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주도의 금융군사세계화인가, 민중의 평화와 보편적 권리인가 [%=사진1%]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은 이후 한국 사회가 나아갈 방향에 대한 지배 세력의 입장을 보여주는 중대한 문제다. 최근 한국 정부는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에 합의하고 한․미 FTA 협상을 추진하고 있다. 이는 한․미 동맹의 공고화와 미국과의 경제통합을 통해서 이후 한국 사회가 나아갈 길을 모색하겠다는 의지를 반영한다. 많은 이들이 이런 발전 방향이 한국의 민중들에게 미칠 영향은 매우 해악적이고 파괴적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지만, 지배 세력은 이를 변경할 수 없는 것으로 못 박고 어떠한 논의도 없이 밀어붙이고 있다. 한․미 동맹의 공고화와 한․미 FTA는 한국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의 미래를 좌우할 사안이지만, 민중들은 자신의 미래에 대한 선택권을 전혀 가질 수 없고 오히려 공권력의 폭력은 민중의 저항을 무참히 짓밟고 있다. 따라서 현재 한․미 FTA가 가지는 의미를 제대로 분석하고, 더 많이 토론하는 것, 그리고 이에 기초해 우리의 미래를 스스로 결정하기 위한 투쟁을 만들어가야 한다.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와 투자 및 무역의 자유화 1947년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자본주의 질서를 복구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GATT)은 관세율을 낮추고 관세를 제외한 모든 무역장벽을 제거하는 것을 원칙으로 무역의 자유화를 관장하기 위해서 체결되었다. 당시 GATT가 추진하는 무역 자유화의 대상은 주로 공산품에 한정되었다. 이런 GATT가 점차 그 대상과 범위를 확장하게 되는 과정은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와 밀접한 연관을 가진다. 1970년대 미국 경제가 여러 요인들로 그 지위를 위협받게 되면서 이를 역전시키기 위해 달러 안정화 조치와 이자율 인상이 추진되고 이를 통해 세계의 자본을 미국에 집중시키면서 금융화의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이것은 이전에 금융에 가해졌던 각종 제약조치가 철폐되는 과정이었고 금융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세계의 자본을 미국에 집중시키기 위해서는 금융의 자유가 세계적인 차원에서 달성되어야 했고, 이를 위한 미국의 압력이 거세졌다. 이런 변화의 바탕에는 구조적 위기에 대응하는 자본의 전략이 놓여있었다. 이른바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이 개시된 것이다. 1980년대 라틴 아메리카를 휩쓴 외채위기는 세계적인 차원에서 금융세계화의 규범을 확산하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 나라들의 외채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개입한 국제통화기금(IMF)은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통해 금융시장 자유화, 관세 인하, 국유 산업의 민영화, 외국인 투자에 대한 경제 개방, 정부 규제의 축소, 소유권 보장 등의 규범을 부과했다. 이런 규범을 통해 제3세계 국가들의 천연자원, 농업, 공공 서비스는 초민족적 자본의 이윤추구에 희생되었다. 더불어 증권시장을 중심으로 시장이 세계화되고, 이 속에서 기업의 인수․합병, 직접투자, 주식투자, 투기 등이 초민족적 자본의 이윤을 추구하는 주요한 방법이 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GATT를 중심으로 한 세계 무역체계 내의 변화가 동반된다. 농업과 서비스가 자유무역의 대상으로 포함되고, 증권시장에서의 각종 투자를 보장하는 규범이 추가되며, 지적재산권과 같이 초민족적 자본의 이윤을 보장하기 위한 권리들이 중요해지는 것이다. GATT의 8차 무역라운드인 우루과이라운드에서는 농업, 서비스, 지적재산권이 이후 다뤄야하는 의제로 설정되고, 우루과이라운드의 성과를 바탕으로 1995년 WTO가 출범한다. 이후 2000년 4차 WTO 각료회의를 통해 합의된 도하개발의제(DDA)에는 농업협상의 3대 목표, 서비스협상의 방식, 환경이슈 추가, 싱가포르 이슈(투자, 무역원활화, 정부조달투명성, 경쟁) 협상을 5차 각료회의 이후 개시할 것 등이 담겨있다(결국 싱가포르 이슈에서는 무역원활화만 협상 의제가 되었다.). 그러나 DDA는 세계적인 대안세계화 운동의 저항과 회원국들 사이의 이견으로 아직 개시되지 못하고 있다. 양자간․다자간 FTA는 WTO가 협상에 난항을 겪으면서 급격히 증가하고 있으며, 그 내용은 WTO DDA가 포괄하는 협정의 대상과 개방의 수위를 훨씬 심화시킨 것들로 채워진다.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시대, 자유무역이란 초민족적 자본의 이윤을 극대화하는 데 필요한 다양한 대상을 포함하고 자유화의 수위를 높인다. 금융적 방식을 통해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의 활동을 보장하기 위한 각종 조치가 자유무역의 확산을 위한 WTO, FTA 등을 통해 확립된다. 결국 금융화와 개방은 동시적으로 진행되는 것이다. 무역과 투자의 자유화를 위한 미국의 정책 미국은 1980년대 이후 무역과 투자의 자유화를 확산하기 위해 양자간, 다자간 지역적 무역협상을 동시에 진행하는 트리플 트랙 통상 정책을 추진해왔다. 이 중에서 미국이 가장 선호했던 것은 세계적인 수준에서 자유무역의 규범을 확산하는 다자간 무역협상이었다. 하지만 유럽통합과 같은 지역화 흐름이 대두되고 WTO 협상이 난항을 겪으면서 미국은 경쟁적 자유주의 전략을 택하고 있다. 이는 특정 국가와 FTA를 체결함으로써 차별을 우려한 다른 국가들이 경쟁적으로 미국과 FTA를 맺도록 압박하고, 이를 통해 세계적인 무역 자유화를 촉진하겠다는 것이다. FTA는 더 이상 단순히 교역확대(자유로운 무역)만을 위한 수단이 아니다. 초민족적 금융자본의 지배력과 활동력을 보장하는 메커니즘을 확산하고 이식하는 수단일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미국의 금융적 지배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특히 부시 행정부는 FTA를 통상정책의 핵심적인 기제로 활용한다.1) 이것은 크게 두 가지 상황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첫째는 WTO DDA 협상이 난항을 겪고 있는 상황이다. 우루과이라운드에서 농업, 서비스, 지적재산권을 의제에 추가하기로 결정은 했으나, 그 세부적인 내용은 DDA를 통해 결정된다. 그러나 아직까지 DDA 협상은 제대로 된 합의를 끌어내지 못하고 있다. 세계 최대의 농산품 수출국이자, 각종 서비스 산업의 선두주자이며, 지적재산권을 통해 엄청난 로열티 수익을 향유하고 있는 미국으로서는 매우 불만스러운 상황이 지속되는 것이다. 미국은 양자간, 지역적 FTA를 통해 이런 난항을 돌파하고, 다자간 무역협정에도 활력을 불어넣으려는 것이다. 따라서 최근 미국이 체결하려는 FTA의 표준안은 DDA 협상에서 쟁점이 되고 있는 의제들을 핵심으로 하고, 그 규범 수위도 DDA보다 훨씬 높임으로써2) FTA가 다자간 무역협정의 지렛대 역할을 할 가능성이 높다. 둘째는 9․11 이후 자유무역에 새로운 안보 위협의 대두를 억제하는 주요한 역할을 부여하고 있는 상황이다. 미국은 세계화에 통합될 수 있는 나라들과 그렇지 못한 나라들을 구분하면서3), 후자를 안보의 주된 위협으로 상정한다. 신자유주의 정책을 통해 자신을 금융세계화에 편입시키려 노력하는 국가들은 위협이 아니다. 하지만 이를 거부하는 나라들이나 통합되고자 해도 그럴만한 시장도 자원도 없어 배제되는 나라들의 경우는 테러리즘이 발생하는 곳으로 간주된다. 미국은 자유무역이 경제 성장을 촉진하여 정치적․사회적 불안정성을 축소시킨다는 구상 하에 이런 나라 중 일부를 FTA 등을 통해 선별적으로 금융세계화의 규범을 이식하여 자유무역 체제 내에 묶어두려 한다.4) 점차 다른 나라들에게도 이런 규범을 강제하며 자유무역을 확산하면서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의 안정성을 유지하려 한다. 그리고 이를 거부하는 국가들은 불량국가로 분류되고, 군사적인 방식을 통해 신자유주의 질서를 이식한다. 실제로 이라크 전쟁 이후 이라크 경제에는 대규모 사유화 조치가 예정되어 있다. 많은 이들이 최근 미국이 FTA의 상대로 삼았던 국가들은 대부분 미국의 입장에서 볼 때 교역 비중이 상대적으로 낮고 경제적 효과도 크지 않은 국가들이고 주로 대미 종속성이 강한 나라들임을 지적한다. 실제로 미국은 단순히 경제적인 목표보다는 종합적인 대외 전략 목표를 염두에 두고 FTA를 추진해왔다. 개방 및 개혁 의지가 강한 국가들이나 대테러 전쟁을 수행하는 데 적극 지지․기여하거나 향후 협력이 필요한 국가들이 그 대상이 되고 있다. 한․미 FTA를 통한 초민족적 자본의 한국 경제 지배력 강화 한․미 FTA 또한 미국의 현재 무역과 투자 자유화 전략에 부합한다. 미국은 한․미 FTA를 통해서 여러 이득을 얻을 수 있고, 자신의 전략도 실현할 수 있다. 순 경제적인 측면만 보더라도, 미 의회조사국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의 FTA 경제효과 시뮬레이션 결과 한․미 FTA는 미국에 약 300억 달러의 경제적 실익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한다. 농업은 말할 것도 없고, 지적재산권 강화, 각종 서비스 산업에서의 추가적인 개방 요구와 미국식 규범과 법률의 이식, 투자에 있어서의 제한 철폐 등 한․미 FTA가 타결된다면 미국이 얻을 수 있는 직접적인 이득은 막대하다.5)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한․미 FTA가 한국 경제의 신자유주의적 개혁을 더욱 심화하고, 이에 따라 한국에서 초민족적 자본의 활동과 지배력은 더욱 강화한다는 점이다. 신자유주의 정책이 실행되면서 미국은 동아시아 지역에서도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며,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편입할 것을 요구했다.6) 김영삼 정권은 세계화라는 용어를 도입하며 이런 개방요구에 적극적으로 응했는데, 우루과이라운드를 통해 농업을 개방하고, OECD 가입을 위해 금융자유화 조치를 약속했다. 이후 1997년 외환위기와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부과된 IMF 구제금융 협약을 거치면서 한국은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에 더욱 깊숙이 편입되었고, 이후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은 한국사회의 주어진 기준이 되었다. 그 결과 노동의 불안정화, 빈곤의 심화, 외국인 투자자의 이득 확대, 한국 경제의 종속성 심화와 같은 한국 경제, 사회 전반의 심대한 재편이 일어났고, 이것은 민중의 삶과 권리를 담보로 한 것이었음은 이미 잘 알려진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미 FTA는 한국 경제, 사회 전반의 신자유주의적인 재편을 더욱 가속하고 심화할 것이다. 그리고 이는 분명 무역과 투자의 자유화를 확대․강화하여 초민족적 자본의 활동 반경을 넓히고 이윤을 극대화할 수 있는 질서를 창출하려는 미국의 전략과 맞물려있다. 정치, 군사, 경제를 아우르는 한․미 동맹의 확대․강화 더불어 최근 한․미 관계 전반에 있어서 중요한 사안들이 진척되고 있는 상황도 고려해야 한다. 지난 해 부산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한국을 방문한 부시 미 대통령은 경주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한․미 동맹 강화, 9.19 북핵공동성명 이행 합의 추진, 한․미 경제협력 강화를 핵심 주제로 한 경주공동선언에 합의했다. 이후 한국은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에 합의했고, 또 그 얼마 후 한․미 FTA 협상 개시를 발표했다. 말 그대로 양국 간에 정치, 군사, 경제를 아우르는 전방위적인 동맹관계가 강화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새로운 군사전략은 초민족적 자본의 이해가 심각하게 훼손되는 상황, 즉 금융세계화의 안정성이 위협받는 상황이 발생하면 해당 지역에 신속하게 군사력을 동원하겠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이는 전략적 유연성, 선제공격, 신속기동군 창설 등으로 구체화된다.7) 한국이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에 합의하고 평택을 이 새로운 전략을 위한 미군기지로 내놓았다는 것은 미국의 새로운 군사전략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면서 하위 파트너로서의 위치를 공고히 하겠다는 의미다. 한․미 FTA는 경제적인 차원에서 미국과의 통합을 심화하는 것인데, 이는 금융세계화의 안정성을 유지하는 것이 한국의 초민족화된 자본(또는 그 길을 지향하는 자본과 지배세력)에게도 사활적인 과제가 됨을 의미한다. 군사적인 동맹과 경제적인 통합이 서로를 강화하여 미국의 이해에 한국을 일치시키는 경향이 강해질 것도 분명하다. 최근 중국 경제가 성장하고 중국이 세계의 공장으로 기능하면서 한국 경제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지고 있다. 이런 경향을 반영하듯 한․중․일 3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의 지역적 협력에 관한 논의가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3국의 FTA나 한․중, 한․일 FTA도 모색되고 있으며, 동아시아의 지역 블록 구상도 제기되고 있다.8) 또 한 편으로 동아시아 지역은 남한과 북한, 중국과 일본 등 민족주의적 갈등이 상존하는 지역이다.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과 한․미 FTA를 통한 한․미 관계의 전반적인 동맹 강화는 이런 동아시아 지역에서 미국의 지위를 다시 공고히 하는 데 유용하다. 한․미 FTA는 미국의 경쟁적 자유주의 전략에 따라 주변 지역에 미국의 경제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계기가 되고, 따라서 동아시아 지역에서 초민족적 자본의 활동의 안정성을 보장할 수 있는 자유무역 체제를 더욱 확장하는 기반이 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전략적 유연성을 매개로 한 미국의 새로운 군사전략을 한국이 합의함으로써 한․미․일 삼각동맹의 범위가 동아시아 전체로 확장되는 계기가 된다. 미국과의 경제통합으로 나아가는 길 한․미 FTA 추진에 있어서 미국보다는 한국 정부의 의지가 더 강했다는 점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한․미 FTA는 한국 농업의 붕괴, 글로벌 스탠더드 이식, 서비스 부문의 개방, 투자의 자유화와 같은 결과를 낳을 것이고, 이런 결과들은 한국의 민중에게 해악적이다. 이미 많은 이들이 이런 결과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고 한․미 FTA를 저지하기 위한 투쟁을 벌이고 있음에도 정부의 입장은 확고하다. 기어이 한․미 FTA를 타결하겠다는 것이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한국은 장기불황에 빠져있다. 경기회복은 매우 짧고 경기침체는 매우 오래 이어지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참여라는 미명 하에 여러 이질적인 지지층을 규합하여 집권에 성공한 노무현 정권에게는 참으로 난감한 문제다. 경제위기 하에서 이질적인 지지층으로부터 쏟아져 나오는 불만을 적절히 관리할 수 있는 정치 전망을 제시하기 어려운 것이다. 게다가 최근 양극화 담론을 중심으로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이 내재한 반(反)민중적인 결과들이 사회적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으며, 신자유주의 정책을 주어진 기준으로 삼고 있는 집권세력은 당연히 이런 문제를 해결할 방도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 노무현 정권은 성장잠재력의 약화, 사회양극화의 심화, 저출산․고령화와 같은 새로운 미래 위험요인이 한국경제의 당면 문제라고 명시하면서 각종 처방전을 쏟아내고 있다. 한․미 FTA 또한 이런 미래 위험요인에 대처하는 적극적인 우리의 노력이라고 포장하는데, 개방과 경쟁을 통해 생산성을 제고하고 성장잠재력을 확충하는 제2의 장기 성장 전략, 우리의 모든 역량을 결집하여 한․미 FTA를 우리 경제․사회 시스템 전반을 선진화시키는 계기로 활용할 필요9)등을 주장한다. 제2의 장기 성장 전략인 한․미 FTA는 양국간 교역을 활성화하고 미국은 물론 제3국으로부터 외국인 투자를 증대시킴으로써 성장잠재력을 확보하여 일자리를 창출하는 데 기여할 수 있고, 이는 양극화를 완화하는 데도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정부의 이런 주장이 현실화될 것인지도 미지수이지만, 정부가 현재 한국사회의 위기에 대한 대응을 미국과의 적극적인 경제통합의 방향에서 진행하고 있는 점이 더욱 심각한 문제다. 1997년 IMF 구제금융협약을 통해 신자유주의 개혁을 본격적으로 진행해 온 결과, 이에 적응한 일부 산업과 기업은 주가상승과 수출확대를 통해 팽창에 성공했다. 세계경제의 위기와 한국경제의 장기불황 속에서 한국경제를 지배하고 있는 초민족적 자본과 대자본은 미래의 전망이 결코 밝지 않음을 인식하고 있다. 한․미 FTA는 이런 불안한 상황을 미국과의 경제통합을 심화하여 타개해 나가겠다는 지배세력의 전망을 의미한다. 한․미 FTA가 무역촉진, 외국인 투자 증대 등의 결과를 가져오고, 일부 기업과 산업에게 이득이 되겠지만, 이것의 이면은 민중의 삶과 권리의 파괴다.10) 미국 주도의 금융․군사세계화인가, 민중의 평화와 보편적 권리인가 최근 정태인 전 청와대 국민경제비서관이 노무현 정부의 한․미 FTA를 강하게 비판하면서 화제가 되고 있다. 그의 비판의 핵심 요지는 한국이 강대국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며 동북아 지역의 캐스팅 보트 역할을 통해 영향력을 높일 수 있었으나 FTA 체결로 미국 편에 완전히 들어가면서 기회를 놓쳤다는 것이다. 그는 한․미 FTA를 추진함으로써 노무현 정부가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 시대라는 제1의 국정목표를 사실상 포기했다고 비판한다. 그의 이런 비판은 '청와대 내부에서조차 한․미 FTA를 비판하고 있다는 주장의 근거로 활용되면서, 한․미 FTA를 저지하려는 운동 진영 내에서도 환영받는 분위기다. 그러나 위에서 밝혔듯이 한․미 FTA는 미국의 세계 전략에 적극적으로 조응해 들어가는 것을 자신의 미래로 삼는 한국 정부와 지배세력의 핵심적인 경로다. 여기서 정태인 식 비판은 결코 현재의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를 거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한계적이다.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 시대의 균형자 역할을 하겠다는 참여정부의 목표는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공고히 하는 가운데, 그 영향력에 위협이 되는 갈등과 분쟁을 미국을 대신해 나서서 조정하겠다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정태인은 이런 기본적인 구상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며, 다만 이런 조정자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라도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자 위치를 차지해야 하고, 이를 먼저 추진하면서 미국과의 관계를 발전시켜나가자는 입장이다. 이런 비판은 현재의 핵심적인 쟁점을 가리고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본질에 대한 인식을 가로막는다. 한․미 FTA는 전략적 유연성을 핵심으로 하는 한․미 동맹의 강화와 맞물리면서 동아시아 지역의 명운을 좌우할 중요한 문제다. 미국 주도의 군사․금융세계화에 적극적으로 편입되어 초민족적 자본의 수탈과 착취를 강화하는 메커니즘을 자신의 미래로 짊어질 것인가가 아니면 이를 거부하고 다른 세계로 나아갈 것인가! 바로 이것이 지금 한․미 FTA를 둘러싼 문제의 핵심이다. 민중의 미래와 직결된 사안을 독단적으로 추진하며, 이에 대한 저항을 폭력으로 억압하는 노무현 정권에 대한 전면적 투쟁이 요구된다. 지금 우리에게는 한․미 FTA와 전략적 유연성이 강제하는 미래를 거부하고 민중의 평화와 보편적인 권리가 실현되는 다른 세계를 향한 운동이 절박한 과제인 것이다. 1) 이는 부시 행정부가 체결한 FTA의 숫자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부시 행정부 1기 동안만 10개국과의 FTA가 체결되었는데, 이는 미국이 1985년 이스라엘과 최초로 FTA를 체결한 후 2000년까지 FTA를 체결한 국가가 단 5개국에 불과했던 것과 대비를 이룬다. 본문으로 2) 대표적인 것이 지적재산권 협정이다. 미국은 WTO에서 논의되고 있는 무역관련 지적재산권협정(TRIPs)조차 충분하지 않다고 간주하고 있으며, FTA 협상이 TRIPs 이상의 높은 보호방식(TRIPs-Plus)을 요구하고 관철시켜왔다. 미국이 호주, 싱가포르와 체결한 FTA이 그러했으며, 한․미 FTA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으로 예상된다. 본문으로 3) 2002년, 미 국방성 병력변환국에서 나온 공개정책문서를 보자. 세계화가 심화․확산되면서 두 집단의 국가들이 서로 경쟁한다. 스스로를 내적으로 조정하여 부상하는 세계 규칙에 맞추려고 노력하는 나라들(예를 들어 서방 선진 민주주의 국가들, 푸틴의 러시아, 아시아의 신흥 경제들)과 정치적․문화적 경직성이나 지속적이고 처참한 빈곤으로 인해 그런 국내적 재배치를 거부하거나 달성할 수 없는 나라들(중앙아시아, 중동, 아프리카, 중앙아메리카의 대부분 국가들). 우리는 전자를 세계화의 역동적 중심부(Functioning Core)로, 후자를 통합되지 않은 틈새(Non-Integrating Gap)로 명명한다. (Barnett and Gaffney, 2002.) 본문으로 4) 미국이 모로코, 요르단과 맺은 FTA가 대표적인 사례다. 본문으로 5) 한․미 FTA가 한미 양국에 미치는 경제적 효과와 각 산업별 영향에 대해서는 많은 자료에서 다뤄졌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이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을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한미 FTA 저지 범국민대책위원회>, www.nofta.com을 참조하라. 더불어 한․미 FTA가 한국의 민중들의 삶과 권리에 미칠 영향에 대해 간략하게 분석한 사회진보연대 입장으로는 정지영, 「한․미 FTA를 저지하자!」, 『사회운동』, 2006년 3월호를 참조하라. 본문으로 6) 그 이전 시기, 미국은 동아시아 지역에서 경제적 이익보다는 정치, 군사적 이익을 추구했다. 냉전 시기 미국은 역개방 정책을 통해 자신의 시장을 열어주면서, 미․일 동맹을 기본으로 하여 한국과 대만을 사회주의권에 대한 쇼케이스로 육성했다. 본문으로 7)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과 미국의 새로운 군사전략에 관해서 더 자세한 것은 권태훈, 「미국의 군사전략과 전략적 유연성의 의미」, 『사회운동』, 2006년 5월호를 참조하라. 본문으로 8) 이런 동아시아, 그리고 좀 더 넓게는 동남아시아를 포함한 동아시아․동남아시아의 경제적 협력 방안에 대한 논의가 최근에 처음 등장한 것은 아니다. 1997년 아시아 위기를 계기로 일본은 엔화를 중심으로 하는 아시아통화기금을 제안하며 화폐동맹을 결성하려는 시도를 한 바 있다. 하지만 이 구상은 미국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좌절되고, 이후 미․일 동맹은 더욱 강화된다.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지역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을 유지․심화하고자 하는 미국은 APEC, FTA 등을 구상한다. APEC은 미․일 동맹을 중심으로 아시아 지역에서의 경제적 주도권을 강화하고 중국을 견제하려는 미국의 개방적 지역주의 전략을 내포한 것이었다. 본문으로 9) 관계부처합동, 「한미 FTA Q&A: 최근 비판론을 중심으로」, 2006, 4, 21. 본문으로 10) 일부의 분석에 따르면 한․미 FTA의 핵심 쟁점이 개성공단 상품의 원산지 규정문제라고 한다. 이는 애초에 노무현 정부의 의도가 FTA와 전략적 유연성을 주고 한반도 문제(특히 개성공단)를 받아내자는 것이었으며, 따라서 만약 미국이 개성공단 상품을 인정하지 않으면 노무현 정부도 FTA를 철회할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첫째, 개성공단에서 상품을 생산하는 것은 주로 중소기업이며, 대기업과 초민족적 자본의 입장에서 개성공단 문제가 한․미 FTA를 좌초시킬 정도로 중요한가, 둘째, 지난해 위폐와 마약과 같이 북한의 불법거래자금을 차단하고 나서면서 강경한 태도를 취했던 미국이 북한에 달러가 유입될 수 있는 하나의 경로인 개성공단 문제를 인정할 것인가 등의 문제를 고려해 본다면, 이런 주장은 적절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미국 주도의 금융군사세계화인가, 민중의 평화와 보편적 권리인가 [%=사진1%]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은 이후 한국 사회가 나아갈 방향에 대한 지배 세력의 입장을 보여주는 중대한 문제다. 최근 한국 정부는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에 합의하고 한․미 FTA 협상을 추진하고 있다. 이는 한․미 동맹의 공고화와 미국과의 경제통합을 통해서 이후 한국 사회가 나아갈 길을 모색하겠다는 의지를 반영한다. 많은 이들이 이런 발전 방향이 한국의 민중들에게 미칠 영향은 매우 해악적이고 파괴적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지만, 지배 세력은 이를 변경할 수 없는 것으로 못 박고 어떠한 논의도 없이 밀어붙이고 있다. 한․미 동맹의 공고화와 한․미 FTA는 한국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의 미래를 좌우할 사안이지만, 민중들은 자신의 미래에 대한 선택권을 전혀 가질 수 없고 오히려 공권력의 폭력은 민중의 저항을 무참히 짓밟고 있다. 따라서 현재 한․미 FTA가 가지는 의미를 제대로 분석하고, 더 많이 토론하는 것, 그리고 이에 기초해 우리의 미래를 스스로 결정하기 위한 투쟁을 만들어가야 한다.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와 투자 및 무역의 자유화 1947년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자본주의 질서를 복구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GATT)은 관세율을 낮추고 관세를 제외한 모든 무역장벽을 제거하는 것을 원칙으로 무역의 자유화를 관장하기 위해서 체결되었다. 당시 GATT가 추진하는 무역 자유화의 대상은 주로 공산품에 한정되었다. 이런 GATT가 점차 그 대상과 범위를 확장하게 되는 과정은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와 밀접한 연관을 가진다. 1970년대 미국 경제가 여러 요인들로 그 지위를 위협받게 되면서 이를 역전시키기 위해 달러 안정화 조치와 이자율 인상이 추진되고 이를 통해 세계의 자본을 미국에 집중시키면서 금융화의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이것은 이전에 금융에 가해졌던 각종 제약조치가 철폐되는 과정이었고 금융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세계의 자본을 미국에 집중시키기 위해서는 금융의 자유가 세계적인 차원에서 달성되어야 했고, 이를 위한 미국의 압력이 거세졌다. 이런 변화의 바탕에는 구조적 위기에 대응하는 자본의 전략이 놓여있었다. 이른바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이 개시된 것이다. 1980년대 라틴 아메리카를 휩쓴 외채위기는 세계적인 차원에서 금융세계화의 규범을 확산하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 나라들의 외채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개입한 국제통화기금(IMF)은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통해 금융시장 자유화, 관세 인하, 국유 산업의 민영화, 외국인 투자에 대한 경제 개방, 정부 규제의 축소, 소유권 보장 등의 규범을 부과했다. 이런 규범을 통해 제3세계 국가들의 천연자원, 농업, 공공 서비스는 초민족적 자본의 이윤추구에 희생되었다. 더불어 증권시장을 중심으로 시장이 세계화되고, 이 속에서 기업의 인수․합병, 직접투자, 주식투자, 투기 등이 초민족적 자본의 이윤을 추구하는 주요한 방법이 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GATT를 중심으로 한 세계 무역체계 내의 변화가 동반된다. 농업과 서비스가 자유무역의 대상으로 포함되고, 증권시장에서의 각종 투자를 보장하는 규범이 추가되며, 지적재산권과 같이 초민족적 자본의 이윤을 보장하기 위한 권리들이 중요해지는 것이다. GATT의 8차 무역라운드인 우루과이라운드에서는 농업, 서비스, 지적재산권이 이후 다뤄야하는 의제로 설정되고, 우루과이라운드의 성과를 바탕으로 1995년 WTO가 출범한다. 이후 2000년 4차 WTO 각료회의를 통해 합의된 도하개발의제(DDA)에는 농업협상의 3대 목표, 서비스협상의 방식, 환경이슈 추가, 싱가포르 이슈(투자, 무역원활화, 정부조달투명성, 경쟁) 협상을 5차 각료회의 이후 개시할 것 등이 담겨있다(결국 싱가포르 이슈에서는 무역원활화만 협상 의제가 되었다.). 그러나 DDA는 세계적인 대안세계화 운동의 저항과 회원국들 사이의 이견으로 아직 개시되지 못하고 있다. 양자간․다자간 FTA는 WTO가 협상에 난항을 겪으면서 급격히 증가하고 있으며, 그 내용은 WTO DDA가 포괄하는 협정의 대상과 개방의 수위를 훨씬 심화시킨 것들로 채워진다.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시대, 자유무역이란 초민족적 자본의 이윤을 극대화하는 데 필요한 다양한 대상을 포함하고 자유화의 수위를 높인다. 금융적 방식을 통해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의 활동을 보장하기 위한 각종 조치가 자유무역의 확산을 위한 WTO, FTA 등을 통해 확립된다. 결국 금융화와 개방은 동시적으로 진행되는 것이다. 무역과 투자의 자유화를 위한 미국의 정책 미국은 1980년대 이후 무역과 투자의 자유화를 확산하기 위해 양자간, 다자간 지역적 무역협상을 동시에 진행하는 트리플 트랙 통상 정책을 추진해왔다. 이 중에서 미국이 가장 선호했던 것은 세계적인 수준에서 자유무역의 규범을 확산하는 다자간 무역협상이었다. 하지만 유럽통합과 같은 지역화 흐름이 대두되고 WTO 협상이 난항을 겪으면서 미국은 경쟁적 자유주의 전략을 택하고 있다. 이는 특정 국가와 FTA를 체결함으로써 차별을 우려한 다른 국가들이 경쟁적으로 미국과 FTA를 맺도록 압박하고, 이를 통해 세계적인 무역 자유화를 촉진하겠다는 것이다. FTA는 더 이상 단순히 교역확대(자유로운 무역)만을 위한 수단이 아니다. 초민족적 금융자본의 지배력과 활동력을 보장하는 메커니즘을 확산하고 이식하는 수단일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미국의 금융적 지배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특히 부시 행정부는 FTA를 통상정책의 핵심적인 기제로 활용한다.1) 이것은 크게 두 가지 상황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첫째는 WTO DDA 협상이 난항을 겪고 있는 상황이다. 우루과이라운드에서 농업, 서비스, 지적재산권을 의제에 추가하기로 결정은 했으나, 그 세부적인 내용은 DDA를 통해 결정된다. 그러나 아직까지 DDA 협상은 제대로 된 합의를 끌어내지 못하고 있다. 세계 최대의 농산품 수출국이자, 각종 서비스 산업의 선두주자이며, 지적재산권을 통해 엄청난 로열티 수익을 향유하고 있는 미국으로서는 매우 불만스러운 상황이 지속되는 것이다. 미국은 양자간, 지역적 FTA를 통해 이런 난항을 돌파하고, 다자간 무역협정에도 활력을 불어넣으려는 것이다. 따라서 최근 미국이 체결하려는 FTA의 표준안은 DDA 협상에서 쟁점이 되고 있는 의제들을 핵심으로 하고, 그 규범 수위도 DDA보다 훨씬 높임으로써2) FTA가 다자간 무역협정의 지렛대 역할을 할 가능성이 높다. 둘째는 9․11 이후 자유무역에 새로운 안보 위협의 대두를 억제하는 주요한 역할을 부여하고 있는 상황이다. 미국은 세계화에 통합될 수 있는 나라들과 그렇지 못한 나라들을 구분하면서3), 후자를 안보의 주된 위협으로 상정한다. 신자유주의 정책을 통해 자신을 금융세계화에 편입시키려 노력하는 국가들은 위협이 아니다. 하지만 이를 거부하는 나라들이나 통합되고자 해도 그럴만한 시장도 자원도 없어 배제되는 나라들의 경우는 테러리즘이 발생하는 곳으로 간주된다. 미국은 자유무역이 경제 성장을 촉진하여 정치적․사회적 불안정성을 축소시킨다는 구상 하에 이런 나라 중 일부를 FTA 등을 통해 선별적으로 금융세계화의 규범을 이식하여 자유무역 체제 내에 묶어두려 한다.4) 점차 다른 나라들에게도 이런 규범을 강제하며 자유무역을 확산하면서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의 안정성을 유지하려 한다. 그리고 이를 거부하는 국가들은 불량국가로 분류되고, 군사적인 방식을 통해 신자유주의 질서를 이식한다. 실제로 이라크 전쟁 이후 이라크 경제에는 대규모 사유화 조치가 예정되어 있다. 많은 이들이 최근 미국이 FTA의 상대로 삼았던 국가들은 대부분 미국의 입장에서 볼 때 교역 비중이 상대적으로 낮고 경제적 효과도 크지 않은 국가들이고 주로 대미 종속성이 강한 나라들임을 지적한다. 실제로 미국은 단순히 경제적인 목표보다는 종합적인 대외 전략 목표를 염두에 두고 FTA를 추진해왔다. 개방 및 개혁 의지가 강한 국가들이나 대테러 전쟁을 수행하는 데 적극 지지․기여하거나 향후 협력이 필요한 국가들이 그 대상이 되고 있다. 한․미 FTA를 통한 초민족적 자본의 한국 경제 지배력 강화 한․미 FTA 또한 미국의 현재 무역과 투자 자유화 전략에 부합한다. 미국은 한․미 FTA를 통해서 여러 이득을 얻을 수 있고, 자신의 전략도 실현할 수 있다. 순 경제적인 측면만 보더라도, 미 의회조사국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의 FTA 경제효과 시뮬레이션 결과 한․미 FTA는 미국에 약 300억 달러의 경제적 실익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한다. 농업은 말할 것도 없고, 지적재산권 강화, 각종 서비스 산업에서의 추가적인 개방 요구와 미국식 규범과 법률의 이식, 투자에 있어서의 제한 철폐 등 한․미 FTA가 타결된다면 미국이 얻을 수 있는 직접적인 이득은 막대하다.5)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한․미 FTA가 한국 경제의 신자유주의적 개혁을 더욱 심화하고, 이에 따라 한국에서 초민족적 자본의 활동과 지배력은 더욱 강화한다는 점이다. 신자유주의 정책이 실행되면서 미국은 동아시아 지역에서도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며,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편입할 것을 요구했다.6) 김영삼 정권은 세계화라는 용어를 도입하며 이런 개방요구에 적극적으로 응했는데, 우루과이라운드를 통해 농업을 개방하고, OECD 가입을 위해 금융자유화 조치를 약속했다. 이후 1997년 외환위기와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부과된 IMF 구제금융 협약을 거치면서 한국은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에 더욱 깊숙이 편입되었고, 이후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은 한국사회의 주어진 기준이 되었다. 그 결과 노동의 불안정화, 빈곤의 심화, 외국인 투자자의 이득 확대, 한국 경제의 종속성 심화와 같은 한국 경제, 사회 전반의 심대한 재편이 일어났고, 이것은 민중의 삶과 권리를 담보로 한 것이었음은 이미 잘 알려진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미 FTA는 한국 경제, 사회 전반의 신자유주의적인 재편을 더욱 가속하고 심화할 것이다. 그리고 이는 분명 무역과 투자의 자유화를 확대․강화하여 초민족적 자본의 활동 반경을 넓히고 이윤을 극대화할 수 있는 질서를 창출하려는 미국의 전략과 맞물려있다. 정치, 군사, 경제를 아우르는 한․미 동맹의 확대․강화 더불어 최근 한․미 관계 전반에 있어서 중요한 사안들이 진척되고 있는 상황도 고려해야 한다. 지난 해 부산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한국을 방문한 부시 미 대통령은 경주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한․미 동맹 강화, 9.19 북핵공동성명 이행 합의 추진, 한․미 경제협력 강화를 핵심 주제로 한 경주공동선언에 합의했다. 이후 한국은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에 합의했고, 또 그 얼마 후 한․미 FTA 협상 개시를 발표했다. 말 그대로 양국 간에 정치, 군사, 경제를 아우르는 전방위적인 동맹관계가 강화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새로운 군사전략은 초민족적 자본의 이해가 심각하게 훼손되는 상황, 즉 금융세계화의 안정성이 위협받는 상황이 발생하면 해당 지역에 신속하게 군사력을 동원하겠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이는 전략적 유연성, 선제공격, 신속기동군 창설 등으로 구체화된다.7) 한국이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에 합의하고 평택을 이 새로운 전략을 위한 미군기지로 내놓았다는 것은 미국의 새로운 군사전략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면서 하위 파트너로서의 위치를 공고히 하겠다는 의미다. 한․미 FTA는 경제적인 차원에서 미국과의 통합을 심화하는 것인데, 이는 금융세계화의 안정성을 유지하는 것이 한국의 초민족화된 자본(또는 그 길을 지향하는 자본과 지배세력)에게도 사활적인 과제가 됨을 의미한다. 군사적인 동맹과 경제적인 통합이 서로를 강화하여 미국의 이해에 한국을 일치시키는 경향이 강해질 것도 분명하다. 최근 중국 경제가 성장하고 중국이 세계의 공장으로 기능하면서 한국 경제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지고 있다. 이런 경향을 반영하듯 한․중․일 3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의 지역적 협력에 관한 논의가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3국의 FTA나 한․중, 한․일 FTA도 모색되고 있으며, 동아시아의 지역 블록 구상도 제기되고 있다.8) 또 한 편으로 동아시아 지역은 남한과 북한, 중국과 일본 등 민족주의적 갈등이 상존하는 지역이다.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과 한․미 FTA를 통한 한․미 관계의 전반적인 동맹 강화는 이런 동아시아 지역에서 미국의 지위를 다시 공고히 하는 데 유용하다. 한․미 FTA는 미국의 경쟁적 자유주의 전략에 따라 주변 지역에 미국의 경제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계기가 되고, 따라서 동아시아 지역에서 초민족적 자본의 활동의 안정성을 보장할 수 있는 자유무역 체제를 더욱 확장하는 기반이 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전략적 유연성을 매개로 한 미국의 새로운 군사전략을 한국이 합의함으로써 한․미․일 삼각동맹의 범위가 동아시아 전체로 확장되는 계기가 된다. 미국과의 경제통합으로 나아가는 길 한․미 FTA 추진에 있어서 미국보다는 한국 정부의 의지가 더 강했다는 점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한․미 FTA는 한국 농업의 붕괴, 글로벌 스탠더드 이식, 서비스 부문의 개방, 투자의 자유화와 같은 결과를 낳을 것이고, 이런 결과들은 한국의 민중에게 해악적이다. 이미 많은 이들이 이런 결과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고 한․미 FTA를 저지하기 위한 투쟁을 벌이고 있음에도 정부의 입장은 확고하다. 기어이 한․미 FTA를 타결하겠다는 것이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한국은 장기불황에 빠져있다. 경기회복은 매우 짧고 경기침체는 매우 오래 이어지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참여라는 미명 하에 여러 이질적인 지지층을 규합하여 집권에 성공한 노무현 정권에게는 참으로 난감한 문제다. 경제위기 하에서 이질적인 지지층으로부터 쏟아져 나오는 불만을 적절히 관리할 수 있는 정치 전망을 제시하기 어려운 것이다. 게다가 최근 양극화 담론을 중심으로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이 내재한 반(反)민중적인 결과들이 사회적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으며, 신자유주의 정책을 주어진 기준으로 삼고 있는 집권세력은 당연히 이런 문제를 해결할 방도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 노무현 정권은 성장잠재력의 약화, 사회양극화의 심화, 저출산․고령화와 같은 새로운 미래 위험요인이 한국경제의 당면 문제라고 명시하면서 각종 처방전을 쏟아내고 있다. 한․미 FTA 또한 이런 미래 위험요인에 대처하는 적극적인 우리의 노력이라고 포장하는데, 개방과 경쟁을 통해 생산성을 제고하고 성장잠재력을 확충하는 제2의 장기 성장 전략, 우리의 모든 역량을 결집하여 한․미 FTA를 우리 경제․사회 시스템 전반을 선진화시키는 계기로 활용할 필요9)등을 주장한다. 제2의 장기 성장 전략인 한․미 FTA는 양국간 교역을 활성화하고 미국은 물론 제3국으로부터 외국인 투자를 증대시킴으로써 성장잠재력을 확보하여 일자리를 창출하는 데 기여할 수 있고, 이는 양극화를 완화하는 데도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정부의 이런 주장이 현실화될 것인지도 미지수이지만, 정부가 현재 한국사회의 위기에 대한 대응을 미국과의 적극적인 경제통합의 방향에서 진행하고 있는 점이 더욱 심각한 문제다. 1997년 IMF 구제금융협약을 통해 신자유주의 개혁을 본격적으로 진행해 온 결과, 이에 적응한 일부 산업과 기업은 주가상승과 수출확대를 통해 팽창에 성공했다. 세계경제의 위기와 한국경제의 장기불황 속에서 한국경제를 지배하고 있는 초민족적 자본과 대자본은 미래의 전망이 결코 밝지 않음을 인식하고 있다. 한․미 FTA는 이런 불안한 상황을 미국과의 경제통합을 심화하여 타개해 나가겠다는 지배세력의 전망을 의미한다. 한․미 FTA가 무역촉진, 외국인 투자 증대 등의 결과를 가져오고, 일부 기업과 산업에게 이득이 되겠지만, 이것의 이면은 민중의 삶과 권리의 파괴다.10) 미국 주도의 금융․군사세계화인가, 민중의 평화와 보편적 권리인가 최근 정태인 전 청와대 국민경제비서관이 노무현 정부의 한․미 FTA를 강하게 비판하면서 화제가 되고 있다. 그의 비판의 핵심 요지는 한국이 강대국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며 동북아 지역의 캐스팅 보트 역할을 통해 영향력을 높일 수 있었으나 FTA 체결로 미국 편에 완전히 들어가면서 기회를 놓쳤다는 것이다. 그는 한․미 FTA를 추진함으로써 노무현 정부가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 시대라는 제1의 국정목표를 사실상 포기했다고 비판한다. 그의 이런 비판은 '청와대 내부에서조차 한․미 FTA를 비판하고 있다는 주장의 근거로 활용되면서, 한․미 FTA를 저지하려는 운동 진영 내에서도 환영받는 분위기다. 그러나 위에서 밝혔듯이 한․미 FTA는 미국의 세계 전략에 적극적으로 조응해 들어가는 것을 자신의 미래로 삼는 한국 정부와 지배세력의 핵심적인 경로다. 여기서 정태인 식 비판은 결코 현재의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를 거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한계적이다.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 시대의 균형자 역할을 하겠다는 참여정부의 목표는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공고히 하는 가운데, 그 영향력에 위협이 되는 갈등과 분쟁을 미국을 대신해 나서서 조정하겠다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정태인은 이런 기본적인 구상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며, 다만 이런 조정자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라도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자 위치를 차지해야 하고, 이를 먼저 추진하면서 미국과의 관계를 발전시켜나가자는 입장이다. 이런 비판은 현재의 핵심적인 쟁점을 가리고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본질에 대한 인식을 가로막는다. 한․미 FTA는 전략적 유연성을 핵심으로 하는 한․미 동맹의 강화와 맞물리면서 동아시아 지역의 명운을 좌우할 중요한 문제다. 미국 주도의 군사․금융세계화에 적극적으로 편입되어 초민족적 자본의 수탈과 착취를 강화하는 메커니즘을 자신의 미래로 짊어질 것인가가 아니면 이를 거부하고 다른 세계로 나아갈 것인가! 바로 이것이 지금 한․미 FTA를 둘러싼 문제의 핵심이다. 민중의 미래와 직결된 사안을 독단적으로 추진하며, 이에 대한 저항을 폭력으로 억압하는 노무현 정권에 대한 전면적 투쟁이 요구된다. 지금 우리에게는 한․미 FTA와 전략적 유연성이 강제하는 미래를 거부하고 민중의 평화와 보편적인 권리가 실현되는 다른 세계를 향한 운동이 절박한 과제인 것이다. 1) 이는 부시 행정부가 체결한 FTA의 숫자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부시 행정부 1기 동안만 10개국과의 FTA가 체결되었는데, 이는 미국이 1985년 이스라엘과 최초로 FTA를 체결한 후 2000년까지 FTA를 체결한 국가가 단 5개국에 불과했던 것과 대비를 이룬다. 본문으로 2) 대표적인 것이 지적재산권 협정이다. 미국은 WTO에서 논의되고 있는 무역관련 지적재산권협정(TRIPs)조차 충분하지 않다고 간주하고 있으며, FTA 협상이 TRIPs 이상의 높은 보호방식(TRIPs-Plus)을 요구하고 관철시켜왔다. 미국이 호주, 싱가포르와 체결한 FTA이 그러했으며, 한․미 FTA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으로 예상된다. 본문으로 3) 2002년, 미 국방성 병력변환국에서 나온 공개정책문서를 보자. 세계화가 심화․확산되면서 두 집단의 국가들이 서로 경쟁한다. 스스로를 내적으로 조정하여 부상하는 세계 규칙에 맞추려고 노력하는 나라들(예를 들어 서방 선진 민주주의 국가들, 푸틴의 러시아, 아시아의 신흥 경제들)과 정치적․문화적 경직성이나 지속적이고 처참한 빈곤으로 인해 그런 국내적 재배치를 거부하거나 달성할 수 없는 나라들(중앙아시아, 중동, 아프리카, 중앙아메리카의 대부분 국가들). 우리는 전자를 세계화의 역동적 중심부(Functioning Core)로, 후자를 통합되지 않은 틈새(Non-Integrating Gap)로 명명한다. (Barnett and Gaffney, 2002.) 본문으로 4) 미국이 모로코, 요르단과 맺은 FTA가 대표적인 사례다. 본문으로 5) 한․미 FTA가 한미 양국에 미치는 경제적 효과와 각 산업별 영향에 대해서는 많은 자료에서 다뤄졌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이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을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한미 FTA 저지 범국민대책위원회>, www.nofta.com을 참조하라. 더불어 한․미 FTA가 한국의 민중들의 삶과 권리에 미칠 영향에 대해 간략하게 분석한 사회진보연대 입장으로는 정지영, 「한․미 FTA를 저지하자!」, 『사회운동』, 2006년 3월호를 참조하라. 본문으로 6) 그 이전 시기, 미국은 동아시아 지역에서 경제적 이익보다는 정치, 군사적 이익을 추구했다. 냉전 시기 미국은 역개방 정책을 통해 자신의 시장을 열어주면서, 미․일 동맹을 기본으로 하여 한국과 대만을 사회주의권에 대한 쇼케이스로 육성했다. 본문으로 7)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과 미국의 새로운 군사전략에 관해서 더 자세한 것은 권태훈, 「미국의 군사전략과 전략적 유연성의 의미」, 『사회운동』, 2006년 5월호를 참조하라. 본문으로 8) 이런 동아시아, 그리고 좀 더 넓게는 동남아시아를 포함한 동아시아․동남아시아의 경제적 협력 방안에 대한 논의가 최근에 처음 등장한 것은 아니다. 1997년 아시아 위기를 계기로 일본은 엔화를 중심으로 하는 아시아통화기금을 제안하며 화폐동맹을 결성하려는 시도를 한 바 있다. 하지만 이 구상은 미국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좌절되고, 이후 미․일 동맹은 더욱 강화된다.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지역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을 유지․심화하고자 하는 미국은 APEC, FTA 등을 구상한다. APEC은 미․일 동맹을 중심으로 아시아 지역에서의 경제적 주도권을 강화하고 중국을 견제하려는 미국의 개방적 지역주의 전략을 내포한 것이었다. 본문으로 9) 관계부처합동, 「한미 FTA Q&A: 최근 비판론을 중심으로」, 2006, 4, 21. 본문으로 10) 일부의 분석에 따르면 한․미 FTA의 핵심 쟁점이 개성공단 상품의 원산지 규정문제라고 한다. 이는 애초에 노무현 정부의 의도가 FTA와 전략적 유연성을 주고 한반도 문제(특히 개성공단)를 받아내자는 것이었으며, 따라서 만약 미국이 개성공단 상품을 인정하지 않으면 노무현 정부도 FTA를 철회할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첫째, 개성공단에서 상품을 생산하는 것은 주로 중소기업이며, 대기업과 초민족적 자본의 입장에서 개성공단 문제가 한․미 FTA를 좌초시킬 정도로 중요한가, 둘째, 지난해 위폐와 마약과 같이 북한의 불법거래자금을 차단하고 나서면서 강경한 태도를 취했던 미국이 북한에 달러가 유입될 수 있는 하나의 경로인 개성공단 문제를 인정할 것인가 등의 문제를 고려해 본다면, 이런 주장은 적절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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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3일 한․미 양국 정부는 한․미 FTA 협상 개시를 선언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한․미 FTA에 정권의 명운을 건 듯, 어떠한 반대를 무릅쓰고서라도 임기 내에 체결을 완료하겠다고 공언했다. 이에 앞서 한․미 양국은 전 세계 주둔 미군을 새로운 유형의 전쟁 및 분쟁에 신속하게 투입될 수 있도록 재편하는 ‘전략적 유연성’에 합의했다. 미국의 새로운 군사전략에 조응하도록 주한미군을 재편하고 한․미․일 삼각동맹을 공고히 하여 동아시아 지역에서의 초민족 금융자본의 이윤창출에 안전성을 꾀하는 한 편, 한․미 FTA를 체결함으로써 한국의 경제․사회 전반에 미국식 기준을 확산하여 초민족 자본의 권한을 극대화하고, ‘서비스산업’을 전략산업으로 첨단화함으로써 금융세계화에 더욱 깊숙하게 편입하겠다는 것이 바로 노무현 정부의 ‘비전’이다. 벌써부터 노무현 정부는 주한미군 재편 계획의 일환인 평택 미군기지 확장 사업을 진행하면서 지역주민의 저항을 무력화하기 위해 군대를 투입하는 등 무자비한 폭력을 동원하여 민중의 생존권과 주권을 짓밟고 있다. 노무현 정부의 ‘비전’이 몰고 올 파괴적인 효과는 이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한반도의 전쟁기지화, 농업․농촌의 붕괴, 빈곤의 심화, 노동권․여성권․건강권․교육권 등 민중의 권리의 파괴로 민중의 삶의 위기는 더욱 증폭될 것이다. 이에, 평택미군기지 확장저지를 위한 투쟁이 전국적인 투쟁으로 확산되고 있으며, [한․미 FTA 저지 범국민 운동본부]가 결성되는 등 한․미 FTA 협상을 저지하기 위한 투쟁 또한 본격화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세계적인 민중 삶의 위기를 야기하는 ‘금융․군사세계화’에 맞서 강력하게 분출하고 있는 ‘대안세계화운동’의 관점에서 한․미 FTA 반대투쟁의 의미와 방향을 짚어보고자 한다.
‘금융․군사세계화’ Vs. '대안세계화‘
1970년대부터 전 세계를 휩쓴 경제위기에 대한 해법으로 등장한 ‘금융세계화’는 자본의 위기를 민중에게 전가하는 과정이다. IMF, 세계은행, WTO와 같은 국제적인 금융․무역기구들은 금융자본의 활동 영역을 넓히는 한편, 국경을 초월한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하는 일련의 조치를 취하고 있다. 각 국에서 폭발한 외채․외환위기를 매개로 도입된 IMF․세계은행의 구조조정 프로그램, 2001년 개시되어 현재까지 협상이 진행 중인 ‘도하개발의제’가 그것이다. 최근에는 신자유주의적 경제통합을 꾀하는 양자간․지역별 자유무역협정(FTA)이 확산되고 있다. 이러한 조치들은 정확하게 민중의 권리를 공격하며 세계의 부와 자원을 자본주의 중심부로 집중시키는 효과를 낳고 있어서, 이에 대한 불만과 저항은 점차 커지고 있다. 또한 미국의 압도적인 군사력은 세계화의 이익을 방어하고 저항을 무력화하는 바탕이 된다. 즉, 현재의 금융세계화는 군사력에 의해 뒷받침되며 전쟁과 폭력을 동반한다.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아시아 각 국의 노동자, 농민, 여성, 원주민, 이주노동자들은 이러한 위기에 대한 국가들의 무기력을 넘어 인민의 권리를 자율적으로 실현하고 공동체와 사회를 재건하며, 사회․경제적인 변혁을 추동하는 운동을 조직하고 있다. 이러한 운동들은 퇴행적인 ‘국수주의’, 코퍼러티즘에 기반을 둔 ‘인간의 얼굴을 한 세계화’와 구별되는 ‘대안세계화’라는 이념을 형성하고 있다. 1999년, 우루과이 라운드의 뒤를 잇는 새로운 무역라운드가 출범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세계 곳곳에서 다양한 사회운동들이 시애틀에 결집했을 때, 지배계급과 주류언론은 이를 두고 ‘세계화라는 대세를 거스르는 시대착오적인 세력들’이라며 ‘목표와 지향이 불분명하여 곧 사그라질 흐름’이라고 폄하했다. 하지만 시애틀 투쟁 이후 이러한 사회운동들의 국제적인 연대는 더욱 강력해지고 있으며, 2001년 등장한 ‘세계사회포럼(WSF)’을 매개로 하여 약탈과 파괴를 획책하는 ‘금융․군사세계화’를 거부하고, 민중의 권리에 바탕을 둔 대안적인 전망을 제출하기에 이르렀다.
싸빠띠스따 민족해방군의 무장봉기에서 세계사회포럼까지: 대안세계화운동의 흐름 개괄
대안세계화운동이 세계적인 흐름으로 성장하게 된 과정을 주요한 계기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1994년 1월 1일 개시된 멕시코 싸빠띠스따 민족해방군의 무장봉기를 그 발단으로 볼 수 있다. 이 날은 미국, 멕시코, 캐나다 사이에 체결된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 발효된 날로, 싸빠띠스따 민족해방군은 이 날을 기점으로 멕시코의 뿌리 깊은 사회 구조적 모순과 NAFTA로 가시화 된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폭력에 대한 저항을 선언했다. NAFTA를 체결하기 위해 멕시코 정부는 1917년부터 지속해온 토지공유제인 ‘에히도(Ejido)'를 폐지했다.1) 이는 곧 원주민들의 삶의 터전과 자치권의 파괴를 의미하는 것이었고, 싸빠띠스따 민족해방군의 봉기는 이에 연원한다. 이들은 투쟁의 과정에서 멕시코 정부의 언론 통제를 통한 고립작전에 맞서기 위해 인터넷을 통해 자신들의 투쟁을 세계에 알려냈으며, 1996년 7월에는 자신들의 근거지 정글에서 국제적인 회합을 개최했다. 이 회합은 싸빠띠스따의 투쟁을 국제적인 쟁점으로 만들어내고, 또한 세계 곳곳에서 벌어진 신자유주의 반대투쟁을 연결시키는 데 기여했다.2)
1998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내에서 추진된 다자간투자협정(MAI)은 싸빠띠스따 무장봉기 이후 다시 한 번 세계적인 공동행동을 촉발했다. 이 협정이 사회운동들의 타깃이 된 이유는, ‘단기성 투기자본’까지 투자로 간주하는 등 투자의 범위를 넓게 정의하고, 투자자에 대한 보호를 강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계의 사회운동들은 이를 ‘초국적 자본을 위한 권리 헌장’으로 규정하고, 이 협정 체결에 반대하는 투쟁을 전개했다. 뉴질랜드 원주민인 마오리족의 투쟁을 비롯하여, 호주, 미국, 유럽 곳곳에서 이 협정에 반대하는 투쟁이 진행되었다. 사회운동들은 이러한 흐름을 모아 1998년 10월 파리에서 ‘MAI 반대 국제민중정상회담’을 개최하고, 국제상공회의소를 점거하는 투쟁을 전개했다. 이러한 투쟁의 성과로 프랑스와 캐나다가 이 협정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혀 결국 OECD 내에서 ‘투자자유화 협정’을 체결하려던 시도는 좌초되었다.3) 이 투쟁을 계기로 ‘초국적 투기자본에 대한 통제’는 사회운동의 중요한 쟁점이 되었다.
MAI 반대투쟁의 경험은 1999년 시애틀 투쟁으로 이어진다. 시애틀 3차 WTO 각료회의는 우루과이라운드의 뒤를 잇는 WTO 뉴라운드의 출범을 목표로 했다. 우루과이 라운드가 공산품뿐만 아니라 농업과 서비스를 WTO 내의 이슈로 포괄해 내었다면, 뉴라운드에서는 이 두 분야에 대한 구체적인 무역자유화 방안과 투자자유화, 지적재산권 강화 등 새로운 의제를 포함시켜 WTO의 활동범위를 확대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이 계획은 이른바 ‘시애틀 전투’로 인해 보기 좋게 무산되었고, 이는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투쟁의 굵직한 획을 긋는 사건이 되었다. 그러나 당시까지만 해도 ‘북반구 NGO를 중심으로 하는 회담장 내 로비전략(장내전략)’과 ‘사회운동․대중조직들의 대중투쟁(장외전략)’ 중 어느 쪽이 중심인지 분명하지 않았고, 제기된 요구도 너무 다양해서 어느 한 쪽으로 수렴되기도 힘들었다. 미국노총(AFL-CIO)은 중국의 WTO 가입으로 미국보다 노동기준이 낮은 중국노동자들과 미국노동자들이 ‘밑바닥을 향한 경쟁’을 하게 되어, 미국의 노동조건이 ‘하향평준화’할 것이라며 ‘중국의 WTO 가입 반대’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또한 WTO 협정 안에 ‘무역기준’과 관련된 조항을 포함시키자는 주장을 내걸었다. ‘밑바닥을 향한 경쟁’을 일정정도 완화하여 ‘일자리’를 보호하려는 의도였다. 또한 환경단체들은 마찬가지로 WTO 협정 안에 ‘환경기준’을 포함시키자는 주장을 하였다. 여기에다 ‘자유무역’을 통한 개발의 혜택이 전 세계로 확대되어야 한다는 ‘개도국 및 최빈국’ 정부의 주장까지 더해져, 시애틀 투쟁은 ‘지향이 불분명한 투쟁’으로 묘사되었으며, 다양한 운동들의 ‘무지개 동맹’이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각 국 각료들의 발을 묶어 회의에 참가하지 못하게 해 결국 ‘각료회의 무산’이라는 결과를 이끌어냈던 직접행동은 그 뒤 프라하, 제노바에서도 재현되었다. 또한 ‘자유무역이 빈국의 발전을 가져올 것’이라는 선동에 대한 세계 민중의 의심은 더욱 커졌다.
2001년 1월에는 세계사회포럼이 시작되었다. 시애틀, 워싱턴 등지에서 일어난 국제적인 시위의 성과를 모아내고, 이를 계기로 새롭게 형성된 사회운동들이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분석과 전망을 공유하여 이를 뛰어넘는 대안을 모색하고자 한 것이다. 1차 세계사회포럼 당시 ‘시애틀 3차 WTO 각료회의 반대투쟁 이후 성장해 온 운동들’이라고 밝힌 여러 조직들이 주축이 되어 ‘세계사회운동총회’가 개최되었는데, 이 회의는 매년 개최되어 세계 사회운동이 집중해야 할 시급한 과제들을 밝히고, 국제적인 공동 행동을 조정하고 이에 대한 결의를 모으는 역할을 해왔다. 2003년 3회 세계사회포럼에서는 세계 사회운동들의 교류와 소통을 상시적으로 이루어내자는 취지에서 ’세계사회운동네트워크'를 건설하게 된다.4) 그 이후에 벌어진 2001년 6월 제노바 G8 정상회의 반대투쟁, 2002년 이라크 침공 직전에 열렸던 2․15 국제반전공동행동 등은 바로 ‘세계사회운동총회’를 매개로 조직되고 조정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조직된 2003년 칸쿤 5차 WTO 각료회의 저지투쟁, 2005년 홍콩 6차 WTO 각료회의 저지투쟁은 시애틀 투쟁과 몇 가지 점에서 다른 양상을 보였다. 우선, 회담장 안에서 개도국․최빈국 정부를 지렛대 삼아 협상의 방향을 트는 전술보다는 장외에서 대중적인 직접행동을 펼치는 전술이 더욱 중심에 놓이게 되었다. 또한 ‘무역협정 내 노동․환경 기준 마련’보다 ‘WTO 도하개발의제 협상 중단’이 중심적인 주장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초국적 자본의 활동의 자유를 보장하는 조처들이 공격하는 민중의 제반 권리를 옹호하는 것이 투쟁의 목표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에, 식량주권, 토지․종자․농업지식에 대한 농민의 권리 확대, 물, 에너지, 교육, 보건의료, 문화에 대한 상품화/사유화 반대, 지적재산권 확대 반대 - 의약품 접근성 확대, 이주자 상품화 반대 - 이주노동자의 노동권․시민권 확대 등의 요구가 제기되었다.
시애틀 투쟁을 계기로 사회운동이 다시금 활발해지고, '도하개발의제‘라는 새로운 무역협상라운드에 반대하는 투쟁이 거세짐에 따라, WTO 도하개발의제 협상은 커다란 진척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이에 미국을 비롯한 중심부 국가들은 WTO를 통한 협상을 계속해서 추진하는 한편, 이러한 다자간 협상보다 훨씬 체결이 용이한 양자간, 지역별 협정을 병행하여 추진하는 전략을 택하고 있다. 미국은 NAFTA의 범위를 미주대륙 전체로 확장하는 ‘전미자유무역협정(FTAA)' 체결을 시도하고 있으며, 에콰도르, 볼리비아, 콜롬비아, 태국, 한국 등 개별 국가와의 양자간 협정을 추진하고 있다. 이러한 양자간․지역별 자유무역협정 또한 사회운동들의 의제가 되었으며, 대륙을 아우르는 ’지역 연대‘가 이러한 협정을 매개로 하여 형성되고 있다. 이러한 지역 연대가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곳은 미주대륙이다. 이 지역의 사회운동들은 <미주사회동맹>(Hemisperic Social Alli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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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3일 한․미 양국 정부는 한․미 FTA 협상 개시를 선언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한․미 FTA에 정권의 명운을 건 듯, 어떠한 반대를 무릅쓰고서라도 임기 내에 체결을 완료하겠다고 공언했다. 이에 앞서 한․미 양국은 전 세계 주둔 미군을 새로운 유형의 전쟁 및 분쟁에 신속하게 투입될 수 있도록 재편하는 ‘전략적 유연성’에 합의했다. 미국의 새로운 군사전략에 조응하도록 주한미군을 재편하고 한․미․일 삼각동맹을 공고히 하여 동아시아 지역에서의 초민족 금융자본의 이윤창출에 안전성을 꾀하는 한 편, 한․미 FTA를 체결함으로써 한국의 경제․사회 전반에 미국식 기준을 확산하여 초민족 자본의 권한을 극대화하고, ‘서비스산업’을 전략산업으로 첨단화함으로써 금융세계화에 더욱 깊숙하게 편입하겠다는 것이 바로 노무현 정부의 ‘비전’이다. 벌써부터 노무현 정부는 주한미군 재편 계획의 일환인 평택 미군기지 확장 사업을 진행하면서 지역주민의 저항을 무력화하기 위해 군대를 투입하는 등 무자비한 폭력을 동원하여 민중의 생존권과 주권을 짓밟고 있다. 노무현 정부의 ‘비전’이 몰고 올 파괴적인 효과는 이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한반도의 전쟁기지화, 농업․농촌의 붕괴, 빈곤의 심화, 노동권․여성권․건강권․교육권 등 민중의 권리의 파괴로 민중의 삶의 위기는 더욱 증폭될 것이다. 이에, 평택미군기지 확장저지를 위한 투쟁이 전국적인 투쟁으로 확산되고 있으며, [한․미 FTA 저지 범국민 운동본부]가 결성되는 등 한․미 FTA 협상을 저지하기 위한 투쟁 또한 본격화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세계적인 민중 삶의 위기를 야기하는 ‘금융․군사세계화’에 맞서 강력하게 분출하고 있는 ‘대안세계화운동’의 관점에서 한․미 FTA 반대투쟁의 의미와 방향을 짚어보고자 한다.
‘금융․군사세계화’ Vs. '대안세계화‘
1970년대부터 전 세계를 휩쓴 경제위기에 대한 해법으로 등장한 ‘금융세계화’는 자본의 위기를 민중에게 전가하는 과정이다. IMF, 세계은행, WTO와 같은 국제적인 금융․무역기구들은 금융자본의 활동 영역을 넓히는 한편, 국경을 초월한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하는 일련의 조치를 취하고 있다. 각 국에서 폭발한 외채․외환위기를 매개로 도입된 IMF․세계은행의 구조조정 프로그램, 2001년 개시되어 현재까지 협상이 진행 중인 ‘도하개발의제’가 그것이다. 최근에는 신자유주의적 경제통합을 꾀하는 양자간․지역별 자유무역협정(FTA)이 확산되고 있다. 이러한 조치들은 정확하게 민중의 권리를 공격하며 세계의 부와 자원을 자본주의 중심부로 집중시키는 효과를 낳고 있어서, 이에 대한 불만과 저항은 점차 커지고 있다. 또한 미국의 압도적인 군사력은 세계화의 이익을 방어하고 저항을 무력화하는 바탕이 된다. 즉, 현재의 금융세계화는 군사력에 의해 뒷받침되며 전쟁과 폭력을 동반한다.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아시아 각 국의 노동자, 농민, 여성, 원주민, 이주노동자들은 이러한 위기에 대한 국가들의 무기력을 넘어 인민의 권리를 자율적으로 실현하고 공동체와 사회를 재건하며, 사회․경제적인 변혁을 추동하는 운동을 조직하고 있다. 이러한 운동들은 퇴행적인 ‘국수주의’, 코퍼러티즘에 기반을 둔 ‘인간의 얼굴을 한 세계화’와 구별되는 ‘대안세계화’라는 이념을 형성하고 있다. 1999년, 우루과이 라운드의 뒤를 잇는 새로운 무역라운드가 출범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세계 곳곳에서 다양한 사회운동들이 시애틀에 결집했을 때, 지배계급과 주류언론은 이를 두고 ‘세계화라는 대세를 거스르는 시대착오적인 세력들’이라며 ‘목표와 지향이 불분명하여 곧 사그라질 흐름’이라고 폄하했다. 하지만 시애틀 투쟁 이후 이러한 사회운동들의 국제적인 연대는 더욱 강력해지고 있으며, 2001년 등장한 ‘세계사회포럼(WSF)’을 매개로 하여 약탈과 파괴를 획책하는 ‘금융․군사세계화’를 거부하고, 민중의 권리에 바탕을 둔 대안적인 전망을 제출하기에 이르렀다.
싸빠띠스따 민족해방군의 무장봉기에서 세계사회포럼까지: 대안세계화운동의 흐름 개괄
대안세계화운동이 세계적인 흐름으로 성장하게 된 과정을 주요한 계기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1994년 1월 1일 개시된 멕시코 싸빠띠스따 민족해방군의 무장봉기를 그 발단으로 볼 수 있다. 이 날은 미국, 멕시코, 캐나다 사이에 체결된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 발효된 날로, 싸빠띠스따 민족해방군은 이 날을 기점으로 멕시코의 뿌리 깊은 사회 구조적 모순과 NAFTA로 가시화 된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폭력에 대한 저항을 선언했다. NAFTA를 체결하기 위해 멕시코 정부는 1917년부터 지속해온 토지공유제인 ‘에히도(Ejido)'를 폐지했다.1) 이는 곧 원주민들의 삶의 터전과 자치권의 파괴를 의미하는 것이었고, 싸빠띠스따 민족해방군의 봉기는 이에 연원한다. 이들은 투쟁의 과정에서 멕시코 정부의 언론 통제를 통한 고립작전에 맞서기 위해 인터넷을 통해 자신들의 투쟁을 세계에 알려냈으며, 1996년 7월에는 자신들의 근거지 정글에서 국제적인 회합을 개최했다. 이 회합은 싸빠띠스따의 투쟁을 국제적인 쟁점으로 만들어내고, 또한 세계 곳곳에서 벌어진 신자유주의 반대투쟁을 연결시키는 데 기여했다.2)
1998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내에서 추진된 다자간투자협정(MAI)은 싸빠띠스따 무장봉기 이후 다시 한 번 세계적인 공동행동을 촉발했다. 이 협정이 사회운동들의 타깃이 된 이유는, ‘단기성 투기자본’까지 투자로 간주하는 등 투자의 범위를 넓게 정의하고, 투자자에 대한 보호를 강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계의 사회운동들은 이를 ‘초국적 자본을 위한 권리 헌장’으로 규정하고, 이 협정 체결에 반대하는 투쟁을 전개했다. 뉴질랜드 원주민인 마오리족의 투쟁을 비롯하여, 호주, 미국, 유럽 곳곳에서 이 협정에 반대하는 투쟁이 진행되었다. 사회운동들은 이러한 흐름을 모아 1998년 10월 파리에서 ‘MAI 반대 국제민중정상회담’을 개최하고, 국제상공회의소를 점거하는 투쟁을 전개했다. 이러한 투쟁의 성과로 프랑스와 캐나다가 이 협정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혀 결국 OECD 내에서 ‘투자자유화 협정’을 체결하려던 시도는 좌초되었다.3) 이 투쟁을 계기로 ‘초국적 투기자본에 대한 통제’는 사회운동의 중요한 쟁점이 되었다.
MAI 반대투쟁의 경험은 1999년 시애틀 투쟁으로 이어진다. 시애틀 3차 WTO 각료회의는 우루과이라운드의 뒤를 잇는 WTO 뉴라운드의 출범을 목표로 했다. 우루과이 라운드가 공산품뿐만 아니라 농업과 서비스를 WTO 내의 이슈로 포괄해 내었다면, 뉴라운드에서는 이 두 분야에 대한 구체적인 무역자유화 방안과 투자자유화, 지적재산권 강화 등 새로운 의제를 포함시켜 WTO의 활동범위를 확대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이 계획은 이른바 ‘시애틀 전투’로 인해 보기 좋게 무산되었고, 이는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투쟁의 굵직한 획을 긋는 사건이 되었다. 그러나 당시까지만 해도 ‘북반구 NGO를 중심으로 하는 회담장 내 로비전략(장내전략)’과 ‘사회운동․대중조직들의 대중투쟁(장외전략)’ 중 어느 쪽이 중심인지 분명하지 않았고, 제기된 요구도 너무 다양해서 어느 한 쪽으로 수렴되기도 힘들었다. 미국노총(AFL-CIO)은 중국의 WTO 가입으로 미국보다 노동기준이 낮은 중국노동자들과 미국노동자들이 ‘밑바닥을 향한 경쟁’을 하게 되어, 미국의 노동조건이 ‘하향평준화’할 것이라며 ‘중국의 WTO 가입 반대’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또한 WTO 협정 안에 ‘무역기준’과 관련된 조항을 포함시키자는 주장을 내걸었다. ‘밑바닥을 향한 경쟁’을 일정정도 완화하여 ‘일자리’를 보호하려는 의도였다. 또한 환경단체들은 마찬가지로 WTO 협정 안에 ‘환경기준’을 포함시키자는 주장을 하였다. 여기에다 ‘자유무역’을 통한 개발의 혜택이 전 세계로 확대되어야 한다는 ‘개도국 및 최빈국’ 정부의 주장까지 더해져, 시애틀 투쟁은 ‘지향이 불분명한 투쟁’으로 묘사되었으며, 다양한 운동들의 ‘무지개 동맹’이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각 국 각료들의 발을 묶어 회의에 참가하지 못하게 해 결국 ‘각료회의 무산’이라는 결과를 이끌어냈던 직접행동은 그 뒤 프라하, 제노바에서도 재현되었다. 또한 ‘자유무역이 빈국의 발전을 가져올 것’이라는 선동에 대한 세계 민중의 의심은 더욱 커졌다.
2001년 1월에는 세계사회포럼이 시작되었다. 시애틀, 워싱턴 등지에서 일어난 국제적인 시위의 성과를 모아내고, 이를 계기로 새롭게 형성된 사회운동들이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분석과 전망을 공유하여 이를 뛰어넘는 대안을 모색하고자 한 것이다. 1차 세계사회포럼 당시 ‘시애틀 3차 WTO 각료회의 반대투쟁 이후 성장해 온 운동들’이라고 밝힌 여러 조직들이 주축이 되어 ‘세계사회운동총회’가 개최되었는데, 이 회의는 매년 개최되어 세계 사회운동이 집중해야 할 시급한 과제들을 밝히고, 국제적인 공동 행동을 조정하고 이에 대한 결의를 모으는 역할을 해왔다. 2003년 3회 세계사회포럼에서는 세계 사회운동들의 교류와 소통을 상시적으로 이루어내자는 취지에서 ’세계사회운동네트워크'를 건설하게 된다.4) 그 이후에 벌어진 2001년 6월 제노바 G8 정상회의 반대투쟁, 2002년 이라크 침공 직전에 열렸던 2․15 국제반전공동행동 등은 바로 ‘세계사회운동총회’를 매개로 조직되고 조정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조직된 2003년 칸쿤 5차 WTO 각료회의 저지투쟁, 2005년 홍콩 6차 WTO 각료회의 저지투쟁은 시애틀 투쟁과 몇 가지 점에서 다른 양상을 보였다. 우선, 회담장 안에서 개도국․최빈국 정부를 지렛대 삼아 협상의 방향을 트는 전술보다는 장외에서 대중적인 직접행동을 펼치는 전술이 더욱 중심에 놓이게 되었다. 또한 ‘무역협정 내 노동․환경 기준 마련’보다 ‘WTO 도하개발의제 협상 중단’이 중심적인 주장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초국적 자본의 활동의 자유를 보장하는 조처들이 공격하는 민중의 제반 권리를 옹호하는 것이 투쟁의 목표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에, 식량주권, 토지․종자․농업지식에 대한 농민의 권리 확대, 물, 에너지, 교육, 보건의료, 문화에 대한 상품화/사유화 반대, 지적재산권 확대 반대 - 의약품 접근성 확대, 이주자 상품화 반대 - 이주노동자의 노동권․시민권 확대 등의 요구가 제기되었다.
시애틀 투쟁을 계기로 사회운동이 다시금 활발해지고, '도하개발의제‘라는 새로운 무역협상라운드에 반대하는 투쟁이 거세짐에 따라, WTO 도하개발의제 협상은 커다란 진척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이에 미국을 비롯한 중심부 국가들은 WTO를 통한 협상을 계속해서 추진하는 한편, 이러한 다자간 협상보다 훨씬 체결이 용이한 양자간, 지역별 협정을 병행하여 추진하는 전략을 택하고 있다. 미국은 NAFTA의 범위를 미주대륙 전체로 확장하는 ‘전미자유무역협정(FTAA)' 체결을 시도하고 있으며, 에콰도르, 볼리비아, 콜롬비아, 태국, 한국 등 개별 국가와의 양자간 협정을 추진하고 있다. 이러한 양자간․지역별 자유무역협정 또한 사회운동들의 의제가 되었으며, 대륙을 아우르는 ’지역 연대‘가 이러한 협정을 매개로 하여 형성되고 있다. 이러한 지역 연대가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곳은 미주대륙이다. 이 지역의 사회운동들은 <미주사회동맹>(Hemisperic Social Alliance),
경계와 새로운 동맹, 더 큰 영향력을 모색하다(2)
<번역: 정지영(정책편집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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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대중권력, 여성의 권리
페미니스트들은 가부장제의 측면에서 국가권력의 문제와 씨름한다. 이들은 국가를 가부장적 관계의 집행자로 비판하는 동시에 국가가 여성권과 더 넓은 사회적 요구를 실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페미니스트들은 가부장적 관계를 되풀이했던 소위 사회주의 국가(또는 좌파 정당)에서 쓰라린 경험을 했지만, 여전히 사회적 욕구와 권리의 중요한 중재자로서 변화된, 평등주의적인 국가의 역할을 상정하고 있다.
다양한 형태와 접근 방식을 통해 자본이 강요하는 조건에 맞서 대중 권력을 (일국적, 지역적, 국제적 수준에서) 수립하는 것이 단기적인 임무다. 이는 거리의 활동가들의 강경파적 입장을 넘어 대안을 놓고 국가와 협상할 수 있는 조직들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 그것이 정당이건 사회운동이건 이러한 조직들은 대중적인 책임감과 진보적인 사회 변화를 위한 명확한 대안을 지녀야 한다. 또한 이들은 국가와 사회뿐만 아니라 자신들 내부의 가부장적 관계를 다뤄야 한다. 이런 지도력이 없다면 종교적 근본주의를 향한 경향이 강화될 것이다.
싸파티스타와 브라질 노동자당은 이와 관련된 흥미로운 사례다. 토착 농민 운동인 싸파티스타는 특정한 정치적, 경제적 계획을 강제하는 국가의 능력에 도전하고 있다. 이들은 또한 농민 대중을 조직하고 교육하며, 정부와 협상하고, 심지어 일부 지도자들은 페미니즘의 의제를 제기한다! 그리고 룰라의 노동자당은 세계 자본이 브라질에 부과한 제한적인 조건에도 불구하고 칸쿤 WTO 각료회담에서 미국과 유럽연합에 도전하기 위해 남반구 국가들을 조직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또한 미국이 지배하는 지역 무역 협상(전미자유무역협정)에 맞서 라틴아메리카 무역 블록을 구축하려고 한다.
자본을 대리하는 국가의 행위에 대항하는 일국적 차원의 조직화가 계속되는 동안, "세계정의운동"은 세계적인 자본주의 기구들(IMF, 세계은행, WTO, 다보스포럼, G-8)의 정당성에 도전해왔다. 이는 일국적인 승리가 초민족적 자본과 이의 정치적 대행자들에 의해 약화되는 상황에서 필수적이다. 남반구 각 국에서 민족 자본에 도전하는 것과 제국주의의 공세에 맞서 민족주의적 입장을 취하는 것 사이의 줄타기는 복잡하며, 때로는 잘못된 상대와 동침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세계사회포럼(WSF)은 대안적 전략을 수립하기 위한 공간을 창출하려고 한다. 이 포럼을 만들어 내는 데 주도력을 발휘했던 비정부기구(NGO)가 "구좌파"의 악습, 특히 젠더ㅁ인종ㅁ참여민주주의 사안들을 둘러싼 악습에 어떻게 도전할 것인가, 동시에 권력에 대항할 잠재력을 지닌 대중적인 사회운동에 어떻게 뿌리를 내릴 것인가는 핵심적인 문제로 남아있다.
페미니스트들에게 추가되는 과제는 가부장제에 관한 분석을 신자유주의 세계화 비판에 어떻게 통합시킬 것인가이다. 2001년 1차 WSF에서 페미니스트들은 WSF의 조직자들로 하여금 지도부의 구조에서 "젠더 및 지역 균형이라는 민주적인 원칙을 실천하도록" 요구하는 성명서를 채택했다. 2차 WSF(2002년)에서 WSF 국제위원회의 일원인 <새로운 시대 여성을 위한 발전대안>(DAWN)은 동료들에게 다음과 같이 호소했다. "1980년대 중반부터 우리는 세계화와 근본주의의 상호 결합에서 제기되는 문제들, 그리고 그것이 여성의 삶, 권리, 힘, 자유에 미치는 악영향과 씨름해왔다. … WSF가 모든 지역의 여성에게 영향을 미치는 다층적인 세력들의 역설과 직접 대면하고 이를 처리하지 않는다면, 매우 민주적인 세계 시민사회의 공간으로서 WSF가 지니는 의미와 정치적인 지배력 그리고 활력을 상실할지도 모른다."1)
WSF의 "남성" 지도부는 대체로 여성들의 관심사를 여전히 "추가되는" 문제로 간주한다. WSF 국제위원회에 약간의 페미니스트 조직이 참여하고, 지방 조직위원회에는 조금 더 많은 수가 참여하고 있지만, 다른 조직들이 자신을 대표해서 여성대표 또는 페미니스트를 파견하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러나 이제 WSF가 최초로 아시아로 이동하자 인도의 페미니스트들은 2004년 WSF의 주요 행사들에 가부장제 비판을 통합시키고, 여기에서 여성과 남성의 지도부의 균형을 맞추는 데 상당한 진전을 이뤘다. 이들의 성과 이면에는 라틴 아메리카 자매들의 3년 동안의 기초 작업이 있었다.
"젠더 정의", "경제 정의"
2003년은 유엔 비엔나세계인권회의2)가 10주년을 맞는 해였다. 이 회의는 "여성권은 인권이다"라는 관념을 국제적 협정에서 성문화한 세계 여성운동의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유엔 세계인권선언과 경제ㅁ사회ㅁ문화적 권리뿐만 아니라 정치적ㅁ시민적 권리에 관한 규약에서 구체화된 인권은 정치적 권리와 경제적 권리 모두를 포함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러한 국제법은 서구는 정치적 권리를, 동구는 경제적 권리를 우선시했던 냉전 시대의 희생물이었다.3)
모든 인권의 분할 불가능성을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초기(1993)의 여성 인권운동은 여성에 대한 폭력, 재생산의 권리, 성적 권리, 육체적 완전성의 사안들, 즉 "젠더 정의"를 강조했다. 이는 많은 페미니스들이 여성에 대한 폭력 및 여성의 자신의 육체에 대한 통제의 문제를 페미니즘 의제의 근본 문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스리니바산(Bina Srinivasan)이 지적한 것처럼, 이런 문제는 다른 운동들이 계속해서 다루지 못하는 것들이다. 폭력에 집중하는 페미니스트들은 세계적인 경제 문제가 여성의 삶에서 차지하는 중요성도 언급하지만 이러한 의제는 소극적으로 다루는 경향이 있다. 마찬가지로 경제 발전과 관련된 활동을 하는 여성들은 최근까지 성적 권리 및 재생산의 권리를 경시했으며 인권이라는 틀을 무시했다.
베이징행동강령(1995)은 지난 10년 동안 세계 여성을 조직하는 중심 프로그램이 되었다. 이것은 세계 여성운동의 중대한 성과지만 한계 역시 지닌다. 이것은 세계화 시대의 여성 빈곤에 대한 미시적 대응뿐만 아니라 폭력, 육체적 완전성, 자원에 대한 동등한 접근 등의 사안에서 강력하다. 그러나 여성들이 직면하는 다양한 억압 및 여성 빈곤의 체계적 원인, 특히 신자유주의적 법인기업의 의제를 다루는 데는 취약하다. 유엔 심의에서 G-8이 지닌 힘을 감안하면 이는 별로 놀랍지 않다. 2000년과 2005년의 공식적인 평가를 보면, 여성 활동가들은 베이징행동강령이 좀 더 확장되기를 원하면서도 이를 침해하는 우익의 공격에는 대항하는 등 조심스런 입장에 처해있다.
베이징에서 페미니스트들의 폭력을 둘러싼 사안과 거시 경제적 문제에 관한 차별적인 강조는 클린턴 (주도적인 "페미니스트"인 힐러리와 함께)이 제시한 강력한 제안들로 인해 더욱 심화되었고, 유럽의 여성들은 G-8의 제국주의는 도외시하면서 폭력 반대 투쟁과 미시적 계획을 옹호하는 관료들을 선출했다. 많은 여성 집단, 특히 북반구의 여성 집단들로만 한정되지 않는 이들이 이러한 협소한 의제를 열렬히 환영했다.
센(Gita Sen)과 코레아(Sonia Correa)는 정부와 여성 NGO 내의 이러한 이분법이 여성들 스스로 겪고 있는 의제에 관한 실질적 혼란을 반영한다고 지적한다. 1980~90년대에 많은 여성들이 노동시장에 진입했다. 그 결과 때로는 여성들이 집이나 지역 공동체에서 더 많은 자율성을 획득하기도 했고, 때로는 훨씬 큰 노동 부담과 작업장 통제로 인해 자율성을 잃기도 했다. 센과 코레아는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이런 모순은 더 많은 개인적 자율성을 위한 여성의 투쟁이 더욱 공정하고 평등한 경제 질서를 위한 그들의 관심 및 요구와 간단히 또는 쉽게 맞물리지 않음을 의미한다. 여성의 역설은 한편으로 세계화된 세계경제를 지지하고 촉진하는 이들이 종종 전통적인 가부장적 질서의 붕괴를 지지하는 이들이라는 점이다. 다른 한편으로 세계화에 반대하는 이들 중 일부는 여성을 강력하게 억압하는 가치와 통제 체계의 이름으로 그렇게 한다.4)
1980~90년대 신자유주의 의제가 미친 영향은 남반구와 북반구의 분할을 더욱 심화시키고 남반구의 협상력을 약화시켰다. "이런 분위기에서 여성권을 옹호하는 의제에 반대하는 바티칸 및 남반구 국가로 이루어진 소규모 집단 등 도덕적 보수주의 집단은 남반구의 옹호자로 등장하려고 체계적으로 시도했다."5) 이는 남반구에 대한 신자유주의 지배를 강화하는 가운데 제한적으로 정의된 "여성권"을 옹호하는 북반구의 국가들과 북반구의 경제적 지배에 대항하는 싸움을 이끄는 한편 "여성권"을 침해하는 일부 남반구 국가들 사이의 분열을 첨예하게 만들었다. 이런 싸움에서 여성권은 또 다시 모호해졌다.
센과 코레아는 북반구와 남반구의 페미니스트들이 이 같은 유엔 회의에서 젠더 정의와 경제 정의 사이의 분할을 연결하려 시도했다고 말한다. <경제정의를 위한 국제여성연합>(WICEJ)과 같은 단체들은 그렇게 했지만, 많은 다른 단체들은 남반구와 북반구로 나뉘는 등 다른 길을 갔다.6) 불행히도 "젠더 정의"에만 초점을 두는 많은 여성 NGO들이 이런 의제에 관해 미국 및 유럽연합의 정부들과 동맹을 형성하면서 여성권을 침해하는 더 광범위한 경제적 사안들과 작동 중인 복잡한 역학을 은폐했다.
신자유주의와 가부장제에 대한 통합적 분석과 활동
페미니즘 의제의 이 두 가지 유기적 요소들이 분석과 활동 모두에서 결합되고 있다는 고무적인 조짐이 있다. 미 제국주의가 심화되고 워싱턴 컨센서스가 균열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페미니스트 활동가들은 좀 더 통합된 분석을 발전시키고 있다. 이 분석은 신자유주의적 의제, 종교 근본주의의 부상, 내전과 종교적ㅁ종족적 공동체의 폭력의 심화, 군사주의의 부상과 민주적 공간의 쇠퇴를 가부장적 사회 구조 및 현재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와 연결시킨다.7) 통합된 분석과 행동의 지표는 다음과 같다.
ㅁ 라틴 아메리카 최남단 지역의 페미니스트 조직들의 네트워크인 <마르코수르 페미니스트 연합>이 2002년 WSF에서 출범시킨 <근본주의에 반대하는 운동>의 출현. 전 세계의 증언물들뿐만 아니라 "근본주의에 맞서 너의 입을 열기" 위한 커다란 입술[모양의 선전물], 형형색색의 풍선들, 죽마 광대들, 춤꾼, 고수(鼓手)와 더불어 현재에도 계속되는 이 캠페인은 여성권을 침해한다는 점에서 신자유주의 교리의 "근본주의"와 종교 근본주의를 연결시킨다.8) 2003년에 이 캠페인은 <이슬람법에서 사는 여성들>, <발전과 여성권 협회>(Association for Women's Rights in Development, AWID), <여성 세계 리더쉽 센터>(Center for Women's Global Leadership), DAWN, WICEJ와 같은 그룹들을 포함하여 국제적인 연합으로 확대되었다.
ㅁ 2004년 WSF를 준비했던 여성들은 신자유주의와 근본주의를 비판하면서 성적인 권리 및 재생산의 권리와 경제적 권리를 통합할 전문위원회를 구성하고 이 주제들과 그에 걸맞는 행동을 더 잘 통합시킬 수 있는 페미니즘 전략 회의를 계획하고 있다.
ㅁ 베이징 이후 5년 간 행동강령 이행을 점검하는 과정에서 출현한 WICEJ도 인종적 정의와 이주자 권리 활동가들뿐만 아니라 "여성의 인권" 류의 집단과 "젠더와 발전" 류의 집단을 연계한다. WICEJ는 일자리, 식량, 주거, 물, 기초 서비스에 대한 요구를 여성권의 일부로 인식하면서 경제적 권리를 여성 인권의 의제의 한 부분으로 재천명하고, 체계적인 경제적 폭력을 여성에 대한 폭력의 한 부분으로 이해하는 경향을 강화했다. WSF의 다른 페미니스트 집단 및 <근본주의에 반대하는 운동>과 협력하면서 WICEJ는 점차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분석을 근본주의, 군사주의, 가부장제에 대한 분석과 연결시키고 있다.9)
ㅁ 2001년 <여성발전협회>(Association for Women in Development)는 공식적으로 명칭을 <발전과 여성권 협회>(AWID)로 바꿨다. 처음에는 발전주의 학자들의 협회였던 AWID는 세계의 여성운동들과 그들의 사상이 결집하는 자리로 변형되었고, 페미니즘적인 발전 의제에 권리의 시각을 통합하기 위해 활동했다. 2002년 10월 멕시코 과달라하라에 2,000여 명의 여성들이 모여서 개최한 <세계화를 재발명하는 여성>이라는 AWID의 포럼은 세계의 이런 다양한 흐름의 페미니즘이 한 자리에 모여 토론하고 분석하는 장이 되었다. 두 명의 연사들은 포럼 참석자들을 "다보스 남성(Davos Man)"10)에 대응하여 "과달라하라 여성"이라 불렀다. 이들은 "복합적인 동일성과 실천적 의제"를 지녔으며 "제도적인 책임성을 쟁취하기 위해 투쟁하고 국가의 젠더ㅁ인종ㅁ계급 정의를 요구"하며 세계적 정의 운동에서 "사회적 정의를 주창하는 사람들의 광범위한 부문과 동맹을 구축하는" 데 힘쓴다.11)
ㅁ 유엔 인권위원회와 유엔 경제ㅁ사회ㅁ문화권위원회 내의 여성 그룹 중 일부는 경제적 권리를 증진하고 워싱턴 컨센서스에 도전할 잠재적 세력으로 주목받고 있다. 아일랜드의 전(前) 수상 메리 로빈슨 하에서 유엔 인권위원회는 WTO 정책을 비롯하여 세계화와 구조조정에서 인권 문제를 평가할 실무 집단을 설립했다. 2003년 경제ㅁ사회ㅁ문화권위원회가 물에 대한 권리를 긍정한 것은 IMF와 세계은행이 세계적으로 추진한 수도 체계의 광폭한 사유화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기초 자원의 사유화에 맞선 대중 투쟁이 볼리비아, 가나, 남아프리카공화국 등지에서 성장하고 있으며, 종종 여성들이 이 투쟁을 지도하고 있다. 이런 운동 중 일부는 유엔 체계를 활용하여 사기업뿐만 아니라 WTO와 브레턴우즈 기관들에 도전하는 데 점차 관심을 보이고 있다. 새로운 집단인 <경제ㅁ사회ㅁ문화권을 위한 국제 네트워크>가 2003년 6월에 태국에서 창립 회의를 가졌는데, 활동적인 여성들의 회의가 이 회의의 한 부문으로 개최되었다.12)
ㅁ 여성들은 카이로 국제인구개발회의(1994)와 베이징행동강령(1995)에서 지역별 10년을 점검하고 종교적인 우익의 반격에 맞서기 위해 모든 지역에서 결집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여성들은 재생산과 관련된 건강 문제를 경제적 정의 문제 및 현 시점에 대한 정치적 판단과 연결시키고 있다. 심지어 유엔에서 역할을 축소했던 집단들조차 이런 지역적인 행사들을 세계적인 페미니즘의 핵심적인 전장으로 간주한다.
신자유주의와 여성의 삶, 그리고 다양한 대응
신자유주의가 여성의 삶에 미치는 심대한 영향은 다양한 대응을 야기했다. 어떤 대응은 발전주의적인 접근의 자장 안에서 이루어지기도 하고 또 어떤 것은 재분배를 통한 경제적 정의를 요구하기도 한다. 이런 대응들은 다음을 포함한다.
․ 반(反)빈곤 전략으로 권유되었던 생존전략
․ 정치적 조직화와 결부된 생존전략
․ 자신의 생계를 방어하기 위해 풀뿌리 여성들이 조직한 전략
․ 이런 영향들을 증명하고 국가와 사부문의 책임성을 요구하기 위한 NGO들의 연대, 교육, 지원
․ 페미니즘 경제 이론의 형태로 이뤄진 학술적 대응
세계은행과 IMF가 1980년대부터 남반구의 가난한 국가들에 부과한 구조조정 정책은 이 방면에서 여성들의 국지적ㅁ국제적 조직화가 등장하는 데 중요한 촉매제가 되었다. 구조조정 정책은 민족 경제를 외채 지불 기계로 변화시킴으로써 재식민지화의 초석을 놓았다. 여성들이 축소된 사회 서비스를 자신의 재생산 노동으로 메우고, 서비스 부문에서 일자리를 잃고, 비공식 부문에서 일해 생계를 책임지고, 새로운 값싼 노동력으로 수출자유지역에 유입되자 여성 활동가들은 구조조정 정책의 부담이 여성에게 너무 과중하게 돌아온다는 점을 명확히 인식하게 되었다. 이런 과정은 동유럽과 중부유럽에서 대대적인 사유화가 진행되는 동안 반복되었다.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점차 민족 경제의 숨통을 조여오자, 풀뿌리 여성 활동가들은 마낄라도라나 노동착취공장의 노동자들, 비공식 부문의 노동자들, 그리고 지역 공동체 활동가들을 조직하여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투쟁하고, 나아가 신자유주의적 경제 모델에 맞서기 시작했다. 많은 이들이 경제적 과정에 페미니즘적 비판을 적용하기 시작했다. 일부 노동자들은 노조 구조 외부에서 여성 노동자들을 조직했는데, 이는 마낄라도라의 공장들에서 노조에 가해지는 위협 때문이자 노동조합의 남성중심성 때문이었다.
페미니스트 경제학자들은 젠더와 거시경제 정책을 이론화하기 시작했다. 페미니즘적 경제 분석은 "사회적 재생산"의 책임을 진 일차적 양육자로서 여성이 경제, 유급 노동시장, 그리고 공동체에서 여성이 수행하는 다양한 역할을 탐구한다. 이런 일들의 대부분이 무급이고 공식 경제에서 계산되지 않지만 경제가 기능하는 데는 필수적이다. 여성들은 구조조정 정책이 외채를 갚고 경제를 재구조화하는 데 여성들의 유급ㅁ무급 노동을 활용하는 방식을 증명했다.13)
릴리(Maria Riley)에 따르면, 1980년대에 세계경제가 변화하고 여성의 삶에 대한 압력이 커지면서 일부 페미니스트들은 "소득지원과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 여성들이 빈곤을 벗어나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보상도 없이 더 과중한 일을 해야 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점을 명확히 인식했다."14)이것은 거시 경제 발전의 부정적인 영향으로 인해 여성들이 번 소득이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릴리는 WTO가 베이징여성대회(1995)와 같은 해에 출현하여 점차 경제 통합을 세계 자본의 최우선 순위로 만들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구조조정 프로그램은 WTO 규범 하에서 남반구 경제의 무역 및 투자의 자유화를 위한 초석을 놓았다. 1997년 아시아의 금융위기는 투기 자본의 위험성을 보여주었고, 전 세계에 파괴적인 효과를 미쳤다.
란드리아마로(Zo Randriamaro)가 지적한 것처럼 젠더 평등은 일국적인 수준에서 해결될 수 없다. 그것은 "세계 경제의 통치성(governance) 내에서 정책과 제도의 변화를 요구한다."15) 그녀는 "여성 조직들과 활동가들 사이에서 벌어진 논쟁은 신자유주의 정책이 여성과 젠더 관계에 미치는 영향의 구조적이고 상호적인 원인에 대해 체계적으로 분석하지 못한 채 그 영향에만 집중하면서 애매하게 되었다"고 덧붙인다.16)
여성의 경제 정의를 위한 운동은 이런 비판에 기초하여 구조조정과 외채의 영향에 집중하던 것으로부터 더 광범위한 신자유주의 의제에 대해 도전하는 것으로 발전했고,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현재는 그 의제가 여성들에게 해를 끼치는 정치적ㅁ이데올로기적 세력과 어떻게 결합되는지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경제 정의에 집중하는 운동들은 주류 발전 패러다임과 여성을 신자유주의적 모델에 통합시킬 뿐인"성주류화" 시도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국제젠더ㅁ무역네트워크>(International Gender & Trade Network, IGTN)와 같은 집단들은 세계적인 무역 거래의 중요한 행위자로 부상했다. 마찬가지로 여성들은 외채, 무역, 원조, 세계 금융을 다루는 유엔 개발재원조달회의(2002, 멕시코 몬트레이)와 그 후속사업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벌였다. 여성들은 외채 탕감, 새로운 형태의 세계경제 통치성, 투기자본에 대한 세계적인 환거래 과세와 같은 지속가능한 발전을 목표로 하는 제안들을 지지했다. 또한 여성들은 환거래 과세를 위해 노력하며 "금융시장과 그 기구들을 민주적으로 통치하려는 국제적 운동"인 아탁(시민지원을 위한 금융거래 과세연합)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서유럽의 여러 지역 사회에 건설된 이 풀뿌리 운동은 현재 WSF를 조직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국제 여성인권 조직인 마드레(MADRE)에 따르면, 여성 조직들은 [베이징]행동강령을 이행하는 정부의 역할을 보충해야만 했다. 건강 상담, 학대받는 여성들을 위한 쉼터, 에이즈 교육과 문맹퇴치 프로그램, 소득지원 프로그램, 영양학 수업, 소녀의 지도력 훈련을 아우르는 이런 노력은 끈기, 창조성, 고된 노동의 측면에서 인간적 잠재력의 최상을 보여준다. 이런 노력은 갈채를 받아 마땅하지만, 이는 또한 정부가 자신의 의무를 이행하지 못한 심대한 태만의 결과로 이해되어야 한다. … 이런 태만은 교정되어야만 하는데, NGO가 아무리 유능하다 해도 책임 있는 정부를 대신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17)
"여성의 조직화" 대부분은 대체로 풀뿌리 수준의 생존 전략에 초점을 맞췄다. 특히 비공식 부문에서 소득을 벌기 위한 여성들의 영웅적인 노력은 리절트(RESULTS)18), 아메리칸익스프레스, 몬산토, 정부, 사적 기부자 등에게 여성의 빈곤에 대한 해결책으로 이용되었다. 1990년대 많은 양의 달러가 방글라데시의 그라민은행 모델이 상징하는 소액대출ㅁ소액창업 체계―영부인 힐러리 클린턴은 클린턴 정부의 복지 감축에 직면한 미국 여성들을 위한 사례로 이를 승인했다―를 지원하는 시도에 투여되었다.
현재 이런 시도에 대한 비판은 수없이 많은데, 이 시도들이 미국의 법인기업, 세계은행, 미국 정부에 의해 추진되었기 때문이다.19) 이런 대출 체계는 첫째, 빈곤한 여성 창업주들을 공식 경제와 빚 놀이에 통합시키고, 둘째, 구조조정 정책의 효과를 개선하고 사회적인 저항의 위협을 감소시키기 위해 자원을 가장 국지적인 차원에 투여하고, 셋째, 여성들의 소소한 생존전략을 기업가 정신과 자본주의적 경제발전을 위한 이데올로기적 만병통치약으로 변모시키는 데 봉사했다.
이것은 여성 노동의 초과 착취에 의존하는 동시에 정부의 책임성이나 적정한 임금과 수당을 주는 괜찮은 일자리에 대한 요구에 관심과 의무감이 생기는 것을 막았다. 또한 이것은 이 "가내 노동자들"의 일부가 세계적 법인기업의 상품을 생산하는 지방의 제조업과 하청 계약을 맺는 상황을 심화시켰다.20) 이런 노력의 한계는 많은 사람에게 명백하지만, 자가 고용 프로그램은 여전히 "개발" 기금과 많은 여성 NGO들의 주요 관심사다. 현지 여성의 생존 욕구는 "자력갱생주의"(boot-strapism)와 사회적 통제라는 더 큰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의제 속에 말려들었다. 더욱이 많은 지역에서 경제 위기가 심화되어가자 외부 자원의 유혹이 여성의 "권력화"(empowerment)와 경제적 자율성을 위한 일부 여성 조직의 목표와 맞물렸다(NGO 그 자체를 위한 자원은 말할 것도 없다).
다양한 경험과 정치적 의제를 가졌지만 모두 "여성권"의 큰 범주에 속하는 다종다기한 여성의 조직화 전략―지방 공동체, 여성 NGO, 노조, 정치정당, 대학에서의―은 복합적인 동학을 창출한다. "우호적인 동맹" 분위기 속에서 정치적 차이를 분명히 하려는 욕구는 거의 없다. 이로 인해 정치적ㅁ분석적 명쾌함이 결여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이런 상황은 운동의 "목소리"를 규정하는 측면에서 운동의 자금 제공자들뿐만 아니라 여성 NGO들 사이의 현실적인 권력관계에 의해 강화되었다.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시기에 기부금에 의존하고 있는 일부 여성 NGO들은 그들이 할 수 있는 것 또는 말할 수 있는 것에 제약을 느낄 것이다. 일부는 급진적인 분석을 자기검열하고, 다른 일부는 그런 분석 없이 불공정한 정책의 영향을 개혁․개선하려는 실용적인 목표에 좀 더 치중한다. 정부, 종교 기관, 좌파 내의 남성 동료들과 이미 힘든 싸움을 치루고 있는 여성 집단들 사이의 공통 지반을 찾으려는 노력 속에서 대부분의 정치적 차이는 대개 봉쇄되었다.
이것은 또한 남반구와 북반구의 많은 여성들이 현재 대학, NGO, 정부 기관 및 다층적 기구들에서 젠더와 발전, 여성과 재생산의 권리, 여성과 폭력 같은 분야의 전문가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로 인해 복잡해진다. 어떤 지역에서 여성들은 자신들의 정부가 국가 정책결정과정에 성인지적 관점을 도입하도록 효과적으로 요구했고 베이징행동강령의 이행 과정에서 국가의 여성담당 부서가 설립되기도 했다. 어떤 경우에 여성 전문가들은 정부 직책, NGO 기관, 다층적인 기구들을 오락가락 한다. 이런 상황이 여성의 권력과 효율성을 강화할 수도 있지만, 또한 만약 책임성이 담보되지 않으면 그것은 정치적 변화 의제를 협상할 수도 있다.
성주류화 전략과 그 한계
성주류화 개념은 여성 활동가들의 승리로 시작되었다. 베이징에서 부상한 이 개념은 부수적인 프로젝트에 여성을 끼워 넣는 대신에 모든 분야의 모든 정책과 계획에 젠더 분석이 통합되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사실 이것은 일종의 젠더 산업을 창출했고, 줄곧 그것은 많은 정부, 유엔, IMF, 세계은행의 관료들에게 현재의 신자유주의 정책에 "여성"을 추가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또한 성주류화는 여성 보호 프로그램을 감축하는 데 대한 변명으로 활용된다. 어떤 경우에 성주류화는 여성들이 기본적인 권리 때문이 아니라 성장을 강화하기 위해 경제에서 고려되어야 한다는 도구주의적 주장을 낳기도 했다. 그것은 여성의 참여를 의미했지만 젠더 평등이나 경제 정의를 향한 진보는 제한했다.
세계은행과 같은 기관들이 젠더 형평성, 참여적 발전, 빈민 친화적 정책과 같은 용어를 수용하고 이것들을 선택하려 하자 여성 NGO 활동가들의 성주류화 의제는 오염되었다. 1995년 베이징에서 세계은행 총재 제임스 울펜손을 만나면서 부상한 여성들은 세계은행 외부의 NGO 감시 집단과 내부의 젠더 감시ㅁ감독 기제를 설립하는 데 성공했다. 그 결과 연구가 쏟아져 나오고 새로운 사무국과 관료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으며 현지의 여성에게 새로운 자원(특히 소액대출을 통해)이 제공되었지만, 세계은행이나 채무국의 거시경제 정책에서의 변화는 미미했다.
2003년 WTO 칸쿤 각료회의에서 여성의 전략을 둘러싸고 성주류화 논쟁이 다시 한 번 나타났다. 라틴 아메리카의 한 여성 집단은 WTO내에 [세계은행과] 유사하게 NGO를 통한 감시체제를 갖춘 젠더 감시․감독 기제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다른 여성들은 이 전략에 강력히 반대했다. 이들은 WTO가 자신의 역할과 활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NGO의 비위를 맞추고자 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들은 성주류화가 불법적인 기관과 정책에 적극적으로 젠더를 통합한다는 의미가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성주류화 개념을 개조하려 한다. IGTN의 프란시스코(Gigi Francisco)는 젠더 분석의 변혁적 의미는 어떠해야 하는지를 제안한다.
무역, 발전, 통치성에 적용되는 젠더 관점과 정책은 경제에서 사회적 재생산의 비가시성, 세계 인구의 특정집단의 거대한 빈곤을 야기하는 축적 과정의 재창조와 통합, 민주주의와 인권의 도구화를 상호 연관된 방식으로 촉진하는 패러다임과 모델에 근본적으로 도전할 수밖에 없다. 인간, 공동체, 정부보다 시장이 중요하다고 주장하고 여성의 자율성을 가로막는 구조적"제도적"문화적 장벽을 지속적으로 간과하는 일련의 규범은 젠더 변혁의 전망과 그 정치와는 직접적으로 그리고 근본적으로 갈등한다.21)
란드리아마로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젠더화된' 경제 정책은 여성에 대한 동정심을 제도화하는 것과는 다르다. … 페미니즘적 접근은, 각 국이 충분한 융통성을 가지고 국민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고 인권과 계발적 욕구에 우선권이 주어진다면 건전하고 공정한 경제 정책은 남성과 여성이 생산 자원에 대해 동등한 접근권과 통제권을 갖고 정책결정과정에 동등하게 참여하며 그들의 노동의 혜택을 동등하게 분배받는 것이라고 가정한다."22)
여성운동 지도자들의 풀뿌리 기초 조직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감 부재와 더불어 "젠더 전문가"가 공식구조 내에서 활동하기를 바라는 정부와 기관의 요구가 증가하자, 심지어 가장 선의의 활동가들조차 포섭될 수 있다는 현실적인 우려가 나타난다. 프로젝트나 이벤트 중심의 활동 속에서 정치적 과제를 분명히 인식하지 못하면 여성의 의제가 조작되는 방식을 판단하기가 더욱 어려워진다.
엘리어차(Julia Elyachar)는 세계은행이 이집트에서 빈민 친화적인 NGO 의제를 어떻게 조작했는지 설득력 있게 설명한다. 구조조정 프로그램이 야기한 사회적 불안을 처리하는 것이 긴급해지자, 세계은행은 "민중의 권력화"와 젠더 평등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정치 참여의 봉쇄는 세계적 안보의 문제로 간주된다"고 말한다.23) 그녀에 따르면, 비공식 부문을 겨냥한 발전 프로그램은 "국가의 주권이 미치지 않는 사회적 공간을 확장한다. 따라서 그런 발전 접근은" 경제활동에 대한 통제력이 줄어든 작은 국가를 지지함으로써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매우 부합한다." 이는 [국가에 반대하여] 공동체를 옹호하는 의제를 가진 많은 반(反)세계화 활동가들이 의도하지 않게 신자유주의 의제에 복무하고 있음을 의미했다. 이집트의 경우에 NGO들은 종종 "구조조정 정책이 거시경제 수준에서 하는 것과 꼭 같이 재정 규율을 강화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지방 프로그램의 주요 초점은 "여성의 권력화"였고, 이는 기부금 수령자가 될 수 있는 자매와 주부들 사이의 쟁탈전을 낳았다. 이 과정은 공동체의 사회적 네트워크와 민중의 생존 전략을 기초하여 확립되었고, 이를 포섭했다. 거칠게 말하자면, "구조조정 프로그램은 불량 국가들을 규율한다. NGO를 매개로 기금이 유입된 사회적 네트워크는 빈자들이 스스로를 규율하도록 하는 기제로 기능할 수 있다."
유럽정부의 기부 기관을 위해 활동하는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의 한 여성과의 대화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녀는 여성을 위한 "경제 교육"과 풀뿌리 수준의 여성 참여에 기금을 투입하는 것에 관심이 있었다. 그녀는 이제 지방 NGO의 노력까지 병합한 세계은행의 현재의 경제개혁(빈곤감축 전략보고서로 알려진)에 "젠더를 주류화"하고 싶어했다. 그녀는 지방 정부에 대한 여성의 협상력이 강화되길 원했고 거시경제 문제에 대한 여성의 지식이 그들의 협상능력에 결정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발전 원조의 역할이 현금보다는 지식과 기술의 이전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성 인지적 예산"이 지방 수준에서 여성을 참여시키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여성의 참여에 이렇게 관심을 갖게 된 이유를 묻자 기부자들의 목표는 "지방 수준에서 여성들이 행위자가 되게 하고 기초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여성이 정치 체제를 탈안정화시키지 않도록 긴장을 감축시키는 것"이라고 그녀가 거리낌 없이 대답했다. 그녀는 만약 사람들이 참여하고 있다고 느끼지 않으면 그들이 폭탄을 투척하는 근본주의자가 될 수도 있다는 우려를 표명했다. 그녀는 남반구에서 다원주의와 민주주의를 증진시키기를 원했지만, 이 풀뿌리 여성들의 경제적 현실에서 실제로 변한 것은 거의 없다는 점은 인정했다.
다양한 동일성들
세계의 여성운동이 직면한 지속적인 중대한 도전은 여성이 체험하는 특별한 현실을 규정하고 이론적ㅁ실천적으로 그들의 정치를 구성하는 인종, 종족성, 신분, 계급, 성적 지향, 국적, 나이, 그리고 여타의 동일성들을 효과적으로 통합해야 할 필요성이다. 이 문제는 2001년 9월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에서 열린 유엔 세계인종차별철폐회의를 준비하면서 세계적인 페미니즘 담론에서 중요한 일부가 되었다. 이 회의는 주목할 만한 행사였는데, 인종적ㅁ종족적으로 주변화 된 세계의 활동가들이 인종화 된 억압의 일소를 요구하는 강력한 포럼에 모였다.
여성 회의에는 인도의 불가촉천민(Dalit)과 유럽의 집시(Roma)부터 원주민 여성과 아프로라틴계 여성들까지 페미니즘 또는 NGO 집단에 거의 연계가 없었던 여성들이 참여했다. 더반에서 여성 활동가들은 여성 회의나 지역 회의뿐만 아니라 식민주의와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인종적ㅁ젠더적 분석을 발전시킨 "인종, 빈곤, 세계화 회의"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외채 탕감, 환거래 과세, 그리고 그 밖의 직접적인 장치를 통해 식민주의와 신자유주의의 유산에 대한 보상으로 세계의 부를 북반구에서 남반구로 이전할 것을 요구했다. 이것은 인종, 계급, 지리학을 역사적으로 재검토함으로써 통해 젠더 정의와 경제 정의를 연결시키려는 시도를 대표했다. 이 회의는 개발재원조달을 위한 유엔 회의에서도 유지되었고, 여기서 여성들은 젠더, 인종, 계급, 인권의 틀을 그런 토의에 적용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성과는 없었)다.24)
이 기간에 행해진 지적ㅁ정치적 작업의 일부는 다양한 억압의 상호 접합을 고려하면서 페미니즘의 기획을 재 개념화하려는 장기적인 요구에 기초했다.25) 과제는 여성의 다양한 억압, 각기 다른 경험, 정치적 의미를 고려하는 통합적인 페미니즘적 분석을 발전시키는 방법이란 측면에서 분석적이지만 동시에 실천적이기도 하다. 즉, 세계의 여성운동들은 어떻게 주변화된 여성들에게 지도력을 부여하고 그들의 의제를 통합하고, 따라서 이 운동 내부의 여성들 사이의 권력관계를 균등화 할 수 있을까?
더반에서의 이런 토론은 (유엔 회의 바로 며칠 뒤에 일어난) 9ㅁ11로 인해 간단히 묻혀버렸지만, 여성운동들은 이를 긴급하게 다뤄야 한다. 여성운동 내부의 인종주의, 계급주의, 북/남 권력의 불균형과 더불어 여성이 상이하게 겪는 경험을 진지하게 고려하는 것은 중요하다. 중요한 차이와 권력 관계에 대한 집중하면서도 동일성의 정치가 여성의 평등, 권리, 인종적 정의, 경제 정의의 의제를 통합할 가능성을 압도하지 않도록 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이것은 북/남 논쟁 내의 세계적 수준에서 그리고 미국에서부터 남아시아에 이르는 일국적 수준에서 똑같이 중요하다.
유엔 회의의 시대가 끝나다
20년에 걸친 유엔 회의에서의 여성 조직화는 유엔을 무대로 한 노련한 국제적 지지자와 활동가를 배출했다. 하지만 현재 정부 간 협상을 통해 성과를 얻을 가능성뿐만 아니라 유엔 회의의 시대도 막을 내린 것처럼 보인다. 탈냉전 시대의 권리에 기초한 공통의 의무 체계에 기반을 둔 다자주의적 발전 의제의 개시은 부시 행정부의 일방주의 정책으로 침식되었고, 이는 세계적인 반대를 무시한 미국의 이라크 침공과 제국주의 열강들 사이의 경쟁 격화에서 가장 명백히 드러난다. 2004년 이래 가장 최근의 유엔 회의26)는 IMF, 세계은행, WTO 사이의 상호 강화하는 의제들의 통합과 유엔에 대한 이 기구들의 권한 증대, 강력한 세계적 법인기업의 의제를 보여준다.
유엔의 여성 문제에 관해 보자면, 북반구와 남반구 사이의 점증하는 긴장은 협상에서 양보하는 것에 대한 남반구 국가들의 저항을 심화시켰고 도덕적인 보수주의 세력의 영향력을 강화시켰다. 2003년 3월, 이라크에 관한 안전보장위원회 회의와 나란히 열렸던 세계여성지위위원회(CSW)에서 참가자들은 여성에 대한 폭력을 다룬 성명서에 대해 합의하지 못했다. 종교적 우익을 대변하는 일군의 국가들은 과거에 합의했던 문서를 거부함으로써 여성들이 수년 동안 획득한 성과물을 철퇴하려고 시도했다. 그들의 여성권 문제에 관한 비타협적 반항심은 정치군사적 전선과 경제적 전선에서 일방주의를 보이는 미국에 대한 분노로 인해 더 커졌다. 거대한 무역 적자, 재정 적자, 불안정한 이라크 점령, EU와 중국의 점증하는 경제력으로 인해 미 제국은 상상하는 것보다 약할지도 모르지만 미 제국은 현재 여전히 우위를 점하고 있다.
이 같은 세계여성지위위원회가 처한 궁지는 유엔 활동가들이 이미 직면하고 있던 현실을 통감하게 했다. 결국 국가적ㅁ국제적 발전 의무를 언어화하는 데 성공했지만 각 국 정부의 실제적인 책임성이 담보되지는 않았던 것이다. 발전 정책을 형성할 수 있는 유엔의 능력은 G-8 선진국들의 자본가의 이익을 대변하는 IMF, 세계은행, WTO(제재 조치를 통해 조약 이행을 단속할 권한을 보유한 최초의 다자주의 기구)의 권력 때문에 무색해진 반면, 젠더 정의는 보수주의 우파에 의해 침식당했다. 따라서 여성 집단은 점차 자신의 실천에서 가장 전략적인 장소―유엔으로부터 무역 부문, WSF, 지역적ㅁ일국적 작업으로―를 고민하고 있다. 이것이 제5회 세계여성대회의 개최 여부를 둘러싼 열띤 토론에 반영된, 현재 세계 페미니스트들 사이의 핵심 논쟁들 중 하나다.
이런 유엔의 변화 속에서 발달한 세계의 여성운동들은 회의와 메일링 리스트를 통해 유엔에 계속 집중하는 것의 이점과 다른 세계여성대회에 관해 숙고하고 있다.
․ 세계적인 여성 의제의 탄력을 유지하고 젊은 여성들을 그 과정에 참여시키고자 하며 여전히 유엔을 우선적인 활동 공간으로 간주하는 이들. 이들은 여성들이 국제적 의제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서 거둔 성공과 이로 인해 생긴 자국 정부에 상응하는 권력에 주목한다. 많은 이들은 유엔이 일국적ㅁ국제적 수준에서 압력을 행사하면서 평등 요구에 좀 더 민감하도록 강화되고 변화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 반대하는 이들은 "회의의 피로감, 실행 자원의 부족, 페미니즘적 사안들의 기반을 상실할지도 모른다는 위험을 불러일으키는 지정학적 분위기와 반격"을 지목한다.27) 어떤 이들은 집중점이 WTO와 지역 무역 협정으로 이동했으며 여성들이 유엔의 절차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말레이시아의 그리펀(Vanessa Griffen)은 세계적인 협상이 현지의 여성의 생활을 개선시키지 못했고, 따라서 유엔에 대한 강조는 여성들의 에너지를 잘못된 곳에 쏟게 하고 정치적 영향력도 약화시킨다고 주장한다. 그녀는 정부의 협약 이행을 감시하고 과거의 의무 증서를 보존하며 보수적인 반격을 저지하는 데 일부 여성이 필요하지만 이것이 세계 여성운동들의 중심점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28)
일부 여성 조직들은 1990년대의 유엔 회의들에서 각국 정부들이 다짐한 엄청난 약속들이 8개의 밀레니엄개발목표(MDGs)―유엔과 세계은행의 모든 발전 작업에서 최우선의 조직화 틀이 된―로 축소된 것에 점차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 목표들은 젠더 관심사를 8가지 목표 중 단 한 가지로 축소시키고 이 목표들의 실현을 직접적으로 제약하는 신자유주의적 틀에는 도전하지 않은 채, 2015년까지 빈곤 경감, 기초적인 의료와 초등교육 보장, 그리고 다른 고귀한 목표들을 달성하기 위해 기술관료적인 장치를 모색한다. 카이로(1994년, 유엔 국제인구개발회의)와 베이징에서 채택된 재생산 권리에 대한 약속은 누락되었다. 차르키비츠(Ewa Charkiewicz)는 MDGs가 권리를 가진 시민에서 사유화된 상품의 소비자로의 초점의 이동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안트로부스(Peggy Antrobus)는 MDGs를 "정신을 산란하게 만드는 속임수(Major Distraction Gimmicks, MDGs)"라고 부르고 이것이 훨씬 원대한 베이징행동강령에 쏠려있던 여성의 초점을 분산시킨다고 말한다.29)
유엔 여성지위위원회에 참석한 국제 여성 NGO 지도자들 중 일부가 2003년 3월 뉴욕에서 모였는데, 이 모임이 세계적인 합의를 대표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모임은 첫째, 제5회 세계여성대회는 2005년은 아니지만 2010년 전에 개최할 것, 둘째, [베이징행동강령] 원문에 대한 협상은 하지 않고 2005년에 유엔 정기회의와 각국 차원에서 행동강령 이행에 관한 10년 평가를 진행할 것, 셋째, AWID포럼과 WSF과 등에서의 여성들의 자율적인 행사 가능성 또는 유엔과 별도의 대안적인 세계여성회의의 개최 가능성을 열어둘 것을 제안했다.30)
유엔 옹호와 유엔 회의에 대한 집중에서 지방적/일국적 조직화, 또는 WTO와 지역 무역 협정에 대한 조직화, 또는 WSF 조직화로의 변화가 세계 여성운동들의 스타일, 문화, 지도력 또는 계급적 토대의 변화를 의미한다는 것은 분명하지 않았다. 이것은 여성들의 네트워크 ―나 자신이 속한 연합을 포함한― 내부의 일 처리 방식, 경력, 기금 모집, 권력 기반에 도전하는 것이다. 가장 전략적인 방식에 대한 평가로부터 이런 요소들을 분리하는 것은 하나의 중요한 도전이 될 것이다.
대체로 여성들이 제5회 세계여성대회를 승인할 것인가의 문제는 현 시점에서 유엔 옹호의 역할 및 지정학적 동학의 상태에 대한 평가와 카이로+10과 베이징+10에 대한 지역별 평가의 결과에 달려있다.
궁극적으로 이것은 양자택일의 문제라기보다는 각기 다른 수준과 다른 영역의 작업을 가장 전략적으로 결합시키는 방법의 문제다. 옹호 대상으로서 유엔을 멀리하는 것이 현명하지 않을 수 있지만, 그 이득은 현재 상당히 제한되어 있다. 유엔에 대한 목표는 인권조약 기구와 같이 페미니스트들이 그들의 의제를 진전시킬 수 있는 특정한 유엔의 영역을 모색하면서 유엔과의 끈을 유지하고 좀 더 믿을만한 기구가 되도록 압박하는 것이다. 세계정의운동과 WSF 프로세스는 세계적 수준에서 여성과 대중적인 사회운동들을 연결시키는 공간을 제공한다. 이것과 지방적/일국적 운동 조직은 모든 수준에서 국가와 사적 이해당사자들의 실제적인 책임성을 요구할 수 있는 권력의 기반을 마련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고무적인 징표들
때로는 여성의 권리에 대한 역행―특히 세계 곳곳의 가난한 여성들의 삶에서―만이 존재하는 듯이 보인다. 생계 기반의 상실, 늘어난 경제적ㅁ물리적 착취, 경제적 생존을 위한 여성 이주의 증가, 여성의 자율성에 대한 통제 증가는 서로 연결되어있는 많은 세력들로부터 유래한다. 법인기업 세계화, 군사주의, 근본주의가 강화되면서 개념적으로는 정부의 약속을 통해 얻어진 중요한 성과들이 대부분 여성의 생생한 경험에서는 실현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성과를 과소평가할 수 없다. 정부 측의 담론과 행동에서의 변화는, 비록 그것이 포섭되었을지언정, 지난 30년 동안 여성들이 조직화한 힘에 대한 반응을 보여준다. 거대한 후퇴에도 불구하고 수천의 여성들은 국지적이고 세계적인 페미니즘의 결과로 다양한 수준에서 여성들의 권리와 그 권리를 요구할 수 있는 공간을 체감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고무적인 징표도 있다.
․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을 연결하는 페미니즘적 경제 분석의 심화ㅁ발전
․ 거시 경제의 문제를 다루고 재분배에 입각한 경제 정의―단순한 경제 "발전"이 아닌―를 위해 조직하는 새로운 세대의 여성들
․ 이론적이고 정치적인 수준에서 젠더 정의와 경제 정의의 통합 증대
․ 세계 여성운동들의 정치 전략, 장소, 영향, 인종/종족적ㅁ계급적ㅁ지정학적 문제를 포함하는 내적 역학관계를 평가하려는 ―여전히 한계적이긴 하지만― 초보적인 노력
․ 종교적 또는 국가적 가부장, 초민족적 법인기업, 미 제국을 비롯하여 가족 내에 위치한 권력에 도전할 수 있는 더 광범한 대중적 사회운동을 건설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국지적인 행사뿐만 아니라 WTO에 반대하는 시위와 WSF 같은 곳에 참여하여 운동의 동료들에게 인식되고자 하는 페미니스트들의 노력
1)"Globalization and Fundamentalism: A Genderscape" (n.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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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여기서는 폭력, 재생산의 권리, 성적 권리, 신체적 완전성, 법적인 권리 등 가부장제와 직접 관련된 문제들이 다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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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인권이 페미니즘적 조직화에 유용한지를 둘러싼 논의가 존재한다. 이것은 "보편주의" 개념과 "문화적 상대주의" 개념을 대비시키며, "권리" 체제를 서구 중심의, 개인주의적 패러다임으로 비판한다. 우리는 양분된 견해의 어느 한쪽을 수용하기보다는 지방 및 국제적인 권리 담론에 대한 '요구와 비판'이라는 이만(Ayeshan Imam, 이슬람법에서 사는 여성들(Women Living Under Muslim Law))의 접근법을 따르고자 한다. 이러한 접근을 통해 지방적 권리라는 틀을 실행 가능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고, 그 범위를 확대할 수 있다. 국제적 권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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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Gita Sen & Sonia Correa, "Gender Justice and Economic Justice: Reflections on the Five Year Reviews of the UN Conferences of the 1990s," DAWN, 2000, www.dawn.org.f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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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같은 글. (미국의 부시 정부는 여성권과 관련된 도덕적 이슈에 관해 이러한 보수주의 집단에 동참하고 있다. 그러나 물론 G-8의 헤게모니에 도전하는 일에는 동참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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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North Shares Responsibility for Slow Progress in Beijing+5", WICEJ, 8 June 2000 WomenAction, New York, www.womenaction.org/ungrass/wicj.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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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Bina Srinivasan, 이번 호; Mona Danner & Gay Young, "Free Markets and State Control: A Feminist Challenge to Davos Man and Big Brother," Gender & Development (n. 6); Peggy Antrobus, DAWN, September 2001, www.dawn.org.fj.publications/index; Sunila Abeyesekera, "A Women's Human Rights Perspective on War and Conflict," WHRnet, February 2003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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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http://www.mujeresdelsur.org.uy/campania/foro1a.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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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WICEJ의 포르투알레그레 선언문 2003을 보라. http://www.WICEJ.addr.com/wsf03/wicej.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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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이코노미스트』에 소개된 바에 따르면, 다보스 남성은 세계경제포럼을 위해 스위스 다보스에서 해마다 회의를 갖는 국제적인 기업과 정치 집행자들을 뜻한다. Danner & Young (n. 28)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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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같은 책, pp.87~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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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http://www.escr-net.org/EngCeneral/confreport1.a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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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Pam Sparr, ed., Mortgaging Women's Lives: Feminist Critiques of Structural Adjustment,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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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Maria Riley, "From Women in Development to Gender and Trade," Center Focus #152,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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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Zo Randriamaro, "African women challenging neo-liberal orthodoxy: the conception and mission of the GERA programme," Gender & Development (n. 6), pp. 45,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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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란드리아마로가 2000년 11월 유엔 개발재원조달에 관한 NGO 청문회에서 했던 연설 중, www.un.org/ff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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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Monica Aleman & Yifat Susskind, "Beyond Beijing: Some Priorities for the Global Women's Movement," June 2000, www.madr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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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역주] 빈곤 감축을 위해 로비를 벌이거나 펀드를 모금하여 빈민들에게 빌려주는 국제 N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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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Micro-enterprise: A Solution to Women's Poverty?" Alt-WID/NY 1997; Gina Neff, "Micro credit, Micro Results," Left Business Observer #74, October 1996, "Microsumitting," Left Business Observer #77, May 1997; Uma Narayan, 제목 없는 작업보고서, CUNY/NCRW 세미나, Facing Global Capital, A Gendered Critique, New York, 2003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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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Radhika Balakrishnan, ed., The Hidden Assembly Line: Gender Dynamics of Subcontracted Work in a Global Economy, Kumarian Press, Connecticut 2002; Ruth Pearson, "Feminist Responses to Economic Globalization: Some Examples of Past and Future Practice," Gender & Development (n. 6)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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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Gigi Francisco, "Gender Mainstreaming in Trade Policies," DAWN informs, 200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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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Randriamaro (n.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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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Empowerment Money: The World Bank, Non-Governmental Organization and the Value of Culture in Egypt," Public Culture 14: 3,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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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Race, Poverty & Globalization Caucus Documents", WICEJ, 2002를 보라. www.wicej.addr.com/racepov.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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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예를 들어, <유색여성자원센터>의 작업을 참고하라. www.coloredgirls.org.
경계와 새로운 동맹, 더 큰 영향력을 모색하다(2)
<번역: 정지영(정책편집부장)>
[%=박스1%]
국가, 대중권력, 여성의 권리
페미니스트들은 가부장제의 측면에서 국가권력의 문제와 씨름한다. 이들은 국가를 가부장적 관계의 집행자로 비판하는 동시에 국가가 여성권과 더 넓은 사회적 요구를 실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페미니스트들은 가부장적 관계를 되풀이했던 소위 사회주의 국가(또는 좌파 정당)에서 쓰라린 경험을 했지만, 여전히 사회적 욕구와 권리의 중요한 중재자로서 변화된, 평등주의적인 국가의 역할을 상정하고 있다.
다양한 형태와 접근 방식을 통해 자본이 강요하는 조건에 맞서 대중 권력을 (일국적, 지역적, 국제적 수준에서) 수립하는 것이 단기적인 임무다. 이는 거리의 활동가들의 강경파적 입장을 넘어 대안을 놓고 국가와 협상할 수 있는 조직들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 그것이 정당이건 사회운동이건 이러한 조직들은 대중적인 책임감과 진보적인 사회 변화를 위한 명확한 대안을 지녀야 한다. 또한 이들은 국가와 사회뿐만 아니라 자신들 내부의 가부장적 관계를 다뤄야 한다. 이런 지도력이 없다면 종교적 근본주의를 향한 경향이 강화될 것이다.
싸파티스타와 브라질 노동자당은 이와 관련된 흥미로운 사례다. 토착 농민 운동인 싸파티스타는 특정한 정치적, 경제적 계획을 강제하는 국가의 능력에 도전하고 있다. 이들은 또한 농민 대중을 조직하고 교육하며, 정부와 협상하고, 심지어 일부 지도자들은 페미니즘의 의제를 제기한다! 그리고 룰라의 노동자당은 세계 자본이 브라질에 부과한 제한적인 조건에도 불구하고 칸쿤 WTO 각료회담에서 미국과 유럽연합에 도전하기 위해 남반구 국가들을 조직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또한 미국이 지배하는 지역 무역 협상(전미자유무역협정)에 맞서 라틴아메리카 무역 블록을 구축하려고 한다.
자본을 대리하는 국가의 행위에 대항하는 일국적 차원의 조직화가 계속되는 동안, "세계정의운동"은 세계적인 자본주의 기구들(IMF, 세계은행, WTO, 다보스포럼, G-8)의 정당성에 도전해왔다. 이는 일국적인 승리가 초민족적 자본과 이의 정치적 대행자들에 의해 약화되는 상황에서 필수적이다. 남반구 각 국에서 민족 자본에 도전하는 것과 제국주의의 공세에 맞서 민족주의적 입장을 취하는 것 사이의 줄타기는 복잡하며, 때로는 잘못된 상대와 동침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세계사회포럼(WSF)은 대안적 전략을 수립하기 위한 공간을 창출하려고 한다. 이 포럼을 만들어 내는 데 주도력을 발휘했던 비정부기구(NGO)가 "구좌파"의 악습, 특히 젠더ㅁ인종ㅁ참여민주주의 사안들을 둘러싼 악습에 어떻게 도전할 것인가, 동시에 권력에 대항할 잠재력을 지닌 대중적인 사회운동에 어떻게 뿌리를 내릴 것인가는 핵심적인 문제로 남아있다.
페미니스트들에게 추가되는 과제는 가부장제에 관한 분석을 신자유주의 세계화 비판에 어떻게 통합시킬 것인가이다. 2001년 1차 WSF에서 페미니스트들은 WSF의 조직자들로 하여금 지도부의 구조에서 "젠더 및 지역 균형이라는 민주적인 원칙을 실천하도록" 요구하는 성명서를 채택했다. 2차 WSF(2002년)에서 WSF 국제위원회의 일원인 <새로운 시대 여성을 위한 발전대안>(DAWN)은 동료들에게 다음과 같이 호소했다. "1980년대 중반부터 우리는 세계화와 근본주의의 상호 결합에서 제기되는 문제들, 그리고 그것이 여성의 삶, 권리, 힘, 자유에 미치는 악영향과 씨름해왔다. … WSF가 모든 지역의 여성에게 영향을 미치는 다층적인 세력들의 역설과 직접 대면하고 이를 처리하지 않는다면, 매우 민주적인 세계 시민사회의 공간으로서 WSF가 지니는 의미와 정치적인 지배력 그리고 활력을 상실할지도 모른다."1)
WSF의 "남성" 지도부는 대체로 여성들의 관심사를 여전히 "추가되는" 문제로 간주한다. WSF 국제위원회에 약간의 페미니스트 조직이 참여하고, 지방 조직위원회에는 조금 더 많은 수가 참여하고 있지만, 다른 조직들이 자신을 대표해서 여성대표 또는 페미니스트를 파견하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러나 이제 WSF가 최초로 아시아로 이동하자 인도의 페미니스트들은 2004년 WSF의 주요 행사들에 가부장제 비판을 통합시키고, 여기에서 여성과 남성의 지도부의 균형을 맞추는 데 상당한 진전을 이뤘다. 이들의 성과 이면에는 라틴 아메리카 자매들의 3년 동안의 기초 작업이 있었다.
"젠더 정의", "경제 정의"
2003년은 유엔 비엔나세계인권회의2)가 10주년을 맞는 해였다. 이 회의는 "여성권은 인권이다"라는 관념을 국제적 협정에서 성문화한 세계 여성운동의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유엔 세계인권선언과 경제ㅁ사회ㅁ문화적 권리뿐만 아니라 정치적ㅁ시민적 권리에 관한 규약에서 구체화된 인권은 정치적 권리와 경제적 권리 모두를 포함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러한 국제법은 서구는 정치적 권리를, 동구는 경제적 권리를 우선시했던 냉전 시대의 희생물이었다.3)
모든 인권의 분할 불가능성을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초기(1993)의 여성 인권운동은 여성에 대한 폭력, 재생산의 권리, 성적 권리, 육체적 완전성의 사안들, 즉 "젠더 정의"를 강조했다. 이는 많은 페미니스들이 여성에 대한 폭력 및 여성의 자신의 육체에 대한 통제의 문제를 페미니즘 의제의 근본 문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스리니바산(Bina Srinivasan)이 지적한 것처럼, 이런 문제는 다른 운동들이 계속해서 다루지 못하는 것들이다. 폭력에 집중하는 페미니스트들은 세계적인 경제 문제가 여성의 삶에서 차지하는 중요성도 언급하지만 이러한 의제는 소극적으로 다루는 경향이 있다. 마찬가지로 경제 발전과 관련된 활동을 하는 여성들은 최근까지 성적 권리 및 재생산의 권리를 경시했으며 인권이라는 틀을 무시했다.
베이징행동강령(1995)은 지난 10년 동안 세계 여성을 조직하는 중심 프로그램이 되었다. 이것은 세계 여성운동의 중대한 성과지만 한계 역시 지닌다. 이것은 세계화 시대의 여성 빈곤에 대한 미시적 대응뿐만 아니라 폭력, 육체적 완전성, 자원에 대한 동등한 접근 등의 사안에서 강력하다. 그러나 여성들이 직면하는 다양한 억압 및 여성 빈곤의 체계적 원인, 특히 신자유주의적 법인기업의 의제를 다루는 데는 취약하다. 유엔 심의에서 G-8이 지닌 힘을 감안하면 이는 별로 놀랍지 않다. 2000년과 2005년의 공식적인 평가를 보면, 여성 활동가들은 베이징행동강령이 좀 더 확장되기를 원하면서도 이를 침해하는 우익의 공격에는 대항하는 등 조심스런 입장에 처해있다.
베이징에서 페미니스트들의 폭력을 둘러싼 사안과 거시 경제적 문제에 관한 차별적인 강조는 클린턴 (주도적인 "페미니스트"인 힐러리와 함께)이 제시한 강력한 제안들로 인해 더욱 심화되었고, 유럽의 여성들은 G-8의 제국주의는 도외시하면서 폭력 반대 투쟁과 미시적 계획을 옹호하는 관료들을 선출했다. 많은 여성 집단, 특히 북반구의 여성 집단들로만 한정되지 않는 이들이 이러한 협소한 의제를 열렬히 환영했다.
센(Gita Sen)과 코레아(Sonia Correa)는 정부와 여성 NGO 내의 이러한 이분법이 여성들 스스로 겪고 있는 의제에 관한 실질적 혼란을 반영한다고 지적한다. 1980~90년대에 많은 여성들이 노동시장에 진입했다. 그 결과 때로는 여성들이 집이나 지역 공동체에서 더 많은 자율성을 획득하기도 했고, 때로는 훨씬 큰 노동 부담과 작업장 통제로 인해 자율성을 잃기도 했다. 센과 코레아는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이런 모순은 더 많은 개인적 자율성을 위한 여성의 투쟁이 더욱 공정하고 평등한 경제 질서를 위한 그들의 관심 및 요구와 간단히 또는 쉽게 맞물리지 않음을 의미한다. 여성의 역설은 한편으로 세계화된 세계경제를 지지하고 촉진하는 이들이 종종 전통적인 가부장적 질서의 붕괴를 지지하는 이들이라는 점이다. 다른 한편으로 세계화에 반대하는 이들 중 일부는 여성을 강력하게 억압하는 가치와 통제 체계의 이름으로 그렇게 한다.4)
1980~90년대 신자유주의 의제가 미친 영향은 남반구와 북반구의 분할을 더욱 심화시키고 남반구의 협상력을 약화시켰다. "이런 분위기에서 여성권을 옹호하는 의제에 반대하는 바티칸 및 남반구 국가로 이루어진 소규모 집단 등 도덕적 보수주의 집단은 남반구의 옹호자로 등장하려고 체계적으로 시도했다."5) 이는 남반구에 대한 신자유주의 지배를 강화하는 가운데 제한적으로 정의된 "여성권"을 옹호하는 북반구의 국가들과 북반구의 경제적 지배에 대항하는 싸움을 이끄는 한편 "여성권"을 침해하는 일부 남반구 국가들 사이의 분열을 첨예하게 만들었다. 이런 싸움에서 여성권은 또 다시 모호해졌다.
센과 코레아는 북반구와 남반구의 페미니스트들이 이 같은 유엔 회의에서 젠더 정의와 경제 정의 사이의 분할을 연결하려 시도했다고 말한다. <경제정의를 위한 국제여성연합>(WICEJ)과 같은 단체들은 그렇게 했지만, 많은 다른 단체들은 남반구와 북반구로 나뉘는 등 다른 길을 갔다.6) 불행히도 "젠더 정의"에만 초점을 두는 많은 여성 NGO들이 이런 의제에 관해 미국 및 유럽연합의 정부들과 동맹을 형성하면서 여성권을 침해하는 더 광범위한 경제적 사안들과 작동 중인 복잡한 역학을 은폐했다.
신자유주의와 가부장제에 대한 통합적 분석과 활동
페미니즘 의제의 이 두 가지 유기적 요소들이 분석과 활동 모두에서 결합되고 있다는 고무적인 조짐이 있다. 미 제국주의가 심화되고 워싱턴 컨센서스가 균열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페미니스트 활동가들은 좀 더 통합된 분석을 발전시키고 있다. 이 분석은 신자유주의적 의제, 종교 근본주의의 부상, 내전과 종교적ㅁ종족적 공동체의 폭력의 심화, 군사주의의 부상과 민주적 공간의 쇠퇴를 가부장적 사회 구조 및 현재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와 연결시킨다.7) 통합된 분석과 행동의 지표는 다음과 같다.
ㅁ 라틴 아메리카 최남단 지역의 페미니스트 조직들의 네트워크인 <마르코수르 페미니스트 연합>이 2002년 WSF에서 출범시킨 <근본주의에 반대하는 운동>의 출현. 전 세계의 증언물들뿐만 아니라 "근본주의에 맞서 너의 입을 열기" 위한 커다란 입술[모양의 선전물], 형형색색의 풍선들, 죽마 광대들, 춤꾼, 고수(鼓手)와 더불어 현재에도 계속되는 이 캠페인은 여성권을 침해한다는 점에서 신자유주의 교리의 "근본주의"와 종교 근본주의를 연결시킨다.8) 2003년에 이 캠페인은 <이슬람법에서 사는 여성들>, <발전과 여성권 협회>(Association for Women's Rights in Development, AWID), <여성 세계 리더쉽 센터>(Center for Women's Global Leadership), DAWN, WICEJ와 같은 그룹들을 포함하여 국제적인 연합으로 확대되었다.
ㅁ 2004년 WSF를 준비했던 여성들은 신자유주의와 근본주의를 비판하면서 성적인 권리 및 재생산의 권리와 경제적 권리를 통합할 전문위원회를 구성하고 이 주제들과 그에 걸맞는 행동을 더 잘 통합시킬 수 있는 페미니즘 전략 회의를 계획하고 있다.
ㅁ 베이징 이후 5년 간 행동강령 이행을 점검하는 과정에서 출현한 WICEJ도 인종적 정의와 이주자 권리 활동가들뿐만 아니라 "여성의 인권" 류의 집단과 "젠더와 발전" 류의 집단을 연계한다. WICEJ는 일자리, 식량, 주거, 물, 기초 서비스에 대한 요구를 여성권의 일부로 인식하면서 경제적 권리를 여성 인권의 의제의 한 부분으로 재천명하고, 체계적인 경제적 폭력을 여성에 대한 폭력의 한 부분으로 이해하는 경향을 강화했다. WSF의 다른 페미니스트 집단 및 <근본주의에 반대하는 운동>과 협력하면서 WICEJ는 점차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분석을 근본주의, 군사주의, 가부장제에 대한 분석과 연결시키고 있다.9)
ㅁ 2001년 <여성발전협회>(Association for Women in Development)는 공식적으로 명칭을 <발전과 여성권 협회>(AWID)로 바꿨다. 처음에는 발전주의 학자들의 협회였던 AWID는 세계의 여성운동들과 그들의 사상이 결집하는 자리로 변형되었고, 페미니즘적인 발전 의제에 권리의 시각을 통합하기 위해 활동했다. 2002년 10월 멕시코 과달라하라에 2,000여 명의 여성들이 모여서 개최한 <세계화를 재발명하는 여성>이라는 AWID의 포럼은 세계의 이런 다양한 흐름의 페미니즘이 한 자리에 모여 토론하고 분석하는 장이 되었다. 두 명의 연사들은 포럼 참석자들을 "다보스 남성(Davos Man)"10)에 대응하여 "과달라하라 여성"이라 불렀다. 이들은 "복합적인 동일성과 실천적 의제"를 지녔으며 "제도적인 책임성을 쟁취하기 위해 투쟁하고 국가의 젠더ㅁ인종ㅁ계급 정의를 요구"하며 세계적 정의 운동에서 "사회적 정의를 주창하는 사람들의 광범위한 부문과 동맹을 구축하는" 데 힘쓴다.11)
ㅁ 유엔 인권위원회와 유엔 경제ㅁ사회ㅁ문화권위원회 내의 여성 그룹 중 일부는 경제적 권리를 증진하고 워싱턴 컨센서스에 도전할 잠재적 세력으로 주목받고 있다. 아일랜드의 전(前) 수상 메리 로빈슨 하에서 유엔 인권위원회는 WTO 정책을 비롯하여 세계화와 구조조정에서 인권 문제를 평가할 실무 집단을 설립했다. 2003년 경제ㅁ사회ㅁ문화권위원회가 물에 대한 권리를 긍정한 것은 IMF와 세계은행이 세계적으로 추진한 수도 체계의 광폭한 사유화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기초 자원의 사유화에 맞선 대중 투쟁이 볼리비아, 가나, 남아프리카공화국 등지에서 성장하고 있으며, 종종 여성들이 이 투쟁을 지도하고 있다. 이런 운동 중 일부는 유엔 체계를 활용하여 사기업뿐만 아니라 WTO와 브레턴우즈 기관들에 도전하는 데 점차 관심을 보이고 있다. 새로운 집단인 <경제ㅁ사회ㅁ문화권을 위한 국제 네트워크>가 2003년 6월에 태국에서 창립 회의를 가졌는데, 활동적인 여성들의 회의가 이 회의의 한 부문으로 개최되었다.12)
ㅁ 여성들은 카이로 국제인구개발회의(1994)와 베이징행동강령(1995)에서 지역별 10년을 점검하고 종교적인 우익의 반격에 맞서기 위해 모든 지역에서 결집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여성들은 재생산과 관련된 건강 문제를 경제적 정의 문제 및 현 시점에 대한 정치적 판단과 연결시키고 있다. 심지어 유엔에서 역할을 축소했던 집단들조차 이런 지역적인 행사들을 세계적인 페미니즘의 핵심적인 전장으로 간주한다.
신자유주의와 여성의 삶, 그리고 다양한 대응
신자유주의가 여성의 삶에 미치는 심대한 영향은 다양한 대응을 야기했다. 어떤 대응은 발전주의적인 접근의 자장 안에서 이루어지기도 하고 또 어떤 것은 재분배를 통한 경제적 정의를 요구하기도 한다. 이런 대응들은 다음을 포함한다.
․ 반(反)빈곤 전략으로 권유되었던 생존전략
․ 정치적 조직화와 결부된 생존전략
․ 자신의 생계를 방어하기 위해 풀뿌리 여성들이 조직한 전략
․ 이런 영향들을 증명하고 국가와 사부문의 책임성을 요구하기 위한 NGO들의 연대, 교육, 지원
․ 페미니즘 경제 이론의 형태로 이뤄진 학술적 대응
세계은행과 IMF가 1980년대부터 남반구의 가난한 국가들에 부과한 구조조정 정책은 이 방면에서 여성들의 국지적ㅁ국제적 조직화가 등장하는 데 중요한 촉매제가 되었다. 구조조정 정책은 민족 경제를 외채 지불 기계로 변화시킴으로써 재식민지화의 초석을 놓았다. 여성들이 축소된 사회 서비스를 자신의 재생산 노동으로 메우고, 서비스 부문에서 일자리를 잃고, 비공식 부문에서 일해 생계를 책임지고, 새로운 값싼 노동력으로 수출자유지역에 유입되자 여성 활동가들은 구조조정 정책의 부담이 여성에게 너무 과중하게 돌아온다는 점을 명확히 인식하게 되었다. 이런 과정은 동유럽과 중부유럽에서 대대적인 사유화가 진행되는 동안 반복되었다.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점차 민족 경제의 숨통을 조여오자, 풀뿌리 여성 활동가들은 마낄라도라나 노동착취공장의 노동자들, 비공식 부문의 노동자들, 그리고 지역 공동체 활동가들을 조직하여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투쟁하고, 나아가 신자유주의적 경제 모델에 맞서기 시작했다. 많은 이들이 경제적 과정에 페미니즘적 비판을 적용하기 시작했다. 일부 노동자들은 노조 구조 외부에서 여성 노동자들을 조직했는데, 이는 마낄라도라의 공장들에서 노조에 가해지는 위협 때문이자 노동조합의 남성중심성 때문이었다.
페미니스트 경제학자들은 젠더와 거시경제 정책을 이론화하기 시작했다. 페미니즘적 경제 분석은 "사회적 재생산"의 책임을 진 일차적 양육자로서 여성이 경제, 유급 노동시장, 그리고 공동체에서 여성이 수행하는 다양한 역할을 탐구한다. 이런 일들의 대부분이 무급이고 공식 경제에서 계산되지 않지만 경제가 기능하는 데는 필수적이다. 여성들은 구조조정 정책이 외채를 갚고 경제를 재구조화하는 데 여성들의 유급ㅁ무급 노동을 활용하는 방식을 증명했다.13)
릴리(Maria Riley)에 따르면, 1980년대에 세계경제가 변화하고 여성의 삶에 대한 압력이 커지면서 일부 페미니스트들은 "소득지원과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 여성들이 빈곤을 벗어나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보상도 없이 더 과중한 일을 해야 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점을 명확히 인식했다."14)이것은 거시 경제 발전의 부정적인 영향으로 인해 여성들이 번 소득이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릴리는 WTO가 베이징여성대회(1995)와 같은 해에 출현하여 점차 경제 통합을 세계 자본의 최우선 순위로 만들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구조조정 프로그램은 WTO 규범 하에서 남반구 경제의 무역 및 투자의 자유화를 위한 초석을 놓았다. 1997년 아시아의 금융위기는 투기 자본의 위험성을 보여주었고, 전 세계에 파괴적인 효과를 미쳤다.
란드리아마로(Zo Randriamaro)가 지적한 것처럼 젠더 평등은 일국적인 수준에서 해결될 수 없다. 그것은 "세계 경제의 통치성(governance) 내에서 정책과 제도의 변화를 요구한다."15) 그녀는 "여성 조직들과 활동가들 사이에서 벌어진 논쟁은 신자유주의 정책이 여성과 젠더 관계에 미치는 영향의 구조적이고 상호적인 원인에 대해 체계적으로 분석하지 못한 채 그 영향에만 집중하면서 애매하게 되었다"고 덧붙인다.16)
여성의 경제 정의를 위한 운동은 이런 비판에 기초하여 구조조정과 외채의 영향에 집중하던 것으로부터 더 광범위한 신자유주의 의제에 대해 도전하는 것으로 발전했고,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현재는 그 의제가 여성들에게 해를 끼치는 정치적ㅁ이데올로기적 세력과 어떻게 결합되는지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경제 정의에 집중하는 운동들은 주류 발전 패러다임과 여성을 신자유주의적 모델에 통합시킬 뿐인"성주류화" 시도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국제젠더ㅁ무역네트워크>(International Gender & Trade Network, IGTN)와 같은 집단들은 세계적인 무역 거래의 중요한 행위자로 부상했다. 마찬가지로 여성들은 외채, 무역, 원조, 세계 금융을 다루는 유엔 개발재원조달회의(2002, 멕시코 몬트레이)와 그 후속사업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벌였다. 여성들은 외채 탕감, 새로운 형태의 세계경제 통치성, 투기자본에 대한 세계적인 환거래 과세와 같은 지속가능한 발전을 목표로 하는 제안들을 지지했다. 또한 여성들은 환거래 과세를 위해 노력하며 "금융시장과 그 기구들을 민주적으로 통치하려는 국제적 운동"인 아탁(시민지원을 위한 금융거래 과세연합)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서유럽의 여러 지역 사회에 건설된 이 풀뿌리 운동은 현재 WSF를 조직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국제 여성인권 조직인 마드레(MADRE)에 따르면, 여성 조직들은 [베이징]행동강령을 이행하는 정부의 역할을 보충해야만 했다. 건강 상담, 학대받는 여성들을 위한 쉼터, 에이즈 교육과 문맹퇴치 프로그램, 소득지원 프로그램, 영양학 수업, 소녀의 지도력 훈련을 아우르는 이런 노력은 끈기, 창조성, 고된 노동의 측면에서 인간적 잠재력의 최상을 보여준다. 이런 노력은 갈채를 받아 마땅하지만, 이는 또한 정부가 자신의 의무를 이행하지 못한 심대한 태만의 결과로 이해되어야 한다. … 이런 태만은 교정되어야만 하는데, NGO가 아무리 유능하다 해도 책임 있는 정부를 대신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17)
"여성의 조직화" 대부분은 대체로 풀뿌리 수준의 생존 전략에 초점을 맞췄다. 특히 비공식 부문에서 소득을 벌기 위한 여성들의 영웅적인 노력은 리절트(RESULTS)18), 아메리칸익스프레스, 몬산토, 정부, 사적 기부자 등에게 여성의 빈곤에 대한 해결책으로 이용되었다. 1990년대 많은 양의 달러가 방글라데시의 그라민은행 모델이 상징하는 소액대출ㅁ소액창업 체계―영부인 힐러리 클린턴은 클린턴 정부의 복지 감축에 직면한 미국 여성들을 위한 사례로 이를 승인했다―를 지원하는 시도에 투여되었다.
현재 이런 시도에 대한 비판은 수없이 많은데, 이 시도들이 미국의 법인기업, 세계은행, 미국 정부에 의해 추진되었기 때문이다.19) 이런 대출 체계는 첫째, 빈곤한 여성 창업주들을 공식 경제와 빚 놀이에 통합시키고, 둘째, 구조조정 정책의 효과를 개선하고 사회적인 저항의 위협을 감소시키기 위해 자원을 가장 국지적인 차원에 투여하고, 셋째, 여성들의 소소한 생존전략을 기업가 정신과 자본주의적 경제발전을 위한 이데올로기적 만병통치약으로 변모시키는 데 봉사했다.
이것은 여성 노동의 초과 착취에 의존하는 동시에 정부의 책임성이나 적정한 임금과 수당을 주는 괜찮은 일자리에 대한 요구에 관심과 의무감이 생기는 것을 막았다. 또한 이것은 이 "가내 노동자들"의 일부가 세계적 법인기업의 상품을 생산하는 지방의 제조업과 하청 계약을 맺는 상황을 심화시켰다.20) 이런 노력의 한계는 많은 사람에게 명백하지만, 자가 고용 프로그램은 여전히 "개발" 기금과 많은 여성 NGO들의 주요 관심사다. 현지 여성의 생존 욕구는 "자력갱생주의"(boot-strapism)와 사회적 통제라는 더 큰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의제 속에 말려들었다. 더욱이 많은 지역에서 경제 위기가 심화되어가자 외부 자원의 유혹이 여성의 "권력화"(empowerment)와 경제적 자율성을 위한 일부 여성 조직의 목표와 맞물렸다(NGO 그 자체를 위한 자원은 말할 것도 없다).
다양한 경험과 정치적 의제를 가졌지만 모두 "여성권"의 큰 범주에 속하는 다종다기한 여성의 조직화 전략―지방 공동체, 여성 NGO, 노조, 정치정당, 대학에서의―은 복합적인 동학을 창출한다. "우호적인 동맹" 분위기 속에서 정치적 차이를 분명히 하려는 욕구는 거의 없다. 이로 인해 정치적ㅁ분석적 명쾌함이 결여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이런 상황은 운동의 "목소리"를 규정하는 측면에서 운동의 자금 제공자들뿐만 아니라 여성 NGO들 사이의 현실적인 권력관계에 의해 강화되었다.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시기에 기부금에 의존하고 있는 일부 여성 NGO들은 그들이 할 수 있는 것 또는 말할 수 있는 것에 제약을 느낄 것이다. 일부는 급진적인 분석을 자기검열하고, 다른 일부는 그런 분석 없이 불공정한 정책의 영향을 개혁․개선하려는 실용적인 목표에 좀 더 치중한다. 정부, 종교 기관, 좌파 내의 남성 동료들과 이미 힘든 싸움을 치루고 있는 여성 집단들 사이의 공통 지반을 찾으려는 노력 속에서 대부분의 정치적 차이는 대개 봉쇄되었다.
이것은 또한 남반구와 북반구의 많은 여성들이 현재 대학, NGO, 정부 기관 및 다층적 기구들에서 젠더와 발전, 여성과 재생산의 권리, 여성과 폭력 같은 분야의 전문가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로 인해 복잡해진다. 어떤 지역에서 여성들은 자신들의 정부가 국가 정책결정과정에 성인지적 관점을 도입하도록 효과적으로 요구했고 베이징행동강령의 이행 과정에서 국가의 여성담당 부서가 설립되기도 했다. 어떤 경우에 여성 전문가들은 정부 직책, NGO 기관, 다층적인 기구들을 오락가락 한다. 이런 상황이 여성의 권력과 효율성을 강화할 수도 있지만, 또한 만약 책임성이 담보되지 않으면 그것은 정치적 변화 의제를 협상할 수도 있다.
성주류화 전략과 그 한계
성주류화 개념은 여성 활동가들의 승리로 시작되었다. 베이징에서 부상한 이 개념은 부수적인 프로젝트에 여성을 끼워 넣는 대신에 모든 분야의 모든 정책과 계획에 젠더 분석이 통합되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사실 이것은 일종의 젠더 산업을 창출했고, 줄곧 그것은 많은 정부, 유엔, IMF, 세계은행의 관료들에게 현재의 신자유주의 정책에 "여성"을 추가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또한 성주류화는 여성 보호 프로그램을 감축하는 데 대한 변명으로 활용된다. 어떤 경우에 성주류화는 여성들이 기본적인 권리 때문이 아니라 성장을 강화하기 위해 경제에서 고려되어야 한다는 도구주의적 주장을 낳기도 했다. 그것은 여성의 참여를 의미했지만 젠더 평등이나 경제 정의를 향한 진보는 제한했다.
세계은행과 같은 기관들이 젠더 형평성, 참여적 발전, 빈민 친화적 정책과 같은 용어를 수용하고 이것들을 선택하려 하자 여성 NGO 활동가들의 성주류화 의제는 오염되었다. 1995년 베이징에서 세계은행 총재 제임스 울펜손을 만나면서 부상한 여성들은 세계은행 외부의 NGO 감시 집단과 내부의 젠더 감시ㅁ감독 기제를 설립하는 데 성공했다. 그 결과 연구가 쏟아져 나오고 새로운 사무국과 관료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으며 현지의 여성에게 새로운 자원(특히 소액대출을 통해)이 제공되었지만, 세계은행이나 채무국의 거시경제 정책에서의 변화는 미미했다.
2003년 WTO 칸쿤 각료회의에서 여성의 전략을 둘러싸고 성주류화 논쟁이 다시 한 번 나타났다. 라틴 아메리카의 한 여성 집단은 WTO내에 [세계은행과] 유사하게 NGO를 통한 감시체제를 갖춘 젠더 감시․감독 기제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다른 여성들은 이 전략에 강력히 반대했다. 이들은 WTO가 자신의 역할과 활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NGO의 비위를 맞추고자 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들은 성주류화가 불법적인 기관과 정책에 적극적으로 젠더를 통합한다는 의미가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성주류화 개념을 개조하려 한다. IGTN의 프란시스코(Gigi Francisco)는 젠더 분석의 변혁적 의미는 어떠해야 하는지를 제안한다.
무역, 발전, 통치성에 적용되는 젠더 관점과 정책은 경제에서 사회적 재생산의 비가시성, 세계 인구의 특정집단의 거대한 빈곤을 야기하는 축적 과정의 재창조와 통합, 민주주의와 인권의 도구화를 상호 연관된 방식으로 촉진하는 패러다임과 모델에 근본적으로 도전할 수밖에 없다. 인간, 공동체, 정부보다 시장이 중요하다고 주장하고 여성의 자율성을 가로막는 구조적"제도적"문화적 장벽을 지속적으로 간과하는 일련의 규범은 젠더 변혁의 전망과 그 정치와는 직접적으로 그리고 근본적으로 갈등한다.21)
란드리아마로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젠더화된' 경제 정책은 여성에 대한 동정심을 제도화하는 것과는 다르다. … 페미니즘적 접근은, 각 국이 충분한 융통성을 가지고 국민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고 인권과 계발적 욕구에 우선권이 주어진다면 건전하고 공정한 경제 정책은 남성과 여성이 생산 자원에 대해 동등한 접근권과 통제권을 갖고 정책결정과정에 동등하게 참여하며 그들의 노동의 혜택을 동등하게 분배받는 것이라고 가정한다."22)
여성운동 지도자들의 풀뿌리 기초 조직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감 부재와 더불어 "젠더 전문가"가 공식구조 내에서 활동하기를 바라는 정부와 기관의 요구가 증가하자, 심지어 가장 선의의 활동가들조차 포섭될 수 있다는 현실적인 우려가 나타난다. 프로젝트나 이벤트 중심의 활동 속에서 정치적 과제를 분명히 인식하지 못하면 여성의 의제가 조작되는 방식을 판단하기가 더욱 어려워진다.
엘리어차(Julia Elyachar)는 세계은행이 이집트에서 빈민 친화적인 NGO 의제를 어떻게 조작했는지 설득력 있게 설명한다. 구조조정 프로그램이 야기한 사회적 불안을 처리하는 것이 긴급해지자, 세계은행은 "민중의 권력화"와 젠더 평등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정치 참여의 봉쇄는 세계적 안보의 문제로 간주된다"고 말한다.23) 그녀에 따르면, 비공식 부문을 겨냥한 발전 프로그램은 "국가의 주권이 미치지 않는 사회적 공간을 확장한다. 따라서 그런 발전 접근은" 경제활동에 대한 통제력이 줄어든 작은 국가를 지지함으로써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매우 부합한다." 이는 [국가에 반대하여] 공동체를 옹호하는 의제를 가진 많은 반(反)세계화 활동가들이 의도하지 않게 신자유주의 의제에 복무하고 있음을 의미했다. 이집트의 경우에 NGO들은 종종 "구조조정 정책이 거시경제 수준에서 하는 것과 꼭 같이 재정 규율을 강화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지방 프로그램의 주요 초점은 "여성의 권력화"였고, 이는 기부금 수령자가 될 수 있는 자매와 주부들 사이의 쟁탈전을 낳았다. 이 과정은 공동체의 사회적 네트워크와 민중의 생존 전략을 기초하여 확립되었고, 이를 포섭했다. 거칠게 말하자면, "구조조정 프로그램은 불량 국가들을 규율한다. NGO를 매개로 기금이 유입된 사회적 네트워크는 빈자들이 스스로를 규율하도록 하는 기제로 기능할 수 있다."
유럽정부의 기부 기관을 위해 활동하는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의 한 여성과의 대화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녀는 여성을 위한 "경제 교육"과 풀뿌리 수준의 여성 참여에 기금을 투입하는 것에 관심이 있었다. 그녀는 이제 지방 NGO의 노력까지 병합한 세계은행의 현재의 경제개혁(빈곤감축 전략보고서로 알려진)에 "젠더를 주류화"하고 싶어했다. 그녀는 지방 정부에 대한 여성의 협상력이 강화되길 원했고 거시경제 문제에 대한 여성의 지식이 그들의 협상능력에 결정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발전 원조의 역할이 현금보다는 지식과 기술의 이전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성 인지적 예산"이 지방 수준에서 여성을 참여시키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여성의 참여에 이렇게 관심을 갖게 된 이유를 묻자 기부자들의 목표는 "지방 수준에서 여성들이 행위자가 되게 하고 기초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여성이 정치 체제를 탈안정화시키지 않도록 긴장을 감축시키는 것"이라고 그녀가 거리낌 없이 대답했다. 그녀는 만약 사람들이 참여하고 있다고 느끼지 않으면 그들이 폭탄을 투척하는 근본주의자가 될 수도 있다는 우려를 표명했다. 그녀는 남반구에서 다원주의와 민주주의를 증진시키기를 원했지만, 이 풀뿌리 여성들의 경제적 현실에서 실제로 변한 것은 거의 없다는 점은 인정했다.
다양한 동일성들
세계의 여성운동이 직면한 지속적인 중대한 도전은 여성이 체험하는 특별한 현실을 규정하고 이론적ㅁ실천적으로 그들의 정치를 구성하는 인종, 종족성, 신분, 계급, 성적 지향, 국적, 나이, 그리고 여타의 동일성들을 효과적으로 통합해야 할 필요성이다. 이 문제는 2001년 9월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에서 열린 유엔 세계인종차별철폐회의를 준비하면서 세계적인 페미니즘 담론에서 중요한 일부가 되었다. 이 회의는 주목할 만한 행사였는데, 인종적ㅁ종족적으로 주변화 된 세계의 활동가들이 인종화 된 억압의 일소를 요구하는 강력한 포럼에 모였다.
여성 회의에는 인도의 불가촉천민(Dalit)과 유럽의 집시(Roma)부터 원주민 여성과 아프로라틴계 여성들까지 페미니즘 또는 NGO 집단에 거의 연계가 없었던 여성들이 참여했다. 더반에서 여성 활동가들은 여성 회의나 지역 회의뿐만 아니라 식민주의와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인종적ㅁ젠더적 분석을 발전시킨 "인종, 빈곤, 세계화 회의"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외채 탕감, 환거래 과세, 그리고 그 밖의 직접적인 장치를 통해 식민주의와 신자유주의의 유산에 대한 보상으로 세계의 부를 북반구에서 남반구로 이전할 것을 요구했다. 이것은 인종, 계급, 지리학을 역사적으로 재검토함으로써 통해 젠더 정의와 경제 정의를 연결시키려는 시도를 대표했다. 이 회의는 개발재원조달을 위한 유엔 회의에서도 유지되었고, 여기서 여성들은 젠더, 인종, 계급, 인권의 틀을 그런 토의에 적용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성과는 없었)다.24)
이 기간에 행해진 지적ㅁ정치적 작업의 일부는 다양한 억압의 상호 접합을 고려하면서 페미니즘의 기획을 재 개념화하려는 장기적인 요구에 기초했다.25) 과제는 여성의 다양한 억압, 각기 다른 경험, 정치적 의미를 고려하는 통합적인 페미니즘적 분석을 발전시키는 방법이란 측면에서 분석적이지만 동시에 실천적이기도 하다. 즉, 세계의 여성운동들은 어떻게 주변화된 여성들에게 지도력을 부여하고 그들의 의제를 통합하고, 따라서 이 운동 내부의 여성들 사이의 권력관계를 균등화 할 수 있을까?
더반에서의 이런 토론은 (유엔 회의 바로 며칠 뒤에 일어난) 9ㅁ11로 인해 간단히 묻혀버렸지만, 여성운동들은 이를 긴급하게 다뤄야 한다. 여성운동 내부의 인종주의, 계급주의, 북/남 권력의 불균형과 더불어 여성이 상이하게 겪는 경험을 진지하게 고려하는 것은 중요하다. 중요한 차이와 권력 관계에 대한 집중하면서도 동일성의 정치가 여성의 평등, 권리, 인종적 정의, 경제 정의의 의제를 통합할 가능성을 압도하지 않도록 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이것은 북/남 논쟁 내의 세계적 수준에서 그리고 미국에서부터 남아시아에 이르는 일국적 수준에서 똑같이 중요하다.
유엔 회의의 시대가 끝나다
20년에 걸친 유엔 회의에서의 여성 조직화는 유엔을 무대로 한 노련한 국제적 지지자와 활동가를 배출했다. 하지만 현재 정부 간 협상을 통해 성과를 얻을 가능성뿐만 아니라 유엔 회의의 시대도 막을 내린 것처럼 보인다. 탈냉전 시대의 권리에 기초한 공통의 의무 체계에 기반을 둔 다자주의적 발전 의제의 개시은 부시 행정부의 일방주의 정책으로 침식되었고, 이는 세계적인 반대를 무시한 미국의 이라크 침공과 제국주의 열강들 사이의 경쟁 격화에서 가장 명백히 드러난다. 2004년 이래 가장 최근의 유엔 회의26)는 IMF, 세계은행, WTO 사이의 상호 강화하는 의제들의 통합과 유엔에 대한 이 기구들의 권한 증대, 강력한 세계적 법인기업의 의제를 보여준다.
유엔의 여성 문제에 관해 보자면, 북반구와 남반구 사이의 점증하는 긴장은 협상에서 양보하는 것에 대한 남반구 국가들의 저항을 심화시켰고 도덕적인 보수주의 세력의 영향력을 강화시켰다. 2003년 3월, 이라크에 관한 안전보장위원회 회의와 나란히 열렸던 세계여성지위위원회(CSW)에서 참가자들은 여성에 대한 폭력을 다룬 성명서에 대해 합의하지 못했다. 종교적 우익을 대변하는 일군의 국가들은 과거에 합의했던 문서를 거부함으로써 여성들이 수년 동안 획득한 성과물을 철퇴하려고 시도했다. 그들의 여성권 문제에 관한 비타협적 반항심은 정치군사적 전선과 경제적 전선에서 일방주의를 보이는 미국에 대한 분노로 인해 더 커졌다. 거대한 무역 적자, 재정 적자, 불안정한 이라크 점령, EU와 중국의 점증하는 경제력으로 인해 미 제국은 상상하는 것보다 약할지도 모르지만 미 제국은 현재 여전히 우위를 점하고 있다.
이 같은 세계여성지위위원회가 처한 궁지는 유엔 활동가들이 이미 직면하고 있던 현실을 통감하게 했다. 결국 국가적ㅁ국제적 발전 의무를 언어화하는 데 성공했지만 각 국 정부의 실제적인 책임성이 담보되지는 않았던 것이다. 발전 정책을 형성할 수 있는 유엔의 능력은 G-8 선진국들의 자본가의 이익을 대변하는 IMF, 세계은행, WTO(제재 조치를 통해 조약 이행을 단속할 권한을 보유한 최초의 다자주의 기구)의 권력 때문에 무색해진 반면, 젠더 정의는 보수주의 우파에 의해 침식당했다. 따라서 여성 집단은 점차 자신의 실천에서 가장 전략적인 장소―유엔으로부터 무역 부문, WSF, 지역적ㅁ일국적 작업으로―를 고민하고 있다. 이것이 제5회 세계여성대회의 개최 여부를 둘러싼 열띤 토론에 반영된, 현재 세계 페미니스트들 사이의 핵심 논쟁들 중 하나다.
이런 유엔의 변화 속에서 발달한 세계의 여성운동들은 회의와 메일링 리스트를 통해 유엔에 계속 집중하는 것의 이점과 다른 세계여성대회에 관해 숙고하고 있다.
․ 세계적인 여성 의제의 탄력을 유지하고 젊은 여성들을 그 과정에 참여시키고자 하며 여전히 유엔을 우선적인 활동 공간으로 간주하는 이들. 이들은 여성들이 국제적 의제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서 거둔 성공과 이로 인해 생긴 자국 정부에 상응하는 권력에 주목한다. 많은 이들은 유엔이 일국적ㅁ국제적 수준에서 압력을 행사하면서 평등 요구에 좀 더 민감하도록 강화되고 변화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 반대하는 이들은 "회의의 피로감, 실행 자원의 부족, 페미니즘적 사안들의 기반을 상실할지도 모른다는 위험을 불러일으키는 지정학적 분위기와 반격"을 지목한다.27) 어떤 이들은 집중점이 WTO와 지역 무역 협정으로 이동했으며 여성들이 유엔의 절차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말레이시아의 그리펀(Vanessa Griffen)은 세계적인 협상이 현지의 여성의 생활을 개선시키지 못했고, 따라서 유엔에 대한 강조는 여성들의 에너지를 잘못된 곳에 쏟게 하고 정치적 영향력도 약화시킨다고 주장한다. 그녀는 정부의 협약 이행을 감시하고 과거의 의무 증서를 보존하며 보수적인 반격을 저지하는 데 일부 여성이 필요하지만 이것이 세계 여성운동들의 중심점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28)
일부 여성 조직들은 1990년대의 유엔 회의들에서 각국 정부들이 다짐한 엄청난 약속들이 8개의 밀레니엄개발목표(MDGs)―유엔과 세계은행의 모든 발전 작업에서 최우선의 조직화 틀이 된―로 축소된 것에 점차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 목표들은 젠더 관심사를 8가지 목표 중 단 한 가지로 축소시키고 이 목표들의 실현을 직접적으로 제약하는 신자유주의적 틀에는 도전하지 않은 채, 2015년까지 빈곤 경감, 기초적인 의료와 초등교육 보장, 그리고 다른 고귀한 목표들을 달성하기 위해 기술관료적인 장치를 모색한다. 카이로(1994년, 유엔 국제인구개발회의)와 베이징에서 채택된 재생산 권리에 대한 약속은 누락되었다. 차르키비츠(Ewa Charkiewicz)는 MDGs가 권리를 가진 시민에서 사유화된 상품의 소비자로의 초점의 이동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안트로부스(Peggy Antrobus)는 MDGs를 "정신을 산란하게 만드는 속임수(Major Distraction Gimmicks, MDGs)"라고 부르고 이것이 훨씬 원대한 베이징행동강령에 쏠려있던 여성의 초점을 분산시킨다고 말한다.29)
유엔 여성지위위원회에 참석한 국제 여성 NGO 지도자들 중 일부가 2003년 3월 뉴욕에서 모였는데, 이 모임이 세계적인 합의를 대표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모임은 첫째, 제5회 세계여성대회는 2005년은 아니지만 2010년 전에 개최할 것, 둘째, [베이징행동강령] 원문에 대한 협상은 하지 않고 2005년에 유엔 정기회의와 각국 차원에서 행동강령 이행에 관한 10년 평가를 진행할 것, 셋째, AWID포럼과 WSF과 등에서의 여성들의 자율적인 행사 가능성 또는 유엔과 별도의 대안적인 세계여성회의의 개최 가능성을 열어둘 것을 제안했다.30)
유엔 옹호와 유엔 회의에 대한 집중에서 지방적/일국적 조직화, 또는 WTO와 지역 무역 협정에 대한 조직화, 또는 WSF 조직화로의 변화가 세계 여성운동들의 스타일, 문화, 지도력 또는 계급적 토대의 변화를 의미한다는 것은 분명하지 않았다. 이것은 여성들의 네트워크 ―나 자신이 속한 연합을 포함한― 내부의 일 처리 방식, 경력, 기금 모집, 권력 기반에 도전하는 것이다. 가장 전략적인 방식에 대한 평가로부터 이런 요소들을 분리하는 것은 하나의 중요한 도전이 될 것이다.
대체로 여성들이 제5회 세계여성대회를 승인할 것인가의 문제는 현 시점에서 유엔 옹호의 역할 및 지정학적 동학의 상태에 대한 평가와 카이로+10과 베이징+10에 대한 지역별 평가의 결과에 달려있다.
궁극적으로 이것은 양자택일의 문제라기보다는 각기 다른 수준과 다른 영역의 작업을 가장 전략적으로 결합시키는 방법의 문제다. 옹호 대상으로서 유엔을 멀리하는 것이 현명하지 않을 수 있지만, 그 이득은 현재 상당히 제한되어 있다. 유엔에 대한 목표는 인권조약 기구와 같이 페미니스트들이 그들의 의제를 진전시킬 수 있는 특정한 유엔의 영역을 모색하면서 유엔과의 끈을 유지하고 좀 더 믿을만한 기구가 되도록 압박하는 것이다. 세계정의운동과 WSF 프로세스는 세계적 수준에서 여성과 대중적인 사회운동들을 연결시키는 공간을 제공한다. 이것과 지방적/일국적 운동 조직은 모든 수준에서 국가와 사적 이해당사자들의 실제적인 책임성을 요구할 수 있는 권력의 기반을 마련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고무적인 징표들
때로는 여성의 권리에 대한 역행―특히 세계 곳곳의 가난한 여성들의 삶에서―만이 존재하는 듯이 보인다. 생계 기반의 상실, 늘어난 경제적ㅁ물리적 착취, 경제적 생존을 위한 여성 이주의 증가, 여성의 자율성에 대한 통제 증가는 서로 연결되어있는 많은 세력들로부터 유래한다. 법인기업 세계화, 군사주의, 근본주의가 강화되면서 개념적으로는 정부의 약속을 통해 얻어진 중요한 성과들이 대부분 여성의 생생한 경험에서는 실현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성과를 과소평가할 수 없다. 정부 측의 담론과 행동에서의 변화는, 비록 그것이 포섭되었을지언정, 지난 30년 동안 여성들이 조직화한 힘에 대한 반응을 보여준다. 거대한 후퇴에도 불구하고 수천의 여성들은 국지적이고 세계적인 페미니즘의 결과로 다양한 수준에서 여성들의 권리와 그 권리를 요구할 수 있는 공간을 체감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고무적인 징표도 있다.
․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을 연결하는 페미니즘적 경제 분석의 심화ㅁ발전
․ 거시 경제의 문제를 다루고 재분배에 입각한 경제 정의―단순한 경제 "발전"이 아닌―를 위해 조직하는 새로운 세대의 여성들
․ 이론적이고 정치적인 수준에서 젠더 정의와 경제 정의의 통합 증대
․ 세계 여성운동들의 정치 전략, 장소, 영향, 인종/종족적ㅁ계급적ㅁ지정학적 문제를 포함하는 내적 역학관계를 평가하려는 ―여전히 한계적이긴 하지만― 초보적인 노력
․ 종교적 또는 국가적 가부장, 초민족적 법인기업, 미 제국을 비롯하여 가족 내에 위치한 권력에 도전할 수 있는 더 광범한 대중적 사회운동을 건설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국지적인 행사뿐만 아니라 WTO에 반대하는 시위와 WSF 같은 곳에 참여하여 운동의 동료들에게 인식되고자 하는 페미니스트들의 노력
1)"Globalization and Fundamentalism: A Genderscape" (n.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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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여기서는 폭력, 재생산의 권리, 성적 권리, 신체적 완전성, 법적인 권리 등 가부장제와 직접 관련된 문제들이 다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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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인권이 페미니즘적 조직화에 유용한지를 둘러싼 논의가 존재한다. 이것은 "보편주의" 개념과 "문화적 상대주의" 개념을 대비시키며, "권리" 체제를 서구 중심의, 개인주의적 패러다임으로 비판한다. 우리는 양분된 견해의 어느 한쪽을 수용하기보다는 지방 및 국제적인 권리 담론에 대한 '요구와 비판'이라는 이만(Ayeshan Imam, 이슬람법에서 사는 여성들(Women Living Under Muslim Law))의 접근법을 따르고자 한다. 이러한 접근을 통해 지방적 권리라는 틀을 실행 가능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고, 그 범위를 확대할 수 있다. 국제적 권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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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Gita Sen & Sonia Correa, "Gender Justice and Economic Justice: Reflections on the Five Year Reviews of the UN Conferences of the 1990s," DAWN, 2000, www.dawn.org.f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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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같은 글. (미국의 부시 정부는 여성권과 관련된 도덕적 이슈에 관해 이러한 보수주의 집단에 동참하고 있다. 그러나 물론 G-8의 헤게모니에 도전하는 일에는 동참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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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North Shares Responsibility for Slow Progress in Beijing+5", WICEJ, 8 June 2000 WomenAction, New York, www.womenaction.org/ungrass/wicj.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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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Bina Srinivasan, 이번 호; Mona Danner & Gay Young, "Free Markets and State Control: A Feminist Challenge to Davos Man and Big Brother," Gender & Development (n. 6); Peggy Antrobus, DAWN, September 2001, www.dawn.org.fj.publications/index; Sunila Abeyesekera, "A Women's Human Rights Perspective on War and Conflict," WHRnet, February 2003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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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http://www.mujeresdelsur.org.uy/campania/foro1a.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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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WICEJ의 포르투알레그레 선언문 2003을 보라. http://www.WICEJ.addr.com/wsf03/wicej.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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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이코노미스트』에 소개된 바에 따르면, 다보스 남성은 세계경제포럼을 위해 스위스 다보스에서 해마다 회의를 갖는 국제적인 기업과 정치 집행자들을 뜻한다. Danner & Young (n. 28)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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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같은 책, pp.87~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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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http://www.escr-net.org/EngCeneral/confreport1.a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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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Pam Sparr, ed., Mortgaging Women's Lives: Feminist Critiques of Structural Adjustment,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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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Maria Riley, "From Women in Development to Gender and Trade," Center Focus #152,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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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Zo Randriamaro, "African women challenging neo-liberal orthodoxy: the conception and mission of the GERA programme," Gender & Development (n. 6), pp. 45,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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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란드리아마로가 2000년 11월 유엔 개발재원조달에 관한 NGO 청문회에서 했던 연설 중, www.un.org/ff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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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Monica Aleman & Yifat Susskind, "Beyond Beijing: Some Priorities for the Global Women's Movement," June 2000, www.madr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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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역주] 빈곤 감축을 위해 로비를 벌이거나 펀드를 모금하여 빈민들에게 빌려주는 국제 N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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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Micro-enterprise: A Solution to Women's Poverty?" Alt-WID/NY 1997; Gina Neff, "Micro credit, Micro Results," Left Business Observer #74, October 1996, "Microsumitting," Left Business Observer #77, May 1997; Uma Narayan, 제목 없는 작업보고서, CUNY/NCRW 세미나, Facing Global Capital, A Gendered Critique, New York, 2003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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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Radhika Balakrishnan, ed., The Hidden Assembly Line: Gender Dynamics of Subcontracted Work in a Global Economy, Kumarian Press, Connecticut 2002; Ruth Pearson, "Feminist Responses to Economic Globalization: Some Examples of Past and Future Practice," Gender & Development (n. 6)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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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Gigi Francisco, "Gender Mainstreaming in Trade Policies," DAWN informs, 200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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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Randriamaro (n.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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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Empowerment Money: The World Bank, Non-Governmental Organization and the Value of Culture in Egypt," Public Culture 14: 3,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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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Race, Poverty & Globalization Caucus Documents", WICEJ, 2002를 보라. www.wicej.addr.com/racepov.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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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예를 들어, <유색여성자원센터>의 작업을 참고하라. www.coloredgirls.org.