 시달려야 했다. 또한 간병노동자들은 생계를 위해 임금을 받고 일하지만, ‘사업체가 아니라 개인’에게 고용되었다는 이유로 노동자성 조차 인정되지 않아, 근로기준법이나 최저임금법의 적용을 받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4대 보험의 적용제외 대상으로 그야말로 법의 사각지대에 있는 노동자들이다. 더구나 ‘간병인’은 26개 파견업 허용직종에도 속해 있어, 간병노동자는 파견노동자이자, 특수고용노동자, 비공식노동자 등 다양하게 ‘분류’될 수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이다. 보건복지부 조사결과에 따르면 2004년 현재 간병인력은 19만이 넘지만, 현실이 이러하기 때문에 간병노동자들은 실제 수요에 따라 병원이나 가정에서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으면서도 제도 밖의 비공식적인 위치에 머무르고 있는 현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간병노동자들은 간병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명확하게 하는 법적, 제도적 조치들을 요구해왔고 그만큼 <노인수발보험법> 제정에 거는 기대 또한 컸다. 실제 <노인수발보험법>에 따르면 간병, 가사 및 일상생활지원서비스 등을 제공하는 ‘수발요원’이 요양서비스를 제공하는 필요 인력의 80% 이상을 차지한다. 그러나 <노인수발보험법>에는 재가수발, 시설수발 등 종사노동자들의 노동의 형태만 적시되어 있을 뿐, 종사노동자들의 법적 지위는 전혀 명시되어 있지 않다. 별도의 명시가 없을 경우 노동법의 적용을 받게 되지만, 문제는 정부법안의 구성이나 법안 설명에 따르면 특수고용, 파견 등 비정규 형태의 고용이 예상되는데 파견법 및 입법 준비 중인 기간제법, 특수고용법 등 비정규법의 적용을 받게 될 가능성이 크다. <노인수발보험법> 6장은 수발기관의 지정과 휴폐업, 취소에 관한 상세한 요건을 다루고 있는데, 수발기관은 보건복지부령이 정하는 요건(시설 및 인력)을 갖추고 공단으로부터 지정받도록 되어 있다. 즉 민간위탁으로 노동자들을 간접 고용하겠다는 것이다.3) 이는 <노인수발보험법> 설명에서 ‘다양한 주체의 참여’ 시스템을 확립하겠다는 목표로 민간부문(기업)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유도하겠다는 계획에서도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정부는 이 법이 ‘일자리 창출 정책’이 될 것이라고 적극 홍보하고 있는데, 그 효과는 정부가 나서서 비정규직을 확대 양산하는 것으로 귀결될 것이다. 일본의 개호보험은 한국의 <노인수발보험법>의 미래 일본은 사회복지기초구조개혁의 일환으로 2000년부터 개호보험을 실시하였는데, 개호보험의 실시로 일본의 고령자복지에서 나타난 최대의 구조변화는 노인요양서비스의 공급에 있어서 ‘복지의 시장화’라 불리는 규제완화이다4). 일본의 개호보험의 사례를 보는 것은, 정부가 사회보험제도의 방식을 택하고 있는 일본의 사례를 참조점으로 삼고 있고 실제로 유사성이 높아, 시행한 지 5년이 넘은 개호보험의 결과는 <노인수발보험제도>의 미래를 짐작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개호보험이 실시되면서 재가복지서비스를 중심으로 공급주체의 규제가 완화되어 의료법인, 주식회사 등과 같은 민간영리기업, 농협, 생협, 사회적기업 등 다양한 사업주체에 의한 서비스 공급이 가능해졌다. ‘복지의 시장화’로 불리는 변화의 핵심은 서비스의 이용과 제공이 행정에 의해서 결정되는 구조에서 이용자와 제공자가 화폐를 매개로 하여 직접적으로 매매하는 구조로 바뀌고, 복지서비스의 이용 및 제공의 책임이 행정에서 이용자 및 제공자로, 즉 직접적인 당사자에게 전가된다는 것에 있다. 이러한 구조개혁의 목표는 서비스를 필요로 하는 고령자가 증가한다고 하더라도, 제공해야 할 서비스의 총량이나 국고부담의 증가로 이어지지 않도록 이용자의 부담을 증대시켜 수요를 억제시키는 것이었다. 이용료의 10%에 달하는 자기부담은 서비스 이용억제 효과를 가져와 개호보험 서비스가 필요함에도 그것을 이용할 수 없는 다수가 생겨나는 계층화된 개호시스템이 구축된 결과를 가져왔다. 이것은 수발을 가족, 특히 여성에게 의존하는 것을 오히려 강화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 영리기업의 참여로 개호종사자의 노동조건이 악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특히 재가서비스의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홈헬퍼’의 경우는 효율화와 비용 삭감의 압력 속에서 시간단위의 서비스 제공과 파트타임 노동을 전제로 한 임금체계 때문에 개호보험 시행 후 노동조건은 급속하게 악화되었다. <노인수발보험법> 역시 일본의 개호보험과 크게 다르지 않은데, 앞서 서술했듯이 정부는 2004년 10월 민간투자법을 개정하여 사회복지시설에 대한 민간투자를 열어놓고, 서비스 공급에 있어 민간기업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유도하겠다는 계획을 내놓고 있다. 이는 법 제정의 취지가 복지의 부재를 가족이 전담했던 현실을 변화하거나 특히 가족 내 여성의 부담을 사회화하겠다는 계획이라기보다는 복지서비스를 새로운 시장으로 만들려는 신자유주의적 정책이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임금을 케이스 별(관리수 별)로 지급하도록 되어 있는데 이는 이동시간 및 보고서 작성 시간, 교통수단의 격차가 인정되지 않아 가사·간병 노동자의 현재의 저임금 구조를 고착화할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가사·간병 서비스를 등급화하려는 것은 이미 ‘여성의 일’로 저평가되어 있는 가사·간병 노동을 차별적 임금지급을 통해 저임금을 정당화하려는 시도이다. 「1차 저출산 고령사회 기본계획」과 「여성인력개발종합계획」의 기만성 지난 6월 7일 정부는 「1차 저출산 고령사회 기본계획」(이하 ‘기본계획’)을 발표했다. 지난 1월 [희망한국 21- 저출산 종합대책]이 거의 출산, 양육지원 부분에만 초점을 맞추었다면 ‘기본계획’은 아동·여성·노인의 양육·고용·보건·복지 등 매우 포괄적인 정책 분야의 과제를 하나로 묶은 사회정책의 종합판이다.5) 그러나 이번 기본계획 230여개의 세부사업 중에서 <노인수발보험법>을 포함하여, 180여개 사업은 이미 시행 중이거나 시행이 확정된 사업이고, 신규 사업은 비 예산 사업 20개를 포함하여 50여 개뿐이다. 즉 ‘기본계획’은 각 부처에서 추진하는 여러 정책들을 ‘저출산 고령사회 대책’이라는 틀로 재구성한 것이며 이는 매우 정치적인 선택의 결과이다. ‘기본계획’은 신자유주의 정책 추진의 결과로 나타난 노동의 불안정화, 대중의 삶의 위기를 저출산·고령화에 따른 ‘경제성장의 위기’로 본질을 호도하고 그 책임을 개별 국민에게 전가하고자 하는 정치적 기획이라는 것이다. 특히 ‘기본계획’에서 여성은 아이를 낳아 출산율을 높여야 하는 주체이자 부족한 생산가능 인구를 보충해야 하는 노동력이라는 이중적 위치에 놓여 있으며, 여성으로 하여금 어머니와 노동자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게 하는 데 정책의 초점이 맞춰져 있다. 육아휴직, 산전 후 휴가에 대한 제도적 보완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일·가정의 양립은 근로형태 유연화를 전제로 하는데 이미 심각히 유연해진 여성노동시장의 상황을 고착화하여 저임금 불안정 여성노동자의 이중부담을 증가시키게 될 것이다. 여기에 여성가족부는 지난 7월 4일 「여성인력개발종합계획」을 발표했는데, 이는 ‘여성인력 활용을 통한 선진경제로의 도약’을 비전으로 2010년까지 여성경제활동참가율 55% 달성, 여성일자리 약 60만 개 확대를 목표로 하고 있다. 여성일자리 창출 60만 개 중 44만 개는 간병서비스 개선 제도화, 노인수발보험제도 등의 실시로 창출될 사회서비스 분야의 일자리가 차지한다. 이는 여성일자리가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이기 보단 이미 비공식부문에서 일하는 가사·간병 노동자의 양성화, 제도화로 봐야 한다. 그러나 앞서 살펴보았듯이 현재 시행예정인 <노인수발보험법>은 가사, 간병노동을 하는 주로 중고령층의 여성노동자의 불안정한 고용과 저임금을 고착화시킬 것으로 보인다. 결국 「여성인력개발종합계획」은 남성=생계부양자, 여성=가사전담자라는 성별분업에 기초한 성차별적 노동시장 구조는 그대로 둔 채 여성노동자들의 일과 가정에서의 이중부담을 증가시키는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여성일자리 창출’로 포장한 것에 다름 아니다. <노인수발보험법>과 여성노동자 노무현 정부는 <노인수발보험법>을 통해 국가가 노인부양을 책임지고, 그와 함께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겠다는 선전을 하고 있다. 따라서 새로운 사회보장체계로서 <노인수발보험법>에 대한 사회적 기대 또한 큰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현재까지 시범사업의 경과만 보더라도 이 제도는 노양부양을 사회적 책임으로 분담함으로써 주로 사적 부양체계에서 이 일을 전담하던 여성의 부담을 경감해주고 이 일에 종사하는 노동자의 노동권을 보장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차 시범사업 결과 2차 시범사업에서 적용될 ‘노인수발서비스 수가 및 산정기준’(이하 ‘기준’)에 따르면, 1등급을 받은 수발대상자가 한 달 동안 받을 수 있는 재가서비스 한도액은 975,120원이다. 현재 환자나 환자가족이 1달 동안 간병인을 고용하는데 최소 120만원(이 역시 간병노동자가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임금을 받는 현실에서의 금액이다)이 소요되는 현실임을 감안할 때 부족한 서비스 제공일뿐더러, 이런 서비스를 이용하는데 월 20만원이 넘는 비용 부담이 생긴다는 이야기다. 이 제도를 이용할 수 있는 65세 이상 노인인구의 60%는 여성이 차지하고 있고, 빈곤계층으로 갈수록 여성노인비율은 높아진다.6) 즉 아프고 요양이 필요한 빈곤한 여성노인들은 높은 본인 부담 때문에 이 제도를 이용할 수 없게 된다. 더구나 현재 가족 내에서 노인요양을 책임지고 있는 것은 아내나 며느리, 즉 여성인 현실7)을 감안할 때, 높은 비용 부담 때문에 이 제도가 시행되더라도 여성의 부양부담을 줄어들지 않을뿐더러, 제도 시행에 따른 요양서비스에 대한 기대와 욕구가 강해져 오히려 여성의 부담과 역할은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또한 ‘기준’에 따르면 재가 서비스의 경우, 제공하는 서비스의 종류, 서비스 대상자의 등급별로 서비스 제공 시간에 따라 해당 수가를 지급하도록 되어있다. 시간당 급여의 경우 30분 단위로 금액이 책정되어 있는데, 서비스 제공시간 30분 미만인 경우는 지급하지 않고, 책정기준 30분 미만의 초과 서비스 제공8)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런 수가 체계에 따르면 노동자가 일하기 위해 이동하는 시간이 고려되어 있지 않고, 교통비, 식대가 모두 일하는 노동자의 부담이 되는 데 반해, 수가가 턱없이 낮고 대상자의 사정으로 일이 취소되어도 보상받을 길이 없다. 또한 고용불안정이나 저임금 문제뿐만 아니라 재가서비스의 경우, 가정 내에서 일대일로 서비스를 제공하기 때문에 간병노동자들은 환자나 환자가족의 성적, 물리적 폭력에 노출되기 싶지만, 이에 대한 어떠한 대책도 없는 상황이다. 시설서비스의 경우는 등급별 1일당으로 산정하는데, 가장 높은 등급 비율을 차지하는 3등급의 경우 25,280원이다. 이는 간병·수발 등의 일상생활지원, 수발관리, 간호, 기능훈련 및 기타 복지서비스 등 시설에서 생활하는데 필요한 제반 서비스 비용을 포함하는 것이어서, 시설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저임금은 예상가능하다. 이렇듯 <노인수발보험제도>는 이 법의 제정으로 간병노동의 제도화를 통한 노동권 확보와 노동조건 개선을 기대했던 현재 간병노동자의 기대와는 정반대인 여성노동자의 저임금구조의 고착화 방향으로 추진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노인수발보험법>의 목표는 중년·고령층 여성노동자를 저임금 노동력으로 활용하여, 높은 비용부담을 감당할 수 있는 중산층 이상에게만 그 혜택이 돌아가게 하는 데 있을 뿐이다. 이에 서울대병원 간병인 노조는 노동권 후퇴와 사회복지가 양립할 수 없음을 분명한 기조9)로 <요양보장연대회의>에 참여하여 현재 추진되는 <노인수발보험법>에 반대하면서, 간병노동자 전국 조직화 사업을 준비 중이다. 이는 정부의 저출산·고령화 대책을 여성고용창출의 기회로 보고, 여성노동의 불안정화를 고착화시키는 사회적 일자리 창출 정책에 편승하는 ‘사회적 기업’ 흐름에도 반대하는 것이다. 우리는 여성노동자를 이중적으로 착취하는 저출산·고령화 대책의 기만성을 폭로하면서 간병노동자의 노동권 쟁취 투쟁에 연대해야 할 것이다. 1) 1차 시범사업은 2005년 7월부터 2006년 3월까지 55개 시설을 중심으로 실시되었는데, 6개 시군구, 기초수급노인을 대상으로 실시되었다. 2차 시범사업은 2006년 4월부터 1년 동안 실시되는데, 8개 시범지역, 일반노인까지 확대하여 실시할 예정이다. 본문으로 2) 최예륜, 「장기요양보장제도 도입의 쟁점과 노인수발보험법의 문제점①」, 『사회운동』65호본문으로 3) ‘요양노동자의 노동권 보장과 지자체의 역할’, 공공연맹 정책부장 이윤주 본문으로 4) 일본의 개호보험과 관련해서는 「노인요양서비스 시장화의 두 가지 길: 일본의 경험과 한국의 시도」(오세영, 2005)‘만’을 참조하였다. 본문으로 5) 「‘1차 저출산 고령사회 기본계획’의 주요 쟁점과 당의 대응: 여성관련 쟁점을 중심으로」, 김원정 본문으로 6) 2001년 현재 65세 이상 여성노인이 남성노인의 1.5배이며 국민기초생활수급자의 경우에는 3배, 차상위 계층의 경우는 약 2배 정도이다.본문으로 7) 1998년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노인생활실태 및 복지욕구 조사결과에 의하면, 주 수발자의 80%가 여성이며, 남성노인의 주 수발자는 여성이 99%이고 배우자가 71.2%를 차지하고(또한 주 수발자의 54.9%가 65세 이상), 여성노인은 71.8%가 여성이고 장남며느리가 37.5%의 비중을 차지한다.본문으로 8) 예를 들어, 가정수발서비스의 경우 30분에 9560원인데, 59분의 경우도 같은 수가가 지급된다. 9) “노인수발보험법을 만들려면 반드시 당사자인 간병노동자들의 노동의 대가가 정당하게 돌아올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겁니다. 국민건강보험료로 간병료가 지급되고, 노인들은 환자는 무료로 간병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간병노동자들이 특수고용에서 벗어나고 최저임금 적용받을 수 있어야지요. 그래서 환자가 정말 마음 편하게 간병을 받을 수 있도록, 그리고 간병인도 불안하지 않도록, 국가가 책임져야 하는 겁니다. 정부가 정말로 국민을 위한 법을 만들고자 한다면, 모두가 만족하는 법을 만들어야 합니다.” -98주년 여성의 날 맞이 토론회에서 서울대병원지부 간병인분회장의 발언 중 본문으로

  • 2006-08-01

    간병인 노동자의 입장에서 본 <노인수발보험법>의 문제점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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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 가족 책임 중심의 노인부양체계가 한계에 부딪히게 되면서 노인에 대한 사회적 부양체계의 개발이 요구되고 있다. 그러나 복지제도의 기반이 전무한 한국 상황에서 이런 제도의 도입은 여성이 져온 부담을 사회적 책임으로 전환하는 것을 목표로 도입되는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서구 복지개혁의 ‘시장화’ 정책을 곧바로 도입하고 있는 상황이다. 간병인 노동자의 저임금 문제는 한국의 가족 전가적 복지부재 시스템에서 기인한다. 사회서비스의 시장화 과정에서 여성노동에 대한 평가절하가 저임금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 이 글에서는 간병인 노동자의 입장에서 <노인수발보험법>의 문제, 현재 정부의 저출산·고령화 대책의 문제를 분석하고자 한다. <노인수발보험법> 제정 경과와 쟁점 노무현 대통령은 2002년 대선 당시 노인요양보장제도 도입을 공약으로 제출한 바 있다. 정부는 급격한 출산율 하락에 대한 사회적 위기 인식을 확산하면서, 저출산·고령화 대책마련이 시급하다는 입장에서 2005년 4월 임시국회에서 ‘저출산 고령사회 기본법’을 제정하였다. 이의 연장선상에서 2005년 10월 <노인수발보장법>을 입법예고하였고, 1차 시범사업).1)을 거쳐 2006년 2월 사회보험 방식의 <노인수발보험법>이 국무회의를 통과, 2008년 7월부터 시행될 예정이다. 정부는 법이 시행되면, 노인의 삶의 질 향상, 가족의 부양부담 경감, 여성 등 비공식적 수발자의 경제활동 증가, 사회서비스 일자리 확대, 고령친화산업 및 지역경제 활성화, 노인의료비 사용의 효율화 등의 효과를 누릴 수 있다고 선전하고 있다. 그러나 작년 5월 마련된 기본안이 제도의 윤곽을 드러내면서부터, 많은 시민사회단체들은 정부가 제시한 법률안이 요양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대상(수급권자), 재원 확보에 있어서 국가 책임과 국민 부담률 문제, 제도 시행을 위한 인력·시설 기반이나 그 운영방식 등 제도의 핵심적인 내용에서 많은 문제점2)이 드러난다고 지적하고 있다. <노인수발보험법>은 의료보험과 같이 전 국민에게 보험료를 부과하면서도, 장기요양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대상을 65세 이상 노인과 노인성 질환을 가진 64세 이하의 국민으로 제한하고 있으며, 제공하는 서비스조차 실제 요양에 필요한 서비스에 미달하는 수준이다. 또한 정부의 재정부담률이나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책임 범위는 모호하게 명시된 반면에, 국민들은 보험료뿐만 아니라, 서비스 이용 요금의 20%를 부담해야 하는 상황이어서 서비스 접근도 역시 낮을 것이 뻔한 상황이다. 이러한 문제점들은 노동시민사회단체들로 구성된 ‘장기요양보장제도 쟁취를 위한 연대회의’(이하 <요양보장연대회의>) 뿐만 아니라, 정부안과 다르게 추진되고 있는 열린우리당, 한나라당, 민주노동당 법안에서도 지적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 하에서 일하게 될 노동자의 입장에서 제도 시행의 효과와 문제점을 지적하는 흐름은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간병노동자들의 현실과 <노인수발보험법> 2003년 말부터 8개월에 걸쳐 전개된 서울대병원 간병인지부 조합원들의 투쟁으로 간병노동자의 현실이 생생하게 알려지게 되었다. 간병노동자들은 매일 24시간씩 주144시간의 장시간 노동을 하면서도,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저임금(8시간 기준 16,666원, 한편 2006년 현재 법정 최저임금은 시간당 3100원, 8시간 기준 24800원이다)을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유료소개소의 중간착취에 시달려야 했다. 또한 간병노동자들은 생계를 위해 임금을 받고 일하지만, ‘사업체가 아니라 개인’에게 고용되었다는 이유로 노동자성 조차 인정되지 않아, 근로기준법이나 최저임금법의 적용을 받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4대 보험의 적용제외 대상으로 그야말로 법의 사각지대에 있는 노동자들이다. 더구나 ‘간병인’은 26개 파견업 허용직종에도 속해 있어, 간병노동자는 파견노동자이자, 특수고용노동자, 비공식노동자 등 다양하게 ‘분류’될 수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이다. 보건복지부 조사결과에 따르면 2004년 현재 간병인력은 19만이 넘지만, 현실이 이러하기 때문에 간병노동자들은 실제 수요에 따라 병원이나 가정에서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으면서도 제도 밖의 비공식적인 위치에 머무르고 있는 현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간병노동자들은 간병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명확하게 하는 법적, 제도적 조치들을 요구해왔고 그만큼 <노인수발보험법> 제정에 거는 기대 또한 컸다. 실제 <노인수발보험법>에 따르면 간병, 가사 및 일상생활지원서비스 등을 제공하는 ‘수발요원’이 요양서비스를 제공하는 필요 인력의 80% 이상을 차지한다. 그러나 <노인수발보험법>에는 재가수발, 시설수발 등 종사노동자들의 노동의 형태만 적시되어 있을 뿐, 종사노동자들의 법적 지위는 전혀 명시되어 있지 않다. 별도의 명시가 없을 경우 노동법의 적용을 받게 되지만, 문제는 정부법안의 구성이나 법안 설명에 따르면 특수고용, 파견 등 비정규 형태의 고용이 예상되는데 파견법 및 입법 준비 중인 기간제법, 특수고용법 등 비정규법의 적용을 받게 될 가능성이 크다. <노인수발보험법> 6장은 수발기관의 지정과 휴폐업, 취소에 관한 상세한 요건을 다루고 있는데, 수발기관은 보건복지부령이 정하는 요건(시설 및 인력)을 갖추고 공단으로부터 지정받도록 되어 있다. 즉 민간위탁으로 노동자들을 간접 고용하겠다는 것이다.3) 이는 <노인수발보험법> 설명에서 ‘다양한 주체의 참여’ 시스템을 확립하겠다는 목표로 민간부문(기업)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유도하겠다는 계획에서도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정부는 이 법이 ‘일자리 창출 정책’이 될 것이라고 적극 홍보하고 있는데, 그 효과는 정부가 나서서 비정규직을 확대 양산하는 것으로 귀결될 것이다. 일본의 개호보험은 한국의 <노인수발보험법>의 미래 일본은 사회복지기초구조개혁의 일환으로 2000년부터 개호보험을 실시하였는데, 개호보험의 실시로 일본의 고령자복지에서 나타난 최대의 구조변화는 노인요양서비스의 공급에 있어서 ‘복지의 시장화’라 불리는 규제완화이다4). 일본의 개호보험의 사례를 보는 것은, 정부가 사회보험제도의 방식을 택하고 있는 일본의 사례를 참조점으로 삼고 있고 실제로 유사성이 높아, 시행한 지 5년이 넘은 개호보험의 결과는 <노인수발보험제도>의 미래를 짐작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개호보험이 실시되면서 재가복지서비스를 중심으로 공급주체의 규제가 완화되어 의료법인, 주식회사 등과 같은 민간영리기업, 농협, 생협, 사회적기업 등 다양한 사업주체에 의한 서비스 공급이 가능해졌다. ‘복지의 시장화’로 불리는 변화의 핵심은 서비스의 이용과 제공이 행정에 의해서 결정되는 구조에서 이용자와 제공자가 화폐를 매개로 하여 직접적으로 매매하는 구조로 바뀌고, 복지서비스의 이용 및 제공의 책임이 행정에서 이용자 및 제공자로, 즉 직접적인 당사자에게 전가된다는 것에 있다. 이러한 구조개혁의 목표는 서비스를 필요로 하는 고령자가 증가한다고 하더라도, 제공해야 할 서비스의 총량이나 국고부담의 증가로 이어지지 않도록 이용자의 부담을 증대시켜 수요를 억제시키는 것이었다. 이용료의 10%에 달하는 자기부담은 서비스 이용억제 효과를 가져와 개호보험 서비스가 필요함에도 그것을 이용할 수 없는 다수가 생겨나는 계층화된 개호시스템이 구축된 결과를 가져왔다. 이것은 수발을 가족, 특히 여성에게 의존하는 것을 오히려 강화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 영리기업의 참여로 개호종사자의 노동조건이 악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특히 재가서비스의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홈헬퍼’의 경우는 효율화와 비용 삭감의 압력 속에서 시간단위의 서비스 제공과 파트타임 노동을 전제로 한 임금체계 때문에 개호보험 시행 후 노동조건은 급속하게 악화되었다. <노인수발보험법> 역시 일본의 개호보험과 크게 다르지 않은데, 앞서 서술했듯이 정부는 2004년 10월 민간투자법을 개정하여 사회복지시설에 대한 민간투자를 열어놓고, 서비스 공급에 있어 민간기업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유도하겠다는 계획을 내놓고 있다. 이는 법 제정의 취지가 복지의 부재를 가족이 전담했던 현실을 변화하거나 특히 가족 내 여성의 부담을 사회화하겠다는 계획이라기보다는 복지서비스를 새로운 시장으로 만들려는 신자유주의적 정책이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임금을 케이스 별(관리수 별)로 지급하도록 되어 있는데 이는 이동시간 및 보고서 작성 시간, 교통수단의 격차가 인정되지 않아 가사·간병 노동자의 현재의 저임금 구조를 고착화할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가사·간병 서비스를 등급화하려는 것은 이미 ‘여성의 일’로 저평가되어 있는 가사·간병 노동을 차별적 임금지급을 통해 저임금을 정당화하려는 시도이다. 「1차 저출산 고령사회 기본계획」과 「여성인력개발종합계획」의 기만성 지난 6월 7일 정부는 「1차 저출산 고령사회 기본계획」(이하 ‘기본계획’)을 발표했다. 지난 1월 [희망한국 21- 저출산 종합대책]이 거의 출산, 양육지원 부분에만 초점을 맞추었다면 ‘기본계획’은 아동·여성·노인의 양육·고용·보건·복지 등 매우 포괄적인 정책 분야의 과제를 하나로 묶은 사회정책의 종합판이다.5) 그러나 이번 기본계획 230여개의 세부사업 중에서 <노인수발보험법>을 포함하여, 180여개 사업은 이미 시행 중이거나 시행이 확정된 사업이고, 신규 사업은 비 예산 사업 20개를 포함하여 50여 개뿐이다. 즉 ‘기본계획’은 각 부처에서 추진하는 여러 정책들을 ‘저출산 고령사회 대책’이라는 틀로 재구성한 것이며 이는 매우 정치적인 선택의 결과이다. ‘기본계획’은 신자유주의 정책 추진의 결과로 나타난 노동의 불안정화, 대중의 삶의 위기를 저출산·고령화에 따른 ‘경제성장의 위기’로 본질을 호도하고 그 책임을 개별 국민에게 전가하고자 하는 정치적 기획이라는 것이다. 특히 ‘기본계획’에서 여성은 아이를 낳아 출산율을 높여야 하는 주체이자 부족한 생산가능 인구를 보충해야 하는 노동력이라는 이중적 위치에 놓여 있으며, 여성으로 하여금 어머니와 노동자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게 하는 데 정책의 초점이 맞춰져 있다. 육아휴직, 산전 후 휴가에 대한 제도적 보완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일·가정의 양립은 근로형태 유연화를 전제로 하는데 이미 심각히 유연해진 여성노동시장의 상황을 고착화하여 저임금 불안정 여성노동자의 이중부담을 증가시키게 될 것이다. 여기에 여성가족부는 지난 7월 4일 「여성인력개발종합계획」을 발표했는데, 이는 ‘여성인력 활용을 통한 선진경제로의 도약’을 비전으로 2010년까지 여성경제활동참가율 55% 달성, 여성일자리 약 60만 개 확대를 목표로 하고 있다. 여성일자리 창출 60만 개 중 44만 개는 간병서비스 개선 제도화, 노인수발보험제도 등의 실시로 창출될 사회서비스 분야의 일자리가 차지한다. 이는 여성일자리가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이기 보단 이미 비공식부문에서 일하는 가사·간병 노동자의 양성화, 제도화로 봐야 한다. 그러나 앞서 살펴보았듯이 현재 시행예정인 <노인수발보험법>은 가사, 간병노동을 하는 주로 중고령층의 여성노동자의 불안정한 고용과 저임금을 고착화시킬 것으로 보인다. 결국 「여성인력개발종합계획」은 남성=생계부양자, 여성=가사전담자라는 성별분업에 기초한 성차별적 노동시장 구조는 그대로 둔 채 여성노동자들의 일과 가정에서의 이중부담을 증가시키는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여성일자리 창출’로 포장한 것에 다름 아니다. <노인수발보험법>과 여성노동자 노무현 정부는 <노인수발보험법>을 통해 국가가 노인부양을 책임지고, 그와 함께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겠다는 선전을 하고 있다. 따라서 새로운 사회보장체계로서 <노인수발보험법>에 대한 사회적 기대 또한 큰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현재까지 시범사업의 경과만 보더라도 이 제도는 노양부양을 사회적 책임으로 분담함으로써 주로 사적 부양체계에서 이 일을 전담하던 여성의 부담을 경감해주고 이 일에 종사하는 노동자의 노동권을 보장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차 시범사업 결과 2차 시범사업에서 적용될 ‘노인수발서비스 수가 및 산정기준’(이하 ‘기준’)에 따르면, 1등급을 받은 수발대상자가 한 달 동안 받을 수 있는 재가서비스 한도액은 975,120원이다. 현재 환자나 환자가족이 1달 동안 간병인을 고용하는데 최소 120만원(이 역시 간병노동자가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임금을 받는 현실에서의 금액이다)이 소요되는 현실임을 감안할 때 부족한 서비스 제공일뿐더러, 이런 서비스를 이용하는데 월 20만원이 넘는 비용 부담이 생긴다는 이야기다. 이 제도를 이용할 수 있는 65세 이상 노인인구의 60%는 여성이 차지하고 있고, 빈곤계층으로 갈수록 여성노인비율은 높아진다.6) 즉 아프고 요양이 필요한 빈곤한 여성노인들은 높은 본인 부담 때문에 이 제도를 이용할 수 없게 된다. 더구나 현재 가족 내에서 노인요양을 책임지고 있는 것은 아내나 며느리, 즉 여성인 현실7)을 감안할 때, 높은 비용 부담 때문에 이 제도가 시행되더라도 여성의 부양부담을 줄어들지 않을뿐더러, 제도 시행에 따른 요양서비스에 대한 기대와 욕구가 강해져 오히려 여성의 부담과 역할은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또한 ‘기준’에 따르면 재가 서비스의 경우, 제공하는 서비스의 종류, 서비스 대상자의 등급별로 서비스 제공 시간에 따라 해당 수가를 지급하도록 되어있다. 시간당 급여의 경우 30분 단위로 금액이 책정되어 있는데, 서비스 제공시간 30분 미만인 경우는 지급하지 않고, 책정기준 30분 미만의 초과 서비스 제공8)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런 수가 체계에 따르면 노동자가 일하기 위해 이동하는 시간이 고려되어 있지 않고, 교통비, 식대가 모두 일하는 노동자의 부담이 되는 데 반해, 수가가 턱없이 낮고 대상자의 사정으로 일이 취소되어도 보상받을 길이 없다. 또한 고용불안정이나 저임금 문제뿐만 아니라 재가서비스의 경우, 가정 내에서 일대일로 서비스를 제공하기 때문에 간병노동자들은 환자나 환자가족의 성적, 물리적 폭력에 노출되기 싶지만, 이에 대한 어떠한 대책도 없는 상황이다. 시설서비스의 경우는 등급별 1일당으로 산정하는데, 가장 높은 등급 비율을 차지하는 3등급의 경우 25,280원이다. 이는 간병·수발 등의 일상생활지원, 수발관리, 간호, 기능훈련 및 기타 복지서비스 등 시설에서 생활하는데 필요한 제반 서비스 비용을 포함하는 것이어서, 시설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저임금은 예상가능하다. 이렇듯 <노인수발보험제도>는 이 법의 제정으로 간병노동의 제도화를 통한 노동권 확보와 노동조건 개선을 기대했던 현재 간병노동자의 기대와는 정반대인 여성노동자의 저임금구조의 고착화 방향으로 추진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노인수발보험법>의 목표는 중년·고령층 여성노동자를 저임금 노동력으로 활용하여, 높은 비용부담을 감당할 수 있는 중산층 이상에게만 그 혜택이 돌아가게 하는 데 있을 뿐이다. 이에 서울대병원 간병인 노조는 노동권 후퇴와 사회복지가 양립할 수 없음을 분명한 기조9)로 <요양보장연대회의>에 참여하여 현재 추진되는 <노인수발보험법>에 반대하면서, 간병노동자 전국 조직화 사업을 준비 중이다. 이는 정부의 저출산·고령화 대책을 여성고용창출의 기회로 보고, 여성노동의 불안정화를 고착화시키는 사회적 일자리 창출 정책에 편승하는 ‘사회적 기업’ 흐름에도 반대하는 것이다. 우리는 여성노동자를 이중적으로 착취하는 저출산·고령화 대책의 기만성을 폭로하면서 간병노동자의 노동권 쟁취 투쟁에 연대해야 할 것이다. 1) 1차 시범사업은 2005년 7월부터 2006년 3월까지 55개 시설을 중심으로 실시되었는데, 6개 시군구, 기초수급노인을 대상으로 실시되었다. 2차 시범사업은 2006년 4월부터 1년 동안 실시되는데, 8개 시범지역, 일반노인까지 확대하여 실시할 예정이다. 본문으로 2) 최예륜, 「장기요양보장제도 도입의 쟁점과 노인수발보험법의 문제점①」, 『사회운동』65호본문으로 3) ‘요양노동자의 노동권 보장과 지자체의 역할’, 공공연맹 정책부장 이윤주 본문으로 4) 일본의 개호보험과 관련해서는 「노인요양서비스 시장화의 두 가지 길: 일본의 경험과 한국의 시도」(오세영, 2005)‘만’을 참조하였다. 본문으로 5) 「‘1차 저출산 고령사회 기본계획’의 주요 쟁점과 당의 대응: 여성관련 쟁점을 중심으로」, 김원정 본문으로 6) 2001년 현재 65세 이상 여성노인이 남성노인의 1.5배이며 국민기초생활수급자의 경우에는 3배, 차상위 계층의 경우는 약 2배 정도이다.본문으로 7) 1998년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노인생활실태 및 복지욕구 조사결과에 의하면, 주 수발자의 80%가 여성이며, 남성노인의 주 수발자는 여성이 99%이고 배우자가 71.2%를 차지하고(또한 주 수발자의 54.9%가 65세 이상), 여성노인은 71.8%가 여성이고 장남며느리가 37.5%의 비중을 차지한다.본문으로 8) 예를 들어, 가정수발서비스의 경우 30분에 9560원인데, 59분의 경우도 같은 수가가 지급된다. 9) “노인수발보험법을 만들려면 반드시 당사자인 간병노동자들의 노동의 대가가 정당하게 돌아올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겁니다. 국민건강보험료로 간병료가 지급되고, 노인들은 환자는 무료로 간병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간병노동자들이 특수고용에서 벗어나고 최저임금 적용받을 수 있어야지요. 그래서 환자가 정말 마음 편하게 간병을 받을 수 있도록, 그리고 간병인도 불안하지 않도록, 국가가 책임져야 하는 겁니다. 정부가 정말로 국민을 위한 법을 만들고자 한다면, 모두가 만족하는 법을 만들어야 합니다.” -98주년 여성의 날 맞이 토론회에서 서울대병원지부 간병인분회장의 발언 중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